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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3: 19 - 20 사랑하는 자를 책망함
계 3: 19 사랑하는 자를 책망함 -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
책망과 권면과 회개의 촉구는 다 주님의 사랑에서 나온다. 주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많은 부족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오래 참고 또 책망하시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버려두시거나 아니면 벌써 쳐서 데려가셨을 것이다. 부모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매를 때리고, 우리는 사랑하는 친구에게 충고한다. 만일 우리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를 사랑하시며 그에게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12: 5-6은,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라고 말했다.
19-1) 권 면 3 :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하나님의 사랑은 주로 '아가파오'(*, '사랑하다')로 표현되는데 본 절의 '사랑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필로'(*)로 되어있다. 문자적인 차이로 인해서 혹자는 '아가파오'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랑하시는 모습을 나타내는 반면에 '필로'는 그리스도의 판단으로 사랑하심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ngel).
그러나 필로는 '아가파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Barclay, Charles). 왜냐하면 신약에서도 자주 '필로'와 '아가파오'가 같은 뜻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 요 5: 20 -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 요 16: 27 -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1) 책망하여 징계
'책망'의 헬라어 '엘렝코'는 원래 '낮춤'을 의미하는 말로 '말로써 교훈하고 다스리는 것'을 나타낸다.
* 눅 3: 19 -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 딤전 5: 20 -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징계'는 책망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행위를 의미한다.
* 히 12: 5-7 -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의 잘못을 방관(傍觀)하지 않으시며 사랑어린 책망과 징계로 인도하신다.
징계와 책망은 그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지만 바로 깨달으면 큰 축복이다. 징계와 책망을 경히 여기지 말고 열심히 회개하여 참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
* 히 12: 8-10 -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① 종 된 자의 회개
사명자가 먼저 회개하여야 한다.
* 겔 9: 3-6 – 3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② 백성 된 자의 회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했던 자들(성도들)이 회개하여야 한다.
* 계 7: 13-14 –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 신 8: 5 -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 삼하 7: 14 -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 욥 5: 17 -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 약 1: 12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 계 11: 3 -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2) 사랑하시는 자를 책망하시는 주님
책망은 사랑의 동기에서 일어난다.
잘못에 대한 책망이 없고 무관할 때 이미 관계는 끊어진 상태이다. 그러므로 책망 받을 때 열심히 회개해서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
* 히 12: 5-10 –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9-2) 열심과 회개 :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1) 열심을 내라
'열심을 내라'의 헬라어 '젤류에'(*)는 현재 명령형이다.
* 왕하 19: 31 -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 행 22: 3 –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 롬 12: 11 -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 고후 7: 11 -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예배생활, 전도생활, 각 기관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육상의 장거리 경주로 비유한다면 마지막 주자에 해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 중요성은 앞의 교회들과 비교할 수 없다.
마라톤 선수가 마지막 골인 지점을 향하여 열심을 내듯이, 주의 날을 사모하는 성도들도 그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열심을 내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요 2: 17 -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 갈 4: 18 -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 딛 2: 14 -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 벧전 3: 13 -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오.
'열심을 내라' - 회개로 가는 길도 역시 뜨거운 열심 그 후에 연결되는 것이다.
고요하게 묵상하는 것으로는 회개하기 어렵다. 양심의 뜨거운 열정이 필요하다. 영혼의 새로운 창조는 철학적 관념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의 각도를 변하게 하는 지적 형태를 교정하는 것이 아니다. 온몸으로 느끼고 발휘하는 회개 운동이 삶 전체에 관여하여 혁명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책장 속의 책을 바꿔 끼워 넣는 방향의 설정이 아니다. 책 속의 주인공을 실제로 만나는 현장이다.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다.
그러므로 자연히 열심을 뿜어낼 수밖에 없다. 열심이 없는 신자는 신앙의 진정한 진의를 체험할 수 없다. 열심만 낸다고 진리를 다 알 수 있다는 공식은 아니다.
충성에도 마찬가지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하시므로 신앙의 열심 있는 태도는 시작과 과정에서 절절하게 나타나야 할 것이다. 신앙은 지적(知的)인 것이 아니라 동적(動的)이다.
(2) 회개하라.
이것은 잘못된 신앙관을 돌이키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예배 시간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라고 찬송한다. 이것을 보고 '예수님처럼, 초대교인처럼 살지 못한 죄'를 회개한다.
회개하면 하나님은 죄의 질을 묻지 않으신다. 죄의 양도 묻지 않으시고 죄의 기간도 묻지 않으신다.
'회개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손'(*)은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 두 개의 명령문의 시상 변화는 '단번에 결정적으로 회개하고 지속적으로 열심을 내라'는 의미를 갖는다(Moffatt, Rebertson).
