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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1. 묵상글 ( 부활 제3주일. - 우리의 사랑과 약함을 다 아시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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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1. 부활 제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의 사랑과 약함을 다 아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아주 곤란한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데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자신있게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작은 사랑을 가지고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작을 뿐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사랑에 비교하면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한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저는 사랑한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분명 사랑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사랑하냐고 물으면 팔을 둥그렇게 그리며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고 자신있게 답하는 아이들에 비해
우리는 우리의 사랑의 크기를 알기에 그렇게 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문은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대답처럼 주님은 우리의 사랑을 아시고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아십니다.
주님의 물으심은 과거적 사랑 그러니까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사랑이 아니라
미래적 사랑 그러니까 지금부터 앞으로 사랑하겠냐고,
곧 사랑의 의지를 물으시는 겁니다.
이것은 고백 성사의 의미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은 모르시기에 실토하는 것이 아니라
다 아심에도 뉘우치는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는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사랑 의지를 물으시는 것이고.
그리고 당신을 위해 사랑의 의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양 떼를 위해 사랑 의지를 물으시는 것이며
결국 당신께 대한 사랑 의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양 떼를 사랑하고 잘 돌보겠는지 물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시고
"내 양들을 돌보아라."하고 부탁하십니다.
이는 마치 남편이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먼저 죽으면서
아이들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내가 아이들을 잘 돌보지 않을까 봐 염려하여 부탁하는것이
아니라 혼자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하는 거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을 세 번 물으신 것은
세 번 배반한 것에 대해 세 번의 사랑 고백을 요구하신 측면도 있지만
이제 당신 대신 그리고 당신 없이 당신 양들을 돌봐야하는 베드로의 고통을
헤아리며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마음 다지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처럼 죽어야 할 베드로의 베드로의 미래를 예언하십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다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베드로도 그렇고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것은 이렇게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분을 따르게 마련이지만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그분의 십자가 길까지 따르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대답을 자신있게 할 수 없는 우리지만
우리의 사랑과 약함까지 아시는 주님을 믿고서 사랑의 고백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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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1. 부활 제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5월 1일 부활 제3주일
고 도미니코 ofm
부활 3주일에 우리는 요한 복음의 끝부부인 21장의 내용을 듣습니다. 21장은 베드로의 사목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의 사목직을 맡기기 전에 당신께 대한 사랑을 확인하게 하십니다. 티베리아 호수에서 시몬 베드로를 비롯하여 제자들이 고기잡이를 나갔지만 제자들은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이처럼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악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아무런 신앙의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실패에 애정어린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얘들아’라는 이 호칭은 바로 애정어린 친밀감의 표시입니다. 부활체험의 시작은 이처럼 따뜻한 마음의 건넴에서 시작됩니다. 얼어 붙은 마음에 따뜻한 사랑으로 인해 녹듯이 사라지는 사랑의 체험이 바로 부활체험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 줍니다. 부활체험은 제자들처럼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잡이 생활의 비천한 인생을 따뜻하게 맞이 해주시는 분은 바로 사랑의 주님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세번의 질문을 통해서 부활체험이 눈높이 사랑으로 내려오심을 깨우쳐 주십니다. 첫번째 질문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시몬 베드로는 자신있게 대답했을 상황이지만 예수님의 부인한 가슴아픈 과거가 떠올라 가슴이 절여오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질문에 나오는 ‘사랑하다아가파오)’ 동사는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조건없는 순수한 사랑을 뜻하고 베드로의 대답에 나오는 동사(필레오)는 친구 사이의 우정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질문은 앞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에 맞추어서 질문을 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입니’다. 이 질문은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제쳐 놓음으로써 눈높이에 맞게 질문을 하십니다. 더 나아가 세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제쳐놓음은 물론 더우기 동사까지 베드로가 이해하는 좋아함의 의미로 더 낮춤으로써 질문의 강도를 더욱 떨어뜨리십니다. 세 번의 질문에 베드로는 똑같은 대답을 하지만 마지막 질문의 대답에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집니다. 그분이 질문의 강도를 떨어뜨리셨을 뿐 아니라 세 번에 걸친 자신의 부인을 되갚기라도 하듯 세 번이나 질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섭섭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은 베드로의 대답에 한결같이 “내 어린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십니다. 바로 사랑의 일관성을 보여주십니다.
