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
샐리 티스데일 지음 | 박미경 옮김 | 김두연 발제
위험한 상황
지금 당장 머릿속에 당신이 원하는 임종 장면을 떠올려보라. 뭐든 원하는 대로 상상하라.
나는 죽어본 적이 없기에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해주진 못한다. 탄생과 죽음은 실습이 허용되지 않는 일이니 말이다. 우리가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과 죽고 죽이는 게임을 좋아하긴 해도, 죽음은 그저 이론이나 상상으로 짐작할 뿐 실체를 볼 수는 없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아이들이 섹스나 출산과 관련된 일에선 배제됐는데, 오히려 임종은 지켰고, 시신 처리까지 도왔다. 요즘 아이들은 형제자매가 태어나는 모습을 지켜보긴 해도, 시신을 보진 않는다. 그 점은 어른도 마찬가지다. 대다수 사람들이 당신의 죽음을 눈앞에 둘 때까지 죽음을 좀체 보지 못한다.
누구나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점을 애써 무시하고 산다.
우리 삶의 중심엔 늘 내일이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죽음을 그저 남의 일인 양 떠든다. 죽음이 그야말로 아주 먼 일처럼 느껴질 때에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어가는 사람은 상징적 표현을 즐겨 쓰는데, 예를 들면 ‘여행을 떠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은 한 번도 안 가본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여행안내서를 구해 읽으면서 그 나라의 풍습과 인사법, 도움을 청하는 방법을 미리 공부하고, 언어와 지도를 살펴보지만, 낯선 곳에 도착하면 어디가 어딘지 몰라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죽음이 그렇다. 죽음은 우리에게 있어 미지의 세계다.
2. 저항
우리는 온갖 두려움을 대놓고 토로하지 않는다. 남들은 멀쩡한데 나만 두려움에 떠는 것 같아 내색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도 마찬가지다. 모른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그것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특별히 죽음의 공포는 보통 어린 시절에 시작된다. 어른들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 아이들은 죽음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기게 된다. 침묵만이 올바른 대응 방식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장례식은 아이들이 갈 데가 못 된다.
10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자기네와 상관없는 일로 여긴다. 죽음의 영속성, 즉 삶을 끊임 없이 따라다니는 위험에 대해서는 결코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다 중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죽음을 어렴풋이 실감하게 된다. 죽음의 위험에 처하지 않는 순간이나 장소는 세상 어디에도 없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고대 로마인은 죽은 사람을 ’빅싯(Vixit)‘이라고 불렀다. ’다 살았다‘는 뜻이다. 볼리비아의 레이미족은 사람이 죽으면 ’고추 재배하러 갔다”고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피하려 든다. 그것은 죽음을 늘 마주하는 의료인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담당하던 환자가 죽었을 때 차트에 죽었다고 쓰지 못한다. 눈을 감았다거나 타계했다거나 이승을 하직했다고 기록한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그 단어를 못 쓰는 것이다.
저널리스트 버지니아 모리스Virginia Morris는 <죽음에 대해 떠든다고 죽진 않는다>는 책에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점을 다양하게 소개했다.
예) 부검으로 신체가 훼손되지는 않을까, 죽어갈 때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가족에게 버림받지는 않을까, 추한 모습으로 죽지는 않을까? 천국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천국이 있어도 들어가지 못한다면? 기력이 쇠해서 누군가에게 혹은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며 살게 되면 어떻하지? 업무나 프로젝트나 집필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떠난다면? 아무도 나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머리가 빠진다면? 수 쉬는 게 힘들지는 않을까? 대소변을 못 가리면 어떻하지? 관에 안치된 상태에서 눈을 뜬다며?
저자인 모리스 자신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가장 두렵다고 한다.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을 기다리느라 늘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늦었다 싶을 때까지, 때로는 진짜로 너무 늦을 때까지 우리의 바람과 두려움을 토로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부분 죽음을 아주 막연하게 생각하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바로 내가, 누구보다 소중하고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죽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생각만 해도 섬뜩하지만, 순식간에 스쳐 지나는 이런 통찰이 우리 삶을 변화시킨다. 육신이 언젠가 소멸한다는 걸 알고 나면, 우리는 달라진다.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ϋbler Ross는 죽어가는 사람이 거치는 정서적 양상을 다섯 가지로 규정했다. 부정과 고립(격노, 시기, 분개를 포함하는) 분노, (불가피한 일이라면 그 일이 발생하는 시기를 늦출지도 모를 합의에 들어가는) 협상, (엄청난 상실감에 빠진) 우울, (환자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우울해하거나 분노하지 말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수용. 이 다섯 가지 감정 상태를 정신의학 용어인 방어기제, 즉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는 대응기제로 보았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인간이 고통을 겪는 근본 원인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터무니없음을 보여주고자 사유 실험을 고안했다. 즉, 일단 소멸하고 나면 소멸을 안타까워할 수 없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무(無)의 상태에서는 인식도, 의식도, 기억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전한 위로의 말을 듣고도 전혀 위로받지 못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때가 온다는 바로 그 개념이 두려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심리과학 학술지>에 실린 최근 연구가 저자의 흥미를 끌었다. 자신의 죽음을 숙고하면 더 행복해진다는 내용이었다. 연구진은 사람들에게 죽음 또는 치통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지시한 다음, 글자를 몇 자 주고 단어를 완성하라고 요청했다. 가령 an은 angry나 angle, jo는 joy나 job 등으로 완성할 수 있다. 실험 결과, 죽음을 생각하도록 요청받은 사람들이 치통을 생각하도록 요청받은 사람들보다 상당히 더 긍정적인 단어를 선택한 것으로 나왔다. 그와 같은 결과에 대해 연구진은 죽음을 생각하면 심리적 ‘면역 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괴로움에 대처하고자 무의식적으로 행복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망 때문에 무력해질 테니까(이처럼 죽음에 관한 이미지에 노출되었을 때 훨씬 더 극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는 현상을 ‘죽음 현저성’이라고 한다).
