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산의 시화(詩話)
봄이 오면 기차를 탈 것이다/꽃그림이 그려진 분홍색 나무의자에 앉을 것이다/워워워, 바람을 몰 것이다//매화나무 연분홍 꽃이 핀 마을에 닿으면/기차에서 내려/산수유 노란꽃잎 하늘을 받쳐 들고 있는 마을에 닿으면/또 기차에서 내려/진달래 빛 바람이 불면/또또 기차에서 내려//봄이 오면 오랜 당신과 함께 기차를 탈 것이다/들불 비치는 책 한 권 들고/내가 화안히 비치는 연못 한 페이지 열어제치며//봄이 오면 요기저기 봄이 오면/당신의 온기도 따뜻한 무릎에 나를 맞대고/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여행을 떠날 것이다/은난초 흰 꽃커튼이 나폴대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광야로 광야로/떠날 것이다, 푸른 목덜미 극락조처럼 빛내며
-강은교, 「기차」
매화가 응향(凝香)을 뿌리는 주말에 범어사(梵魚寺)를 품은 금정산(金井山) 기슭에서 강은교 시인이 후학인 배재경, 이효림, 송진 시인들과 함께 보경사(寶鏡寺)가 있는 내연산(內延山)을 찾아왔다. 필자는 이종암 시인, 이형수 화백과 함께 시인 일행을 맞이하여 삼용추(三龍湫)를 거쳐서 선열대(禪悅臺)에 올랐다.
“청하(淸河)의 내연산은 바닷가의 명산이다. 소금강(小金剛)이라는 별칭이 있으니 나는 오매불망 가고 싶은 것이 오래다. 이제 너가 그곳의 주인이 되었고 나 또한 올해 양산(梁山) 군수 관직을 벗고서 작은 노새 한 마리를 사서 명승을 유람할 준비가 되었다. 너의 행정이 이루어질 내년 늦봄에 짧은 거문고를 싣고, 시낭(詩囊)을 매달고서, 너를 따라 삼동석(三動石)과 열두 폭포 경치 속에서 내가 시를 읊고 네가 화답하여 100편의 시를 읊어도 또한 시원치 않을 것이라고 산신령께 고하고 기다려라.”
청암정(靑巖亭)이 있는 봉화 닭실마을 사람 소산(小山) 권정택이 1749년 단풍철에 청하현감으로 부임할 때 당숙이자 스승인 강좌(江左) 권만이 환송하며 백암(栢巖) 김륵의 묘 앞에서 했던 말이다. 강좌는 내연산에 오기로 한 이듬해 봄이 오기도 전에 별세하고 말았다. 그는 단행본으로 유통되었던 황여일의 유내영산록(遊內迎山錄)을 읽고 내연산에 꼭 오고 싶어 하였다.
내연산의 상징 경관은 삼동석이고 대표 경관은 삼용추이다. 어우야담을 지은 유몽인은 금강산 표훈사에 머물 때 인조반정(1623) 소식을 들었고, 그해에 아들과 함께 서인의 무고로 처형됐다. 유몽인의 조카 홍문관 부제학 취흘(醉吃) 유숙은 환갑의 나이에 동해 바닷가의 변방 청하현으로 귀양 와서 고희를 넘기고서야 풀려 날 수 있었다. 집안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나고 사람들은 외면했다. 그에게 위안을 준 공간은 내연산이었고, 시를 주고받으며 벗이 되어준 사람은 장자에 정통한 계조암의 덕경(德瓊), 황정경에 통달한 문수암의 설희(雪熙) 스님이었다. 두 스님은 야만의 땅으로 유배 갔던 당의 시인 한유, 유종원과 교유했던 태전(太顚), 호초(浩初) 스님과도 같았다. 취흘은 삼동석에 두 차례나 찾아가고 그 곁의 암자에서 묵으며 시를 남겼다.
높고 낮은 나무꾼들의 길이 맑은 계곡물을 둘러싸고,/절은 단풍 비단 숲가에 있다./스님과 뜬 구름은 지는 해로 돌아가고,/객은 호학산(呼鶴山)을 따라서 신선의 세계로 들어간다./천년의 삼동석이 새로운 얼굴을 만나고,/하룻밤의 등잔불 아래 대화에 숙세의 인연을 안다./종과 경쇠 소리 몇 번이나 어디서 일어나는가,/앞 봉우리가 지척인데 신선이 있다.(高低樵路繞淸泉 寺在丹楓錦繡邊 僧與浮雲歸落日 客從呼鶴入諸天 千年動石逢新面 一夜懸燈認夙緣 鐘磬數聲何處起 前峯咫尺有眞仙)
-유숙, 「동석암에 묵으며宿動石庵」
대학승 석전(石顚) 박한영은 정인보, 최남선, 이광수, 이병기의 사우(師友)이고 김달진, 조지훈, 오장환, 김동리, 신석정, 서정주 등 한국 문단의 거장들을 제자로 양성했다. 석전은 ‘금강산의 구룡연(九龍淵), 철원의 삼부연(三釜淵) 폭포와 백중을 다투는 삼용추(三龍湫) 폭포가 있는 내연산에 오고 싶다.’고 하였다. 겸재 정선은 이 세 폭포를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화폭에 모두 담았다. 호고와(好古窩) 유휘문은 삼용추를 구룡연, 박연 폭포와 버금간다고 하였고, 우담(愚潭) 정시한은 삼용추가 금강산에도 없는 경치라고 하였다.
이처럼 경관이 수려한 내연산에서 불교와 유교 문명이 발달하며 인간 정신의 정화인 시문(詩文)이 창작되었다. 이 글에서는 내연산에서 빚어진 많은 시 중에서 사연이 깊은 것을 선별해 소개하고자 한다.
내연산은 본래 종남산(終南山)으로 명명되었는데 의상대사가 유학하며 화엄학을 공부한 중국의 종남산에서 유래한다. 화엄 10찰에 드는 부석사, 범어사, 화엄사처럼 화엄종 사찰인 보경사도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적광전이 금당(金堂)이다.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지도한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제자인 원진국사 승형(承逈)은 이자현 거사의 춘천 청평사 문수원기를 읽고 능엄경의 중요함을 알고 보경사 주지로 있으면서 입적하는 순간까지 능엄경을 강의하였다. 한국불교사에서 능엄경을 천명한 것은 원진국사였다. 그가 입적한 뒤에 그 문도를 위하여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지은 지눌의 수제자 진각국사 혜심(慧諶)이 보경사 적광전에서 설법을 하고 게송을 읊었다.
오늘 아침에 장맛비가 개어,/탁 트인 허공이 끝이 없구나./누가 말했던가, 보경(寶鏡)이 티끌에 묻혔다고/영원한 그 광명이 항상 세상을 비추는데.(今朝宿雨初晴 廓落太虛無際 誰云寶鏡埋塵 自有常光照世)
-혜심, 「구월 초이일에 보경사 원진국사 문도의 청으로 상당법문을 하고 스님이 읊은 게송
九月 初二日 寶鏡圓眞國師門徒請上堂 師云」
이 시에서 ‘보경’은 보경사의 절 이름에서 취한 것이다. 보경은 해나 달을 비유하는 말이다. 해와 달이 만상을 밝게 비추듯이 보경은 붓다의 진리나 불성의 메타포다.