교회의 사목직은 주님께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둡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극도의 순수한 사랑만을 요구하지는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호언장담했다가 힘없이 배신의 늪에 빠져 버린 베드로에게 최고의 사목직을 맡기십니다. 실패한 적이 없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넘어진 경험이 있는 이가 그 심정을 알기에 넘어진 이를 더 잘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이 사목직은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의 개인적 사목직이기도 합니다. 부서진 마음과 비천한 체험을 통한 사랑의 부활체험을 겪은 후라야 진정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5월 영적 수련 성월 1주간 회개/겸손✝️
금주간 성서읽기 사도 20-23장
✝️ 1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볼세나(Bolsena)의 피묻은 성체포
이탈리아 -1263년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황의 부탁으로 열절한 사랑과 함께 다음과 같이 반복되는 문구를 사용하여 환회가 넘치는 축제문을 썼다.
곧, “라우다 시온(Lauda Sion), 살바토렘 (Salvatorem) …당신의 구세주, 당신의 스승, 당신의 목동, 당신의 양육자, 시온아, 찬미가를 부르세! "
우리도 짧은 지상의 삶을 사는 동안 할 수 있는 이러한 찬미가를 소리맞춰 노래 부르자. 성체 축일은 마땅히 성대한 행렬을 해야 하는 유일한 축제이며 성체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을 꽁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다. 종교의 모든 표현을 거리로부터 내쫓아 교회의 담 안에 가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사람들에 맞서서 이런 공식적인 종교의 예식을 통해 하느님의 권리를 변호하려 하지만 1 년 동안에 얼마나 많은 세속적인 행렬과 행사 개최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더구나 감정을 상하게 하는 행렬, 부끄러움을 모르는 옷차림, 방해를 주는 시끄러운 소리까지도 허용되고 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로 돌려라 ! 우리는 적어도 1 년에 한번쯤 우리의 거리와 광장을, 또 우리의 창문과 발코니를---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그 많은 은혜에 감사를 드려야 하는---주님이신 하느님께 공식적으로 공경을 표시하는 곳으로 변화시키도록 하자.
성체 축일은 700 년 동안 실시되어 왔다. 우리는 이 성체 축일을 보전하고 아름답게 해야 한다. 우리가 언젠가 천상의 행렬에서 하느님을 영원무궁 찬미하고 찬양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선사해 주시는 동안 이 축제에 참여하도록 하자.(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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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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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1. 부활 제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금 제 방에는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물론 전임 신부가 보던 텔레비전이 있었지만, 이것으로 인해 시간을 너무 낭비하는 것 같아서 치워버렸습니다. 텔레비전만 켜면 볼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정말 많은 채널이 있습니다. 전에는 공영방송만 있어서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케이블방송에 종편까지 너무나 많은 채널이 있어 무엇을 봐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한번은 바쁜 일과를 모두 끝내고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그때 채널을 하나하나 옮기면서 무엇을 방송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영화, 드라마, 예능, 뉴스, 스포츠…. 이렇게 채널을 돌리다 보니 1시간이 금방 지나가는 것입니다. 1시간 동안 리모컨 버튼만 누른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 도둑이라는 생각에 텔레비전을 치웠지요.
우리 삶에는 전념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상관없지만, 영향을 받고 있다면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전념하지 못하는 것들도, 다른 것들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는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엄청난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하지요. 이는 교회의 상징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하기만 제자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인해서 인간적인 모든 예상을 뒤엎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모여 커다란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특별히 이 기적 후에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마지막으로 당부하십니다. 이는 교회를 맡기는 중대한 순간입니다. 우선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시지요. 이때 베드로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수난 전에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라고 장담했었습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했고,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에 함께하면서 이런 자신감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예수님과 함께했기 때문이지요.
이제 베드로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대신 담대히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면서, 질문하시는 주님께서 사람의 마음속까지 다 아신다고 겸손하게 아뢰고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재주는 주님 앞에서는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전념해서 굳은 믿음을 갖춰야 합니다. 사실 이런 부족함도 주님께서는 함께하셔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전념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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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무얼 하건 적당히 대충하지 말라. 열 가지를 해야 한다면 스무 가지를 하라(데니스 웨이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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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1. 부활 제3주일. 키엣 대주교님.
선교의 힘
사도행전은 일반적으로 성령의 복음,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 생활, 선교의 노력 등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기 사도들은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셨고 성령의 말씀대로 다시 부활하셨고 모습을 드러내셨다고 다소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대사제가 사도들을 심문하는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추종자들은 비록 배우지 않은 어부들이었지만 매우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증언을 하였기에 대사제는 놀랐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기꺼기 고통을 받아들였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하다”고 하였으며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라며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의 권능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대사제는 너무나도 강력하고 명확한 증언으로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습니다.