정신분석가인 오토 랭크Otto Rank는 ‘생명 불안’과 ‘죽음 불안’을 짝지어 설명했다. 전자는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자아, 즉 취약하고 외롭고 독립된 자아를 깨달았을 때 느끼는 불안이다. 후자는 외로움을 극복하려면 반드시 타인과 어우러져야 하고 소중한 개별성을 상실해야 함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불안이다. 결국 우리는 삶과 죽음 둘 다를 두려워하게 된다.
문화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Ernest Becker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층’이 있다고 믿었다.
미셸 몽테뉴Michel de Montaigne는 “죽음에서 그 기이함을 없애버리자. 죽음을 자주 떠올리고, 죽음에 익숙해지도록 하자”고 말하며, 죽음을 자주 생각해서 죽음이 삶과 잘 어우러지게 하자고 주장했다.
버지니아 모리스Virginia Morris는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두려워하는 것을 하나씩 꺼내서 소리 내어 말해볼 것을 제안한다. 비행기 여행을 두려워했던 모리스는 죽음을 이렇게 수용했다. “우리는 모두 충돌(crash)을 향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결국엔 충돌할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과 관련된 사회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죽음 인식 운동(death awareness movement)과 같은 것이다. 2011년 영국에서 시작된 데스 카페(death cafe)에선 사람들이 소규모로 모여 죽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데 반해, 데스 살롱(death salon)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과학적 강연과 심포지엄 등 대규모 행사를 열기도 한다. 데스 살롱은 좋은 죽음을 표방하는 집단(Order of the Good Death)이라는 단체가 후원하는데 그 단체의 블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강령이 있다. “우리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 삼고자 합니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야 합니다. 죽음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죽음을 막연히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온갖 잡다한 정보로 무장하면 진짜로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까? 저자는 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인류 역사에서 죽음과 죽음의 공포를 다스리기 위한 의식을 치르지 않은 문화는 하나도 없다. 죽음을 감추는 것은 보편적이지 않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극히 보편적이다. 그런데 낯선 사람들과 그런 두려움을 공유한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될까? 강연에서는 죽음을 아무리 직설적으로 제시한다 해도 이론적 접근일 뿐이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때로는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다. 평안한 죽음을 보며 위로도 받는다. 그러나 내 호기심은 죽음이 임박하지 않은 여유로운 순간에 느끼는 호기심일 뿐이다. 나는 계속, 계속 계속 살고 싶다. 나의 임종 장면을 상상할 순 있지만, 언젠가 진짜로 죽을 거라는 사실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무슨 자가당착에 빠진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다들 그렇지 않나? 주변 사람이 떠난다고 상상하는 것도 힘든데, 자기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우리는 눈을 가리고 죽음을 반쯤 부정하면서 살아간다. 물론 우리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는 아니다. 머리로는 인정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은 참 모순된 존재다.
수용은 거부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 이뤄진다. 죽음을 숙고하는 것은 실제로 저항을 숙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죽을 준비가 될까?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그 두려움을 오래, 아주 오래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외면했던 진실, 즉 우리 모두 미래의 시신임을 인정하는 것부터 해야 한다.
3. 좋은 죽음
미국 성인 2/3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 가능한 한 오래 사는 것보다 고통 없이 평안하고 차분하게 죽는 걸 좋은 죽음이라고 규정한다.
연방 정부는 좋은 죽음이란 ’환자와 가족과 돌보는 사람이 피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에서 해방되고, 환자와 가족의 바람에 전체적으로 조화되며, 임상적, 문화적, 윤리적 기준에도 상당히 부합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저자는 좋은 죽음을 규정하기보다 죽음을 둘러싼 실상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임종 과정을 어떻게 지원할지 논의해보는게 더 낫다고 말한다. 그는 환자의 나쁜 선택이나 자기 파괴적 선택(단식, 방광과 장의 통제력을 잃었을 때 몸을 씻지 않고, 옷과 시트를 갈지 않는 것, 몸의 기능이 떨어지고 삶이 서서히 해체되고 소멸되는 것을 온전히 느끼려 하는 행동 등)이라 할지라도, 주변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과 상충된다 할지라도 임종 과정을 스스로 선택하고 주도해나갈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삶에서 죽음으로의 전환 시점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호흡 정지, 심정지, 체온 하락과 같은 죽음의 신호는 실제로 죽어가지 않는 상황에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물에 빠졌을 때 심장이 멈추지 않아도 호흡이 멎을 수 있다. 저체온증이 나타나면 차가운 피부와 뻣뻣한 근육 탓에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심폐 기능을 기준으로 삼아 심폐 기능의 불가역적 정지 상태를 사망으로 간주한다. 어떤 사람이 한동안 심장박동이 없고 자가 호흡을 못 하면 호흡기와 심장 기능의 정지로 사망했다고 선고한다. 다만 그를 소생시키려는 노력(예, 심폐소생술)이 지속되는 한 죽은 게 아니다(의료진이 죽었다고 말해야 죽은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신체 기능이 멈춰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을 때 사망했다고 말한다. 이때는 부패를 막아주는 생물학적 과정이 멈췄다고 간주하고, 죽음을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규정한다.
∎전뇌(whole brain) 접근 방식: 전체 뇌 기능의 불가역적 정지를 죽음으로 규정한다.
∎고등 뇌(higher-brain) 접근 방식: 자각 능력의 불가역적 정지를 죽음으로 규정한다.
뇌 기능의 상실은 결국 심장을 죽게 하고, 심장 기능의 상실은 결국 뇌를 죽게 하며, 호흡 기능의 상실은 둘 다를 죽게 한다. 그렇지만 자아는 과연 어느 시점에서 상실되는 것인가?