우리나라의 도연명을 자처하며 무릉도원을 찾던 문장가 백운거사 옹몽진(邕夢辰)이 청하현감으로 와서 내연산을 발견하였다. 그는 돌아가면서 경주부윤 귀암(龜巖) 이정에게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오늘 아침 구름 안개 활짝 개어,/종일토록 냇물의 근원을 찾아 푸른 이끼를 밟았네./꽃과 버들 산에 가득한데 누가 있어 그 뜻을 헤아릴까?/한 줄기 계곡물, 바람과 달만이 홀로 서성이는 것을.(今朝雲翳豁然開 盡日窮源踏翠苔 花柳滿山誰會意 一川風月獨徘徊)
-이정, 「내영산에 노닐며 遊內迎山」
1562년 봄에 퇴계의 문인으로 명망이 높던 귀암이 내연산을 찾아왔다. 손작이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를 지어 ‘선동(仙童)과 석자(釋子)의 굴택(窟宅)’이었던 절강성 바닷가의 천태산이 천하에 알려진 것처럼, 귀암이 찾아와 시를 짓자 동해안 내연산은 사대부 사회에 유산의 명산이 되었다. 진달래 피는 봄과 단풍이 고운 가을에 시인 묵객이 앞 다투어 내연산을 찾아왔다.
청하현에는 해월루(海月樓)가 있고 내연산과 조경대(釣鯨臺)가 명승이었다. 1587년 8월 초순 해월(海月) 황여일과 그의 숙부 대해(大海) 황응청은 울진에서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연꽃이 피고 배롱나무꽃 자욱이 빛나며 매화와 대나무가 심어진 청하현 해월루에 올라 친구인 매당(梅堂) 조정간의 환대를 받고 월포 조경대를 유람하였다.
명유 신재(愼齋) 주세붕과 회재(晦齋) 이언적의 기문과 글씨·그림·음악의 3절이었던 돈재(遯齋) 성세창의 신묘한 필치의 편액이 걸린 해월루가 있어서 바닷가 궁벽진 작은 고을 청하현은 영남 칠십 고을에 이름이 났다. 열하일기에 버금가는 일본 통신사 여행기, 해유록을 남긴 당대의 문장가 청천(靑泉) 신유한은 회재가 기문을 쓴지 3갑자가 지난 1723년에 바다에서 달이 휘황히 오른 밤에 누각에 올라 거문고를 타게 하고 시를 지으며 한바탕 풍류를 즐기고 기문을 남겼다. 10년 뒤에 겸재 정선이 현감으로 와서 그린 청하성읍도에 해월루가 등장한다. 또 10년이 지난 1742년에 경기관찰사 홍경보는 소동파의 적벽부 탄생 11주갑을 기념하여 한탄강 적벽에서 뱃놀이를 하며 청천과 겸재를 불러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게 했다.
박목월은 젊은 날 경주 모량리에서 버스를 타고 먼지 날리는 길을 달려 청하로 와서 맞선을 보았다.
유월 하루를 버스에 흔들리며/동해로 갔다//선을 보러가는 길에/날리는 머리카락//청하라는 마을에 천희(千姬)/뭍에 오른 인어는 아직도 머리카락이 젖어있었다//왜, 인연이 맺어지지 않았을까/따지는 것은 어리석다, 그것이 인간사/지금도 청하라는 마을에는 인어가 살고 있다/칠빛 머리카락이 설레는 밤바다에는 피리소리가 들리곤 했다//지금도 유월 바람에 날리는 나의 백발에 천희가 헤엄친다/인연의 수심(水深) 속에 흔들리는 해초 잎사귀
-박목월, 「청하(淸河)」
해월 일행은 청하현에서 자고 다음날 내연산으로 들어갔다. 적멸암(寂滅庵)에서 저녁밥을 먹으며 묵고서 삼용추를 보고 선열대에 올랐다.
“외로운 연기가 석양에 오르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졌다. 적멸암 불당에 들어가 베개를 높이하고 누우니 바람과 냇물이 세차서 골을 울리는데, 바람소리가 울려 영롱한 음성이 되었다. 사람으로 하여금 뼈를 차게 하고 혼은 벌써 깨어나게 했다. 밤은 일경인데 달이 산봉우리에 걸렸고, 달그림자가 못 가운데에 떨어졌다. 성글게 돋아난 별이 빛나고, 은하수가 비껴 돌았다. 적막하여 한 마리 새도 울지 않으니, 참으로 산중의 절경이었다. 팔월 칠일 갑자. 잠든 객들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숲 끝에 이미 붉은 해가 걸렸다.”
“선열암(禪悅庵)이었다. 나는 발걸음이 비틀거렸지만 숙부는 월영대(月影臺)에서 지팡이를 짚고 오셨는데, 잠간 사이에 나를 따라 잡았다. (......) 가파른 서쪽에 백운암(白雲庵)이 있고, 층이 진 남쪽에 운주암(雲住庵)이 있다. (......) 삼용추는 말갈기의 한 물방울이었다. 관음굴은 교룡의 한 속눈썹이었다. 문수암은 개미굴이고, 보경사는 메추라기 둥지이었다. (......) 바다에는 만경창파가 넘실대고, 해와 달이 요동치며, 안개가 맑게 개었다. 우주가 광활하게 트여 참으로 장자 추수편에 나오는 강물의 신, 하백(河伯)이 바다를 처음 보고 놀라워하는 것과 같았다.(......) 나와 숙부가 옥처럼 밝게 읊조리고 그은 듯이 휘파람 부니 산이 울고 골이 메아리쳤다. 바람이 일고 계곡에 물이 넘쳐흘러 오래도록 정신이 상쾌하고, 몸이 가볍고, 눈은 천지에 비우고, 마음은 만물에 그윽하니, 스스로 그러함(自然)과 더불어 근원으로 돌아갔다. 때 마침 청하현감 조매당이 서찰을 부쳐 보냈다. 그 가운데에 근체 율시 한 수가 있어서 화답하기를 마치고, 따르는 승려로 하여금 머루술을 거르게 하니 빛깔이 매실간장 같아서 유리 같이 맑았다. 암자의 스님이 또한 나물밥을 갖추어 내왔는데 날은 저물려고 하였다.
-황여일, 「유내영산록(遊內迎山錄)」
그대가 가을산 속으로 들어가고,/가을산은 정말로 찾아 갈만 하여라./폭포는 바위 아래서 울고,/노송은 학 가에 그늘진다./시상(詩想)은 일천 가지 모습을 담고,/신선의 발걸음은 일만 고개를 넘는다./지은 시들 주머니에 모두 담고,/남는 것은 부쳐서 이 늙은이 크게 읊게 하시라.(君去秋山裏 秋山正可尋 泉流巖下咽 松老鶴邊陰 詩思籠千態 仙蹤度萬岑 奚囊收拾盡 餘寄老夬吟)
-조정간, 「원운 原韻」
옛날부터 듣던 호학산(呼鶴山) 풍경,/오늘에야 멀리서 찾아왔네./스님과 솔은 함께 늙어가고,/하늘은 골짝 따라 그늘진다./그대는 번거롭게 녹옥장(綠玉杖) 만들어 주고,/나는 흰 구름 고개를 넘는다./절경은 시로 다 읊기가 어렵지만,/바람을 맞으며 종일 시를 읊조린다.(昔聞鶴山景 今日遠來尋 僧與松同老 天隨壑共陰 煩君綠玉杖 度我白雲岑 絶勝難聲畫 臨風盡日吟)
*녹옥장(綠玉杖): 신선이 짚고 다닌다는 옥 지팡이. 청하현감 조정간이 읍성 동문 앞에서 황응청, 황여일과 송별하며 해월루 앞의 대나무를 잘라 만든 지팡이를 선물하였다.
