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일보] 삼국유사 기행 <144> 경애왕
신라 55대 경애왕, 후백제 견훤에게 무릎 꿇으며 천년신라 막내려 출처 : 대구일보 2021-12-20... 에서 옮겨 편집 ☜ 출처 바로가기 클릭 🌷🌷🌷🌷▒ 맨 아래로 가기 ▒🌷🌷🌷🌷 경애왕릉... 경북 경주시 배동 산 73-1 ↑ 통일신라의 실질적인 멸망은 56대 경순왕에 앞서 후백제 견훤에게 죽임을 당한 55대 경애왕대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경주 서남산자락에 위치한 경애왕릉 통일신라가 원성왕 이후 내전에 휩싸여 어지러울 때 후백제와 후고구려 세력은 점점 힘을 키워 확대되며 오히려 신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신라 하대 48대 경문왕과 49대 헌강왕대에는 풍년이 들어 백성들의 삶도 잠시 평화로운 시기를 맞는 듯했으나 이내 위홍, 김예겸 등의 귀족들이 득세하면서 내정이 다시 어지러워지고 후삼국의 견제로 신라는 급격하게 쇠퇴했다. 김예겸은 효공왕에게 딸을 시집보내 장인어른으로 군림하며 어린 왕을 대신해 권력을 휘둘렀고, 53대 신덕왕과는 의부로 인연을 맺어 여전히 최고의 권력자로 행세해 신라하대 왕권은 나라의 힘과 함께 위력을 잃었다. 경명왕과 경애왕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박씨 왕조는 이미 기울어진 1천 년 신라의 운명과 함께 후백제와 고려의 사이에서 바람 앞의 등불 격이었다. 경애왕 즉위 이후 영천까지 압박해온 후백제 견훤의 군사들을 막기에는 이미 벅찬 신라는 고려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신라를 돕기 위해 급하게 내려오다 왕건도 팔공산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겨우 목숨을 건지고 도망쳤다. 제대로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견훤의 말발굽에 밟혀버린 신라왕조는 경애왕이 적장 앞에서 스스로 자진하는 굴욕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 화랑 출신으로 왕이 된 경문왕의 세 자녀도 차례로 왕위에 올랐다. 경문왕의 첫째 아들로 왕위에 올라 신라 하반기 안정기를 찾았던 시기를 맞았던 49대 헌강왕의 릉 ◆경문왕의 자녀들 신라 47대 헌안왕은 화랑 응렴의 지혜로움이 돋보여 사위로 삼았다. 응렴은 헌안왕에 이어 48대 경문왕으로 즉위해 원성왕 이후 이어지던 왕권다툼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경문왕은 화랑들의 교육을 강화하면서 인재를 키워 대거 등용했다. 이어 불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수련이 깊은 승려들을 중앙은 물론 지방에까지 파견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평화스러운 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경문왕은 두 아들과 딸 하나, 삼남매를 뒀다. 그 삼남매는 차례로 왕위를 이었다. 경문왕의 노력은 결국 아들 헌강왕이 즉위했을 때 빛을 발해 전국에 풍년이 들고, 백성들의 마음에도 평화가 깃들었다 ↑ 서남산 끝자락에 위치해 있으면서 경주시가지에서 경주내남교도소 사이의 경애왕릉은 접근성이 좋고, 삼릉과 가까울뿐 아니라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여 경치가 좋아 방문객들이 많다 헌강왕은 15세에 즉위해 철이 없었다. 단지 성격이 호쾌하고 활달해 화랑들과 무예와 사냥을 즐겼다. 사냥터에서 헌강왕을 만난 여인이 남매를 낳았다. 아들은 나중에 52대 효공왕이 됐고, 딸은 53대 신덕왕의 왕비가 돼 54대 경명왕과 55대 경애왕을 낳았다. 신덕왕이 박씨 성을 가졌으나 김씨 왕가의 사위로, 결국 김씨 왕의 세습이 이어진 셈이다. 헌강왕은 유흥에 빠지기도 했지만 주변에 실력이 뛰어난 화랑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아버지 경문왕의 뜻에 따라 그들을 중용하여 신임을 두텁게 얻고 있었다. 이어 경문왕때부터 장려해왔던 국학을 발전시켜 6두품 세력들을 중앙 정계에 진출하도록 해 신흥세력의 지지 또한 두텁게 받아 강한 국운을 이어갈 수 있었다. 