변호사 루이스 하먼Louise Harmon은 ’죽음을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아니라 언제부터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타당한가‘를 따져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의 정의를 고려하려면 삶의 정의를 고려해야 하고, 삶의 정의를 고려하려면 인간의 의미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 윤리학자 바루흐 브로디Baruch Brody는 사람은 살아 있거나 죽었거나 혹은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상태에 있으며... 죽음은 명확히 정의된 경계를 갖지 않은 상태‘라고 주장했다.
철학자 데이비드 데그라치아David DeGrazia는 죽음의 경계가 실제로 너무 모호해서 그것을 규정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죽음을 나이에 결부시켜 말한다. 그런데 사람마다 규정하는 나이가 다 다르다. 과연 몇 살을 죽기 적당한 때라고 말할 수 있을까? 흔히 장수하면 좋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불행한 상태로 오래 산 사람도 봤고, 상당히 짧지만,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산 사람도 알고 있다. 삶의 질은 삶의 기간에 달려 있지 않다. 직접 살아보기 전까지 뭐가 좋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좋은 죽음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가 식구들에게 둘러싸인 체 한 사람씩 호명하며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런 죽음은 흔치 않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몸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상태에서 조용히 떠나는 걸 상상한다. 그야말로 상상이다. 소위 죽음에 대한 이상이 우리를 옥죄고 있다. 그러나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혼자서 가야 할 길이다. 죽음의 가치는 남들의 생각에 달려 있지 않다. 내 죽음은 오로지 내 소관이며, 내 죽음의 가치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좋은 죽음이란 죽어가는 사람이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 눈에도, 그렇게 비쳐야 한다.
죽음을 가장 많이 목격하는 보호시설, 가령 ’호스피스‘에서는 좋은 죽음을 어떻게 규정할까? 행해질 수 있는 일이 다 행해졌다고 판단될 때 조용히 떠나는 책임감 있는 개인이 전제된다.
사람들은 죽어가면서 품위를 잃을까 봐 몹시 두려워한다. 토마스 브라운Thomas Browne 경은 “죽음이 두렵다기보다는 죽음으로 인한 결과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죽음은 순식간에 외양을 흉하게 망가뜨려서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 아내와 자식들마저 우리를 보고 흠칫 놀랄 정도다”라고 적었다. 그는 죽음에 수반되는 ’동정의 눈물‘이 너무 싫어서 차라리 아무도 안 보는 데서 익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조력자를 택하는 사람들이 흔히 대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품위 유지이다. 그런 죽음엔 ’존엄사‘라는 그럴싸한 이름까지 붙여 준다. 품위 있게 죽으려면 그런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내가 나의 죽음을 선택하지 못하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게 되는 상황이 오는 것을 수치요, 우리의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여긴다.
우리는 중병에 걸리면 당연히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 처하고 사생활이 크게 침해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을 돌봐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으며, 너무 약해서 스스로 생활하기 힘든 사람에게 도움을 주다 보면 저절로 겸손해진다. 어쩌면 당신은 신체적 허약함이 품위를 훼손시키는 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할 것이다. 요컨대 사람은 누구나 이따금 눈물을 흘린다. 때로는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중 잣대를 들이댄다. 즉 고령인 할머니가 대소변을 못 가려 도움이 필요한 건 괜찮다. 하지만 내가 대소변을 못 가려 도움이 필요한 건 괜찮지 않다.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4. 의사소통
당신이 죽어가는 사람이라면 하고 싶은 말은 뭐든 해도 된다.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말이다. 반대로 입 꾹 다물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
다만 방문자와 동반자와 조력자들에겐 몇 가지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죽어가는 사람과 시간을 보낼 때 엉뚱하게 반응하지 않도록 감정적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두면 유익하다.
우선 경청이다. 흔히 사람들은 의사소통에서 자기 생각이나 뜻을 잘 설명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귀 기울여 듣는 게 더 중요하다. 죽어가는 사람을 돌볼 때 에너지의 절반은 경청하는 데 써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사람은 보호자로서, 죽어가는 사람의 요구를 들어줄 수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 또 ’문지기‘ 역할도 해야 한다. 방문자에게 웃으면서 ’이제 그만 일어나시는 게 좋겠어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들러주세요!“라고 말하면서 문까지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외에도 요리나 청소, 각종 청구서 정리, 편지를 쓰거나 만남을 주선해 줄 수도 있다.
부정적인 방문자 유형이 있는데, ‘해결사’(자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남의 일에 간섭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사람)와 ‘비교자’(이야기를 들어줄 것처럼 찾아와선 자기 경험과 어떻게 다른지 혹은 같은지 비교하는 사람) 그리고 ‘세상에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을 방문할 때는 가능한 범위를 설정하는 것이 좋다. ”한 시간 정도 머물 수 있어.“ ”저녁때까지 있을게“. 아울러 떠날 때는 언제 다시 방문할지 알려줘야 환자가 기다리지 않는다.
뭐든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허락을 구해야지, 함부로 판단하고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아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을 상대할 때는 늘 솔직해야 한다. 환자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말이다. 아픈 사람에게 부담 주지 않는 선에서 당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라. 당신도 때로는 위로가 필요하다.
당신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참을 수 없을 땐 잠시 벗어나 있어야 한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면 그렇다고 인정하고 해소할 방법을 강구하라(환자에게 당신 기분을 풀어달라고 하지는 말라).
어린아이처럼 감정을 다 드러내서도 안 되지만 매사에 꼭꼭 숨길 필요는 없다.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은 엉뚱한 문제를 일으켜 자신에게 닥친 난관을 잊거나 긴급한 문제를 회피하려 들기도 한다. 그럴 때는 나무라지 말고 너그럽게 받아주되, 그런 행동이 습관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라.