-황응청, 「조매당의 시에 화답하여 차운하다 次酬趙梅堂」
갈선(葛仙)은 어제 벌써 떠나갔지만,/봉래산엔 가을이 다시 찾아왔네./구동(龜洞)은 노을이 오래되었고,/용담(龍潭)은 흰 해에 그늘진다./열두 폭포는 우레치고,/일천 봉우리는 칼과 창처럼 솟았다./조물주는 다함없이 갈무리하였고,/천지간의 나는 이렇게 읊조리네.(葛仙昨已別 蓬島秋更尋 龜洞丹霞古 龍潭白日陰 雷霆十二瀑 劒戟一千岑 造物藏無盡 乾坤我此吟)
*갈선(葛仙): 나부산에 머물던 포박자(抱朴子) 갈홍(葛洪)은 지방관이 편지를 보내 잡아도 그 전날 이미 떠나갔다고 함.
*구동, 용담: 내연산의 이칭이 신귀산(神龜山)이고 무풍계(舞風溪) 사자폭의 낙구암(落龜巖), 구연(龜淵)이 있는 골이 구동이고, 삼용추의 연산폭 아래 못이 용담임.
-황여일, 「조매당의 시에 차운하다 次趙梅堂韻」
해월은 ‘붉은 해가 솟아오르고, 흰 구름이 허리에 걸리는’ 선열대를 백운대로 개명하였다. 선열대는 삼용추에서 올려다보면 암봉이기에 선열봉이라고 하였고, 운주암이 있기에 운주봉(雲住峰)이라고도 하였으며, 속칭 기화봉(妓花峰)이다. 이곳에 머물던 시승(詩僧) 의민은 내연산의 이러한 풍경 속에서 출가 수행승으로 사는 내면 풍경을 시로 읊었다.
운주봉으로 붓을 삼고,/용추로 벼루를 만들어,/일만 겹으로 펼쳐진 바위 병풍에,/뜻 가는대로 나의 시를 쓰리라.(雲住峯爲筆 龍湫作硯池 巖屛開萬疊 隨意寫吾詩)
-의민, 「넋두리 自諷」
1571년 가을에 낙재(樂齋) 서사원의 양부(養父)인 연정(蓮亭) 서형이 내연산을 찾아와 바위벽에 붓글씨를 남기고 시와 유산록(遊山錄)을 남겼지만 임진왜란 때 원고가 불타버렸다. 한강(寒岡) 정구의 제자인 낙재는 1603년에 내연산을 찾아와 그 부친이 바위에 쓴 붓글씨 흔적을 이틀 동안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다. 낙재와 함께 내연산을 유산했던 청하 사람 윤락(尹洛)이 1605년에 가야산을 유산하고 돌아오는 길에 대구 금호강 가의 솔숲에 서재를 짓고 살던 낙재의 집을 찾아가 1571년 연정이 학연 스님의 시축에 차운한 시를 전해주었다.
송탄(松灘) 채응린과 낙재는 ‘달성십현(達城十賢)’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낙재는 퇴계의 제자였던 계동(溪東) 전경창, 채응린을 통하여 퇴계학을 계승하였고, 여헌 장현광, 정구와 함께 당시 대구‧경북 지역의 세 명유였다. 서형, 서식 형제, 채응린, 서사원 등은 금호강 가에 정자를 짓고 살며 교유하고, ‘강안문학(江岸文學)’을 꽃피웠다.
부생(浮生)의 심사는 인간 세상에 매여 있고,/망중한에 산을 찾아왔지만 한가하지 못하다오./다음날 돌아가는 길에 공연히 슬프게 바라볼 것인데,/다른 해 꿈속에서 산을 그리고 싶소.(浮生心事繫人間 忙裏尋山不是閒 明日歸途空悵望 他年幾作夢中山)
-서형, 「청하 내연산에 노닐며 학연(學衍) 스님의 시축에 차운하여 적다 遊淸河內延山 次題僧學衍詩軸」
선친이 돌아가시고 많은 해를 세간에 머물렀는데,/동해바다 노을 지는 골에서 옛날 한가함을 훔쳤네./근원을 찾아가도 선친의 유묵은 보지 못하고,/슬픈 눈물 허공에 뿌리고 산은 만첩이었다./선경에 노닌 계묘년을 손꼽아보니,/그동안 물과 구름 사이로 날아온 꿈이었다./어찌 오늘에야 솔숲 오두막 속에서 볼 줄을 알았겠는가,/바닷가 산에서 지은 선친의 시를 울며 보네.(見背多年住世間 東溟霞洞昔偸閒 窮源未見先遺墨 哀淚空揮萬疊山 屈指仙遊癸卯間 邇來飛夢水雲間 那知此日松窩裏 泣見先詩出海山)
-서사원, 「선친의 을사년 내연산 유산 운을 절하며 보고 피눈물 흘리며 엎드려 차운하다 乙巳拜見先君子遊內延韻 泣血伏次」
문장가 청성(靑城) 성대중은 자신의 벗이고 당대 문단의 어른인 현천(玄川) 원중거로부터 보경사의 오암(鰲巖) 의민(毅旻, 1710-1792) 스님과 농수(農叟) 최천익(崔天翼, 1712-1779) 진사는 영남 좌도(嶺南左道, 낙동강 동쪽의 영남 지방)의 위인들이라는 말을 들은 지 오래되었는데, 1783년에 흥해 군수로 부임해와 오암을 뵙고 보니 과연 듣던 것과 같았다고 하였다. 다만, 농수는 이미 고인이 되어 만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지만, 자신이 농수의 묘지명을 짓고, 오암의 문집에 서문을 쓰는 인연이 있음을 뜻깊게 생각하고 있다.
청성은 오암집의 서문에서 공자의 ‘회사후소(繪事後素)’ 예술론을 적용하여 그 시가 투박하다고 헐뜯는 사람들에게 변명하며 평하고 있다.
“시는 진실로 문장의 한 기교에 지나지 않으나 모든 문체의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시를 오직 기교나 꾸미는 것만으로 평을 할 수 없다. 논어에 ‘회사후소’라고 한 것처럼, 인품의 바탕이 아름다운 뒤에야 재능을 말할 수 있다. 스님을 이야기할 때, 풍만하고 후덕한 그 인품을 말하여야지 한갓 그 시만을 이야기할 수 없다. 삼용추가 웅장한 기세를 가진 내연산을 다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내연산을 보면 내연산의 주인인 스님의 인품을 알 수 있는데, 하물며 스님의 시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청하현 월포 오두촌(鰲頭村)에서 태어나 보경사 대비암에 머문 오암과 흥해군 용전리(龍田里)에서 탄생하여 향리로 일한 농수는 시를 주고받으며 성속을 초월하여 교유한 절친한 벗이었다. 농수는 두보처럼 죽어서도 제자의 꿈에 나타나 시고(詩稿)를 다듬었을 만큼 치열한 시혼을 가진 천재 시인이었다.
“틈이 나시거든 가을과 겨울 사이에 암자로 은혜로운 왕림을 한 번 하여 주오. 산 중 암자의 창가에 고요히 앉아 서로 시를 논하고 도를 강하면 몸이 쇠약해져 가는 이 노년에 쉬이 얻을 수 없는 좋은 인연이지 않아요.”
