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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8/04/14 |
해인사 대장경 필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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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04/14 |
부산진 함락 정발 첨사 전사... 임진왜란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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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04/14 |
(조선 숙종 28) 백두산 분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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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04/14 |
강화해협서 한-미간 포격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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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04/14 |
광혜원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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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04/14 |
일본, 오사카의 교포학교 등 19개교에 폐교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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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04/14 |
재일교포 북송 재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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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04/14 |
김일성, 인도네시아 알라아르함 사회과학원에서 3대혁명 역량론 연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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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04/14 |
정부 GATT가입협정 발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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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04/14 |
대한민국-스위스 무역협정 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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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04/14 |
호남고속도로 기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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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04/14 |
북한, 김일성에게 2중 영웅 칭호 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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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04/14 |
치안본부, 장발족 일제 단속령 시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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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04/14 |
부산-제주 카페리호 취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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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04/14 |
세종문화회관 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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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04/14 |
강원도 함백탄광서 화약폭발사고. 26명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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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04/14 |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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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04/14 |
일본 혼슈 동남방해역서 원양어선 제102오성호 표류 15명 실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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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04/14 |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암살 진상의 일부 밝힘. 장택상 노덕술 최운하 김태선 경찰간부와 김창용 특무대장으로부터 백범을 암살해야 한다는 암시를 받았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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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04/14 |
북한, 나진-선봉 직할시 승격-외국인투자 확대 겨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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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4/14 |
환경운동연합, 그린피스와 함께 두 번째 대만 핵폐기물 해상저지 훈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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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4 |
북한,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요원들 추방. |
오늘의 탄생화와 꽃말 4/14일 [ 4월 14일 탄생화] 나팔꽃(흰색)(Morning Glory) 꽃말 : 넘치는 기쁨 분류 : 메꽃과 원산지 : 유럽,아시아 [꽃말 이야기] 모닝 글로리'란 아침의 미녀를 말합니다. 프랑스에서는 '한낮의 미녀'라 일컬어지며 여기에 향기가 더해지면 완벽하다는 평까지 듣고 있습니다. '나팔꽃도 한 때'라는 격언은 젊었을 때에만 덧없이 빛나는 아름다움을 뜻합니다. 하지만 명이 짧은 꽃입니다. 그렇지만 유럽에서는 '용기와 힘의 상징'. 의지할 것을 찾아서 하늘을 떠도는 굵은 줄기의 생명력에서 이렇게 연상된 것이겠죠. [꽃점 이야기] 용기와 힘이 넘치는 당신. 일찌감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멋진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 만만한 사람이므로 거드름을 피우는 것으로 비치기 쉽지만, 정이 깊어 사람들의 호감을 삽니다. 덧없는 사랑을 경험하지만 곧 잊게 됩니다. 기쁨에 넘치는 생애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나팔꽃(喇叭-흰색) Morning-Glory, White[Pharbitis nil] -통화식물목 메꽃과의 쌍떡잎식물 : 통화식물목 메꽃과의 쌍떡잎식물. 높이 3m. 한해살이풀로서 전체에 거친 털이 있고, 왼편으로 감아 올라간다. 잎은 어긋나며 잎자루가 길고 심장형이며 보통 세 갈래로 나뉘고, 그 조각은 끝이 날카롭다. 잎밑은 넓고 잎겨드랑이에 큰 꽃이 한 자루에 1∼3 송이 달리며 꽃받침은 5갈래로 깊게 갈라진다. 꽃부리는 깔때기모양이고 봉오리는 붓끝 모양이며 수술은 5개이다. 삭과는 둥글며 3실이고 각 방에 2개의 씨가 들어 있다. 7∼8월에 남자색·백색·홍색 등의 꽃이 피는데, 아침 일찍 피었다가 낮에는 오므라든다. 열대아시아 원산이고 관상용으로 전세계에서 재배하며 씨는 약용으로 한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꽃 말] : 넘치는 기쁨, 기쁜 소식消息, 결속結束 [탄생화] : 귀하는 勇氣와 힘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멋진 인생人生을 보내시는 사람입니다.
4월 14일 오늘의 역사
1458 해인사 대장경 50 팔인
1592 (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일어남 1702 (조선 숙종 28) 백두산 분화 1885 (조선 고종 22) 최초의 국립병원 광혜원 개원 1919 한인자유대회 개최
1948 일본 오사카의 교포학교 등 19개교에 페교령 1949 지방자치법 국회 통과
1955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의전 병합
1961 제일교포 북송 재개
1963 한국 독립운동 민필호 사망 1965 김일성, 인도네시아 알라아르함 사회과학원에서 3대혁명 역량론 연설
1966 한국의 쿠베르탱 이상백 박사 별세
1967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GATT)국내에서 발효
1967 한국-스위스 무역협정 체결 1970 호남고속도로 기공 1972 북한, 김일성에게 2중 영웅 칭호 수여 1975 경주 안압지에서 신라유물 800여점 출토
1977 부산-제주 카페리호 취항 1978 서울 세종문화회관 개관 1978 정부, 수입자유화 조치 발표 1979 강원도 함백탄광서 화약폭발사고로 26명 사망
1979 정효주양 두번째 유괴 1980 최규하 대통령,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겸임 임명
1983 여의도 광장에서 귀순 이웅평씨 환영대회 열려
1983 제 1회 천하장사씨름대회 열려 1983 무기 구형 받은 대도 조세형, 법원에서 탈주
1987 김수환 추기경, 호헌철폐 내용 부활절 메시지에서 발표
1987 한국-벨리즈 국교수립 1997 권오기 부총리, 민간차원의 대북지원 한적 창구 단일화 방침 발표 1997 환경운동연합, 그린피스와 함께 두 번째 대만 핵폐기물 해상저지 훈련
2004 국립공원관리공단 홍도가 철새 이동의 핵심경로라고 규명
2004 동해를 동쪽 바다 로 적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공개
2004 통일신라 7세 어린이 유골 발견 인신 공양 제사 가능성 제기
2004 국내 최초로 경인교회 직원들 노동조합(노조) 설립 신고서 제출
2004 애국지사 강동석 선생 별세
2004 한국 항공우주산업 수출용 아파치헬기 동체1호기 출하
2006 2006 경남고성 공룡세계엑스포' 개막
2009 지휘자 이남수씨 타계
2009 이인근 전 의원 별세
2009 양준혁 ‘통산 최다홈런 타이’ 쏘다
해 외 1527 근대 지도 제작술의 선구자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 출생
1626 `호이겐스의 원리" 만든 네덜란드 물리학자. 수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 출생,
1759 독일 작곡가 프리드리히 헨델 세상 떠남 1851 제1회 세계박람회 파리에서 열림 1865 미국 링컨(1808-1865) 대통령, 워싱턴에 있는 극장에서 저격 당함 1866 헬렌켈러 출생,
1875 일본 입헌정체 수립 공포 1889 영국 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태어남
1894 에디슨이 발명한 영사기 '키네토스코프'가 대중에게 처음으로 선보임 1900 파리 만국박람회 개막
1907 14년간 장기 집권한 아이티의 독재자 대통령 장 클로드 뒤발리에 출생 1912 영국 여객선 타이타닉호, 북대서양서 빙산과 충돌로 침몰, 1503명 사망
1917 폴란드의 안과의사, 에스페란토어 창시자 자멘호프(Zamenhof, Lazarus Ludwig) 사망
1924 미국 근대 건축의 선구자인 설리번 사망
1929 제1회 모나코 그랑프리 대회 개막 1930 러시아의 혁명시인 마야코프스키, 자신의 심장에 총을 쏘아 자살 1931 스페인 왕정 붕괴, 제2공화국 수립
1939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출간, 1962 드브레 프랑스 내각 총사퇴 후임에 풍피두 수상
1964 동파키스탄에 돌풍 1천여명 사망
1966 파키스탄 눈사태로 469명 사망
1966 아프레 이라크 대통령 탑승기 사고로 사망
1970 남 예멘 내전 종결 1980 프랑스 철학자 싸르트르 세상 떠남
1982 중국 대만에 대한 무기판매 반발 미국에 항의 각서 1985 남아공화국, 백인과 유색인 결혼 허용 1986 싸르트르의 부인인 프랑스 작가 시몬 보브와르 세상 떠남 1988 아프가니스탄 평화협정 조인 1989 중국 공산당 총서기 호요방 세상 떠남
1995 배우 겸 가수 벌 아이브즈 85세 의 나이로 사망
2001 일본 적군파 해산 공식 선언
2002 하누치 마라톤 세게신기록 수립
2002 동티모르 대선투표 종료, 투표율 86%
2010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2010 중국 칭하이에 7.1 강진 발생
블랙데이(Black Day)는 대한민국 대중 문화에서 매월 14일째 되는 날 일정한 의미를 담아 특별한 행동을 하는 비공식 기념일의 일종이다. 블랙데이는 그중에서 4월 14일에 해당한다. 주로 아직 연인들을 못 구한 사람들이 자장면을 먹는 날로 알려져 있다. 2월 14일인 발렌타인데이와 3월 14일인 화이트데이 바로 다음에 돌아오는 14일이라는 점에서 그 두 기념일의 의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블랙데이 다음에 돌아오는 14일은 로즈데이이다. /위키백과
2009 - 양준혁 ‘통산 최다홈런 타이’ 쏘다
340호 작렬…팀 삼성은 한화에 5-7 역전패 기아 모처럼 타선집중…구톰슨 무실점 호투
양준혁(40)은 홈런타자가 아니라 교타자에 가깝다. 지난 시즌까지 16년 연속 세자릿수 안타를 기록하는 등 타격왕에 4차례(1993년·1996년·1998년·2001년)나 올랐지만, 홈런왕을 차지한 적은 없다. 데뷔해인 93년(23개)을 포함해, 96년(28개)과 97년(30개) 등 3차례 홈런 2위에 올랐다. 시즌 최다홈런도 2003년의 33개. 그가 통산 최다홈런 타이 기록을 썼다. 데뷔 후 한 시즌(2008년)을 제외하고 꾸준하게 두자릿수 홈런을 쳐 온 덕이다.
양준혁은 14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한화와의 안방경기에서 1회말 상대 선발 안영명의 5구째 140㎞ 직구를 힘차게 때려 오른쪽 담장을 넘어가는 솔로홈런을 터뜨렸다. 시즌 1호이자 장종훈 현 한화 타격코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통산 340호 홈런. 양준혁은 지난해 9월8일 대구 기아전서 통산 339호를 친 뒤 기록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지만, 시즌이 끝날 때까지 침묵했다.
그는 경기 후 “한 번도 홈런왕을 해본 적 없는데 통산 타이기록을 세웠다. 그동안 꾸준하게 홈런을 쳐 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부담을 갖지 않도록 되도록이면 빨리 기록을 깨고 싶다”고 밝혔다. 통산홈런까지 공동 1위에 오른 ‘기록제조기’ 양준혁은 현재 최다안타(2207개), 2루타(437개), 최다루타(3714개), 타점(1323개), 사4구(1천286개), 타수(6962타수), 득점(1241점) 등 타격 8개 부문에서 통산 1위를 달리고 있다.
그러나 양준혁의 홈런포는 팀승리 축포는 되지 못했다. 삼성은 3-0으로 앞서다가 3회초 이영우의 우중간 2루타 등으로 동점을 허용했고, 7회초에는 이범호에게 비거리 130m의 큼지막한 쐐기 3점포를 두들겨맞아 한화에 5-7로 무릎 꿇었다.
개막 후 8경기에서 평균 2.63점을 뽑아내는 데 그쳤던 기아 타선은 롯데와 사직 방문경기에서 오랜만에 타선의 응집력을 선보였다. 9안타(솔로홈런 1개 포함) 3볼넷으로 4득점. 기아 선발 구톰슨은 체인지업을 앞세워 8⅔회를 산발 6피안타 7삼진으로 막아 시즌 첫 승(1패)을 거뒀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한겨레 2009-04-14 오후 11:29:52
2009 - 이인근 전 의원 별세
제10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인근 전 의원이 14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
고인은 함흥 출신으로 성균관대 법률학과를 졸업한 1955년 31살 때 지인들의 도움과 전 재산을 털어 고흥중학교를 설립했고 그 2년 뒤 고흥상고(현 청원여고)를 세웠다. 청원학당 이사장,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 민주공화당 당무위원 등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아들 용길(신원철강 대표이사), 영길(송산학원 이사), 환길(청원학당 이사)씨 등 3남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18일 아침 7시다. (02)3010-2230.
한겨레 2009-04-15 오후 07:26:05
2009년] 지휘자 이남수씨 타계 국립교향악단 지휘자와 서울대 음대 학장을 지낸 지휘자 이남수(李南洙·79)씨가 2009년 4월 14일 지병으로 타계했다. 고인은 서울대 음대와 미국 맨해튼 음대를 마친 뒤, 서울대 교수 등을 지냈다. 1994년에는 박은성·금난새·임헌정·정치용 등 국내 대표적 지휘자들이 고인을 위해 '릴레이 지휘'를 할 정도로 한국 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유족으로는 김용분 단국대 전 음대 학장과 이주현·주미 2녀가 있다./조선
2007 - 중국, 다섯번째 항법위성 발사 성공
내년 말 이전 자국 및 주변국가 고객들을 대상으로 위성항법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인 중국이 14일 새벽 다섯번째 '베이더우(北斗)' 항법위성을 쏘아올렸다.
'중국 베이더우 항법시스템(COMPASS. 컴퍼스)' 구축의 일환인 이 COMPASS-M1 위성은 이날 새벽 4시11분 쓰촨(四川)성 시창(西昌)위성발사센터에서 '창정(長征)3호A' 로켓에 실려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중국 언론은 컴퍼스-M1이 발사 14분 만에 로켓과 분리된 후 고도 2만1천500㎞의 예정 궤도에 정확하게 진입했다고 보도했다.
또 이번 항법위성 발사 성공은 중국에서 자체 연구.개발한 컴퍼스가 새로운 발전단계에 진입했음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중국은 미국, 러시아, 유럽에 이어 세계에서 네번째로 항법위성 시스템 자체 연구.개발 능력을 갖춘 나라다.
중국은 지난 2000년 10월31일, 같은해 12월21일, 2003년 5월5일에 각각 베이더우 1호A, B, C를 발사했고 올해 2월3일에는 항법시험 위성 베이더우 4호 발사에 성공한 바 있다.
베이더우 4호는 발사 직후 궤도상에서 태양전지판 고장으로 두 달 이상 정상운행을 하지 못했으나 최근 이를 수리해 정상을 회복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은 올해 들어 잇달아 2개의 정지지구궤도(GEO) 위성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내년 말에는 첫 비정지중궤도(MEO) 위성을 발사해 위성항법 서비스를 자국 및 주변국가에서 점차 전지구로 확대할 예정이다.
최종적으로는 5개의 정지지구궤도 위성과 30개의 비정지중궤도 위성으로 전지구적인 항법 및 위치확인 서비스용 컴퍼스를 구축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중국의 위성항법 및 위치확인 시스템 시장규모는 지난 2000년 10억위안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2005년에는 120억위안 규모로 크게 확대됐다.
중국은 이에 따라 기존의 자국 및 주변국가를 대상으로 한 '베이더우 제1세대 항법위성 시스템'에 이어 전지구를 대상으로 하는 '베이더우 제2세대 항법위성 시스템' 구축을 본격적으로 추진해왔다.