대화 주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런 얘긴 하지마. 그냥 기분 좋은 얘기나 하자“라는 식으로 대응하지 말라. 성급하게 부정하지 말고 당사자의 말을 충분히 듣고 깊이 생각한 뒤 반응하도록 하라. 죽어가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당사자가 부정하고 싶을 때까지 부정하도록 놔둬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은 믿기 힘든 현실에 비관적인 말(”다 소용없어. 아무 효과도 없을 텐데 이걸 뭐하러 굳이 하겠어!“) 내지 터무니없는 낙관적인 말(크리스마스 즈음엔 스키장에서 스키 타고 있을거야”)로 대응하기도 한다. 그렇게 말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이 요청하지 않으면 완곡한 표현으로 사실을 은폐하지 말라. 거짓말로 둘러대지도 마라. 의사도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예후를 속이거나 질문을 받았을 때 애매하게 둘러댈 때가 많다.
환자가 당신에게 조언을 구하면, 친절하고 솔직하게 조언하되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주어야 한다. 헛된 희망으로 기운을 북돋우려 하지 마라. “범사에 감사해야지” 압박하지 마라. 그들의 행동을 보고 “넌 지금 협상 단계에 들어간 거야”라는 식으로 아는 척 하지 마라.
“너를 위해 기도할게”라고 말하지 마라. “이건 위기가 아니라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거야.”라고 절대로 말하지 마라. 이런 말은 사이를 갈라놓을 뿐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절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서로의 생각을 속속들이 알고 공유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이것도 다 하늘의 뜻일 거야”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마라.
“내가 너라면...” “난 네가 ... 해야 한다고 생각해”라거나 “...하는게 어떠니?”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당신 자신의 편견에 주의하라.(“단 것을 그만 먹어야 해”_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마라. 상대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라. 뭐든 다 알려고 하거나 보려고 하지 마라. 궁금증에 대한 답변을 다 들으려 하지도 마라.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다.
죽어가는 사람이 하는 말에 함부로 반박하지 마라. 자신의 감정 상태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통증 우려에 대해서, 치료 확신에 대해서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5. 마지막 몇 달
심각한 질병은 개인의 살아온 내력(유전, 민족성, 어려서부터 길들여진 성향, 대대로 내려온 습관과 전통 등)을 절묘하게 드러낸다. 때문에 우리는 죽어가는 환자가 누구인지, 그들의 여러 측면과 역사까지 다 기억해야 한다.
죽어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괴롭고 험난한 과정이다. 옛 자아가 사라지고 새로운 자아가 등장한다.
작가 마조리 그로스(Marjorie Gross): 난소암 진단을 받았으나 말기 암 환자의 처지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몇 가지 혜택이 있는 식으로 수용했다.(물건을 들어달라고 부탁하거나 줄을 설 필요가 없다)
작가 준 빙햄(June Bingham): 88세에 전이성 암 진단을 받았지만, 치료받지 않고 서서히 죽어가기로 결정했다. 시간만 잡아먹고 별 효용도 없는 각종 검진을 취소했다.
오랜 투병 생활에서 겪어야 하는 변화는 원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몇 가지 변화는 누구나 겪는다.
피로(fatigue)는 떼놓을 수 없는 동반자다. 가벼운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면 도움이 된다. 피로 때문에 일상이 틀어지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못 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준비만 잘하면 여행도 가능하다.
오랜 투병 생활에서 그 다음으로 문제 되는 건 통증이다. 많은 이들이 통증을 두려워하는데, 그런 두려움은 현실적이지 않다. 호스피스 완화치료에 관한 연구를 보면, 100명 가운데 1명 정도만이 죽어가면서 통제할 수 없는 통증에 시달린다.
통증은 주관적이다. 어떤 사람은 “아이고 나 죽네!”라고 말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통증을 느낌으로써 “내가 아직 살아있구나”라고 생각한다. 환자가 아프다고 하면 아픈 것이다.
통증은 다스려야 한다. 담당 의사가 당신의 통증을 온전히 제어해주지 않는다면, 다른 의사를 알아보는 것도 대안이다. 특히 몰핀은 가격이 저렴하고, 제대로 처방하면 매우 안전한 약물이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다. 대표적으로 진정 상태다. 며칠 동안 일정한 간격으로 복용하면 대개 사라지지만, 아편이 함유된 약물은 모두 이런 문제를 야기한다. 당신은 몽롱하지만, 통증이 없는 상태를 바라는가? 아니면 하루 종일 초롱초롱한 상태로 있기 위해 경미한 통증을 꾹 참고 견디겠는가?
“중독될까 봐 두렵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중독을 걱정한다는 건 기적이 일어나길 기대하는 것과 같다. 딱히 고려하지 않아도 될 미래를 염려하는 것이니 말이다. 진통제를 원래 의도대로, 즉 통증을 다스릴 용도로 사용한다면 당신의 중독자가 아니다.
임종을 향해 갈 때 구역질과 식욕 부진, 그로 인한 체중 감소는 피할 수 없는 징후들이다. 그리고 죽어가는 동안 이런저런 손실이 이어진다. 즉 머리카락과 치아가 빠지고, 시력이 떨어지며, 집중하는 시간도 점점 짧아진다.
사람은 무력감을 느끼거나 삶의 목표를 상실하거나 정신적 고뇌를 이기지 못하면 의기소침해진다. 죽을 날이 다가올수록, 사회적 역할이 줄어들고 온 신경이 신체의 요구에 집중될수록 다른 관심사는 줄어든다. 어떤 사람은 몸의 기능이 떨어져 남에게 점점 더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온갖 걱정과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한다. 반면 다른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고, 과거를 돌아보며, 나날이 달라지는 변화에 주목한다.
6. 집에서 모신다고?
193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인은 대부분 가정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요즘엔 미국인의 80퍼센트 정도가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선택할 수는 없지만 어디서 죽을지는 선택하려고 한다. 그 결과 죽음을 다시 가정에서 맞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둘러쌓인 멋진 그림이 다시 떠오른다. 하지만 집에서 모시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잘해야 본전이 경우가 많다.
