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므이의 저주
삼하 16:5-14
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13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
14 왕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피곤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삼하 16:5-14 / [시므이의 저주와 다윗의 믿음] 다윗왕이 감람산을 넘어 바후림 마을에 이르자, 그 마을에서 어떤 사람이 달려 나오며 왕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는 사울 집안의 먼 친척인 게라의 아들 시므이였다. 6) 다윗왕의 용감한 부하와 신하들이 왕의 곁에 함께 하고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그는 겁 없이 돌팔매질과 저주를 퍼부었다. 그때에 다윗 일행은 깊은 골짜기를 타고 내려갔는데, 시므이는 골짜기 위의 산비탈을 타고 따라오면서 밑으로 돌을 던지고 모래를 날리며 7) 무서운 저주를 외쳐 댔다. `이 살인자야, 꺼져라! 악한 자야, 영원히 망해 버려라! 8) 네가 사울의 집안을 모두 죽이고 무사할 줄 알았더냐? 이제 바로 그 벌을 받게 되었다. 네가 죽인 그 모든 사람의 피가 네 머리 위로 돌아왔다. 네가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았지만, 이제는 여호와께서 그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바로 네 아들 압살롬에게 넘겨주셨다. 네가 사람을 많이 죽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 벌을 받는 줄이나 똑똑히 알아라. 이 더러운 살인자야!' 9) 왕을 모시고 가던 신하들은 더 이상 수모를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내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표로 나서서 다윗에게 건의하였다. `죽은 개만도 못한 놈이 우리 임금님을 이렇게 욕하고 저주하는데, 내버려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당장 언덕으로 뛰어올라가 그놈의 목을 잘라 버리겠습니다.' 10)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스루야의 아들들아, 왜 나의 일에 그토록 간섭을 하느냐? 가서 나를 저주하라고 그에게 명령을 내리신 분이 바로 여호와이시라면 누가 감히 그를 책망하고 벌을 내릴 수가 있겠느냐?' 11) 그리고 다윗이 끝으로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내 몸에서 태어난 아들도 지금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하물며 베냐민 사람이야 더 말하여 무엇하겠소?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를 저주하라고 책임 맡겨 주신 것이니 계속 욕하고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12) 내가 지금 이 수모를 그대로 다 받으면 여호와께서 혹시 나의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시므이의 모든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는지 누가 압니까?' 13) 다윗이 이런 말을 하면서 자기의 부하들과 함께 골짜기를 내려갈 동안에도 시므이는 여전히 산비탈을 타고 쫓아오면서 다윗을 저주하고, 그에게 돌팔매질을 하며 흙먼지를 날렸다. 14) 왕이 신하들과 요단 강가에 이르자 아주 지치고 피곤하였다. 그는 여기서 비로소 휴식을 취하고 기운을 되찾았다.
다윗이 사울의 친족이며 완악한 시므이의 저주를 받습니다.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5-8) 다윗 왕의 일행이 바후림에 도착했을 때 시므이가 나타나 다윗 왕을 저주합니다. 시므이의 저주는 말뿐 만 아니라 행동, 즉 돌을 던지기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돌을 던지는 행위는 상대방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극도의 분노를 표시한 행위로서, 다윗이 베냐민 지파의 쇠퇴와 사울가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8). 그러나 이러한 시므이의 비방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다윗은 사울가의 어느 누구도 살해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을 마치 자기 아들처럼 예우하며 아껴주었습니다(9:9, 10). 또한 시므이의 저주는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아’ 또는 ‘파괴를 일 삼는 자식아’, ‘약속의 땅에서 떠나 이방인의 땅으로 가라’는 뜻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창 13:14-17)을 자신들의 영원한 기업으로 믿고 있었던 히브리인들에게는 아주 악랄한 저주였습니다.
