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칠 월 이십 일.
곽가장주 곽모천은 이른 아침부터 손님을 맞았다.
감여가 일만여 명을 이끌고 있는 하후상이었다. 그는 곽모천의
맞은편에 당당히 앉아 느긋한 자세로 차를 홀짝거렸다. 산귀의
그늘아래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지만 그의 역량은 일파를 거
느리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곽가장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을 수 있는 사람은 강서성을
전부 뒤져봐도 열 손가락을 채우지 못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하후상이었다.
일반적으로 권문세가(權門勢家)나 무림세가 사람들에게 감여가
는 빈천한 하급 인간일 뿐이다. 그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감여
가들을 무시했고, 감여가들은 그런 대우를 당연하게 받아들였
다. 일상생활에 직접 관여하는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관습으로
정해진 신분 격차는 좀처럼 좁힐 수 없었다.
하후상의 경우는 예외였다.
일 만여 감여가.
그들을 말 한마디로 움직일 수 있는 지위는 상당한 권력이었
다.
하후상은 공식적으로 원방파 총수에 오른다고 선포한 후였다.
취임식은 팔월(八月) 일일(一日)이지만 현재 원방파 총수로서
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기에 그만한 대접을 받는 것은 마땅했
다.
'늙은 생강... 이럴 때일수록 다급함을 보이면 안 된다.'
하후상은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오늘 새벽, 조중이 돌아와서 일러준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황백과 범도가 장주의 사람이었다니. 그렇다면 원방파에서 천
지유불을 도와준 일이나, 산귀 등이 주일의 질고인 대저택에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으리라.
곽모천은 대단한 사람이다.
코밑에 적이 있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건드리지 않았다.
이유는 반여량이 교교의 시신을 안고 온 다음에야 알았다. 자
식을 잃은 슬픔과 비등한 슬픔을 안겨 주겠다는 뜻. 다음 목표
는 반여량의 아내이자 자신에게는 딸인 곽소연이라지 않은가.
공격은 조만간 시작되리라.
다급해진 반여량 일행은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섰다.
명당을 골라 교교를 묻어준 후 다음 행로를 정한다는 비참한
여로(旅路)였다.
하후상은 그들이 머지않아 잡히리라 생각했다.
강서성 안에서 곽가장 이목을 벗어날 곳은 없었다. 비록 정대
원이 몰살했다 하더라도.
그는 곽가장주와 담판을 짓기 위해 이른 아침에 방문한 것이
다.
"허허허!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차가 아주 좋습니다. 허허허! 이런 차를 드시니 기체(氣體)가
헌앙하신 것 같습니다."
"차를 마셔서이겠나? 워낙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늙을 틈이
없었던 게지. 흠! 오늘은 차가 진하게 우려졌구먼. 맛이 좀 덟
지 않나?"
"달기만 하군요."
곽모천과 하후상은 잠시 우호적인 듯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정리를 할 필요가 있어서요."
"허허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먼.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
은 기분이야. 이른 아침부터 정리를 하다니? 어디 말이나 차근
차근히 들어보세."
"허허허! 그렇게 말씀하시니 할말이 없군요. 좋습니다. 단도직
입적으로 말하죠. 천지유불은 독단적으로..."
"아! 그 일."
곽모천은 하후상의 말을 중간에서 가로챘다.
거론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관계되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책임을 묻겠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좀더 파고들면 원방파를 가
만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정대에 일이 생겼다면서요? 감히 곽가장에 검을 들이대다니.
골치깨나 아프시겠습니다."
하후상은 물러서지 않았다.
원방파도 알 것은 알고 있다는 뜻을 은근히 내비쳤다.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원방 감여가들을 동원해 곽가장에서 벌어진 일
을 무림천하에 알리겠다는 협박이었다.
"도전(挑戰)이 있으면 응전(應戰)도 있는 법이지. 검을 쥔 사
람이 그깟 일쯤이야."
곽모천은 도전을 받아들였다.
할 테면 해보아라.
이것은 하후상이 생각한 것과 다른 내용이었다.
