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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역사 속의 강원인물 =강원일보 기획시리즈 )
한 시대의 비운을 살다간 박인환!
시인 이 영 춘
1.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여름 날의 호숫가/가을의 공원/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세월이 가면>전문
널리 알려진 박인환의 대표 시 중의 한 편이다. 이 시는 어쩌면 종래의 그의 다른 모던한 현대적 감각의 작품에 비하면 매우 센티멘탈 하면서도 서늘한 정서의 감동을 전해주는 시다.
이 시가 빚어진 배경은 자못 흥미진진하다. 1956년 이른 봄, 그러니까 박인환이 이 세상을 떠나던 해이다. 명동의 한 모퉁이에 자리한 주로 막걸리를 파는 ‘경상도집’에 송지영(宋志榮),정광주(鄭光洲), 김규동(金奎東) 등의 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 가수 나애심(羅愛心)도 있었다. 몇 차례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일행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다. 나애심은 마땅한 노래가 없다고 거절했다. 이 때 옆에 있던 박인환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즉석에서 이 시를 써 내려갔다. 완성된 시를 넘겨받은 이진섭(李眞燮=주간국제 문화부)이 단숨에 악보를 그렸다. 나애심이 그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불렀다. 한 시간쯤 지나 송지영. 나애심이 자리를 뜨고 태너 임만섭(林萬燮)과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의 소설가 이봉구(李鳳九)가 새로 합석했다. 임만섭은 악보를 받아들고 정식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랫소리를 듣고 명동 거리를 지나가던 행인들이 술집 옆문으로 모여들었다.(2009.9. 장석주) 이 노래가 바로 그 유명한 <세월이 가면>의 배경 일화다. 노래로 된 시의 원문에는 어미 “〜있어”라는 구어체로 쓰여 졌다. 그런데 노래에는 “〜있네” 라고 감탄형 어미로 불려 지고 있다.
2.모더니즘과 모더니스트 시인 박인환
박인환은 1946년 12월 국제신보 주간으로 있던 송지영(宋志英)의 추천에 의해 <거리>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다. 1948년(22세) 양병식, 김차영, 김규동, 김수영, 김경희, 김병욱, 등이 모여 <신시론>제1집을 간행하였다. 그보다 한 해 전인 1947년 가을에 박인환은 김경린을 찾아간다. 그들은 십년지기라도 만난 듯 금방 친해져 그 당시 사회상과 문단의 혼란상에 대하여 개탄하고 격분하기도 했다. 특히 박인환은 김경린이 일본에서 모더니즘운동 단체인 ‘바우vou" 그룹에 참가하였던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어디 멋있는 친구가 있어야지!”그는 몇 번이고 ‘멋’을 강조하면서 김경린에게 “김 형, 우리 멋있는 '현대시‘의 운동을 해 봅시다. 다시 말해서 모더니즘modernism 운동을 말입니다.” 라면서 톤을 높이곤 했다. 그 후 드디어 「신시론」제1집이 나왔을 때, 박인환은 “됐어, 됐어!”하며 의기양양해 하면서 조니워커를 실컷 마시고 싶다며 다방을 들락날락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다.
이어 1949년(24세) 4월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 등과 함께 합동시집「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란 제목의 「신시론」(도시문화사刊) 제2집을 발간했다. 이 때 박인환은 작품 수집과 대외 활동을 맡았고 편집과 장정은 김경린이 맡았다. 그러면서 그는
“어떻게 하여서든 팔리지 않는 잡지를 만들어야지.”
당시 그들은 “그 시대에 가장 많이 팔릴 만한 작품은 시대에 가장 뒤떨어지는 작품”이라는 역설을 토해가며 일했다고 김경린은 전한다. 박인환은 그「신시론」제2집의 표제<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중간 속표지에 『장미의 온도』라는 제목 아래 <열차><지하실><인천항><남풍><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를 발표했다. 이처럼 박인환은 현대문명의 기기機器와 사회비판적 요소가 강한 제목들을 사용하였다.
해방기의 사회 현실에 대한 박인환의 인식은 그 ‘합동시집’의 ‘서문’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나는 불모의 문명 자본과 사상의 불균정不均整한 싸움 속에서 시민정신에 이반離反된 언어작용만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었다. 자본의 군대가 진주進駐한 시가지에는 지금은 증오와 안개 낀 현실이 있을 뿐--- 더욱 멀리 지난 날 노래하였던 식민지의 애가哀歌이며 토속의 노래는 이러한 지구地區에 가라앉아 간다.”
