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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존재 이유: 타자를 위한 책임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처럼 교회는 근본적으로 ‘타자를 위한 존재’(Dasein für andere)일 수밖에 없다. 그는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는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1) 모든 것을 타자를 위해 내어주는 교회일 때만이 교회는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의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주어진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타자는 하나의 얼굴, 하나의 집단, 하나의 상황으로 통일될 수 없는 ‘다수’로서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위해야 할’ 타자의 자리는 예수가 함께했던 이웃들(과부, 아이, 병자, 장애인, 성매매 여성, 세리, 이방인, 갈릴리 지역 농민 등)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이들에게 도둑맞기 십상이었다. 특히 독일어 für라는 전치사가 ‘-을 위하여’ 말고도 ‘-편에’라는 의미를 지시한다는 점도 염두에 둘 때, 교회는 고대 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이후부터 이미 정치권력이나 종교권력 ‘편에 서서’ 지배체제의 질서를 유지하고 자신의 사명을 날조하여 스스로를 기만하는 어두운 역사를 자주 써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교회사를 보면, 교회가 편들어야 할 타자 자리를 함부로 강탈하거나 강탈을 방관하는 낡은 관습에 저항하는 개혁 운동이 매번 교회를 재생해왔다. 이러한 일은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어내기보다 시대가 처한 상황에 따라 새롭게 해석하면서 교회가 보살피고 보듬어야 할 타자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환대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데서 이뤄졌다. 20세기 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본회퍼가 감옥에 갇혀 사형에 이르면서까지 ‘위하고자 했던’ 타자가 단순히 빈곤한 이들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포화 속에 학살당한 반인륜적 중대 범죄의 피해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이웃사랑 윤리 측면에서 보았을 때 교회는 시대와 사회의 특수성 속에서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되는 타자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들을 ‘위하는’ 구체적인 디아코니아 실천뿐 아니라 사회구조를 구체적으로 변혁하는 새로운 정치적 행동에도 참여해왔다.
하지만 교회의 존재성을 타자를 위한 책임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이 설명이 명백하게 정당하지만― 현실적으로 오히려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한다. 어떠한 부작용인지 논하려면 먼저 설명이 필요하다. 교회가 타자를 위할 때 비로소 참된 교회로서 존재할 수 있다면, 누군가를 ‘편들어야 하는 타자’로 교회가 의식하는 바로 그 순간 ‘타자’라는 항(項) 반대편에 있는 ‘주체’라는 항으로 자신을 정체화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본회퍼는 타자를 위하는 일에 책임을 지는 교회를 두고 ‘주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주체’라는 말의 사용 자체가 서양 전통 철학을 오랫동안 장악하고 있는 자아 중심적 존재론과 관념론에 의해 너무나 오염되어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염된 ‘주체’라는 말로는 다른 사람을 ‘주체’인 나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존재로 동일시하거나, 혹은 타자의 고유성을 무시하고 마치 도구처럼 함부로 대상화하기 쉽다. 그래서 본회퍼는 교회가 ‘타자’를 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타자를 위하는 교회를 두고 ‘주체’라고 우쭐대는 자의식 과잉을 보이지 않았다. 주체와 객체로 나뉘는 위계적 체제에 대한 거부에도, 본회퍼는 타자를 ‘위하는’ 책임에 대해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기로 선택한 자유이자, ―논리적으로는 말이 잘 안 되지만―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자신을 속박하는 복종의 자유라는 모순된 논리를 펼친다. 타자에 대한 책임의 의무를 강조하면서도 주체를 정의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자유’ 개념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순종으로 자유 개념을 설명한 본회퍼