곽가장도 세계가 다른 원방파를 어찌할 수 없고, 원방파도 대
놓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입장이고 보니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되리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장주님께서 흥미있어 하실 만한 이야기가 있기에 찾아
왔습니다."
하후상은 다시 한 번 운을 떼어보기로 했다.
"허허허! 그런 이야기가 있는가? 어서 말씀해 보시게."
"아시다시피 저희 감여가들은 눈과 발이 생명입니다. 명당을
찾아 전국 각지를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그렇겠지."
하후상은 잠시 여유를 찾으려는 듯 찻잔을 홀짝거렸다.
"한 친구가 구궁산 무여촌을 들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뜻밖
에도 탈명화검이 거기서... 허허허!"
하후상은 어떠냐는 듯 곽가장주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가 가든 피어 올랐다.
"탈명화검이? 그 사람이 거기는 어쩐 일로 갔을까?"
곽모천은 천년을 버텨 온 바위처럼 흔들림 없었다.
'장주... 제법 태연을 가장하는데... 승부는 끝났어.'
"허허허! 그때는 무심히 흘려 버렸는데... 총수의 일을 관장하
다 보니 전임 총수인 산귀께서 무슨 일로 긴 여행을 떠나셨는
지 알게 되더군요. 이상한 일이지요? 대명이 천하에 자자한 탈
명화검이 천하의 요희(妖姬) 음갈마희 초초와 정분을 통했을
리도 없고... 인적드문 산골에서 무엇을 하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는지. 허허허!"
순간, 곽모천의 눈가에 살광(殺光)이 번뜩였다.
하후상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태연히 맞받았다.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음갈마희 초초를 알고 있다는 말을 함으로써 곽
혼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 혈단과 비수당의 싸움을 포함한 모
든 싸움을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승부수였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면 산귀를 죽이려 하듯이 자신 또
한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곽가장이라면 무공을 모르는 범인
(凡人) 하나쯤 소리없이 제거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래서
총수라는 말을 강조했다. 원방파총수가 되면 모든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자네 말을 참조하지."
곽모천은 의외로 순순히 시인했다.
이제는 조건을 제시할 차례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십유오이지우학(十有五而志于學)하고
삼십이립(三十而立)하고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하고 오십이지
천명(五十而知天命)하고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하고 칠십이종
심소욕(七十而從心所欲)하야 불유구(不踰矩)라 했죠. 하지만
그 이상은 언급이 없었습니다. 어찌 생각하시는지?"
공자의 말씀을 예로 들어 산귀의 나이가 많으니 그만 이쯤에서
끝내면 어떠냐는 물음이었다.
"공자의 말씀인가? 나도 한 구절 들은 풍월이 있지."
하후상은 긴장했다. 과연 곽모천의 의중은 어떠한가.
"자왈(子曰) 부득중행이여지(不得中行而與之)인대 필야광견호
(必也狂 乎)인저. 광자(狂者)는 진취(進取)요 견자( 者)는
유소불위야(有所不爲也)라."
하후상은 탄식을 터뜨렸다.
곽모천은 살려 줄 수 있다는 뜻을 표시했다. 단지 조건이 받아
들이지 못할 만큼 컸다. 중용을 아는 자를 얻어 가르치지 못할
바에는 과격하거나 성격이 급한 자를 얻겠다. 광자는 진취적이
고, 견자는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
중용을 아는 자, 타협한다는 의미였다. 타협을 하여 굴종시키
지 못할 바에는 미치거나 성미 급한 자에게 원방파를 치게 하
리라. 나쁜 일, 곽가장에 해로운 일을 못하게 되리라.
원방파의 존립 자체를 말살시키겠다는 미친 생각이었다.
하후상은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적합한 이유를 늘어놔도 살수를 양성했다는 것은 치명
적인 오류였다. 누가 입이라도 뻥끗 하는 날에는...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했다. 조그만 트집이라도 잡으면 벌떼처럼
들고일어서는 무림인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원방파는 초토
화될 것이고, 중원 감여계는 삼파(三派)만 존재하게 되리라.
곽모천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허허허!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 아닌가. 사해지내(四海之
內) 개형제야(皆兄第也)라 했네. 천하의 모든 사람이 형제인
것을."