-오암이 농수에게 보낸 편지
천지에는 예와 이제 없건만,/인생은 비롯함과 마침이 있구나./묵묵히 자연의 이치를 관찰하니/시냇물에 떠 내리는 서리 맞은 단풍잎.(天地無古今 人生有始終 黙然觀物理 霜葉下溪楓)
-의민, 「가을 풍광을 읊음 諷吟秋光」
“가을 기운이 고결한 것을 살피고 배움의 발걸음이 진중하여 저를 찾아와 진리를 찾는 모범을 보여 주심에 구구히 감사함을 감당하지 못하겠소. 중추가 지났고 또 서리 맞은 단풍잎도 졌으니, 비록 세속의 삶에 골몰하여 그렇다 할지라도 맑게 노닐 연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오. 나뭇잎은 지고 산은 텅 비었는데, 어찌 시월 보름을 기다리겠소. 그 때가 되면 암자에도 재를 베푸느라 번거로워 평온한 대화가 방해될 듯하니, 열흘 여드레간에 신을 들메하고 소나무 사립문을 두드리면 응당 동자로 하여금 구름 깊은 산 속을 가리키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오암이 농수에게 보낸 편지
남녘 하늘 시월에 샛노란 국화 피었네,/이 매헌(梅軒)에 마음을 두니 흥이 참으로 풍요롭다./비바람 치는 밤에 벗과 마주하여 지새는 듯하고,/눈서리 내린 아침에 회포를 풀 것 같다./저정(滁亭)의 물색은 쓸쓸함이 더해가고,/팽택(彭澤)의 술잔은 적요하지 않다./분외(分外)의 시골 늙은이 왔다가 문득 취했으니,/성문을 나가면 마을 아이들 조롱을 사겠지.(南天十月黃花在 賴此梅軒興正饒 如對故人風雨夜 欲論懷抱雪霜朝 滁亭物色添蕭爽 彭澤杯樽不寥寂 分外村翁來輒醉 出城嬴得市兒嘲)
*매헌: 흥해군 관아 건물.
*저정: 구양수가 태수로 있을 때 지은 안휘성 저현의 취옹정.
*팽택: 도연명이 현령을 하다가 귀거래사를 남기며 사임했던 고을.
-최천익, 「관아의 국화를 읊조림 詠官菊」
선리(仙吏)의 매헌에 일찍이 국화 피어났으니,/기쁜 손님인양 대작하니 흥이 서로 풍요로웠다네./외로운 절개 서리에 맞서는 밤을 끔찍이도 어여삐 여기고,/남은 꽃잎 이슬에 젖는 아침을 가장 아꼈다./어질던 관리를 우러러하지만 천리나 멀고,/남긴 시 낭랑히 읊조리건만 구천은 적요하기만 하다오./떠도는 인생 팔십 인연은 얇기만 한데,/세상 밖 영령(英靈)은 나를 조롱하지나 마소.(仙吏梅軒曾有菊 喜賓對酌興相饒 偏憐孤節凌霜夜 崔愛殘葩浥露朝 敬慕甘棠千里遠 朗吟遺詔九泉寥 浮生八十塵緣薄 世外英靈莫我嘲)
*선리: 신선처럼 고상하고 깨끗한 아전.
-의민, 「농수의 국화 시 운에 거슬러 차운함 追次農叟菊韻」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산놀이 문화는 주자의 남악 형산(衡山) 축융봉 유산과 그 시문집인 남악창수집(南嶽唱酬集)의 전래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주자의 시, 「취하축융봉(醉下祝融峰)」은 애송되었다.
영남 퇴계학의 정맥을 잇는 대학자 대산(大山) 이상정이 영일현감으로 와서 1754년 3월에 농수, 오암과 어울려 내연산을 유산하였다. 그는 삼용추 위 계조암에서 논어 몇 장을 강의하고 오암이 머무는 대비암으로 가다가 비하대에 올라 암대의 이름을 물었다. 월영대(月影臺)라는 이름은 잊히고 기하대(妓賀臺)라는 속칭만 있었다. 대산은 주자의 시, 「취하축융봉」의 제4구 ‘朗吟飛下祝融峰’의 ‘비하’가 와전되어 ‘기하’가 되었을 것이라 하며 기하대를 비하대로 개명하였다. 이들은 대비암에서 시연(詩筵)을 열었다.
대산의 손자 이병원(李秉遠)이 청하현감으로 와서 농수집을 읽다가 65년 전에 있었던 이 사실을 알고 감격해 하며 조부의 시에 차운하였다. 그는 경주로 여행가는 벗인 봉화의 유학자 강필효(姜必孝)를 내연산에서 나오다가 만나 ‘大山先生命名 飛下臺’라는 글씨를 받아서 석공에게 비하대 바위에 새기도록 했다.
한 뜰 가득 솔과 회나무 그늘이 짙고,/ 천 길 벼랑 위 암자가 깊기만 하네./ 꽃은 한창피고 산새는 지저귀는데,/ 호젓이 종일토록 무심히 앉았다.(一庭松檜影陰陰 千仞岡頭佛院深 花事欲闌時鳥語 悠然終日坐無心)
-이상정, 「대비암에 올라서. 운을 부르는데 심자를 얻었다 上大悲庵 呼得深字」
암자 뜰은 깊고 깊어서 여름 나무가 그늘지고,/우연히 불경을 만나서 깊은 산에 이르렀네./절에는 예부터 관심이 없었고,/당시를 아득히 기억하자니 도심을 얻었다./동해 바닷가 봉우리들마다 땅거미가 묻어오고,/등불 아래 옛 부처님 모신 깊숙한 암자 하나 있다./여기서 신령스런 샘물은 그치지 않고 흘러가고,/유연히 냇가의 공자님 마음을 깨닫는다.(庭院沉沉夏木陰 偶逢經釋到山深 西林自古無端意 緬憶當年證道心 亂峯東畔欲斜陰 古佛燈明一院深 自是靈源流不舍 悠然會得在川心)
*논어 자한(子罕)편에, ‘공자님이 냇가에서 흐르는 물을 보시면서 말씀하시었다. “세월이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는도다!”(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라고 하였다.
-이병원, 「삼가 조부의 대비암 시에 차운하다 敬次王考大悲庵韻」
금강산으로, 시베리아로 가는 동해중부선 기찻길이 멀지 않아 열린다. 시인이 월포역(月浦驛)에서 내려 조경대에 올라 고래 떼를 보고, 혜공과 원효, 일연 스님이 머문 오어사(吾魚寺)의 황홀히 물든 단풍 숲을 찾아와 ‘범어(梵語)’를 토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사이펀>>(2017.4. 봄호))
사진1 겸재 정선, 내연삼용추도(호암미술관 소장)
사진2 내연산 선열대
사진3 내연산 삼용추 연산폭 배재경, 이형수, 김희준, 송진, 이효림, 강은교(뒷줄), 이종암(앞)
*김희준: 수필가. 1963년 영천 출생. 《포항문학》(1997)·《수필시대》(2014) 등단. 저서 『인문학의 공간 내연산과 보경사』(공저, 2015), 수필집 『눈 내리던 밤』(2017).