앞서 중국 관련 분야 과학자들은 자국의 전지구 컴퍼스가 구축되면 위치 오차 10m 이내, 속도 오차 초당 0.2m 이내, 시간 오차 50나노초 이내의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고 밝혔었다.
미국은 현재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를 운영중이고, 러시아는 군사용으로 개발했던 항법시스템 글로나스(GLONASS)의 완성을 서두르고 있다.
또 유럽국가들은 2008년 완성을 목표로 갈릴레오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며, 일본은 일본, 동북아, 호주 등을 8자 궤도로 선회하는 'QZSS'라는 위성항법시스템을 독자적으로 구축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돈관 특파원 don@yna.co.kr (베이징=연합뉴스) /한겨레 2007-04-14 오전 11:32:08
2006년] 2006 경남고성 공룡세계엑스포' 개막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의 공룡과 지구, 그리고 생명의 신비를 체험할 ‘2006 경남 고성 공룡세계엑스포’가 14일 막이 올라 오는 6월 4일까지 휴일 없이 계속된다. 올해 처음 개최하는 고성공룡엑스포 행사장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선 57척을 섬멸한 당항만을 끼고 앉은,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관광지의 13만평이다. 개장식은 오전 8시30분 메인게이트 간이무대에서 열린다. 공룡엑스포는 고성군에 산재한 5000개 넘는 공룡발자국 화석의 가치를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한 것. 고성은 미국 콜로라도 및 아르헨티나 서부 해안과 더불어 세계 3대 공룡발자국 산지(産地)다. 1982년 하이면 덕명리에서 처음 발견됐고, 회화면에서는 최대 115㎝짜리 등 무더기로 확인됐다. 발자국 밀도로 따지면 세계 최고라고 한다. 필수 관람코스는 ‘발굴체험관’ ‘로봇공룡관’ ‘영상관’ 등으로 이뤄진 주제관. 그리고 캐나다 로열티렐 박물관 등 세계 3대 공룡박물관에서 보낸 공룡 전신 등 60여점을 전시한 세계공룡대교류관이다. 주최측이 권하는 관람 동선은 2.5㎞로, 4~5시간은 걸린다고 한다. 행사장에서 35㎞ 떨어진 하이면의 공룡발자국 화석지도 빼놓을 수 없다. 하이면에는 티라노사우루스와 같은 공룡 화석 93점을 전시한 공룡박물관도 있다. /조선
2004년] 동해를 ‘동쪽 바다’로 적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공개 ‘동방견문록’의 저자로 원(元)나라를 여행한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가 활동했던 13세기에 서양인들이 동해를 ‘동쪽 바다(Eastern Sea)’로 불렀음을 시사하는 18세기 영국 지도가 발견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 사료조사실장은 고(古)지도 수집가인 모경국씨가 최근 프랑스에서 입수한 이 지도를 2004년 4월 14일 공개했다.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여행 지도’라는 제목의 이 지도는 가로 30cm, 세로 19cm의 크기이며, 1744년 영국의 지도 제작자인 해리스가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탈리아에서부터 아라비아·인도·중국·보르네오와 한국·일본까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을 포함하고 있으며, 한반도를 ‘고려 왕국(K. of Corea)’,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다를 ‘동해(Eastern Sea)’라고 표기했다. 이 실장은 “이 지도가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의거했다는 점으로 보아 지금 전해지지 않는 ‘동방견문록’의 판본이나 그 당시의 다른 자료에서 ‘동해’라고 적힌 부분을 근거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고 말했다. /조선
2004년] 통일신라 7세 어린이 유골 발견, ‘인신 공양’ 제사 가능성 제기 2004년 4월 14일 1300년 전 통일신라에 어린이를 산 제물로 바치는 ‘인신 공양’의 제사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이날 경북 경주시 인왕동 이 박물관 미술관 신축 예정지의 왕궁터 우물에서 7~8세 가량의 인골이 출토됐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고대의 어린이 유골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 인골은 깊이 10.27m의 우물 안 뻘층에서 머리를 바닥 쪽으로 향한 채 거꾸로 박혀 있었다.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김재현 교수는 “유골의 손이 머리보다 아래 쪽에 있었던 것은 손으로 머리를 감싼 것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렇다면 떨어질 때 아직 의식이 있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 어린이가 추락사했을 가능성과 어떤 제사의식의 희생양이었을 가능성 두 가지 경우를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인골 옆에서 머리가 위쪽으로 향한 소의 상반신 유골 등 동물뼈가 함께 출토됐고, 강돌로 이 우물을 인위적으로 메운 흔적이 드러났다”며 제사의 희생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조선
2004 - 한국항공우주산업, 수출용 아파치헬기 동체1호기 출하
수출용 아파치 헬기 동체 1호기 출하식이 미 보잉사와 한국항공우주산업(KAI·대표 길형보) 임직원을 비롯, 국방품질관리소·국방조달본부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14일 한국항공우주산업 경남 사천공장에서 열렸다. 이번 수출은 한국항공우주산업이 지난해 미국 보잉사와 아파치 동체 독점 공급계약을 체결한 데 따른 것이다. 한국항공우주산업은 1호기를 시작으로 최소 160대 이상의 동체를 생산, 수출하게 된다.
창원=강인범기자 ibkang@chosun.com /조선닷컴 2004.04.14 18:50
2004 - 국립공원관리공단, 홍도가 철새 이동의 핵심경로라고 규명
철새의 '허브 항로' 홍도 멸종위기 보호조류등 202종 찾아와
국립공원관리공단은 14일 “2002년 11월부터 1년간 다도해해상국립공원 내 홍도에서 철새 이동상황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를 찾는 380여종의 철새 중 53.2%인 202종이 관찰돼 홍도가 철새 이동의 핵심경로로 규명됐다”고 14일 밝혔다. 특히 ▲멸종 위기종인 흰꼬리수리, 검독수리, 매 ▲보호야생조류인 아비, 흑기러기, 솔개, 참매 등 보호가 필요한 조류가 다수 관찰됐고, 국내에 관찰기록이 없었던 흰머리바위딱새, 긴다리사막딱새, 얼룩무늬납부리새 등도 발견돼 이 지역 생태계 보전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됐다. 조사 결과 홍도에는 4월(105종)과 10월(85종)에 가장 많은 새가 찾아오며, 일부 종은 봄철 북상할 때와 가을철 월동지로 날아갈 때 이동경로를 달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유용원기자 kysu@chosun.com /조선일보 2004-04-14 18:29
2004 - 국내 최초로 경인교회 직원들, `노동조합(노조)` 설립 신고서 제출
“목사도 노동자” 교회노조 신고
부목사·전도사·사무원 포함
인천 계양구 서운동 경인교회 등 일부 교회 계약직원 5명은 “교회 안의 노동자 권익보호”를 내걸고 지난 14일 계양구청에 지역노조인 ‘기독교회노동조합(위원장 이명원)’설립 신고서를 냈다. 보수색채가 강한 한국교회 현실에서 ‘목사도 노동자’라며 노조를 설립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계양구청 관계자는 16일 “노조원들이 교회에 소속돼 있는지 등을 확인한 뒤 다음주 초에 신고필증을 내주겠다”고 말했다.
기독교회 노조는 부목사, 전도사, 교육전도사, 관리인, 사무원 등 교회에 근무하며 급료를 받거나 관련 사업체 노동자가 가입 대상이다.
기독교회노조 설립을 주도한 경인교회 이길원 목사(49)는 “교회 안의 노동자들은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 속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 있다”며 “종교라는 이름 아래 근로기준법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고용 불안과 비인간적 대우,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는 노동자를 위해 노조 설립을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목사는 “노조를 만들자 벌써 30여명이 가입했다”며 “노조가 활성화하면 교회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 개선되고 노조의 견제로 담임목사의 전횡과 교회 세습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기독교회노조 쪽은 홈페이지( www.gdnojo.org)를 개설하고 앞으로 서울과 부천에도 지역노조 형태의 노조를 만들도록 도움을 줄 계획이다.
그러나 노조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이는 목사들이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노조 설립을 둘러싼 진통도 예상된다.
인천/김영환 기자 ywkim@hani.co.kr /한겨레 2004.04.16(금) 18:48
2004 - 애국지사 강동석 선생 별세
애국지사 강동석 선생이 14일 오전 5시 대구 효심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76세. 1928년 경북 상주 태생인 선생은 1943년 8월 경북 안동의 대한독립회복연구단에 참가,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을 포함한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은 방학중 대구 동촌비행장 확장공사에 강제 동원되자 일제의 부당한 식민통치에 항거하기 위해 공사 현장에서 대한독립회복연구단을 조직했다. 이 조직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참가해 항일투쟁 강도를 높여갔다. 선생은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일제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를 위해 안동시내 일본인 기관 및 요인 습격 기회를 엿보다 선생은 1945년 3월 일본 육군기념일에 총궐기하는 거사를 추진하다 사전에 발각돼 단원 전체가 일경에 체포,됐다. 선생은 모진 옥고 끝에 광복 다음날인 1945년 8월16일 출옥했다. 정부는 1999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유족은 부인 임계임씨와 2남2녀. 빈소 대구 효심병원. 발인 16일 오전 7시.장지 대전국립묘지 053-746-9302
문화일보 2004-04-15 11:17
2002년] 동티모르 대선투표 종료, 투표율 86% 21세기 최초 독립국가 탄생을 앞둔 동티모르의 초대 대통령 선거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며 14일 오후 4시(현지시간)에 마감됐다. 카를로스 발레주엘라 선거위원장은 유권자 44만명 가운데 86.3%가 투표했다면서"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번 투표가 최고 투표율로 간주될 것"이라고 말했다. 발레주엘라 위원장은 또 282개 투표소 가운데 단지 한 곳에서만 경미한 폭력사태가 벌어졌다고 덧붙였다. 동티모르과도행정기구(UNTAET) 세르지오 비에이라 데 멜로 수석 행정관은 이번 선거를 "진정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찬사를 보내면서 "이번 투표는 새천년 새국가 탄생을 축복하기에 앞서 마지막 중요 단계"라고 말했다. 당선자 윤곽은 15일 오후께 밝혀질 것으로 보이며 최종 공식 집계 결과는 오는 21일 발표된다. 그러나 독립 영웅 사나나 구스마오와 사비에르 도 아마랄(65) 티모르사회민주연합(ASDT) 총재가 출마한 이번 선거에서 후보자 전력과 최근 여론 등으로 미뤄 구스마오가 80% 정도의 득표율로 압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구스마오와 아마랄은 이날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수도 딜리에 설치된 투표장에 나와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으며 투표에 앞서 서로 포옹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유권자들도 향후 5년 간 신생 독립 국가를 이끌 지도자 선출을 위한 권한 행사를 남보다 빨리 행사하려는 듯 이날 오전 5-6시부터 주거지 인근 학교 등에 마련된 투표소로 몰려들었다. 한편 투표장에는 2천여 외국인 및 현지 감시단이 투표상황을 감시했다. 유럽연합(EU) 감시단 대표인 존 보위스는 "현지 직원들이 딜리 투표장 안팎에서 매우 잘 대처했다"고 평했다. (자카르타 AP.AFP/연합뉴스) /한겨레 2002-04-14
2002 - 하누치, 마라톤 세계기록 수립
할리드 하누치 /조선
하누치, 마라톤 세계기록 수립
남자마라톤 세계기록이 2년6개월 만에 깨졌다. 모로코 출신의 할리드 하누치가 2002년 4월 14일 벌어진 영국 런던마라톤에서 우승하며 2시간5분38초를 기록, 지난 99년 미국 시카고마라톤에서 자신이 세웠던 종전 기록을 4초 단축했다.
크로스컨트리, 1만m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모로코 육상연맹이 다른 선수와 차별하는 데 불만을 품고 1993년 조국과 결별했다. 미국 식당에서 접시를 닦아 생활하며 달리기를 계속했다.
그러다 만난 도미니카 출신의 이혼녀 산드라와 1996년 결혼하면서 그의 마라톤 인생은 꽃이 피기 시작했다. 하누치는 마라톤 선수였던 산드라의 도움을 받아 체계적인 훈련을 한 지 1년 만인 1997년에 미국 시카고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기록은 2시간7분10초로 그해 세계 최고기록이었다. 1999년 같은 대회에서 2시간5분42초로 호나우두 다 코스타의 종전기록(2시간6분5초)을 23초나 단축하며 세계 최고기록을 작성했다. 마라토너로 성공한 것은 아내와 미국의 팬, 후원자 덕분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1998년 귀화 신청을 했지만 이민 절차 지연으로 시민권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2000년 5월 시민권을 받았다. /조선
2001 - 일본 적군파 해산 공식 선언
시게노부 후사코 /조선
일본 적군파 해산 공식 선언
일본의 극좌 게릴라 조직 `적군`의 지도자 시게노부 후사코(55·살인미수로 기소 중)가 2001년 4월 14일 지지자들에 보낸 옥중 성명을 통해 적군파의 해산을 선언했다.
중동을 무대로 테러활동을 벌이다 2000년 11월 일본 오사카에서 체포된 시게노부는 이날 도쿄의 지지자 집회에서 공개된 성명을 통해 “국제주의와 군사를 특성으로 했던 일본 적군의 해산을 통해 새로운 투쟁방법에 도전하겠다”며 합법적 활동으로 전환할 방침을 밝혔다.
그는 “세계는 변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투쟁은 불충분했고 잘못됐다”고 말했다. 이로써 1971년 공산 적군파 간부였던 시게노부 등이 해외 혁명거점 확보를 위해 조직했던 적군파는 완전히 활동을 중단했다. /조선
1987년 : 김수환 추기경, 호헌철폐 내용 부활절 메시지에서 발표 1987년 4월 14일 김수환 추기경이 호헌철폐 내용을 부활절 메시지에 담아 발표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날 오전 부활절을 앞두고 발표한 메시지에서 “국민은 있어도 주권은 없고 신문 방송은 있어도 언론은 없으며 국회나 정당은 이름 뿐 이요 힘만 있고 정치는 없는 공허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당시 시국과 관련 “국민의 여망인 민주화가 정략의 도구로 쓰이고 보다 밝은 새 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됐던 헌법 개정의 꿈은 기만과 당리의 술수아래 무참히 깨졌다”고 지적했다. 김 추기경은 또 “오늘의 현실 속에서 정치가 아무리 허무하다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못하며 정의와 진실을 단념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1987 - 한국-벨리즈 국교수립
벨리즈는 한국정부와 1987년 4월 14일 수교하였으며, 멕시코 주재대사가 외교관계업무를 담당한다. 북한과는 1991년 수교하였다. 벨리즈와 한국은 1987년 경제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였고 1987년 총리 에스키벨이 방한하였다. /naver
1986년] 프랑스 작가 보부아르 사망 ← Simone de Beauvoir, Jean-Paul Sartre og Che Guevara. Cuba, 1960
1908. 1. 9 ~ 1986. 4. 14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프랑스 작가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1986년 4월 14일 사망했다. 소르본대에서 수학했으며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1929년 실존주의를 주도한 사르트르(Sartre, Jean-Paul, 1905~1980)와 '계약결혼'을 시작했으며, 1945년부터는 그와 함께 월간지《레탕모데른 Les Temps Modernes》을 편집했다. 그녀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여성해방문학의 고전이라 불리우는《제2의 성(性) Le Deuxième Sexe》(2권, 1949)을 통해 '전통적인 여성상'을 강조한 기존의 관념에 반기를 들었을 때부터였다. 이 책에서 그녀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녀의 또 다른 역작《레 망다랭 Les Mandarins》(1954) 은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본 다양한 철학서적과 평론을 썼으며 프랑스 지식인들의 생활을 분명하게 드러낸 여러 편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조선
1983 - 무기 구형 받은 대도 조세형, 법원에서 탈주
대도 조세형. /조선
- 대도 조세형 탈옥
대도 조세형이 1983년 4월 14일 서울형사지법에서 결심공판을 마치고 구치소로 넘겨지기 직전 다른 피고인들이 재판을 받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구치감벽의 환풍기통을 뜯고 탈주했다. 조씨는 당시 공범 4명을 포함한 다른 사건 피고인 15명과 함께 재판을 받은 뒤 법정에서 20km 가량 떨어진 서울구치소 피고인 대기 구치감으로 가 3층에 다른 피고인 3명과 함께 입감됐다.
