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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1월07일(일요일) [강화 나들길 제10코스(교동 2코스 머르메 가는 길)&교동도 고구저수지&교동대교] 탐방기
탐방지 : [강화 나들길 제10코스(교동 2코스 머르메 가는 길)&교동도 고구저수지&교동대교]
[강화나들길 10코스 - '교동도 머르메 가는 길'
‘금수강산’이란 단어는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다운 산천’이란 뜻으로 아름다운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자성어다. 전국 곳곳에 숨겨져 있는 다양한 걷기길을 걸을 때면 선조들이 우리나라를 왜 ‘금수강산’이라 표현했는지 깨닫게 되는데 강화군을 한 바퀴 도는 강화나들길도 예외는 아니다. 청정자연을 간직한 채, 인천 앞바다에 떠있는 여러 개의 섬 안엔, 걷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수려한 풍경이 꼬리를 문다. 그 아름다움을 모두 알리려는 듯이 강화나들길은 20개의 코스로 나뉘어 310킬로미터 가까이 이어진다. 그중 열 번째 코스인 ‘머르메 가는 길’은 강화도 본섬 북서부에 위치한, 북녘땅이 닿을 듯 보이는 교동도의 서쪽을 도는 걷기길이다. 17킬로미터에 이르는 강화나들길 10코스를 걷다 보면 산과 들은 물론 바다와 섬까지, 그야말로 우리가 자연에 바라는 모든 요소를 다 만날 수 있다. 코스의 시작점이자 종료지점인 대룡시장은 1960~7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볼거리를 제공한다.]
[6.25때 활주로로 사용하였던 곧게 뻗은 도로를 따라 드넓게 펼쳐진 교동평야를 가로 지르면 거대한 호수를 연상케 하는 난정저수지를 만난다. 평범했던 선조들의 숨결이 유적으로 남아 있고 섬을 지키려 했던 역사가 이야기로 전해지는 마을로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머르메 가는 길은 옛사람들의 일상이 풍경되어 남아있는 코스다. 머르메는 동산리의 자연부락 이름이다. 원래는 가장 큰 마을이라는 뜻의 두산동이라 하였으나 한자를 풀어 우리말로 ‘머리뫼’라 한 것이 와전되어 ‘머르메’로 전해져 오늘날까지도 머르메로 불리고 있다.]
[교동도는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 안쪽에 위치한 섬이다. 그래서 교동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분증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 교동도는 면적이 크지 않지만 강화군에서 제일 넓은 평야를 지니고 있는 섬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해상교통로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방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한때는 삼도수군통어영이 교동도에 설치되어 서해바다를 지키는 보루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교동도는 개성이나 한양과 가까우면서도 물살이 빨라 탈출이 어려운 섬이라서 왕족들의 유배지로 자주 이용되었다. 고려 21대 왕 희종이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어 이곳으로 귀양 왔고, 고려 22대 왕 강종도 교동도에서 14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안평대군이 교동도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중종반정으로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난 연산군도 이곳에 유배되어 사망했고,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 광해군의 형 임해군, 광해군의 동생 능창대군, 영창대군, 숭선군, 익평군, 영선군, 조선 영조의 서녀이자 사도세자의 여동생인 화완옹주 등이 교동도에 유배되었다.]
[교동도는 원래 읍내리의 화개산을 중심으로 한 개의 섬, 난정리 수정산을 중심으로 한 개의 섬, 지석리의 율두산(밤머리산)을 중심으로 한 개의 섬 등 3개의 섬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 세 개의 섬이 간척 공사로 하나의 섬이 됐다. 간척 공사에 관한 정확한 역사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원나라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천도한 이후 강화에 유입된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화도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간척 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교동도는 다른 섬에서는 보기 드물게 드넓은 평야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교동도의 논과 밭은 모두 3300만㎡로서 강화군 내에서 가장 넓다. 교동도는 쌀 등 농작물이 잘 되기로 유명하다. 이 섬이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하구에 위치한 까닭에 기름진 퇴적토가 매년 쌓였기 때문이며, 별다른 오염원이 없는 청정지역이라 현재까지도 알아주는 농작물이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교동도에서 한 해 생산되는 쌀은 인천 사람들 모두를 몇 년 동안 먹이고도 남을 양이라고 한다.]