사회 현실의 불균형과 이념 논쟁의 갈등을 은연중 담고 있는 내용이다. “불모의 문명과 자본의 불균정한 싸움”이란 결국 새로운 제국주의의 팽창으로 인해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심각한 것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이 속에서 “언어작용의 어리석음을 깨달으면서”도 박인환과 그들은 글을 썼고 또 책을 냈다.
박인환이 시인으로서 모더니즘 시에 대해 얼마나 치열한 시인정신과 시적 효과를 노리고 있는지 다음의 말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규동, 자네도 한 번 해봐, 마지막 행부터 거꾸로 쓰는 거야. 재미 있어!”
“거꾸로 쓰니까 시가 되더군!”
“박인환이 거꾸로 시를 쓰는 습관은 라직logic을 위해서고 폭발하는 시적 효과를 노리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김규동은 술회하고 있다.
필자도 때로 나의 시를 거꾸로 읽어 보고 그것이 더 좋다 싶으면 아예 시를 뒤집어 놓는다. 극적인 효과가 반드시 있을 때가 있다. 왜냐하면 내용 구성상의 전개가 귀납적이냐 연역적이냐에 따르는 문제인 것 같다. 그런데 적어도 박인환은 구성상의 문제가 아니라, 그 당시의 복잡한 사회 현실상의 내용 문제가 더 컸을 것이다.
3.영화 狂, 그리고 책 애호가였던 박인환
박인환은 환도 이후 해외 영화에 열중했다. 영화를 보고 비평을 써서 호구지책을 하기도 했다. 오종식(吳宗植)을 중심으로 「영화평론가협회」를 만들었고 발기인은 허백년, 유두연, 이봉래, 이진섭, 유한철, 박인환, 김규동 등이었다. 박인환은 가끔 “왜 이 나라에는 감독이 없느냐?” 감독이 있다면 영화에 주연하겠다는 것이 박인환의 자랑스런 선언이었다. 널리 열려진 그의 유머러스한 일화가 있다. <제3의 사나이>의 시사회 때 일이다. 문단 선후배들이 모여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데 갑자기 박인환이 벌떡 일어나 “어이, 여깁니다. 바로 이것이 영화예요! 백철씨 아십니까? 저걸 모르고 무슨 평론을 한단 말이오!” 라고 소리쳤다. 뒷켠에 앉아 있던 백철 선생이 뜻하지 않게 봉변을 당했다. 모두들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다.
1945년 8.15 광복 후 박인환은 낙원동 입구 현 탑골공원 부근에「마리서사」(茉莉書舍)라는 서점을 열었다. 이 장소가 바로 ‘한국 모더니즘의 모태’ 역할을 했던 책방이다.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朴一英)의 도움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게 꾸몄다. 이름은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의 이름을 땄다는 설이 있다. 여기에 진열된 책들 대부분은 박인환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로 문학인과 예술가들을 위한 전문서적이었다. 그러나「마리서사」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자본을 다 날린 채 1948년 문을 닫고 말았다.
박인환이 얼마나 책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던지 어디 가면 그냥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당시 한국일보에 근무하던 김규동을 찾아가서는
“여봐, 뭐 좀 먹어 갈 거 없나?” 그가 먹어 갈 것이란 보통 책을 말하는 것이다. 책장에 있는 책을 이것저것 뒤적거리다가 아무거나 한 두 권 슬쩍 끼고 사라지는 것이다. 한 번은 신문사 재산인 큰 백과사전을 “나 이거 먹어 갈까?”라고 하자 김규동은 펄쩍 뛰면서 “ 장기영 사장이 알면 자네는 다시는 여기 못 와. 엉뚱한 짓 좀 하지 마.” 라며 타박한 일이 있었다.
그만큼 책을 좋아하고 탐했던 박인환이다.
심지어 박인환은 외국여행 중 “배 안에서 하루에 두 권 가량 읽으며 영어공부도 많이 했다.”고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고 있다. 옛날부터 이런 말이 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오복 중의 하나를 타고 난 사람이라고. 박인환이 비록 가난했으나 마음만은 부자였고 책 읽는 복을 타고난 귀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4.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박인환
부산 피난 시절, 박인환과 김규동은 남포동 골목 쪽으로 들어서려는데 헌병이 길을 막고 ‘국민병 수첩’을 검열했다. 구겨진 바지에다 노타이셔츠 차림인 김규동은 자주 검열에 걸렸다. 그러나 박인환은 그 무더운 여름날에도 정장을 하고 영국 신사처럼 거만을 부리며 걷는 그는 헌병의 검문에 걸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반면 검문에 걸려 가끔 위신이 상해지는 김규동을 보고 박인환은 한 마디 한다.
