5월 18일 일요일이었다. 교회에 가려고 동구청 옆 골목을 거쳐 금남로로 나왔는데 학생 30여 명이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쳤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서 학생들을 구타하고 붙잡아가 순식간에 진압되어 버렸다.
그것을 보고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데도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예배가 끝나자 전일빌딩에 있는 학정서예원에 가서
오후까지 글씨를 썼다. 그때가 마침 도전 출품작품 마감일이 임박해서 하루 종일 글씨를 쓰던 중이었다.
오후가 되자 서예원에 나온 사람들이 광주에 공수부대가 와서 학생과 시민을 곤봉으로 때린다는 말들을 했지만
'설마 그럴까'라고 생각하고 계속 글씨만 썼다.
한참 후 몇 시인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서예원 문을 닫아야 한다고 해서 모두 하던 일을 중단하고 나왔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별다른 일 없이 집으로 갔다.
서예원은 18일 오후부터 시내가 완전히 잠잠해진 이후까지 문을 닫았었다.
19일은 중앙국민학교 앞과 가톨릭센터 앞을 오가면서 공수를 향해 돌을 던졌으나 그들은 날아오는 돌을 피하지도 않고
시위대를 향해 돌진해 와서 몽둥이로 때리고 붙잡아갔다.
내가 화랑을 하던 곳이 광주경찰서 앞길에서 중앙국민학교 담 쪽으로 난 길로 가다 보면 중간지점 정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 주위에서 신나게 돌을 던지다 공수들이 뛰어오면 도망쳐서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상당히 안전한 데모를 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위험부담이 거의 없었다.
그때 돌을 많이 던져서 그런지 지금도 오른팔을 활발이 쓰지 못한다.
시위대는 국민은행 앞 사거리에서 공수부대를 향해 투석을 했지만
아직도 많은 시민들은 구경만 하고 있지 공수부대원들이 무서워서 시위대에 적극 합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한 학생이 쇠막대기를 들고 앞으로 나와서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가 이대로 주저앉으면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저놈들과 맞서서 용감하게 싸웁시다!"라고 선동하자
시위군중들이 맞장구를 치면서 우리가 돈을 내서 마이크를 사자고 하면서 돈을 걷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마이크를 살 만큼의 돈이 모이자 어디서 구했는지 마이크를 사왔다.
그 학생은 계속해서 "시민 여러분, 저들을 용서하지 맙시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주위에 구경하고 있던 시민들이 시위대에 합류했다. 공수에게 한바탕 투석을 하고 밀리고 있을 때
소문대로 금남로 5가 쪽에서 택시들이 몰려왔다.
그와 동시에 시위대들은 함성을 지르고 격렬해지면서 택시와 함께 관광호텔 앞까지 밀고 갔다. 군인들이 최루탄을 쏘면서 다시 무자비하게 때리면서 진압하기 시작하자 집으로 돌아갔다.
21일은 초파일이었다. 시위대들은 아침부터 어디에서 구했는지 공사장에서 쓰는 리어카에 시체 두 구를 싣고 그 위에 태극기를 덮어 가지고 다니면서 시위를 했다.
그때 당시 도청 앞에는 공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차는 동구청 앞에까지 밖에 다닐 수 없었다.
그런데 덤프트럭 한 대가 뒤쪽에서 짐을 싣는 칸을 위로 쳐들고 도청을 향해서 질주하니까 공수들이 총을 쐈다.
그러자 차는 도청 앞 분수대를 들이박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날 내 동생은 예비군용 장갑차가 도청 앞으로 쳐들어가자 공수들이 총을 쐈는데도 끄덕 않고 학동 쪽으로 갔었는데
그 차에 경찰 몇 명이 깔려 죽은 것을 봤다고 했다.
오후쯤 되자 공수들의 무차별 난사가 시작됐다.
전일빌딩 옥상에 진을 친 공수들은 광주경찰서 방향에 있는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고 관광호텔 옥상에 배치된 공수들은 금남로 5가 쪽을 향해서 무작위로 쏘아댔다.
이때 광주경찰서 건너편에 있는 진주다방 주방장이 2층 옥상에 올라가서 구경을 하다 총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했다.
광주은행 옆에 있는 수미호텔 앞쪽에서는 중고생으로 보이는 학생 30여 명이 죽거나 치명상을 당했다.
관광호텔 옥상에서 공수들이 쏜 총에 시민, 학생이 맞고 쓰러지면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시체와 부상자를 옮기려고 길가로 뛰어나갔다. 그러면 또 총을 쏴버렸다.
나는 가톨릭센터 뒤쪽 사거리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사망자가 발생할 때마다 땅바닥에다 '바를정'자로 표시했다.
약 30여 분 사이에 12명이 사망했다.
12명까지를 표시한 후 산수동에 있는 여자친구 집으로 갔다. 당시 자취를 했기 때문에 거의 여자친구 집에서 밥을 가져다 먹었다
. 혹시나 그날도 시내의 위험한 상황을 모르고서 밥을 가지고 올까봐 시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알려주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시위대들이 화순에서 무기를 탈취해 왔다는 소식은 산수동에서 처형을 통해 들었다.
후에 들은 얘기로 그날 나와 함께 가톨릭센터 뒤쪽에서 총에 맞아 죽은 사람수를 땅바닥에 표시하던 동네 선배는 37명까지 표시하다 지워버렸다고 한다.
그 선배도 우리 동네에서 화랑을 했는데 지금은 장성댐에서 보트장을 한다고 들었다.
바로 그날, 충장로에서 '맨하탄'이라는 남성복집을 차려 장사하던 사람이 삼양백화점 옆에 있는 무등맨션에서 시내의 상황을 내려다보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내가 봤을 때만 해도 시민들은 전혀 총기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왜 무장하지도 않은 시민을 향해 총을 쏘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
22일에는 계엄군이 철수하고 시내에 없었다. 당시 나는 '적십자청년봉사단'이었기 때문에
오전 10시쯤에 적십자병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오후까지 헌혈자들을 안내하고 시체를 닦고 옷을 입혀서 입관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관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적은 관에다 시신을 겨우 넣어두면 나중에 관 밖으로 손과 발이 삐죽삐죽 나왔다.
내가 입관을 했던 시신이 열네 구였다.
병원에 있을 때 가끔씩 시위대 차량이 그곳으로 왔다. 대개 부상자를 싣고 오거나 의약품을 얻으러 왔다. 한번은 차를 타고 온 시민군들이 교도소 부근에서 계엄군들에 의해 시민들이 무참히 살해됐다면서 그들을 구하러 가자고 소리쳤다. 우리는 "그곳으로 가면 모두 죽는다" 면서 말렸으나 시민들이 죽는 광경을 목격하고 온 그들은 뜻을 같이했던 시민군들을 태우고 교도소를 향해서 갔다.
그때 떠난 후로는 그 차와 차에 탔던 사람들이 다시는 그곳으로 오지 않았다. 아마 교도소 쪽으로 가다가 계엄군들에 의해 차량과 함께 박살났을 것이다.
적십자병원에서 헌혈 안내를 할 때 굉장히 많은 시민들이 헌혈을 하려고 와서 줄을 섰다. 황금동 여인들도 한꺼번에 와서 줄을 서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말을 해줘서 그들이 창녀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에게 내가 "병원에 피가 남아도니까 그냥 가세요"라고 말하자 "제발 내 피도 좀 뽑아주세요. 나도 한몫 하고 싶어요" 하고 사정을 했다.
5·18 당시 그렇게 많은 시민이 총에 맞아 수혈을 받았어도 하도 많은 광주시민이 헌혈을 하려고 병원마다 겹겹으로 줄을 서 사실상 병원마다 피가 남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그 당시처럼 광주시민들이 하나가 되어 내 일처럼 환자들을 보살피고
시민군을 위해 밥과 음료수를 주면서 단결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내 스스로 자랑스럽다.
5월 22일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증심사에 계시는 현덕스님이 내가 하는 화랑에 표구를 맡긴 병풍을 찾으러 오시다가 시위대와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있었던 궐기대회 때에 앞에 나가 여러 번 연설을 했다. 그 후 6월 3일인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셨다.