우리가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① 미지근한 신앙을 회개해야 한다.
② 신앙적인 자만을 회개해야 한다.
③ 곤고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④ 가련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⑤ 가난한 것과 눈먼 것을 회개해야 한다.
⑥ 벌거벗은 것을 회개해야 한다.
계 3: 20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주님을 문밖에 세워두었다. 목사인 그는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지 못하였다. 주께서는 그의 몸을 성전 삼지 못하시고 그를 떠나 계셨다.
그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경우이다. 그는 문을 열고 그를 영접해야 했다. 그가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면 그는 즐거운 식탁 교제, 즉 주님과의 교제의 회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이기는 자들은 심판날에 주의 보좌에 함께 앉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20-1) 문밖에서 :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1) '서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스테카'(*)는 현재 완료 시상으로 이미 오셔서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의미한다.
(2) '두드리노니'의 헬라어 '크루오'(*)는 현재 시상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두드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은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을 알리시는 모습으로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초청과 약속의 말씀이다(Mounce, Trench).
(3) '문'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세상이다(Swete, Beckwith).
* 마 24: 33 -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 약 5: 9 -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의미한다(Mounce, Johnson).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앞 절에서 현재 회개하고 열심을 내라고 권면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의 '문'은 현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지칭한다(Ladd).
(4)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 회개를 기다리시는 예수님
성도들의 심령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의 간절하심이 가슴 속 깊이 느껴져야 한다.
* 아 5: 2-4 - 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 눅 12: 36-37 -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 요 10: 7 -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 벧전 3: 20 -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0-2) 누구든지 :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1) 누구든지 -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 하나님의 말씀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회개 촉구의 권면을 듣고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의 결과를 나타낸다.
* 신 26: 7 -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 창 27: 22 -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 욥 37: 2 -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
(2) 문을 열면 : 주님을 영접하면
문을 열라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라는 것이다.
유명한 홀만 혼트의 예수님이 문밖에 서 계시는 그림을 다 보셨을 것이다. 그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면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문 바깥쪽에는 문고리가 없고, 안에만 문고리가 있다. 그러므로 안에서 문을 열어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요즘은 이웃 사람끼리도 마음의 문을 안 연다. 목사끼리도, 장로끼리도, 성도끼리도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으니까 말씀이 들어가지 않고, 그래서 예수님이 마음 밖에, 교회 밖에 계신다. 교회들이 타락하고, 혼합주의, 종교 다원주의가 성행하므로 예수님이 그 속에 계실 수 없다.
20-3) 더불어 먹고 :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1) 주님 -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 주님께서 직접 찾아가신다.
(2)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① '먹고'라는 헬라어는 저녁식사를 의미하는 데이프논[deipnon]에서 유래하였다.
단어의 시제로 볼 때 저녁은 종말을 상징한다.
② 식사의 방법으로 입증된다.
③ 본문의 문맥적 구분으로 입증된다.
* 눅 22: 29-30 -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 더불어 먹으리라
천국에서 누리게 될 가장 친밀한 교제의 약속으로 '먹고 마신다'는 말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① 아침은 '아크라티스마(?κρατ?σμα)'인데, 마른 빵 조각을 포도주에 찍어 먹는 것을 말한다.
② 점심은 '아리스톤(?ριστον)'으로 도로가나 가로수, 광장에서 먹는 도시락을 말한다.
③ 저녁은 '데이프논(δε?πνο)'인데, 오래 앉아서 이야기하며 먹는 친교의 식사를 말한다.
여기서 먹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마 24: 45에 보면 '때를 따른 양식'이다.
여기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저녁은 특징적으로 종말을 의미한다. 아침은 구약 시대를, 점심은 신약 시대를 예표 한다면 저녁은 종말 시대, 재림의 때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마지막 때 작은 책, 계시록이 열릴 것이며, 주님의 재림의 복음이 너희 안에 들어가서 이 말씀의 교제가 있겠다. 너와 내가 말씀으로 교제하고, 말씀으로 하나 되는 것을 얘기한다.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는 문을 열어야 하고, 열심히 믿어야 한다. 마지막 때는 계시록이 확 열릴 것(역사 속에 현실로 드러날 것)이다.
마지막 때에 일곱 영, 성령의 농사가 여물 때 늦은 비가 쏟아지듯이,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여 작은 책 요한계시록이 폭발적으로 죽은 영혼들을 살려내고 주님이 오신다. 따라서 지금은 열매 맺을 때다.
* 아 5: 1 -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 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
* 암 9: 14 -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을 먹으리라.
* 눅 17: 8 -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 약 5: 3 -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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