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의 2014년 2월 섬여행은 제24강으로 통영 한산도의 아름다운 솔숲길과 몽돌해변이 아름다운 추봉도를 찾아갑니다. 2월 8(토)~9(일)일의 1박2일 일정입니다. 한산도는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주둔했던 곳이라 많이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섬이지만 한산도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제승당 한 곳만 둘러보고 떠나기 때문입니다. 한산도에는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아늑한 이십 리 솔숲길이 있습니다. 또 섬은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원형의 섬입니다. 또 추봉도는 포로수용소가 있던 역사의 섬이기도 하지만 해변 길에서 보는 한려수도의 비경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유난히 추운 겨울, 따뜻한 남국으로 떠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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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처럼 아련한 한산도 바다의 일출 ⓒ이상희 |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014년 2월 답사지인 한산도와 추봉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한산도] 인간 이순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길가차없는 탈영병 처형이순신은 도망치다 잡혀온 수군들을 처형한다. 군율을 엄하게 하는 것은 병사들을 전장에 붙들어두기 위한 고육책이다. 병사들을 전장에 머물게 하는 것은 애국심이 아니다. 공포다. 적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난중일기>에 적의 수급을 베어낸 기록만큼이나 탈영병의 목을 베었다는 언급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전장의 안과 밖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
무능하고 물정 모르는 임금은 그저 "급히 적들의 돌아갈 길목으로 나가서 물길을 끊고 도망치는 적을 몰살하라" "부산으로 가서 돌아가는 적들을 무찌르라"는 뜬구름 같은 교서만 내릴 뿐 군사나 무기를 보내주지 않는다. 제 한 목숨 보전에도 급급한 왕에게 전장에 보낼 지원군이나 무기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전쟁 시작 20일도 못 되어 도성을 왜적에게 빼앗기고 도주한 무능한 조정. 전쟁의 와중에서도 부패한 관리들의 욕망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명나라 고관 송응창이 보낸 불화살 1,530개를 나누지 않고 혼자 독차지하려 하고" 남해 부사 기효근은 "배 안에 어린 색시를 싣고 다니며 남이 알까 두려워한다"고 이순신은 탄식한다.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고 놀기까지 하니 그 사람됨은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고 한심스런 지경이다."
이순신 혼자서 아무리 군율을 엄하게 한들 이탈해 가는 민심을 막을 도리가 없다. "옥과의 향소에서 지난해부터 수군을 잡아서 보내는 일을 성실히 하지 않아서 도피자의 수가 거의 100여 명이다."
징집된 백성이 무능한 나라의 군대를 피해 달아나는 것은 살기 위함이다. 죽음을 무릅쓴 탈주. 죽음의 공포보다 강한 것이 생에 대한 애착이다. 전란이 일어나자 임금과 관리들은 제 살길을 찾아가버리고 백성들만 사지(死地)로 내모는 나라. 백성들이 그런 나라에 목숨을 내놓지 않으려 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전쟁 중에는 탈영병만이 아니라 포로가 되어 왜군에게 협조한 백성들도 많았다. 백성이란 본래 그런 것이 아니다. 나라가 백성의 보호자가 아니라 수탈자였으니 그런 것이다. 나라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고마운 대상이 아니었으니 그런 것이다. 나라는 왕과 양반들의 나라였지 미천한 백성들의 나라는 아니었다.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나라나 왜적이나 다 같은 약탈자였다.