사실 ‘순종’ 개념에 이미 익숙한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본회퍼의 논리를 두고 모순적이라는 지적을 받아들이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타자를 위하는 것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으로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고 ‘의무’로 규정되어 있는데, 거기에 만에 하나라도 명령을 어기고 의무를 위반할 가능성을 전제하는 ‘자유’ 개념을 교집합처럼 연결하는 ‘순종’ 개념은 결국 자유 본연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전복한다. 본회퍼에게 자유는 내 것을 우선적으로 지키는 자기중심의 선택이 아니라, 보살핌과 돌봄이 필요한 타자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타자 중심의 선택으로만 실현된다. 내 몸, 내 물건, 내 생각, 내 감정의 배타적 소유권으로부터 자유가 보장된다고 믿는 근현대 개인들의 자유주의적 자유 개념과 완벽하게 대치될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서 질문할 수 있다. 본회퍼가 설명하는 타자에게 복종하는 자유의 개념이 육체적 본능에 굴복하지 않고 이성적 본성에 따라 도덕적 선택을 자율적으로 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자유 개념과 무엇이 다르냐고 말이다. 그렇다. 둘은 실천 결과에서 차이가 거의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빈곤으로 굶주리는 타자에게 본회퍼도, 칸트도 모두 자기가 가진 음식을 나누어주는 자유를 누릴 것이다. 그러나 ‘주체’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자유 개념을 설명하고자 했던 본회퍼와 ‘주체’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 자유 개념을 설명했던 칸트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 칸트의 자유 개념은 음식의 원천적 소유권은 음식을 나누어주는 사람에게 독점적으로 귀속되어 있다는 선행 사실에서 출발하지만, 본회퍼의 자유 개념은 음식의 원천적 소유권이 원래부터 창조주에게 귀속되어 있었고 자신의 소유권은 임시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신앙고백에 기초하고 있다. 나눔이란 칸트에게는 내 것을 남에게 나누어주며 빚을 내주는 행위일 테지만, 본회퍼에게는 원래 내 것이 아닌 것을 때가 이르러 남에게 되돌려주는 빚 갚는 행위인 셈이다. 전자의 논리에서 나눔 실천은 선의의 공덕이 나에게 있고 그래서 ‘주체’라고 스스로를 선언하기에 마땅하지만, 후자의 논리에서는 나눔 실천이 사랑의 은혜를 갚음이 되고 그래서 ‘주체’라는 말은 언제나 나를 ‘먼저 나를 사랑한 이’나 ‘그래서 내가 사랑한 이’에게로 대신 미뤄지는, ‘타자’를 위한 존칭이 된다. 한마디로 교회는 나눔의 행위를 통해 타자를 위하는 주체로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은혜를 대신 갚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제자 공동체로 서는 것이다.
교회가 타자를 위해 비우는 헌신이 어려운 이유
교회는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죽음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스스로 낮추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장 급진적인 나눔 실천을 해야 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의 말씀을 따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원천적으로 하나님께 속해있는 것들을 가려내 그가 편드시는 타자들의 필요를 충족하는 헌신을 보여야 한다. 그러한 헌신을 조직으로 묶어내는 일을 감당하는 교회야말로 교회다움을 충족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준에서 볼 때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교회는 교회다워지는 길로 나아가지 못해왔다. 많은 경우 교회 재정을 타자를 위해 쓰기보다 화려한 예배당과 부속 부동산을 소유하고 유지하는 데 사용하였다. 교권 세력의 유지를 위해서도 적지 않은 재정이 낭비되어야 했다. 교회가 그나마 위하였던 타자들 역시 ‘선교’라는 분명한 목적의식에 부합하는 자들로 제한되기 일쑤였다. 많은 성도가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하여 교회에 바쳤던 것이 하나님이 편드시는 타자들을 위해 사용되지 못하고 교회 자체를 위해 독점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럴수록 “교회는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급진적 주장은 구체적 개혁을 이뤄내기보다 교회가 ‘세계 내 존재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위선적 집단임을 사회에 명백하게 드러내는 비관적인 자기 고백이 되기 십상이었다.