곽모천은 협박과 회유를 동시에 했다.
"자네가 도와 준다면 사양하지 않겠네. 허허허! 어떤가? 이왕
도와줄 것 이번 일부터 도와주게."
"말... 씀 하시지요."
하후상은 차라리 귀를 막아 버리고 싶었다. 산귀와 쫓기는 사
람들의 목숨을 살려 보려고 찾아왔던 것이 원방파를 통째로 곽
가장의 입속에 처넣고 말았다. 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사우맹과 신창윤가, 정대원을 한꺼번에 몰살시킬 능력이라면
일만 명 아니라 이만명의 감여가가 있다고 할지라도 며칠 사이
에 요절나리라.
"추풍... 그놈의 뒤를 바짝 따라붙어 주게. 내게 검을 들이댄
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아들놈을 죽인 놈은 용서할 수 없네."
"알아보죠."
"어떤가? 차 맛이 덟지? 역시 조금 진하게 우렸어."
"그렇군요."
하후상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 * *
곽가장에서 전서구(傳書鳩) 수십 마리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강북에 있는 구파일방, 그리고 강서 대소문파에게 날아가는 전
서구였다.
사우맹 멸문, 커다란 충격이었다.
흑도인들이 연합하고 있다는 소문은 중원 전 무림계를 술렁이
게 만들었다. 모든 것은 시작이 어렵지 일단 시작하고 나면 다
음은 수레바퀴처럼 제 스스로 굴러가게 되어 있지 않은가 말이
다.
같은 이치였다. 큰 세력으로 규합하기가 어렵지 하나의 단체로
커지고 나면 다음은 건드릴 수 없는 힘이 되고 말리라.
사우맹을 치고자 노력한 문파는 많았다.
강서 제일 문파라는 곽가장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
는 소리도 심심찮게 터져 나오던 차였다.
그들이 하루 아침에 몰살하고 말았다.
신창윤가가 사우맹과 연수하여 곽가장을 치려 했다는 것도 믿
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곽가장에서는 그들의 시신을 거두지 않았다.
신창윤가 무인들의 시신은 황음곡에, 사우맹 수뇌부의 시신은
함산에 버려 놓았다. 까마귀가 날아오면 쫓아 보냈고, 들개가
피냄새를 맡고 달려들면 죽여 버렸다. 아무도 시신을 건드리지
못했다. 볼수는 있었다. 그들이 어떤 곳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곽가장을 치려 하지 않았다면 무엇 하러 남창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육신을 뉘었겠는가.
곽가장의 피해도 컸다.
일심각, 비수당, 비화당, 신계각의 전멸.
장주의 여식 중 곽요연, 곽선연, 곽무연의 죽음.
엄청난 희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가장은 기치(旗幟)를 힘차게 휘날렸다.
분타는 거의 손실이 없었다. 싸움을 본장 무인들이 도맡은 결
과였다. 비목당과 비금당이 건재하고 한동안 무림에 관여를 하
지 않던 원방파가 곽가장의 눈과 귀가 되었다는 사실도 놀라웠
다.
하나같이 충격적인 사실들.
곽가장은 이십 년 전의 역사를 재현했다. 단독으로 혈조수를
옥순산에서 몰살시켰듯이, 이번에도 단독으로 사우맹을 무림도
상에서 지워 버렸다.
아무런 기미도 눈치채지 못하던 많은 문파들에게는 날벼락 같
은 전서였다.
전서를 받은 문파에서는 한결같이 혀를 내둘렀다.
역시 곽가장, 역시 곽모천!
곽가장 칭송으로 하루해가 뜨고 졌다.
* * *
요와는 안락한 침상 위에서 눈을 떴다.
일지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아버지가 죽는 모습도
보았다. 모두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무공으로는 발버둥을 쳐
보았자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었다.
그리고 이곳...
요와는 힘겹게 눈을 떠 잠시 자신의 존재를 찾았다.
내가 누군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주위에 있는 사람은?
이곳은 어디인가? 정신을 잃었던 사람이 맑은 정신을 찾기까지
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존재는 곧 찾아졌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제일 먼저 찾아왔고, 침상에 누워 있고,
아담하지만 화려하게 치장된 방 안이고... 아! 혈단인에게 일
지를 찍혔으니 곽가장 안이 되리라.