곤고함에 처한 다윗(9-14) 시므이의 계속되는 저주에 아비새는 다윗 왕에게 시므이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죽은 개는 가장 보기 싫고 하찮은 인간을 뜻하는 히브리적 은어입니다. 유대인들은 개를 멸시하였으며(출 22:31; 삼상 17:43; 24:14; 왕하 8:13; 시 22:16, 20) 더구나 죽은 개란 시체를 의미하는데 모세 율법에서 시체는 아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여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규정했습니다(레 22:4). 그러나 아비새의 요구에 다윗 왕은 압살롬의 반역이나 시므이의 저주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시는 징계라고 생각했습니다(12:10-12).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를 용납하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시므이는 계속해서 산비탈로 따라가면서까지 저주하고 돌을 던지고 먼지까지 날리며 저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은 시므이의 저주를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긍휼이 보실 수 있는 기회로 생각을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넉넉히 이겨나가고 있습니다(약 1:4). 이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엄정하게 살펴볼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적 용 : 다윗은 자기를 괴롭히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보복하거나 불평하기 보다는, 자신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여기고 철저히 근신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꿈을 크게 가져라. 오직 큰 꿈만이 영혼을 감동시킬 수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입니다. 나이가 들었어도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었어도 꿈을 꾼다면 그것은 청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소년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무엇이 되고 싶다는 그 열망, 그 열망이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스스로를 봅니다. 내가 내 자신을 배반하지 않는 이상 꿈은 내 손을 들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꿈을 버리지 맙시다. 우리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꿈을 품고 살아야합니다.
< 설 교 >(1)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말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 간에 널리 회자된 말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아서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동안 이 사상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저항했습니다. 저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일단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인간에 불과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닮을 수 있겠느냐? 그리고 예수님은 집도 없고, 가정도 없고, 또 독신으로 사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셨는데 인간이 그렇게 사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하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닮고자 한다면 예수님의 인격적인 면만을 닮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의 행적,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의 이적 행하심도 닮아야 실제로 그리스도를 닮는다고 말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바뀌게 된 동기는 세상이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있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 기독교 소설가 작품에서 여객선이 침몰할 때 구명조끼가 없는 사람에게 자기의 구명조끼를 벗어주는 신부님을 보고 기독교 신앙에 귀의했다, 라는 그런 스토리를 기억하게 되면서 한국의 기독교가 일본의 기독교와 대비되는 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사람들이 기독교에 귀의하는 동기는 누가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뭔가 신앙을 통하여 소원을 이루었다거나, 문제를 해결했다거나, 병을 고쳤다거나 이런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또 기복적인 이유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한국의 기독교가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졌는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에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고 그렇게 열심히 믿었던 것이 오히려 한국의 개신교가 타락하게 된 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말은 어떤 비현실적인 것을 닮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하여 직장이나 가정을 버릴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하여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더 단순하고 평이합니다. 오히려 쉽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남을 위해 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는 것입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오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마음을 본받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태로 나타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본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초점을 다른 데 두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별로 우리에게 어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화려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예수님처럼 거룩하고, 결백하고, 완벽하고, 흠이 없는 분에게는 가능하겠지만, 나는 이미 인생에 실책이 많고, 흠이 많고, 이미 많이 더럽혀진 사람인데 내가 이제 와서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한다는 것은 마치 이미 더러운 칠판에다가 흰색 분필로 무엇을 쓰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내가 이제 와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하게 되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오히려 나를 조롱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건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에요. 이제 와서 내가 이렇게 한들 특별히 의로워질 것 같지 않고, 나답지 않다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기 때문에 본문에 다윗의 모습을 우리가 참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다윗이 밧세바와 부정을 저지르고, 밧세바의 남편을 전쟁터에 보내서 죽여버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셔서 그의 가정에 풍파가 닥친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에게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압살롬이라는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일시적으로 성공하고 아버지 다윗을 예루살렘에서 내쫓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자기의 왕자에서 쫓겨나서 도망가는 중에 시므이, 라는 사람이 돌을 던지면서 다윗을 욕하는 장면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장면을 보고 다윗의 장군 중에 한 사람이 저 죽은 개가 어찌 임금을 모욕하는 것을 내버려두겠습니까? “내가 곧 건너가 칼로 베이리다.”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 때 다윗이 대답하기를, “내버려두라.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 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또 아비새와 모든 심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라.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여기까지만 들으면 다윗이 좀 우울하게 생각하고 모든 것을 낙심하는 그런 심리에서 나온 말처럼 들리지만, 곧 다음 절에, 22절에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여기에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자기의 의의를 부인함과 자신의 운명과 자신의 의
로움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고, 여기에서 다윗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므이가 다윗을 욕하는 것은 일리가 있는 일이에요. 다윗은 욕먹을 만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다윗이 한 일은 수욕을 감수하고,묵묵히 참은 것입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실 때 자기의, 당신의 수난을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변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의롭다 확진하실 분은 하나님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왜 죄 없는 나를 이렇게 하느냐? 라던가 왜 나에게 이런 불의한 고난을 주느냐? 이런 식으로 반발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는데 수난을 받으신 것이고, 다윗은 죄가 있는 중에 수난을 받은 것이지만, 원리는 똑같습니다. 원리는 똑같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 라고 주장하지 않고, 판단을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비우려 할 때 비워야 할 것이 많아요. 명예라던가, 욕심이라던가, 탐욕이라던가 그러나 비워야 될 것 중에 하나가 자기의 의로움이에요.