왜 이렇게 된 것인가? 성도들이 하나님의 것을 교회에 내놓으면 교회가 그것들을 모아 보살핌이 필요한 타자를 위해 사용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지 못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성도의 타락과 관련되어있다. 두 번째 이유는 지상의 나라에 존재하는 교회의 불가피한 현실성과 관련이 있다. 우선 성도의 타락은 우리가 현재 수없이 많은 한국교회에서 직면하고 있는 교회 재정의 부패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재물을 거두었음에도 전 교인이 참여한 공식 회의의 승인과 감사(監事) 없이 사적으로 착복하거나, 교회 자산으로 축적하는 데에만 매몰된 교권 세력이 존재한다. 이들 중 다수는 교회의 담임목사나 장로로서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미 교회 재물에 대한 그들의 소유 의식은 신성모독 수준에 이른다. 근본적으로 분노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는 실제적 무신론자나, 하나님과 자신을 혼연일체로 인지하는 무속인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이 원인과 관련하여서는 옳고 그름의 판단이 어렵지 않기 때문에 교회 재정의 부패를 저지르는 이들의 죄를 최소한 하늘 법정에서는 규명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날이 올 때까지 그들은 자기 자리를 굳건히 차지하며 죄에 죄를 더할 뿐이다. 심판의 길로 스스로를 재촉한다.
그러나 지상 교회가 처한 현실성과 관련한 두 번째 이유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문제이다. 그리스도교의 윤리가 타자를 위한 교회의 헌신을 가르치는 윤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은 여러 번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완전한 하나님 나라 임재의 지연으로 교회 공동체가 ‘에클레시아’라는 지상의 조직체를 현실적으로 유지하고 미래 세대를 예비하려면, 적절한 물질적 기반과 조직을 위해 전문적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즉 타자를 위한 본질적 사명을 감당할 교회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몫이 여전히 교회 안에 필요할 수밖에 없다. 물론 오늘날 예배당 없는 교회나 자비량 혹은 이중직 담임목회자가 일하는 교회, 심지어 목회자 없는 평신도 교회와 같이 교회 몫을 하나도 남기지 않으려는 급진적 모델을 추구하는 교회가 없지 않지만, 그러한 교회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은 여전히 시험 중에 있다.
이러한 현실적 문제는 초대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약학자 리처드 헤이스는 신약성서 본문에서 경제적 나눔 실천과 관련하여 “단순하거나 획일적인 규정을 도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2) 가지고 있는 것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라는 급진적 명령이 예수의 말씀에서도, 또한 초대교회 이야기를 증언한 사도행전(행 4:32-37)에서도 분명히 나타나는데, 헤이스는 예수의 제자들과 초대 교인들 삶에서 급진적 나눔 실천의 가르침은 ‘교회를 향한 도전’으로서 의미가 있었다고 보았다.
부정의하고 비합리적인 교회 재원의 분배
교회는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기 위해 가진 것을 끊임없이 비워내도록 도전받는다. 그러나 나눔 실천을 위해서라도 교회는 교회의 존재를 지탱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몫이 필요하다. 이는 지상의 조직체라는 형태를 적어도 마지막 날까지는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현실 교회의 숙명이다. 그러한 숙명을 감안한다면 교회의 소유를 전부 이웃에게 되돌려주는 ‘나눔 실천’ 이전에 ‘나누기 행정’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자의 원리가 교회의 본질인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면, 후자의 원리는 교회의 현실이 기초해야 할 ‘정의’에서 나온다. 물론, 본질이 현실보다 당연히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비본질적이라고 치부해서도 안 된다. 정의 관점에서 현실적 문제들을 충분히 조율할 수 있음에도 비본질적이라며 함부로 취급한다면 결국 현실적 문제들을 가늠하는 ‘정의’의 원리도 함께 무시된다. 정의의 원리가 무시되는 집단에서는 ‘사랑’의 원리가 불의를 함부로 덮거나 쉽게 용서하는 근거로 도용되기 쉽다. 특히 ‘사랑’의 권위를 독점한 교회의 가부장적 지도자들에 의해 불의한 재정 운영이 은폐되기도 쉽다.
‘나누기 행정’이 정의롭게 지켜지지 않은 교회의 ‘나눔 실천’은 사랑의 원리를 어떻게 오용하는가? 나누기 행정은 제한된 재원을 적절하게 분배하는 일이다. 교회는 함께 모여 예배하고 교육하기 위해 적절한 물질적 기반이 필요하며, 성도들 간에 교제와 돌봄이 잘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도 적절한 재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언급한 일들을 전문적으로 해낼 목회자(들)뿐 아니라 여타 전문가들과 보조자들도 함께 필요하다. 나누기 행정은 바로 이러한 항목들에 교회 재정을 어떻게 바르게 나눌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렸다.