“요다음에 걸리면 ‘시인’이라고 해 봐. 나 일전에 걸려서 말야, 유명한 ‘시인’이라고 소개를 했더니 경례를 붙이면서 가시라고 하던데.”
“자넨 감히 그랬을 거야. 헌데 자넨 그런 염치가 어디서 생겨나나?
“놀고먹어도 버젓이 살아 다니니.” 김규동의 퉁명스런 대꾸이다.“그는 아무리 쏘아붙이듯이 말을 내뱉어도 성을 내는 일이 없는 그였다. 박인환이 정색을 하고 누구와 다투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다.”고 김규동은 그의 인간미에 대하여 회고한다.
또한 박인환은 모더니스트 한 시인이기에 앞서 한 가정의 따뜻하고도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를 일러 ‘댄디보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미남이면서도 멋쟁이였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그의 내면은 더없이 섬세하면서도 가정적이었다는 것을 그의 시와 서간문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1950년 그의 나이 25세,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9. 28 수복 때까지 지하생활로 전전하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8일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 종군 기자로 활동하였다. 다시 1951년 5월에는 육군 소속 종군 작가단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하순 경향신문사 본사가 부산으로 내려가자 부산으로 다시 이주하였다. 부산 광복동 골목에 두 평짜리 방을 얻어 피난 생활을 하였다. 그 때 대구에 남겨둔 아이들과 아내 李丁淑에게 보낸 편지는 박인환의 섬세하고 따뜻한 인간미를 새삼 되돌아보게 하는 단서가 된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그날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 별고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중략)
세화가 아프다니 걱정입니다. 우선 음식 조심시켜야 합니다. 당신의 책임은 어린애들을 잘 기르는 것입니다. 아프다는 세화가 불쌍합니다. 그 귀여운 얼굴로 몸이 아파서 찡얼찡얼거리며 아빠 아빠 하고 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니 더욱 귀엽고 , 더욱 애절합니다. 세하가 빨리 건강해지도록 오늘 저녁 자기 전에 하나님에게 기도 올리겠습니다. 세화 보고 전해 주시오.
세화야! 아빠는 네가 보고 싶다. 참으로 귀여운 세화야, 아빠는 네 곁에 있어야 할 것인데, 가족이 무엇인지 나보다도 우리 가족을 위해 지금 너와 떨어져 있단다. 세화야, 세형이 오빠하고 즐겁게 놀도록 빨리 회복해라. 할머니가 너무 먹을 것을 많이 주더라도 먹지 말고, 잘 네 몸 조심해라. 아빠는 네가 몹시 아프다는 말을 듣고 손에 아무 맥이 없다. 그리고 눈물이 난단다. 너, 내 사랑하는 딸 세화야, 빨리 나아라, 그리고, 어머니 걱정시키지 말아라. 세형이 하고 잘 놀아라. 빨리 내가 집에 들 것이니 우리 다 함께 즐겁게 만나자.
세화 생각을 하니 또한 세형이 모습이 오고 갑니다. 그 놈은 요즘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길가에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직접 전해 주시오.
세형아, 길가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엄마하고 있어라. 응.(하략) 박인환 올림
“참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누구라는 것은 당신이 스스로 생각하십시오. 다방에 오랫동안 나가 계시지 마십시오. 코티 하나 사 보냅니다.”
“세형이 보고 잘 이야기 하여 주시오. 아빠가 곧 대구에 돌아간다고.”
11월 5일 아침
사랑하는 나의 정숙!
나는 지금이 곧 당신의 무릎을 껴 안고 힘 있는 대로 당신의 목을 끌안고 싶습니다. 당신 없이는 세상에서 죽을 수도 없습니다. 술 한 잔 먹지도 않고 멀쩡한 정신으로 지금 미친놈처럼 나의 나 혼자만의 독백을 붓이 움직이는 대로 솔직하게 쓰고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영원히 지내도록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우리 가족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도록 나는 나의 모든 정열에 바라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돈이 없어 죽겠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돈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의 무한한 유일의 재산이며, 영원한 당신의 것이올시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14일 아침에 대구에 떨어집니다.
박인환 12일 밤
정숙이!
오늘은 3월28일입니다. 그동안 올리피아와 커코마와 시에틀, 에버렛을 거쳐 오늘 포트앤젤레스로 갑니다. 아무 일 없습니다. 당신 스프링과 사이즈를 몰라 양복지를 샀습니다. 어린애들 것도 모두 샀습니다. 집의 생각이, 더욱이 당신 생각이 간절합니다. 돈도 거의 떨어져서 마음이 쓸쓸합니다. 세형, 세화, 헤곤이에게 뽀뽀합니다. 4월 4-6일경 포틀랜드에 갔다가 8.9일경에 는 향한向韓이 될 것입니다. 또 편지하겠습니다. 영원히 사랑합니다. 이 사진은 시애틀 시입니다.
