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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紫木蓮)
七月紫木蓮(칠월자목련)-칠월에 핀 자목련(紫木蓮)이
旅客步停留(여객보정류)-나그네 발길을 멈추게 한다
面淤血紫色(면어혈자색)-얼굴에 멍든 자주빛
春秋經生痕(춘추경생흔)-세월속 삶의 흔적이런가?
농월(弄月)
피멍든 자목련(紫木蓮)앞에 적막한 침묵 홍난파(洪蘭坡) !
오늘 하남시에 있는 홍난파(洪蘭坡) 생가(生家)를 답사하였다.
일탈(逸脫) !
계획 없이 훌쩍 떠난 길
사실은 사전 계획 없이 갑자기 마음을 내킨 것은 남이장군 묘를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남이장군 묘를 답사하고 시간이 남아 인터넷을 검색을 하니까
홍난파(洪蘭坡) 생가(生家)가 있었다.
난파(蘭坡) 홍영후(洪永厚) !
“울밑에선 봉선화야~~”등 한국 가곡의 싹이 트는 시기(發芽期)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슈베르트,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이름아래
주옥같은 124곡을 출반한 음악인이다.
홍난파(洪蘭坡)는 시대의 경계선에서 우리의 가슴에 새겨진 음악인임을 다 알고 있고 학생시절 가곡과 명성이 귀가 아플 정도로 익숙한 인물이기 때문에
필자가 새삼스레 서툰 글로 홍난파(洪蘭坡)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야말로
진부(陳腐)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 “홍난파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쓰지 않고,
![](https://t1.daumcdn.net/cfile/cafe/2572D633597695B434)
“홍난파(洪蘭坡) 생가(生家)”를 답사한 소감을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말하고자
한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홍난파(洪蘭坡) 생가(生家)”는 폐가(廢家)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필자가 농촌 태생이고 청년시절까지 초가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초가집”에 대하여 잘 안다.
1986년에 생가(生家)를 복원(復元)하였다고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는데
31년 동안에 볏짚으로 덮는 지붕 이응을 몇 번이나 갈았는지 의심스럽다.
사진에서 보면 처마 끝이 처져있고 제일 위에 덮는 용마름 밑이 내려 꺼져
있는 것을 보면 이응으로 지붕을 덮은 지가 4~5년은 될 것 같다.
초가집 지붕 이응은 매년 갈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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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되고 사람의 손길이 가지 않은 울타리를 보면 더욱 폐가(廢家)의 느낌이 들
정도로 처량하다.
다행이 이름 모를 초록빛 넝쿨식물이 울타리를 타고 올라가 그나마 녹색 잎으로
폐가(廢家)의 모습에 색칠한 자연미를 주고 있다.
울타리 안팎과 뒤꼍에는 사람의 손길이 가지 않은 잡초가 무성하고
축담(址臺)과 방 부엌 등에는 먼지투성이고 개나 짐승들이 돌아다닌 흔적이 역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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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洪蘭坡) 생가(生家)”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蘭坡 洪永厚 선생 태어난 옛터”라고 1970년에 쓴 검은 대리석 비석의
경기도 지사의 비문(碑文)과 “난파 홍영우 생가”의 안내판이다.
홍난파(洪蘭坡)의 사진들도 초가집과 어울리지 않게 어색하고 무성의하게 걸려있다.
퇴색되어 지저분한 것을 필자가 더러운 부분은 삭제하고 깨끗한 부분만
편집한 것이다.
참 놀라운 것은 “난파(難坡) 홍영후(洪永厚)님을 추모(追慕)하며” 라는 시(詩)다.
시(詩) 제목에 홍난파(洪蘭坡)를 “난파(難坡)”로 써놓은 것이다.
호(號)의 글자를 이렇게 잘못 쓴 것은 큰 무례(無禮)다.
1986년 생가(生家) 복원(復元)무렵에 썼다고 추정하면 무려 31년 동안을 이 추모시를 쓴 사람이 한번도 “홍난파(洪蘭坡) 생가(生家)”를 다시 찾지 않았다는 증거다.
만일 다시 찾았다면 “난파(蘭坡)”를→ “난파(難坡)”로 잘못 쓴 것을 알았을 것이다.
홍난파(洪蘭坡)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난파(難坡)”로
일부러 썼단 말일까?
정말 모르고 쓴 것일까?
“난파(蘭坡)”는 “난(蘭) 꽃이 피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호(號)다.
홍난파(洪蘭坡) 아버지 홍준(洪埻)은 국악에 조예가 깊었다는 기록이 있다.
차남인 홍영후(洪永厚-홍난파)는 앙금 연주를 잘했다고 한다.