백성들이 의병에 가담해 왜적과 맞서 싸운 것 또한 왕조와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왜적의 만행이 너무도 가혹해서였다. 나라는, 임금은, 조정은, 양반 지배세력은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난 후에도 결코 그런 백성의 뜻을 알지 못했다. 전란 뒤 백성들은 더 이상 임금과 조정과 양반들을 두려워하지도 신뢰하지도 않게 됐다. 그러므로 후일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과 조정이 남한산성에 갇히게 됐을 때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수수방관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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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배는 혹시 피안으로 가는 반야용선이 아닐까. ⓒ섬학교 |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기까지 한' 전쟁1592년(선조 25년) 7월 7일, 전라우수사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의 부대와 합류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군의 배 70여 척을 격파하고 불태우는 대승을 거둔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1593년 수군의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다.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오니 나그네 생각이 어지럽다. 홀로 배 뜸 밑에 앉았노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전에 비치고 정신도 맑아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덧 닭이 울었다."(<난중일기> 1593.7.15)
"원 수사의 음흉하고 간흉함이 대단했다."(1593.7.28)
1592년 4월 시작된 왜군의 침략으로 조선 반도는 7년간 고통이 극에 달한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1592년(선조 25년) 1월 1일부터 정유재란이 끝나가던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간의 기록이다. 마지막 일기를 쓴 이틀 후에 이순신은 절명한다.
옥포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한산도해전까지 해전에서는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이순신이었지만 육상의 패전 소식에는 속수무책이었다. 1593년 6월 29일 10만의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른바 2차 진주성 싸움. 1592년 10월의 1차 진주성 싸움 때는 3,800여 조선군과 성민들이 왜군 3만과 싸워서 승리했다. 하지만 2차 진주성 싸움의 결과는 참혹했다. 성이 무너지자 왜군들은 성안에 남아 있던 6만여 명의 조선 백성들을 창고에 몰아넣고 모조리 불태워 죽였다.
전쟁이란 그토록 무참한 것이다. 평화의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모두가 시대의 행운아들이다. 그 행운의 고마움을 모르고 전쟁을 마치 아이들 공놀이나 되는 양 떠드는 자들이 이 나라에는 아직도 많다. 악마가 존재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악마다.
임진왜란은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리고 총에 맞아 죽고, 불태워져 죽고, 굶어 죽고, 죽고, 죽고.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기까지 한' 전쟁이었다. 전쟁의 와중에 사람은 없다. 전쟁은 사람이 아니라 '병사'들이 하는 것이다. 전쟁에는 이쪽 사람도 저쪽 사람도 없다. 오로지 적군과 아군만 실재한다. 적을 이롭게 하면 아군도 적이 된다.
"훈도를 처형했다."
"도망병을 처형했다."
처형하고 또 처형해도 처형당할 자들은 넘쳤다. 전쟁터에 사람이 설자리는 없다. 대체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경계란 무엇인가. 이순신 또한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고뇌했다. 적과 탈영병을 가차 없이 처형하고서는 어머니와 자식들 걱정에 날을 새고 또 병사들의 고통에 눈물 흘렸다. 전장은 죽음과 삶의 경계였다.
"미역 60동을 따왔다. 군관 정사립이 왜인의 목을 베어 가지고 왔다."(1594.3.23)
"송한령이 대구 10마리를 잡아 왔다."(1594.11.5)
"견내량의 군사방어선을 넘어서 고기잡이를 한 어부 24명을 잡아다 곤장을 때렸다."(1594.11.12)
"이날 청어 40두릅을 곡식과 바꾸어 사려고 이종호가 받아 갔다."(1595.11.21)
바다는 죽음의 바다이면서 삶의 바다이기도 했다. 둥둥 떠다니는 적군과 아군의 시체가 물고기와 조개의 먹이가 되는 바다. 그 바다에서 병사들은 동료들의 살을 먹고 자란 조개와 전복을 따고 물고기를 잡아다 굽고 국을 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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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더없이 평화롭고 호수처럼 잔잔한 한산도 바다 ⓒ섬학교 |
"머리는 가려웠고 심사는 외로웠다"이순신은 불안한 자신의 앞날과 어지러운 심사를 점술에 기대기도 했다.
"장님 임춘경이 와서 내 운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1597.5.11)
"선홍수가 와서 원균의 점을 쳤는데, 첫 괘가 수뢰(水雷) 둔(屯)인데 천풍(天風) 구(女后)로 변했으니 본체를 이기는 것이라 크게 흉하다고 했다."(1597.5.12)
감지 못한 머리는 늘 가려웠다.