. 지금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의문 중의 하나는 '왜! 도대체 왜! 백성을 향해 총을 쏘아야만 했는가'라는 것과 '내가 확인한 사망자와, 입관시키고 또 땅바닥에 기록했던 사망자의 숫자만해도 굉장히 많은데 발표된 사망자 숫자는 그에 비해 적다'는 것이다. 교도소 부근에서 사망한 시민군의 경우, 시민이 접근하기만 하면 계속 총을 쏴서 죽였다는데 그들의 시신은 어디로 갔는지…….
5·18 당시에는 광주경찰서 부근에서 화랑을 했으나 그만두고 지금은 서예원을 하고 있다.
화장실까지 쫓아와 구타
증 언 자 : 김광영(남)
생년월일 : 1951.(당시 나이 29세)
직 업 : 동구청 미화요원(현재 만화가게)
조사일시 : 1988. 11
5월 18일이었다. 오후 3시경, 학강국민학교 앞에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었다. 최루탄 냄새도 났다.
"다 죽인다. 다 죽인다.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 다 죽인다",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냈다",
"여고생의 유방을 도려냈다" 등의 살벌한 이야기가 퍼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울분이 일었다.
나는 다음날의 작업상황이 궁금해서 5시가 못 된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가톨릭센터 앞으로 돌아서 동구청으로 갔다.
가톨릭센터 맞은편에 사람 통행을 막기 위해서 공수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산업은행과 제일은행 사이에서 시위군중과 거리를 두고 서 있었는데 그들 바로 앞에는 시민 200여 명이 대치중이었다.
갑자기 공수부대가 충장로 쪽으로 쫓아왔다. 시민들은 우르르 도망갔다.
나도 죽어라 달음을 쳐서 셔터가 조금 열려 있는 동해물약국 옆 건물로 뛰어들어 막 셔터를 내리는 순간
네거리에 나타난 공수부대가 그것을 봐버렸다. 건물 맨 위층 화장실에 몸을 숨겼으나 곧 쫓아 들어온 M16을 착검한 공수부대원
한 명이 목에 칼을 대며 "손 들어" 했다.
그 뒤 그는 나에게 달려들어 무차별 구타를 가했다. 정신없이 맞으면서도 나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난 동구청 미화요원이오. 학생이 아니오. 이 제복을 보면 알 것이 아니오?"
청소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곧 허리띠를 풀고,
상의와 신발은 벗은 채로 동해물약국 사거리로 끌려나왔다. 갑자기 거기서 공수부대 한 놈이 군화발로 내 턱을 강타했다.
입술이 터졌다. 그런 상태에서 원산폭격을 시켰다. 그 찰나에 충장로파출소 쪽에 있던 시위군중이 공수부대에 돌을 던졌다.
공수부대가 그쪽으로 갔다. 순간 나는 우체국 쪽을 향해 죽어라고 뛰었다. 공수부대가 나를 잡으러 뒤쫓아왔으나
그들을 향해 계속 돌을 던지는 시위군중으로 인해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온몸이 시퍼렇게 멍든 상태로 근처 복음외과로 갔다. 그곳에서 터진 입술을 꿰매는 등 응급치료를 받은 뒤
치료비는 다음날 계산하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하라고 했다.
또 "헌옷이 있으면 좀 주십시오. 내일 빨아다 드리겠습니다"라고 웃옷을 벗은 상태인
내가 부탁하자 의사는 매우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치료해 주었으면 그만이지 옷까지 주란 말이오?"하고 툭 쏘았다. 참으로 무안하고도 서글펐다.
맨발에다 상의를 벗은 상태로 황금동 콜박스 사거리로 걸어가고 있자니까
시민들이 다가와 입고 있던 와이셔츠와 슬리퍼를 벗어주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약국에서 박카스도 사주었다.
고마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아무 죄 없이 맞은 것에 대한 억울함이 일었고
공수부대의 잔인함을 생각할 때 울분도 생겼다.
그 다음날인 19일, 의료보험카드로 병원에서 타박상 치료를 받고 일도 못 하고 출근부에 도장만 찍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같은 미화요원 중에서도 몇 명이 공수부대원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동구청에서는 별다른 신경은 써주지 않았다.
21일 아침 9시경, 병원에 가기 위해서 숭의실고 앞까지 걸어간 뒤 도청 쪽으로 가려고 지나가는 트럭에 올라탔으나
그 트럭은 전남대학교 앞까지 가버렸다. 나는 전남대 정문 앞에서 내려 정문다리 옆에서 시위대의 시위를 구경했다.
'전두환이 물러가라!', '계엄령을 철폐하라!'
2시경 전남대로부터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그와 동시에 시위군중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다.
어느 틈에 나도 철로 굴다리를 넘어 사거리까지 도망갔다. 놀란 심장이 온통 방망이질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도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지나가던 미니버스를 세웠다. 시내 쪽으로 간다고 하기에 올라탔다.
"도청에서 집결하니까 공원보다는 도청으로 갑시다"
차 안에서 시민들은 말했다.
MBC방송국 앞에서 내린 내가 장동 로터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노동청 쪽에서 총소리가 나더니
옆에 가던 사람 두 명이 쓰러졌다. 한 명은 즉사한 것 같았고 다른 한 명은 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나는 겁이 나서 얼른 그 자리를 피했다.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조선대를 지나 신당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내가 서석국민학교 뒷골목에 있는 광주여고 근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손들어" 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공수부대원이었다. '호랑이 굴로 들어왔구나!'하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공수부대는 "다른데로 돌아가"라고만 했다.
내가 전남대병원에 이르렀을 때 병원 옥상에서 시민군들이 옥상에서 낮게 떠 있는 헬기에 총을 쏘는 것을 보았다.
총을 쏘자 헬기는 고공비행으로 도망갔다. 숭의실고 다리에서 트럭 위의 사람들이 시민들에게 무기를 분배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총을 받는 시민들 틈에 끼여 들었다.
나는 처음에 M1 소총을 받았다. 그러나 몸이 아프니까 가벼운 카빈을 달라고 해서 막 총을 받아든 순간이었다.
걱정이 되어 나를 찾아나선 아내에게 들키고 말았다. 아내의 만류에 할 수없이 다시 총을 반납한 채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계엄군이 물러가고 난 22일, 복음외과에 가니까 의사가 이런 말을 했다. "선생께 옷을 드리려고 했는데 그냥 가버리시대요." '참, 세상이 변하니 의사까지 변했네. 나한테 선생이란 호칭까지 써가며 말이야'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의사는 치료비를 꼬박꼬박 받았다.
26일 이후로는 집에만 있었다. 시민들이 무장을 한 이후부터는 오발사고의 위험도 있었을 뿐더러
아내가 큰애를 낳은 지 몇 달 안 되었기 때문에 그랬다.
그러다가 27일 새벽에 직장일이 궁금해서 집을 나와 남광주 건널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쿵, 쿠르르 쿵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청 쪽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집으로 얼른 도망갔다.
그때가 바로 계엄군이 광주 진압작전을 시작한 때였다.
날이 밝자 동사무소에서 출근하라는 방송을 듣고 동구청으로 갔다.
군인들이 거의 청소를 했기 때문에 별다르게 할 일은 없었다
. 나중에 소리를 들어보니까 청소차에 시체를 싣고 어디론가 갔다고도 했으나 보지는 못했다.
1980년 5월 이후 몸이 불편해 더 이상 미화요원으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했다. 구호 양곡이 나왔을 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주라고 거절을 했으나 동장이 귀찮게 해서 받은 적이 있다.
나는 5·18 이후 지금까지 아내가 해오던 만화가게를 하고 있다.
수천 발의 총소리가 광주를 뒤덮어
증 언 자 : 김용택(남)
생년월일 : 1959. 12. 22(당시 나이 21세)
직 업 : 대학생(현재 백화점 근무)
조사일시 : 1988. 11
김용택 씨는 1980년 학내민주화 투쟁에 참여하고 5월 16일은 타대학과 함께 횃불시위에 참가했다. 21일 계엄군들이 무차별 사격했을 때 총에 맞아 왼쪽 발목을 다쳤다. 시위군중이 병원에 옮겨줘 대강 수술을 한 후 이곳저곳의 병원에서 치료를 했다.