탐방코스: [지석리 교동 망향대 입구 버스 정류장~(0.3km)~교동 망향대~(4.8km)~난정저수지 해바라기 정원~(1.0km)~수정산~(3.0km)~죽산포~(0.8km)~동산리(머르메) 노인회관~(2.4 km)~양갑리 복지회관~(3.0km)~대룡시장~(2.8km)~고구 저수지~(0.3m)~고구저수지에 세운 정자~(3.6km)~봉소리복지회관~(1.3km)~교동대교의 서단~(4.1km)~석산 버스 정류장] [27.4km]
탐방일 : 2024년 01월 07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강화군 교동면 : 최저기온 영하 7도C, 최고기온 영하 3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6시간 소요)
06:18~06:36 구산역에서 지하철 6호선을 타고 합정역으로 이동 [18분 소요]
06:36~06:42 합정역에서 강화터미널로 가는 3000번 버스 승차 대기
06:42~08:10 3000번 버스를 타고 합정역에서 강화터미널로 이동 [1시간28분 소요]
08:10~09:00 강화터미널에서 핸폰을 충전한 후 대룡시장으로 가는 18번 버스 승차 대기
09:00~09:40 18번 버스를 타고 대룡시장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40분 소요]
09:40~09:42 대룡시장 버스 정류장에서 지석리 교동망향대 입구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904번 버스 승차 대기
09:42~09:57 904번 버스를 타고 대룡시장 버스 정류장에서 지석리 교동망향대 입구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15분 소요]
09:57~10:03 지석리 교동망향대 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탐방 출발하여 인천 강화군 교동면 지석리 산 130 번지에 있는 교동 망향대로 이동
[교동도 망향대
교동도 망향대는 한국 전쟁 때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와서 정착한 실향민들이 고향 땅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교동면 북서쪽 해안의 밤머리산에 위치하고 있는 망향대에서는 물길 건너로 북녘땅이 아주 가깝게 보인다. 분단 전에 교동도와 북한의 연백군은 생활권이 같아 뱃길로 왕래가 잦았지만 분단 이후 연백군 등 황해도에서 온 내려온 피난민들은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실향민들은 고향 땅이 바라다보이는 이곳에 1960년에 비를 세우고 추석 등에 매년 망향대를 찾아 제를 올리며 망향의 한을 달래고 있다. 망향대에 설치된 2대의 망원경으로 북한 연백군의 집과 오가는 사람의 모습까지 볼 수 있을 정도이나, 교통 편리성이 좋지 않아서 철원과 고성에 있는 통일전망대와 자유로 옆 오두산 통일전망대, 파주의 망배단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10:03~10:09 사진촬영
10:09~11:04 난정 저수지에 있는 해바라기 정원(인천 강화군 교동면 난정리 741-3)으로 이동
[난정저수지는 농업용수 개발을 위해 난정리와 무학리 일부 주민을 이주시키고 1991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2006년 완공되었다. 수혜면적은 321만평에 이르고, 총저수량은 6,214천 톤에 달한다. 2017년에는 난정리마을 주민들이 해바라기 10만 그루를 약 3만 3000㎡ 부지에 심어 해바라기 공원을 조성하여 9∼10월경 해바라기 축제를 열고 봄철에는 청보리를 심는다. 저수지 주변에 수정산과 난정 전망대가 있어 북쪽 땅을 조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철책선을 눈앞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장체험의 장소로 적격이다.]
[2017년 교동도 난정리 마을 난정저수지 주변 3만3천㎡ 부지에 해바라기정원이 조성됐다. 난정리 주민들이 지역을 알리기 위한 계획으로 뜻을 모아 저수지 옆 공터에 시범적으로 해바라기를 심기 시작했다. 이곳은 최북단 고요한 섬에 깨끗한 공기와 해풍, 저수지의 수려한 풍광이 어우러진 명소로 알려져 매년 해바라기 축제를 개최한다. 맑은 저수지 주변으로 8월 말에서 9월 초순까지 피는 10만 송이의 노란 해바라기가 얼굴을 들어 올리면 관광객뿐 아니라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작품 사진을 찍는 명소로도 유명하다.
해바라기는 국화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초본으로 원산지는 북아메리카다. 100종이 넘을 정도로 가짓수가 많다. 추위에 약해서 매년 심어야 한다.]