조씨는 교도관이 잠시 2층으로 내려간 사이 문을 차고 밖으로 나와 한쪽 수갑과 포승줄을 푼 뒤 복도벽에 붙은 환풍기를 뜯고 붙어있던 2층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려 달아났다. 탈주 당시 조씨는 형사법정 대기실에서 교도관에게 손목의 통증을 호소, 수갑을 느슨하게 해준 것을 이용해 구치감에서 왼손을 빼냈고, 포승줄도 풀 수 있었다.
조씨는 탈주 5일 만인 4월 19일 서울 장충동 민가에서 시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의 총을 맞고 검거됐다. 검거된 조세형은 청송교도소 1평짜리 감옥에서 15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던 중 1998년 11월 16년 만에 석방됐다. /조선
1983년 : 여의도 광장에서 귀순 이웅평씨 환영대회 열려 미그 19기를 몰고 귀순한 전 북한 공군 대위 이웅평씨의 환영대회가 1983년 4월 14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다. 비가 내리는 궃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의도 광장에는 130만여 시민들 운집했다. 이날 환영대회에서 이웅평씨에게 주민등록증과 정착 보상금이 전달됐다. 북한에서 김책공군대학을 졸업하고 인민군 1비행사단 책임비행사였던 이웅평씨는 1983년 2월 25일 미그 19기를 몰고 귀순했다. 한국 공군에서 군 생활을 이어가다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공군대학 정책연구원으로 활동하다 2002년 5월 4일 사망했다.
1983년 : 제 1회 천하장사씨름대회 열려 제 1회 천하장사씨름대회가 1983년 4월 14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당시 상금은 우승자인 천하장사 1천500만원, 준우승 1천만 원, 3위 750만 원 등 국내 단일경기사상 최고액이었다. 1983년 첫 대회 후 2004년 마지막 대회까지 총 42회의 대회가 열렸고 모든 경기는 KBS에서 생중계 했다. 천하장사 씨름대회는 민속씨름의 황금기를 열어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으며 이만기, 이봉걸, 강호동 선수 등 스타플레이어를 배출했다.
대한민국에서 제1회 천하 장사 씨름 대회가 열렸다.
천하장사 씨름대회(天下壯士씨름大會)는 한국씨름연맹에서 주최하는 프로 씨름대회이다. 제5공화국의 스포츠 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1983년 첫 대회가 열린 후 2004년 마지막 대회까지 총 42회의 대회가 열렸다. 모든 경기는 KBS에서 생중계 방송하였다.
2005년부터는 체급별 장사 대회만 치러졌다. 프로팀의 해체가 가속화되어 실업팀, 지자체팀을 받아들여 민속씨름대회로 이어나갔다. 그러나 한국씨름연맹과 대한씨름협회의 불협화음으로 KBS 방송 중계가 중단되고, 대회 운영도 어렵게 되었다. 현재는 대한씨름협회 민속씨름위원회가 주관하는 민속씨름위원회 전국장사씨름대회로 운영되고 있다. 역시 체급별 장사 대회만 치러진다.
* 경기일 1983년 4월 17일
* 천하장사 이만기
* 경기장 서울 장충체육관
체급 /위키백과
어제의 오늘]1983년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ㆍ무명 이만기 첫 천하장사 등극
1980년대만 해도 씨름은 전 국민에게 인기가 높은 스포츠였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제5공화국이 스포츠장려정책의 일환으로 씨름을 포함시킨 것도 그 때문이다. 83년 4월14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막한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에는 당시 아마 씨름계의 정상급이던 홍현욱, 이준희, 이봉걸과 대학 유망주인 장지영, 황영호 등 전국 방방곡곡에서 320명의 역사가 총집결했다. 씨름계의 별들이 모이자 관중도 구름처럼 몰렸다. 첫날에만 무려 1만5000명이 장충체육관을 가득 메웠다. 대회 나흘간 총 2만7000명이 모래판에서 밭다리치기, 호미걸이, 들배지기, 들어잡채기 등 기술과 팽팽한 힘이 빚어내는 드라마에 열광적인 응원을 보냈다. 당시 경기는 TV로도 중계됐는데 마지막 경기 때에는 시청률이 61%를 기록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한국-우루과이의 16강전 시청률이 47.5%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 뜨거운 열기를 가늠할 수 있다. 이 대회의 첫 우승자는 당시 경남대 2학년이던 스무살의 무명선수, 이만기였다. 씨름계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던 이준희와 홍현욱을 꺾은 그는 결승에서 ‘모래판의 여우’로 불리던 최욱진에 맞서 접전을 벌였다. 이만기가 배지기로 최욱진을 메다꽂는 순간 장충체육관의 관중은 모두 일어나 체육관이 떠나갈 듯한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단상에서는 국악인들이 우리 민요를, 단 아래에서는 농악단이 한마당 자지러지는 굿판으로 천하장사의 탄생을 축하했다. 이 대회를 통해 이만기는 명예와 돈을 함께 거머쥔 대중의 스타로 급부상했다. 배 나온 장사들이 겨루는 ‘힘의 씨름’은 명민한 그에 의해 날렵한 ‘기술의 씨름’으로 흐름이 바뀌었다. 당시 이만기는 천하장사 상금으로 1500만원과 한라장사 2위 상금인 200만원 등 1700만원과 70㎏짜리 대형 은컵을 안았다. 대중들은 강남의 고급 아파트를 사고도 남는 이 거액을 젊은 천하장사가 어떻게 쓸지에 대해서도 꽤 궁금해했다. 어린 꼬마들은 ‘제2의 이만기’를 꿈꾸면서 초등학교 한쪽의 모래판에서 친구들과 씨름을 벌이기도 했다. 프로야구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총 42회가 열린 천하장사 씨름대회는 그러나 이후 씨름계의 내분과 기술 대신 힘만 쓰는 재미없는 경기라는 평가와 함께 점점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2004년을 마지막으로 천하장사 씨름대회는 막을 내렸고, 2005년부터는 체급별 장사대회만 열리고 있다. 최민영 기자 min@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4-13 21:17:19
1980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1905 - 1980 ] 사망,
*프랑스 철학자·작가. 파리 출생. 중산계급 가정에서 자랐고, 제 2 차세계대전 후에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종합을 시도하여 세계적인 영향을 끼친 지식인이다. 어렸을 때 오른쪽 눈을 거의 실명하였고 이것이 말년에 불행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고등사범학교시절에 S. 보부아르와 알게 되어 평생 동안 동지적 사랑으로 맺어졌다. 1931년부터 르아브르의 고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33년∼34년까지 베를린에 유학하여 E.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했다. 거기에서 생겨난 것이 《상상력(1936)》 《자아의 초월(1937)》 《상상력의 문제(1940)》 등의 철학논문들인데, 사르트르사상의 기틀은 이때 만들어졌다. 이들 철학논문을 집필하는 한편 장편소설 《구토(1938)》를 발표하고, 철학이 뒷받침된 대담한 주제로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당시의 사르트르는 의식의 자유를 밑바닥에 깔고 인간의 자유를 추구했는데 그것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것이 《존재와 무(1943)》이다. 제 2 차세계대전중 소집되어 포로가 되었고, 독일 수용소에 수감되었는데 병이라고 속이고 석방되어 파리로 돌아왔다. 독일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조직을 만들려고 시도했으나 별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종전을 맞았다. 그 동안에 희곡 《파리(1943)》 《출구없는 방(1944)》 등이 상연되면서 극작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전후, 잡지 《레 탕 모데른(현대)》에 모인 그룹의 리더로서 전투적 휴머니즘 입장에서 활발한 발언을 전개하였다. 그의 존재는 전후 혼란기의 젊은이들에게 강렬한 영향을 주었다. 그 뒤의 활동을 4기로 나누어 보면 다음가 같다. [1945∼50년] -제 1 기는 《존재와 무》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로부터 <사회참여문학>을 제창한 시기이다. 당시는 미·소의 심한 대립이 세계의 정치상황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는 <제 3 의 길>을 모색하여 <혁명적 민주연합>이라는 운동에 적극 참가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행동은 거의 무효로 끝났다. 그 무렵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던 장편소설 《자유를 위한 길(1945∼49)》이 미완성으로 끝난 것은 이 때문이다. [50∼55년] -제 2 기에 들어서자 <제 3 의 길>을 완전히 버리고 긴 논문 《공산주의자와 평화(1952∼54)》를 쓴 뒤부터 공산당의 동반자가 되었고 반전·평화운동에 참가하였다. 한편 문학적으로는 작품에서 직접적 유효성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에서 더 깊은 가치를 탐구하여, 그 결과로서 대작 《성(聖) 주네론(1952)》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전후 한때 서로 협력하였던 A. 카뮈와는 반항 및 역사를 둘러싼 논쟁이 계기가 되어 결별하였다. [56∼60년] -제 3 기에 들어서자 다시 한번 변신과 비약을 한다. 그 계기가 된 것은 1956년 소련공산당의 스탈린비판과 헝가리의거 및 1954∼62년의 알제리독립전쟁이었다. 그는 그때마다 자기 입장을 밝혔는데 그의 태도표명은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만큼 전후 가장 저명한 지식인으로서 그의 명성은 흔들릴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특히 그가 식민지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지지한 것은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에게는 강력한 자기편을 얻은 것을 의미했을 뿐만 아니라 <제 3 세계>의 중요성을 인식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공산당 정책과는 부합되지 않는 것이었으나 그 반면에 사상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받아들여 실존주의로서 그것을 보완하려고 하였다. 거기에서 태어난 것이 구조적·역사적 인간을 목표로 한 《변증법적 이성비판(1960)》이다. 그러나 이것은 제 1 권만 간행한 채 중단되었고 그 영향력도 완전히 발휘되지 못하고 끝났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에는 《알토나의 유폐자들(1959)》이 있다. 64년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의 지명을 받았으나 노벨문학상의 정치적 편향을 이유로 거부하였다. [60년대 후반 이후] -1960년대 후반에 세계적 규모로 일어난 학생운동, 특히 68년 프랑스의 <5월 혁명>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전부터 써왔던 방대한 플로베르론인 《우리집의 바보자식(1·2권 1971, 3권 1972)》을 발표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영향받은 조직, 마오파를 지원하고 발행금지와 압수가 계속되는 그 기관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편집장을 맡거나 그 신문을 길에서 배포하기도 하여 종래의 지식인으로서의 행동에서 조금 탈피하는 자세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쇠약하였고 하나 남은 왼쪽 눈도 73년 이후 거의 실명상태가 되어 독서나 집필활동은 거의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집의 바보자식》 제 4 권도 이러한 관계로 쓰지 못했다. 80년 4월 15일 그의 죽음은 프랑스 신문들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장례식날에는 수만의 군중이 자발적으로 그의 영구 뒤를 따랐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오늘의 지식인 사르트르냐 아롱이냐-韓佛공저 ‘프랑스 지식인들과 한국전쟁]’ -1950년 6·25전쟁은 프랑스 지식인들의 현실참여 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덕적 열정으로 무장한채 지식인의 현실참여를 실존적 화두로 밀고간 사르트르,냉정한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방관자적 참여를 견지한 아롱의 태도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역사는 다시 묻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지식인의 현실참여 모델로 받아들여지는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그와 가장 가까운 이념적 동지였던 모리스 메를로퐁티(1908∼1961), 그들과 함께 ‘앙가주망’(참여)을 표방하며 1945년 10월에 창간된 ‘현대’지에 동인으로 참여했던 레이몽 아롱(1905∼1983). 한때 지식인의 현실참여를 모토로 한 배를 탔던 이들이 갈라선 배경에는 1950년 6월25일 프랑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발발한 전쟁이 놓여 있었다. 6·25전쟁이 프랑스 지식인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분석하면서 요즘 현실참여 목소리를 높이는 한국 지식인사회에 냉정한 성찰을 요구하는 책이 출간됐다. 정명환 가톨릭대 대우교수와 장 프랑수아 시리넬리 파리국립정치대 교수 등의 공저로 출간된 ‘프랑스 지식인들과 한국전쟁’(민음사). 프랑스 지식인 사이의 이념논쟁 과정에서 6·25전쟁이 간헐적으로 언급되기는 했지만 이를 본격 조명하기는 이 책이 처음이다. 저자들은 한국의 해방공간에서 극심한 좌우대립이 벌어졌듯이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지식인사회도 친공(親共)과 반공(反共)의 선택을 놓고 극심한 분열상을 드러냈다고 설명한다. 그 와중에서 사르트르가 자신의 자리를 ‘메를로퐁티의 오른쪽, 카뮈의 왼쪽’이라고 술회할 만큼 메를로퐁티는 사르트르보다 더 좌익에 기울어 있었다. 메를로퐁티는 사르트르의 고등사범학교 후배로 두 사람은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함께 대독(對獨) 투쟁을 벌이며 가까워졌고 ‘현대’지를 창간할 때 공동편집자로 나서며 정신적 동지가 된다.
그러나 6·25전쟁은 둘의 관계를 바꿔놓았다. 사르트르는 처음에는 한국전쟁이 ‘남한에 의한 북침’이라는 프랑스공산당의 의견을 따랐고 나중에는 “북한이 남한과 미국의 계략에 빠져 남한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북한을 사주해 남한을 침공한 스탈린의 유죄를 인정하면서 반공주의자로 전향한다. 1953년 사르트르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현대’지에 게재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둘은 결별한다. 사르트르와 고등사범학교 동기이자 군복무를 함께 했던 레이몽 아롱은 서로가 서로를 지적으로 단련시키는 ‘특권적인 대화상대자’로 여길 만큼 절친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 차로 1947년 아롱은 사르트르와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아롱은 6·25가 발발하자 “북한의 군대가 남한을 침략한 것은 2차대전 이후 일어난 가장 중대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이 전쟁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계획 아래 이뤄진 남침임을 거듭 강조했다. 아롱과 사르트르의 결별은 6·25 전에 이뤄졌지만 6·25를 기점으로 사르트르는 공산주의와 구소련에 더 가까워지게 되고 아롱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 쪽으로 더욱 경사된다. 이 책은 억압당한 계급과의 협력을 통해 계급 없는 사회의 도래에 지식인이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는 사르트르의 참여를 ‘혁명적 유토피아’로, 정치적 현실과 도덕적 요청을 엄격하게 구별하면서 평생 참여하는 방관자로 일관한 아롱의 참여를 ‘비판적 현실주의자’로 각각 규정하고 있다. 대표집필을 맡은 정명환 교수는 “사르트르의 현실참여가 도덕적 동기에 의해 촉발된 뜨거운 열정의 산물이었다면 아롱은 현실과 냉정한 거리를 둔 ‘방관자적 참여’를 고수했다”면서 “한국의 지식인들이 사르트르의 환상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반추하고, 아롱의 공산체제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되새겨 타산지석의 지혜를 얻기 바란다”고 밝혔다.(동아일보[2004/04/07 권재현기자 donga.com )
1979 정효주양 두번째 유괴
우리나라의 수많은 어린이 유괴사건 중 정효주(鄭效朱) 사건만큼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오랫동안 기억된 것도 없을 것이다. 대통령(朴正熙)이 직접 나서 “효주양을 살려만 보내주면 선처해 주겠다”고 범인에게 호소할 정도였다. 물론 이는 전례(前例)가 없었던 일이었다. 효주양 유괴사건이 오랫동안 기억되는 이유는 당시 부산의 국민학생이자, 한 회사 사장의 외동딸이던 그녀가 두 번씩이나 유괴되었다가 살아서 돌아온 까닭이었다.
