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에 관한 시모음 4)
봄날은 가네 /鞍山백원기
끈질긴 녀석 때문에
억지로 추운 겨울 보내고
예년보다 앞서 달려온
꽃님들의 반가운 얼굴이
그렇게도 반가웠건만
이게 또 무슨 변고일까
자꾸만 날아오는 것을
듣도 보도 못했던
미세 초미세 먼지가
눈과 코를 어지럽히고
금족령처럼 살았던 시간
조금은 풀어질까 기다렸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
별의별 방해꾼 탓에
꽃님 벗님 모두 멀어지고
반갑던 봄날 떠나려네
봄날이 가네 /김동기
(시몬에게)
봄이 오는
줄을 몰랐는데
봄이 가는 줄은 알겠네
오고가는 것이
그뿐이랴
그대와 내가
남남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네
나는 놀라지 않았고
슬프지도 않기에 울지도 않네
다만 말문이 막혀
멍한 눈으로 하늘만 보네
그 곳에
떠오른 담담한 모습의 그대
볼수록 편안해 보여서
삶이란 것에 대하여 새삼
이가 시리도록 곱씹어 볼 일이다
생각 했네
그대가 아니고서
누가 이 가난한 나에게
살아온 진실을 고백하겠는가
나는 이름표를 달고 다녀도
불러주는 이가 없는데
지금 그대는 이름표 달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이 이처럼 불러주는
참 좋은 이여
내 것이 아니면 탐하지 아니하고
내 것일지라도 빈자리가 있으면
채워서 함께 웃어주고
잔꾀에 익숙하지 않아 항상
부자이면서도
낮은 자리만 지키던
당신의 이름표
편안하게 가시게나
아직도 못다 이룬 꿈이 있다면
이루고 행복하게 사시게나
봄과 가시는 이여
행운을
비네
봄날은 그렇게 간다 /최영희
나, 지나는 길목
하얀 목련꽃
한 잎씩 날면
봄날은 간다
봄날이 간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던 맹세는
하얀 꽃잎 위
헛맹세의 자국으로 남고
나는 다시 사랑하기 위해
이 슬픈 길을 돌아, 저만치
기억의 푸른 섬으로 있을 것 같은
내 안의 몽마르트
그 언덕을 오른다.
봄날은 간다 /이재무
봄날 오후 투명한 햇살
이런 날은 저승의 안방에까지가
훤하게 보일 듯하다
물 오른 신입생들의 통통 튀는 종아리
반짝이는 소음으로 세상은 청년이 된다
점심 거르고 전투처럼 치러낸 강의
내 달변의 혓바닥에 실린
진실의 질량은 얼마나 될까
불쑥 허기 몰려와 몸, 휘청거린다
먼 곳에서 크고 작은 길들은
꼿꼿이 고개 쳐들고 어디론가 바삐
달리고 있다 내가 뱉어낸 그 많은
장식의 허언들은 붕붕거리며 긴 복도
서성이거나 휴게실 담배 연기 자욱한
소음에 갇혀 날개 다친 나비처럼 비틀,
부유하고 있을 것이다
봄날 오후 햇살은 투명해서
이런 날은 맨살에 비단을 걸쳐도
아플 것이다
하지만 변한 것은 없다 밥그릇
비워내지 못하는 날이 늘어갈 뿐,
체중은 줄지 않고
누구의 안부도 그리 간절하지가 않다
꽃처럼 화들짝 피어나 한순간의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저 웃음의 화원 속으로
아직도 겨울을 다 보내지 못한
두꺼운 몸 밀어 넣으며
물 밖으로 아가미 내민 물고기처럼
헉, 가쁜 숨 몰아쉰다
모든 게 봄날 투명한 햇살 탓이다
봄날은 간다 /정민기
찔레나무 발목에서 잠시 속도를 줄인 바람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는다
육지의 등대처럼 환한 꽃불 켜고
길눈 어두운 벌 나비 좌초되지 말라고
한 그루로 서 있는 찔레여,
깨끗하게 눈물 훔쳐내던 자리마다
또다시 그리움으로 얼룩져 있다
가지마다 글썽거리는 눈물을 받아줄
손수건 하나 없어서 고개를 떨구고 있다
시냇물은 흐르며 젖은 꽃잎 헹구고
상처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얌전하게 향기로 아물어 낙화로
찔레나무 마르고 닳도록 걸어 나간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보고 있어도
미치도록 여전히 보고 싶어서
그렇게 무르익은 봄날은 가고 또 간다
봄날이 가네 /임영준
안녕
저기 사십구재를 넘어가는
내 순정이여
여태 변변한 씨 한 톨 심지 않고
교활한 세상에 일갈 한 번 못하고
시시하게 시들어 가는
붉은 꽃잎이여
몽롱한 벌판에서 헛물만 키던
철없는 방황이여
멀리 사십구재를 넘어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만신창이 내 꿈이여
안녕
봄날은 간다 /안재식
단단했던 동아줄
한 생(生)이 꺼져가는 찰나,
실낱같은 꿈마저
휘파람에도 너풀거리는 촛불이어라
만남과 이별, 사랑과 미움,
얽히고설킨 인연의 흔적들...