베드로와 그의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초기 개척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의 존재를 확신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으로 사도들의 설교는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신도들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으며, 서로 연대를 맺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직접 눈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야 스승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한 그들에게 물가에 서 계시던 예수님이 다시 그물을 던지라고 하자 그들은 아주 많은 물고기를 잡아 올렸고 그제서야 스승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백쉰세 마리의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은 당시 바다 밑 물고기의 종류를 백쉰세 종류로 보았기 때문에 바다 속 모든 물고기를 잡을 만큼 많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는 어부의 배와 같습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선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교회는 영혼을 건져 올리는 곳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의 영혼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어부는 닻을 내리고 둑에 앉아 한가로이 쉬는 것이 아니라 돛을 달고 깊고 넓은 바다로 나가야 비로소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영혼을 구원하려면 교회가 조용히 그 자리에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멀고 험한 길을 찾아 떠나는 노력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거센 파도와 바람을 무릅쓰고 나가야 하며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선교는 수 많은 어려움과 위험을 받아들이고 감내해야만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야 하는 것은 주님의 바램이며,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사명-선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의 노력에 의해 결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밤새 지치도록 일을 했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한 교회 활동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니 그들은 기적처럼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고, 그들과 같이 배에 올라타지도 않았으며, 제자들을 위해 파도를 가라앉히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늘에 계셨기에 호숫가 어느 곳에서라도 제자들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만을 알려주셨습니다. 비록 우리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언제나 교회 안에 계십니다.
“나는 세상이 끝나는 곳까지 언제까지나 너희들과 함께 할 것이다”
교회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하신 주님이지만, 그분의 존재 속에는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강력한 힘은 규율과 힘이 아니라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이 깊고 용서가 많을수록 교회는 강해집니다. 좋은 결실은 안정되고 정착되었을 때가 아니라 어려움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갔을 때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떠날 때만이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고, 고통이 클수록 교회는 강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교회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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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1. 부활 제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생명이 생생하게 돋아나는 5월은 영원한 생명을 잉태하신 어머니 성모님의 달입니다. 오늘은 부활 3주일이며, 생명주일입니다. 봄이 싹을 틔우며 생명을 증명하듯이 오늘 <말씀전례>도 생명을 증언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증언합니다. 최고의회 앞에 선 베드로는 성령의 감도를 받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증언하여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사도 5,30)
<제2독서>는 하느님나라의 천상전례에서 수많은 군중이 환호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곧 하늘과 땅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생물들이 바치는 경배와 찬미의 노래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생생한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아침을 해 먹이시며 생명을 섬기시고 살리시는 장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발현하셨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절망에 빠져있고 과거의 생업이었던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물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엉뚱한 곳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어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요한 21,6)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날 아침을 열치시고 오시어,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식사를 준비하시고 부르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을 먼저 알아본 이는 요한이었지만, 그분께 먼저 달려간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요한은 관조적이고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사랑을 받은 이가 되고, 베드로는 일을 맡은 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른 것은 와서 시중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그들에게 시중을 드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 부르시기보다 우리를 당신이 사랑하시려고 부르십니다. 결국,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고 깨우쳐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지만, 당신께서는 그들을 소중히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믿는 것보다도 당신은 훨씬 더더더~ 저희를 믿으십니다. 그러니 사실은 저희의 믿음이 아니라 당신 믿음으로 저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당신은 훨씬 더더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저희를 사랑하십니다.
사실 오늘도 저희는 주님의 그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또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희망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더더~ 저희를 희망하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저희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자리가 되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숯불에 구운 물고기’는 수난 받으신 당신의 몸을, 그리고 당신이 몸소 준비하신 ‘빵’은 찢어지고 바수어진 당신의 몸을 드러내줍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바쳐 부활생명을 담은 사랑의 아침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당신의 밥상을 받아먹는 일인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시중을 받는 일,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당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당신의 향기를 뿜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퍼 먹이시려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을 아는 일이요, 그리고 그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님이심을 아는 일입니다. 그래야 부활생명으로 살아나 당신의 사랑과 부활생명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저희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려야 할 일입니다. 형제를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해야 할 일입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구워 드려야 할 일입니다. 기쁨으로 부활생명을 경배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은 제가 저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리렵니다.
내 형제들을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겠습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굽겠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오시어 아침을 드십시오. 사랑합니다. 주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
이 아름다운 아침, 당신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을 먹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당신 생명과 사랑을 먹고 자란 제가 종일토록 당신의 색깔을 내고,
당신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
오늘 저의 삶이 당신께 차려 올리는 밥상이 되게 하소서.