집에서 모실 경우, 가족은 환자를 사랑으로 보살피긴 하지만 대개 환자의 고통스러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거나 약물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른다. 위생이나 살균 면에서 보호시설보다 부족하기에 여러모로 불편하다. 1930년대처럼 대가족이 묘여 살지도 않고, 장거리 출퇴근과 초과 근무 때문에 환자를 하루 종일 돌보기도 어렵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병원에서 숨질 가능성이 더 크다.
죽어가는 사람을 집에서 모시려 한다면, 먼저 누가 도와줄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만 앞세울 뿐 막상 도움을 청하면 꽁무니를 뺀다. 때로는 한 사람한테 떠맡기고 남은 식구들은 나 몰라라 하는 경우도 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가정이 파괴될 수 있다. 그만큼 엄청난 사건이며, 남겨진 가족들이 남보다 못한 사이로 멀어질 수 있다. 임종을 앞둔 환자의 ‘간병’은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 벅차다.
미국인의 약 40퍼센트가 죽을 때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고, 그중 94퍼센트는 환자가 가정에 머물면서 받는다. 호스피스는 1차 의료를 제공하지 않는다. 불치병에 따르는 고통을 더는 데 도움을 제공할 뿐 치료는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그에 비해, 완화의료는 만성질환과 불치병을 앓는 사람의 치유를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혹은 죽음을 받아들인 상황에서 좀 더 편안하게 삶을 유지하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춘다. 완화의료는 좋은 죽음을 맞는 데 필요한 온갖 것을 지원한다.
의술은 치료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진짜로 좋은 의술은 환자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그리고 죽음을 어떻게 느끼는지에 더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다.
집에서 눈을 감고 싶다면, 아는 사람과 단체와 조직에 다 연락한 다음, 괜찮은 호스피스나 완화프로그램을 신청하라. 물론 사람 일은 알 수 없기에 병원에서 죽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될 이유가 셀 수 없이 많고, 그렇게 되더라도 이상할 건 전혀 없다.
간호사는 죽어가는 사람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고, 입원환자 전문의는 적절한 약물을 처방함으로써 당신이 최대한 편히 가도록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줄 것이다. 당신이 영원히 깨지 않을 잠에 빠져들 때까지 간호사는 전혀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살며시 다가와 몸을 정갈하게 씻겨 주고 머리를 빗겨준 뒤 조용히 물러날 것이다.
7. 마지막 몇 주
죽는 과정은 지루하거나 혼란스러울 수 있다. 남은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지만, 때로는 이 상황이 끝나게 죽음이 얼른 찾아왔으면 싶다.
우리는 소멸을 두려워한다. 때문에 공포를 다스리는 데 최선을 다한다. 때로는 약속의 땅이라고 공공연하게 불리는 것을 손꼽아 기다린다. 세상엔 여러 형태의 위로가 있고 여러 경로의 두려움이 있다. 우리는 죽을 준비가 되면 자신의 내밀한 믿음을 찬찬히 돌아본다. 아울러 우리가 평생 바라보지 않으려 했던 주제, ‘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라는 문제를 똑바로 바라본다.
“얼마나 남았죠?” 절박한 이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의사는 없다. 다만 환자가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예후는 더 정확해진다. 결국 익숙한 거리를 지나는 것처럼 죽음의 순간을 훤히 예측할 수 있다.
임종을 몇 주 앞둔 시점엔 몸이 몹시 피곤해진다. 활력과 기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다가 결국 죽는다.
환자는 눈을 감기 전에 자질구레한 일들을 마무리 짓고 싶어 한다. 혹시 죽어가는 사람을 돕고 싶다면, 당사자가 처리하기 어려운 자잘한 일(ex 옷장 정리, 편지쓰기 등등)을 도와주라.
이즈음엔 환자의 피부도 신경 써야 한다. 이를 위해 자세를 바꿔주고 가볍게 마사지를 해주면 크게 도움이 된다. 피부에 상처가 있거나 환자가 통증을 느낀다면 간호사에게 즉시 알려야 한다.
호흡곤란이라고도 하는 호흡 장애는 임종이 가까워지면 흔히 나타난다. 그럴 때는 더 편하게 호흡하도록 도와주면 된다. 입술을 오므린 호흡을 하도록 하고, 환자 옆에서 시범을 보이면서 함께 호흡하면 좋다.
환자는 음식물을 점점 덜 먹고 덜 마시다가 결국엔 다 끊는다. 음식을 그만 먹겠다고 선택하는 게 아니라 먹겠다는 욕구가 없어지는 것이다.
소화도 천천히 진행되고 콩팥 기능도 효율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억지로 먹이거나 마시게 하지 마라. 환자는 억지로 먹거나 마실 때 구역질이 나거나 통증을 느끼거나 호흡이 어려워질 수 있다.
죽어가는 사람을 오래 지켜보면 자꾸 오그라드는 게 느껴진다. 생명력을 잃은 것이다. 임종을 앞둔 환자는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아야 오히려 더 편안하다.
인공영양, 즉 튜브를 끼워 영양물을 보급하는 경관영양(頸管營養)은 경구섭취가 불가능한 환자에게는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에겐 고문이나 다름없다. 경관영양은 통증과 감염, 궤양 같은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다. 부작용이 없더라도 임종 환자에게 인공영양은 아무 소용이 없다.
기력이 서서히 떨어지는 사람들 중엔 의식적으로 식음료를 끊겠다고 선택하는 이들이 있는데(스콧 니어링, Scott Nearing, 평화주의자이자 작가, 급진적 경제주의자), 의학 용어로 ‘수의탈수증’이라고 한다.
죽어가는 사람에겐 의료와 간호의 상당 부분이 불필요해지지만, 강제적으로 이어진다. 치료의 무익성을 제기한다고 해도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할 치료 과정을 선택할 수 있을까? 환자는 죽음을 향해 치달리는데, 당신은 환자가 살기를 바란다. 이러한 불가피한 이해충돌 때문에 배우자나 가족이 결정을 다 내리는 건 좋지 않다.