-계간 시 전문지 《사이펀》(2017년 봄호)
내연산의 시화(詩話)
김희준
시인 강은교와 소산 권정택
봄이 오면 기차를 탈 것이다/꽃그림이 그려진 분홍색 나무의자에 앉을 것이다/워워워, 바람을 몰 것이다//매화나무 연분홍 꽃이 핀 마을에 닿으면/기차에서 내려/산수유 노란꽃잎 하늘을 받쳐 들고 있는 마을에 닿으면/또 기차에서 내려/진달래 빛 바람이 불면/또또 기차에서 내려//봄이 오면 오랜 당신과 함께 기차를 탈 것이다/들불 비치는 책 한 권 들고/내가 화안히 비치는 연못 한 페이지 열어제치며//봄이 오면 요기저기 봄이 오면/당신의 온기도 따뜻한 무릎에 나를 맞대고/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여행을 떠날 것이다/은난초 흰 꽃커튼이 나폴대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광야로 광야로/떠날 것이다, 푸른 목덜미 극락조처럼 빛내며
-강은교, 「기차」
매화가 응향(凝香)을 뿌리는 주말에 범어사(梵魚寺)를 품은 금정산(金井山) 기슭에서 강은교 시인이 후학인 배재경, 이효림, 송진 시인들과 함께 보경사(寶鏡寺)가 있는 내연산(內延山)을 찾아왔다. 필자는 이종암 시인, 이형수 화백과 함께 시인 일행을 맞이하여 삼용추(三龍湫)를 거쳐서 선열대(禪悅臺)에 올랐다.
“청하(淸河)의 내연산은 바닷가의 명산이다. 소금강(小金剛)이라는 별칭이 있으니 나는 오매불망 가고 싶은 것이 오래다. 이제 너가 그곳의 주인이 되었고 나 또한 올해 양산(梁山) 군수 관직을 벗고서 작은 노새 한 마리를 사서 명승을 유람할 준비가 되었다(1748년). 너의 행정이 이루어질 내년 늦봄에 짧은 거문고를 싣고, 시낭(詩囊)을 매달고서, 너를 따라 삼동석(三動石)과 열두 폭포 경치 속에서 내가 시를 읊고 네가 화답하여 100편의 시를 읊어도 또한 시원치 않을 것이라고 산신령께 고하고 기다려라.”
청암정(靑巖亭)이 있는 봉화 닭실마을 사람 소산(小山) 권정택(1706-1765)이 1749년 단풍철에 청하현감으로 부임할 때 당숙이자 스승인 강좌(江左) 권만(1688- 1749)이 환송하며 백암(栢巖) 김륵(1540-1616)의 묘 앞에서 했던 말이다. 강좌는 내연산에 오기로 한 이듬해 봄이 오기도 전에 별세하고 말았다. 그는 단행본으로 유통되었던 황여일의 유내영산록(遊內迎山錄)을 읽고 내연산에 꼭 오고 싶어 하였다.
2. 삼동석과 삼용추
내연산의 상징 경관은 삼동석이고 대표 경관은 삼용추이다. <<어우야담>>을 지은 유몽인(1559-1623)은 금강산 표훈사에 머물 때 인조반정(1623) 소식을 들었고, 그해에 아들과 함께 서인의 무고로 처형됐다. 유몽인의 조카 홍문관 부제학 취흘(醉吃) 유숙(1564-1636)은 환갑의 나이에 동해 바닷가의 변방 청하현으로 귀양 와서 고희를 넘기고서야 풀려 날 수 있었다. 집안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나고 사람들은 외면했다. 그에게 위안을 준 공간은 내연산이었고, 시를 주고받으며 벗이 되어준 사람은 장자에 정통한 계조암의 덕경(德瓊), 황정경에 통달한 문수암의 설희(雪熙) 스님이었다. 두 스님은 야만의 땅으로 유배 갔던 당의 시인 한유, 유종원과 교유했던 태전(太顚), 호초(浩初) 스님과도 같았다. 취흘은 삼동석에 두 차례나 찾아가고 그 곁의 암자에서 묵으며 시를 남겼다.
높고 낮은 나무꾼들의 길이 맑은 계곡물을 둘러싸고,/절은 단풍 비단 숲가에 있다./스님과 뜬 구름은 지는 해로 돌아가고,/객은 호학산(呼鶴山)을 따라서 신선의 세계로 들어간다./천년의 삼동석이 새로운 얼굴을 만나고,/하룻밤의 등잔불 아래 대화에 숙세의 인연을 안다./종과 경쇠 소리 몇 번이나 어디서 일어나는가,/앞 봉우리가 지척인데 신선이 있다.(高低樵路繞淸泉 寺在丹楓錦繡邊 僧與浮雲歸落日 客從呼鶴入諸天 千年動石逢新面 一夜懸燈認夙緣 鐘磬數聲何處起 前峯咫尺有眞仙)
-유숙, 「동석암에 묵으며宿動石庵」
대학승 석전(石顚) 박한영(1870-1948)은 정인보, 최남선, 이광수, 이병기의 사우(師友)이고 김달진, 조지훈, 오장환, 김동리, 신석정, 서정주 등 한국 문단의 거장들을 제자로 양성했다. 석전은 ‘금강산의 구룡연(九龍淵), 철원의 삼부연(三釜淵) 폭포와 백중을 다투는 삼용추(三龍湫) 폭포가 있는 내연산에 오고 싶다.’고 하였다. 겸재 정선(1676-1759)은 이 세 폭포를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화폭에 모두 담았다. 호고와(好古窩) 유휘문(1773-1827)은 삼용추를 구룡연, 박연 폭포와 버금간다고 하였고, 우담(愚潭) 정시한은 삼용추가 금강산에도 없는 경치라고 하였다.
이처럼 경관이 수려한 내연산에서 불교와 유교 문명이 발달하며 인간 정신의 정화인 시문(詩文)이 창작되었다. 이 글에서는 내연산에서 빚어진 많은 시 중에서 사연이 깊은 것을 선별해 소개하고자 한다.
3. 원진국사 승형과 진각국사 혜심
내연산은 본래 종남산(終南山)으로 명명되었는데 의상대사가 유학하며 화엄학을 공부한 중국의 종남산에서 유래한다. 화엄 10찰에 드는 부석사, 범어사, 화엄사처럼 화엄종 사찰인 보경사도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적광전이 금당(金堂)이다.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지도한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의 제자인 원진국사 승형(承逈)은 이자현 거사의 춘천 청평사 문수원기를 읽고 능엄경의 중요함을 알고 보경사 주지로 있으면서 입적하는 순간까지 능엄경을 강의하였다. 한국불교사에서 능엄경을 천명한 것은 원진국사였다. 그가 입적한 뒤에 그 문도를 위하여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지은 지눌의 수제자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1234)이 보경사 적광전에서 설법을 하고 게송을 읊었다.
*강원[講院]의 교과편성: 사미과(沙彌科)는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사미율의(沙彌律儀)·치문경훈(緇門警訓)·선림보훈(禪林寶訓) 등, 사집과(四集科)는 도서(都序)·서장(書狀)·절요(節要)·선요(禪要)를, 사교과(四敎科)는 금강경·능엄경·원각경·기신론, 대교과(大敎科)는 화엄경·선문염송·전등록·선가귀감 등을 배움.
오늘 아침에 장맛비가 개어,/탁 트인 허공이 끝이 없구나./누가 말했던가, 보경(寶鏡)이 티끌에 묻혔다고/영원한 그 광명이 항상 세상을 비추는데.(今朝宿雨初晴 廓落太虛無際 誰云寶鏡埋塵 自有常光照世)
-혜심, 「구월 초이일에 보경사 원진국사 문도의 청으로 상당법문을 하고 스님이 읊은 게송
九月 初二日 寶鏡圓眞國師門徒請上堂 師云」
이 시에서 ‘보경’은 보경사의 절 이름에서 취한 것이다. 보경은 해나 달을 비유하는 말이다. 해와 달이 만상을 밝게 비추듯이 보경은 붓다의 진리나 불성의 메타포다.