1980년 당시 나는 지금의 호남대학 전신인 성인경상전문대학 무역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었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급변하는 시국에 발맞춰 학내에서도 민주화의 함성이 치솟아
어용교수 및 어용직원 퇴진시위가 한창이었다.
나도 학내의 비민주적인 문제점을 척결하기 위한 시위에 합류하여 열심히 싸웠다.
학내문제로 열을 올리던 우리 학교에 전남대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현재 시국이 급변하고 있는데 한가하게 학내시위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시내 각 대학의 학생과 시민이 힘을 합쳐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 계엄령 철폐를 주장하자는 취지였다.
그 요청을 수락하여 그날부터 뜻을 같이한 많은 학생들은 도청 앞 분수대로 나갔다.
우리 학교에서도 당시 날마나 계속된 시위로 인하여 학생들의 투쟁열기는 드높았고
아울러 지도부의 설득으로 100여 명의 학생이 피킷과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16일에 있었던 평화적인 횃불시위에 참여했다.
도청 앞 광장은 운집한 학생, 시민으로 발디딜 틈도 없었으나 모두 진지한 태도로 행사에 임했다.
그날 주된 구호로는 '계엄령을 철폐하라. 신현확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이었다.
행사에 동참한 시민, 학생들이 횃불을 들고 지도부가 짜준 조에 맞춰 평화적인 시위를 시작했는데
내가 속한 조는 광주천변을 따라 돌다가 충장로, 금남로를 거쳐 다시 도청 앞으로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랫동안 행진을 했으나 경찰의 제지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그들이 시위대를 보호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횃불시위는 정말로 감동적인 행진이었다.
비상계엄령이 확대 조치된 후 18일부터 날마다 시내 중심가로 나가 자연스럽게 시위에 합류했다.
주로 충장로, 원각사 앞, 시외버스공용터미널 부근 등에서 전경과 투석전을 벌였다.
시내 곳곳을 친구와 함께 돌아다니며 투쟁했다. 내가 처음으로 공수를 본 것은 광주천변에서였다.
전남대병원에 입원해 계신 친구 아버님 병문안을 갔다 오는 길에 4.5톤 복사트럭에 공수 20여 명을 태우고 지나가는 것을 봤는데,
그때만 해도 공수부대인지 몰랐고 그저 군인이려니 생각했었다.
친구와 함께 곧바로 가톨릭센터 앞으로 갔더니 그곳에는 이미 공수들이 두세 겹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는 20, 30미터까지 접근해서 투석을 했다. 전경들과는 달리 그들은 10여 명씩 짝을 지어 북북 군화 소리를 내면서
시위대를 향해 위협적인 진압을 해왔다. 그때까지도 시민들은 구경하는 정도였다.
그때 공수들은 곤봉을 들고 쫓아왔다. 우리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잡히면 곤봉으로 머리가 깨지도록 얻어맞고 반죽음이 되어 트럭에 실려가기 때문이다.
나는 한참을 쫓기다 황금동 술집으로 숨었다. 거기까지 끈질기게 쫓아온 공수들이 주변을 수색하여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은 무조건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팬 뒤 잡아갔다고 하는데
나는 아슬아슬하게 수색을 피해 무사히 집으로 갔다.
나는 19, 20일도 모이기로 한 약속 시간에 시내로 나왔다.
19일 아침 시위도중 시민들이 공수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듣고 분노한 기억이 생생하다.
첫날은 구경만 하던 시민도 시간이 갈수록 차츰 합세하기 시작했다.
총상을 당한 21일, 양동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던 아버님께서 시내가 어수선하여 시장에 가지 않고 집에 계시면서
나를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하셨다. 스피커를 통해 시민들의 참여를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던 나는 아버님이 화장실에 가신 틈을 타 몰래 집을 빠져나왔다.
그간 시내에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경험했던 기억 때문에 도저히 집에 갇혀 있을 수 없었다.
오전 10시쯤, 집을 나와 금남로를 향해 걸어가는데 거리는 온통 최루탄 파편, 돌, 화염병 깨진 조각 등으로 어지럽혀 있었다.
농성동에서 출발하여 계속 걸어가는데 서부경찰서 앞에서 쓰러진 나무가 불타고 있는 것을 봤다.
수창국교 앞에는 시민들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18일부터 공수들의 잔인한 시위 진압을 직접 보고 들었지만, 막상 금남로 4가 중앙교회 앞에서
리어카에 실려 태극기가 씌워진 두 구의 시체를 목격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검으로 찔리고, 짓이겨진 모습은 성별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처참했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솟구치는 분노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동족에게 이렇게 잔인한 행위를 하다니. 오! 하느님' 이런 말을 뇌까리며 같은 민족으로서 끓어오르는 울분 때문에 무척 흥분했다.
나는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당시 성경책을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 시위에 참가할 정도로 순수했었다.
다른 학생, 시민들도 지니고 있는 무기라고는 겨우 돌멩이와 각목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공수들은 무방비상태의 시민, 학생을 곤봉과 총칼로 잔인하게 죽인 것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이미 엉클어진 마음을 안고 계속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공수들을 광주에서 몰아내기 위해 한 뜻 한 몸이 된 많은 시민들이 무리지어 금남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금남로 1가로 가서 보니 공수들은 전일빌딩 앞에 탱크 한 대와 M16으로 무장한 채 금남로를 가로질러 겹겹이 버티고 있었다
그들의 바로 앞까지 가서 보니 계급은 중사, 하사 등이었다.
동구청 앞에서도 시민들과 마주 서 있는 공수들을 봤는데 그들의 눈이 충혈되어 있었음을 확인했다.
그때까지도 시민들은 무장하지 않았고 다만 탈취 차량이 몇 대 있었을 뿐이다.
차마다 빨간 페인트로 '신현확, 전두환 찢어 죽이자' 등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광주시민의 맺힌 원한이 표현된 구호라는 생각을 했다.
탈취차량 중에는 장갑차도 있었다. 차량과 시민들이 금남로에 뒤섞여 있었는데
갑자기 장갑차가 도청으로 질주해 가다 저지당한 후, 시위군중이 조금씩 도청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금남로 3가 광주은행과 한국은행 중앙 도로에 군중과 함께 있었다.
12시경으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수천 발의 총소리가 광주시를 뒤흔들었다.
금남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물결처럼 양편으로 갈라졌고 금남로는 삽시간에 텅 비었다.
얼떨결에 광주은행 쪽으로 도망친 나는 재빨리 금남로를 보았다.
그곳에 쓰러졌거나 죽은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불안스런 얼굴로 숨어서 쥐죽은 듯이 있는 시민들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시민 여러분! 공포탄입니다. 놀라지 마시고 다시 모입시다"
그때까지 나는 공포탄만 쏘는 줄 알았다. 잠시 후, 곳곳에 숨어 있던 시민들이 하나둘씩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고,
시위군중이 대열을 맞춰 또다시 도청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무차별 사격이 시작됐다.
그때 나는 총에 맞았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꼬집히는 듯한 경미한 통증을 느꼈을 뿐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도망가려는데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아 그 자리에 쓰러졌다.
주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순간 '아! 총에 맞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한 통증으로 다리를 절룩거리며 기다시피 인도로 나왔다. 탕탕거리던 총소리가 일시에 멎었다.
거리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시민들은 경악스런 눈으로 쓰러져 신음하는 우리들을 눈물로 바라봤다.
총에 맞은 왼쪽 발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총에 맞아 쓰러져 있는 나를 보고 군중 속에 있던 고등학교 동창생이 뛰어와서 지혈시키기 위해 수건으로 복숭아뼈를 묶어줬다.
몸에서 쏟아져나오는 피를 본 후부터 이성을 잃고 나는 절규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이여!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모두 힘을 합쳐 저놈들을 몰아냅시다."
그렇듯 절통하고 피 끓는 심정을 표출했다. 나는 4명의 학생들에게 팔다리를 의지하고 병원을 찾아다녔다.