형제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게 하소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의 생선을 굽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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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1. 부활 제3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아주 구체적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식탁에서 빵을 들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 사랑이신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시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주님께서는 모든 능력을 지니셨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믿는 이들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대개는 머리로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가슴으로 새기고 손발로 움직여서 열매를 맺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머리에서 머무는 믿음은 삶에서 아무런 역사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결국 그런 사람은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앞날만 걱정합니다. 그렇지만 참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문제는 믿음을 보여줄 기회입니다. 환난은 두려움으로 다가오지만 믿음의 눈은 기회로 포착합니다. 그야말로 문제는 최선을 다할 기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제자들은 실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철석같이 믿었던 구세주께서 힘없이,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으니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시쳇말로 끈이 떨어졌으니 앞날이 막막합니다. 이제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체념한 듯 다른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가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동거 동락하던 예수님과의 생활을 내려놓고 고단한 일상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고기를 잡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경황이 없는 그날 고기가 눈에 보였겠습니까?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힘들고 지친 상태인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못 잡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못잡았다.’는 것은 자기들의 먹을 양식조차 구하기 힘든 무력함과 고단함이 느껴지는 자리입니다. 바로 이 절망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대로 하였더니 감히 생각지도 못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시키는 대로 하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낳는 법입니다. 또한 순명은 눈을 뜨게 해 줍니다. 말씀대로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고 놀라운 결과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 받던 제자가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눈이 뜨인 것입니다. 사실 그때까지는 옆에 계신 분이 예수님인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지금 육적인 눈을 뜨고 있지만 주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눈 뜨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졌듯이 말씀에 순명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1-22). 우리를 구원할 힘이 하느님 말씀에 있는데 왜 말씀대로 실천하기를 주저하십니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렇게 했을 때 정말 축복이 주어질까?’ 하는 의심 때문입니다. 지금당장 불이익을 당하고 손해 보는 것 같은 마음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귀한 말씀이 주어져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말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사도5,41)하였습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14,23).하고 말씀을 지키는 사람과 함께 사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거기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구워주고 빵을 주시는 행위는 바로 우리에 대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고기를 끌어올리기 전에 이미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수고로 잡은 고기를 보태서 나누어 주셨습니다.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은 ‘내가 아침상을 준비해 놨는데 너희가 보탤 것이 뭐 좀 있느냐?’ ‘내가 나눌 음식을 준비했으니 너희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은총에 우리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협력을 통해 더욱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기운을 북돋아 주시고 원기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그분을 보고 누구도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고 난 후 입니다. 이른 아침 왠 젊은이가 나타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했는데 그들이 어부라는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순명을 한 것입니다.
순명은 비합리적이고 상식에 어긋나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고 지극히 마땅하고 옳은 일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순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선원들이 선장의 말을 듣지 않으면 배가 산으로 갑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군대는 오합지졸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늬만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순명은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했고, 많은 고기를 낚는 기적을 낳기도 했습니다. 순명은 이성과 판단의 희생입니다. 어부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다른 어느 것보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삶이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데서 오는 포기의 순간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말씀에 순명하는 가운데 주님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말씀대로 실천하는 곳에 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십니다.“너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종,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너를 내치지 않았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이사41,9-10).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하시며 길을 알려주시는 주님, 말씀 그대로 행하여 그물을 가득 채워서 당신의 말씀이 곧 진리임을 가르치신 주님, 몸소 생선과 빵을 들어 나누어 허기진 배를 채워주시는 생명의 주님께 대한 믿음이 더해지길 기도합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믿음의 순명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10년째 강의 노트를 바꾸지 않는 교수에게 학생이 물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어찌 10년이 넘도록 똑같은 강의 노트를 그대로 사용하십니까?”그랬더니 교수님께서 당당히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는 그것도 모르나? 진리는 영원한 거야!”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가르침은 진리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는 한주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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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1. 부활 제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학교에서 처음으로 기타를 배웠습니다. 그때 배운 노래 중에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신학적으로 참 의미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추구하고, 사랑하는 ‘돈과 잘못된 가치’를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남들이 가니까 무조건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돈은 하느님을 대신하는 이 시대의 우상입니다. 잘못된 가치는 성공, 명예, 권력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신념입니다. 부활시기를 지내며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의 사랑아 이제 네 눈을 떠봐요./ 삶의 참된 의미를 찾아보아요./ 네가 올라있는 그들은 너의 사랑/ 이제 내려와 모두 함께 노래 불러./ 나의 귀여운 사랑 나비야 날아라./ 세상의 저 모든 꽃들에게 희망을/ 너의 줄무늬 쳐진 겉옷을 벗어라/ 그때 세상의 모든 꽃들 노래하리./ 네가 추구하던 세상에 허황된 것/ 허공에 쌓아진 시기와 질투의 탑일 뿐/ 오욕과 싸우면서 세상에 아름다운 사랑 이루어요./ 너 비록 추한 몰골의 자그만 애벌레이나/ 너 죽어 사라질 때 그 위에서 떠 나르는/ 한 마리 나비되어 들판에서 피어있는/ 이 꽃들에게 희망을”
