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의 일곱 번째 기일이다. 지난 세월 돌이켜볼수록 회한만 깊어져 감상(感傷)에 빠져든다. 눈 가에도 들지 않을 미천한 철부지를 사위로 맞아 아껴주시고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건만 나는 정작 해드린 것 하나 없는 죄인이 되었다. 이제는 갚을 길 없으니 이 노릇을 어찌 할까. 얼마 전에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아버지 곁에 모셨다. 부모님 산소는 장인, 장모님 산소와 같은 묘역에 있다. 장인어른의 유언에 따라 ‘사돈’을 가까이에 모신 것이다. 그리고 내 제사는 네가 지내달라며 딸의 손을 잡았던 장모님의 유언을 지켜 아내가 제물을 마련했다. 서울 처남이 모시는 장인장모님 합동 제사 때에 장모님도 함께하실 터이지만 아내나 나는 괘념치 않는다.
제삿날은 고인이 돌아가신 날 곧 마지막으로 살아계시던 날이다. 전날에 제사준비를 하여 그 밤에 제사를 모시기 때문에 돌아가시기 전날이 제삿날인 줄로 오해하는 이가 많다. 그러나 그 오밤중 자시라는 것이 기실 자정이 지난 조자시이니 결국 돌아가신 날이 되는 것이다. 기어이 돌아가시기 전날이 제삿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죽는 날이 제삿날’이라는 속담을 설명해야 할 터이다. 제사는 고인의 살아생전을 가족이 함께 하는 잔치인즉 길사(吉事)이다. 그런데 자시에 제사를 모시는 전통을 지키려면 전날에 제사음식을 장만하고 제관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므로 돌아가시기 전날이 실제적인 ‘제삿날’이라 할 수 있겠다. 요즈음엔 사람들이 지나치게 편리함만 좇다보니 초저녁에 제사를 모시는 바람에 그야말로 돌아가시기 전날에 제를 올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저녁에 제사를 모시려거든 돌아가신 날에 맞춰 모시는 것이 옳다.
남의 제사에 배 놔라 감 놔라 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 제사는 지방에 따라 올리는 제물이 각색이고 집안마다 격식이 조금씩 다르다보니 참견할 일이 아니다. 북한에서는 단고기(개고기)를 올리기도 한다지 않은가. 먹잘 것 없는 제사에 절이 석 자리라는 속담은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는 제사를 비꼬는 말로 들린다.
엄동설한에 현관문을 계속 열어두는 건 장모님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아내가 벌써 모사기와 향합을 챙겨 향을 피워놓았다. 청주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상 아래에 퇴주 그릇을 놓고 모사에 술잔을 세 번 기울여 붓고 두 번 절하여 제사를 고했다. 나는 집사 겸 제주가 되어 아내가 하나하나 제물을 담아내면 그걸 받아 향연에 세 번 돌려 가만히 진설한다. 홍동백서와 조율이시, 두동미서와 좌포우혜 따위의 격식은 모르는 걸로 치부하고 그저 보기에 좋도록 올려놓는다. 아버지는 생전에 두동미서를 절대로 따르지 않으셨다. 생선 머리가 바깥쪽을 향하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버지가 진설한 제사상은 구도와 조형미가 일품이었다. 조상님 기일에 제사상 차림은 아버지가 전담하셨고 백부님과 중부님은 물론하고 먼 데서 오신 당숙님도 결코 간섭하지 않으셨다. 철상(撤床)하고 도마를 들여 구운 생선이나 전부치를 먹기 좋게 토막 치는 일조차 아버지가 맡으셨다. 아버지만큼이나 잘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메와 갱을 끝으로 제물 진설을 마치고 술을 올려 아내와 함께 두 번 절하였다. 독축은 생략하고 아헌과 유식, 합문을 거쳐 종헌으로 제사를 마쳤다. 둘이서 모신 제사이다 보니 채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은 추도예배라는 것으로 제사를 대신한다. ‘추도’라는 단어가 마땅치 않다며 ‘추모예배’를 내세우는 이들도 있으나 내용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망인을 기리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제사를 모시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제물을 장만하지 않는 것이 크게 다른 점이라고 강변할 것도 없다. 추모예배도 대개 초저녁에 드리기 때문에 참석한 집안사람들의 만찬을 진수성찬으로 준비해야 한다. 제물도 어차피 함께 나눠먹을 음식이다. 조상귀신이 먹고 간 음식이라 부정하다고 여기는 건 어린아이의 응석이다.