정의의 원리를 사랑의 원리로 압도해버리는 많은 교회에서는 재원의 분배가 비합리적이거나 폐쇄적인 의사결정 구조에서 일방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분배의 차별이 발생한다. 예배하고 교육하기 위해 적절한 공간을 마련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지상의 공간은 부동산 시장을 통해 매매나 임대 가격이 형성되어있고 적절한 인테리어를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회가 공간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시장의 논리가 침투하여 누군가에게 경제적 이득이 몰릴 위험이 크다. 특히, 그 이득은 교회 의사결정 구조를 독점한 이들에게 교회와 세상에서 활보할 수 있는 권력을 제공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배경 아래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대형교회의 목회 세습은 근본적으로 교회 재정을 정당하게 분배해야 할 나누기 행정을 방해한다. 지상의 조직체로서 교회가 지닌 물리적 기반과 재정은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공개되고 적절하게 분배되어야 하지만, 목회 세습은 교회를 한 푼의 세금 없이도 증여가 가능한 사적 재산이나 기업체로 변질시켜 버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습에 성공한 교회들에 속한 성도 다수는 그러한 행위의 부당성에 분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지지하기도 한다. 시끄러운 갈등을 초래하는 정의의 원리보다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랑의 원리가 본질에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목회를 세습한 담임목사가 가부장처럼 높이 떠받들어지며, 어떤 실수라도 마땅히 사랑으로 용서해드려야 할 교회의 실질적 주인이자 ‘주체’로 존재한다.
‘헌신페이’를 요구받는 교회 내 하위주체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나누기 행정은 교회의 실질적 주인이자 주체인 이를 제외하고, 교회에서 전문적으로 일하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부당하고 차별적인 분배를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주최한 ‘2015 교회의 사회적책임 심포지엄 ― 한국교회 부교역자를 생각하다’에서 발행한 자료에 따르면, 설문에 참여한 949명(남 860명, 여 89명)의 개신교 부교역자와 동일 교회에 소속된 담임목사의 공개된 사례비 평균이 395만 원인 것에 비해 부교역자들 사례비는 전임 목사(부목사)가 204만 원, 전임 전도사가 148만 원에 불과하였다. 더 심각한 점은 같은 부교역자라고 하더라도 남성 부교역자 사례비 전체 평균이 163만 원(일평균 10.9시간 근무)인 것에 비해 여성 부교역자 사례비 전체 평균은 104만 원(일평균 10.2시간 근무)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이다.3) 통계에 응답한 부교역자 중 17%가 담임목회자 사례비를 모른다고 답했다는 사실과 일부 대형교회 담임목회자의 재정 전용 문제가 은밀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인용한 통계의 정확성이 완전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래도 두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교역자가 되기 위해 밟아왔던 교육 기간에 비해 부교역자들 수입이 상당히 부족하여 한 가정의 생계를 이끌기에 충분치 않다는 점이다. 또한, 성별 간 사례비 차이는 여성 안수 금지나 여성 목회자 차별 등이 여전히 공고한 한국교회 현실을 그대로 반영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교회의 나누기 행정 자체가 성차별적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불합리하고 부정의한 나누기 행정이 이토록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용인되는 것은 목회 활동이 기업 노동자의 노동과 절대로 같을 수는 없다고 여기는 강력한 교회 문화 때문이다. 교역자에게 지급되는 돈은 분명히 임금에 준하는 양태를 띠고 있지만, ‘임금’이라고 불리지 않고 주로 ‘사례비’로 지칭된다. 교역자의 목회 활동은 임금으로 정당하게 계산되어 보상해야 하는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하여 대가를 먼저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헌신적으로 드리는 자발적 봉사에 머물러야 하며, 교회 공동체는 그 갸륵한 마음을 귀히 여겨 감사한 마음의 ‘사례’를 하는 일이 마땅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재정 전권이 담임목회자에게 속해있는 교회에서 담임목회자 사례비는 너무나 과도하게, 부교역자들 사례비는 너무나 과소하게 책정된다.