<세월이 가면>,근역서재,1982.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 가면서/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주검의 세계로/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힘없이 자란다//엄마는 너를 껴 안고 3개 월 간에/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서울에 피의 비와/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화차 위 별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애소哀訴도 없이/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무엇을 그리 우느냐//(중략) 나의 어린 딸이여/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그 때까지 너에게 알려 줄 사람이/살아 있을 것인가// 시<어린 딸에게>전 8련 중 일부
5. 박인환의 생애와 유럽풍의 그 멋
박인환은 (1926.8.18-1956.3.20)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에서 아버지 박광선(朴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 사이에서 4남 2년 중 맏이로 태어났다. 8살에 인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 먼 길을 걸어서 면소재지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11세 때 서울로 이사,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거주하다가 다시 종로구 원서동 134번지로 이사하고 덕수공립보통학교에 편입했다.
그 후 서울 경기공업중학교에 입학했다가 자퇴하는 등, 아버지 친지가 있는 황해도 재령으로 가서 기독교 재단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고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3년제 학교로 일제 강점기 당시 의과, 이공과, 농수산과 전공자들은 징병에서 제외되는 학교였다.
박인환이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46년 국제신보에 작품<거리>를 발표하면서 향후 10여 년 동안이다. 1976년 3월10일 그의 20주기를 맞아 「근역서재」에서 간행한 박인환 시집<목마와 숙녀>(박인환 「선시집」개제 보완한 책)에 추가된 <세월이 가면><가을의 유혹><이 거리는 환영한다>등 4편을 합친 68편과 이상(李箱)을 기린<죽은 아폴론>등 70여 편이 된다. 그리고 2007년.12.26 발행한 맹문재역음의「박인환전집」(실천문학사 刊)에는 83편이 실려 있다.
박인환은 그 짧은 생애 동안 많은 작품과 숱한 화제를 뿌렸다. 어떤 의미에든 박인환은 훨씬 더 크고 높게 평가되어져야 한다. 시인 장석주의 논문(2009.9)<인생의 통속을 꿰뚫어 본 혜안>에 실린 글을 인용하여 그의 멋을 아는 삶을 음미해 본다.
훤칠한 키에 수려한 얼굴의 박인환은 당대 문인 중에서 최고의 멋쟁이, ‘댄디보이’였다.
서구 취향에 도시적 감성으로 무장한 그는 詩에서도 누구보다 앞서간 날카로운 모더니스트였다. 시인은 여름에도 정장을 입었다.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풀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냐?”
어느 날 그는 친구들 앞에 땅 끝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를 입고 나타나 “이제 바로 세르게이 에세닌이 입었던 외투란 말이야.”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세닌이 자살하기 직전 입었던 외투를 잡지 사진으로 보고는 그걸 본떠 미군용 담요로 지어 입은 것이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시인 김차영(金次榮)은 “그가 입고 다닌 양복은 외국 고급 천에 일류 양복점 라벨이 붙어 있었다.” 흐린 날은 손잡이가 묘한 박쥐우산, 봄가을엔 우윳빛 레인코트, 또 겨울엔 러시아 사람들처럼 깃이 넓고 기장이 긴 진회색도 검정도 아닌 중간색의 헐렁한 외투를 입고 다녔다.“고 증언한다.
박인환은 통속을 혐오하고 원고 쓸 때는 구두점 하나에도 신경질적으로 까다롭게 굴었다고 한다. 1955년 10월에 나온 (30세) 그의「선시집」후기에서 작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10여 년 동안 시를 써 왔다. 이 세대는 세계사가 그러한 것과 같이 참으로 기묘하고 불안정한 연대였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해 온 그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하였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것이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이었다. 나는 지도자도 아니며 정치가도 아닌 것을 잘 알면서 사회와 싸웠다.“(후략)
(맹문재엮음,2007.12.박인환전집,P304.
