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택 의원 비서관으로 시작, 국회 전문위원 거쳐 한 지역구에서 내리 6選 기록
⊙ 1985년 민한당 탈당으로 2·12총선 승리 기폭제 역할
朴寬用
⊙ 74세. 동아대 정치학과 졸업, 한양대 행정대학원 박사.
⊙ 국회 전문위원, 11~16대 국회의원, 남북국회회담 대표, 대통령비서실장, 국회 통일위무위원장,
신한국당 사무총장, 한나라당 부총재·총재권한대행, 제16대 국회의장 역임.
현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이사장,
⊙ 저서: 《나의 삶, 나의 꿈 그리고 통일》 《다시 탄핵이 와도 나는 의사봉을 잡겠다》
《통일은 산사태처럼 온다》.
⊙ 상훈 : 청조근정훈장.
⊙ 1985년 민한당 탈당으로 2·12총선 승리 기폭제 역할
朴寬用
⊙ 74세. 동아대 정치학과 졸업, 한양대 행정대학원 박사.
⊙ 국회 전문위원, 11~16대 국회의원, 남북국회회담 대표, 대통령비서실장, 국회 통일위무위원장,
신한국당 사무총장, 한나라당 부총재·총재권한대행, 제16대 국회의장 역임.
현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이사장,
⊙ 저서: 《나의 삶, 나의 꿈 그리고 통일》 《다시 탄핵이 와도 나는 의사봉을 잡겠다》
《통일은 산사태처럼 온다》.
⊙ 상훈 : 청조근정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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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린 내가, 진보가 뭔지 사회민주주의가 뭔지 알 리가 없었다. 다만 “이건 공정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나는 상이군인들에게 “왜 이러느냐?”고 항의를 하다가 목발에 얻어맞았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분한 마음에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처음으로 “장차 정치를 해서 나라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하나의 계기는 어머니였다. 괄괄하고 정의감이 강했던 어머니는 민주당 정치인인 박순천(朴順天·2·4~7대 국회의원, 민중당 대표최고위원 역임) 여사와 가까웠다. 그 인연으로 어머니는 야당 활동에 열심이었다. 민주당 경남도당(당시는 부산이 직할시가 되기 전이어서 부산도 경남의 일부였음) 부녀부장 등을 지냈다. 부산의 민주당 신파(新派) 정치인들이 우리 집에 많이 드나들었다. 집 주변에는 늘 사찰과(현재의 정보과) 형사들이 서성거렸다.
4·19후 지프에 올라타 연설하던 朴正熙
1960년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3·15 부정선거 이후 나는 부산지역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했다. 4월 19일, 학생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때 나는 부산시내에 있는 경남도청 앞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과 시위를 하고 있었다. 마이크를 잡고 “국회 해산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는데, 계엄군이 왔다. 헌병 한 명이 다가오더니, “지금 계엄사령관이 왔는데 그 마이크를 사령관에게 넘겨 달라”고 했다. 마이크를 내주었다.
잠시 후 어깨에 별을 두 개 단 키가 작고 볼품없는 장군이 지프차 보닛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마이크를 잡더니 “여러분의 주장은 옳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지금은 계엄군이 사회질서유지를 맡고 있다. 여러분도 주장을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 해산하라”고 했다. 그가 바로 당시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을 맡은 박정희(朴正熙) 소장(少將)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4월 26일 하야(下野)하고 난 후 부산지구 계엄사령부에서 각 대학에 공문을 보내 왔다. 4·19 주동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대표를 계엄사로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부산지역 대학생 10여 명이 계엄사에 모였다.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라운드테이블 형태로 학생들이 둘러앉았다. 나는 박정희 장군의 왼편에 앉았다. 박 장군이 말했다.
“오른편에 앉은 학생부터, 계엄사가 앞으로 무엇을 해 주었으면 좋겠는지를 말해 주시오.”
모두들 돌아가면서 당시 정치·사회 상황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내 차례가 돌아왔을 때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를 앞의 사람들이 다 한 다음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사회가 혼란하다 보니 물가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보리쌀값, 연탄값이 엄청나게 오르고 있습니다. 조금 고(高)지대에 사는 집에는 여기에 배달값이라고 해서 돈을 더 받으려 합니다. 서민들이 몹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이를 단속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산동네 판잣집에 살고 있는 우리집 얘기이기도 했다. 민생문제를 얘기한 것은 나뿐이었다. 박정희 장군은 지휘봉을 흔들면서 “자네, 지금 좋은 얘기를 해 줬어. 내 생각을 일깨워 주었어”라고 말했다(이때 박 장군과 학생대표들의 만남은 김종신 당시 《부산일보》 기자가 쓴 《영시의 횃불》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 언급된 P군이 바로 나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박 장군이 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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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찍은 가족사진. 아버지(1), 나(2), 어머니(3). |
어린 시절 朴槿惠와의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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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후 나(뒷줄 왼쪽)는 4·19참가 학생들이 주동이 된 대한민주청년회 부산지부에서 활동했다. |
나는 박정희 장군과 단 둘이 회의실에 남았다.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눈 끝에 박 장군은 “내가 이 부대 사령관인데, 이 근처를 지나다가 위병소에 ‘사령관을 만나러 왔다’고 얘기하면 언제든지 만나줄 테니, 놀러 오라”고 했다. 그때는 별 생각 없이 “알겠습니다”라고 하고 나왔다.
얼마 후 4·19 합동위령제를 지내게 됐다. 나는 부제주(副祭主)가 됐다. 행사를 준비하다 보니 책상, 나팔수, 트럭 등 필요한 게 하나둘이 아니었다. 군(軍)의 협조가 있어야 했다. 친구들이 “지난번에 보니 군수기지사령관이 너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네가 가서 부탁 좀 해 보라”고 했다.
나는 박정희 장군을 찾아가 위령제 지원을 부탁했다. 박 장군은 참모장 김용순(金容珣·제2대 중앙정보부장 역임) 대령을 불러 “이 학생을 도와주라”고 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박 장군이 말했다.
“우리 집이 온천장 우장춘(禹長春) 박사댁 옆에 있네. 우 박사댁 알지?”
“네, 압니다.”
“놀러 와.”
‘아, 이 양반이 내게 유별난 관심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몇 달 후 어느 날, 온천장 앞을 지나가는데 사복 차림의 박정희 장군이 “박 군” 하면서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러더니 옆에 있던 육영수(陸英修) 여사에게 “이 친구가 내가 전에 말했던 박 군이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박 장군은 옆에 있던 소녀를 가리키면서 “박 군, 이 아이가 내 딸일세”라고 말했다. 그 딸이 바로 박근혜(朴槿惠) 의원이었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기록한 책을 몇 권 냈지만, 박정희 장군과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었다. 다만 몇 년 전 박근혜 의원 후원회에서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다음 날 회의석상에서 박 의원은 “왜 그 얘기를 여태까지 하지 않았느냐?”면서 반가워했다.