주인공 줄무늬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이 가고 있는 길을 따라가다가 드높은 기둥에 오르게 됩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남들이 가니까 가야 할 것처럼 여기며 따라 오릅니다. 거기서 운명의 노랑 애벌레를 만나는데 이들은 오르던 일을 멈추고 내려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에 집중합니다. 그러다가 줄무늬 애벌레는 자신이 오르다가 내려온 그 기둥을 떠올리며, 가보지 못한 기둥 꼭대기에 대한 갈망으로 사랑하는 노랑 애벌레를 떠납니다. 줄무늬 애벌레가 다시 오른 그 기둥은 다른 애벌레를 딛고 오른 애벌레 기둥이었습니다. 자신이 남을 딛고 오르지 않으면 남이 나를 딛고 오르는 치열함 속에서 줄무늬 애벌레는 마침내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줄무늬 애벌레가 그 위에서 목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애벌레들에게 밟히지 않기 위해서 올라오는 다른 애벌레들을 떨어뜨리고, 밟아야 한다는 현실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곁에 날아오르는 나비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나비의 시선에 익숙한 사랑을 느끼며, 내려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내려오는 동안 ‘저 위에는 아무것도 없어’라고 말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혼자 내려와 노랑나비를 다시 만나고 나비의 인도로 고치를 만듭니다. 그리고 멋진 호랑나비가 되었습니다.
떨어트려야만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욕망의 사다리가 있습니다.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여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던 헤로데가 올라갔던 사다리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모두의 죽음 보다 좋다며 예언을 했던 가야파가 올라갔던 사다리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무죄한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했던 빌라도가 올라갔던 사다리입니다.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던 유다가 올라갔던 사다리입니다. 나약함과 두려움을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가 올라갔던 사다리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 몰았던 러시아의 대통령이 올라가는 사다리입니다. 안일함과 나태함으로 주어진 직무를 소홀히 하면서 일상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올라가려는 사다리입니다. 복음의 기쁨을 소홀히 하고, 세상 속으로 세상의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인이 올라가고 있는 사다리입니다. 저 역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저의 이기심과 저의 욕심을 따라 갔던 적이 많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베드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면서 박해를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면서 멸시와 비난을 받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돌에 맞아 순교했던 스테파노 부제가 걸어간 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했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걸어간 길입니다. 환경 미화원을 위해서 따뜻한 어묵 탕을 준비한 포장마차 주인이 걸어간 길입니다. 헌혈증을 가져오면 국밥을 무료로 주었던 국밥집 주인이 걸어간 길입니다. 홀로 성당에 남아 조용히 기도하는 어르신이 걸어간 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따라, 우리도 우리가 가졌던 신앙을, 우리가 만났던 소중한 이웃들을 처음처럼 간직하고 사랑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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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1. 부활 제3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불씨를 다시 지펴주시는 주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아침이 될 무렵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로 하여금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도록 해주시고, 손수 아침을 준비하시어 같이 식사하시며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먼저 그분을 알아봅니다(21,7).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일곱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고 돌아가시자 두려움과 좌절에 빠진 나머지 스승을 버리고 도망갔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희망을 걸었던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예전의 일터로 돌아와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죽음을 넘어서는 빛을 보지 못한 채 밤의 어둠 속에 있었던 그들은 예수님의 ‘숯불 사랑’으로 사랑과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렇게 제자들을 절망과 당혹감, 좌절감과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이끈 빛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겪었던 이 과정은 내 안에서도 되풀이되곤 합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 사회적 불의 앞에 무기력함을 느낄 때,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고 오해를 받을 때 쉽게 내가 원하는 일상에 안주해버리곤 하지요.
참으로 그런 어둠의 순간이야말로 더 깊이 주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으며, 사랑이신 주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때에도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다가오시어 내 일상의 그물이 터지도록 풍요롭게 해주시고, 생명을 시작하는 아침밥을 차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이 피곤하고 고달플 때일수록 내가 만든 동굴이 아니라 주님을 애타게 찾아야 할 때입니다. 제
자들이 아침을 먹은 뒤 예수님께서는 으뜸 사도인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첫 번째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21,15)고 묻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양들을 쳐야 할' 으뜸 사도로서 지닌 막중한 사랑의 책임을 상기시켜 주신 것이지요.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차례나 거듭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21,17) 하고 대답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난 뒤 세 차례나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배신했었지요. 아마도 그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 쓰라린 아픔이 다시 떠올랐을 것이고 죄책감과 수치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의 심정을 너무도 잘 아시면서도 거듭 사랑을 확인하셨을까요? 무엇보다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 양들을 치며, 교회의 반석이 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질문을 통해 베드로 스스로 자신 안에 있던 죄책감과 수치심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정화된 사랑을 지니길 바라셨을 것입니다. 거듭 되는 질문은 사랑과 희망의 불씨였던 것입니다.