사건은 이랬다. 1978년 9월 15일 정효주는 학교 앞에서 유괴되어 33일 동안 끌려 다니다가 풀려났다. 범인은 매석환이라는 남자였다. 그런데 정효주는 첫 번째 유괴에서 풀려난 지 1백78일만인 1979년 4월 14일 아침 등교길에서 또다른 유괴범에게 승용차로 납치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유괴였다. 범인은 효주의 부모에게 1억5천만원을 요구하면서 효주의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는 등 협박을 계속했다.
효주양을 살려내라는 각계의 성명과 호소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각계의 성명(聲明)과 호소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사건 4일 만인 4월 18일, 대통령까지 효주를 돌려달라는 담화문을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날 밤 조선일보 울산(蔚山)주재 최진환(崔震煥) 기자는 전녁을 먹은 뒤 울산경찰서에 들렀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 체크하러 간 길이었다. “아는 그날 동아일보 기자와 술을 한 잔 먹고 나서 경찰서로 들어갔는데, 마침 당직사령이 우리 신문사가 주최한 청룡봉사상을 탄, 나에게 평소부터 호감을 보여주던 사람이었어요. 그 당시 나는 CBS(기독교방송) PD를 하다 조선일보로 옮기면서 울산주재로 간 지가 1년쯤 될 때였는데, 기자로서는 초년병이었기 때문에 그 지역 토박이 주재기자들에게 계속 물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저 죽자살자하는 수밖엔 없다고 보고 매일 밤늦게까지 경찰서를 열심히 돌았는데, 그날도 그런 날 중의 하나였어요. 다른 기자들은 밤에는 거의 경찰서를 체크하지 않았습니다. 당직사령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밤 10시반~11시쯤 되었는데,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들어오면서 ‘효주를 찾았다’고 소리치는 게 아닙니까.”
한 울산지역 검문소의 경찰관이, 한 픽업 운전사가 잔디밭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물으니 “내가 효주예요”라고 하길 래 검문소까지 태워왔다면서 효주의 손을 잡고 들어온 것이었다. 볼 것도 없었다. 최기자는 그 자리에서 효주를 직접 인터뷰했고, 효주 생환에 대한 자세한 과정을 담은 대특종을 낚을 수 있었다. 당시 최기자가 송고한 4월 19일자 사회면 톱은 ‘효주양 찾았다’였다.
「효주양이 살아서 돌아왔다. 효주양은 납치 4일 만인 18일 오후 9시 30분쯤 동대구 경부고속도로 진입로에서 범인의 손에서 풀려나, 대구에서 포항방면으로 운행하던 한 픽업 운전사에 의해 픽업돼 경찰에 인계됐다. (중략) 당시 효주양은 오른쪽 팔목에 노란 나일론끈이 묶여 있었고, 아래 위에 남성국교 마크가 새겨진 청색 체육복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가 헝클어졌으나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다…」
“내가 인터뷰를 하고 있으니 경찰서장과 당직사령이 ‘아직 보고도 되지 않았다. 기사 쓰지 말라’고 제지를 해요. 그래서 나는 기사 뺐기지 않으려고 경찰서 담을 넘어 도망갔지요. 그때 옷이 찢어 졌는데 나중에 방우영(方又榮) 사장이 초년기자가 옷까지 찢으면서 특종을 했다고 양복 한 벌 값을 내려보냈는데, 그걸로 울산에서 제일 좋은 양복점에 가서 옷을 맞춰입었습니다.”
또 정효주가 1차로 유괴되었을 때 조선일보 시회부장이었던 안종익(安鍾益)은 “효주양 1차 유괴의 범인인 매석환이 잡혔을 때 그가 바로 4?19직후 청와대 경찰서장으로 있던 곽영주(郭永周?나중에 4?19발포명령자로 사형)의 아들 유괴범이자 위조지폐사건의 범인이었던 그 매석환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고 두 사건을 연결지어 크게 보도했던 기억이 새롭다”고 회상했다.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당시 모습
세종문화회관이 1978년 4월 14일 개관됐다. 불타버린 시민회관 자리에 1974년 착공해 4년 만이었다. 2백21억원의 공사비에 대지 5천6백평 지하3층 지상6층의 건물이었다. 4천2백석의 초대형 대강당은 1백만달러짜리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됐고 무대는 5백평이 넘는 회전식이었다. 건축양식은 한국의 옛 건축양식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변용하여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갖도록 하였다. 그러나, 화려한 외관과는 달리 서울특별시의 운영으로 ‘‘관료주의적인 운영이다.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던 중 1999년 7월1일 재정은 서울시가 지원하고 운영은 시가 아닌 민간이 책임지는 체제인 ‘재단법인 세종문화회관’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이는 세종문화회관 관장직이 ‘구청장 대기소’라고 불릴 정도로 예술과는 무관한 공무원으로 자주 교체되어 전문적인 기획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관주도 행사 위주로 운영되어 시민의 문화공간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평을 들었기 때문이다. /조선
1977년 : 제주-부산 카페리호 취항 우리나라 최초의 제주-부산 간 카페리호 취항식이 1977년 4월 14일 제주 연안 여객터미널에서 거행됐다. 취항식에는 교통부장관을 비롯해 국회교육위원장, 항만청장 및 제주지사와 제주도민 1천여 명이 참석했다. 이 카페리호는 동양고속 페리주식회사가 일본에서 당시 12억 원을 주고 도입한 3천875톤급 여객선으로 여객 578명, 승용차 100대, 트럭 45대, 컨테이너 25개를 동시에 적재하고 부산-제주 간을 10시간에 운항하는 전천후 쾌속 여객선이었다.
1970 호남고속도로 기공
정부의 간선도로망 구축계획에 따라 건설된 이 고속도로는 1차, 2차로 나눠 건설되었다. 1차인 대전∼전주 간 79.5㎞ 구간을 국내 기술과 국내 자본으로 1970년 4월 15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같은해 12월 30일에 완공·개통하였다. 2차 구간인 전주∼순천 간 172.3㎞ 구간은 IBRD 차관과 국내 재원을 이용하여 1972년 1월에 착공하여 1973년 11월 14일 전 구간이 완공·개통되었다. 같은 날 남해고속도로(고속국도 10)의 부산∼순천 간 176.5㎞ 구간도 개통되었다. 개통 초기에는 중앙분리대가 없는 너비 10.7∼13.2m인 왕복2차선으로 건설하였으나 1983년 4월부터 1985년 9월까지 회덕∼논산 간 48.5㎞ 구간, 1984년 5월부터 1986년 9월까지 논산∼광주 간 122.2㎞, 1987년 3월부터 1989년 8월까지 광주∼고서 간 9.9㎞, 1992년 11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고서∼순천 간 71.9㎞ 구간이 너비 23.4m로 확장, 개통되면서 전체 구간이 왕복4차선이 되었다. 인터체인지 21개소, 분기점 2개소(대덕·고서·장성·익산·논산), 휴게소 11개소, 100m 이상의 장대교(長大橋) 18개소, 영업소 23개소 등이 있다.
1967년 :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국내 발효 1967년 4월 14일 ‘관세 및 무역에 관란 일반협정(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이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효력이 발생했다. 우리나라는 효력이 발생하기 전 4월 1일 정회원국이 됐다. GATT는 관세장벽과 수출입 제한을 제거하고, 국제무역과 물자교류를 증진시키기 위해 1947년 제네바에서 미국을 비롯한 23개국이 조인한 국제적인 무역협정이다. 현재 120여개국가가 이 협정에 가입돼 있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국내에서 발효
우리나라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가입이 1967년 4월 14일부터 정식으로 효력이 발생, 우리나라는 72번째의 GATT 가입국이 됐다. 이에 따라 11일 재무부는 체코 유고슬라비아 쿠바 등 공산국가를 제외한 68개 가트 가입국과 우리나라와 별도의 무역협정을 맺은 자유중국 태국 비올빈 월남 캄보디아 5개국 등 총73개국에 대해 이날부터 최혜국 대우를 하고 가트 가입때 양허한 수입품목에 양허세율을 적용하도록 지시했다.
양허세율이 적용될 대상품목은 모두 60개품목인데 그중 17개 품목은 14일부터 세율을 인하하고, 41개품목은 현행세율 그대로 두기로했으며 2개품목은 세율의 인상한계를 미리 정해놓도록 했다. /조선
1966년] ‘한국의 쿠베르탱’ 이상백 박사 별세 ← 민족시인 이상화씨의 동생으로 ‘한국의 쿠베르탱’으로 불렸던 이상백 박사.
우리나라 체육계의 선구자이자 한국 사회학의 개척자였던 이상백 선생이 1966년 4월 14일 별세했다. 해방 직후 조선체육동지회를 창설해 초대 위원장을 지낸 그는 1946년 조선체육회이사장, 1951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제2대 IOC위원을 역임하며 한국체육의 발전을 주도해 ‘한국의 쿠베르탱’으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제15∼18회 올림픽대회에 한국대표단의 단장 또는 임원으로 잇달아 참석하며 특유의 ‘인물외교’를 통해 한국체육의 국제화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1903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1924년 와세다대 사회철학과에 입학했으며 일본농구협회를 결성(1930년)하면서 일본에 농구를 처음으로 보급해 ‘일본 농구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그는 해방 후 서울대 문리대 교수·사회학과 주임·박물관장을 역임하면서 사회학의 기틀을 세웠으며 조선왕조사 연구에 남다른 발자취를 남겼다.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동생이기도 하다. 이 박사는 1964년 대한 올림픽위원회 위원장과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어 평생을 체육인이며 학자로 보내다 이날 별세했다. 문화체육부는 이상백 박사를 1994년 ‘6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조선
1963 한국 독립운동가 민필호 사망 여흥 민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911년 상하이로 유학한 뒤, 박달학원(博達學院), 체신학교를 수학했다. 1912년 신규식의 동제사에 가담하여 일찌감치 독립 운동을 시작했다. 이어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9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신규식(임시정부 법무총장, 국무총리)의 비서로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그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다. 1923년부터는 이시영(임시정부 재무총장)의 비서를 맡아 13년간 근무하였고, 1924년에는 한인 교민단(韓人僑民團) 이사회의 학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임시정부 임시 의정원 의원을 지내며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을 맡기도 했다. 이때 《독립신문》을 발간하는데 참여하였고, 임시정부 외무차장 겸 판공실장(辦公室長)으로서 중국정부와 협의하여 무장경위대를 편성하도록 하였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판공실장도 역임하여 김구의 비서로도 불린다. 중국어에 능통했던 민필호는 광복 후에도 바로 귀국하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의 귀국을 주도하면서 계속 중국에 머물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의 부단장, 주화대표단 단장서리를 지내며, 교포 교육과 보호에 힘썼다. 1948년 중국 국민당 정부와 함께 대만(臺灣)으로 건너갔다가 1956년 귀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았고, 독립기념관에는 망국의 통한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저서로 《한중외교사화》가 있으며, 신규식의 《한국혼》을 중국어로 번역해 펴내기도 했다. 그와 신규식의 활동을 함께 다룬 연구서 《신규식·민필호와 한중관계》(나남출판사, 2003)가 나와 있다. 아들인 민영수와 장녀 민영주, 맏사위 김준엽, 둘째 사위인 이윤철(임시정부 국무위원 이광의 아들)은 모두 광복군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들이다.
1962년] 드브레 프랑스 내각 총사퇴. 후임에 퐁피두 수상 드브레(Debré, Michel, 1912~1996)는 해방 후 드골 장군을 만나 1945년 드골 임시정부에서 활약하다가 1948년 상원의원이 되었다. 일찍이 제4공화정에 대한 반대 진영으로 알려졌으며, 1958년의 드골 복권을 위하여 열심히 활동하였다. 제5공화정 헌법 기초의 중심인물이고 1959∼1962년 제5공화정 초대수상이 되었으며, 1966∼1969년 재무장관·외무장관 등을 역임했다. 1969년 6월 개방정책을 들고 나선 G. 퐁피두 대통령 때 순수·강경파 드골주의의 제동적 존재로 국방장관에 취임하였다. 1972∼1973년 P. 메스멜내각에서도 유임되었다. /yahoo
1961 재일교포북송[在日僑胞北送] 재개 ,
*[재일교포북송] -북한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협정에 따라 1959년 이후 재일본조선인연합회(조총련)계 재일교포들이 북한에 송환된 사건. 1955년 2월 북한은 6·25에 따른 노동력 부족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재일교포의 귀환 추진과 귀환시 이들의 생활을 책임질 것을 대내외에 공식 천명했다. 일본은 이에 호응, 58년 각 정당의 거물급 인사들이 망라된 재일조선인귀국협력회가 결성되는 등 재일교포북송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마침내 59년 8월 13일 북한과 일본은 인도 캘커타에서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에 정식 조인했다. 같은 해 12월 14일 975명의 제 1 진이 니가타항[新潟港]을 출발한 이후 협정 만료시한인 62년 11월 12일까지 7만 7288명의 재일교포가 북송되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일본인 아내의 수도 적지 않았다. 그 뒤 양측은 협정 연장에 합의, 계속 재일교포 북송을 추진했지만 북송교포의 비참한 생활이 알려지자 그 수가 급격히 줄어 사실상 종결상태이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1949 지방자치법 국회 통과
1949년 법률 제32호로 제정되었다. 지방자치단체의 종류는 특별시와 광역시 및 도,특별자치도, 시와 군 및 구로 정하되, 특정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별도의 특별지방자치단체를 설치할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는 법인으로 한다. 특별시와 광역시, 도 및 특별자치도는 정부의 직할하에 두고, 시는 도의 관할구역 안에, 군은 광역시 또는 도의 관할구역 안에 두며, 자치구는 특별시와 광역시의 관할구역 안에 둔다. 특별시 또는 광역시가 아닌 인구 50만 이상의 시에는 자치구가 아닌 구를 둘 수 있고, 군에는 읍·면을 두며, 시와 구에는 동을, 읍·면에는 리를 둔다. 시에는 도시의 형태를 갖춘 지역에는 동을, 그 밖의 지역에는 읍·면을 두되, 자치구가 아닌 구에는 읍·면·동을 둘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를 폐치·분합하거나 명칭 또는 구역을 변경할 때에는 관계 지방자치단체 지방의회의 의견을 들어야 하고, 자치구가 아닌 구와 읍·면·동의 명칭과 구역을 폐치분합할 경우에는 그 지자체의 조례로 정한다. 구역을 변경하거나 폐치·분합한 때에는 새로 그 지역을 관할하게 된 지방자치단체가 사무와 재산을 승계한다. 시는 그 대부분이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인구는 5만 이상이어야 하며, 일정한 지역은 도농복합 형태의 시로 할 수 있다. 읍은 그 대부분이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인구 2만 이상이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는 주민의 편의와 복리를 증진시키고, 조직 및 운영을 합리화하는 데 노력하여야 한다. 법령이나 상급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위반하여 사무를 처리할 수 없으며, 관할구역의 자치사무와 법령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에 속하는 사무를 처리한다. 외교·국방·사법 등 국가의 존립에 필요하거나 물가정책 등 전국적으로 통일된 처리를 요하는 사무 등은 처리할 수 없다. 주민의 자격은 지방자치단체의 구역 안에 주소를 가진 자로 정한다. 지방자치단체장은 주민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거나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주요 결정사항 등에 대하여 주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 19세 이상의 주민은 일정한 기준에 따라 조례의 제정 또는 개폐, 감사를 청구할 수 있고, 주민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는 법령의 범위 안에서 조례를 제정할 수 있되, 주민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과하는 사항 또는 벌칙을 정할 때에는 법률의 위임이 있어야 한다. 시·군 및 자치구의 조례나 규칙은 특별시·광역시 및 도의 조례나 규칙을 위반해서는 안 된다. 이밖에 지방의회, 집행기관, 재무, 지방자치단체 상호간의 관계, 국가의 지도·감독, 서울특별시 등 대도시와 제주특별자치도의 행정의 특례에 대한 규정 등이 있다. 10장으로 나누어진 전문 175조와 부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행령이 있다.
