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예천 명봉사 written by 한국의 사찰과 문화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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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봉사 무량수전 좌측에 위치한 문종대왕 태실비(사진 좌)와 명봉사 사적비(사진 우) |
이 절의 창건은 신라 말 875년(헌강왕 1) 두운(杜雲) 선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하는 것이 없으며, 그 뒤 1662년(현종 3)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여러 스님들이 힘을 모아서 중건했다. 1668년에 다시 절이 전소되어 신익(信益)․행선(幸善) 스님 등이 시주를 얻어서 크게 중창하였다. 이후 1807년(순조 7)에도 한 차례 중수가 있었으나,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되어 버렸다. 그 뒤 1955년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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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봉사 본전인 무량수전 내외부 모습 |
예천읍에서 단양으로 넘어가는 927번 지방도를 따라 승용차로 약 25분 정도 가면 소백산 자락 해발 500m에 자리 잡은 천년 고찰 명봉사(鳴鳳寺)가 나타난다. 명봉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두운선사(杜雲禪師)가 창건한 사찰로 창건 당시 깊은 산중에서 봉황이 울었다고 해서 명봉사로 불러졌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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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량수전 앞에서 내려다 본 모습 |
선계(仙界)에 든 듯 아름다운 숲을 가진 명봉사는 소백산맥 백운봉 아래서 깊은 고요함을 안고 있다. 하늘을 덮고 있는 울창한 수목과 심산계곡을 돌아 나오는 맑은 물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삶의 갈증을 적셔준다. 사찰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아담하고 정갈해서 평온한 느낌을 주는 도량이다. 지난날의 번창할 때의 명봉사의 규모는 수 천 칸이 넘는 매우 큰 절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자취는 보이지 않고 비구니 스님의 수행도량으로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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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량수전 앞에서 좌우로 내려다 본 요사채 모습 |
명봉사 문종대왕 태실비(경북 유형문화재 18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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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종대왕 태실비(사진 좌)와 명봉사 사적비(사진 우)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습니다. |
문종대왕(文宗大王) 태실비(胎室碑), 조선 왕실의 태(胎)를 명당이나 명산에 묻어 성장과 성공을 기원했다는 태실(胎室)과 태봉(胎封)은 왕족의 태반을 묻은 석실(石室)이다.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태실도감을 설치한 뒤 태실을 봉안하고 그 위에 비를 세웠다고 한다. 명봉사에 자리하고 있는 문종대왕 태실비는 대구, 경북에 현존하는 몇 안 되는 태실비 중 하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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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종대왕 태실비 측면에서 바라 본 모습 |
▲ 명봉사 사적비 측면에서 바라 본 모습 |
조선시대(朝鮮時代) 문종대왕(文宗大王)의 태(胎)를 안치하고 세운 이 비는 규모가 전체높이 246cm, 비신(碑身) 높이 113cm, 귀부(龜跌) 61cm, 대좌(臺座)높이 12cm인데, 원래 대웅전(大雄殿) 뒤편 산봉우리에 있었으나 일제(日帝) 때 이 자리로 옮긴 것이다. 이 비는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首)를 올려놓은 일반형으로 지대석(地臺石)과 귀부가 한 돌로 되어 있다. 귀두(龜頭)는 용머리같이 하여 이에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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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종대왕 태실비 앞뒷 모습 |
이수는 방형(方形)으로 전면에 두 마리의 용(龍)이 서로 엉켜 있는 것을 양각(陽刻)했는데 몸체에 비하여 귀부의 처리기법이 둔중(鈍重)해 보이나 전체적인 구성과 조각솜씨는 매우 섬세하다. 비산 앞면에 '문종대왕(文宗大王) 태실(胎室)' 뒷면에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일백팔십을묘(一百八十乙卯)'라 음각한 비명(碑銘)으로 보아 이 비의 건립 년대가 영조(英祖) 11년(1735)임을 알 수 있다. 원래는 절 뒤편 산기슭에 있었으나 일제 때 태실을 발굴해간 뒤, 명봉사의 스님들에 의해 이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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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종대왕 태실비 귀부 측면과 후면 모습 |
명봉사 사적비(사도세자 태실비로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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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봉사 사적비 앞뒷 모습. 사적비는 사도세자 태실비의 비문을 갈아서 명봉사 사적비로 다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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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봉사 사적비 귀부 앞뒷 모습 |
명봉사의 사적비인 '소백산명봉사사적비명병서(小白山鳴鳳寺事蹟碑銘幷序)'는 대웅전 옆의 문종대왕 태실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비신의 형태나 용 무늬가 조각된 양식 등이 서로 흡사하다. 본래는 1785년에 건립된 사도세자 태실비(思悼世子胎室碑)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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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에서 바라 본 명봉사 사적비(사진 좌)와 문종대왕 태실비(사진 우) |
일제강점기에 이 비를 깎아내고 지금의 명봉사 사적을 기록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큰 말썽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사적기는 1940년에 권상로(權相老)가 글을 짓고, 고영찬(高永贊)이 글씨를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석의 앞뒤 면에 모두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출처 : 전통사찰총서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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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량수전 우측에 위치한 약사전과 삼성각 |
▲ 약사전 앞에 위치한 이름 모를 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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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사전 내외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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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각 내외부 모습 |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보물 164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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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각 안에 안치된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보물 1648호) |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境淸禪院 慈寂禪師凌雲塔碑)는 고려시대의 자적(慈寂) 스님을 추모하기 위해서 941년(고려 태조 24) 명봉사 경내에 건립한 탑비로, 1972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호(2010년 보물로 승격)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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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봉사 우측 계단을 올라서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비각이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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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각에 다가서며 바라 본 모습 |