당시 금남로 3가 광주은행 부근에 숨어 있었던 사람이면 단장의 아픔을 토해 내는 나의 절규를 들었을 것이다.
병원을 찾아 헤매는 동안 이마에 정통으로 총알을 관통 당해 지하상가 도로 옆에 기대어 있는 한 시민을 목격한 후
더욱 격한 분노가 치밀었다. 친구들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있으라고 타일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병원을 향해 가는 동안 계속해서 피 끓는 음성으로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한참을 헤매다닌 끝에 충장로 3가에 있는 한일정형외과로 들어갈 때 한 구의 시체를 시민들이 들것에 실어 들고 있는 것을 봤다.
역시 태극기로 시신을 덮어놓은 상태였다. 병원으로 들어가자
병원측에서 '지금은 계엄상태라 총상환자들은 받을 수 없다'면서 무척 꺼렸으나 그곳에 있던 시민들의 완강한 주장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응급실로 들어가 곧바로 수술대 위로 올려졌다.
나를 들것에 싣고 간 4명의 동료가 의사의 지시에 따라 팔과 다리를 붙들자,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술이 시작됐다.
M16 총알의 관통상이었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생살을 찢고 꿰매는 수술을 견딘다는 것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당하는 가장 힘든 상태였다. 소요시간은 불과 5분-10여 분 정도였겠지만 고통으로 일그러진 나는
연신 소리를 질러대며 뼛속 깊이 전해 오는 공수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수술은 총알이 뚫고 들어간 쪽에서 한 바늘, 뚫고 나간 쪽에서 세 바늘을 꿰매는 것으로 끝났다.
수술 후, 입원실이 없어서 보조의자에 누워 있었다.
왼쪽 다리의 상처 부위는 붕대로 감겨진 채였지만 계속되는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몸은 한치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나른했고, 왼쪽 다리는 끝에서부터 시퍼렇게 멍들어가면서 퉁퉁 부어 올랐다.
그동안 친구집에다 전화를 해서 사실을 이야기 하고 가족들을 오라고 했다.
대기의자에 누워 있는데 또다시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다.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의로운 광주시민, 학생들이 적의 총과 탱크 앞에 겨우 돌과 몽둥이로 대항하여 싸우다 쓰러져
내가 있던 병원으로 여러 명이 실려오는 것을 봤다.
시간이 흐른 뒤, 병원으로 실려온 부상자를 통해서 시민, 학생들이 시외로부터 탈취해 온 무기를 지급받아 공수들과 교전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웬지 힘이 솟았다.
적은 M16으로 무장했는데 우리 편은 카빈소총이라 무척 어렵다고 했으나 그것도 다행이다 싶었다.
그 사이에도 총소리는 계속 들렸다. 갑자기 헬리콥터 소리가 한일정형외과 상공 가까이서 들리기 시작했다.
기관단총 소리가 나자 의자에 누워 있던 나는 와락 겁이 났다. 두렵고 겁에 질린 상황에서도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저 총소리에 따라 죽어갈까!'라는 걱정과 탄식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나는 병원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시위대열에 합류해 싸우지는 못했지만 마음은 이미 그들과 함께 했다.
분노와 걱정이 뒤섞이는 마음으로 시민들의 무사함을 빌고 반대로 공수들을 증오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병원으로 시민인지 기자인지 모를 어떤 사람이 들어와서 학교, 생년월일, 이름, 주소 등을 노트에 적어서 가져갔다.
그분이 조금 있으면 공수들이 각 병원을 뒤져 부상자를 사살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자
나는 불안에 떨면서 가족이 빨리 와주기를 애타게 기다렸으나 빨리 오지 않았다.
상처로부터 오는 고통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의사에게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사정했더니 주사를 놔줬다.
거짓말처럼 통증이 가시더니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다시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데
큰형님과 형수님께서 오셨다. 형님은 밖으로 가시더니 공사장용의 조그만 리어카를 구해 왔다.
신장의 절반도 되지 않는 리어카에 나를 실어준 후 내가 당한 총상을 보고 더욱 흥분한 친구 2명은 다시 시위현장으로 가버리고
형님이 리어카를 끌고 병원을 떠났다.
병원에서부터 조그만 리어카에 몸을 구긴 채, 농성동까지 가다 보니 상처의 통증은 말할 것도 없고
허리, 어깨 등이 리어카에 부딪치면서 오는 아픔도 심했다.
부상을 당해 집으로 실려가는 나를 보고 길가의 시민들은 위로의 박수를 쳐주었으며,
무장한 시민군이 탄 지프차가 가던 길을 멈추고 나의 안부와 어디서 다쳤는가를 확인한 후, 몸조리 잘하라고 하고는 떠났다.
오후 4시경 집에 도착했다. 내가 다니던 화정교회 목사님께서 연락을 받고 오셨다.
그분은 내 상처를 보더니 집에 있으면 안 되겠다고 하시면서 기독병원으로 빨리 옮기라고 하셨다.
형님과 형수님의 부축을 받고 도로에 나와 지나가는 시위차량을 잡아 타고 기독병원으로 갔다.
병원은 눈에 보이는 곳마다 총상환자로 들끓었다. 지긋지긋한 냄새와 환자들의 신음 소리로 꽉찬 병원은 꼭 지옥을 연상하게 했다
. 나는 콘크리트 맨바닥에 누웠다. 한 시간쯤 후에 목사님의 도움으로 X-Ray를 찍었다.
나중에 보니 복숭아뼈 부근의 뼈가 전부 금이 갔고 총알이 뚫고 나간 구멍이 훤히 보였다.
그날 밤에도 총성은 끊이지 않았고 많은 부상자와 시신이 기독병원으로 실려왔다.
간호원을 통해서 병원 밖의 상황에 대해 간간이 들었다.
특히 춘태여상에 다니던 여고생이 기독병원에 와서 헌혈하고 귀가하던 중 공수들의 무차별한 사격으로
차에 탔던 시민들과 함께 참혹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는 말을 울먹이는 간호원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우리 모두는 절통한 심정으로 울었다.
내 옆에 있던 부상자는 조선대 상대 경제학과 3학년에 다니던 학생이었다.
그는 공수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주둔했던 17일 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학교 안에 숨어 있었다.
기회를 엿보다 21일 새벽에 탈출을 시도했으나 발각되어 공수들이 쏜 총에 어깨를 맞았다.
계속 도망하여 인근 주민의 도움으로 무사히 기독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처럼 가벼운 상처는 그곳에서는 치료받을 수도 없었다.
나보다 훨씬 심하게 다쳐 생명의 위독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경상환자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기도도 수없이 하고 찬송도 들었지만 평상시와 다르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총성으로 인한 두려움과 육신의 고통을 견뎌내면서 21일 밤을 지새웠다.
22일 아침에도 간헐적인 총성이 들렸다. 하룻밤을 콘크리트 바닥에서 새우고 나자 침대로 옮겨주었다.
그때도 병실로 들어가지는 못한 상태였다. 상처는 계속 쑤셔댔지만 통증을 혼자서 참아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침이 되자 아주머니들은 환자들을 위해 죽을 끓여오고, 헌혈자는 계속 밀려들었다.
바로 이런 모습이 광주시민이 모두 '하나'로 뭉쳤음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오전에는 외국사람 5, 6명이 병원으로 와서 여기저기 누워 있는 부상자들을 비디오로 찍어가고
우리 중에 영어 잘하는 사람과 인터뷰도 해갔다.
1박 2일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받은 치료는 몇 대의 주사와 알약 몇 알 먹은 것이 전부였다.
통증이 심해 도저히 참을 수 없음을 호소했을 때 치료해 준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오후 5시에 3일분의 약을 받아 들고 병원을 나섰다.
집으로 가던 중, 걸어가느라고 상처난 다리에 무리가 되었는지 감아놓은 붕대 위로 피가 흘러내려 인근 병원으로 가서 치료받고 갔다.
그 후로는 아버님 친구가 운영하시는 병원에서 간호원을 보내 하루에 한 번씩 소독하고 붕대로 감아주는
간단한 치료를 30일까지 해줬다.