매순간 나의 어둠과 절망, 실패와 고통, 죽음의 상황, 죄책감과 수치심의 한복판으로 다가오시어 다시 사랑의 불씨를 되살려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려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펴주시는 사랑의 모닥불에 나의 고통과 시련,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를 올려 희망을 숨쉬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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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1. 부활 제3주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살해된 어린양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시나이다
1. 말씀의 흐름
부활 제3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는 말씀은 예수 부활 이후 초대교회의 여러 상황을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이번에는 단지 당신 부활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사도로 진급시키고 그들이 사도로서 복음을 전할 때 일어날 미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 보면, 과연 제자들은 이전의 비겁하고 소심했던 태도를 버리고 용감하고 지혜로운 사도가 되어 대사제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신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사도 5,30). 그리고 오늘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의 공생활과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박해와 수난에 대해서 천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즉, 지상에서 진리를 위해 의인들이 당하는 수난이 지니는 영적인 의미와 품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천상에서 전례가 거행되는데, 악인들의 계략과 죄인들의 방관으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이제 권능과 지혜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고 천상의 성인들이 입을 모아 찬미하는 것입니다.
2. 변화무쌍한 사람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죄를 저지르거나 이익을 도모할 때 똑똑해집니다.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은 나름대로 치밀하게 완전범죄를 기획했었습니다. 군중이 집에 돌아간 어두운 밤을 틈타서 밀고자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체포하는 과정이 그러했고, 혁명당원들과 야합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후에 빌라도를 윽박질러 정치범에게나 내리는 십자가형을 예수님께 언도하도록 유도해 낸 과정이 그러했으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무덤이 비게 되자 이 빈 무덤이 부활의 징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자기 스승의 시신을 훔쳐가서 무덤이 빈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라고 경비병을 매수하여 여론을 날조하고자 나름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예수 부활로 이 모든 범죄 기획과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악인들이 부질없이 저지르는 일들이 이렇습니다.
또한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로부터 도움을 받으려던 여러 사람들도 머리를 많이 썼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마귀 들린 딸을 고쳐 보려고 강아지도 주인이 상에서 흘린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느냐는 기발한 논리로 예수님의 양보를 이끌어냈으며, 로마인 백인대장은 죽을 병에 걸린 자기의 유다인 종을 고쳐 주기 위하여 군인다운 충성심과 극진한 예우로 예수님을 감동시키기도 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군중은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는 예수님께 열광하여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시겠다고 갈릴래아 호수를 거의 반바퀴나 돌아서 그 먼 거리를 쫓아오기까지 했었습니다. 눈 앞의 이익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노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눈물겨운 구석이 있습니다. 흔히 얻을 이익보다 더 큰 희생을 바치곤 하기 때문입니다.
3. 깨달음에 굼뜨고 무딘 제자들
예수님의 제자들은 더 딱했습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엄청난 결단을 내려서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자기가 종사하던 생업이 있었고 가족과 이룬 가정도 있었는데, 이를 버리고 따라나섰지만 결단에 따른 기대가 너무 커서 계산을 하느라고 바쁜 나머지 예수님의 가르침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도 답답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아서라도 믿으라고 하시며, 숱한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제자들은 자기들 눈앞에서 일어난 기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머릿속에 꽉 차 있던 생각은 스승의 능력과 명성에 기대어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현세적 이익과 출세였습니다. 그러기에 스승이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세 번이나 예고하던 당시에도 서열 다툼을 일삼았고 정작 스승이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자 믿지 못했던 것이겠지요. 부활시기를 맞이하면서도 도무지 부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즈음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제자들에게서 미리 볼 수 있습니다.
4. 예수님의 대책
악인들이 저지르는 죄에 대한 예수님의 대책은 십자가 수난이었고, 이익만을 좇는 사람들에 대한 대책은 부활이었으며, 제자들에 대한 대책은 발현이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은 후속 대책을 마련하셨으니 이것이 오늘 복음의 상황입니다. 일단 당신 부활에 대한 믿음을 확보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갈릴래아로 불러 모으셔서 풍어의 기적을 보여주시는 한편, 제자들의 으뜸으로 삼으신 베드로는 따로 독대를 하시며 신앙을 확인 점검하셨습니다. 이 기적과 독대가 그분의 심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악과 이익을 도모하느라 어지러운 상황을 완성하시려는 사랑의 심판입니다. 의로운 사람을 그 의로움에 그치지 않고 거룩하게 성숙시키시어 어지러운 상황을 정리할 만한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구원의 심판입니다. 죄악의 혼돈 속에서 사랑으로 가득 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시는 창조의 심판입니다.