8. 마지막 며칠
밤새워 임종을 지키는 일은 매우 오래된 관습이다. 죽음은 으레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기쁨은 나무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사람의 니즈는 명백하게 드러나기도 하지만 모호하고 상징적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돌보는 사람은 그들이 바라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 아쉬워하는 것을 잘 포착해 대응해야 한다.
임종을 앞둔 사람이 작별 인사를 하면 정말로 떠날 준비가 됐다는 뜻이다. 당신도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라. 옛날 일을 꺼내 바로잡거나 해명하려 하지 말라.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당신은 목격자이지 주인공이 아니다. 당신 짐은 당신이 져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짊어지라고 요구하지 마라.
질병이나 고령으로 죽음을 앞둔 사람은 흔히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변한다. 그래서 괜찮은 간호사가 임종 환자에게 해주는 일의 상당 부분은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다. 그들은 환자를 지켜본 뒤, “예 이게 정상적입니다. 원래 그런 거예요. 남들도 다르지 않아요”라고 안심시킨다. 모든 일이, 환자의 안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환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게 제일 중요하다.
죽어가는 사람은 혼란에 빠진다. 각종 검사와 의사와의 상담, 수시로 찾아오는 방문객, 각종 청구서, 날마다 피로와 수면 부족에 시달린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벌어지니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환자의 집중력은 좋았다 나빴다 한다. 갑자기 환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과 후각, 청각에 일대 혼란이 일어난다.
그럴 때는 치료와 함께 병실 조명과 목소리를 낮추는 등 자극을 줄여줘야 한다. 환자가 평소 즐겨 듣던 음악을 들려주면 몸과 마음이 안정되기도 한다. 향기도 진정 효과가 있을 수 있다.
임종 시의 경련과 불안 증상은 임종 며칠 전이나 몇 시간 전에 갑자기 기운이 뻗치고 흥분하는 상태를 말한다. 절박한 순간에 격한 감정을, 마지막 남은 생명의 불꽃을 일시에 발산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즉 죽음이 임박했을 때 갑자기 생기가 돌고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이다. 내내 잠만 자거나 축 쳐져 있던 사람이 갑자기 기민해지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젠 정말 떠날 때가 됐음을 알아차린 게 아닐까?
임종을 며칠이나 몇 시간 앞두고서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경련과 불안처럼 고통스러워 보이는 행동, 통증, 불편한 자세, 가쁜 호흡 같은 비언어적 신호가 바로 그것이다. 그밖에 심리적, 정신적, 영적 형태의 고통도 있다. 어떤 환자는 심판대에 서야 한다거나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다며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남들에게 의존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자존감이 떨어지기도 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만 해도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 막을 수 없는 현실에 부딪혀 평정심을 잃은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영적 경험(다른 세계를 방문하거나 밝은 빛을 보았다는 이야기 등등)을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이를 ‘임종 현상’이라고 한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런 현상은 죽어가는 환자에게 평안과 위안을 안겨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는 극심하게 약해지다가 결국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항문 괄약근이 느슨해져서 변을 가리지 못한다. 요실금이 생기고 소변을 보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소변이 끊긴다. 신장 기능이 아예 멈추고 순환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혈액은 수소 이온 농도가 변한다. 갑자기 팔다리가 비틀리거나 몸이 떨리거나 들썩거리기도 한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얼룩덜룩한 반점이 생기기도 한다. 순환이 잘 안 돼서 팔다리가 붓는다. 죽어가는 몸은 점점 움츠러든다. 죽음이 가까워져 올수록 감각중추가 둔해져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모두 약해진다. 눈이 게슴츠레해지거나 반만 뜨여 있다. 죽음이 임박하면 호흡이 가쁘거나 느려지면서 불규칙해진다. 때로는 아주 깊어 지거나 아예 건너뛰기도 한다. 때로는 막혔던 숨을 헉! 하고 내뱉거나 고함이라도 치는 양어깨를 들썩이며 그르렁거리기도 한다. 이러한 임종 호흡이 나타나면 죽음이 임박했다는 뜻이다.
정상적인 죽음의 과정인데도 간병인과 가족이 특히 괴로워하는 게 있다. 바로 죽어가는 사람의 목에서 나는 가래 끓는 듯한 소리다. 이런 요란한 호흡은 죽는 과정에서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환자의 불편이 아닌, 자신의 불편을 해소하고자 약물을 투여하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9. 마지막 순간
삶은 팽팽한 긴장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활기요, 움직임이요, 탄성이다.
하지만 죽는 순간엔 생명의 기운이 쇠하다가 완전히 고갈된다. 눈이 흐릿해지고 푹 꺼진 것처럼 보인다. 근육이 늘어지고 턱이 축 처친다. 피부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형체로 변한다. 죽은 몸은 세상 어떤 것과도 같지 않다. 죽은 후의 시신을 보면 우리가 창조물임을 가장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시신을 서둘러 옮기거나 천으로 가릴 필요도 그리고 방에서 서둘러 나갈 필요도 없다. 천천히 이 방에서 일어난 엄청난 일을 살펴보라. 죽음은 한 순간에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오랜 순간에 걸쳐서 진행되고 마지막 호흡을 통해 이뤄진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시인 마리 하우Marie Howe는 죽음의 순간을 어떤 것의 종료나 중단이 아닌 완성 즉 삶의 총결산으로 생각했다. “마침내/ 누군가가 당신의 구두끈을 절대로 풀리지 않게 묶어주었다.”
10. 시신
그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줄 뻔히 아는데, 그의 몸을 어떻게 처리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죽은 몸이라 해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시신을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우리가 주검을 가령 쓰레기로 취급하기 시작한다면, 시신이 되기 직전 즉 아직은 살아 있지만 곧 죽을 사람을 다루는 태도 역시 바뀔지 모른다.” 시신은 거울이고, 우리는 거울에 비친 상(像)이다.