4. 백운거사 옹몽진과 구암 이정
우리나라의 도연명을 자처하며 무릉도원을 찾던 문장가 백운거사 옹몽진(邕夢辰, 1518-1584/ 음성현감(1567-1573))이 청하현감으로 와서 내연산을 발견하였다. 그는 돌아가면서 경주부윤 귀암(龜巖) 이정(1512-1571)에게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오늘 아침 구름 안개 활짝 개어,/종일토록 냇물의 근원을 찾아 푸른 이끼를 밟았네./꽃과 버들 산에 가득한데 누가 있어 그 뜻을 헤아릴까?/한 줄기 계곡물, 바람과 달만이 홀로 서성이는 것을.(今朝雲翳豁然開 盡日窮源踏翠苔 花柳滿山誰會意 一川風月獨徘徊)
-이정, 「내영산에 노닐며 遊內迎山」
1562년 봄에 퇴계의 문인으로 명망이 높던 귀암이 내연산을 찾아왔다. 손작(孫綽, 314-371)이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를 지어 ‘선동(仙童)과 석자(釋子)의 굴택(窟宅)’이었던 절강성 바닷가의 천태산이 천하에 알려진 것처럼, 귀암이 찾아와 시를 짓자 동해안 내연산은 사대부 사회에 유산의 명산이 되었다. 진달래 피는 봄과 단풍이 고운 가을에 시인 묵객이 앞 다투어 내연산을 찾아왔다.
5. 회재 이언적과 돈재 성세창
청하현에는 해월루(海月樓)가 있고 내연산과 조경대(釣鯨臺)가 명승이었다. 1587년 8월 초순 해월(海月) 황여일(1556-1622)과 그의 숙부 대해(大海) 황응청은 울진에서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연꽃이 피고 배롱나무꽃 자욱이 빛나며 매화와 대나무가 심어진 청하현 해월루에 올라 친구인 매당(梅堂) 조정간의 환대를 받고 월포 조경대를 유람하였다.
명유 신재(愼齋) 주세붕(1495-1554)과 회재(晦齋) 이언적(1491-1553)의 기문과 글씨·그림·음악의 3절이었던 돈재(遯齋) 성세창(1481-1548)의 신묘한 필치의 편액이 걸린 해월루가 있어서 바닷가 궁벽진 작은 고을 청하현은 영남 칠십 고을에 이름이 났다. 열하일기에 버금가는 일본 통신사 여행기, 해유록을 남긴 당대의 문장가 청천(靑泉) 신유한(1681-1752)은 회재가 기문을 쓴지 3갑자가 지난 1723년에 바다에서 달이 휘황히 오른 밤에 누각에 올라 거문고를 타게 하고 시를 지으며 한바탕 풍류를 즐기고 기문을 남겼다. 10년 뒤에 겸재 정선이 현감으로 와서 그린 청하성읍도에 해월루가 등장한다. 또 10년이 지난 1742년에 경기관찰사 홍경보(1692-1745)는 소동파의 적벽부 탄생 11주갑을 기념하여 임진강 적벽에서 뱃놀이를 하며 청천과 겸재를 불러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게 했다.
박목월(1915-1978)은 젊은 날 경주 모량리에서 버스를 타고 먼지 날리는 길을 달려 청하로 와서 맞선을 보았다.
유월 하루를 버스에 흔들리며/동해로 갔다//선을 보러가는 길에/날리는 머리카락//청하라는 마을에 천희(千姬)/뭍에 오른 인어는 아직도 머리카락이 젖어있었다//왜, 인연이 맺어지지 않았을까/따지는 것은 어리석다, 그것이 인간사/지금도 청하라는 마을에는 인어가 살고 있다/칠빛 머리카락이 설레는 밤바다에는 피리소리가 들리곤 했다//지금도 유월 바람에 날리는 나의 백발에 천희가 헤엄친다/인연의 수심(水深) 속에 흔들리는 해초 잎사귀
-박목월, 「청하(淸河)」
6. 대해 황응청과 해월 황여일
해월 일행은 청하현에서 자고 다음날 내연산으로 들어갔다. 적멸암(寂滅庵)에서 저녁밥을 먹으며 묵고서 삼용추를 보고 선열대에 올랐다.
“외로운 연기가 석양에 오르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졌다. 적멸암 불당에 들어가 베개를 높이하고 누우니 바람과 냇물이 세차서 골을 울리는데, 바람소리가 울려 영롱한 음성이 되었다. 사람으로 하여금 뼈를 차게 하고 혼은 벌써 깨어나게 했다. 밤은 일경인데 달이 산봉우리에 걸렸고, 달그림자가 못 가운데에 떨어졌다. 성글게 돋아난 별이 빛나고, 은하수가 비껴 돌았다. 적막하여 한 마리 새도 울지 않으니, 참으로 산중의 절경이었다. 팔월 칠일 갑자. 잠든 객들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숲 끝에 이미 붉은 해가 걸렸다.”
“선열암(禪悅庵)이었다. 나는 발걸음이 비틀거렸지만 숙부는 월영대(月影臺)에서 지팡이를 짚고 오셨는데, 잠간 사이에 나를 따라 잡았다. (......) 가파른 서쪽에 백운암(白雲庵)이 있고, 층이 진 남쪽에 운주암(雲住庵)이 있다. (......) 삼용추는 말갈기의 한 물방울이었다. 관음굴은 교룡의 한 속눈썹이었다. 문수암은 개미굴이고, 보경사는 메추라기 둥지이었다. (......) 바다에는 만경창파가 넘실대고, 해와 달이 요동치며, 안개가 맑게 개었다. 우주가 광활하게 트여 참으로 장자 추수편에 나오는 강물의 신, 하백(河伯)이 바다를 처음 보고 놀라워하는 것과 같았다.(......) 나와 숙부가 옥처럼 밝게 읊조리고 그은 듯이 휘파람 부니 산이 울고 골이 메아리쳤다. 바람이 일고 계곡에 물이 넘쳐흘러 오래도록 정신이 상쾌하고, 몸이 가볍고, 눈은 천지에 비우고, 마음은 만물에 그윽하니, 스스로 그러함(自然)과 더불어 근원으로 돌아갔다. 때 마침 청하현감 조매당이 서찰을 부쳐 보냈다. 그 가운데에 근체 율시 한 수가 있어서 화답하기를 마치고, 따르는 승려로 하여금 머루술을 거르게 하니 빛깔이 매실간장 같아서 유리 같이 맑았다. 암자의 스님이 또한 나물밥을 갖추어 내왔는데 날은 저물려고 하였다.
-황여일, 「유내영산록(遊內迎山錄)」
그대가 가을산 속으로 들어가고,/가을산은 정말로 찾아 갈만 하여라./폭포는 바위 아래서 울고,/노송은 학 가에 그늘진다./시상(詩想)은 일천 가지 모습을 담고,/신선의 발걸음은 일만 고개를 넘는다./지은 시들 주머니에 모두 담고,/남는 것은 부쳐서 이 늙은이 크게 읊게 하시라.(君去秋山裏 秋山正可尋 泉流巖下咽 松老鶴邊陰 詩思籠千態 仙蹤度萬岑 奚囊收拾盡 餘寄老夬吟)
-조정간, 「원운 原韻」
옛날부터 듣던 호학산(呼鶴山) 풍경,/오늘에야 멀리서 찾아왔네./스님과 솔은 함께 늙어가고,/하늘은 골짝 따라 그늘진다./그대는 번거롭게 녹옥장(綠玉杖) 만들어 주고,/나는 흰 구름 고개를 넘는다./절경은 시로 다 읊기가 어렵지만,/바람을 맞으며 종일 시를 읊조린다.(昔聞鶴山景 今日遠來尋 僧與松同老 天隨壑共陰 煩君綠玉杖 度我白雲岑 絶勝難聲畫 臨風盡日吟)
*녹옥장(綠玉杖): 신선이 짚고 다닌다는 옥 지팡이. 청하현감 조정간이 읍성 동문 앞에서 황응청, 황여일과 송별하며 해월루 앞의 대나무를 잘라 만든 지팡이를 선물하였다.