1939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출간,
1939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 Steinbeck, John Ernst, 1902.2.27-1968.12.20 ], `분노의 포도" 출간,
*1933년부터 3년간 미 중서부 지역을 휩쓴 가뭄과 농업의 기계화로 지주와 은행의 빚독촉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고향 오클라호마를 떠나 8000리나 떨어진 풍요의 땅 캘리포니아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 어렵게 도착한 풍요의 땅에는 풍요의 상징인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지만 그 풍요는 지주들의 몫일 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전한 배고픔과 노동착취 뿐이었다. 홍수까지 겹치자 참상은 극에 달한다. 1939년 3월14일, 존 스타인벡의 대표소설 ‘분노의 포도(Grapes of Wrath)’가 출간됐다. 스타인벡은 이주민들의 분노가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있다고 해서 제목을 ‘분노의 포도’로 정했지만 이 표현은 성서 요한묵시록 제14장 19절에 나오는 말이다. 스타인벡은 이주민촌에서 직접 노동을 체험한 뒤 그들에 대한 연민과 현실에 대한 분노를 소설에 담아냈다. 농장주들은 ‘검은 악마적 창조물’ ‘증오를 주제로 한 파괴적인 책’이라며 소설을 맹비난했고, 도서관에서는 금서목록에 올렸다. 스타인벡은 이주민들의 참상을 증명하는 르포기사를 사진과 함께 라이프지에 실어 반론을 펼쳤다. 극단적인 찬반양론속에서도 초판이 50여만부나 팔려나가 정부가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삶에 대한 인간의 강한 의지를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아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고, 1962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돼 주목을 끌었다.
*[분노의 포도[憤怒-葡萄, The Grapes of Wrath] -미국 작가 J. 스타인벡의 장편소설. 1939년 간행. 1930년대의 경제불황을 배경으로 오클라호마주의 소작지에서 쫓겨나 캘리포니아에 낙원을 꿈꾸며 흘러 들어가는 계절노동자 조드가(家)를 그린 작품이다. 자본주의사회의 모순, 기계문명에 대한 부정, 정치참여, 사회의식의 각성을 담고 있다. 사실(史實)에 바탕을 둔 기록소설로, 큰 반향을 일으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국의 전통적 농본주의에 뿌리를 박은 작품이다. 문명에 등을 돌리고 소박 단순한 원시사회로의 회귀를 바라는 작가의 염원이 상징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1902 노벨문학상(1962년) 수상한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 Steinbeck, John Ernst, 1902.2.27-1968.12.20 ], -미국 캘리포니아주 설리너스에서 출생하였다. 196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른바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을 이은 30년대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그의 작풍은 사회의식이 강렬한 작품과 온화한 휴머니즘이 넘치는 작품으로 대별된다. 군청의 출납관리였던 독일계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정이 어려워 고등학교 시절부터 농장일을 거드는 등 고학으로 스탠퍼드대학교 생물학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1925년 학자금 부족으로 중퇴, 문필생활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뉴욕으로 와서 신문기자가 되었으나, 객관적인 사실보도가 아닌 주관적 기사만 썼기 때문에 해고되어, 갖가지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었다. 육체노동으로 각지를 전전하다가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별장지기를 하면서 처녀작 《황금의 잔》(1929)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영국 해적 헨리 모건을 주인공으로 한 낭만적인 이야기였으나 반향이 없었다. 1930년에 결혼, 가난과 싸우면서 캘리포니아 농민의 이상한 생활을 주제로 한 단편집 《하늘의 목장》(1932)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한 농민의 토지에 대한 신비적인 집착을 다룬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1933)를 발표하였으나 역시 주목을 끌지 못하고, 1935년의 《토르티야 대지(臺地) Tortilla Flat》로 겨우 작가로서의 이름을 얻었다. 이것은 캘리포니아 해안 연변의 마을 몬트리에 사는 파이사노의 생활을 따뜻한 유머와 페이소스를 담아 그린 작품이다. 이듬해 과수원의 파업을 사실적으로 그린 《승부 없는 싸움 In Dubious Battle》(1936)을 쓰고, 이어서 《생쥐와 인간 Of Mice and Men》(1937)의 발표로 그의 명성은 확고한 것이 되었다. 이 작풍은 두 노동자의 우정을 그린 것으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자신이 희곡화하여 영화로도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희곡 비평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38년 그의 소년시절을 그린 뛰어난 단편집 《긴 골짜기 The Long Valley》를 발표하고, 이듬해 대표작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1933)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기계화 농업의 압박으로 농토에서 쫓겨난 이동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변천하는 사회양상과 함께 힘차게 그린 이 작품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결함을 고발하며 깊은 감명을 주었으나, 그의 모든 작품의 저변에 흐르는 인간의 선의와 인류의 운명에 대한 신비로운 신뢰가 그 비판을 중화하는 결과가 되었다. 작품구성 면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엿보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작품으로서, 그는 이 작품으로 1930년대의 대표적인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후 그의 관심이 처음으로 캘리포니아를 떠나 국외로 향해졌다는 점에서 흥미 있는 《달이 지다 The Moon is Down》(1942)가 출판되고, 해외여행에서 귀국한 뒤 《통조림 골목 Cannery Row》(1944), 풍속 소설 《변덕스런 버스 The Wayward Bus》(1947), 멕시코 민화 《진주(眞珠) The Pearl》(1947), 공상적인 희곡 《벌겋게 타오르다 Burning Bright》(1950) 등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에덴의 동쪽 East of Eden》(1952)이 발표되었는데, 이것은 《분노의 포도》 이래의 대작으로, 그가 전력을 기울이고, 남북전쟁에서 제l차 세계대전까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에덴 동산을 찾아 미래를 꿈꾸는 자들의 이야기로서, 처음으로 그의 가계도 언급한 야심작이다. 이 밖에도 《통조림 골목》의 속편인 《즐거운 목요일》(1954) 《피핀 4세의 짧은 치세》(1957) 등 가벼운 기지가 넘치는 작품이 발표되었다. 1961년에 발표된 《우리 불만의 겨울 The Winter of Our Discontent》은, 그가 한때 상실하였던 사회와의 연대감 회복이라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대표작:
*[에덴의 동쪽East of Eden] -작자의 고향인 캘리포니아주 살리나스 계곡을 무대로, 아이슬란드에서 이민온 해밀턴 일가와 트라스크 일가의 몇 대에 걸친 이야기이다. 해밀턴가는 작가의 조부의 생가(生家)이며, 이 작품은 드물게 자서전적인 요소가 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의 중심인물은 트라스크가의 아담이다. 동생 찰스와의 불화, 캐시라는 악녀와 결혼하여 얻은 쌍둥이 형제 캐레브와 아론 사이의 숙명적인 싸움을 대비시켜, 매력적인 산문과 교묘한 이야기의 전개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작품에는 또한 아담의 하인인 중국인 리[李]가 온화한 성경연구가로 등장한다. 제명(題名)은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에덴의 동쪽 노드의 땅"으로 도피하였다는 구약성서에서 유래한 것이다. 작가는 인간내부로 눈을 돌려, 원죄의 추구와 인간의 가능성의 탐구를 시도하였다. 1955년 엘리아 카잔 감독, 제임스 딘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생쥐와 인간 Of Mice and Men] -1937년 작품이다. 제명은 스코틀랜드의 시인 번스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목장을 무대로 팔푼이 거한(巨漢) 레니와 조그맣고 팔팔한 조지라는, 육체나 성격이 모두 상반되는 두 사람의 이주(移住)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꿈과 우정을 따뜻하게 묘사한 애수에 넘치는 작품이다. 주요 등장인물의 대비에서 이미 전체 구성이 희곡적인 복선을 나타내고 있으며, 후일 그 자신의 손으로 각색되어 뉴욕 연극평론가 서클상도 탔다. 현실사회에서 꿈의 덧없음을 다룬 작자의 비극관의 구조를 이해하게 된다. (출처: 두산백과)
1930년] 러시아의 혁명시인 마야코프스키 자살 ← 마야코브스키
1893. 7. 19 ~ 1930. 4. 14 러시아 시인 블라지미르 마야코프스키(Mayakovskii, Vladimir Vladimirovich)가 현실에서의 혁명과 예술에서의 혁명을 동시에 밀고 나가다 1930년 4월 14일 권총자살로써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그는 자신의 시가 가슴이 불타는 매춘굴과 같고, 자신의 시어는 불길이 이는 창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창녀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런가하면 ‘내 심장은 꽃피는 5월까지 살아본 적이 없소. 내 삶에는 오로지 백번의 4월만 있을 뿐’이라는 시행들을 통해 여린 가슴을 내보이기도 했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 10대 시절부터 러시아의 차르 체제에 항거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하면서 시의 형식파괴를 통해 새로운 시를 현실에 세우려고 했다. 그는 현실의 지배계급인 부르조아의 미학을 파괴하는 실험시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망하는 인간의 내면을 토해냈다. 그는 레닌이 성취한 혁명을 찬양했지만, 혁명가들이 현실의 지배자가 된 상황에서 항상 더 많은 혁명을 요구했다. 그래서 정작 레닌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러시아 미래파의 전통 거부와 기술 중시의 영향이 두드러지고, 동시에 독특한 시형과 격렬한 비유, 그리고 풍자와 내성이 나타나 있으며, 서정과 서사의 기적적인 결합이 엿보인다. 그는 그 후의 소련의 시인뿐 아니라 금세기 세계 각국의 시인에게도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시에 신선한 영역을 개척해 놓은 시인이다. /조선
"사랑의 나룻배는 현실생활에 부딪쳐 부서져 버렸다" -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1917년] 폴란드의 안과의사, 에스페란토어 창시자 자멘호프(Zamenhof, Lazarus Ludwig) 사망 ← 자멘호프
1859. 12. 15 ~ 1917. 4. 14 라자로 루드비코 자멘호프는 1859년 12월 15일 유럽 리투아니아의 비얄리스토그(당시 폴란드령)의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안과 의사가 되었다. 그 곳은 당시 러시아가 점령한 폴란드의 일부였는데 산업 혁명 무렵 직물업의 중심지였다. 1861년 당시 러시아의 농노 제도가 폐지당할 때 러시아 제국주의가 폴란드 말을 금지시키고, 리투아니아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독일인, 유태인들이 혼합해 거주하는 도시들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일어나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것을 매일처럼 보고 자란 자멘호프가 여러 민족의 공통어가 있으면 이와 같은 싸움이 없어진다고 느꼈고, 그 자신이 유태인이어서 유랑민이란 편견과 차별 대우를 받아왔다. 1881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알렉산더 11세 암살 사건의 범인이 폴란드인이었으나 러시아 정부가 유태인의 소행이라고 소문을 퍼뜨려 전국에 유태인 대학살 바람이 불어 하루에 만오천 여명의 유태인이 죽음을 당했다. 1881년 12월 25일, 폴란드 바르샤바에 불어닥친 대학살에 자멘호프 일가는 지하실에 숨어서 공포의 밤을 지냈었다. 1878년 이미 국제어 의 초안을 완성했던 그는 이런 현실에서 언어만으로 민족 차별을 없애기는 어렵다고 느껴서 이스라엘을 만든 시오니즘운동에 한때 몰입했다가 팔레 스타인과의 적대감을 알고 손을 떼었다. 1887년 7월 14일에 <에스페란토 박사>라는 필명으로 국제어의 창안을 발표하고 톨스토이 등 많은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국제어의 사상인, 민족간의 우애와 정의를 추구하는 동호인들이 확산되어 1905년에 프랑스의 브로뉴 수메르에서 제1회 에스페란토 세계 대회를 열었는데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 만으로 사이좋게 교류하는 현실을 보면서 결의가 점점 확고해졌다. 중립언어만으로 각 종교간의 중계 역할인 <히레르주의>를 완전히 수행할수 없다고 판단되어 <민족주의>를 그냥 두고 자멘호프는 1906년 <인류인주의>를 부르짖었다. 자기는 인류의 일원이고, 타민족의 어떤 편견이나 차별도 하지 말자는 사상이다. 세계 평화를 바라며 모든 민족의 편견과 차별에서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언어와 종교의 면에 전력을 기울여 투쟁한 자멘호프는 에스페란토로 된 방대한 저작을 남기고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17년 4월 14일에 바르샤바에서 58세를 일기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12년] 타이태닉호 빙산과 충돌 침몰 ← 타이태닉호
1912년 4월 14일 영국 사우스샘프턴에서 미국 뉴욕시티를 향해 처녀항해하던 호화여객선 타이태닉호[Titanic]가 빙산과 충돌해 침몰했다. 뉴펀들랜드에서 남쪽으로 640㎞ 떨어진 지점에서 일어난 이 침몰사고로 1,515명이 사망했다. 당시 조사에 의하면 사고지점에서 32㎞가 채 안 되는 곳에 레이랜드 정기선인 '캘리포니안호'가 있었지만 조난신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침몰 후 커나드 정기선인 '카파시아호'가 사고지점에 도착해 인명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이 사고로 런던에서 최초의 국제해상안전협정이 체결되기도 했다. 사고가 일어난 지 73년 후인 1985년 9월 1일 타이태닉호의 잔해가 해저 4,000m, 북위 41˚26', 서경 50˚14'의 위치에서 발견되었다. 미국·프랑스 과학자의 감독 아래 무인잠수정 탐사 결과, 충돌의 충격으로 선체 판재 이음새가 벌어져 선체로 바닷물이 유입되면서 침몰한 것으로 밝혀졌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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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호 첫 출항서 침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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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 후 첫 출항에 나선 타이타닉호. |