시신을 서둘러 옮기지 않아도 된다. 변화는 몇 시간에서 며칠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시신을 씻기는 일은 항복의 몸짓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항복한다. 시신을 씻겨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지진 않았지만 거의 어디서나 시신을 씻긴다. 죽은 자에 대해 애도를 표하는 본능적 방식이자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해 행하는 일이다.
시신 씻기는 일은 혼자 하기에는 벅차다. 생명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 쪼그라든 주검이라도 살아 있는 몸보다 무겁고 다루기도 힘들다. 특히 시신을 옮길 때 방광이나 장에서 분비물이 나올 수 있으니, 먼저 수건이나 패드를 여러 장 깔라. 시신을 옮길 땐, 양쪽에 두세 명씩 붙어서 시트를 시신에 바짝 붙이고 들어 올린다. 시신에서 한숨 소리나 신음 소리가 나더라도 놀라지 말라. 시신을 돌 때 폐에 남아 있던 공기가 빠져나오는 것이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심호흡을 하고 어떻게 처리할지 머릿속으로 찬찬히 생각하라.
사람의 몸은 죽은 후 한 시간에 약 0.8℃씩 체온이 떨어지는 사후 경직이 일어난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거도 걸치지 않은 채 당신 앞에 놓여 있다. 당신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쪼그라진 몸을 마주한다. 그 시점에서 발휘할 건 사랑뿐이다. 당신에겐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과 사랑만 있으면 된다.
시신을 씻기고 옷을 입히라. 그리고 원하는 위치로 옮겨라. 시신의 사진을 찍고 싶을 수도 있다. 옷을 입고 단정하게 누운 고인의 사진은 살아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만큼이나 소중하다. 머리카락이나 치아나 손톱 등 죽은 이의 유품으로 장식품을 만들기도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라틴어로 ‘그대는 죽어야 할 운명임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죽은 이를 추억하면서 동시에 우리도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는 것이다.
시신을 장례업자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영안실이나 화장터로 옮길 수도 있다. 어떤 묘지에서는 당신이 직접 땅을 팔 수도 있고, 해당 지역의 법규만 지킨다면 사유지에 매장할 수도 있다. 장례업자에게 휘둘리지 마라.
방부처리와 ‘복원술’(시신을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성형 작업)은 고인을 공경하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기억하자는 미명 하에 대중에게 판매된다. 하지만 그런 일은 모두 산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지는 일일 뿐이다. 방부처리는 죽음을 완벽하게 부정하는 기술일 뿐이다.
죽는 순간부터 몸속의 피가 중력에 의해 밑으로 가라앉으면서 피부가 얼룩지는 데 이를 시반이라고 한다. 시반은 육안으로 확인되는 부패의 첫 번째 신호이며, 이후 수개월에 걸쳐 부패가 진행된다. 죽자마자 변하기 시작해 며칠만 지나도 누구인지 알아볼 수는 없다.
분해(decomposition)는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 여러 문화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시신을 노출시킨다. 유럽: 징벌의 의미로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개나 청소 동물(독수리, 하이에나)에게 던져줌 / 티벳의 풍장 풍습. / 조로아스터교도: 시체를 원형으로 된 돌탑인 ‘침묵의 탑’에 올려 놓음.
자연장(natural burial)은 시신을 방부처리 하지 않고 그대로 묻는 방식이다. 유구한 세월 동안 수백만, 아니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의 몸이 그런 식으로 묻혀 왔다.
전 세계 어디서나 묘지로 쓸 공간이 부족하다. 때문에 묘지가 가파른 산이나 동굴로 올라가게 되었고, 심지어 하늘로까지 치솟게 되었다(브라질의 수직묘지/빌딩).
하지만 우리가 뭘 하든 시간이 지나면 우리 몸에는 분해가 일어난다. 방부 처리한 몸도 결국 분해된다. 속도가 느리고 패턴이 조금 다를 뿐이다. 시애틀의 어느 학제간 연구팀에서 궁극적으로 자연장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들이 시도하는 매장의 최종 결과물은 퇴비다. 과거의 조각들을 새 생명으로 다시 탄생하게 하는 것이다.
화장은 시신 처리를 위해 가장 널리 사용되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화장이 끝날 무렵엔 몸의 약 5퍼센트만 남는다. 문제는 화장을 하는 소각로에서 나오는 유독물질이다. 화장장 근처에서 선천적 기형과 사산이 증가했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재는 거의 어디에나 뿌릴 수 있지만 바람의 방향을 잘 살펴야 한다. 땅에 묻거나 단지에 담아 선반에 둘 수도 있고 바다에 뿌릴 수도 있다. 그밖에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재를 처분할 수 있다(스테인글라스, 연필 세트, 곰 인형, 모래시계, 인공 산호초 조성, 다이아몬드, 문신용 잉크나 페인트에 혼합, 레코드판, 폭죽, 유골 탄환 등등).
리소메이션(resomation) 혹은 바이오화장(biocremation)으로 불리는 친환경 화장방법이 있다. 시신을 알칼리성 가수분해로 알려진 과정을 통해 융해시키는 것이다. 매우 신속하게 시신을 분해시킬 수 있다.
한 스웨덴 회사는 ‘프로메션(promession)이라는 기술을 고안했는데, 시신을 영하 196℃의 극저온으로 얼려 몸 전체를 크리스털로 만드는 기술이다. 70킬로 나가는 시신이 20킬로 크리스털로 남는다.
당신은 몸을 전시용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몸 전체나 일부가 교실이나 박물관 전시를 위해 보존될 수 있다. <인체의 신비> 전시회에서 논란이 된 플라스티네이션 기법이 대표적이다.(시신을 방부처리, 절개, 아세톤 목욕, 냉동을 거친 후 다시 고분자(polymer) 목욕과 경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 정밀한 표본으로 탄생)
11. 애도
애통은 ’어 뭐지?‘하면서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상태이다. 너무나 익숙했던 것이 사라졌다.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나눴던 일상까지 전부 다 사라졌다. 내가 이걸 하면 넌 저걸 했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넌 저렇게 대답했는데. 손을 뻗으면 늘 거기 있었는데, 이제 손을 뻗은들 아무것도 없다. 애통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기억의 띠가 되어 계속해서 우리 주변을 맴돈다. 욱신거리는 치아를 슬쩍 만져보고 그냥 놔두듯이 애통한 마음을 그러안고 살아간다.