목회 활동이 여타 노동과 같은지 다른지에 대한 논의는 신학적으로 따져보아야 하기에 여기서는 더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 그러나 목회 활동이 일반 노동자의 노동과 같을 수 없다는 주장을 순수하게 받아들인다고 해도, 현재 일어나고 있는 부교역자나 교회의 행정 혹은 기술직 직원들에 대한 열악한 대우에는 여전히 비판적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교회의 나누기 행정이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 가족의 생계가 유지될 만큼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는지 말이다. 마지막 날까지 교회만 지상에 거주해야 할 조직체가 아니다. 가족도 마지막까지 지상에 거주해야 할 또 다른 조직체이며, 그렇기에 지상의 교회처럼 지상의 가족도 최소한의 물질적 기반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의 나누기 행정은 부교역자와 교회 직원에게 ‘열정페이’, 정확히 말해 ‘헌신페이’를 요구하는 데 부당함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낭만적 신앙으로 교회 내 ‘하위주체들’(subalterns)의 입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말이 ‘교회는 세상의 기업보다 더 나쁜 방식으로 존재해도 다 용서가 된다’는 말로 잘못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세상의 맘몬보다 교회의 맘몬이 더 악독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자의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만 돌보는 한국교회
‘비전교회’라고 불리는 미자립 교회 담임목회자들의 비참한 상황은 굳이 통계자료를 대지 않아도 너무나 명백한 현실이다. 한국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들에서는 총회장이 되겠다고 서로 첨예하게 갈등하고 경쟁하며 파벌 조직을 형성하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교단 내 미자립 교회 담임목회자들의 생존에는 제대로 된 조직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대형교회의 재정은 주로 개별 교회를 운영하는 데 한정되어야 하며, 교단 내 미자립 교회는 ―선교와 자선으로 대표되는 교회의 나눔(연보) 실천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나누기 행정에서 정당한 권리를 지닌 조직의 일부로 여겨지지 않는다. 분명히 예수는 자신을 포도나무라 부르고 그의 제자들 모두를 포도나무 가지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교회는 각자의 농원에서 각자의 포도나무를 키우고 그 나무에 붙은 가지만을 챙기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모두가 가슴 아프게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다. 한국교회가 수많은 미자립 교회를 공교회로서의 단일성과 공통성 관점에서 보살피지 않고, 교회 시장이라는 거대한 경쟁 구조에 뛰어든 개별 사업체로서 대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모두 가능했는가? 한국교회가 사랑의 원리에 기초한 ‘나눔 실천’을 내세워 세계 선교와 봉사에 가장 열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듯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나누기 행정’에 있어 차별적이고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심지어 정직하지도 않은, 불의한 분배를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 근본적 원인이다. 개교회와 교단 내부의 하위주체들이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려 하거나 지상의 정부가 교회의 경제적 활동에 조세를 부과하려 할 때마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는 노동자의 일터가 아니고 목회자는 시장의 장사치가 아니라고 항변해왔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말하는 많은 교회가 그 어떤 일터보다도, 그 어떤 장사치보다도 더 맘몬의 포악한 논리를 좇아왔다. 목회자들 간의 심각한 사례비 격차를 정당화하는 문화에는 자본주의의 핵심 도덕인 능력주의 등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폐쇄적인 재정 구조는 교회가 자본주의의 가장 기본 도덕인 정직성에도 미치지 못하는 비도덕적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나누기 행정 자체가 불의한 상황에서는 교회의 나눔 실천은 사랑을 가장한 위선이며, 불의를 감추기 위한 위장일 확률이 매우 크다.
■ 주
1) 디트리히 본회퍼, 손규태·정지련 옮김, 《저항과 복종: 옥중서간》(대한기독교서회, 2010), 교보문고 전자책.
2) 리처드 헤이스, 유승원 옮김, 《신약의 윤리적 비전》(IVP, 2002) 705쪽.
3)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한국교회 부교역자를 생각하다 - 2015 교회의 사회적 책임 심포지엄〉(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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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든 것을 타자를 위해 내어주는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