민족통일론 대토론회의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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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동아대에서 열린 전국대학생모의국회에서 의장을 맡은 나(가운데)는 그때부터 국회의장의 꿈을 키웠다. |
대토론회는 내 평생 잊지 못할 커다란 충격이었다. 토론회에서는 남북학생회담론에서부터 영세중립화통일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통일논의가 쏟아져 나왔다. 부산에서는 듣지도 못하던 얘기였다. 나는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다. 이때 나는 ‘통일을 위해 온 몸을 바치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를 위해 정치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4·19 후 나는 부산에서 대한민주청년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기택(李基澤·8~10·12~14대 국회의원, 민주당 총재,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역임) 전 의원이 부산지부장이었다. 그때 같이 활동했던 서석재(徐錫宰·11·13~15대 국회의원, 총무처 장관 역임), 문정수(文正秀·12~14대 국회의원, 부산시장 역임), 허재홍(許在弘·13·14대 국회의원 역임) 등과는 후일 정계(政界)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후 나는 대학생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서울에서는 이세기를 소장으로 하는 민족통일론연구소가 생겼다. 나는 이 연구소의 부산지부장을 맡았다. 가는 곳마다 통일을 이야기하고 다녔다. 1960년 10월 1일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신정부수립경축식에서 나는 이렇게 연설했다.
“4·19의 스크럼을 풀지 말고, 통일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대오를 더욱 견고히 하자!”
“어떤 동맹도 민족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 연설을 관심 있게 들은 황용주(黃龍珠) 《부산일보》 주필이 나를 만나자고 했다. 당시 황 주필은 부산MBC라디오에서 <라디오브리지>라고 하는 프로를 맡고 있었다. 나는 몇 차례 이 프로에 출연해서 황 주필과 통일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인 황 주필은 5·16 후 좌익으로 몰려 옥고(獄苦)를 치렀다.
1960년 동아대에서 전국대학생 모의국회가 열렸다. 나는 여기서 국회의장을 맡았다. 행사가 끝난 후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지금은 모의국회 의장이지만, 언젠가는 국회의장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는 40여 년 후 내가 정말 그 꿈을 이루게 될 줄은 몰랐다.
운동권 학생을 풀어준 軍 검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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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사고병’으로 낙인 찍힌 나(뒷줄 맨 오른쪽)는 최전방 6사단에서 3년간 복무했다. |
대한민주청년회 긴급회의가 열렸다. 우리는 ‘쿠데타는 용납할 수 없다’고 의견을 모으고, 성명서를 내기로 했다. 언론사에 연락을 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우리는 ‘박정희 장군은 즉각 군으로 돌아가라’는 성명서를 만들어 인근 부산MBC방송국에 전달하기로 했다. 밖으로 나오는데, 우리를 담당하고 있던 방첩대(지금의 국군기무사령부) 대원이 우리를 막았다. 우리를 잡아야 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지금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세상이 어떻게 됐는데 이런 짓을 하냐? 빨리 도망가라.”
MBC 옆을 지나면서 보니 탱크와 착검(着劍)한 군인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는 흩어져서 도망을 쳤다. 나는 서울 안국동에 있는 친구의 집으로 몸을 피했다가 마산에서 군에 입대했다.
1961년 11월 하순경, 논산훈련소에서 무반동총 훈련을 받고 있는데, 대위 한 명이 지프차를 타고 나타났다. 그는 “여기 훈련병 중에 박관용이라고 있느냐?”고 했다. 그는 내게 “입대 전에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다. 어물어물하다가 “청년운동을 했다”고 실토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밤열차 편으로 서울로 붙잡혀 올라갔다. 조사는 육군본부 검찰관실에서 받았다. 군검찰관은 김인구 대위라는 사람이었다.
김 대위는 내게 “왜 통일운동을 열심히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 생각을 솔직히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젊은 혈기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잡혀 가! 이렇게 대답해야 해.”
김 대위는 내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더니, 그런 내용으로 조서를 작성해 나를 풀어 주었다. 그는 “훈련받느라고 고생 많을 텐데, 며칠 쉬고 갈래?”라고 하더니, “1주일 동안 조사 받은 걸로 서류를 작성했으니, 서울에 친구들 있으면 만나서 놀다 가”라고 했다. 1주일 동안 잘 쉬고 훈련소로 돌아갔다. 그런데 자대(自隊) 배치를 받을 때가 되자, 1주일간 훈련을 덜 받았다는 이유로 다음 기수와 함께 배치를 받게 됐다. 나는 학생운동 경력 때문에 ‘사고병(事故兵)’이라는 이유로 강원도 간성에 있는 6사단으로 배치되었다. 1964년 6·3사태 때에는 계엄군으로 차출된 6사단의 일원으로 서울로 출동, 연세대에 주둔하기도 했다.
유진오 총재와 안철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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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이기택 의원의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한 나는 국회 본회의를 열심히 방청하면서 정치를 익혀 갔다. |
“배지는 내가 달았지만, 우리 둘이 반씩 나누어 달았다고 생각하고 날 좀 도와다오.”
사실 학생운동에서 우리는 동격(同格)이었다. 솔직히 약간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서울의 중앙정치무대로 진출하고 싶은 생각이 컸다. 우리는 함께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우리 두 사람은 “4·19의 주역인 우리가 이 나라를 정말 바로 세워 보자”며 열띤 대화를 나누었다.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의 정치이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려서부터 야당 활동을 해 온 어머니를 보면서 자라 온 터라, 서울에 올라와서 본 당시 야당의 모습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야당은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겠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쳐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하면서 투쟁하는 정치단체였지, 제대로 된 정당은 아니었다.
당시 신민당 총재는 고려대 총장을 지낸 유진오(兪鎭午) 박사였다. 그는 역시 학자이지 정치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나는 안철수(安哲秀) 교수를 보면서 유진오 총재를 생각하곤 한다. 안 교수가 컴퓨터에는 전문가인지 몰라도, 그가 정치를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TV에 나오는 안철수 교수는 여성적이고 얌전한 것 같은데 유진오 총재가 딱 그랬다. 유 총재는 유명한 학자였지만, 실제 정치에서는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었다.
김영삼 원내총무의 투쟁력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유 총재는 말이 총재지, 실제로는 원내총무인 김영삼 의원이 모든 정치를 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김대중 의원을 보면서는 ‘연설을 참 잘하고 똑똑하다’고 느꼈다.
유진산(柳珍山) 의원에게서는 ‘아주 노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김영삼 의원에 대한 초산(硝酸)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그 다음 날 유진산 의원은 국회 본회의에 나가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이 정권이 초산테러범을 체포한다면 나는 즉시 의원직을 사퇴하겠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그렇게 공언했으니, 범인이 잡히면 사퇴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유진산 의원은 “초산테러는 군부(軍部)정권이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결코 범인을 잡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군부정권의 죄상을 꿰뚫고 그렇게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용기에 감명을 받았다.