27일 계엄군이 도청을 장악하면서 수많은 시민을 죽이고 잡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음날 오토바이 뒤에 타고 양민의원으로 가서 실을 뽑았다. 농성동 집에서 양동 양민의원으로 가던 중,
탱크가 서부경찰서 앞과 농산물 공판장 앞에 각각 1대씩 있는 것을 봤다.
6월 1일 또다시 기독병원에 입원하여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총상 입었을 때 금 간 뼈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어 깁스를 했다.
그때부터 5개월 동안을 목발에 의지하면서 생활했다. 입원해 있으면서 치료도 받고 물리치료도 지속적으로 했더니
7월이 되면서 목발이 없이도 몇 걸음 뗄 수 있게 됐다. 그날은 너무 기뻐서 눈물까지 흘렸다.
내가 병원에 있을 때 보복이 무서워서 모든 가족이 쌍촌동으로 이사를 갔다.
7월 14일 퇴원한 후로도 계속 목발에 의지해 학교도 가고 거의 모든 생활을 정상적으로 해냈다.
끝으로 고통을 함께 나누며 민주화와 독재 타도를 위해 싸우다 먼저 가신 고인들을 생각하면서 그분들의 염원이 광주시민과 함께 꽃피길 기원하며 목청껏 민주를 부르짖는 애국시민들께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살인마 전두환이 가엾다니‥‥
증 언 자 :문재인(남)
생년월일 :1938(당시 나이 42세)
직 업 :막노동(현재 막노동)
조사일시 : 1988. 12
개요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던 증언자 문재인씨는 21일 공수부대의 만행을 듣고 도청 앞에 나갔다가 21일 오후 1시쯤 공수부대의 발포 때 다리를 부상당한다.
5월에는 MBC방송국 옆에서 개인집 지하실 공사를 하고 있었다. 정확히 날짜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18일 이전에도 MBC방송국 앞으로 많은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었다.
학생들은 과격하지도 않았고 평화적으로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그때는 무지해서 계엄이 뭣인지도 몰랐었다.
18일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하실 공사를 하러 나갔다.
몇 시나 되었을까? 밖에서 '전두환이 물러가라', '신현확이 물러가라'는 구호와 함성 소리가 들려서 밖으로 나왔다.
MBC방송국 앞에서 공수부대들이 학생들을 잡아다가 웃통을 벗기고 트럭에 꿇어앉힌 채
손을 뒤로 묶고 머리를 앞으로 처박게 하고는 군화발과 곤봉으로 사정없이 구타하고 있었다.
트럭에는 빈 부대자루가 있었는데 그 부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속에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학생들을 구타하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였지만 학생들이 그렇게 개처럼 두들겨맞을 정도로 잘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다음날부터 일을 나가지 않았다. 일을 나가지 않는 대신에 시위군중 뒤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며칠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MBC방송국 앞에 시위군중들을 따라서 갔다.
MBC방송국은 총을 든 몇 명의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시위군중들은 공수부대를 향해 돌을 던지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셔터문을 내리고 한동안 지키고 있더니 시위군중의 기세에 눌리기 시작했는지 도망을 갔다.
시위군중들은 그들을 쫓아가서 1명의 군인을 잡아가지고 구타를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냥 보내 주자고 해서 무사히 보내줬다. 다른 일에 대해서는 별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21일은 내가 부상당한 날이다. 아침에 우리 애들한테 밖에 나가서 구경을 하라고 했다.
애들도 현실을 목격해서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공수부대가 왜 나쁜지 직접 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전에 동네 친구 두 사람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고 쇠파이프를 들고 걸어서 도청 앞까지 갔다.
도청 앞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공수부대 물러가라"고 외쳤다.
나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은 공수부대를 밀어붙이자고 했다.
그 상황에서는 밀어붙일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한참 구호를 외치고 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설마 하니 진짜로 총을 쏠까 생각했다. 위협하느라 공포를 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도 엉겁결에 사람들 틈에 끼여 골목으로 도망쳤다.
아마 지금의 진내과 골목이었을 것이다. 공수부대는 그 골목까지 쫓아와서 총을 쏘았다.
여러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 나도 오른쪽 대퇴부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시민들은 총에 맞은 사람들을 병원으로 옮기느라 정신이 얼었다. 나는 근처의 어느 산부인과로 옮겨졌다.
산부인과에서는 치료를 할 수 없다고 하여 응급처치로 지혈을 하고서 서너 바늘 대강 꿰매고는
다시 그 옆에 있는 정영환흉부외과로 옮겼다. 그 병원도 부상자들로 만원이었다.
집에 연락도 하지 못하고 빵과 우유를 먹으며 링게르를 꽂고 하룻밤을 보냈다. 그날 오후 내내 총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다음날(22일) 시민들이 도청을 장악했다는 소문이 병원에 나돌기 시작했다.
시민군들이 도청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해 놨다는 등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병원은 환자들이 가득해 바닥에까지 환자들이 누워 있었다. 나도 바닥에 있었는데,
병원문을 열고 내다보니 총을 든 시민들이 차에 타고 지나다녔다.
나는 집에서 걱정할 거라는 생각도 들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지나가는 차를 세웠다.
차에 탔던 사람들에게 집으로 데려다달라고 부탁을 하여 그 차를 타고 집에 왔다.
집에서는 내가 들어오지 않아서 죽은 줄 알고 집사람이 찾으러 나갔다고 큰방 아줌마가 전해 주었다.
집사람은 적십자병원으로, 전남대병원으로 찾으러 다녔다고 했다.
병원 영안실에서 죽은 사람들을 보고는 얼마나 겁이 나고 정신이 없던지 냄새가 나는 줄도 몰랐다고 했다.
그날 집에서 보내자니 어찌나 통증이 심하던지‥‥
다음날인 23일 지금의 원광대 한방병원(그때는 성심병원이었다)에 입원했다.
병원에서는 다리의 상처가 생각보다는 심하다고 했다. 27일 새벽에 총소리가 심하게 들렸는데 계엄군이 밀고 들어왔다고 했다.
성심병원에도 군인들이 들어왔다. 병원이 광남로 사거리에서 돌고개 가는 쪽에 있었기 때문에
군인들이 그 지역을 지키기에는 아주 좋은 장소였다. 군인들은 총을 들고 각 병실마다 돌아다니면서 확인을 했다.
나에게도 어떻게 다쳤냐고 물었다. 나는 지나가다가 다쳤다고 했다. 군인들은 병원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해 놓았다.
성심병원에서 한 달 정도 있다가 적십자병원으로 옮겼다. 적십자병원에도 환자는 많았다.
지금은 무엇을 하는지, 어디서 사는지 모르지만 중학생 환자에서부터
다리,허리,머리 등을 다친 환자들까지 다양한 환자들이 있었다. 병원에 있으면서 라디오 방송을 들어보았다.
내가 목격한 사실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방송에 나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신문과 방송을 믿지 않는다. 적십자병원에서 퇴원을 할 때 각서를 썼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정부 쪽 사람이 밖에 나가서 5 · 18에 관한 말을 하지 알기로 한다는 각서를 쓰라고 했던 것이다.
다리의 부상은 병원에서 거의 완치되었다. 날씨가 궂으면 통증이 심하고 조금만 앉아 있어도
다리가 저린 것 빼고는 별다르게 불편한 점은 없다. 5 · 18때 부상당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정도의 후유증은 있을 것이다.
가슴을 뚫고 지나간 M16
증 언 자 : 임승만(남)
생년월일 ,1947. 1.2B(당시 나이 33세)
직 업 :광주고속 운전기사(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1
개요
5월 21일 회사에 출근한 후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가 대형 화물트럭을 몰고 온 시위대와 부딪쳤다. 광주고속 시외버스를 요구하는 시위대와 함께 도청 앞으로 나갔다가 값자기 날아온 총알에 가슴을 관통당했다. 한 선량한시민이 5 · 18로 인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맏은 고통을 당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것을 적었다.
18일인지 19일인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퇴근길이었다. 대인동 소방서 골목 승호장 입구에서
한바탕 시위가 벌어졌는지 공수부대가 시위대를 쫓아다니다 어느 식당문을 두드렸다
. 그러자 주인 아주머니가 고개를 비쭉 내밀었다. 공수부대는 물 좀 달라고 말했다.