1912년 4월 14일, 세계최대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가 22노트의 빠른 속도로 북대서양 유빙 사이를 헤치며 미국 뉴욕을 향해 항진하고 있었다. 영국 사우샘프턴을 출항한지 4일째, 배가 건조된 후 첫 출항이었다. 타이타닉호는 봄에는 빙산과 충돌할 위험이 있어 주로 여름에 이용되는 거리가 짧은 코스를 선택했다. 타이타닉호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 코스를 고집한 것은 함께 대서양을 운행하는 경쟁사 큐나드 라인사(社)가 세계 최고속 신형 여객선 루지타니아호를 건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단시간으로 대서양을 횡단한 배에 주어지는 ‘블루 리본상’도 선주와 선장을 자극했다. 타이타닉은 4만6329t에 배 길이만 272m, 곧추 세우면 지상의 어느 빌딩보다도 높았고 시설도 초일류 호텔급으로 꾸며 ‘떠있는 궁전’으로 불렸다. 건조비도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4억 달러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돈이 투입됐다. 여느 때처럼 안개가 심했던 이날 밤 11시 45분쯤, 배가 뉴펀들랜드 동남쪽 640km 해상에 이르렀을 즈음, 북대서양을 떠다니는 거대한 빙산이 오른쪽 뱃전을 들이박았다. 충돌 당시의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는지 대부분의 승객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럼에도 배는 오른쪽 앞부분 흘수선 아래로부터 찢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90m 크기의 구멍이 뚫려 3시간 만에 3,950m의 해저 속으로 가라앉았다. 구명보트도 승객수의 절반 밖에 없었다. SOS를 수신한 인근의 여객선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4시, 부랴부랴 771명을 구조했지만 1,513명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 "1912년 4월14일 일요일, 시계는 바야흐로 오후 11시40분을 가리키려 하였다. 프리트는 갑자기 바로 앞에 무슨 물체가 있음을 보았다. 그것은 주위의 어두움보다도 훨씬 검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작았으나 그것은 곧 점점 커지며 다가왔다." --로드, <타이타닉호의 최후> 2천2백 명의 승객 가운데 697명만이 구조된 타이타닉호 사건 기록문학
1907 14년간 장기 집권한 아이티의 독재자 대통령 장 클로드 뒤발리에 출생
1907 14년간 장기 집권한 아이티의 독재자 대통령 장 클로드 뒤발리에([ Francois Duvalier, 1907.4.14.-1971) 출생
*아이티의 독재정치가. 군의병을 거쳐 미국에서 의학공부를 했다. 보건장관 등을 역임한 뒤 1957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64년에 종신대통령임을 선언했다. <톤톤 마쿠트(鬼人)>라는 비밀경찰로 정적을 암살하고, 대중운동을 탄압하는 등 공포정치를 폈으며 3만 명 이상을 살해하였다. 71년 죽기 직전에 19세인 아들 장 클로드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후계대통령이 된 장 클로드도 공포정치를 했으며, 83년에는 역시 종신대통령임을 선언하고는 부패한 생활을 보냈다. 86년 2월 식량부족으로 인한 국민폭동이 전국에 확산되는 가운데 장 클로드 일가가 미군기를 타고 탈출함으로써 일족의 독재체제는 무너졌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개막 프랑스의 20세기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L’Exposition de Paris de 1900]의 개막과 함께 그 문을 열었다. 샹 드 마르스 공원에서 열린 이 축제에 8만 3천에 달하는 전시자가 참여했고 200여 일에 걸쳐 약 5천만 명이 관람했다. 니콜라이 2세로 명명된 큰 길 양편에는 막 완공된 그랑 팔래와 프티 팔래가 호화로운 예술의 전당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프티 팔래에는 ‘기원에서 1800년까지’를 보여주는 약 5천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었으며 그랑 팔래에는 프랑스 미술 ‘100년전’이 열렸다. 이 ‘100년전’의 마지막 전시 벽면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으로 장식되었다. 이 인상주의 전람회에는 마네,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쇠라, 시슬레, 바질, 부댕, 드가, 기요맹, 모리소 등 고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인상주의 주요 화가들이 참여했다. 고갱은 그 때 타히티 섬에서 외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동양학파의 일원이며 프랑스 한림원의 회원이기도 한 레옹 제롬은 인상주의 전시장 입구를 두 팔을 올려 막으면서 “대통령 각하, 멈추십시오. 이것은 프랑스의 치욕입니다” 하고 말한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이 에피소드에서 그 때만 해도 인상주의가 프랑스인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기할 점은 훗날 근대 조각의 아버지로 불리운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1840~1917)이 60세의 나이로 만국박람회에 참여한 것이다. 그는 이미 명성이 높은 조각가로 알마 광장에 사비를 들여 별도로 건립한 개인전시장에서 조각품 150여 점을 소개했다. 그의 개인전은 성공했는데, 코펜하겐, 함부르크, 드레스덴, 부다페스트 등 유럽의 뮤지엄뿐 아니라 미국 필라델피아 뮤지엄도 그의 작품을 다투어 사들였다. 그는 이 전람회를 위해 오랫동안 미완성으로 남겨둔 <지옥문>을 석고로 완성시켜 전시했다. <지옥문>은 로댕이 타계한 후에 청동으로 뜰 수 있었다. 사람들이 석고로 된 <지옥문>을 보고 미완성이라고 말하면 로댕은 “그럼 프랑스의 대성당들은 완성작이란 말이오?” 하고 대꾸했다.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지 3년 후에 개최된 이 박람회에 우리나라도 참여했다. 고종은 학무대신 민병석을 총재격인 박물대원에, 민영찬을 실무 담당 박물부원에, 그리고 프랑스인 안예백Alple을 사무부원에 임명 파견했다. 프랑스 건축가 에밀 페레Emile Ferret가 지은 왕궁 접견실 형태의 대한제국관은 샹 드 마르스에서 떨어진 슈프렌 가에 위치했다. 『파리 박람회 L’Exposition de Paris』에 조선관이 소개되었다. “조선관은 화려한 색채로 칠해진 목조건물로 극동 건축의 특징적인 위로 치솟은 처마와 큰 지붕으로 덮여 행인들의 관심을 끈다. 독특한 구조의 건축은 왕궁의 알현실에서 영감을 받았다. 벽은 7세기에 만들어진 비단으로 장식되었으며 들어갈 때 서로 마주보는 두 개의 패널에는 탈과 연극적인 물건들이 걸려 있다. 진열장에는 황제가 직접 보낸 값비싼 물건들과 대한제국에 가 있던 몇몇 프랑스인이 소장한 것들, 그리고 국가에서 제작한 물건들의 견본이 … 이 모든 것은 조선의 산업 자산에 대한 강한 인상을 준다.”
1889년]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출생 ← Arnold Toynbee, 1974
1889년 4월 14일 태어남 / 1975년 10월 22일 죽음
"타성을 깨고 돌진하려는 창조적 소수에 의해서 역사는 도약하고 문명은 발전하게 된다." - 아널드 토인비
토인비는 역사의 기초를 정치가 아닌 문명에 두고 인류의 문명을 도전과 응전의 역사로 파악한 문명사관으로 유명한 영국의 역사가이다. 19세기 경제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조카로서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런던대학교에서 비잔틴과 근대 그리스 교수(1919~24)를 지냈으며, 런던에 있는 왕립 국제관계 연구소의 연구 책임자(1925~55)로도 활동했다. 역사철학을 확립한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12권, 1934~61)에서 역사의 연속성과 반복성에 대한 인식 아래 26개 문명의 발생과 성장, 해체 과정을 비교 분석했다. 토인비는 문명이 엘리트 지도자로 이루어진 창조적 소수의 지도 아래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등장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물리적·환경적 도전이 아닌 도덕적·종교적 도전에 대응하지 못할 때 생존에 실패한다고 결론지었다.
영국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출생 영국 경제학자·사회개량가. 런던 출생. 옥스퍼드대학에서 경제학과 경제사를 공부하고, 졸업 후 이 대학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사회개량가로서 실천적인 운동을 하였고 노동조합·협동조합 보급에도 힘썼다. 세틀먼트운동의 선구자로 죽 은 다음해인 1884년 그의 업적을 기념하여 토인 비홀이 런던 화이트채플지구에 세워졌다. 청강학생들의 노트를 바탕으로 사후에 편집·출판된 《18세기 영국산업혁명 강의(1884)》는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보급시킴과 동시에 그 뒤의 산업혁명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에 따르면 생산과 분배에 관한 중세적인 규제가 경쟁으로 대치된 것이 산업혁명의 본질이며, 과도한 경쟁이 빈곤을 만들어 내므로 빈곤은 나태에서 생긴다는 전통적 견해를 배제하고 자유방임의 법적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1894년] 에디슨이 발명한 영사기 '키네토스코프'가 대중에게 처음으로 선보임 초기 사진들의 연결수준에서 어느 정도 현재의 촬영기와 같은 개념을 부여할 수 있는 기계들은 발명왕 에디슨과 영화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개발되었습니다. 1892년 촬영장치인 키네토그라프(kinetograph)를 만든 발명왕 에디슨은 1894년 필름을 볼 수 있게 만든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은 영사기가 아니라, 단지 확대경 뒤로 단조로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필름이 든 상자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영화 필름 영사기의 시초로 작은 이미지들이 들어 있는 그 상자는 한 번에 한 명의 관객만이 볼 수 있었습니다. 즉, 1명씩 동전을 넣고 보는 '들여다보는 영화'였는데, 약 15초 동안 실물과 똑같이 움직이는 사람과 물체의 필름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www.edufree.co.kr
1885 -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 광혜원 개원
1885년 제중원 모습 /메디파나뉴스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 광혜원 개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은 1885년에 설립한 제중원(濟衆院)이다. 이해 4월14일, 서울의 혜민서 활인서를 없애고 재동에 광혜원(廣惠院)이라는 이름으로 발족했다. 첫 국립병원이기도 했던 광혜원의 의사는 1884년 내한한 선교의사 미국인 알렌(安連·Allen)이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밤, 칼을 맞은 수구파의 두목 민병익을 3개월만에 고쳐준 일이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알렌은 정부의 후원으로 재동 홍영식의 집에 서양식 병원을 이 땅에 처음으로 차린 것이다. 이때부터 이 나라에는 서양의술에 대한 쇄국의 장막이 걷혔으며, 알렌은 마침내 고종임금의 어의까지 되었다. 이로부터 국내 곳곳에 미국의 선교의사들이 속속 입국하여 군산?전주 등지에도 예수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서양 의식(醫式)의 근대식 병원이 설립되었다. 전북에는 1896년 군산시 구암동의 해변가에 선교 의사들이 예수구암병원을 설립했다. 원장에 A·D·드루(한국명·유대모)이었고, 2대 원장은 패터슨 박사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미국인 철수령에 따라 문을 닫았다. 또한 전주에도 그로부터 2년 후인 1898년 11월3일에 예수병원이 설립되었다. 최초의 의사는 여의사 잉골드 였다. 그녀는 미국 케롤라이나 주의 허커리에서 의료와 선교의 사명을 띠고 왔었다. /Google
1866 헬렌켈러 출생,
1866 헬렌켈러[Helen Keller1880∼1968 ] 를 가르친 미국 교사 앤 설리번 메이시(1866.4.14.-1936)출생,
*1880년 미국에서 태어난 헬렌켈러. 그녀는 세상에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큰 병을 앓아 시력을 잃었고, 귀로는 들을 수 없게 되었으며, 입으로는 말도 할 수 없는 "삼중고"의 가련한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20세기의 기적이란 칭호까지 받는 놀랄 만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어찌보면 나무토막 같은 그녀를, 전세계를 놀라게 한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사람은 다름아닌 그녀의 스승인 앤 설리반입니다. 7세가 될 때까지 제멋대로 행동하던 헬렌 앞에 나타난 설리번 선생은, 사랑과 인내로써 어둠 속을 헤매던 헬렌에게 말과 글은 물론 인생의 참의미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헬렌은 설리번 선생의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노력한 끝에 20세때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설리반 선생님은 헬렌 켈러에게 늘 다음과 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시작하고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 실패할 때마다 무엇인가 성취할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은 성취하지 못할지라도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을 얻게 되리라. 시작하는 것과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 1937년 우리 나라에도 방문한 적이 있는 그녀는 힘들고 긴 시련을 극복하고 정상적인 사람도 감히 쓸 수 없는 <나의 회상록>, <내가 살고 있는 세계>, <믿음을 가지고> 등의 유명한 저서까지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맨 처음 "물"이라는 말 한마디를 배우는 데 7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녀는 시련 극복의 의지로 최고 학부까지 나오게 되었고, 희랍어, 라틴어, 불어 등에 통달하게 되어 온 세계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특히 헬렌은 장애인들에게 이렇게 말하며 장애자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었으며, 그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태양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볼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 속에 빛을 갖는 일입니다. 힘과 용기를 가지세요." 헬렌 켈러는 자신의 불행에 꺾이지 않고 극복하여 많은 사람들을 위해 애쓰다가 1968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TIME 지는 20세기의 위대한 100명의 인물에 "기적의 헬렌 켈러"라는 제목과 함께 헬렌 켈러를 포함시켰고 그의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원망하며 비관과 반항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디그 가족들이 있다면 그 불행앞에 굴복하지 말고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보다 더 비참하고 나쁜 상황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헬렌 켈러처럼 말입니다. (cgi.chollian.net/~kimgme1/person)
1865년] 미국의 링컨 대통령, 극장에서 저격 당함 (다음날 사망) ← 부스
1865년 4월 14일 미국의 링컨(Lincoln, Abraham, 1809~1865) 대통령이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연극 관람 도중 남부출신의 배우 J. W. 부스(Booth, John Wilkes)에게 저격당했다. 링컨은 다음날 아침 사망했다.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암살범 부스는 미국 최남부 순회공연에서 폭넓은 인기를 얻었으며, 남부를 열광적으로 지지해 공공연하게 노예제를 옹호하고 링컨을 비난했다. 그는 1859년에 노예제폐지론자 존 브라운을 교수형에 처했던 리치먼드 민병대에 자원했으며, 남북전쟁 중에는 남부의 비밀첩보원으로 활동했다. 처음에는 링컨 납치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자 암살을 결심했다. 연극의 3막이 진행되는 동안 관람석에서 링컨의 머리 뒤쪽을 향해 총을 쏘고는 "남부는 복수했다"라고 외치며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12일 뒤 연방군이 버지니아의 한 농장 담배창고에서 부스로 알려진 시체를 찾았다. 암살이 성금요일에 이루어져 링컨은 사후에 성인으로 더욱 추앙받았다. /브리태니커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 극장에서 피격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재임 1861~1865)인 링컨이 1865년 오늘 피격당합니다. 1863년 11월 게티즈버그국립묘지 설립 기념식 연설에서 유명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불멸의 말을 남겼습니다. 전쟁 중인 1864년의 대통령선거에서는, 재선 전망이 불투명하였으나, U.S.그랜트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승리가 계속된 것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해서 재선에 성공하였습니다. 1865년 4월 9일 남군사령관 R.E.리가 애포매턱스에서 그랜트에게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은 종막을 고하였고, 전쟁이 종막에 가까워짐에 따라 관대한 조치를 베풀어 남부의 조기 연방 복귀를 바랐으나, 남군 항복 2일 후인 4월 14일 워싱턴의 포드극장에서 연극관람 중 남부인 배우 J.부스에게 피격, 이튿날 아침 사망하였습니다.