국회 전문위원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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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국회 전문위원 시절 나는 이철승 신민당 대표, 김재광 최고위원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
이기택 의원의 도움으로 정치인으로 도약하기를 바랐지만, 이 의원은 나를 자기의 보좌관으로 오랫동안 붙잡아 두고 싶어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나는 비서관 자리를 손태인(孫泰仁·제16대 국회의원 역임)씨에게 물려주고, 야당 몫 교섭단체 전문위원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국회로부터 차관급 급료를 받는 전문위원 자리는 야당 의원 비서관 출신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희망자가 몰렸다. 신민당 국회의원들은 저마다 송원영(宋元英·7~10·12대 국회의원) 원내총무에게 자기 사람을 뽑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송 총무는 시험을 쳐서 뽑겠다고 했다. 20여 명이 시험을 치렀다. 시험문제는 ‘한국경제의 문제점’이었다. 이기택 의원을 보좌하면서 닦은 실력 덕분에 나는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송원영 원내총무는 나중에 내 답안을 두고 “압권이었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전문위원은 원내총무를 비롯해 소속 의원들을 뒷바라지하는 게 일이었다. 초선(初選) 의원 원고 써 주기에서부터 원내전략 수립까지 다양한 일을 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유신(維新)이 선포됐고, 1976년에는 이철승(李哲承) 의원이 신민당 당권(黨權)을 잡았다. 나는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이 내세운 ‘중도(中道)통합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YS와 DJ의 선명한 반독재투쟁 노선이 야당의 갈 길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날 이철승 대표가 “대기업 독과점(獨寡占)문제에 대해 조사해서 모레 아침 7시에 우리 집으로 오라”고 지시했다. ‘독과점’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우리 국민은 아침에 일어나면 럭키에서 만든 치약으로 이를 닦아야 하고, 럭키에서 만든 비누로 세수를 하고 …’ 하는 식으로 보통 국민의 일상생활을 통해 독과점의 폐해를 보여주는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이 대표는 “수고했다”며 흡족해했다.
“박관용 같은 놈 열 명만 있으면…”
이후 이철승 대표는 걸핏하면 나를 불러 일을 시켰다. 나는 열심히 일했다. 한번은 이철승 대표가 중앙당 국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 좀 똑바로 하라”면서 “박관용 같은 놈 10명만 있으면, 우리가 집권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국장들은 내게 “축하한다. 다음 번에 공천받을 수 있겠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이 “다음 총선에서 공천을 받으려면 김재광(金在光·6~10· 12~14대 국회의원 역임) 최고위원에게는 인사를 해 놓는 게 좋다”고 권했다. 그런 걸 잘 못하는 성격이었지만, 서울 불광동 김 최고위원댁을 찾아갔다. 그런데 김 최고위원이 비서관을 막 야단치고 있었다. 당시 국회 교통체신위원이던 김재광 최고위원은 그날 체신부를 상대로 대(對)정부질문을 할 예정이었는데, 그 준비를 안 해 놓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김재광 최고위원에게 “지금 체신부의 가장 큰 문제는 EMD 전화교환기 문제”라고 말했다. 독일제 EMD 교환기기 성능이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업체가 공화당 정부에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이를 들여온 것이다. 김재광 최고위원은 반색을 하면서 내게 대정부질문 원고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김 최고위원은 그날 국회에서 EMD 교환기 문제를 제기했다. 다음 날 신문들은 이 얘기를 톱기사로 다뤘다.
신이 난 김재광 최고위원은 내게 “다음은 철도청 대정부질문인데, 뭐 없느냐”고 했다. 나는 침목과 레일 문제에 대해 원고를 써 주었다. 이것도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났다. 이때부터 김 최고위원은 급격히 나를 좋아하게 됐다. 나는 ‘이철승 대표와 김재광 최고위원이 밀어 주면 다음 총선에서 공천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978년 제10대 총선을 앞두고 나는 신설되는 부산 남구에 공천을 신청했지만, 공천을 받지 못했다. 공천과정에서 신민당 내 각 계파 간에 거래가 있었는데, 이철승 대표가 나를 희생시킨 것이다. 김재광 최고위원이 이철승 대표에게 “소석(素石·이철승씨의 아호), ‘박관용 같은 사람 10명이면 집권할 수 있다’고 말해 놓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 언성을 높였다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치를 포기하려 했는데…
공천심사에서 탈락하면서 나는 정치를 접기로 결심했다. 유신헌법하에서 국회 임기는 6년이었는데, 다시 6년을 기다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이는 마흔을 넘었고, 두 아이는 커 가고 있었다. 야당 생활을 계속하다가는 아이들 공부도 제대로 시키지 못할 것 같았다.
마침 친하게 지내던 교통부 국장이 “새로 생기는 고속버스회사인 그레이하운드사(社)에서 홍보이사를 구해 달라고 하는데, 당신이 적격인 것 같다”고 했다. 나도 잘됐다 싶어 응낙하고 국회 전문위원은 사표를 냈다.
그 소식을 듣고 이기택 의원이 손태인 비서관을 통해 “떠날 때 떠나더라도 마지막으로 내 선거를 한번만 도와주고 떠나라”고 부탁해 왔다. 오랜 세월 동안 형, 동생하며 지내 온 이기택 의원과의 인연을 상기하니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부산에 내려가 선거운동을 하면서 보니, 민심이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완전히 떠난 것이 확연히 보였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야당에 내 청춘을 바치면서 투쟁해 왔는데,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는 그렇게 내 발목을 붙잡았다.
당시 신도환(辛道煥·4·8~10·12대 국회의원 역임) 최고위원의 계보에 속해 있던 이기택 의원은 신 최고위원으로부터의 독립을 생각하고 있었다. YS와 DJ가 신민당을 좌우하는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이 의원은 공공연히 두 김씨를 비난하는 발언도 많이 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포스트 김’이어야 한다. 왜 지금 양김과 대결하려 하느냐”고 조언하곤 했다. 양 김씨도 이기택 의원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기택 의원은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치적 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당권도전을 선언했다.
1979년 신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국민은 YS를, 정부는 이철승 대표를 밀었다. 이철승 진영에서는 막 인쇄되어 나온 현금을 뿌렸다. 정부는 이기택 의원에게 이철승 대표를 지원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정부는 이 의원 자형(?兄)이 경영하는 태광산업의 장부를 압수해 가는 등 노골적인 압력을 가해 왔다. 이기택 의원의 부친은 “아들도 자식이고, 사위도 자식이다. 왜 자형을 어렵게 하느냐? 집안 망하겠다”며 이 의원을 압박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이기택 의원이 정치적으로 영원히 살려면 전당대회에서 YS를 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기택 의원은 신중해서 자기 표현을 잘 안 하는 사람이었다.
5·30 전당대회에서 이기택의 곡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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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국회 외무위에 출석한 김영삼(왼쪽)과 이철승 의원. 두 사람은 이듬해 5월 신민당 당권을 놓고 경쟁한다. |
1차 투표에서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이철승씨가 1위, YS 2위, 그리고 이기택 의원이 표 차이가 많이 나기는 하지만 3위가 된 것이다.
결선투표를 앞두고 YS와 이철승씨 모두 이기택 의원에게 구애(求愛)를 해 왔다. 그런데 이기택 의원은 이철승씨 측이 보낸 송원영 의원은 만나 주면서도, YS가 보낸 사람은 만나 주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아, 이기택이 정권의 압력에 굴해서 이철승씨에게 가는구나’라고 판단했다.