여러 MRI 연구 결과, 애도하는 뇌는 다른 감정과 다른 패턴을 보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감정은 보통 뇌의 특정 부위만 밝히지만, 애통은 기억과 소화, 시각적 이미지 등 온갖 부위에 영향을 미친다. 애통은 당신을 아프게 할 수 있다. 심지어 죽을 만큼 아프게 할 수도 있다. 한꺼번에 아프다 말거나 어쩌다 잠깐 아프나 마는 게 아니다. 그냥 아프지 않은 순간이 없다.
애통은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싶은 일이 자꾸만 벌어진다. 다 거짓말처럼 느껴지고 약을 먹은 것처럼 멍하다. 다 끝났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병수발을 하느라 수주에서 수개월 동안 병원 대기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일이 다 끝났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안도감을 느낀다는 사실에 놀라 죄책감에 휩싸인다. 너무 혼란스럽다. 잘 굴러가던 일상이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진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그리워하며 늘 후회한다. 애통은 후회하는 마음이다. 분노하는 마음이다. 질병에 분노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끔찍한 상황에 분노하고, 빼앗긴 미래에 분노한다. 사고에, 실수에, 죽음까지 이르게 된 어리석음에 분노한다. 심지어 죽은 사람에게도 분노한다. 우리는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죽음을 막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 분노한다.
어쩌면 분노는 살아남은 자가 생존의 두려움에 대처하는 방식일 수 있다.
어떠한 설명도 애통을 고쳐주진 못한다. 조언이나 공유는 크나큰 도움은 줄지언정, 온전히 고쳐주진 못한다. 애통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통은 칼이나 몽둥이게 의한 상처와 같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면 흉터가 남는다. 그 부위는 결코 예전과 똑같지 않다. 애통은 질서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다. 정해진 일정도 따로 없다. 유효 기간도 따로 없다. 때로는 평생 지속되기도 한다.
애통(grief)은 상실의 내적 경험이고, 한탄(mourning)은 상실의 외적 표현이다. 둘을 합쳐 우리는 사별(bereavement)이라는 멋진 말로 표현한다. 애도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외침인 통곡(lamentation)은 “절절한 마음을 토로하는 만가(輓歌)” 혹은 “심금을 울리는 울부짖음”이다. 통곡은 전세계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애통과 한탄 그리고 통곡은 종교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애통을 드러내면 눈살을 찌푸린다. 너무 많이 한탄하면, 운명을 거부하고 하나님에게 불복하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상실감에 빠진 사람이 바닥에 엎드려 주먹을 쥐고 가슴을 친다. 그들은 자기 살을 도려내고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쥐어뜯는다. 옷을 갈기갈기 찢거나 남은 평생 특정한 옷을 입는다. 특별한 문신을 하기도 한다.
애통은 반복해서 토로해야 하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과거에 얽매여 살면 쓰겠니?”라는 말은 하지 마라. 애도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말은 이것이다. “혹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니? 무슨 이야기든 괜찮아.”
애통은 간혹 인정받지 못할 때도 있다. 사람들은 당신이 왜 슬퍼하는지, 혹은 왜 그리 격하게 슬퍼하는지 의아해 한다.(가령 이혼한 전 배우자의 죽음이나 말기 치매 환자인 배우자의 죽음, 조기 유산 등은 상실의 아픔이 비교적 적다고 여겨진다) 이를 박탈당한 애통(disenfranchised grief)이라고 부른다. 인정받지 못하거나 평가받지 못한 애통은 사람을 더욱 힘들게 한다.
예상치 못한 죽음이나 격렬한 죽음 앞에서는 흔히 ’복합적 애통(complicated grief)‘이라는 감정에 빠진다. 이때는 고통이 몇 달에서 몇 년에 걸쳐 끈질기게 이어진다. 애통에는 엄격한 시간표나 정해진 스케줄이 없기에 정확히 언제 털고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긴 해도 대다수는 몇 달에서 몇 년에 걸쳐 앞으로 나아간다. 떠나간 사람을 날마다 생각하긴 하지만, 그 사람이 없는 새로운 삶을 어떻게든 꾸려나간다.
사람들이 애통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애도 카운슬러 존 제임스와 러셀 프리드먼은 이렇게 진단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 다르게, 더 나은 방식으로 벌어지길 염원하고, 미래의 실현되지 않을 희망과 꿈과 기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애통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혹은 더 나은 어제’를 내려놔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게 바뀌어버린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상활을 바꾸고, 우리 자신을 바꾸고, 이미 떠나버린 그 사람을 바꾸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상황은 실제 벌어진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12. 기쁨
극한 상실감과 애통의 과정을 지낸 후, 이 세상에서 감당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같은 단단한 마음이 생긴다. ‘안 돼, 안 돼’를 연발하며 나를 짓눌렀던 부정적 감정이 구름처럼, 연기처럼 사라졌다. 자리에 누웠는데 따스한 바다의 잔잔한 파도에 몸을 내 맡긴 것 같았다.
스승의 화장한 뼈를 손에 쥐었을 때, 나는 그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실없는 키득거림과 호탕한 너털웃음 속에서 그의 행복을 감지했다.
우리는 나날이 빛나는 특별한 삶을 찬미한다. 하지만 태어난 모든 것에는 죽음이 따른다. 아무리 다정하고 완벽한 만남도 결국엔 헤어짐이 있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사기그릇은 언젠가 깨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 사기그릇의 생명력은 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
위태로운 아름다움. 우리의 고충이 여기에 있다.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영원할 수 없어 고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