5. 지상의 혼돈, 천상의 전례
복음서를 쓰기 전에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에서 에페소를 비롯한 일곱 교회에 복음을 전하다가 황제의 상에 경배하라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를 거부한 요한은 파트모스라는 외딴 섬에 갇혀서 채석장 중노동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같은 박해를 받고 있는 일곱 교회 신자들이 걱정되어서 틈틈이 동굴에 가서 기도하다가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묵시록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도 어린 시절에 그분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그분의 수난도 목격했거니와 그 자신도 똑같은 수난을 당하게 되자, 그 수난의 영적인 의미를 한결 수월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묵시록의 4,5장은 지상에서 의인들이 겪는 수난이 천상에서는 거룩한 전례로 그 의미와 품위를 선포하는 것임을 믿음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기록입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어좌에 앉아 계시고, 복음을 증언했던 의인들을 상징하는 네 생물 즉 사자와 황소와 사람과 독수리가 찬양하며 수난을 겪고 순교한 무수한 신자들이 찬미하는 목소리가 그 핵심이었습니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묵시 5,12-13).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로지 천상의 관심사이며 이 일들을 선과 악으로 분별하고 그 중 선한 일에 대해서는 천상에서 전례로 거행함을 요한은 알려주었습니다.
6.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하는 용기
그러니 사도 요한이 천상에서 거행되는 전례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찬양하는 기도 소리를 현실의 박해 상황에서도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사도로 거듭난 제자들도 더 이상은 대사제와 유다교의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신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 살리셨다고 그 살벌한 자리에서 당당하게 선포하고 나섰습니다. 그네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을 대놓고 공개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천상에서 전례로 찬미할 만한 지상에서의 영적 전투 상황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군다나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하다고 응수했습니다. 그랬더니 대사제는 사도들을 매질하면서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협박을 하고 나서 풀어 주었습니다.
7.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
사도들은 사람에게보다 하느님께 순종할 수 있는 용기만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사제로부터 매를 맞고 공갈 협박을 당하는 모욕을 당하고 나서도 기뻐하며 최고의회를 물러 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없는 자격이 이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
사도들의 이런 모습은 대사제와 유다인들이 보기에는 정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후대의 신앙인들이 보기에는 이런 심리 상태는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지 못했던 죄를 뉘우치는 마음의 발로입니다. 도덕적 부채의식을 느낄 만큼 사도들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또 달리 보자면, 그만큼 예수님과 영적으로 한 마음 한 몸이 되었다는 변화이기도 합니다.
8. 나를 사랑하느냐?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따로 만나셨습니다. 풍어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이 사도직 소명을 새로이 다짐한 바로 그 자리에서 모두가 둘러 서 있는 가운데, 독대 아닌 독대로 신앙을 고백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실 때 두 가지가 특별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라고 당신이 이름지어주신 대로가 아니라, 당신을 만나기 전의 이름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 호칭을 부르신 뜻은 이제까지의 일은 다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자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고백 즉 당신을 믿느냐고 고답적으로 묻기보다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인격적으로 물으시면서, 그 자리에 둘러있는 다른 제자들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베드로의 마음을 배려하신 예수님의 깊은 마음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하느님께 순종하는 용기와 예수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는 것조차도 기뻐할 만한 자격이라고 생각하게 된 변화였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라면 백쉰세 마리로 상징되는 선교적인 풍성한 성과는 따놓은 당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서 당신을 사랑한다는 다짐을 세 번이나 받으시고 다음의 한 말씀으로 사람 낚는 어부로 낚으셨습니다. “나를 따라라”(요한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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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1. 부활 제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날마다, 끊임없이 물어야 할 질문-
계절의 여왕이라는, 신록의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5월 성모성월의 첫날입니다. 계속되는 부활시기 파스카 축제와 더불어 맞이하는 성모성월이 참 은혜롭습니다. 또 오늘 5월 첫날은 생명주일이자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이며 노동절이기도 합니다.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장 문희종 주교는 오늘 5월1일 생명주일을 맞이하여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사회를 향하여’라는 제목의 담화에서 “교회는 인간생명을 소중한 부부사랑의 결실이요, 하느님의 선물로 여긴다”면서 생명의 신비를 드높이 경축하는 사회가 되도록 함께 노력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어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김선태 주교는 오늘 5월1일 노동절을 맞이하여 ‘젊은이여 일어나라’(루카7,14)라는 제목의 담화에서 “불의한 노동 현장으로 내몰린 청소년 노동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그들이 자신의 꿈을 온전히 펼칠수 있는 인간적인 노동현장을 만들 것’을 당부했습니다.
