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단, 바르게 성경을 해석하고, 말씀으로 시대를 온당하고도 적실하게 해석하는 것이 어렵다. 항상 그렇듯 나의 공부는 벌려놓기만 하고 정리를 못한채 새벽을 맞는다. 내일 아침에 얘기할게 과연 있을까 싶다.
조금만 정리해보면..
유다서는 거짓교사에게 휘둘리는 교회를 염려하며 긴급하게 보낸 서신이다. 5~19절까지 거의 내용의 전부를 차지하는 긴 내용이 거짓교사를 고발하는 내용이다. 이것을 설교한다고 할 때, 옛날 유다의 교회에 거짓교사들이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이었다.. 하고 설교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게 지금의 우리와 어떤 연결점이 있는가가 중요하다.
유다서에서 가장 긴 내용이 거짓교사를 고발하는 것이지만 난 그게 핵심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 핵심은 비판에 있지 않고 세우는데 있다. 그런 면에서 20~23절까지가 핵심이다.
거짓교사는 유다에게 있어 심판받을 인간들이다. 유다의 실제 관심은 그들보다 흔들린 성도들에게 있었다. 나쁜 일도 짝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유혹한 사람들과 유혹당한 사람들이 있다. 거짓교사의 행실과 말들에 대해 분명한 기준으로 정죄한 다음, 흔들린 사람들을 어떻게 회복시킬지에 대해 유다는 관심을 갖고 있다.
이것을 설교한다고 할 때, 우리도 유다의 방식을 따를 수 있겠다. 거짓교사의 정체를 폭로하는 데 신나서는 안 된다. 잘못된 가르침에 반응하는 우리 안의 인자가 무엇인가를 함께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왜 매력있는가? 에드워즈의 표현으론 감정이 아닌 정감(affection)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우상일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유다서에 나오는 거짓교사의 정체는 영지주의가 아니고 반율법주의다. 영지주의는 2세기에나 나오기 때문에 어차피 비슷한 부분들을 따서 같이 다룰 수는 있지만 자칫 뭉뚱그리다보면 내용 자체가 어그러질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아마도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복음이 주는 자유, 천사숭배에 대한 비판 등이 그들에게 들어갔을 것이다. 복음은 율법주의도 아니지만 반율법주의도 아니다. 천사숭배를 거부하지만 질서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반율법주의와 천사비방의 선봉에 섰고, 육체적으로는 이방사람들의 문화와 다를 바 없이 문란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에 대해 영적이라 생각했고, 애찬식에서 자신들에게 동의하는 자들을 포섭하고 일등신자, 이등신자를 갈라놓는 가르침을 주었으며, 감사가 아닌 원망과 불만을 심었다. 그들 스스로에 대한 후한 평가와는 달리 유다는 그들에 대해 탐욕적이고, 말은 많으나 실속 없는 사기꾼들과 같고, 남들에게 악영향을 주는 존재들이며 불경건하고 육에 속하여 성령이 없는 자라고 평가했다.
반율법주의는 무규범주의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모든 법과 규범에서 해방시킨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그들을 억압하는 자는 바로가 되고 꼰대가 되고 사탄이 된다. 그들에게 뭐라 한다면 하나님도 하나님에서 해고될지 모른다. 이런 경우 그들의 하나님은 자유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복음과 복음이 주는 것을 혼동하는 것이다. 복음은 자유를 주지만 자유 자체가 복음은 아니다. 자유를 추구할때 구원이 오는게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을 묵상하고 받아들이며 그 가치를 추구할 때 그는 복음적 삶을 살게 된다.
반율법주의는 왜 성적 타락으로 귀결되었을까?
육체를 더럽힌다는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지금 시대에 육체를 더럽힌다는 말은 시대착오적으로 들릴 것이다.
낸시피어시는 지금이 몸을 우상화하는 시대이자 혐오하는 시대라고 지적한다. 우상화는 대상화다. 자기를 대상화하지만 결코 자기같지 않은 자신이다. 그렇기에 우상화는 필연적으로 소외를 가져온다. 멋있는 우상과 허접한 자신의 간극 때문에 더 우상에게 집착하며 나의 가치를 우상에게 쏟아붓는다.
또한 지금 사람들은 성적인 문제를 관계의 문제로 보기보다 개인욕구 또는 취향의 문제, 개인의 자유에 속한 문제로 본다. 어떤 변태적인 욕망들이 춤을 춰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즐긴다면 그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세상의 접근들이 풀지 못하는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야동을 즐겨 보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피해 주지 않고 혼자 보는 것이지만 왜곡된 성의식을 갖게 될 가능성이 많다. 자기와의 관계에 손해가 나게 되는 것이다.
성관계는 단순히 쾌락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성관계를 통해 둘 사이가 한층 친밀해지거나 반대로 파괴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그것으로 또 하나의 생명이 탄생한다. 하지만 지금 성이슈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관계적인 것은 빼고 어떻게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증진시키는 쪽으로만 발전하는 것 같다.
지금 세상에서 유다가 맞닥뜨린 반율법주의의 모습은 일반적인 모습이 되지 않았는가? 어떤 죄의 모습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버리지 않고 합리화하며 다른 이에게도 그 라이프스타일을 전하는 모습.
졸립다. 그래서 복음이 어떻게 적용될지에 대해 더 고민을 해봐야 하는데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자야겠다. 꿈에서 유다 만나보자. 뭘 썼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