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침묵이 깃들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며, 숨이 끊기는 그 순간까지 연습을 놓지 않으며, 자나깨나 감사로 마음을 채우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참된 현인이 아니겠는가.
"표준국’이란 관청이 있었지 아마, 하는 생각이 떠올라서 사전을 보니 ‘표준국’은 안 나오고, ‘표준’이란 항목만 나오는데, 그 뜻이 (1) 사물을 처리하는 데서의 목표 (2) 타의 규범이 되는 준칙, 이렇게 돼 있다. 내친 김에 ‘기준(基準)’을 보니, 그 뜻이 ‘기본이 되는 표준’ 이러하다. ‘표준’이나 ‘기준’이 서로 비슷비슷한 말이다. 어떤 사물의 성질이나 상황이 기준에 비추어서 그 정도가 어느 만큼인가를 알아볼 수 있는 기계가 각종 계기다. 온도계, 압력계 따위이다. 옛날 (벌써 반 세기 이상 지났다) 학교 다닐 때 물리학 시간에 ‘경도계(硬度計)’에 대해서 배운 기억이 난다. 이 ‘경도계’는 특별한 기계 장치는 아니고, 단단하기가 다른 물질 열 가지를 모은 것에 불과하다. 손톱으로 긁힐까말까한 정도면 경도 1도이다. 경도 10도에 해당하는 물질이 다이아몬드다. 그러니 이 세상에 다이아몬드에 흠집을 낼 수 있는 물질은 없는 것이다.
기준이나 규격은 우리의 삶에서, 특히 여러 사람이 모여서 복잡한 사회생활을 할 때에 없어서는 큰일이 날 정도로 중요한 구실을 한다. 가게마다 저울대의 눈금이 다르다면 견딜 노릇인가. 무게나 길이, 화폐의 가치나 환율 따위 물질적 기준 말고도, 마음이나 정신 현상의 정도를 헤아릴 수 있는 기준도 세울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70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어느 틈엔가 머리에 고인 이러한 기준이 한 서너 가지쯤 된다.
첫째, 저 사람과 나와 마주 앉아서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내도 서로 마음에 불편함이 없다면, 그 사람과 나는 상당히 친밀한 사이이다. 상호간 이해의 정도도 그만큼 깊다는 뜻이 된다. 침묵을 사이에 두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친밀의 정도도 그만큼 높다고 말할 수 있다. 듣고 보면 단순한 생각이지만, 이런 생각을 얻기까지에는 나의 뼈저린 체험이 깔려 있다. 젊었을 때, 사람을 만난다.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다. 인사하고, 날씨 얘기하고, 그 무렵 화제가 되는 운동 선수 얘기도 하고 나면 마땅한 화제가 끊어진다. 상대를 앞에 앉혀 놓고 아무 말이 없으면 그 사람을 푸대접하는 것이 된다. 무슨 좋은 화제가 없을까 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하면 머리가 더욱 콱 막혀서 좋은 생각이 더더욱 떠오르지를 않는다. 세상에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저쪽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때의 그 지옥 같은 시간. 얼마나 많은 이러한 아픈 체험을 제물로 바쳤던가. 부부 사이에서는 하루 온종일 말이 없어도 오해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부부 싸움 한 다음은 사정이 다르다. 부부 싸움으로 해서 둘의 사이가 조금 멀어진 형편이다. 애써, 피나는 노력 끝에 화해를 했다. 이때엔 마음이 쓰인다. 말 않고 내버려두면 또 오해를 살까봐 서로 자주 말을 걸게 된다. 침묵이란 좋은 것이다. 이 좋은 것을 서로 부담 없이 누리기 위해서는 서로의 친애의 정도와 이해의 정도가 그만큼 깊어져야 하는 것이다.
둘째, 무엇이고 연습이 힘들고 지겨워지면 그것은 심신 모두가 늙었다는 증거이다. 이것이 늙음 측정의 기준이다. 연습이란 무엇인가? 연습은 숙달에의 희망이다. 스키건 골프건 서예건 연습 없이 숙달할 수는 없다. 연습은 달인이 되는 길잡이이다. 따라서 연습은 희망이요 기쁨이다. 그런데 어느 날 연습이 하기 싫어진다. 바둑의 급수도 골프의 핸디도 거기에서 스톱이다. 이거야말로 늙음의 기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노신의 『아큐정전』에 아큐가 열심히 동그라미를 똑바르게 그리는 연습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저것 다 그르친 연후에 동그라미 그리기에 열중하는 아큐의 자세에는 자못 처절한 데가 있다. 연습은 같은 동작의 되풀이이다. 직선긋기를 만 번 반복한다. ‘만번주의(萬番主義)’가 연습의 기본 골격이다. 젊음의 힘과 패기 없이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연습이 싫어지는 것이 늙음을 아는 기준이라면, 이것을 역으로 이용해서 애써 연습에 재미를 붙임으로써 늙음을 멀리 할 수 있는 일이다.
셋째, 매사에 감사를 할 수 없다면, 달거나 쓰거나 간에 한결같이 감사를 바칠 수 있을 정도가 되지 못한다면 아직도 수도의 길이 멀었다는 증거이다. 기쁜 일이 생기면 기뻐서 감사하고, 어렵고 언짢은 일이 생기면 시련을 주시니 감사할 일이 아닌가. 이 점에서는 나무가 제일 가는 스승이다. 나무는 ‘절대적 수동성’ 안에 머물러 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누리는 저 나무의 눈부신 자유! 바람과 하나 되어 유유히 춤추는 저 나무의 충실(充實). 우리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간에 살아 있는 동안은 삶 안에 있다. 살아 있다는 일의 이 설렘! 마당에 내려서니 날씨가 너무 맑고 따뜻하다. 내친 김에 지팡이 하나 들고 뒷동산에 올라간다. 나뭇잎으로 덮인, 에메랄드의 터널이 유현하게 나를 빨아들여 준다. 이 기쁨, 이 감사로움.
소중한 침묵이 깃들 수 있을 정도로 (무엇이고) 사랑하며, 숨이 끊기는 그 순간까지 연습을 놓지 않으며, 자나깨나 감사로 마음을 채우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참된 현인이 아니겠는가? 침묵, 연습, 감사... 한번 생각해 보세요...(^^)
첫댓글 눈병 조심--- 늦여름에 눈병이 성행합니다 (슈퍼맨이 다니는 학원에 눈병이 돌아서 슈퍼맨 그제 눈병 걸리고 슈퍼맨 엄마 오늘 눈병나고 ㅠㅠㅠㅠㅠ) 다들 눈병 조심하셈!!!
우리집 환자만 있네....^^
어짜스까이...조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