이 「선시집」에는 <거리><어린 딸에게><어느 날의 시가 되지 않는 시>외에 30편을 수록하고 있다. 시에 대한 자신의 시적 에스프리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인환은 또 고향에 대한 애착과 향수를 담은 시<인제>를 1956년 3월11일, 작고하기 며칠 전에 「조선일보」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수구초심의 본능일까? 고향 사랑과 애틋한 향수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인제/봄이면 진달래가 피었고/설악산 눈이 녹으면/천렵 가던 시절도/이젠 추억,//
아무도 모르는 산간벽촌에/나는 자라서/고향을 생각하며 지금 시를 쓰는/사나이/
나의 기묘한 꿈이라 할까/부질없고나.// 그 곳은/전란으로 폐허가 된 도읍/ 인간의 이름이 남지 않은 토지/하늘엔 구름도 없고/나는 삭풍 속에서 울었다/ 어느 곳에 태어났으며/우리 조상들에게 무슨 죄가 있던가// 눈이여/옛날 시몽의 얼굴을 곱게 덮어 준/눈이여 /나에게는 정서와 사랑이 있었다 하더라// 나의 가난한 고장/인제/ 봄이여/빨리 오거라.// <인제>전문
6. 영원한 우리들의 애인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중략)/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불이 보이지 않아도/(중략)/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목마는 하늘에 있고/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가을바람 소리는/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우는데// <목마와 숙녀>전문
이 시의 주요 제재와 소재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1882-1941)이다.
1939년, 전운이 짙게 감돌던 유럽은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에 휩싸인다. 울프 부부는 검은 천을 사다가 방공 커튼을 만들기도 하지만 독일군의 맹렬한 공격 앞에 집마저 함락되었다. 더욱이 남편 레너드는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파시스트의 공포에 극도로 시달렸다. 울프는 나치스로부터 자비를 바라느니 차라리 가스실로 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1941년 템즈 강에 뛰어들어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런 일연의 사건을 연상하면서 인생을 회의적으로 노래했다고 느껴진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이라 했다. <세월이 가면>이란 시처럼 센티맨탈 한 정서를 담고 있다. 암울한 시대의 데카당스 한 심상일까?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는 구절에는 서러움마저 배어난다. 여기서 ‘주인’은 버지니아 울프일 것이다. ”술병에 별이 떨어지고/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아픈 상처를 다스려야 하는 화자는 참으로 암담하고 슬프다. “불이 보이지 않아도”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우리는 지혜로운 이성적인 인간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7.박인환이 마지막 가던 날
천재는 요절한다고 했던가? 그는 겨우 서른 한 살을 살고 갔다. 그러고 보니 강원도의 작가들은 하나 같이 그렇다. 김유정은 29살, 이효석은 35살에 갔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은 곧 이들을 두고 이르는 말이 되었다. 그들의 빛나는 발자국, 발자국에 고인 큰 얼굴들, 그 얼굴들 때문에 오늘도 강원도는 더할 나위 없이 빛나고 있다.
아, 박인환! 그의 삶, 그의 문학적 업적, 그 작품들을 읽으면서 뼛속까지 전율이 일었다.
1956년 3월20일 밤, 9시에 그는 이 세상을 떠났다. 무슨 예언이라도 하듯이 그는 술자리에서 옆에 있던 이진섭(‘세월이 가면’ 곡을 붙인 사람)에게 “인생은 소모품! 그러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야지.”라고 메모한 것을 주었다. “누가 알아? 이걸로 절필을 하게 될지---.” 운명의 신이 그에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던지 박인환은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씩 웃었다. “관棺 뒤에 누가 따라오느냐---,죽어선 모르지만, 아, 그래도 누가 올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당시의 문우들은 전한다. 뮤즈의 신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지만 운명의 신 클레토스는 ‘운명’의 예감을 준 것은 아니었을까?
1956년 3월17일 이상李箱(1910-1937)시인 ‘추모의 밤’을 예년과 같이 열었다. 그날「한국일보」에 이상李箱을 추모하는 시 전 5연 28행으로 된 <죽은 아폴론>=이상李箱, 그가 떠난 날에=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를 발표했다. 이후 사흘 동안이나 술을 마시다가 3월20일 9시경 귀가했다. 만취 상태로 세종로 집에 들어온 그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답답해! 답답해!”를 연발했다. 그러다가 자정 무렵 “생명수를 달라!”는 그 부르짖음을 마지막 말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그의 나이 고작 서른 한 살에 그는 우리들 곁을 떠났다.
올해로 그가 떠난 지 56회가 된다. 그는 갔지만 그의 영혼은 살아 회자膾炙되고 있다.
나라도 빼앗기고 주권도 빼앗기고, 암울하고 처절했던 그 시대, 그리고 6.25 전란의 포성 속에서 과연 그가 설 땅은 어디였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인환은 오로지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새로운 현대시 개척을 위해 과감하게 시인 정신을 발휘하였다. 우리는 그의 삶과 업적을 다시 되새겨 보면서 그에 대한 평가를 재인식해야 할 시점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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