존 윌크스 부스 /위키백과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 극장에서 피격(다음날 사망)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 1838년 5월 10일 - 1865년 4월 26일)는 에이브러햄 링컨을 암살한 것으로 악명높은 미국의 배우이자, 암살 범죄자다. 그는 에이브러햄 링컨을 총을 쏘아 죽인 뒤 그를 잡으려고 하는 라스본 시장을 칼로 찌르고 귀빈석에서 무대 위로 뛰어 내린 뒤 "폭군은 언제나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뒤 말을 타고 10일간 도망가서 4월 24일에 리차드 갸렛이라는 사람의 농가에서 갔지만 그의 가족에 의해 체포되어 29명의 기병대에게 포위당했다. 기병대가 투항의 여부를 물었지만 부스는 투항을 거부하였다. 데이빗 해롤드가 투항하였지만 에버튼 콩거 대좌의 지시에 의해 농가의 주변에서 불을 질렀다. 그 후, 화재장소에서 기병대의 일원 보스턴 코벳 중사에게 총살당하였던 부스는 치명상을 입고 4월 26일 아침에 사망하였다. 사람들은 남부가 그를 영웅으로 받들 거라고 추측했지만 남부에서조차도 그를 미치광이라고 저주했다. 그의 배후에 모(某) 결사단체가 사주했다는 설이 있으나, 실제는 분명치 않다. /위키백과
"주님은 평범한 모습의 사람을 좋아하신다. 때문에 평범한 모습의 사람을 많이 만드신 것 같다."
- 에이브러햄 링컨
[역사속의 인물] 링컨 암살범 존 윌크스 부스
'현상금 5만달러…'
서부영화처럼 $(달러) 표시가 된 포스터가 미국 곳곳에 붙었다. 1800년대 중반 5만달러는 현재의 125만달러(16억5천만원)에 달하는 큰 액수다.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암살범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1838~1865)에게 붙은 현상금이다. 그는 남북전쟁이 막 끝난 1865년 오늘,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던 링컨의 뒷머리를 권총으로 쏘았다. 링컨은 혼수상태에 빠져있다 다음날 사망했다.
미치광이 암살범은 아니었다. 유명한 연극배우였다. 미국에서 제일 잘생긴 배우로 통했고 뭇 여성들의 우상이었다. 연극으로 부와 명예를 이뤘지만 남부연맹의 열렬한 옹호자이자 노예제 신봉자였다. 요즘 개념으론 정치적 테러범이었다.
그로부터 12일 후 버지니아의 농가에 숨어있다 연방군대에 의해 사살됐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브루투스'역만 맡아왔는데 링컨 암살 후 극장에서 외친 말도 "독재자는 죽음으로…"라는 라틴어였다. 인간의 신념이란 과연 무엇인가? 허망하지 않은가.
박병선 사회1부장 lala@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4월 14일
1759 독일태생 영국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사망,
1759 독일태생 영국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ndel, 1685.2.23 - 1759.4.14]사망,
*할레에서 출생했다. 9세 때부터 오르간 연주자인 F.차하우에게 사사하여 작곡의 기초와 오르간을 공부하였다. 그 후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한때 할레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18세 때 함부르크의 오페라극장에 일자리를 얻어 이때부터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20세 때 오페라 《알미라 Almira》(1705)를 작곡하여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 오페라의 고향인 이탈리아로 가 로마에서 A.코렐리, A.스카를라티의 영향하에 실내악을 작곡하는 한편 피렌체 ·베네치아에서 오페라 작곡가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1710년 하노버궁정의 악장(樂長)으로 초빙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방문한 런던에 매료되어 1712년 이후는 런던을 중심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작곡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1712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오페라 《충직한 양치기 Il pastor fido》《테세오 Teseo》를 작곡, 상연하고 1718∼1720년에는 찬도스 공작의 후원 아래 종교음악의 명작 《찬도스 앤섬 Chandos Anthoms》 11곡을 작곡하였다. 또 1719년에는 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상연을 위해 ‘왕립 음악아카데미’를 설립하여 다른 두 이탈리아인 작곡가 G.B.보논치니, A.아리오스티와 함께 그 지배인이 되었다. 그 후 약 10년 동안 창작력의 전성기에 들어선 그는 오늘날까지도 상연되고 있는 이탈리아오페라의 명작 《라다미스토 Radamisto》《오토네 Ottone》《줄리어스 시저 Giulio Cesar》《타메를라노 Tamerlano》《로델린다 Rodelinda》《아드메토 Admeto》《톨로메오 Tolomeo》 등을 작곡하였다. 또 1721년에는 초기의 명작 오라토리오 《에스테르 Esther》를 작곡하였으나 1728년부터 약 10년간은 이탈리아오페라 작곡가로서의 헨델의 운세가 점차 기울어갔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던 영국의 시민계급이 궁정적 ·귀족적인 취미를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오페라에 대해 반발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728년 대사(臺辭)에다 민요선율을 곁들여 당시의 귀족사회를 통렬히 풍자한 J.C.페푸시 작곡의 《거지 오페라 The Begger’s Opera》가 상연되어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자 왕실 음악아카데미는 부득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헨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에 아카데미를 재건, 헤이마게트극장을 근거로 한때 옛날의 인기를 되찾았으나 1733년 경쟁상대인 보논치니의 이탈리아오페라와 《거지 오페라》의 협공을 받고 두 번째 극장을 폐쇄하게 되었으며, 1734년 세 번째로 이탈리아오페라의 기치를 들고 코벤트 가든 오페라극장 경영에 나섰으나 3년 후인 1737년 마침내 건강악화와 경제파탄으로 오페라 작곡가 겸 극장 경영자로서의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헨델은 1732년경부터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예찬되고 있는 《메시아 Messiah》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는 1732년의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1735년 사순절(四旬節)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약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극장에서 연속 연주하여 점차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 1736년에는 《메시아》에 버금가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 Alexander’s Feast》을 작곡하고 1738∼1751년까지도 거의 모두를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경주하였다. 1739년 구약성서에 입각한 위대한 서사시적인 드라마 《사울 Saul》과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Israel in Egypt》을 발표하면서 다시 건강을 회복한 그는 왕성한 창작력으로 1741년에는 고금의 명작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하였다. 《메시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 정수(精髓)를 순수하고도 감동 깊게 전해 주는 명작이다. 그러나 헨델의 수많은 오라토리오 중에서 주로 서정적 요소를 강조하며, 접속하는 칸타타형태를 취한 이 작품은 오히려 예외적인 작품에 속한다. 그의 오라토리오의 본질은 현실무대의 제약을 벗어난 가상적 무대에서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모체로 하는 보편적 ·윤리적인 관념을 전개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는 종교적 감동을 주는 서정적 표현에 뛰어났고, 오페라작품 속에 축적한 선명한 이미지를 환기시켜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구사하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이런 점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이 앞서 언급한 《이집트의 이스라엘인》과 함께 1746년의 작품 《마카베의 유다 Juda Macabaeus》 등이다. 《메시아》 이후에도 그는 《삼손 Samson》《벨샤자르 Belshazzar》 등 뛰어난 오라토리오를 많이 작곡하였으며, 1751년 오라토리오 《입다 Jephtha》를 작곡하던 중 시력을 잃었다. 그러나 실명한 후에도 오라토리오의 상연을 지휘하는 한편 조수의 도움으로 구작(舊作)의 개정에 힘썼다. 헨델은 오페라(46곡), 오라토리오(32곡) 등 주로 대규모의 극음악 작곡에 주력하였지만 기악방면에서도 상당히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유명한 관현악곡모음곡 《수상의 음악 Water Music》《왕궁의 불꽃놀이 음악 Royal Fireworks Music》 외에, 작품 6의 합주협주곡, 작품 4 ·7의 오르간협주곡, 작품 2 ·5의 트리오소나타, 작품 3의 오보에협주곡, 그리고 1720년에 출판된 하프시코드용의 모음곡 등은 모두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다. 종교곡으로는 앞서 말한 11곡의 《찬도스 앤섬》 외에도 유명한 작품으로 위트레히트와 데팅겐의 전승(戰勝)을 축하한 《테 데움 Te Deum》 등이 있다. 1726년에 영국에 귀화하였고 사후 최고의 영예인 웨스트민스터대성당에 매장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메시아 The Messiah] -독일의 작곡가 헨델의 오라토리오로 메사이아 또는 구세주라고도 한다. 헨델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고금(古今)의 종교음악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대본은 성서를 바탕으로 영어로 씌어졌으며, <예언과 탄생> <수난과 속죄>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3부로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서사적 묘사라기보다도 전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존재를 강력히 호소한 작품이다. 알기 쉬운 웅장한 표현 속에 생생한 종교적 감동이 잘 나타나 있다. 불과 3주일 만에 완성되어(1741), 이듬해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자선행사로 초연되어 절찬을 받았다. 헨델이 죽기 전부터 자주 자선단체를 위하여 상연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세계 각처에서 자선연주회를 개최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다. 제2부의 마지막 곡 <알렐루야 코러스>가 특히 유명하며 런던 초연 때는 조지 2세가 너무나도 감동한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선 고사(古事)에 따라 오늘날도 그 대목에서 청중이 일어서는 습관이 있다. (출처: 두산백과)
1702년] “백두산 화산 폭발” 조선시대 네 차례 기록 “정오께 천지가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때때로 붉고 노란 불길이 먹구름과 더불어 솟아나는데 유황내가 코를 찌르고 그 열기가 난로같았다. 이튿날 일어나보니 회우(灰雨·잿비)가 산야를 덮어 별천지 같았다. ” 1702년(숙종 28년) 4월 14일, 백두산에서 폭발한 화산을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문헌상에는 백두산 화산폭발이 1413년·1597년·1668년·1702년 네 차례 기록돼 있지만 지질학자들은 277만년 전 이후 모두 358회나 화산이 폭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때 ‘해동성국’으로까지 불렸던 발해가 거란 침공 불과 1개월 만에 쉽게 무너진 원인을 백두산 화산폭발과 이에 따른 기후의 한랭화로 해석한 일본 학자의 주장이 몇년 전 국내에 소개돼 관심을 끈 적이 있었다. 발해가 멸망한 926년을 전후해 백두산에 대규모 화산폭발이 있었고, 화산재가 약 1000km나 떨어진 일본 혼슈 북부 및 홋카이도 일원에까지 날아가 약 1∼5cm 쌓였다고 한다. /조선
1626 `호이겐스의 원리" 만든 네덜란드 물리학자. 수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 출생,
1626 `호이겐스의 원리" 만든 네덜란드 물리학자. 수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 Christiaan Huygens, 1626.4.14.-1695]출생,
*네덜란드 물리학자·천문학자. 헤이그 출생. 명문가에서 태어나 일찍이 수학에 재능을 보이고 16세에 레이덴대학에 입학, 수학과 법률을 공부하였다. 66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설립 때 최초 외국인회원으로 선임되어 파리로 이주, 중심적 인물로 활동하다 귀국하였다. 그의 과학상 업적은 당대 연구가들처럼 실천적 문제와 관련된 것이 많고 또 다양한 부문에 걸쳐 있었다. 수학은 구적법(求積法)을 탐구하여 미적분학 형성에 이바지하고 확률도 다루었다. 물리학은 부체(浮體)의 안정성을 정역학적(靜力學的)으로 논하였으며, 1652년부터는 R. 데카르트의 충돌규칙이 실험적으로 맞지 않는 것을 깨닫고, 56년 운동의 상대성원리를 이용한 충돌론을 제시하였다. 이 결론은 그가 죽은 뒤 《충돌에 의한 물체의 운동에 대하여(1703)》로 정리되었다. 역학은 실용적인 시계 개량을 목표로, 59년 사이클로이드곡선을 그리는 흔들이 등시성(等時性)을 발견, 기하학적으로 증명하고 정도가 높은 흔들이시계를 설계하였다. 73년 저서 《흔들이시계》는 그의 역학 연구들을 종합한 것이다. 광학(光學)에 관해서는 52년부터 주로 망원경·현미경의 개량문제를 취급, 55년 개량 망원경으로 토성의 티탄위성을 발견하였다. 빛의 파동설을 주장, 빛의 반사·굴절·복굴절현상을 설명하고 78년 《빛에 관한 논고》에 종합하였다. 그의 연구내용은 I. 뉴턴의 체계적인 이론이 널리 수용되어 있었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호이겐스의 원리 -原理, Huygens" principle] -빛의 파동설에서 광파의 진행 상태를 작도하는데 쓴 원리. 시간 경과에 따라 나타나는 파면형태 변화는 일정한 시각의 파면 위의 각점을 새로운 제2파원으로 간주하고, 제2파 파면집합에 접하는 면을 작도하면 기하학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파도가 퍼질 때 파도의 골짜기 또는 산처럼 위상이 같은 점을 이은 면을 파면이라고 하고, 파면이 평면이면 평면파, 구면이면 구면파라 한다. 파면과 파도의 진행방향은 서로 수직이다. 파면이 전달되는 방식을 설명할 때는 어떤 시각에서 파면상의 각 점이 파원이 되어 새로운 구면파를 보낸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새로운 구면파를 2차파라 하고, 다음 파는 이 2차파의 포락면(包絡面)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네덜란드 물리학자 C. 호이겐스가 빛의 파동설에서 광파의 진행상태를 작도하는 데 이용하였다(1690). 그는 이 원리로부터 반사·굴절현상을 설명하였다. 1818년 A.J. 프레넬은 이를 확장하여 2차파의 간섭으로부터 회절현상을 설명하였다. 1882년 G.R. 키르히호프는 파동방정식을 바탕으로 회절이론을 전개하여, 호이겐스의 원리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구축하였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일어남 1592년 4월 14일 선조25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한국과 일본은 이웃나라로써 우호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으나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동아시아를 정복하겠다는 계획으로 동아시아의 출입구인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7년간의 전쟁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십만 병력의 일본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두달 만에 평양과 함경도까지 점령하여 급기야는 선조임금이 의주로 피난하게 되었다. 1593년 1월 명나라에서 원군을 보내주어 조선군은 평양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또,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해상권을 장악했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다. 이후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일본군은 직산까지 점령했으나 조선군에게 다시 패했다. 이런식의 소모전이 계속되었으나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전쟁이 끝났다. 전쟁의 결과, 일본은 도요토미 정권이 멸하고 도쿠가와 정권이 세워졌으며 도자기, 활자 등의 활발한 제작으로 새로운 문화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중국은 조선으로의 무리한 원군 때문에 국력이 쇠약해진 명이 멸하고 청나라가 세워졌다. 조선은 국토가 황폐해지고 많은 문화유산을 일본에 빼앗기게 됐다. /조선
임진왜란 발발 1592년(선조 25년)에서 1598년(선조 31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인 임진왜란이 오늘 발발합니다. 임진년에 일어났다 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하며, 정유년에 또다시 쳐들어온 싸움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게이초[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이라고 합니다.
1527년] 근대 지도 제작술의 선구자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 출생 지도는 문자의 역사에 뒤지지 않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은 시행착오와 과정을 거치며 완성되어온 지도 제작기술은 16세기에 이르러서야 근대 지도제작술의 기초를 마련하게 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이전까지의 세계 모습은 벨기에의 지도제작자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 1527.4.14~1598.7.4)에 의해 수정되기 시작하였다. 또 한 사람의 뛰어난 지도제작자 메르카토르와 함께 당대 세계지도 제작술의 최고봉에 올랐던 오르텔리우스는 메르카토르의 도법을 이용해 최초의 대중적인 지도책을 만들어 지도의 대중화를 실현시킨 인물이다. 플랑드르 지방의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난 오르텔리우스는 골동품 상인으로서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지리적 견문을 넓혔다. 1560년 평생 친구이자 경쟁자인 메르카토르 만나 본격적인 지도제작에 뛰어들었고 이후 이집트, 아시아 등 다양한 지역의 지도와 함께 이를 한데 묶어 편집한 ‘세계의 무대 (Theatrum orbis terrarum, 1570)’라는 지도책을 출판함으로써 많은 인기를 얻었다. 53페이지 분량의 이 책자에는 약 70여장의 지도가 수록되어있으며 당대 최고의 지도책으로 지도의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1458 해인사 대장경 50 팔인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諸)경판 1
고려대장경판 81,258판
- 그외 1098년부터 1958년까지 불교 경전과 불교 역사, 불교 계율, 불교 연구논문, 고승의 문집, 계율판, 불교 판화 등 5,987판
고려대장경판(팔만대장경)의 제작은 한국이 13세기에 일구어낸 위대한 문화적 업적으로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려대장경판은 81,258 목판에 새긴 대장경판으로 아시아 전역에서는 유일하게 완벽한 형태로 현존하는 판본자료다.