"물이 떨어지고 없소."
아주머니는 딱 잘라 말했다. 끓인 물은 없다 하더라도 수돗물은 나왔을 것인데
공수부대가 얼마나 미웠으면 그랬을까 싶었다. 공수부대는 별 시비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 나에게도 별로 시비를 걸지 않았다. 아마 운전기사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19일 오후 3, 4시쯤이었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 있는데 공수부대 원 50여 명이
갑자기 시외버스공응터미널 안으로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무조건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곤봉으로 내리쳤다.
바로 얼마 전 고속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도로를 돌면서 시위를 했었다.
나는 그때 공수부대의 곤봉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로 끌려가는 젊은이를 몇 명 보았다.
그러나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었다. 우리 기사들도 도망가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때 기사 중 한 사람이 곤봉에 머리를 맞았다.
정확한 날짜를 기억할 순 없지만 20일경이었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는 터미널다방이 하나 있었다.
내가 지하다방에 있는데, 지하에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가보니
계단이 꺾어진 한쪽 모퉁이에 있는 청소함에 사람들이 처넣어져 있었다.
10여 명 정도였는데 누워 있는 사람도 있고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몰골은 한결같이 말이 아니었다. 온통 피투성이였고 부상당한 사람들이었다.
아니 그중에는 죽은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수부대가 한번 휘젓고 간 뒤였다.
딴은 사람들의 생활터전인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까지 들어와서 그런 난동을 부렸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시민들은 많이 흥분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조차 그런 짓을 했다면
더 외진 곳에서는 얼마나 더 심하게 굴었을까를 생각하고 분함을 금치못했다.
20일 오후 6시경 나는 순천에 있었다. 그때까지 계속해서 광주고속은 정상운행을 했었다.
나는 손넘을 태우고 순천에 내려갔던 것이다. 거기서 그날 저녁에 광주에 올라올 것인가를 한참 망설였다.
광주의 통행금지 시간이 8시로 앞당겨졌기 때문에 전속력으로 달려온다고 해도 통행금지에 걸릴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광주로 올라가기로 하였다. 손님들 사정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식구들이 걱정되었다.
6시가 넘은 시간에 차를 몰아 광주로 오게 되었다.
그때 순천에서 을라모지 않았더라면 5 · 18은 나에게 별상처를 주지 알고 지나갔을 것이다.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되려고 그랬던지 나는 광주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또 그때 광주의 상황이 그렇게 살벌한지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통행금지에 걸린다손 치더라도 어쩔라디 야 하는 생각이었다.
고속도로를 질주해 오는데 도로에 있는 순찰대도 더 빨리 가라고 손짓을 했다.
광주에 들어와서 손님들을 모두 서방에 내리게 했다. 버스에 손님들을 태우고 시내로 들어갔다가는
시위차량으로 몰려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빈 차를 몰고 주차장으로 갔다. 될 수 있으면 시내 중심가를 피했다.
주차장은 양등에 있었는데 지금의 금호맨션 자리에 있었다.
거기다 주차를 해놓고 보니까 8시5분 전이었다.나는 회사에 들르기 위해 죽어라고 뛰었다.
운전기사복을 입은 채였다. 내가 광남로 남아빌딩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광남로 사거리에 여자를 포함해 다섯 명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공수부대가 무릎을 꿇려놓은 것이었다. 나는 무조건 그 앞을 뛰었다.
그 순간 공수부대가 소리쳤다.
"너 이 새끼, 이리 안 와."
하지만 나는 더 속력을 내서 뛰었다.
지금의 동방생명빌딩 앞에 교통순경이 서 있었다. 나는 그 교통순경한테 얼른 말했다.
광주고속 운전수인데 집에 가는 길이라고 그랬더니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바로 그 부근이라고 말했다. 교통순경은 나보고 얼른 집으로 가라고 했다.
소리지르는 공수에게도 그가 말했다. 퇴근하는 운전수인데 집이 바로 이 근방이라고
아마 내가 제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공수부대가 쉽게 나를 보내줬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들처럼 나도 잡혔을 것이다.
나는 가까스로 회사에 도착하여 배차했다고 상관에게 보고했다.
과장이 다음날 출근하여 시위대로부터 차를 지키기 위해 근무를 서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알고 그날 저녁 골목골목으로 피해 간신히 집에 들어갔다. 당시 집은 계림동에 있었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했다. 다른 기사들도 여럿 나와 있었다. 모두들 차를 지키려고 나온 것이었다.
나도 함께 있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가려고 지금의 로얄 카바레 쪽으로 나오다가 시위차량과 부딪쳤다.
20여 명의 젊은이들이 대형 화물트럭을 몰고 왔다. 운전수는 따로 동승하고 있었다.
그 시위대는 버스를 좀 내달라고 말했다.나는 화물트럭에 탄 시위대와 함께 광천 동까지 갔다
. 거기서 대기차를 돌려 시내로 들어왔다. 도청 쪽에 사람들이 몰렸기 때문인지 거리는 조용했다.
가톨릭센터 앞까지 간뒤 나는 차에서 뛰어내렸다. 시위대도 뛰어내렸다.
금남로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도청 앞에는 공수부대들이 저 있었다.
몇백 명은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과 바로 몸을 맞대고 있었다.
사람들은 온통 웅성웅성했을 뿐 노래를 부르는 것도 못 들었다.
통일된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다. 지휘하는 사람이 없어서 인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기는 했지만
전혀 통합이 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차에서 내린 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2시쯤 되었을까?
나는 여전히 가톨릭센터 앞에 서 있었다.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순간 누가 내 가슴을 탁 하고 내리치는 것 같았다.
고개가 저절로 뒤로 돌려지는 순간이었다. 분수처럼 내 가슴에서 피가 솟아나지 않는가.
나는 얼른 손으로 가슴을 막았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만은 조건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끈끈하고도 뜨끈뜨끈한 피의 감촉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그날 나는 빨간 티를 입고 있었다. 빨간색이라 유난히 띄었을 것이다.또 175센티미터의 큰 키였기 때문에 더 잘 띄었을게다.
총알이 내 가슴을 뚫었다는 것은 조준사격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큰 키에 빨간 티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쉽게 띄어 나는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국회 청문회를 보니까 위협사격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혁띠 아래를 맞았으면 모를까 나는 혁띠 위를 맞았다.
그것도 어느 쪽에서 날아왔는가 하는 것은 확실치 모르겠다. 아마 도청 쪽이었을 것이다.
그때 분수대 위에 서있는 공수부대도 있었는데 분명 그곳에서 쏘았을 것이다. 나는 도청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내가 연락을 받고 기독병원에 가보니까 내가 복도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쓰러진 뒤로 사람들에 의하여 기독병원으로 옮겨진 것이었다. 부상자들이 워낙 많이 밀려들다 보니 병원은 대만원이었다.
나는 흰 보에 덮인 채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복도 바닥에 누워 있었고, 횐 보도 없이 그냥 누워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잠깐 동안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떠보니까 머리 위로 횐 가운을 입은 간호원들의 모습이 희끗희끗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 정신을 잃어버렸다. "총알이 적어도 심장으로 3센티미터만 밑으로 내려왔다고 해도 당신 병원에 올 필요 없었을 것이오" 하고 의사는 말해 주었다.
그렇게 하여 나는 한 달 동안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곳에 있을 때 계엄사,보안사 요원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본부에서
수사를 나왔었다. 사복을 입은 사람이 와서 자기가 소령이라고 말한 다음에 몇 가지 사실을 물었다.
나는 거기서 한 달 뒤에 강제퇴원을 당했다.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상태였다.
병원에서 나온 뒤에도 '고준석외과'등에서 입원치료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약을 먹기도 했고 단방약으로 치료하기도 했다. Ml6에 맞았기 때문에 앞가슴 쪽에는 조그만 흉터가 있지만
등뒤에는 험악한 상처를 입었다. 몸에 좋다는 약이라면 모두 구해다 치료를 하다 보니 상처는 아물었다.