이것이 어렵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른 건 벗을 수 있는데 자신의 의로움을 벗는 것은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의 인격을 오해한다던가, 나의 어떤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다거나, 또 내가 공로 세운 것에 대해서 빛을 비춰주지 않는다거나 나는 선한 사람인데 사람들이 나의 인격을 오해한다거나, 욕한다거나, 씹는다거나 이럴 때 다른 건 참아도 자신의 의로움이 손상되는 것처럼 느낄 때는 사람들이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반발하고, 욕을 하고, 맞서 싸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실 때 사람들이 다른 이유로 예수님을 욕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돈을 떼어먹었다느니, 누구를 해쳤다느니 이런 고발을 한 게 아니고, 신앙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을 비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어겼다느니, 그렇게 가르쳤다느니,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모독했다느니. 그런데 이러한 모든 비난에 대하여 예수님은 묵묵하셨습니다. 대꾸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베드로 2장 23절에, “그리스도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공의로 심판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다, 라는 말은 다 맡기셨다, 라는 뜻입니다. 내가 의로운 것을 하나님이 증명하시리라. 내가 옳았다는 것을 하나님이 확진해주시리라. 그걸 믿고 묵묵히 현재의 비판을 감수하셨다는 말인데 다윗이 한 것도 똑같은 일입니다. 다윗도 사람이 나를 욕하는 것은 내가 욕을 먹을 만한 짓을 했기 때문일 것이고, 만일 내가 불의하게 욕을 먹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라도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이다. 이렇게 믿고 현재의 수욕을 묵묵히 감당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은 의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죄인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죄인도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자기를 의롭다고 변명하지 않고,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위탁함으로. 그게 그리스도를 본받는 거에요. 나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죄가 있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반대로 의의가 있더라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왜요? 나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믿기 때문에. 내게 죄가 있든, 의로움이 있든, 나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누가 나를 욕하면 내가 욕먹을 짓을 했었던 모양이구나, 라고 생각하지만 낙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그러기 때문에 반발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발끈하지 않습니다. 아픔을 참습니다. 온유합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자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설 교 >(2)
사람의 숲 속에서
사람은 누구나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본래부터 그런 존재로 창조해 놓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통해 가정을 만드셨고, 가정은 더 나아가 사회, 국가, 세계 인류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가리켜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이는 ‘사회적인 존재’(Social Being)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한자로 사람을 가리켜 사람 人자와 사이 間자를 써서 ‘인간’(人間)이라 부르는 것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만일 사람이 혼자 떨어져 있다면 얼마나 삭막하고 고독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래서 교도소에서 가장 큰 벌 중에 하나가 독방 수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이른바 ‘사람의 숲’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숲에서 살아가는 게 즐거움과 기쁨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갈등과 괴로움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죠. 밤에 으슥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기분이 어떤가요?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뒤를 돌아보니까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반갑죠. 길동무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모르는 사람이면, 더욱이 인상이 험악하면 어떤가요? 혹시 해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게 인간관계의 이중성입니다. 내 곁에 사람이 없어도 쓸쓸하고 힘들지만, 있어서 오히려 더 나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이 모든 인간 사회에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각종 모임과 단체에서도, 심지어는 교회에서조차 그럴 수 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아마 공동묘지에만 없을 겁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불완전하고 악한 본성을 가진 죄인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교인들에게 미워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분은 손을 들어보라고 질문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아무도 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다음 말을 이어가려고 하는데, 뒷자리에서 연세 많으신 노인이 천천히 손을 들었습니다. 놀라서 정말 한번도 사람을 미워한 적이 없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아, 있기야 있었지. 그런데 다 죽었어 ~ ” 예외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정말 행복하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려면 무엇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잘 지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주변에 사귀기 어려운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그들과 잘 지내야 합니다. 물론 이게 말이 쉽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죠. 그러기에 우리에게 인간관계에서 승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 사회에서 결코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삶을 통해 이런 점에서도 좋은 모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일생 중에 많은 고난이 있었는데, 그것은 경제 문제나 건강 문제 같이 물질적인 문제보다 주로 인간관계의 문제였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돈이 없어 궁색할 때도 괴롭고, 건강을 잃어 고통 받을 때도 정말 괴롭습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보면 인간관계에서 겪는 갈등과 고통이 더 괴로운 것 같습니다. 사실 인간관계가 원만하면 경제적인 문제도 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 문제도 어느 정도는 위로받으며 이겨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대책이 없죠. 그 정신적 고통은 엄청난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고통을 많이 겪었지만 신앙으로 극복해 냈습니다. 결국 인간관계의 고통 중에서도 잘 버텨냈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비결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훨씬 더 우리 인생이 행복하고 윤택해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1] 다윗에게 긍정적이었던 사람들 : 인생의 활력소
다윗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를 도와주고 그에게 기쁨이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사울에게 목숨의 위협까지 받으며 핍박을 당할 때 도와주었던 요나단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 외에도 그의 주변에서 수족처럼 충성을 다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이 가장 곤고할 때조차 그의 곁에서 든든한 지지자로 남아 있던 사람들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핍박을 피해 다닐 때 오랜 세월 그와 동행했던 600명의 부하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그의 아들인 압살롬의 쿠데타로 비참하게 쫓겨난 그를 위해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잇대, 후새, 사독, 아비아달, 요압, 바실래 등 ...