나는 이기택 의원의 양복을 꽉 잡았다. 옆에는 부산에서 우리와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YS의 비서 서석재씨가 있었다.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저 창밖에 국민의 함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그걸로도 모자라 나는 거의 이 의원을 머리로 들이받으려 들었다. 그런데 이 의원은 나를 꽉 끌어안더니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가만히 좀 있어 봐! 가만히 좀 있어 봐!”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뭔가 잘못 판단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맥이 탁 풀렸다. 그와 함께 이기택 의원에게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났다.
그런데 밖에서 갑자기 환성이 들렸다. 달려 나가 보니 이게 웬일인가? 이기택 의원이 YS의 손을 잡고 단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또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결선투표가 시작되려는데 송원영 의원이 나를 불렀다. 그는 원내총무로 나를 국회 전문위원으로 뽑아 준 인연이 있었다. 송 의원은 “1차 투표에서 YS와 이기택 의원이 얻은 표를 합해도 이철승 대표에게 못 미치는데, 왜 이런 짓을 하나?”라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밖의 함성소리를 듣지 못하십니까? YS 표+이기택 표+알파(α)를 생각하셔야죠!”
내 말을 들은 송원영 의원은 “그럴까, 그렇게 될까”라고 되뇌었다.
결국 당사 밖의 함성이 YS를 승리하게 만들었다. YS가 승리하자 당사 밖에서는 애국가 합창, “김영삼!” “김영삼!”을 외치는 연호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날인가 그 다음 날인가, 상도동에서 들어오라고 연락이 왔다. 아마 서석재 비서가, 내가 이기택 의원에게 YS 지지를 호소했던 것을 보고한 것 같았다. YS는 나를 보고 말했다.
“수고했네. 다시 전문위원으로 들어와서 일해!”
YH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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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YH사건 당시 김영삼 총재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나는 YS의 지시로 비밀리에 〈YH사건백서〉를 만들었다. |
YH사태가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일단락된 후, YS는 나를 불러 “언론이 YH사건에 대해 보도를 제대로 안 하고 있다”면서 “YH사건 백서(白書)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나는 조홍규(趙洪奎·13~15대 국회의원 역임) 전문위원과 함께 그가 잘 아는 술집 여주인의 아파트에 숨어서 4~5일 동안 작업을 했다.
나는 완성한 원고를 점퍼 속에 감추고 몰래 당사로 가서 YS에게 전달했다. YS는 이 원고를 김덕룡(金德龍·15~17대 국회의원, 정무제1장관 역임) 비서에게 주면서 인쇄를 지시했다. 그런데 김덕룡 비서가 인쇄소를 물색하는 과정에 발각이 돼서 체포됐다.
원고 작성자들도 잡아간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나는 조홍규와 함께 피신했다가 황낙주(黃珞周·8~10·12~15대 국회의원, 국회의장 역임) 원내총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원이 당의 지시에 따랐다고 잡혀가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의했다. 황 원내총무는 ‘사쿠라’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여당과의 막후 대화에 능했다. 얼마 후 황 원내총무로부터 “잘 해결됐으니 나와라”라는 연락이 왔다.
이어 김영삼 총재 제명, 부마사태 등 정국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10월 26일 아침 5시, 집에서 자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DJ의 비서로 있던 친구 김형국이었다.
“청와대에서 총격사건이 나서 박정희가 총에 맞았다는 얘기가 있다.”
김형국은 외신기자에게 들은 얘기라고 했다. 나는 즉시 이기택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의원도 물론 모르고 있었다.
YS와 DJ의 양보없는 싸움
우리가 그렇게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었다니 처음에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생각했다. 환호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오후가 되면서부터 “이북 놈들이 이 틈을 타서 무슨 짓을 하는 것 아니냐” “우리 사회의 불안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 착잡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불안감은 점차 현실화되어 갔다. 그해 겨울 12·12사태가 발생해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이 군권(軍權)을 장악했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모두들 애써 외면했다. YS와 DJ는 ‘아무리 군부라고 해도 국민의 여론을 거스르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대신 두 사람은 대권(大權) 경쟁에 들어갔다. YS는 DJ에게 신민당으로 들어와서 전당대회를 통해 대선 후보를 선출하자고 했고, DJ는 총재인 YS에게 유리한 구조 아래서 신민당에 들어오기를 거부했다. 두 사람 모두 권력을 잡는 것이 목표였다. YS와 DJ는 어떤 경우에도 싸울 수밖에 없었다. 같은 꿈을 가지고 세력도 엇비슷한 두 사람이 그러는 것은 숙명이었다. 권력은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상도동과 동교동 모두 나에게 손짓을 했다. 상도동에는 서석재가, 동교동에는 김형국이 있었다. 그때 나는 서교동에 살고 있었는데, 김형국이 “선생님이 겸상 차려 놓고 기다린다”고 해서 예닐곱 차례 동교동에 가서 DJ와 식사를 한 적도 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니 DJ는 아는 게 너무 많았다. 똑떨어지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에게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YS를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면, 백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내 얘기가 팍팍 먹혀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이런 사람이라면 내가 뭔가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줬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다. 한번은 정책실장으로 있던 이택돈(李宅敦·8~10·12대 국회의원) 의원이 “DJ 계보는 못하겠다”고 투덜댔다. 변호사였던 그는 DJ가 신민당으로 끌어들인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DJ는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굴어요. 법에 대해서도 그럽니다. 법조계에서는 나도 알아주는 사람인데 …. 이런 사람을 위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소?”
부산 출신으로 부산에서 출마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던 내가 DJ 계보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김형국 비서에게 그런 사정을 얘기하고 동교동에 발길을 끊었다.
‘서울의 봄’, 꿈은 사라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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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미국 버클리대에서 스칼라피노 교수와의 간담회를 마치고. 왼쪽부터 나, 스칼라피노 교수, 이기택 전 의원. |
나는 바로 마포당사로 달려가서 김영삼 총재에게 들은 바를 보고했다. YS는 “그놈들이 한때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YS에게는 나보다 더 정확한 정보가 있나 보다’ 하고 물러나왔다. 그런데 이틀 뒤 YS가 나를 부르더니, “지난번 그 얘기는 어디서 들은 거냐”고 물었다. “삼성비서실에 있는 사람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YS는 이렇게 말했다.
“그 정보가 맞는 것 같다. 나쁜 놈들 …. 하지만 그렇게는 안될 거다. 민주화의 도도한 물결을 총칼로 막지는 못할 거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가 내려졌다. 국회는 폐쇄되고, DJ는 중앙정보부로 잡혀갔다. YS는 자택에 연금(軟禁)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유혈(流血)진압됐다. 너무나 압도적인 군부의 힘 앞에 일시에 기가 꺾여 버린 것 같았다. 그건 차라리 체념이었다.
신군부는 권력을 잡자 정치풍토쇄신법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야당 현역의원들과 중앙당 국장급 이상 간부들은 정치규제 대상이 됐다. 그런데 나와 조홍규씨는 정치규제에 묶이지 않았다. 신군부 사람들이 국회 교섭단체 전문위원이라는 자리가 야당에게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를 모른 덕분이었다.