몸을 일으켜 봤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아픈 곳도, 행동이 부자연스러운 곳도 없
었다. 하지만 얇은 비단이불에 쓸리는 촉감은...
"헉!"
요와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알몸... 그녀는 본능적으로 비
단이불을 끌어다 가슴을 가렸다. 틀림없었다. 천조각 하나 걸
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보다 더욱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느닷없이 들려온 사내의
음성이었다.
"깨어났느냐? 허허허!"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차분한 음성이었다.
"누, 누구?"
"허허! 강서제일염 요와가 알몸을 부끄러워하다니."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환갑을 넘었음직한 노인이었다.
"누구세욧!"
"짐작하고 있지 않느냐."
"곽모천!"
"너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사람과 비슷한 체질이야. 그녀는 내
아이를 낳아 주었다.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이 내 아이를 낳아
줄 수 있었지. 어떤가? 너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요와는 새하얗게 웃었다.
곽모천의 목적이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들어 줄 용의가 있
다. 그의 곁에 머무른다면 얼굴이 낯설었던 아버지의 복수라는
것도 해줄 수 있다. 자신이 상대했던 수많은 사내들처럼 곽모
천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릴 수 있다.
"호호호! 강서제일패주님의 씨앗이라면 오히려 제가 영광이
죠."
"아비의 원수인데도 원한이 없나?"
"스물다섯 해를 살아왔죠. 그 중에 아버지라는 사람과 지낸 기
간은 불과 한달 남짓. 새삼스럽게 원한이랄 것이 있나요?"
"현실적인 여자군."
"나와 비슷한 체질의 여자라면 음갈마희 초초 맞나요?"
"허허허!"
"그 여자는 어디 있죠?"
"아는 것이 많으면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해."
"죽었죠? 강서무림의 패주가 음희(陰姬)와 정분을 통했다면 당
당하지 못하죠. 저는 장주님이 직접 죽여 주세요. 고통 없이
죽고 싶어요."
"사랑스런 아이구나."
요와는 곽모천의 눈가에 일렁이는 욕정을 읽었다.
그녀는 나신을 가린 비단이불을 젖히고 사뿐히 옥보(玉步)를
내딛었다.
눈부시게 드러나는 하얀 살결, 풍만하게 부푼 가슴, 그리고...
"하악!"
곽모천의 품에 안긴 요와는 더운 김을 토해 냈다.
그녀는 어떻게 했을 때 사내가 가장 강한 자극을 받는지 잘 알
았다. 이미 고벽(痼癖)으로 굳어져 버린 손길은 익숙하게 곽모
천의 옷을 헤치고 단단한 살결을 더듬었다.
장주는 육십을 넘긴 노인답지 않게 팽팽한 근육을 지녔다. 너
무 단단하여 흡사 돌덩이를 만지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꿈툴거
리는 박동감은 살아 있는 생명이 무엇인가 일깨워 주는 듯했
다.
여인에게 각기 독특한 향기가 있듯이 사내들에게도 개인만의
향기가 있었다. 요와는 많은 냄새를 맡아 보았다. 땀이 물씬
배어있는 들찬 냄새, 향유를 바른 듯 고아한 냄새, 날연한 냄
새, 간동한 냄새...
곽모천에게서는 생명의 냄새가 풍겨나왔다.
품에 안겨있으면 살아 있다는 행복이 느껴졌다. 그의 진면목을
몰랐을 때 오늘과 같은 제안을 받았다면... 승낙했으리라. 순
수한 마음으로. 이와 같은 냄새를 풍긴 사람은 반여량. 그래,
그도 이런 냄새를 풍겼다. 속이 꽉 찬 느낌...
곽모천은 요와의 손길에 전신을 내맡기고 서 있었다.
장삼이 벗겨지고, 우람한 근육이 드러날 때까지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요와의 손길은 점점 아래로 향해졌다.
"헉!"
느닷없이 요와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장주의 하물(下物), 움직임이 없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욕
정으로 가득 채우는 손길에도 그는 득도한 고승 마냥 휘말리지
않았다.