헌강왕은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태평성대한 시대를 열어가게 되는 복된 군주의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집권하반기 문란한 정치로 다듬어지던 나라의 기반도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헌강왕의 동생이 50대 정강왕으로 왕위를 이었지만 병약해 1년 만에 죽고, 여동생 김만이 51대 진성여왕으로 등극해 상대등이었던 삼촌 위홍과 결혼했다 ↑ 경문왕의 둘째 아들로 헌강왕에 이어 886년 왕위를 이었으나 병으로 1년 만에 여동생 진덕여왕에게 왕위를 넘기고 사망한 50대 정강왕의 릉 위홍은 경문왕의 동생으로 경문왕 집권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정권의 전반에 걸쳐 실질적인 권력자로 모든 나라의 살림살이에 깊숙이 관여했다. 헌강왕이 즉위하면서부터는 상대등의 지위로 모든 국정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됐다. 진성여왕 3년에 위홍이 죽자 나라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여왕은 위홍의 빈자리에 화랑 홍기와 영조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이들에게 나라의 일을 맡겼다. 홍기와 영조는 젊은데다 직접적인 국정 운영 경험이 없어 인사는 물론 군사, 재정 등 모든 분야에 개인적인 연고와 정실 위주로 처리했다. 진성여왕이 직접 나라를 경영해 본 경험이 없었고, 주변의 젊은 층들로 구성된 대신들조차 경험이 일천해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진성여왕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오빠 헌강왕의 아들 ‘요’에게 왕위를 인계해주고, 신라 1천 년 왕조 최초로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는 기록을 남겼다. 여왕은 김요의 척추 두 마디가 돌출된 특이한 경문왕가의 신체적 특징을 확인하고 태자로 삼았다가 그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 헌강왕과 정강왕은 경문왕의 아들로 친형제다. 죽어서도 경주 동남산자락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누워있다. 정강왕릉과 헌강왕릉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의 소교량 ◆김예겸 천년의 사직을 이어오던 통일신라가 본격적인 멸망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효공왕과 신덕왕 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효공왕과 신덕왕은 모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제대로 왕노릇 한번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다. 진성여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으며 화랑들의 품에 안겨 실정을 쏟아내자 김예겸은 귀족들과 세력을 모아 여왕을 몰아내기 위한 전략을 추진했다. 예겸은 헌강왕이 사냥에서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데려와 진성여왕에게 천거했다. 결국 진성여왕은 효공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예겸은 재빠르게 자신의 딸을 효공왕에게 추천해 왕비로 간택하게 했다. 이어 왕실에 자신의 세력을 깊숙하게 심어 화랑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산하고 있는 효종 등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기회를 노렸다. 이때 차기 왕으로 등극할 후보는 효종과 경휘가 유력했다. 효종은 화랑 출신으로 덕망이 높고, 무예 또한 뛰어났다. 거기에다 헌강왕의 맏사위로 경문왕가의 튼튼한 줄을 잡고 있었다. 경휘는 헌강왕의 둘째 사위로 아달라왕의 후손이었다. 역시 왕가의 후손이었지만 명분으로 효종에게 밀렸다. ↑ 사적 제1호로 지정된 포석정. 최근 학자들이 주변에 사당으로 보이는 터와 기왓장이 발견된 점 등을 들어 연회장이 아닌 사당이었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러나 예겸은 경휘를 자신의 의자(義子)로 삼아 기회를 만들었다. 예겸은 전쟁이 산발적으로 신라 곳곳에서 일어나자 효종을 전쟁터로 내몰아 결국 효종은 대야성 전투에서 불귀의 객이 돼 버렸다. 효공왕의 뒤를 이어 신라 53대 왕은 김예겸의 의자인 박경휘가 물려받았다. 후삼국시대에 멸망의 길을 걷는 기울어가는 신라의 왕실은 효공왕에 이어 신덕왕까지 예겸의 입김으로 움직였다. 효공왕은 예겸의 사위이고, 신덕왕은 예겸의 아들이었다. 신라는 예겸의 세상이 됐고, 불행하게도 예겸의 세상은 기울어가는 신라였다 ↑ 경주 서남산 경애왕릉 북쪽에 8대 아달라왕과 53대, 54대 신덕왕과 경명왕의 릉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삼릉. 