1981년 제11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與野)정당들이 하나둘씩 만들어졌다. 나는 구(舊)신민당 인사들이 주축이 된 민주한국당(민한당)에 입당, 공천을 신청했다. 신군부 집권 후 엄혹한 상황이었던 만큼, 정상적인 정당정치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양식은 지켜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건 착각이었다.
신군부 검열 거친 야당 공천자 명단
민한당 공천심사가 시작된 날 밤 12시30분, 공천심사위원이던 김현규(金鉉圭·10~12대 국회의원 역임)씨가 전화를 걸어 왔다. “1차 심사를 통과했으니 내일 아침 중앙당에 나와 공천장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기뻤다.
다음 날 민한당사를 찾아갔다. 1차 공천자 명단이 인쇄되어 배포되어 있었는데, 두 사람 이름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나와 DJ비서였던 김형국씨였다. 공천자 명단을 발표하면서도 우리 두 사람의 이름은 발표하지 않았다.
나는 신상우(辛相佑·8~11·13~15대 국회의원, 해양수산부 장관,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역임) 공천심사위원장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어떻게 된 거냐”고 따졌다. 신 위원장은 정색을 하면서 “조용히 있어라. 몸조심하라”고 했다.
방에서 나오자 기자들도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았다. 여기저기 알아봤더니 민한당 공천자 명단을 군부로부터 검열 받는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 과정에서 뒤늦게 야당 국회 전문위원이 ‘묶어야 할’ 대상인데, 자기들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나는 기자들을 만나 억울한 심정을 호소했다. 다음 날 신문 정치 가십난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는 부산 동래지구당’이라는 기사가 나갔다. 고마웠다.
열흘쯤 지나 신상우 위원장에게서 보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복수(複數)공천이라도 수락하겠느냐”고 물었다. 나와 복수공천을 받은 사람은 주 모라는 약사였는데,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1개 선거구에서 두 사람을 선출하던 시절이었지만, 내 지역구에서만 전국에서 유일하게 복수공천이 이루어졌다는 게 이상했다. 신군부의 손이 작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주 모씨는 신군부의 실력자였던 이학봉(李鶴捧·민정수석비서관, 안기부 차장 역임)씨 바로 이웃에 사는 사람이었다.
결국 주 모씨와 함께 지역구를 창당하고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얼마 후 선거운동을 치를 자신이 없어진 주씨는 전국구로 가겠다면서 후보를 사퇴했다.
中情, 형님 통해 발언 수위 낮추라고 압력
출마는 했지만 돈이 없었다. 방법은 네 번의 합동연설회에서 연설을 잘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정권을 욕하는 것이 곧 연설을 잘하는 것이었다. 거제국민학교에서 열린 첫 연설회에서 나는 전두환 정권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여러분, 시저의 가슴에 칼을 꽂은 브루투스를 기억하시죠? 전두환이 국민을 위한 정치, 민주주의를 하지 않으면, 내가 전두환 가슴에 칼을 꽂는 ‘한국의 브루투스’가 되겠습니다!”
“정권은 민의(民意)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이 정권은 총구(銃口)로부터 나왔습니다. 광주에서 탱크를 몰고 시민들을 학살하고 권력을 잡은 정권입니다!”
연설을 마치고 나오는데 청중의 반 이상이 나를 따라 나오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아, 이거구나’ 싶었다. 그런데도 신문은 민정당의 김진재(金鎭載·11~16대 국회의원 역임), 국민당의 양찬우(楊燦宇·7~10대 국회의원, 내무부 장관 역임)씨의 당선이 유력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명륜국민학교에서 열리는 마지막 연설회를 앞두고 형님이 찾아왔다. 형님은 작은 가내공업을 하면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형님이 말했다.
“니, 당선될 것 같다고 하더라.”
“누가요?”
형님은 그 말에는 대답을 않고 호주머니에서 메모를 꺼내면서 “니, 이런 얘기는 안 하면 안되겠나?”라고 하는 것이었다. 8가지였는지 10가지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하면 안되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 즉시 감이 왔다.
“누굴 만났소?”
형님은 대답이 없었다. 내가 재차 “짐작이 갑니다. 누굴 만났소?”라고 다그치자 형님은 “중앙정보부 지부에 갔다 왔다”고 실토했다.
유세장 청중 80%가 따라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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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제11대 총선 당시 나는 거리유세와 합동연설회에서 전두환 정권을 공격해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
“내가 어제 쓸데없는 소릴 한 것 같다. 니 생각대로 해라.”
‘형님이 망하기로 결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하나 출세하자고 형님을 망하게 할 수는 없겠다. 오늘은 너무 세게 얘기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세장인 명륜국민학교로 가면서 보니, 유세장으로 향하는 골목마다 사람들로 가득했다. 명륜국민학교 담장 위에도 사람들이 새카맣게 올라가 있었다. 그걸 보니 “죽을 때 죽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상에 올라간 나는 ‘총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을 극렬하게 규탄했다.
연설을 마치고 내려오니 젊은이들이 스크럼을 짜고 “앞으로는 못 나간다”면서 나를 둘러쌌다. 유세장 질서유지를 위해 나와 있는 경찰관들을 보고, 나를 잡으러 온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잡혀가더라도 앞문으로 나가겠다”며 정문으로 향했다. 젊은이들이 나를 무동 태웠다. 뒤를 돌아보니 청중의 80% 정도가 나를 따라 나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동래 거리를 행진했다. 옆에서 같이 행진하던 국민학교 여자 동기들이 울면서 “뒤를 봐라. 이제 됐다, 선거 됐다”고 말했다. 뒤를 돌아보니 끝이 안 보였다. 누군가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정신이 짜릿했다. ‘이제 됐다’ 싶었다. 안락동 로터리에서 군중을 해산하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동래에 흰 눈이 내릴 것”
“이제 투표일까지 이틀이 남았습니다. 오늘 저녁부터 동래에 흰 눈이 내릴 것입니다. 흰 봉투도 갈 것이고, 흰 설탕봉지도 갈 것이고, 흰 밀가루도 갈 것이고, 흰 쌀자루도 갈 것입니다. 그 눈에 미끄러지지 말고 이 박관용이를 끝까지 붙들어 주십시오.”
다음 날 누님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니 안되겠다.”
“왜요?”
“지금 산골, 골목마다 트럭으로 맥주, 밀가루, 설탕, 신발, 담배 등을 막 실어 나르고 있다. 내 친구들도 찾아가 보니 눈치가 전하고 다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사무실에는 빵, 현금봉투, 담배, 설탕 등이 쌓이기 시작했다. 여당이 뿌리는 것을 우리 당원들이 빼앗아 온 것이었다.
나는 부정선거를 고발하고 사퇴하기로 결심했다. 봉고차 두 대를 대절해서 그물로 덮었다. 그물에는 여당이 뿌린 부정선거 증거물들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차체(車體)에는 ‘부정선거 이동전시장’이라고 커다랗게 써 붙이고, 차 안에는 내 선거운동을 해 주던 동아대 후배들을 가득 태웠다. 이 차가 시내를 돌아다니자 유권자들은 박수를 치며 재미있어했다.