참으로 생명 충만한 5월을, 기도와 노동이 조화된 풍요로운 5월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5월의 표제로 삼고 싶은 성구가 있습니다. 아니 5월뿐 아니라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물어야 할 화두와 같은 질문입니다. 제가 서품성구를 다시 쓰라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이 질문으로 하겠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아마도 주님을 세 번 배반했다가 세 번 사랑 약속을 하게 된 이 물음을 베드로는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 심기일전 늘 주님 사랑을 새로이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두부분으로 나뉘어 지는데 전반부는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신 주님에 관한 내용을, 후반부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당부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세계적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는 주석에서 앞부분은 모두 후반부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당부 말씀이라는 피날레를 위한 들러리에 불과하다고 강조합니다. 바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주님의 일성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 대신 내 세례명을 넣어 스스로 날마다 자문해야 할 물음입니다. 참으로 이 물음이 우리 모두 심기일전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생명을 사랑하고 노동을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세 번 연거푸 반복되는 물음과 답이 대동소이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얼마나 겸손해진 베드로인지 절제된 그의 사랑의 표현에서 주님 사랑의 진정성을 감지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저라면 베드로보다 더 분명히 용감히 고백하고 싶습니다. “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저뿐 아니라 대부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진짜 주님 사랑의 표현인지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사랑하라!”입니다.
누구를 사랑합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면 이웃사랑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원적 처방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무엇보다 주님 사랑입니다. 베드로 역시 참으로 절제된 겸손으로 주님 사랑을 고백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그리워, 간절한 사랑 때문에 부활하시어 맨먼저 찾은 제자들입니다.
바로 이 주님 사랑에 대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응답이 주님 사랑입니다. 성인들의 특징도 바로 이런 주님 사랑에, 주님의 몸인 교회에 대한 사랑에 있음을 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 말씀하셨고, 소화데레사는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임종어로 선종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든 수행은 주님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랑의 진정성은 이웃사랑으로 입증됩니다. 주님 역시 당신 사랑하는 사랑으로 형제들을 돌보라 하십니다. 형제들을 내 양들이라 하며 당신 사랑의 소유임을 세 번 연거푸 밝히십니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새삼 모든 이웃 형제자매들이 주님 소유의 소중한 양들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바로 여기있습니다. 주님의 양들인 형제자매들을 사랑함이 바로 주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이들은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둘째, “찬미하라!”입니다.
알렐루야, ‘찬미의 계절’ 파스카 축제 시기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저절로 찬미와 감사로 응답합니다. 참 좋은 영혼의 명약名藥이 찬미와 감사의 기도요 삶입니다. 참으로 순수한 주님 사랑의 표현이 찬미와 감사입니다. ‘알렐루야’ 찬미로 살다가 ‘아멘’ 감사로 끝나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하겠는지요!
찬미와 감사라는 영혼의 양날개를 달고 하느님 창공을 나는 자유로운 영혼들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묵시록은 찬미의 대상에 대해 분명히 보여줍니다. 천상의 존재들과 하느님과 함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바로 찬미의 대상이며 우리는 이런 천상의 찬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합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얼마나 장엄한 찬미의 고백인지요! 바로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주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사랑이 더욱 주님을, 이웃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게 합니다.
셋째. “선포하라!”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을 증언하면서 복음 선포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열화와 같이 터져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를 보십시오. 옛날의 겁많고 비겁했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체험했을 때의 놀라운 존재론적 변화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사랑에 대한 고백이 그대로 복은 선포의 삶을 통해 입증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얼마나 멋지고 담대한 복음 선포의 증인 베드로인지요! 박해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기쁨과 평화의 사도들! 정말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도들에게 선물하신 기쁨과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성인들의 공통점은 이런 고통과 시련중에도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주님의 참 좋은 선물, 기쁨과 평화를 지녔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따라라!”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 사랑은 제 운명의 십자가를, 제 책임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교적 삶으로 표현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서가 아닌 자발적 샘솟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예수님의 베드로를 향한 말씀은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 사랑의 진정성을 보장하는 주님을 따름입니다. 삶의 목표와 방향, 삶의 중심과 의미이신 파스카의 주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살아있는 그날까지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하십니다. 제 좌우명 애송 고백기도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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