성경에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하는 법이 없다. 돌아가신 부조를 그리며 제사를 모시는 것은 우리의 오랜 미풍양속일 따름이다. 많은 크리스천이 전통방식으로 모시는 부모제사에 참예치 않고 더구나 제사음식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성경은, 우상의 제물도 그저 음식일 뿐 우리의 믿음을 해치 못하니 제사음식을 먹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다고 말한다. 다만, 그로 인하여 믿음이 굳세지 못한 자들이 실족할 염려가 있다면 이를 자제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믿는 자가 실족한다면 고기도 먹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봉사(奉祀)는 우상숭배가 아니므로 제물 또한 우상의 제물이 아니다. 조상을 기리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단정하는 일부 크리스천의 오해는 귀신에게 절하기 때문이라는 그릇된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만, 마지막 살아계시던 날을 기념하는 것이 제사일진대 지방에 ‘○○신위’라고 표기하고 독축을 하며 ‘흠향’을 꺼냄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유교는 유물론(唯物論)에 가까워서 사람의 사후세계를 논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상에 대한 제사가 유교의 전승이라는 주장도 어딘지 허술해 보이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들 유전자의 계보와 실체를 확인하는 축제라는 개념에서 접근하면 그다지 어색한 풍습도 아니다.
우상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는 이들은 하나님을, 국조 단군 상을 시기하여 넘어뜨리고 다른 종교를 배척하며 조상에게 절도 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옹졸한 신으로 만들어버렸다. 하나님이 금하는 우상은 바깥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지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데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이 금하는 다른 신은 언제나 하나님보다 높은 곳에 있다. 생각해보라. 천상천하에 지극히 거룩하고 위대하신 하나님보다 높은 신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것은 오직 자신의 마음이 지어내는 거짓우상이니 곧 그가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보다 높은 다른 신이다. 종손으로서 한 해에 제사를 수십 번 모신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단 한 번도 조상님께 절하지 않아도 하나님보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을 더 소중히 여긴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것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이 그의 우상이니 이로써 그 사람은 다른 신을 섬긴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진짜우상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단군상이나 사찰의 불상과 같은 우상 아닌 우상을 없애버리겠다며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성모 마리아상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상은 우상 아닌가? 위인과 애국지사의 동상은 우상이 아닌가? 국립묘지에 참배하며 분향하고 헌화함은 귀신에게 절한 것 아닌가? 순국 영령들에게 묵념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닌가? 진남제전이나 여러 축제에 참여하여 제를 올리는 건 우상숭배가 아니란 말인가?
오늘날 독실한 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불신자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 예의와 착한 행실과 도덕과 잠언은 세상의 책에 널려있고 좋은 선생도 많다. 애써 교회에 나갈 일이 없다. 종교인의 이름표는 진리의 깨달음 즉 도통에 있고 그의 실행에 있다. 거짓의 종이 되어 헛된 언행을 일삼는 치기어린 신앙의 울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때가 오래 되었는데 그제도 젖이나 먹고 있다면 어느 세월에 장성한 자가 되겠는가. 이 시대가 과연 어느 때인지 철을 모르는 자가 철부지이다. 성경은 이 시대의 신앙인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지나지 않은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와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명하고 있다.
제사상은 북향에 차려 촛불을 밝히며 그 뒤편에 병풍을 친다. 집의 구조상 동편에 차리면 동쪽을 북향 삼는다. 그러니 제상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오른쪽이 동편이 된다. 시접에 수저를 놓고 맑은 술을 올리며 떡을 비롯하여 갖은 제물을 진설한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성소와 지성소의 형상과 기물이다. 향로에 향을 사르면 독축이 향연 되어 하늘로 올라가니 성도의 참 소망이 기도의 힘으로 상달되는 이치이다. 그러므로 조상 봉사는 하늘의 모양과 예법을 본떠서 행하는 풍속이라 하겠다. 6천 년 전,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가 인류 최초의 제사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 내외는 개신교도이지만 제사에 대하여 이견이 없다.
첫댓글 제사는 마음으로 지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특정 종교를 믿는다고 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고 절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는데
너무 따지는 것도 보기에 좀 그렇더군요.
장모님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각별합니다.
많이 반성을 하게 됩니다.
돌이켜보면 처가 덕을 저만큼 많이 본 사람도 흔치 않을 겁니다 장모님 뇌출혈로 쓰러져 16,7년 아내가 고생했지만 막상 제가 해드린 일은 없었군요 세월이 흐를수록 회한이 깊어지니 늦게야 철이 드는가 봅니다 기독교인들이 조상제사를 기피하는 건 교회에서 잘못 가르친 탓이 큽니다 제사상 차림의 격식을 유심히 살펴보면 성경의 내용과 흡사하여 놀라기도 합니다
인산님의 세세한 제사의식과 자세에 대하여 박수를 보냅니다. 신교를 믿는 자들이 명심해야할 귀감이 될 잠언입니다.
솔로몬 같은 제사에 대한 통찰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신교가 보급되어 기독교 의식이 천착되어 조상을 숭배하는 것마저
우상이라 하고 배척하니 아브라함이 지냈던 참 제사의 의미를 모르는 우매한 자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서
작은 틀에 매어서 헤어날 줄 모르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제 작은 생각으로는 제사를 지내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조상 제사를 귀신에게 절하는 미신으로 여기는 현실이 답답합니다
스스로 자기 조상을 귀신으로 만들어버리는 꼴입니다. 우상은 자신이 지은 것이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데도
자꾸 바깥만 나무라는 의식에서 깨어나야겠습니다. 장모님 제사를 모시고나니 생각나는 몇 가지를 두서없이 써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