그 외에도 중요한 순간마다 그에게 도움이 준 많은 용사들과 무명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삼하 23:11~3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삼하23:13~17 보면 아주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블레셋과 전쟁 중 목말라 애태우는 다윗을 위해 적진인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온 용사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굉장하죠. 그들은 왕에게 물을 갖다 주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때 다윗은 차마 마실 수 없어 하나님 앞에 부어버렸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 가운데 이런 사람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게 쉽지 않죠. 그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남이 자기에게는 잘 해주기를 바라는데, 자기는 남에게 잘 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이전에 다윗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서로의 인생에 큰 힘이 되고 활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우선 내 편에서 먼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겁니다. 그럴 때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눅6:38에 보면 먼저 주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행20:35에 보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내 것을 퍼주는데 어떻게 더 복되고 많아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더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대접하는 것, 그것이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승리의 비결입니다. 윈윈(Win-Win)의 관계요, 상생의 비결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이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한 게 현실입니다. 우리는 핍박하는 사람들, 상처를 주는 사람들, 배반하는 사람들, ... 이런 저런 사람들 때문에 많은 괴로움과 고통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의 숲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 그리고 그 사람의 숲이 오히려 신선한 그늘이 되게 할까? 바로 그게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인 것입니다.
[2] 다윗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람들 : 인생의 독소
다윗의 일생을 보면 인간 고생이 참 많았습니다. 초년 시절에는 사울에게 많은 미움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장인과 사위 관계였는데 말입니다. 왕이 된 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배반당하고 갈등을 겪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친 아들이 배반을 하고 그를 왕궁에서 쫓아냅니다. 이제는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그때 다윗의 인간적인 괴로움이 얼마나 컸을까? 헤아려 봅니다.
여러분, 다윗의 처절한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황급히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가 감람산 비탈길로 올라가며 눈물을 흘리는 다윗! 삼하15:30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그런데 그 아픈 상처를 마치 후벼 파내듯이 더 고통스런 일이 발생합니다. 너무 황당한 일입니다. 참 세상 인심이 그렇습니다. 다윗이 왕의 권좌에 있을 때는 충성하던 자들이 많이 배반했습니다. 조용히 있던 자들이 일어나 다윗을 비난하고 욕을 해댑니다. 그 중에 가장 황당하고 힘들었던 일은 본문에 기록된 ‘시므이의 저주 사건’입니다.
본문 5절 이하를 보면 시므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사울 왕가의 일족인데 다윗에게 분풀이를 합니다. 사울 왕가가 망한 것은 다윗 때문이 아닙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몇 차례 있었는데도 오히려 살려주고 끝까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순리대로 왕이 된 다윗입니다. 그런 다윗에게 분풀이 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그런데 시므이는 오해를 하고 다윗과 그 일행을 향해 저주합니다. 돌을 던집니다. 돌을 던지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모욕과 저주의 표현입니다. 입에 담지 못할 말로도 저주를 합니다. 다윗을 가리켜 피를 흘린 자요 비루한 자(=불한당)라 부르며 꺼지라고 소리칩니다. 아들에게 쫓겨났으니 자업자득이고 꼴이 좋다고 조롱합니다.