"허허! 나는 양물(陽物)이 서지 않아. 음갈마희 초초만이 내
양물을 일으켜 세웠지. 요와... 네가 알고 있는 모든 방중술
(房中術)을 사용해 봐."
요와는 놀란 눈으로 장주를 올려다보았다.
양물은 아무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움직이지 않다니. 세
상에 그럼 장주는 불구자(不具者)란 말인가. 성불구자(性不具
者).
요와의 전신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반응이 없는 상대를 대상으로 방중술을 사용한다는 것은 환락
이 아니라 고통이었다.
"호소봉왕 가심이란 수하가 있었지. 허허! 그 여자의 몸도 색
기(色氣)가 넘쳐흘렀어. 그녀는 나의 양물을 일으켜 세우지 못
했고... 허허! 너도 못한다면 가심을 만나게 될 거야."
요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죽여 버리자.'
요와는 독심을 품었다. 그러나 틈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요
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곽모천의 손가락이 사혈(死穴)을 더
듬었다.
발가락이 성을 자극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요와는 몸을 밑으로 내려 혀로 발가락 사이를 핥았다.
성을 자극시킨다는 의미 외에도 장주의 손가락으로부터 몸을
빼기위해 취한 행동이었다.
과연 장주는 두 손을 침상 위에 늘어뜨렸다.
'됐어!'
혀는 부지런히 발가락 사이를 누볐다. 암중으로는 진기를 끌어
올려 장심에 모았다. 어느 사혈을 친다? 칠 수 없었다. 끌어
올린 진기를 풀어 버렸다. 장주는 다른 발을 묘하게 움직여 사
혈을 눌러왔다. 약간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단번에 격살9
擊殺)시키겠다는 듯이. 아니면 흥분을 느끼고 있다는 표시로.
첫날, 그의 양물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미친 짓이야. 음갈마희 초초가 곽모천의 양물을 일으켜
세웠다면 그녀야말로 천하제일의 요녀(妖女)다. 나는... 못
해.'
요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비술(秘術)을 사용했다.
결과는 예측했던 대로였다.
나이가 많은 자의 하물은 일으킬 수 있다. 성에 관심이 없는
척하는 자기 위선도 벗겨낼 수 있다. 하지만 성불구자를 정상
으로 만드는 방법은 없었다.
결점(缺點)을 지닌 인간은 극과 극의 특성을 나타낸다.
결점을 딛고 일어선 사람과 좌절하여 광적인 기질을 드러내는
사람. 불행히도 곽모천은 후자였다. 여인에게 정을 줄 수 없으
니 무공에 대한 집념이 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음갈마희 초초를 죽였다?
요와는 그 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까마득히 잊어버린 성을
일깨워 준 여인이라면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사랑하고
매달리게 되어 있다. 설혹 평생 동안 일궈 온 곽가장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더군다나 그녀는 곽모천의 아이까지 낳아 주었다. 그런 여인을
죽일수가 있을까? 세상에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단 한 명의
여인을?
야망(野望)이란 말로 모든 것을 덮어 버리면 간단하다.
여인보다 야망에 일생을 거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여인의 가슴에 검을 꽂는
비정한 현실도 왕왕 일어난다.
요와는 자신의 생각과는 너무 다른 삶을 사는 한 인간과 만난
것이다. 그의 자식을 낳아 주면 그는 그가 말한 대로 틀림없이
죽음을 내릴 것이다. 양물을 일깨우지 못한다면 검은 그림자가
당장 찾아오겠지만...
죽음이 바로 곁에서 살결을 더듬는 느낌이었다.
장주는 오래 기다리지 않으리라. 호소봉왕 가심을 죽였듯이 자
신도 죽일 것이다.
그녀는 살고 싶었다.
곽모천은 매일 찾아와 한 시진씩 전신을 내맡겼다. 그러나 돌
아갈 때의 반응은 날이 갈수록 포악해졌다.
퍼억!
"악!"
"병신 같은 년. 강서제일염이라더니만 가심만도 못한 년이구
나. 노기만도 못해. 노기만도..."
육 일째 되는 날, 곽모천은 이성을 잃은 듯 행동했다.