11:04~11:35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수정산 한증막을 거쳐서 인천 강화군 교동면 서한리에 있는 수정산(126m) 정상으로 이동
[수정산 한증막은 조선후기에 축조하여 사용하던 민간 목욕시설로 소나무 가지 등을 이용하여 불을 지펴 그 열기로 한증을 하던 목욕시설이며, 196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원형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둘레 18m 높이 2.5m의 시설이다.]
11:35~12:32 인천 강화군 교동면 동산리에 있는 죽산포로 이동
[죽산포는 옛날 포구에 배가 많이 정박하여 배의 돛대가 마치 대나무숲과 같다 하여 부쳐진 이름이다. 1970년대까지 교동에서 외지로 나가는 선착장으로 사용하였다.]
12:32~12:35 사진촬영
12:35~12:50 인천 강화군 교동면 교동서로 502 번지에 있는 동산리(머르메) 노인회관으로 이동
[머르메는 동산리의 자연부락 이름이다. 원래는 가장 큰 마을이라는 뜻의 두산동이라 하였으나 한자를 풀어 우리말로 ‘머리뫼’라 한 것이 와전되어 ‘머르메’로 전해져 오늘날까지도 머르메로 불리고 있다.]
12:50~13:14 인천 강화군 교동면 교동서로 264 번지에 있는 양갑리 복지회관으로 이동
13:14~13:44 인천 강화군 교동면 교동남로 35 번지에 있는 대룡시장으로 이동
[시간이 멈춰선 듯 옛 향기 가득한 대룡시장은 연백군에 살던 북한 주민들이 6.25 전쟁을 피해 교동도로 잠시 피난 왔다가 한강 하구가 분단선이 되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시장이다. 50여 년간 교동도 경제발전의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시장을 만든 어르신들이 대부분 돌아가시고 인구도 급격히 줄어들면서 시장 규모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대룡시장에 들어서면 마치 70~80년대로 시간을 거꾸로 돌린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대룡시장은 2014년 교동대교 개통과 함께 1970년대 만들어진 영화세트장 같은 모습이 알려지면서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곳은 교동 이발소, 동산약방, 중앙신발로 예능프로그램 방송이 나간 후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나들목 식당과 거북당도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해졌다. 대룡시장에 가면 제비집과 제비가족, 제비를 보호하자는 글을 보게 된다. 그 이유는 고향 연백에서 찾아오는 제비에 대한 실향민들의 특별한 애정 때문이다.]
13:44~13:51 대룡시장을 탐방
13:51~14:15 인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에 있는 고구 저수지로 이동
[고구저수지는 강화도에서 교동도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여행 명소다. 드넓게 펼쳐진 저수지 한편은 매년 여름 연꽃이 장관을 이룬다. 저수지 수면 위로 데크길을 만들어 놓았고, 데크길의 끝에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14:15~14:20 고구저수지에 세운 정자로 이동
14:20~14:25 고구저수지에 세운 정자에서 주변 풍경을 사진촬영
14:25~14:56 인천 강화군 교동면 교동동로 123 번지에 있는 봉소리복지회관으로 이동
14:56~15:10 인천 강화군 교동면 봉소리에 있는 교동대교의 서단으로 이동
[교동대교는 2008년 9월 25일 착공하여 2014년 7월 1일에 개통하였다. 교각을 탑에서 연결한 케이블로 지탱하는 사장교(cable-stayed bridge, 斜張橋)로 만들어졌다.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소리를 연결하는 다리로 길이는 3.44km이고 2차로로 만들어졌다. 교동도는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으로 관할 부대의 통제를 따라야하고 출입증을 받아야 교동도로 진입할 수 있다. 바다 풍경 촬영 등의 이유로 교동대교 다리 중간에서 자동차의 주행을 멈추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15:10~15:57 교동대교를 건너서 인천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에 있는 석산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강화에도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이 있으니 강화군 양사면의 '인화리(寅火里)'가 바로 그곳이다. 인화리의 '인(寅)'은 호랑이 곧 범을 뜻하는 한자어이고 '인화(寅火)'는 범의 눈에서 나는 빛이라는 뜻이다. 