음악을 좋아한 부친이 어렸을 때에 아호(雅號)로 장남은 금파(錦坡),
차남은 난파(蘭坡)로 지어 주었다.
또
“난파(難坡) 홍영후(洪永厚)님을 추모(追慕)하며”라는 제목 밑에
송홍만(宋弘萬) (한국문인협회 시인, 법무사)
라고 크게 쓰여 있다
모두 79행의 긴 문장의 추모시다.
이것은 필자의 주관적 생각이지만
시(詩)나 수필 소설을 쓴 것을 보면 으레 “시인이나 글 쓰는 사람”임을 안다.
추모 시에 스스로가 “한국문인협회 시인”이다라고 강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심지어 추모시(追慕詩)에 자기 직업까지 “법무사”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게 추모시(追慕詩)인지 자기 신분과 직업 선전용인지 의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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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문인(文人)이다.
붓글씨를 잘 쓰셨기 때문에 전국명소에 현판이나 돌(石)에 쓴 글씨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관동8경(關東八景)의 하나인 강원도 고성의 “청간정(淸澗亭)”이다.
글씨의 말미(末尾)에 낙관(落款)을 찍는 곳에 반드시 “대통령 이승만”이라 쓰지 않고 호(號)인 “우남(雩南)”이라고 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시(漢詩)를 200여수 넘게 지으셨다.
독립운동하다 옥중에서 쓴 시집인 “체역집(替易集)”에는 120수의 한시가 있다.
필자가 다 읽어 보았는데 “우남(雩南)”으로 되어 있다.
노자(老子) 45장에 충고하기를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대직약굴 대교약졸 대변약눌)
정말 곧은 것은 굽은 듯하고, 큰 정교함은 졸렬하고 서투른 듯하고,
큰 말씀은 어눌한 듯하다
고 하였다.
또 우리 속담에
谷穗越盈 垂地越低(곡수월영 수지월저)
벼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半瓶水晃蕩 满瓶水不响(반병수황탕 만병수불향)
반쯤 찬 병의 물은 흔들리고, 가득 찬 병의 물은 출렁이지 않는다.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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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cafe/2536A833597698DE07)
“홍난파(洪蘭坡) 생가(生家)”에 대한 선입감(先入感) 때문인지는 몰라도
생가(生家)를 중심으로 “개망초”꽃이 많이 피어 있어 더욱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개망초”는 우리나라에 자생한 산야초(山野草)가 아니고 미국이나 유럽이 원산지라고 하였다.
1991년 7월 3일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6.25전쟁 이후 미군 군수물자에 묻어 들어온 씨앗이 번져 한반도 전역에 개망초가
퍼졌다고 하였다.
1957년 8월 13일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개망초”를 “왜풀(倭草)”이라고 한다.
이방(異邦)에서 귀화(歸化)해온 식물인데 처음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로 이주해 왔던
까닭에 일본 세력과 같이 들어온 식물이기 때문에 “왜(倭)”자가 붙여진 모양이다.
그러나 원산지는 구라파이며 미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고 하였다.
개망초가 우리국민에게 나쁜 인상을 주는 “구전(口傳) 된” 속설에는
1905년 11월 17일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제로 체결될 때 이 꽃이 갑자기 퍼지기 시작해 나라를 망하는 꽃이라 하여 망초(亡草)라 불렸고
그것도 제대로 된 망초(亡草)가 아니라 “개망초”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외국 학명으로 “개망초(Annual fleabane)”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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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cafe/21ACAE33597696FA2E)
특이한 것은 “홍난파(洪蘭坡) 생가(生家)”앞에 늙은 자목련(紫木蓮)이다.
나는 자목련(紫木蓮)인줄 몰랐다.
백목련이든 자목련이든 3월경에 일찍 피는 꽃이다.
들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일부러 찾아가서 물었더니 자목련(紫木蓮)이라 하였다
3월과 7월에 두 번 피는 것이 희한(稀罕)하다고 하였다.
어쩌면 관리가 제대로 안된 “홍난파(洪蘭坡) 생가(生家)”를 보고 상한 마음에 피멍이든 가슴앓이 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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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화 된 농촌이지만 역시 농촌풍경은 목가적(牧歌的)이고 정신적 힐링(healing)이다.
오랜만에 참깨 꽃을 보았다.
오이넝쿨
애기 업은 옥수숫대
도시에서 핀 것과 다른 느낌을 주는 해바라기
30도 넘는 더위 속에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시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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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부터 집이 적은 동네였는지
세월이 변하면서 도시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였는지는 몰라도
멀리서 보이는 “홍난파(洪蘭坡) 생가(生家)”가 이웃도 없이 더욱 쓸쓸해 보인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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