다음 날 나는 부정선거 증거물들을 모아 동래경찰서 앞 사거리에 쌓아 놓고 불을 지른 후, 후보사퇴를 선언하기로 결심했다. 믿을 만한 운동원들에게 준비를 하라고 했다. 후보 사퇴 성명서를 쓰고 있는데 밖이 시끄러웠다. 창밖을 내다보니 카빈총으로 무장한 전경대원들이 사무실을 에워싸는 것이었다. 정보가 새나간 것이다.
잠시 후 형님이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사퇴하겠다는 내 말에 형님은 “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니는 당선된다”며 사퇴를 만류했다.
다음 날 선거가 치러졌다. 김진재 민정당 후보가 1위, 그리고 내가 근소한 표차로 2위로 당선됐다. 이후 나는 이곳에서 내리 6선(選)을 했다. 같은 선거구에서 한 번도 낙선을 하지 않고 내리 6선을 한 사람은 나와 포천-연천에서 당선된 이한동(李漢東·11~16대 국회의원, 국무총리 역임) 전 국무총리뿐이라고 한다.
김상조 고문치사 사건 폭로
11대 국회에서 나는 내무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83년 3월, 김상조(金相祖) 한일합섬 이사가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 불려가 조사를 받다가 사망했다. 신문에는 그가 조사 중 지병(持病)으로 죽었다고 조그맣게 보도됐다.
얼마 후 친구가 “김상조 죽음에 의문이 있다”고 제보해 왔다. “김상조씨 사촌형의 얘기인데, 사체(死體)에 멍이 많이 들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부산으로 달려가 진상을 알아봤다. 명백한 고문치사(拷問致死)였다. 나는 국회 내무위에서 이 사실을 폭로했다.
안기부의 김근수(金瑾洙·13대 국회의원, 보훈처장, 상주시장 역임) 국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너무 관(官)의 권위를 실추시키면 정부가 일을 못한다”면서 “협조 좀 해 달라”고 했다.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지만, 나는 국회에서 김상조씨 사건 관련 폭로를 이어 갔다. 그때 그 기사를 제대로 써 준 신문은 《동아일보》뿐이었다. 결국 치안본부장이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이후 정보기관에서 “별일 없느냐?” “뭐 새로 준비된 것이 있느냐?”며 수시로 전화를 걸어 왔다.
그래도 나는 위축되지 않고 의정(議政)활동을 펼쳤다. 당시 내무부 장관은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이었다. 군인 출신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점잖고 겸손한 모습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1983년 5월 YS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斷食)을 결행했다. 하지만 언론은 물론 국회에서도 YS단식은 ‘정치현안’이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YS의 단식을 계기로 이듬해 5월 YS, DJ계 정치인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만들었다. 그해 12월 민추협은 1985년 12대 총선에 참여하기로 하고 신한민주당(신민당) 창당 작업에 들어갔다.
나는 민한당 정책위의장이던 김현규 의원과 만나 “더 이상 이런 정당에 있는 것이 부끄럽다. 탈당(脫黨)해서 신민당으로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어 홍사덕(洪思德·11·12·14~18대 국회의원) 의원이 합류했다. 서석재·김찬우(金燦于·11·14~16대 국회의원)·최수환(崔守桓·11대 국회의원) 의원 등도 동참했다. 우리는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변두리 식당을 돌면서 탈당 작업을 추진했다. 탈당 직전에 허경만(許京萬·10~14대 국회의원, 전남지사 역임) 의원도 합류했다.
민한당 탈당
1984년 12월 18일 정기국회가 끝났다. 서울 강서구 인공폭포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만난 우리는 다음 날 새벽 5시에 탈당을 결행하기로 했다. 내가 탈당 성명서를 작성하고 서명을 받았다.
이어 나는 신상우 의원을 찾아가 동참을 권유했다. 그는 민한당 창당을 주도하면서 ‘전두환 정권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많이 듣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는 자기도 동참하겠다고 했다.
“1차로 여러분이 결행하고 나면, 나는 2차로 합류하도록 하겠소.”
나는 이렇게 말했다.
“1차로 우리가 먼저 나가고 나면 셔터문이 쳐져서 나오지 못할 겁니다.”
신상우씨는 걱정 말라고 했다. 이어 나는 김현규 의원과 함께 상도동으로 몰래 찾아갔다. 우리의 결심을 이야기하자 YS는 뛸 듯이 기뻐했다.
“정말 위대한 결심을 하셨소. 여러분의 공천은 내가 100% 보장하겠습니다.”
나는 다시 아현동 이기택씨 집을 찾아가 탈당 계획을 말했다. 그는 우리의 결심을 반기면서도 “잡혀갈 수도 있으니 집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그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잠자리에 들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 두 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벨이 울렸다. 거사가 탄로 나서 안기부에서 잡으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를 맞게 되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내복을 두 벌 껴입었다. 대문을 열고 나가 보니 함께 탈당하기로 했던 최수환 의원이 서 있었다. 사업체를 가지고 있던 그는 “겁이 나서 안되겠다. 미안하지만 나는 빼 달라”고 했다. 나는 “그럼 당신은 빠지라”고 말하고, 가지고 있던 서명부에서 그의 이름에 줄을 그었다.
최 의원이 돌아가고 두 시간쯤 지났는데 다시 벨이 울렸다. ‘이번엔 진짜 잡혀가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이번에도 최수환 의원이었다. 그는 내게 “방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했다. 그는 “마누라가 탈당에 동참하라고 한다”고 말했다.
“박관용 의원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했더니, 마누라가 하라고 하더군요. ‘내가 잡혀가고 어려워질 수도 있는데 괜찮겠느냐’고 했더니, ‘남자가 한 번 결심이 섰으면 해야 한다. 집은 내가 꾸려 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더군요.”
다음 날 우리는 탈당 성명을 발표했다. 정계가 발칵 뒤집혔다. 우리의 탈당은 이듬해 2·12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의 전주곡(前奏曲)이 됐다.
성명을 발표한 후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쳤다. 김현규·홍사덕 의원은 안기부로 잡혀가 곤욕을 치렀다.
탈당을 결행하기 나흘 전인 12월 14일 나는 지구당으로 내려갔다. 부위원장 등 간부들을 모아놓고 입을 열었다.
“양 김씨가 신당을 만든다고 합니다. 두 분을 지도자로 모시던 입장에서 마음이 아픕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하지만 모두 탈당에 부정적이었다. 수석부위원장은 “의원님, 전쟁을 앞두고 다리 위에서 말을 갈아타는 짓은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들을 설득하려다가는 일이 탄로날 것 같아서 그냥 서울로 올라왔다. 탈당 전날, 양면괘지 여러 장 분량의 편지를 썼다.
“여러분, 나는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선명야당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선거를 앞둔 여러분의 걱정은 잘 알고 있지만,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이 편지를 받으신 후, 내 생각에 동의한다면 ‘박관용 위원장의 선택을 적극 지지한다’는 현수막을 당사에 내걸어 주십시오.”