뭍도 아닌 섬에 무슨 호랑이가 있다고 동네 이름에 호랑이 '인'자를 다 붙였을까. 인화리는 강화도 서북단 끝에 위치한 작은 바닷가 마을이다. 동네 앞에는 바다가 있고 건너편에는 교동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황해도 연백반도도 빤히 바라보인다. 그래서 예전에는 교동도와 연백으로 가는 배가 이곳 인화나루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인화리 바닷가 쪽으로 튀어나온 높다란 언덕에는 큰 암반 위에 커다란 범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금방이라도 풀쩍 뛰어올라 바다를 건널 기세다. 짙은 검은색의 바위 색깔 하며 웅크리고 있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범이다. 지긋이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범을 보니 왜 이곳이 '인화리'인지 알겠다. 조선 정조 8년(1783년), 강화유수였던 김노진이 간행한 <강화부지>에는 "남쪽을 향한 바위가 있는데 호랑이 모양이어서 인화석진(寅火石津)이라고 부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호랑이가 지켜보고 있는 바다여서 그런지 인화리 앞바다는 물살이 꽤 세다. 그 옛날 뱃길로 교동도와 황해도 연백으로 갈 때면 호랑이바위 근처에 있던 당집에 재를 올리고 배를 띄웠을 것도 같다. 인화리에는 조선시대 군사시설인 '인화보'와 '인화포대', 그리고 '인화돈대'가 있었다. 조선 숙종은 한양을 지키기 위해 강화도를 요새화 했다. 48개의 돈대를 해안가에 촘촘히 축조해 강화를 난공불락의 성으로 만들었다. 강화에는 5진 7보 54개의 돈대가 있는데 진과 보가 지금의 대대와 중대 규모의 상급 부대였다면 돈대는 그 아래 속해 있는 소대 급의 군사시설이었다. 인화보(寅火堡)는 인화돈, 광암돈, 구등곶돈, 작성돈, 무태돈 등 모두 5개의 돈대를 관할했다. 인화보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인화보가 있었으리라고 짐작되는 곳에는 집들이 들어서 있다. 산을 깎고 언덕을 뭉개서 택지를 만들고 집을 지었다. 그래서 인화보는 기록 속에서만 존재할 뿐 실제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주택지를 지나 높다란 언덕에 오르면 범 바위가 있다. <강화부지>에서 말했던 그 '인화석진'이다. 바다를 응시하며 웅크리고 있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범이다. 크고 검은 범 한 마리가 금방이라도 튀어오를 것 같다.
눈에 불을 켜고 이 바다를 지켜줬던 범 바위다. 사람이 살기 이전부터 바위는 그 자리에서 묵묵히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역사 이후에도 범 바위는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탐욕의 손길이 지금 범 바위를 갉아먹고 있는 것 같다. 범 바위 바짝 아래까지 산을 깎아 집을 지었다.
세세년년 그 자리에서 우리 땅, 우리 바다를 지켜주었던 범 바위였다. 교동도로 가던 연산군과 광해군의 눈물도 보았을 바위다. 340여 년 전, 인화보며 인화돈대를 축조하던 선인들의 피와 땀 역시 지켜봤던 범 바위다.
전쟁이 나서 총알이 날아가던 것도 바위는 지켜봤다. 그 후 70년, 배 한 척 다니지 않는 바다를 범 바위는 묵묵히 응시한다. 바닷가에 가시 철망을 치고 사람 하나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놓은 것도 범 바위는 지켜봤다.
범 바위 앞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 봤다. 둥실 다리가 떠 있다. 2014년에 개통한 교동대교다. 이제 인화나루에는 배 대신 차들이 다리 위를 달린다. 인화석진 범 바위는 오늘도 묵묵히 바다를 지켜보고 있다.]
15:57~16:03 석산 버스 정류장에서 강화터미널로 가는 18번 버스 승차 대기
16:03~16:27 18번 버스를 타고 석산 버스 정류장에서 강화터미널로 이동 [24분 소요]
16:27~17:00 강화터미널 안에 있는 가정식백반 식당에서 가정식백반으로 식사 [공기밥 1공기 추가 포함 6천원]
17:00~17:10 강화터미널에서 합정역으로 가는 3000번 버스 승차 대기
17:10~18:49 3000번 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에서 합정역으로 이동 [1시간 39분, 37개 정류장 이동]
18:49~19:00 합정역에서 역촌역으로 가는 6호선 지하철 승차 대기
19:00~19:16 6호선 지하철을 타고 합정역에서 역촌역으로 이동 [16분 소요]
제10코스 (교동 2코스 머르메 가는 길) 지도
교동도 고구저수지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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