-황응청, 「조매당의 시에 화답하여 차운하다 次酬趙梅堂」
갈선(葛仙)은 어제 벌써 떠나갔지만,/봉래산엔 가을이 다시 찾아왔네./구동(龜洞)은 노을이 오래되었고,/용담(龍潭)은 흰 해에 그늘진다./열두 폭포는 우레치고,/일천 봉우리는 칼과 창처럼 솟았다./조물주는 다함없이 갈무리하였고,/천지간의 나는 이렇게 읊조리네.(葛仙昨已別 蓬島秋更尋 龜洞丹霞古 龍潭白日陰 雷霆十二瀑 劒戟一千岑 造物藏無盡 乾坤我此吟)
*갈선(葛仙): 나부산에 머물던 포박자(抱朴子) 갈홍(葛洪)은 지방관이 편지를 보내 잡아도 그 전날 이미 떠나갔다고 함.
*구동, 용담: 내연산의 이칭이 신귀산(神龜山)이고 무풍계(舞風溪) 사자폭의 낙구암(落龜巖), 구연(龜淵)이 있는 골이 구동이고, 삼용추의 연산폭 아래 못이 용담임.
-황여일, 「조매당의 시에 차운하다 次趙梅堂韻」
해월은 ‘붉은 해가 솟아오르고, 흰 구름이 허리에 걸리는’ 선열대를 백운대로 개명하였다. 선열대는 삼용추에서 올려다보면 암봉이기에 선열봉이라고 하였고, 운주암이 있기에 운주봉(雲住峰)이라고도 하였으며, 속칭 기화봉(妓花峰)이다. 이곳에 머물던 시승(詩僧) 의민은 내연산의 이러한 풍경 속에서 출가 수행승으로 사는 내면 풍경을 시로 읊었다.
운주봉으로 붓을 삼고,/용추로 벼루를 만들어,/일만 겹으로 펼쳐진 바위 병풍에,/뜻 가는대로 나의 시를 쓰리라.(雲住峯爲筆 龍湫作硯池 巖屛開萬疊 隨意寫吾詩)
-의민, 「넋두리 自諷」
7. 연정 서형과 낙재 서사원
1571년 가을에 낙재(樂齋) 서사원(1550-1615)의 양부(養父)인 연정(蓮亭) 서형이 내연산을 찾아와 바위벽에 붓글씨를 남기고 시와 유산록(遊山錄)을 남겼지만 임진왜란 때 원고가 불타버렸다. 한강(寒岡) 정구의 제자인 낙재는 1603년에 내연산을 찾아와 그 부친이 바위에 쓴 붓글씨 흔적을 이틀 동안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다. 낙재와 함께 내연산을 유산했던 청하 사람 윤락(尹洛)이 1605년에 가야산을 유산하고 돌아오는 길에 대구 금호강 가의 솔숲에 서재를 짓고 살던 낙재의 집을 찾아가 1571년 연정이 학연 스님의 시축에 차운한 시를 전해주었다.
송탄(松灘, 松潭) 채응린과 낙재는 ‘달성십현(達城十賢)’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낙재는 퇴계의 제자였던 계동(溪東) 전경창, 채응린을 통하여 퇴계학을 계승하였고, 여헌 장현광, 정구와 함께 당시 대구‧경북 지역의 세 명유였다. 서형, 서식 형제, 채응린, 서사원 등은 금호강 가에 정자를 짓고 살며 교유하고, ‘강안문학(江岸文學)’을 꽃피웠다.
부생(浮生)의 심사는 인간 세상에 매여 있고,/망중한에 산을 찾아왔지만 한가하지 못하다오./다음날 돌아가는 길에 공연히 슬프게 바라볼 것인데,/다른 해 꿈속에서 산을 그리고 싶소.(浮生心事繫人間 忙裏尋山不是閒 明日歸途空悵望 他年幾作夢中山)
-서형, 「청하 내연산에 노닐며 학연(學衍) 스님의 시축에 차운하여 적다 遊淸河內延山 次題僧學衍詩軸」
선친이 돌아가시고 많은 해를 세간에 머물렀는데,/동해바다 노을 지는 골에서 옛날 한가함을 훔쳤네./근원을 찾아가도 선친의 유묵은 보지 못하고,/슬픈 눈물 허공에 뿌리고 산은 만첩이었다./선경에 노닌 계묘년을 손꼽아보니,/그동안 물과 구름 사이로 날아온 꿈이었다./어찌 오늘에야 솔숲 오두막 속에서 볼 줄을 알았겠는가,/바닷가 산에서 지은 선친의 시를 울며 보네.(見背多年住世間 東溟霞洞昔偸閒 窮源未見先遺墨 哀淚空揮萬疊山 屈指仙遊癸卯間 邇來飛夢水雲間 那知此日松窩裏 泣見先詩出海山)
-서사원, 「선친의 을사년 내연산 유산 운을 절하며 보고 피눈물 흘리며 엎드려 차운하다 乙巳拜見先君子遊內延韻 泣血伏次」
8. 오암 의민 스님과 농수 최천익
문장가 청성(靑城) 성대중(1732-1809, 1763 통신사 조엄 서기관, 1784 흥해군수)은 자신의 벗이고 당대 문단의 어른인 현천(玄川) 원중거(1719-1790, 1763통신사, 1770 송라도찰방 6개월)로부터 보경사의 오암(鰲巖) 의민(毅旻, 1710-1792) 스님과 농수(農叟) 최천익(崔天翼, 1712-1779) 진사는 영남 좌도(嶺南左道, 낙동강 동쪽의 영남 지방)의 위인들이라는 말을 들은 지 오래되었는데, 1783년에 흥해 군수로 부임해와 오암을 뵙고 보니 과연 듣던 것과 같았다고 하였다. 다만, 농수는 이미 고인이 되어 만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지만, 자신이 농수의 묘지명을 짓고, 오암의 문집에 서문을 쓰는 인연이 있음을 뜻깊게 생각하고 있다.
청성은 오암집의 서문에서 공자의 ‘회사후소(繪事後素)’ 예술론을 적용하여 그 시가 투박하다고 헐뜯는 사람들에게 변명하며 평하고 있다.
“시는 진실로 문장의 한 기교에 지나지 않으나 모든 문체의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시를 오직 기교나 꾸미는 것만으로 평을 할 수 없다. 논어에 ‘회사후소’라고 한 것처럼, 인품의 바탕이 아름다운 뒤에야 재능을 말할 수 있다. 스님을 이야기할 때, 풍만하고 후덕한 그 인품을 말하여야지 한갓 그 시만을 이야기할 수 없다. 삼용추가 웅장한 기세를 가진 내연산을 다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내연산을 보면 내연산의 주인인 스님의 인품을 알 수 있는데, 하물며 스님의 시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청하현 월포 오두촌(鰲頭村)에서 태어나 보경사 대비암에 머문 오암과 흥해군 용전리(龍田里)에서 탄생하여 향리로 일한 농수는 시를 주고받으며 성속을 초월하여 교유한 절친한 벗이었다. 농수는 두보처럼 죽어서도 제자의 꿈에 나타나 시고(詩稿)를 다듬었을 만큼 치열한 시혼을 가진 천재 시인이었다.