자적 선사의 속성은 김씨(金氏)이고 법명은 홍준(洪俊)이다. 그는 882년에 태어났으며, 899년에 수계(受戒)하였고, 58세의 나이로 구산사(龜山寺)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입적 후 고려 태조는 자적선사(慈寂禪師)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경청선원 안에 '능운(凌雲)'이란 탑비(塔碑)를 세우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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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판 앞에서 바라 본 비각. 탑비의 측면이 보입니다. |
▲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 전면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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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 귀부 앞뒷 모습. 귀부 머리는 깨져서 없어졌습니다. |
최언위(崔彦陶)가 비문을 지었고 글자는 고서에서 따와 새겼다. 탑비는 귀부(龜跌) 위에 좌대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올렸다. 이 탑비는 현재 많이 마멸되어 있지만, 1979년에 판독된 내용에서 신라 말 고려 초에 사용되었던 이두 문자가 발견되어 국어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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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 귀부 좌우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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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 이수 전면과 측면 모습 |
또한 이 탑비의 내용 그 자체는 건립 당시 고려의 중앙 관서인 도평성(都平省)에서 승도들에게 내린, 행정적 양식을 갖춘 문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크기는 전체 높이 291㎝이며 거북의 좌대 높이 52㎝, 둘레 50.5㎝이다. 비신은 높이 190㎝, 너비 96㎝, 두께 2㎝이다. (출처 : 전통사찰총서 17) - 전통사찰 관광종합정보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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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로 가기 전에 계단 앞에서 바라 본 예천 명봉사 전경 |
예천】사도세자 및 문종 태실 복원한 관광콘텐츠 개발 영남타임즈 2012-08-30
태실 발굴지에서 다량의 태실석물 출토 예천군(군수 이현준)은 문화재청으로부터 긴급발굴비를 지원받아 진행된 경북 예천군 명봉리 사도세자 및 문종 태실터에서 다량의 석물들을 발견했다.
보물급으로 알려진 문종대왕의 태항아리와 사도세자의 태항아리는 1930년대 이왕직 예식과에 의해 서삼릉으로 이장되면서, 이곳의 석물들은 훼손되어 문종 태실비와 사도세자 태실비만 명봉사에 안치돼 있다고 알려졌으나, 금년 7월 성림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발굴조사 한 결과 온전하게 남은 석함과 뚜껑 그리고 개첨석, 횡죽석 등 다량의 석물이 출토됐다.
더구나 국립고궁박물관과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문종과 사도세자의 태항아리와 태지석,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는 장조(사도세자) 태봉도와 사도세자태실비 탁본 그리고 태봉등록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남아 있는 역사자료를 활용한다면, 원형에 가까운 복원과 연구성과가 도출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특히, 왕실의 태실문화는 동양의 한․중․일 삼국 중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는 독특한 문화이지만, 전국 대부분의 조선왕조태실은 파괴돼 일부만이 남아 있는 실정이며, 향후 원형복원과 관리가 이루어진다면 동양의 독특한 왕실문화로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을 길이 열려 있다.
한편, 명봉사에 있는 사도세자의 태실과 화성시의 융릉은 정조가 특별하게 왕과 같은 격식으로 조성한 곳으로,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알 수 있게 하는 곳이다. 더구나 예천군에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태실뿐만 아니라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의 태실이 용문사에 위치하고 있어, 정조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지역이다.
특히,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고, 조선후기 왕도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정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며, 사도세자의 융륭과 정조의 건릉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효를 다하고자 했던 정조의 효성이 담겨있는 곳으로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앞으로 예천군에서는 문종대왕 태실과 장조대왕 태실을 복원하여 조선왕조 태실문화의 산 교육장이자 정조의 효심을 보여주는 문화자원으로 활용하고, 이곳을 수원과 화성에 위치한 정조관련 역사자원과 연계하여, 충효와 관련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할 예정이다. 더구나 국립고궁박물관과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문종과 사도세자의 태항아리와 태지석,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는 장조(사도세자) 태봉도와 사도세자태실비 탁본 그리고 태봉등록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남아 있는 역사자료를 활용한다면, 원형에 가까운 복원과 연구성과가 도출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특히, 왕실의 태실문화는 동양의 한․중․일 삼국 중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는 독특한 문화이지만, 전국 대부분의 조선왕조태실은 파괴돼 일부만이 남아 있는 실정이며, 향후 원형복원과 관리가 이루어진다면 동양의 독특한 왕실문화로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을 길이 열려 있다.
한편, 명봉사에 있는 사도세자의 태실과 화성시의 융릉은 정조가 특별하게 왕과 같은 격식으로 조성한 곳으로,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알 수 있게 하는 곳이다. 더구나 예천군에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태실뿐만 아니라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의 태실이 용문사에 위치하고 있어, 정조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지역이다.
특히,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고, 조선후기 왕도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정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며, 사도세자의 융륭과 정조의 건릉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효를 다하고자 했던 정조의 효성이 담겨있는 곳으로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앞으로 예천군에서는 문종대왕 태실과 장조대왕 태실을 복원하여 조선왕조 태실문화의 산 교육장이자 정조의 효심을 보여주는 문화자원으로 활용하고, 이곳을 수원과 화성에 위치한 정조관련 역사자원과 연계하여, 충효와 관련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할 예정이다. |
경북 예천 명봉사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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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부분의 계단을 오르면 끝 부분에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소재지 : 경북 예천군 상리면 명봉사길 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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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좌측 상단의 A 부분에 예천 명봉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영주IC나 예천IC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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