고려대장경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완벽한 불교 대장경판으로 산스크리트어에서 한역된 불교대장경의 원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려대장경판은 인도 및 중앙아시아 언어로 된 경전, 계율, 논서, 교리 및 불교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물을 집대성하여 한역한 내용과 더불어 중국어가 원문인 일부 문헌을 선정하여 수록하고 있다. 그 엄청난 규모로 볼 때 이러한 대장경판의 제작은 상당한 국고 및 인력의 투입을 필요로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해인사에 소장되고 있는 고려대장경판과 제 경판 87,000여장의 목판은 1098년부터 1958년까지의 오래 시간에 걸쳐 완성된 경판들로써 국가제작판과 사찰제작판으로 나뉜다. 국가제작판은 고려대장경으로 81,258판 5,200여 만자에 달하고, 사찰제작판은 5,987판이다.
고려대장경판은 이미 사라진 초기 목판제작술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는 한편, 고려시대의 정치, 문화, 사상의 흐름과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역사기록물이기도 하다. 경판 표면에는 옻칠을 하여 글자의 새김이 760년이 지나도록 생생한 상태로 남아 현재까지 인쇄할 수 있을 정도이다.
※ 대장경(大藏經)은 불교의 교조 석가모니가 일생동안 설법한 경전과 계율, 그리고 그 내용들에 대해 후대의 사람들이 첨부한 논서, 주석서, 이론서들을 집대성한 불교경전(佛敎經典)의 총서(叢書)를 가리키는 말이다.
1702 (조선 숙종 28) 백두산 분화
백두산 폭발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언제 폭발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전문가에 따라 백년 후에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하는 견해도 많습니다
공포에 떨 필요는 더욱 없습니다.
백두산이 폭발하면 남한까지 피해를 줄 것은 분명합니다.
화산재에 의해 약간의 재산피해나 환경피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화산재가 비산하거나 내릴 때는 외출을 삼가하고 꼭 필요해서 나갈 경우 미세먼지를 막기위해 마스크를 착용하면 됩니다. 죽을 일도 없고 집에 있을 때는 창문을 닫아놓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잘못된 정보에 의해 걱정하는 것처럼 지진의 피해가 심각할 것도 없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할 만큼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북한에는 많은 피해가 갈 것입니다.
다만 피해의 정도에 있어 폭발이 언제 일어나느냐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겨울에 폭발할 경우 북서계절풍에 의해 일본이 많은 피해를 볼 것이고
여름에 폭발할 경우에는 남한 쪽에 피해가 제법 클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화산폭발의 피해 중 주요한 것이 화산재입니다.
화산재가 날아오면 여러가지 상황이 생기겠지요.
북한의 북동부지방은 아주 큰 피해가 예상이 됩니다만, 남한은 큰 피해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폭발의 강도나 계절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규모가 큰 폭발이 겨울에 발생한다면 남한도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폭발이 아이슬란드때보다 10배 이상이라면 폭발 그 자체의 물리적인 힘으로도 남한에 화산쇄설물을 옮길 수 있구요, 특히 겨울이라면 북서풍, 또는 북동풍을 타고 남한으로 올 수 있습니다. 반면 남풍이 부는 여름이라면 그 피해가 덜하겠죠. 일단 기본적으로 화산재가 남한에 떨어졌다하면 정밀산업 생산에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이고, 호흡기 질환자를 비롯해 여러 노약자들은 위험하겠죠. 그에 따라 우리나라 증시도 영향을 받을 것이구요.
언제 폭발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현재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학자에 따라 백년 정도 후라고 보는 경우도 있고 혹은 수년 후에 있을 수도 있다고 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폭발 직전까지 그 정확한 시점을 예측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소방재청에서는 25일 발표한 바로는
국립방재연구소가 미국 연방재난관리청과 해양대기관리청의 유해물질 확산 대기모형을 바탕으로
겨울과 여름의 고도 1㎞ 상공의 바람과 기압 상황을 반영하여
백두산 분화시 화산재 확산 범위를 시뮬레이션한 결과가 예측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겨울철에 백두산 화산이 규모 6VEI로 분화하면
화산재는 북서풍의 영향으로 약 2시간만에 양강도 혜산, 함경남도 신포, 함경북도 청진 부근까지 덮치고
약 8시간 뒤에는 울릉도와 독도에 도달하게 된다고 합니다.
12시간 이후에는 일본 서부 돗토리현 일대에 상륙하여
간사이, 주부, 간토 지방을 관통해 18시간이 지날 경우에는
일본 본토 너머까지 확산이 될 거라는 전망입니다.
울릉도와 독도에는 황사경보를 내리는 미세먼지 농도보다 최대 62배나 짙은 화산재가
20㎝ 정도 쌓일 것으로 추정되며 그로 인해 농작물 등의 피해와
항공기 엔진등의 영향을 주어 국제선 결항이 예상되며,
미세먼지로 인한 인체건강에 치명적인 문제를 불러 일으킬 것이라 하네요
참고자료
백두산 폭발의 역사와 발해의 멸망
백두산은 한중(韓中) 양국에 걸쳐 있는 장백산맥의 최고봉으로, 두 나라의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과 두만강 및 중국내 송화강의 발원지이다. 산정에는 칼데라 호수인 천지가 있다. 천지는 수심이 3백 73m, 호수면의 둘레는 13.11km, 호수면의 해발고도는 2천 1백89.1m 이며,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해발 2천 5백m 이상이다.
백두산 천지못
이들 중 최고봉은 2천 7백49.5m의 장군봉(將軍峰)이다. 백두산 화산은 현무암 용암대지와 순상화산체를 하부로 하여 그 상부에 칼데라를 가지는 성층화산추로 구성되는 복합화산체다. 화산암류 분포면적은 약 1만8천3백50km²에 달한다.
백두산과 천지에 대한 지질조사는 1920년대에 일본인들이 시작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 주로 중국과 북한의 지질학자들에 의해 백두산의 형성과정, 화산암류에 대한 암석학, 지질학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1990년대 초에는 국내 화산학 전공 지질학자들을 중심으로 '백두산-한라산 화산연구회'가 발족되었고 백두산과 한라산 화산활동 및 화산암류 연구가 한-중 양국의 수교와 함께 급속히 진행되게 되었다.
백두산 지역의 화산분출 역사를 화산암 층의 화산층서 및 용암류에 대한 암석연대측정 결과를 토대로 살펴보면 몇 단계로 구분된다. (아래 표 참조)
◀ 백두산 일대의 화산폭발사▶
지질시대 |
화산활동기 |
분출연대 |
분출물 |
주요지질사건 |
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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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1668년, 1702년
1413년, 1597년 |
화산회, 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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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괘묘기 |
? |
용결응회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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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봉기 |
1050년~1410년전 |
부석, 화산회 |
천지칼데라형성 |
홍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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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기 6기
5기
4기
3기
2기
1기 |
9~8만년전
10만년전
28~22만년전
33만년전
44만년전
61~55만년전 |
알칼리유문암
조면암용암암
화산쇄설암
화산쇄설암
화산쇄설암
화산쇄설암 |
백두산
성층화산추형성 |
광평기 |
65만년~9만년전 |
현무암 |
|
플라이오세 |
군함산기 |
290~170만년전 |
현무암 |
순상화산체 형성 |
마이오세
|
내두산기
장백기 |
1600~1500만년전
|
현무암
현무암 |
용암대지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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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봉산기 |
2300~1900만년전 |
현무암 |
용암대지형성 |
올리고세 |
마안산기 |
2800만년전 |
현무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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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활동 산물은 제3기 올리고세(약 2천8백만년 전)에 분출된 마안산(馬鞍山) 현무암으로 백두산 화산체의 기저부에 소규모로 분포하고 있다. 마안산은 압록강변에 위치한다.
그 뒤 초기 마이오세(2천3백만년~1천9백만년 전)에 증봉산기(甑峰山期) 현무암으로 대표되는 현무암 용암이 분출하여 백두산 지역을 중심으로 용암대지를 형성하였다.
이 직후인 약 1천6백만년~1천5백만년 전에 백두산 남쪽에서는 장백기 현무암, 북쪽에서는 내두산기 현무암이라고 불려지는 현무암 용암이 분출하여 광범위한 용암대지를 형성했다.
제 3기말 플라이오세(약 2백90만년~1백70만년 전)에 백두산 일대에서는 열하식 분출을 수반한 중심식 분출이 활발하게 일어나 천지지역을 중심으로 광활한 용암고원 및 용암대지를 형성하고 백두산 화산체의 하부를 이루는 화와이형 순상화산체를 형성했다. 화산체 경사각은 5~6도로 평탄하며 분포면적은 약 1만 5천km²에 이른다. 화산체 밑바닥의 직경은 약 1백30~1백50km다.
백두산 주변의 지질도
분화구 부근인 천지지역의 현무암 두께는 약 3백m이고, 평균두께는 약 1백 10m로서 분포고도는 해발 6백~1천1백m다. 백두산 외곽으로부터 북쪽과 동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넓고 평탄한 용암대지를 이루고 있다. 이 현무암을 군함산기(軍艦山期)현무암이라 부른다. 백두산 순상화산체를 형성한 다량의 현무암질 용암 분출 후, 지하의 마그마 성분은 점성이 비교적 큰 산성마그마로 바뀌고 화산활동 양상도 폭발적이며 간헐적으로 일어났는데 이를 백두산기(白頭山期) 화산활동이라 부른다.
백두산기 화산활동은 61~55만년전, 44만년전, 33만년전, 28~22만년전, 10만년전, 그리고 9~8만년전의 6기에 걸쳐 알칼리조면암 용암 유출과 화산쇄설암 분출이 번갈아 일어났다. 이들 화산분출물이 번갈아 쌓여 점차 큰 규모의 백두산 성층화산추를 형성했다.
백두산 성층화산체가 형성된 후 지하 심부의 마그마 방은 평온하게 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광물의 정출에 수반하여 휘발성 성분이 점차로 집중되고 마침내 수증기압이 커지면서 다량의 부석과 화산회를 분출한다. 이를 백운봉기(白雲峰期) 화산활동이라 부른다.
백운봉기 화산활동은 이때 분출한 고온의 부석과 화산회의 퇴적층 사이에서 발견되는 탄화목의 탄소동위원소 연대를 측정한 결과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1천4백10~1천50년 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운봉기에 많은 양(50㎦ 이상)의 보석 화산회 화산쇄설물이 분출되면서 천지 하구 안쪽 벽이 심하게 파괴되고 함락되어 칼데라가 형성됐다. 그리고 칼데라에 물이 고여 오늘날의 천지가 만들어졌다.
1413년, 1597년, 1668년, 1702년에 천지를 중심으로 화산회와 가스를 내뿜었다는 기록이 이조실록에 남아 있으나 그 분출물은 잔존하지 않는다. 그 뒤로도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 1724년, 1898년, 1900년, 1903년에 비교적 소규모의 화산지진 및 화산회의 분출이 있었다는 기록이 중국 문헌에 전해진다고 한다.
백두산 최상부의 백운봉기 화산분출물은 황색, 흑색, 백색의 부석과 화산회가 주종이며, 천지 주변의 백운봉, 천문봉 정상과 천지 동남쪽 삼포 일원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천문봉에서 부식층 두께는 약73m 이며, 천지에서 멀어질수록 두께는 점차 작아져 삼포 일원에서는 30cm~1m에 이른다. 이때 분출된 화산회가 멀리 동해와 일분 혼슈 북부 및 훗카이도 일원까지 날아가서 쌓인 응회암이 산재한다. 일본학자들은 이를 'B-Tm ash'(The Baedusan-Tomakomai ash)라 부른다. 응회암의 두께는 일본에서는 약1~5cm 이고, 동해에서는 해양시추 자료에 의하면 1~16cm에 달한다.
'B-Tm ash'의 분포 및 두께.(일본 미치다 교수 자료, JS는 시료명, 숫자는 cm 단위의 두께를 표시한다.)
일본 북부에서는 이 B-T-화산회를 1천년 전에 분출된 화산 분출물의 기준, 즉 열쇠층으로 사용한다. 이보다 아래에 있는 화산회층은 그 이전에 쌓인 지층으로, 이보다 위 화산회층은 그 이후에 쌓인 지층으로 간주하고 있다.
백두산 천지로부터 멀지 않은 함경북도 삼포 일원에는 나무들이 완전히 숯으로 되어 있다. 또 천지 가까이에서 매몰된 나무 일부분이 숯으로 탄화돼 있고 화산쇄설암후가 협재되어 있다. 이는 고온의 화산회가 흘러 삼림을 덮음으로써 화산회가 접촉하는 부분이 매몰되고 탄화된 것으로 해석된다.
천지 주변의 부석과 화산회 퇴적층에서 자주 발견되는 탄화목은 당시 생장하던 버드나무, 가문비나무 등인데 탄화목의 탄소 동위원소연대는 1410년전, 1230년전, 1153년전, 1050년전으로 보고되고 있다.
백두산 천지 주변 퇴적층. 백두산 천지 주변의 부석과 화산회 퇴적층은 화산활동이 왕성하던 백두산의 역사를 말해준다.
얼마 전부터 일본과 한국 일부에서 발해멸망이 백두산 분화 탓이라는 주장이 제기되 관심을 끌고 있다. 백두산 주변과 개마고원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발해왕조(서기 698~926년)는, 신라에게 망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송화강 이남 지역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확보하여 세운 국가였다. 이들은 고구려 문화를 물려 받고 당나라의 관제와 문화의 영향에 힘입어 '해동성국'을 이룩하여 국세를 떨쳤으나, 14대 229년만에 일시에 멸망했다.
서기 926년을 전후하여 천지 칼데라를 형성한 백운봉기 화산활동 절정기에 화산분출로 인한 고온의 화산회가 편서풍을 타고 동쪽의 발해 일대를 뒤덮고(베수비우스 화산분출로 고온의 화산회와 화쇄류가 폼베이시를 멸망시키듯), 화재 및 지진 등으로 인한 막대한 인명손실 및 재산상의 피해가 발해왕조 내부사정과 연계돼 멸망을 촉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 진위 여부는 확인이 되지 않았지만 재미있는 추리임은 분명하다.
[백두산] 화산폭발 규모
천년동안 잠을 자던 백두산의 분위기가 뉴스에 연이어서 화제가 되고있습니다.
천지에있는 물도 10cm ~28cm 높아지고
수북히 쌓인 마그마가 보이기 시작했으며
전세게 지질학자들은 짧으면 2년에서 길게 4년안에
백두산이 폭발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백두산은 용암이 잘게 부서져 쌓인 부석층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천지 부근의 부석층은 두께가 20m 가량 된다
백두산이 폭발 하게된다면 그 피해의 규모는 어느정도 일지 아무도 예견할수 없습니다.
아래사진은 백두산과 똑같은 크기의 피나투보화산폭발 사진이니 참고하세요.
1991년 VEI 6 규모의 필리핀 피나투보화산 폭발사진이며 백두산과 같은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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