“틈이 나시거든 가을과 겨울 사이에 암자로 은혜로운 왕림을 한 번 하여 주오. 산 중 암자의 창가에 고요히 앉아 서로 시를 논하고 도를 강하면 몸이 쇠약해져 가는 이 노년에 쉬이 얻을 수 없는 좋은 인연이지 않아요.”
-오암이 농수에게 보낸 편지
천지에는 예와 이제 없건만,/인생은 비롯함과 마침이 있구나./묵묵히 자연의 이치를 관찰하니/시냇물에 떠 내리는 서리 맞은 단풍잎.(天地無古今 人生有始終 黙然觀物理 霜葉下溪楓)
-의민, 「가을 풍광을 읊음 諷吟秋光」
“가을 기운이 고결한 것을 살피고 배움의 발걸음이 진중하여 저를 찾아와 진리를 찾는 모범을 보여 주심에 구구히 감사함을 감당하지 못하겠소. 중추가 지났고 또 서리 맞은 단풍잎도 졌으니, 비록 세속의 삶에 골몰하여 그렇다 할지라도 맑게 노닐 연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오. 나뭇잎은 지고 산은 텅 비었는데, 어찌 시월 보름을 기다리겠소. 그 때가 되면 암자에도 재를 베푸느라 번거로워 평온한 대화가 방해될 듯하니, 열흘 여드레간에 신을 들메하고 소나무 사립문을 두드리면 응당 동자로 하여금 구름 깊은 산 속을 가리키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오암이 농수에게 보낸 편지
남녘 하늘 시월에 샛노란 국화 피었네,/이 매헌(梅軒)에 마음을 두니 흥이 참으로 풍요롭다./비바람 치는 밤에 벗과 마주하여 지새는 듯하고,/눈서리 내린 아침에 회포를 풀 것 같다./저정(滁亭)의 물색은 쓸쓸함이 더해가고,/팽택(彭澤)의 술잔은 적요하지 않다./분외(分外)의 시골 늙은이 왔다가 문득 취했으니,/성문을 나가면 마을 아이들 조롱을 사겠지.(南天十月黃花在 賴此梅軒興正饒 如對故人風雨夜 欲論懷抱雪霜朝 滁亭物色添蕭爽 彭澤杯樽不寥寂 分外村翁來輒醉 出城嬴得市兒嘲)
*매헌: 흥해군 관아 건물.
*저정: 구양수가 태수로 있을 때 지은 안휘성 저현의 취옹정.
*팽택: 도연명이 현령을 하다가 귀거래사를 남기며 사임했던 고을.
-최천익, 「관아의 국화를 읊조림 詠官菊」
선리(仙吏)의 매헌에 일찍이 국화 피어났으니,/기쁜 손님인양 대작하니 흥이 서로 풍요로웠다네./외로운 절개 서리에 맞서는 밤을 끔찍이도 어여삐 여기고,/남은 꽃잎 이슬에 젖는 아침을 가장 아꼈다./어질던 관리를 우러러하지만 천리나 멀고,/남긴 시 낭랑히 읊조리건만 구천은 적요하기만 하다오./떠도는 인생 팔십 인연은 얇기만 한데,/세상 밖 영령(英靈)은 나를 조롱하지나 마소.(仙吏梅軒曾有菊 喜賓對酌興相饒 偏憐孤節凌霜夜 崔愛殘葩浥露朝 敬慕甘棠千里遠 朗吟遺詔九泉寥 浮生八十塵緣薄 世外英靈莫我嘲)
*선리: 신선처럼 고상하고 깨끗한 아전.
-의민, 「농수의 국화 시 운에 거슬러 차운함 追次農叟菊韻」
9. 대산 이상정과 소암 이병원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산놀이 문화는 주자의 남악 형산(衡山) 축융봉 유산과 그 시문집인 남악창수집(南嶽唱酬集)의 전래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주자의 시, 「취하축융봉(醉下祝融峰)」은 애송되었다.
영남 퇴계학의 정맥을 잇는 대학자 대산(大山) 이상정(1711-1781)이 영일현감으로 와서 1754년 3월에 농수, 오암과 어울려 내연산을 유산하였다. 그는 삼용추 위 계조암에서 논어 몇 장을 강의하고 오암이 머무는 대비암으로 가다가 비하대에 올라 암대의 이름을 물었다. 월영대(月影臺)라는 이름은 잊히고 기하대(妓賀臺)라는 속칭만 있었다. 대산은 주자의 시, 「취하축융봉」의 제4구 ‘朗吟飛下祝融峰’의 ‘비하’가 와전되어 ‘기하’가 되었을 것이라 하며 기하대를 비하대로 개명하였다. 이들은 대비암에서 시연(詩筵)을 열었다.
대산의 손자 소암(所庵) 이병원(李秉遠, 1774-1840)이 청하현감으로 와서 농수집을 읽다가 65년 전에 있었던 이 사실을 알고 감격해 하며 조부의 시에 차운하였다. 그는 경주로 여행가는 벗인 봉화의 유학자 강필효(姜必孝, 1764-1848)를 내연산에서 나오다가 만나 ‘大山先生命名 飛下臺’라는 글씨를 받아서 석공에게 비하대 바위에 새기도록 했다.
한 뜰 가득 솔과 회나무 그늘이 짙고,/ 천 길 벼랑 위 암자가 깊기만 하네./ 꽃은 한창피고 산새는 지저귀는데,/ 호젓이 종일토록 무심히 앉았다.(一庭松檜影陰陰 千仞岡頭佛院深 花事欲闌時鳥語 悠然終日坐無心)
-이상정, 「대비암에 올라서. 운을 부르는데 심자를 얻었다 上大悲庵 呼得深字」
암자 뜰은 깊고 깊어서 여름 나무가 그늘지고,/우연히 불경을 만나서 깊은 산에 이르렀네./절에는 예부터 관심이 없었고,/당시를 아득히 기억하자니 도심을 얻었다./동해 바닷가 봉우리들마다 땅거미가 묻어오고,/등불 아래 옛 부처님 모신 깊숙한 암자 하나 있다./여기서 신령스런 샘물은 그치지 않고 흘러가고,/유연히 냇가의 공자님 마음을 깨닫는다.(庭院沉沉夏木陰 偶逢經釋到山深 西林自古無端意 緬憶當年證道心 亂峯東畔欲斜陰 古佛燈明一院深 自是靈源流不舍 悠然會得在川心)
*논어 자한(子罕)편에, ‘공자님이 냇가에서 흐르는 물을 보시면서 말씀하시었다. “세월이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는도다!”(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라고 하였다.
-이병원, 「삼가 조부의 대비암 시에 차운하다 敬次王考大悲庵韻」
금강산으로, 시베리아로 가는 동해중부선 기찻길이 멀지 않아 열린다. 시인이 월포역(月浦驛)에서 내려 조경대에 올라 고래 떼를 보고, 혜공과 원효, 일연 스님이 머문 오어사(吾魚寺)의 황홀히 물든 단풍 숲을 찾아와 ‘범어(梵語)’를 토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사이펀>>(2017.4. 봄호))
-2018.1.9. 문향 강의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