그러나 온전치가 못했다. 지금도 날씨만 궂으면 몸이 아프다. 기압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노루뼈를 구해다 고아먹는 등 치료를 계속하고 있다.
퇴원한 뒤 몇 달을 쉬다가 다시 운전대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두 아들과 아내 나 등 네 식구의 생활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 계속해서 운전대는 잡았지만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남과 같이 일할수는 없었다.
나가서 일을 하다가도 힘이 들면 들어와버리곤 한다. 광주고속 운전기사로서 5 · 18 때 부상당한 김갑진이라는 사람은
1986년도에 죽었다. 그는 총에 맞지는 않고 구타를 당했다. 약한 체질에 구타를 당했으므로 더 견디지 못한 것이다.
더 큰 후유증은 가해자들의 왜곡
증 언 자 :박동환(남)
생년월일:1950. 7.24(당시 나이 30세)
직 업 운전기사(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1
개요
박동환 씨는 5월 21일 12시경 군용트럭 운전석 옆에 타고 있다가 도청 분수대 부근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오른쪽 둔부가 맞았다. 부상 후 기독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았으나 지금도 그 후유증이 심하다.
5월에 내가 운전하던 차가 사고가 나서 5월 17일에 서방에 있는 공업사로 차를 고치러 광주로 나왔다.
5월 20일까지 아침에 나와서 차를 고치는 것을 것을 보고 있다가 저녁에 장성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했다.
5월 21일 오전 광주-장성간의 버스가 다니지 않아 고려시멘트 차를 타고 광주로 갔다.
그러나 구톨케이트(어린이대공원 부근)에서 지키고 있던 군인들이 차를 시내로 가지 못하게 하여 차에서 내렸다.
그때 공수부대원 6명이 계급장도 달지 않은 채 군용지프차 2대에 LMG를 장치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할수없이 나는 걸어서 호남고속도로를 돌아 전남대 후문으로 해서 공업사로 들어가보니 차를 고치던 작업이 중단되어 있었다.
하는수없이 집에 가려고 공업사 앞에 서있는데 군용트럭을 타고 가던 사람이
"형님 거기서 뭐하요?'라고 물었다.
예전에 내가 운전했던 '통일화물' 차의 조수였다. 장성으로 간다고 하니까 트럭에 타라고 했다.
트럭 적재함에는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나는 운전석 옆에 탔다.
트럭을 타고 서방에서 기름을 넣은 후 법원-시청 앞으로 해서 장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구톨케이트 부근에 오니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비아에 있는 방송국 기자라고 하는 사람이 도청으로 가자고 하였다.
도청 앞 상황을 비디오로 찍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당사의 비디오는 어깨에 메는 것이 아니라 무겁고 텔레비전 수상기와 같은 형태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도청으로 가기 위해 광주역-시외버스공용터미널을 거쳐 금남로로 나아갔다.
이때의 시간이 12시경이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도청 앞에는 군인들이 중무장을 한 채 서 있었다. 우리차는 점차 분수대 가까이 접근해 갔다.
분수대 부근에서 뒤에 탔던 기자는 계속해서 도청 앞의 상황을 비디오에 담고 있었다.
그때였다. 난데없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탄 트럭의 기사가 방향을 바꾸려고 하는 순간
나의 오른쪽 둔부에 총알이 박혀버렸다.
차를 돌려 도청 앞에서 빠져나온 후 환자만 실은 미니버스를 보았다.
나는 그 버스에 옮겨지는 과정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기독병원이었다.
후에 들은 얘기로는 개인병원에서 응급치료를 한 후 기독병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기독병원에는 환자가 너무 많아 복도에서 치료를 받았다. 병원에 있는데 안기부에서 조사를 나왔다.
그들은 학생들을 조사하던 증에 교도소 앞에서 다쳤다고 하는 사람은 무조건 끌고 갔다.
병원에 있는 동안 안기부에서는 6번이나 조사를 나왔다.
또한 기독병원 마당에 있던 여고생 한 명이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았다. 그 학생은 피가 모자라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피가 모자라 죽는 경우도 있었다. 병원에서는 부상이 심한 환자가 맞아 총알만 빼고
파편은 빼지 않은 채 6월 13일 나를 퇴원시켰다.
퇴원 후 장성 집에서 쉬고 있는데 장성경찰서 수사과에서 4년 동안이나 못살게 굴었다.
하루만 안 보여도 이상히 여기고 다른 곳으로 일을 가면 그쪽 수사기관에 연락해 미행을 시켰다.
부상 1년 후에 장성 '미화사'에서 운전을 하게 되었는데 몸이 아파 종종 쉬게 되었다. 내가 쉬는 동안 아내가 막일을 하면서 생활을 꾸려갔다.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1988년도에 위수술을 했고 최근에도 몸에 박힌 파편 때문에 피부병을 않았다. 현재도 몸이 불편하여 집에서 쉬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광주의 문제는 무엇보다 진상이 밝혀지고 명예회복이 된 후 보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폭도로 몰리면서 명예회복은 되지 않고 보상만 된다면 일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현재는 5 · 18 부상자동지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잘라낸 창자가 세숫대야에 가득
증 언 자 : 이문창(남)
생년월일 : 1950(당시 나이 30세)
직 업 : 도장공(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1
개요
1980년 5월 21일 도청 앞 수협 부근에서 복부관통상을 당한 이문창씨의 증언이다. 그는 21일 아침에 직장에 출근했다가 즉시 퇴근하라는 사장의 지시를 받고 직장 동료와 함께 나왔다. 집으로 가기 위해 전일빌딩에서 수협 앞으로 건너간 직후 공수들이 갈긴 M16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그후 창자를 절단하는 수술을 2차례에 걸쳐 받았으나 현재까지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는 등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1980년 5 · 18 당시 나는 중흥동에 있는 대동공업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는 20일에도 정상근무를 했었다.
21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을 했으나 사장이 지금 시내에 난리가 났으니 그냥 집으로 가라고 했다.
직장 동료와 함께 걸어서 유동 삼거리에 가보니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그곳에서 친구집에 전화를 걸어 만나기로 했다.
약속된 장소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친구가 오지 않자 직장 동료와 함께 전남여고에서 전일빌딩으로 난 길을 따라 금남로로 왔다.
전일빌딩 앞에 도착한 시간은 12시에서 1시 사이였을 것이다. 금남로에 빡빡하게 들어찬 사람들을 비집고 수협 앞에 왔을 때
총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시 시위구경을 하려고 금남로로 간 것이 아니라 그곳을 지나 집에 가기 위해 길을 건넜던 것이다.
처음 총소리가 연이어 들리는 순간 배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거리에 팍팍 고꾸라지는 것을 봤다. 머리에 총을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려대는 총소리 때문에 멍청하게 있던 나는 정신이 들자마자 도망치려고 일어났다.
마음과는 달리 아무리 달리려고 해도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제야 내가 총에 맞은 사실을 깨달았다.
옷은 이미 피로 낭자해 있었다. 나는 배를 움켜쥐고 혼신의 힘을 다해 무등극장 맞은편에 있는 조그만 병원문을 열고
들어간 후 쓰러져버렸다.
의식이 가물거리는 상태에서 간호원들이 와서 침대로 나를 옮기는 것을 느꼈다.
간호원이 지혈시키기 위해 상처부위를 붕대로 조이자 숨도 쉬지 못할 전도로 배가 아프고 뜨거웠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소리지르는 나를 다시 들것에 싣고 차에다 태웠다.
그곳에서 응급처치만 받고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다. 적십자병원에서 의사들이 보호자를 찾았다.
나는 집에 전화가 없기 때문에 동생집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그때까지 의식이 있기는 했으나 상처로부터 오는 통증이 너무 심해 사람의 말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집에서 보호자가 도착할 때까지 나는 응급실에 방치돼 있었다. 나는 평상시 용돈을 맡이 가지고 다닌다.
그때도 지갑에 만원권 여섯장,천원권 열장과 껍, 빗 등을 담아 잠바 속주머니에 넣어뒀었다.