李敏雨 파동
나는 편지를 테이프로 단단히 봉한 후, 지구당을 관리하는 박양훈 비서관에게 편지를 건네주면서 “절대 미리 뜯어 보지 말고, 내일 아침 9시 정각 지구당 확대간부회의를 소집해 그 자리에서 이 편지를 읽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나중에 들은 바로 지구당 간부들은 박 비서관이 내 편지를 읽자 박수를 치며 환호하더니, 바로 ‘박관용 위원장의 결단을 지지한다’는 현수막을 내걸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도 이 못난 위원장을 믿고 따라 준 지구당원들이 고맙기만 하다.
2·12총선으로 돌풍을 일으킨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면서 정국(政局)을 개헌정국으로 몰고 갔다. 나는 신민당 100만명 개헌서명운동본부 기획위원장을 맡았다. 서명운동을 기획하고, 서명용지를 취합, 보관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하지만 개헌문제로 정국이 경색되면서 두 김씨와 이민우(李敏雨·4·5· 7·9·10·12대 국회의원) 신민당 총재 간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른바 ‘이민우 구상’이라는 게 나왔다. ‘이민우 구상’이 나오는 데는 대변인이던 홍사덕 의원이 큰 역할을 했다.
이를 두고 당시 별의별 말이 돌았지만, 나는 이민우 총재나 홍사덕 의원이 투쟁의지가 약화되거나 권력과 유착해서 그런 일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 현실정치에 몸담고 있던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얼어붙은 정국을 풀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이다.
투쟁 일변도이던 장외(場外)의 두 김씨는 이민우씨를 용납할 수 없었다. 특히 이민우씨를 총재로 추천했던 YS는 이 총재가 자기를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결국 YS와 DJ는 1987년 5월 신민당을 깨뜨리고 통일민주당 창당에 나섰다. 이어 6월 민주화운동이 전개됐다. 그리고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선언이 나왔다.
YS와 DJ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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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시위현장에서 사망한 이태춘씨의 장례행렬.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나이고 그 오른쪽이 박찬종 의원. |
우리는 먼저 DJ를 찾아갔다. 주로 내가 취지를 설명하기로 했다. 나는 “민주화운동세력이 갈라지는 것은 국민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역설했다.
DJ는 “내가 출마하지 않으면 많은 동지들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된다”면서 “지금까지 나를 지지해 왔던 동지들이 자살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YS의 전당대회 추진방식이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국회의원들이 와서 힘을 보태주겠다는데도 그런 소리를 하는 DJ를 보면서 ‘이거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날 오후, 우리는 YS를 찾아갔다. 이번에는 박찬종 의원이 YS를 설득했다. 하지만 YS는 “전당대회를 열어서 경선(競選)을 하면 제일 깨끗하지 않으냐”는 태도를 고수했다. 우리는 맥이 빠져 버렸다. 결국 양 김씨는 제 갈 길을 가게 됐다.
부산 수영만에서 YS지지 군중대회가 열렸다. 나 한 명만 빼놓고 부산 지역 통일민주당 의원들이 모두 그 자리에 참석했다. 나는 외톨이가 됐다. “비겁자”니 “배신자”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보단일화운동에 들어간 후 우리는 무척 괴로웠다. 그래도 《한국일보》에서 우리를 두고 ‘용감한 의원들’이라는 박스 기사를 써 준 것이 참 위로가 됐다.
최형우에 밀려 동래구로
양 김씨가 완전히 결별하고 난 후, 나는 YS캠프로 들어갔다. YS의 선거대책위원회에서 홍보위원장을 맡았다.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당선됐고, YS는 2위를 차지했다.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선거법이 개정됐다. 한 지역구에서 두 명을 뽑는 중선거구제 대신, 한 지역구에서 한 명을 뽑는 소선거구제가 도입됐다. 내 지역구인 부산 동래선거구는 동래구와 연제구로 분구(分區)됐다. 내 모교가 있는 동래구에는 중산층이 많이 살았다. 반면에 연제구는 서민층이 많이 살았다. 나로서는 연제에서 출마하는 게 유리했다. 동래와 연제가 한 선거구로 묶여 있던 1구2인제 시절에도 동래보다는 연제에서 표가 더 많이 나왔었다.
통일민주당에서는 분구되는 지역구의 현역 위원장에게 선거구 선택 우선권을 준다는 원칙을 정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YS의 측근인 최형우(崔炯佑·9·10·13~15대 국회의원, 내무부 장관 역임)씨가 연제에서 출마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박관용이는 이기택 계보고, 이기택은 사쿠라다. 선명야당인 내가 연제에서 출마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원들을 포섭하고 다녔다. 나는 YS를 찾아갔다.
“총재님, 당 방침대로면 제가 우선권을 갖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연제에서 출마하고 싶습니다. 최형우씨가 동래로 가는 게 원칙대로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YS는 뜻밖의 말을 했다.
“박 의원이야 어디로 가든 당선되지 않겠어요?”
당이 정한 원칙을 부인하는 얘기였다. 순간 ‘원래부터 YS계보가 아니어서 설움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하니 비애가 밀려왔다. 그와 함께 ‘내가 연제를 고수하겠다고 최형우씨와 싸워도 이길 길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형우씨와 연제구를 놓고 싸우다가 밀려서 동래구로 간다면 ‘박관용이는 연제구에서 밀려서 동래로 왔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고, 그러면 선거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 뻔했다.
나는 부산의 지구당으로 전화를 걸어, “동래에 ‘동래 주민 여러분과 더불어 정치를 하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라”고 지시했다. 내가 출마할 것으로 알고 있는 연제에는 ‘그동안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도록 했다.
保革정치구도 구상
동래에서 민정당 후보로는 전두환 정권 시절 재무부 장관과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강경식(姜慶植·12·14·15대 국회의원, 부총리 역임) 의원(민정당 전국구)이 출마했다. 그는 부산중학교 2년 선배였다.
여당은 엄청난 물량공세를 퍼부었다. 동래 중심부의 커피숍, 은행 등에 가서 물어보면 대부분 강경식씨가 당선될 것이라고 했다. 선거를 처음 치르는 강경식씨는 부산고 친구 30명 가량을 모아 놓고 “선거결과가 어떻게 될 것 같은지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모두들 강경식씨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작은 인쇄소를 하는 한 사람만 “니는 박관용이한테 안된다. 밑바닥 표는 모두 박관용이 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결과가 두려워서 개표소에 가지도 못했지만, 결국은 더블 스코어 차이로 당선됐다.
민주화가 되면서 그동안 억눌렸던 욕구들이 분출되어 나왔다. 학생시위와 노사분규로 편할 날이 없었다. 공장마다 빨간 페인트칠이 안되어 있는 곳이 없었다.
당시 나는 이기택씨의 계보인 민사회(민주사회연구회) 회원들을 상대로 몇 차례 강의를 했다. 그 자리에서 보수와 진보에 대해 설명하면서 “지금처럼 보수인지 진보인지 모르는 정당체제로는 안된다”면서 “우리 사회도 보혁(保革)이 건전하게 존재해야만이 정치가 제대로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날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이기택 의원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도 공감하는 눈치였다.