복부를 걷어차인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눈앞이 노랗게 변하고 몸에 안 받는 술을 잔뜩 마신 사람처럼
구역질이 치밀었다.
"내일 한 번 더 해보지."
거짓 얼굴을 벗어버린 곽모천은 죽음의 사신이었다. 흉신악살
이었다. 간단한 말 한마디에도 죽음의 냄새가 풀풀 피어 올랐
다.
요와는 아픈 것도 잊어 버리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죽음이구
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철커덕...!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곽모천, 그놈이 또 왔나?'
요와는 밀옥에 갇혔을 때처럼 조그만 방 안에서 한 걸음도 나
가지 못했다. 문살은 단단한 쇠로 만들어졌고, 밖에서 자물쇠
를 잠궈 버렸다. 음식은 문 밑에 뚫어 놓은, 개나 드나들 수
있는 작은 구멍으로 들어왔고, 대소변은 요곤(尿 :요강)으로
해결했다.
곽모천 외에는 누구하고도 접촉을 한 사람이 없으니, 다른 사
람이 자물쇠를 푼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황급히 들어와 다시 문을 닫았다.
그녀는 요와를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잠시 문틈으로 바깥 동정
을 살폈다. 이윽고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
제서야 요와를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헉!"
요와는 입을 손으로 가리면서 헛바람을 토해 냈다.
흉신나찰(凶神羅刹).
여인은 꿈에 볼까 두려울 만큼 징그러웠다. 얼굴은 자상(刺傷)
투성이였고, 코는 베어져 구멍이 뻥 뚫렸다. 코뿐이 아니라 양
쪽 귀도 잘려졌고, 입술도 한쪽이 잘려져 언청이처럼 보였다.
유독 한 군데, 눈동자만은 무척 아름다웠다.
"놀라지 마요. 자, 어서 옷 입어요. 여길 빠져 나가야지."
요와는 여인의 말을 듣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알아들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이빨이
모두 부러지고, 혀까지 반토막으로 잘린 음성은 몹시 어눌했
다.
"빨리 움직여요. 시간이 없어요."
한참 만에야 여인의 말뜻을 알아들은 요와는 생각할 것도 없이
옷을 주워 입었다.
곽모천은 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백옥 같은 나신을 보는 것이 큰 즐
거움중 하나라고 했다.
요와는 옷을 입지 않았다.
꼭 곽모천의 말을 따라서가 아니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굳이 옷을 입고 있을 필요가 없어서였다.
"가요."
여인이 요와의 손을 잡아 이끌자, 요와는 불현듯 현실을 자각
했다.
이곳이 어디인가? 곽가장이 아닌가? 곽가장에서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을까?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서둘 필요가 무엇인가.
혹시 또 아는가? 내일 곽모천의 양물을 일으키게 될지...
요와는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생각과는
반대로 정신없이 움직였다.
'이, 이게...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요와는 곽가장을 빠져 나온 것이 너무 신기해 볼을 살짝 꼬집
어봤다. 아팠다. 금장철벽 같던 곽가장을 빠져 나온 것이다.
중간에 곽가장 무인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더군
다나 지하에 그런 통로가 있었다니. 한 시진 전만 해도 골방에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비로소 얼굴이 흉악한 여인에게 관심을 가졌다.
"고마워요."
"흥! 고마워할 필요 없어. 곽모천, 그놈이 바라는 대로 자식
까지 낳게 해줄 수 없어 한 짓이니까."
"성함이라도..."
"호호호! 왜? 알면 보답하려고? 어떻게 보답할 거야?"
요와는 멀쑥해져 말을 잇지 못했다.
여인의 태도가 너무 쌀쌀맞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갈 데 있어?"
'갈 데라... 어디로 가지?'
곽가장의 눈을 피해 몸을 은신할 만한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곳은 고사하고 당장 몸을 뉠 공간 하나 없었다.
"없어요."
"그렇겠지. 너도 나와 같은 입장이니 갈 곳이 없겠지. 곽가장,
저놈들 내버려 두면 안 돼. 흥!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놔?"
여인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따라오고 싶으면 따라와."
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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