박씨 문중에서 박씨 왕들의 릉을 비정하기 위해 사적지로 지정은 하고 있지만 시대적 배경 등으로 사실과 맞지 않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경애왕과 신라의 멸망 신라 53대 신덕왕의 아들 박승영은 917년 54대 경명왕으로 즉위했다. 경명왕은 즉위하면서 동생 박위응을 상대등으로, 유렴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즉위 2년에 일길찬 현승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는 어수선하게 됐다. 거기에다 후백제 견훤이 공격의 수위를 높여 대야성까지 함락됐다. 궁예의 후고구려도 한강 이남까지 밀고 내려와 신라의 영토는 결국 현재 경상도 정도의 영역으로 좁혀졌다. 신라는 진성여왕 당시 위홍의 정치에 이어 김예겸의 손에 의해 나라가 운영되면서 왕권은 사실상 실추되고 권위를 잃었다. 진성여왕이 효공왕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신덕왕이 왕좌에 오르기까지 왕위 선양도 모두 예겸을 비롯한 몇몇 대신들의 입김으로 이뤄졌다. 경명왕의 측근세력 위주 인사정책으로 왕실을 둘러싸고 있던 귀족세력들의 대다수는 자신의 고향을 찾아 지방으로 내려가 후백제나 고려에 투항해 신라의 국력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왕건이 궁예를 죽이고 고려를 세우자 경명왕은 고려를 나라로 인정하고 사신을 보내 친화정책을 도모했다. 왕건도 고려에 친화적인 신라와 손을 잡고 후백제 견훤을 손쉽게 견제하는 후삼국 형태가 갖춰졌다. 왕건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신라와 친화정책을 유지하는 동안 신라의 지방세력들은 앞다퉈 고려에 투항했다. 경명왕 말년에는 당나라와의 외교도 시도를 했지만 성사하지는 못했다. 경명왕은 스스로 나라를 유지하는 힘을 잃고 고려에 의존하면서 경산부의 장군에게도 고려에 투항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 조카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41대 헌덕왕릉의 12지신상 호석은 쥐, 소, 호랑이, 토끼, 돼지의 5개 상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홍수로 유실되고 없다. 12지신상들은 모두 평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경명왕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군사력을 잃은 것은 오래됐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백성들의 민심 또한 흔들렸다. 신라가 스스로 지탱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경명왕의 이러한 정치형태는 경애왕으로 이어져 신라는 스스로 자구책을 구하기보다 종교적인 힘에 의존하는 정책으로 전락했다. 경명왕이 즉위 7년 만에 죽자, 그의 아들들이 어려 동생이었던 위응이 경애왕으로 즉위했다. 경애왕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기에 급급했다. 상대적으로 군사력이 약화되고 있던 신라는 후백제 견훤과 후고구려 궁예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경애왕은 경명왕과 같은 외교정책을 택했다. 막무가내로 신라 영토를 침략해오는 견훤을 견제하면서 궁예를 죽이고 고려를 세운 왕건과 친화전략을 필사적으로 펼쳤다. 견훤의 군사가 고을부를 점령하고 다시 금성쪽으로 남하해오자 경애왕은 다급해져 왕건에게 도움을 청했다. 견훤의 신라에 대한 공격 속도는 너무 빨랐다. 왕건의 후원군사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경애왕이 신하들과 머물러 있던 포석정으로 몰려왔다. 경애왕은 결국 견훤의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천년 신라의 사직은 실질적인 막을 내렸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새로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사실과 다를수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출처 : 바로 가기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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