다윗이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 얼마나 황당했을까? 얼마나 자신이 비참했을까? 마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인생 살다보면 이런 경우를 당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 잘못 대처하면 우리 인생에 정말 독소가 되고 맙니다. 그로 인해 인생이 몹시 괴로워지고 무너져 내립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이런 경우가 아주 가까운 인간관계에서 자주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시므이도 시므이지만 가장 가까운 아들 압살롬에게 당한 것을 보면 압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인간관계 중 갈등을 겪고, 상처를 주고 받고, 괴로워하는 때가 대개 어떤 경우인가 ... ? 가족, 부부, 부모 자식, 친구, 동료 등 오히려 가장 가까운데서 그런 경우를 당하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해결하기가 더 힘든 건지도 모릅니다.
이때 다윗이 본능적으로 감정적으로 대응했다면 아마 그의 인생도 순탄치 않았을 겁니다. 분노한 나머지 아비새가 건의한 대로(본문 9절) 시므이의 목을 치라고 했었더라면 평생 그 부담을 안고 살았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천만다행입니다.
다윗은 참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잘 알았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한 마디로 백해무익합니다. 나쁜 결과만 안게 됩니다. 대개 다음의 세 가지 나쁜 결과들이 생기게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① 마음의 평화가 깨집니다. 상대방이 잘못해서 당연히 내가 반응하는 것이라도 증오와 미움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부둥켜안고 있으면 나 자신이 매여 있는 겁니다. 맥스 루카도는 이런 경우를 가리켜 ‘꼼짝 없이 매인 사람들’이라 불렀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만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상대방을 어떻게 해주지도 못하면서 나만 해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상대방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잘 먹고 잘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더욱더 약이 오르고 힘들어지죠. 그러다 보면 때로는 충동적인 행동으로 문제를 만들기도 합니다. 마치 쥐를 잡으려고 집에다 불을 놓는 격입니다. 쥐는 잡아야 되지만 집까지 불태워버려서는 안되죠.
② 육신의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마음이 무엇엔가 얽매여 있으면 육신도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결국 건강도 해치고 수명도 단축될 수 있습니다. 어느 신경정신과 의사의 글을 읽다가 한편 흥미롭기도 하고 한편 심각한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이 스트레스로 신경성 질환을 얼마나 많이 앓고 있습니까? 심지어 무좀도 신경성 무좀이 있다고 합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③ 영적으로 하나님과 막혀버립니다. 이게 제일 치명적인 일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계속 막히면 하나님과 막히게 됩니다. 예수님도 마6:23~24에 말씀하셨습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다가 어떤 사람과 원한이 있으면 얼른 가서 그 감정을 풀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과의 악한 감정을 품고 있으면 예배도 실패한다는 겁니다. 기도도 응답되지 않습니다. 축복의 통로도 막혀버립니다. 엄청난 손해를 보는 겁니다. 심한 경우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지면 안 됩니다. 악을 악으로 대응하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롬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와 증오에 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악으로 대응하고 나쁜 감정을 품은 게 아니라 선한 방법으로 대했습니다. 그리고 완벽하게 승리했습니다. 우리가 이걸 배워야 합니다.
[3] 사람의 숲 속에서 승리하는 비결 : 사랑과 용서
다윗이 인간적인 모욕과 저주를 당할 때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이것은 인간 관계에서 거둘 수 있는 위대한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는 인간 관계를 ‘너와 나의 관계’로 국한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로 생각했습니다. 거기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 관계에서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 대 인간의 문제로만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했는지 살펴봅니다.
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성찰 :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다윗은 나름대로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과거에 잘못한 점도 잇었지만 이미 용서받고 모든 게 해결된 상태입니다. 그럼에두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고 부족한 사람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시므이가 저주를 해도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 나도 죄인인데 ... 다 내 부덕의 소치이지 ... 내 아들도 나를 몰라내는데, 네가 나에게 저주하는 게 뭐 그리 큰 일이냐? 어쩌면 하나님이 너를 시켜 나에게 저주하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게 하나님의 징계라면 달게 받겠다는 자세까지 보입니다. 10절~11절.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
사람은 믿음이나 신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저 사랑의 대상일 뿐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달라지면 인심도 변합니다. 시므이가 그러는 것이나 우리 주변에서 사람들이 나를 향해 변심하고 악하게 나오는 것이나 이상한 게 아닙니다. 그려러니 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받아 넘기면 승리하는 겁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세요. 야구에서 투수가 공을 세게 던집니다. 엄청난 속도와 힘으로 옵니다. 그러나 포수가 마치 끌어안듯이 받으면 아프지 않습니다. 우리도 상대방이 악한 공격을 해도 하나님 앒에서 나도 죄인인데, 부족한데, 혹시 하나님이 시켜서 저러나 생각하면서 너그럽게 받아들이면 괜찮다는 겁니다.