나중에 대통령비서실장 시절 YS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기택 의원은 상도동으로 YS를 찾아가서 “우리 정치도 보수는 보수대로, 진보는 진보대로 헤쳐모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얘기가 얼마나 YS에게 영향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가 YS가 3당 통합논의를 시작할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통일민주당 내에서는 “YS가 JP와 손을 잡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를 두고 말이 많았다. 김현규·최형우·이기택 등은 만나기만 하면 YS가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 “JP와 손을 잡는다는 게 말이 되나”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심지어는 “YS가 미친 것 아니냐”고 극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황병태의 천기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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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합당 추진 과정에서 필자의 참여를 타진했던 황병태 전 민주당 부총재. |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켜 주겠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지금 3당 통합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김동영(金東英·9·10·12·13대 국회의원, 정무제1장관 역임) 의원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는데 손이 모자랍니다. 도저히 우리 둘로는 안되겠습니다. 총재(YS)에게 말씀드려 박 의원을 우리 일에 합류시키고 싶은데, 생각이 어떠십니까?”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이건 내가 생각하던 보혁 정치구도로 가는데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한편으로는 ‘군부세력과 손을 잡는 건데, 명분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황 부총재는 “박 의원을 3당 통합 준비위원으로 당장 넣겠다는 게 아니고, 박 의원이 동의하면 총재께 건의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를 ‘골수 야당분자’로 생각하는지 아주 조심스러운 자세였다. 나는 “판단이 잘 서지 않으니, 먼저 총재께 말씀드려 봐라”고 대답했다.
얼마 후 황병태 부총재와 다시 만났다. 그는 “YS가 일을 더 크게 벌이지 말라고 했다”면서 “지난번 얘기는 없었던 일로 해 달라”고 말했다. 나는 ‘YS가 3당 합당을 놓고 조건이 안 맞으면 그만둘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合黨)이 발표됐다. 이기택 의원과 3당 합당에 참여하느냐를 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의원이 말했다.
李基澤과의 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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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가운데)이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함께 3당 합당을 발표하고 있다. |
“맞습니다. 나도 명분상으로는 못 간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럴 경우 어떻게 되느냐입니다. 지금 이 땅에는 김영삼이라는 강과 김대중이라는 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김영삼이 선택하는 강으로 가지 않으면, 우리는 김대중이라는 강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YS가 타는 버스에 나는 못 타겠어요.”
“YS가 모는 버스가 대단히 위험한 곳으로 가고 있고, 명분도 없다는 것은 나도 잘 압니다. 하지만 이 버스에서 내리면 어디서 내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경우 DJ에게 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왜 자꾸 그렇게만 생각하는 거요? 중간에 지류(支流)를 만들 수도 있는 것 아니오?”
“양김시대의 주인공은 YS와 DJ지 당신이 아닙니다.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두 사람을 따라갈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지류? 조그만 지류 하나 있어도 어느 한 강으로 휩쓸리고 맙니다. 나는 DJ에게는 못 갑니다.”
이렇게 사흘을 옥신각신하다가 이기택 의원은 결국 3당 합당에 합류하기로 했다. 그는 각 당 5명씩으로 구성되는 3당합당추진위원회 위원이 되기를 희망했다. 이 뜻을 김동영 의원에게 전했더니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다른 3당 통합추진위원들과 함께 청와대에 가서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후 이기택 의원은 다시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가 보니 영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든다. 박철언(朴哲彦)이가 거들먹거리는 것은 꼴도 보기 싫다”고 했다.
결국 이기택 의원은 구정(舊正)이 지난 후 3당 합당에 불참하기로 결정했다. 이 의원은 내게 “도와 달라”고 했다. 함께 3당 합당에서 이탈하자는 얘기였다. 나는 거절했다.
“나도 이제 일개 개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정치인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 결정한 일을 번복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도 이게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YS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로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합당 후 YS가 대통령 후보 공천을 못 받을 것 같으면, 그때 탈당하겠습니다.”
신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된 이기택 의원 비서관으로 상경(上京)한 지 23년 만에 우리는 그렇게 갈라섰다.
‘3프로’라는 별명
하지만 YS를 민주자유당(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만드는 과정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6공(共)의 황태자’ 박철언 정무장관은 사사건건 YS와 부딪쳤다. 민자당 내 YS 계보 사람들 사이에서는 YS가 대통령 후보가 되기 어렵겠다는 비관적인 얘기가 나왔다.
하도 답답해서 YS의 인척이기도 한 손주환(孫柱煥) 정무수석비서관을 만나 “당신은 YS와 집안 사람 아니냐? YS가 되는 건지 안되는 건지 솔직하게 말해 달라. 만일 YS가 안된다면 탈당한다”고 화풀이를 한 적도 있다.
1990년 10월 내각제 각서 유출 파문이 발생했다.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이던 YS는 당무를 거부하고 마산으로 내려갔다. 나는 YS를 찾아가 “죄송하지만 지금 총재님이 후보가 될 가능성은 3%도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그 얘기를 하도 많이 하고 다녀서 당시 내 별명이 ‘3프로’였다. 그만큼 YS가 민자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마산에서 올라온 나는 최기선(崔箕善·13대 국회의원, 인천시장 역임)·박경수(朴炅秀·13·14대 국회의원 역임)·강삼재(姜三載·12~16대 국회의원 역임) 의원 등과 더불어 탈당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몇 명의 민주계 의원들이 먼저 탈당, 민주계 의원들의 탈당을 선도(先導)한다는 계획이었다. YS에게는 비밀로 했다. 서울 마포 가든호텔에 방을 얻고, 민주계 의원들의 서명도 받았다. 성명서는 내가 작성했다.
탈당성명을 발표하기로 한 날 아침, 갑자기 우리가 있던 호텔 방문이 확 열렸다. YS였다.
그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와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너그들, 왜 이러노? 이러면 안 된다.”
YS는 다급했다. YS가 말했다.
“행동하려면 내하고 같이 행동하자. 이러면 안 된다.”
내가 말했다.
“이대로 가면 후보가 못 됩니다.”
YS, “나하고 같이 민자당에서 싸우자”
“그렇게 되면 다 같이 싸우자. 다 같이 탈당하자. 이러면 안 된다.”
YS가 하도 간곡하게 얘기하는 바람에 결국 우리는 탈당계획을 포기했다. YS를 보내고 난 후 “도대체 어떻게 YS가 이 사실을 알았느냐?”고 하자, 최기선 의원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내가 말했소. 총재님 식객으로 시작한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소.”
YS는 최 의원의 얘기를 듣자 “김동영이 찾아라, 최형우 찾아라, 그 ××들 다 끌고 와라”라며 난리를 치다가 “총재님이 직접 가시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듣고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탈당계획은 그렇게 무산됐다. 그 이후 YS는 노태우 대통령과 정면충돌로 들어갔다.
1992년 5월 19일 민자당 전당대회에서 YS는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그날 밤 9시쯤 나는 상도동으로 YS를 찾아갔다. 내 발로 상도동을 찾아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대통령 후보는 누가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총재님이 스스로 쟁취한 것입니다. 이제 당선될 것입니다. 훌륭한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그동안 불평하고 총재님을 괴롭힌 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해 12월 18일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YS는 DJ를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YS시대가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