가슴에 내리는 눈물싣고
강으로, 바다로 흘러만 가네
남겨진 이들은 이제야 '돌아서 걷기'를 하고
어차피 인생은 연극이라며
순간, 한순간의 소중함과
그가 남긴 주마등을 이야기하네
그래, 봄날은 회한만 남긴 채
이렇듯 숨가쁘게 달려가고
그의 종점을 지켜보며
어느새 달려가고 있는 나의 봄날
봄날은 간다 /안도현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 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 갔으나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나는 흐드득 지는 살구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어느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어 달고 떠나려는
한척의 커다란 범선을 보았다
살구꽃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봄날은 간다. /황우 목사 백낙은(원)
봄 색시 오신다고 좋아라했는데
땋은 머리 흔들며 뒤태를 보이고
누른빛 감도는 보리 이랑도 춤춘다.
보리누름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고
옛 어른들이 말씀 하시곤 했는데
5월 중순 더위가 한여름 진배없다.
농부들은 못자리 마련에 여념이 없고
본답엔 물 담아 쓰레질이 한창인데
씨앗 뿌리는 농부들 손길이 분주하다.
계집죽고 자식 죽었다는 비둘기 울음소리
산천에 퍼지던 풍년가 아련히 그리운데
인생들아! 착각하지 마라.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허순성
당신께선 오랫동안
나의 봄을 온몸으로 펄펄 끓여놓았다
아, 수많은 그리움
그렇게 눈에 덮여간 세월은
지난해 봄
참꽃, 야윈 꿈길에 물관만 이어놓아
이제는 거울 보면, 슬픔이
그리움보다 더 자라는 게 보인다
그 한 끗 붙잡고, 어제인 양 반기고 싶어도
긴 여행 중이겠다 그대의 봄은
그러하여도
가슴에 다시, 회한(悔恨)이 살게는 말자
몸은, 청춘의 강을 이미 건넜고
남은 세월
망각을 부여잡는 일만 남은 우리 아닌가
올해는 봄의 마음으로 빈다
열정은 본래, 차디찬 것
청춘이 빌려 가 뜨거웁게 사용하다 돌려온 것
한 사랑 고이는 일로
지금 여행의 끝인가 싶은 아무 곳에서는 그대여
낯익은 길 나오면 알리라
잠시 숨도 고르며
인생사
어느 하나, 굳이 덧칠은 하려 말자
그까짓 거라 말고
조심히 손 모둠 하는 마음이지 못한
오래전에 죽어간 오늘과
무수히 버려진 미사여구들
듬성듬성 비어버린 망각의 자리에는
또, 무엇으로 채우며 살아가야 할까
또, 셈이 아니 되는 현실에 갇힐 때는 그대여
차라리, 실성이라도 하게 해다오
나, 허허 웃고나 살게
가는 봄아
청춘아
언제, 우리
꿋꿋이, 아니 외로운 적 있었더냐
어쨌든 봄날은 간다 /성백군
코로나-19로
집안에만 갇혀 있다가
달력을 보니 어영부영 5월 중순
봄날이 다 간다
마중도 못 했는데 배웅마저 놓치면
마음이 몸에 미안할 것 같아
사회적 거리 띄우기 눈치를 살피며
산기슭 식물원으로 접어든다
길가
아카시아 폭탄에
언덕 위 플루메리아 산화한다
혼자 피었다가 혼자 떨어지는 꽃들
인적 끊겨 봐줄 사람도 없는데
때 되었다고
봄날은 야멸차게 떠나 간다
이제 와
나 보고 어쩌라고
나이도 잊고 낙화 한 잎 주워 냄새를 맡으려
킁킁거리는데, 안쓰럽지도 않은지
봄바람이 자꾸 등을 떠민다.
봄날은 간다 /이재환
오지 않는 그 누군가를
혹시 나하고 기다렸는데
새봄이 오고 꽃이 피더니
꽃잎이 맥없이 떨어진다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계절이 바뀌어도 감감 무소식
세월은 어디론가 흘러가고
또 그렇게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이난희
연분홍 치마에 봄날을 보낸다고
휘날리며 봄날을 날려 보내버린다고
나 이제 알겠네
가는 봄날은 전부 그대 떠나던 날
그대 따라가 버렸다는 걸
빈 하늘 모퉁이를 몇 바퀴 돌고 나면
우거지는 여름 숲에 드는 작은 새
하나의 점이 되어 지워져 버리고
격정의 꽃들의 청산 허리에 피고
뜨거운 땅의 입김
냉기 가득한 바위산에 지리멸렬로 누운 날
봄은 다시 올 것이네
그림자마저 거두어 간 새는
부르지 못할 후렴만 남기면서
봄날은 간다 /정연복
꽃잎 바람에 나부끼며
봄날은 간다
님 향한 내 그리움은
끝이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아득한 세월 너머
아, 나의 그리움에도
끝이 있으면 좋으련만
님 향한 내 그리움에는
종착역이 없다
지는 꽃잎에 님의 모습 아롱지며
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