② 하나님의 심판과 섭리 기대 : 다윗은 시므이에게 저주를 당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했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데, 그렇다면 심판하실 것이고, 또 선하게 섭리하실 걸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말 그렇죠. 하나님 보지 않으면 모르겠거니와 하나님이 보고 계시면 어련히 알아서 판단해 주시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길에서 운전하다 교통사고가 나면 쓸데없이 흥분하고 싸우기를 잘합니다. 접촉 사고가 나면 현장 보존이나 해 두고 교통 경찰을 부르면 됩니다. 아니면 양쪽 보험회사 직원을 부르면 됩니다. 그런데 핏대를 올리고 싸웁니다. 그러다 보면 감정 싸움이 되고 해결이 더 복잡해지기 일쑤입니다.
다윗은 그 순간 분노하거나 흥분하지 않고 심판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12절.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정말 지혜롭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하나님이 판단하고 계실테니까 흥분할 게 없다는 것이죠.
다윗이 이렇게 믿음으로 대처하자 하나님이 역사해 주셨습니다. 암살롭을 진압해 주셨고, 시므이는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결국 환궁해서 말년을 은혜롭게 마치게 됩니다.
③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용서를 선택 : 다윗은 시므이가 저주할 때 순간적으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분노하고 보복할까 아니면 용서할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됩니다. 그는 충분히 복수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피난을 떠나는 왕이라도 왕은 왕입니다. 수행하는 신하들도 많았습니다. 아비새는 당장이라도 시므이의 목을 칠 태세입니다. 그러나 그는 용서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죄인이므로 용서가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하라니까 그냥 선택하는 겁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압살롬이 진압되어서 환궁할 때도 한번 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벌써 알고서 다윗 앞에 달려나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시므이의 모습을 보고 그가 어떻게 합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구역질이 날 정도입니다. 거들떠 보지도 않아도 되고 복수를 해도 됩니다. 그러나 그는 용서하기로 선택합니다.(삼하19:18~23 참조)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도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큰 은혜를 기억하는 그로서는 차마 복수할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기에 우리도 당연히 남의 죄를 용서해줘야 합니다.(마6:15)
27세에 이미 백만장자가 된 폴 마이어라는 미국인이 있습니다. 그는 그 후에도 계속 사업에 성공하여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리더십과 인간 관계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의 책 「성공을 유산으로 남기는 법」(두란노)을 보면 그는 자기의 성공 요인을 신앙으로 언급합니다. 25개 신앙의 덕목(백만장자의 인생 열쇠 25)을 설명하면서 그것들이 자기를 성공하게 만들었다고 간증합니다. 그는 후손들에게 그 덕목들을 꼭 물려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 25개 덕목 중 하나인 ‘용서’의 항목에서 그는 한 가지 간증을 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난폭한 분이었는데, 하루는 밖에서 언짢은 일이 있었는지 식탁에 앉았다가 음식을 먹지도 않고 냅킨에 싸서 쓰레기통에 처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치웠습니다. 어리지만 그는 속에서 울분이 생겼습니다. 나중에 어머니에게 하다못해 그릇이라도 던지며 대항하지 그랬냐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20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예수님 말씀처럼 오른뺨을 맞으면 왼빰을 대주듯이 용서하기로 선택했다.” ‘선택’이라는 말이 어린 그의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후 그는 사업을 하고 인간 관계를 하면서 어려운 순간마다 어머니 말씀대로 용서를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 관계가 잘 풀렸고 사업도 잘 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피뢰침을 아시죠. 피뢰침은 낙뢰를 온 몸에 받지만 끄떡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죠? 접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 은혜에 연결되어 그 은혜를 기억하고 깊이 묵상하면하면 사름들에게 상처를 받거나 고통을 당해도 넉넉히 용서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어차피 사람의 숲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숲 속에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인간 관계를 맺으면 신선한 바람이 부는 아름다운 숲 속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관계의 갈등과 분노에 매여 산다면 정글과 같이 살벌한 숲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물론 우리 혼자서 그 숲을 아름답게 만들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남의 탓만 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 은혜를 입은 우리이기에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아니,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행복한 인생을 위해 좋은 인간 관계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숨쉬며 사는 사람의 숲은 정말 아름다운 숲이 되어 우리의 남은 생애가 늘 기쁨으로 충만한 승리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