그날 총알이 가죽 지갑과 그 내용물을 뚫고 배에 박혔다. 지금도 그 지갑을 내용물과 함께 보관하고 있다.
지갑에 있던 돈은 적십자병원에서 계약금으로 써버렸다.
나중에 수술했던 의사가 하는 말이 "지갑이나 그 내용물이 없었다면 총알이 관통했을 텐데
내용물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총알의 회전력이 약해져서 복부에 박힌 것 같다"고 했다.
동생이 병원에 오기 전까지 오직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버티었으나 동생과 매제가 도착하자 정신을 잃었다.
수술 후 3주 진단을 받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처음에는 회복도 빠른 편이었고 경과도 아주 좋았다.
수술 후 열사흘 정도 지난 날이었다. 밤 9시경에 갑자기 하혈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 과장해서 수돗물이 쏟아지듯 밤새 피를 쏟았다. 간호원이 이 소식을 원장에게 전화로 알리자 하혈이 멈출 때까지
수혈을 시키라고 했다. 양팔을 통해 계속 수혈을 하면 괜찮다가 수혈이 끝나면 다시 세숫대야에 가득 피를 쏟았다.
그러기를 다음날 아침 9시까지 되풀이하자 얼굴은 핏기가 없이 하얗게 변하고 손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었다.
원장이 출근한 후 다른 대학병원으로 연락하여 의사들이 왔다.
수술하는 중 사망해도 책임이 없다는 각서에 도장을 찍고 오전 10시경에 재수술을 했다.
내가 재수술을 받던 날 오후 4시가 되어도 수술실에서 나오지 않자 어머니는 창문으로 뛰어내리려고 했다고 한다.
평소 장남인 나를 극진히 위해 주시던 어머니는 타는 듯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오후가 되면서 통곡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어찌나 발악을 했던지 보다못한 간호원이 가족들에게 어머니를 진정시켜 집으로 보내라고 충고할 정도로
안절부절 못하고 그 긴 시간을 수술실 앞에서 보내셨다.5시가 지나서야 수술은 끝났다.
"이문창 씨 수술 끝났으니 들어 가보세요"
어머니는 오히려 겁이 나더란다. '혹시 수술하다 죽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티자,
친척들이 어머니를 안심시켜 들여보냈다고 했다. 수술 후 작은어머님이 보니
내 배속에서 잘라낸 창자가 세숫대야 가득 들어 있었다고 한다.
6시경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병실로 옮겨졌다. 나에게 그날부터 새로운 고통이 시작되었다.
수술 후 보름간을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영양제일 링게르 주사에 의존한 채 살았다.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단 한 .가지 생각으로 병원에서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지키려고 노력했다.
아침마다 의사들이 상처부위의 소독을 하기 위해 병실로 왔다.
수술하고 꿰맨 곳에 계속 고름 주머니를 허리띠에 끼어 차고 생활했다.
손바닥만한 고름 주머니를 하루에 서너 번 정도 바꾸는데도 진한 피고름이 흘렀다.
그래서 아침마다 의사들이 와서 고름을 짜내고 소독을 했다. 거의 상처부위에 고여 있는 고름만 짜는데
어떤 때는 핀셋 같은 것으로 쿡 찔러 뱃속을 휘저으면 단장의 아픔을 느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면서도 비명 소리를 내지 않았다.
내가 고통에 못 이겨 몸부림치면 혹시라도 의사들이 소독을 소흘히 할까봐서 아픔을 속으로 삼켰다.
수술하고 보름이 지나자 물을 한 모금씩 마셔도 괜찮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목이 마르고 혀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갈증을 생각하면 당장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참았다.
의사가 마셔도 좋다고 했지만 빨리 회복하기 위해서는 며칠 더 참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사흘을 견딘후에야
한 숟가락의 물로 입만 축였다. 그렇게만 해도 살것 같았다.
의사들은 내가 회복되리라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재수술을 할 때도 우리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시험삼아 하는 식이었다.
수술 후 병실에 누워 있을 때 복도에서 과장이 "이문창이 목숨도 참 질기네"라고 말하는 것을 어머니가 들었다고 했다.
수술하고 꿰맨 자국도 간격이 굉장히 벌어져 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두 배 이상 벌어지게 듬성듬성 꿰맸다..
아무튼 어떻게 수술했는지 모르지만 내 배는 가로 세로로 쩍쩍 갈라진 상처가 3개나 되고,
왼쪽 맨 밑에 있는 갈비뼈 끝이 날렵하게 되어서 툭 불거져 있다.
아마 의사들이 어차피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수술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간격이 넓게 꿰매놓은 상처 사이로 삐져나온 살이 고름을 짤 때마다 들락날락했을 정도이니까.
재수술 후 치료과정중에는 의사와 간호원들이 참 친절하게 대해 줬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환자가 차츰 회복되어 가자 반갑기도 했겠지만
그들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지키려고 노력하자 대견스럽게 생각했는지 전력을 다해 치료에 힘써 주었다.
적십자병원에 입원한 지 며칠 후 도청에선가, 경찰서에선가 조사를 나왔다.
부상환자들의 신원파악을 모두 해보고 시위에 가담한 사람들은 통합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들이 당시 내가 근무했던 대동공업 사에 가서 출근부까지 복사해 가고 고향까지 가서 나에 대해 알아봤다고 한다.
그때 "치료비는 정부에서 부담한다"는 말을 그들로부터 들었다.
나는 중상환자였기 때문에 일반병실에는 있었고, 나머지 기간은 중환자실에서 보내다했다.
1980년 10월말에 퇴원하여 1981년 1월까지를 허리에 차고 살았다. 뱃속에 구멍을 뚫어 고름 주머니 연결해 놓은 호스에서
끈끈하게 나오던 액체가 점차 묽게 나오더니 석달째 되자 거의 나오지 않았다.
수술하면서 연결해 놓은 호스가 뱃속에 살이 차니까 점차로 빠져나왔다.
호스도 조금씩 밖으로 나오고 고름도 거의 안 나오자 적십자병원에 가서 호스를 뽑아냈다.
출처: 전남대 518 연구소 자료
첫댓글 잊지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너무감사합니다. 이제 편히쉬세요.
잊지않겠습니다
정말....ㅠ 이걸보고 폭동이라는 말똥같은 소리들이 없었으면..
잊지않겠습니다 아니 잊지못합니다.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을 일입니다. 이런 희생이 있었음에도 아직까지 대한민국은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닙니다. 고개를 못 들 만큼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뿐입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걸까요......
이걸 어떻게 잊어. 절대 못잊어. 오늘 금남로 다녀와야겠다...
아존나빡치네ㅋㅋㅋㅋㅋㅋ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절대죽을때까지안잊는다감사합니다정말찾아주신민주주의우리가계속잇겠습니다ㅠㅠㅠㅠ
창자...
감사하고 또 폭동이라고 폭군이라고 불리게 해서 죄송하고
지금보다도 더 참된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진짜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가다니 잊지않겠습니다 그때희 희생이 지금의 민주주의를 이뤄냈다는것에 믿어 의심치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진짜무서웟겟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고맙습니다ㅠㅠㅠㅠ
잊지않겠습니다.절대로 잊지않을겁니다.
잊지않겠습니다.
아....진짜할말없다 난지금뭐하고있는건지도 모르겠고 진짜슬프다 전두환찢어죽일새끼 산소아까우니까 빨리쳐뒤졌으면 좋겠다 무슨 ;; 죄책감도없나 ....걍진짜슬프다
전두환 시발새기
잊지않겠습니다
잊지않겠습니다.
잊지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잊지말자 관심가져줘제발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잊지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잊지않겠습니다.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네요 해마다 오일팔때 광주는 날씨가 안좋았는데 이번해는 날씨가 좋네요....마음이아픕니다...
잊지않겠습니다
잊지않겠습니다..
언제다시 이런날이 올지모름.. 박대통령이 당선되기 전까지의 삶을 누리게 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잊지않았고 잊지 않을겁니다.
읽는데너무가슴이아프다 어떻게사람의탈을쓰고저런짓을할수가
잊지않을게요 감사합니다
답글좀주라..두고두고읽게!
정독했다 진짜 너무 화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