"다락에 기대어 저녁나절을 보냈는데 심회가 언짢았다. 머리를 꽤 오랫동안 빗었다."(1596.3.25)
"닭이 운 뒤 머리가 가려워 견딜 수 없었다. 사람을 불러 긁게 했다."(1594.8.5)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과 부하 군관들에 대한 증오를 자주 토로하기도 하고 첩의 부정을 꿈에 보기도 했다. 이순신에게는 정실부인 상주 방씨 외에도 해주 오씨와 부안댁 두 사람의 첩이 더 있었다.
이순신은 "초 1일 한밤중에 꿈을 꾸었는데, 나의 첩(부안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로 따져 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다. 꿈이지만 내쫓아 버렸다." 현실의 불안이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순신 또한 사랑을 잃을까 노심초사 하고 질투심에 몸을 떠는 외로운 사내였다."나라가 위급함에 처해 있는데 남해 부사 기효근이 어린 색시를 싣고 다니며 논다"고 분노하던 이순신 또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술을 마시고 시를 읊고 수시로 여인들을 품었다.
"이날 밤, 으스름 달빛이 다락을 비치는데 잠을 들지 못하고 시를 읊으며 밤을 지새웠다."(1595.8.15)
"이날 달빛은 대낮 같고 바람 한 점 없는데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이 심란했다. 잠을 이루지 못해 신홍수를 불러 퉁소를 듣다가 밤 10시경에 잠들었다."(1596.1.3)
"개(介)와 함께 잤다."(1596.3.9)
"국화 떨기 속에 들어가서 술 두어 잔을 마셨다. 여진(女眞)과 잤다."(1596.8.8)
"광주 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술에 취했다. 최철견의 딸 귀지(貴之)가 와서 잤다."(1596.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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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루(戌樓)에 앉으면 이순신 장군의 시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섬학교 |
기적은 없다이순신은 누구보다 원칙에 충실한 관리였다. 훈련원 봉사로 재직할 당시 자신의 상관인 병조정랑 서익의 인사 청탁을 거절했다가 후일 서익의 보복을 받았다. 고흥의 발포 만호로 재직 중 이순신은 서익의 모함으로 파면당했다. 먼 친척이었던 율곡이 한번 찾아오라는 제의도 거절했다. 1691년 2월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로 부임 한 뒤에도 원칙에 따라 모든 일을 처결했다.
이순신이 전투마다 승리를 거둔 것은 운이나 기적이 아니라 원칙의 승리였다. 왜군의 침략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으나 무능한 조정과 부패한 관리들은 임무에 태만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병사들에게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시키고 총포 등 무기를 확충하고, 전함을 새로 만들거나 수리하고 거북선을 건조했다. 이러한 일들은 전쟁을 앞둔 군 지휘관이면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었다.
이순신은 해야 일들을 마땅히 했으나 다른 관리와 지휘관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전쟁에서의 승패를 갈랐다. 평상이든 전장이든 기적은 없다. 준비가 기적을 만든다. 하지만 전란을 겪고서도 조정과 관리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송사가 진행 중인데 술과 첩, 심지어 자신의 딸까지 상납해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관리도 있었다. 그에 대해 이순신은 단호했다.
"이른 아침 조계종(趙繼宗)이 현풍 수군 손풍련에게 소송을 당한 결과 마주 대면하고 공술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가 갔다."(1596.2.20)
"날이 어두워질 무렵 영등 조계종이 소실을 데리고 술을 들고 와서 마시기를 권했다." (1596.2.20)
"밤 9시가 지나서 영등 조계종이 그의 딸을 데리고 술병을 들고 왔다고 하는데 만나지 않았다. 11시가 넘어서 돌아갔다."(1596.3.23)
전란 중에도 조정은 여전히 부패한 자들의 잔치판이었다. 이순신의 절망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듯하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다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장차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야말로 둘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인가." (1597.5.21)
한산해전 승리는 거북선이 아니라 판옥선의 힘한산도는 조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곳이다.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는 이순신 장군(1545-1598)이었는데 경상·전라·충청도 3도의 수군 총사령관이었다. 1593년(선조 26) 8월 임진왜란 중에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1597년 2월, 파직될 때까지 한산도에 주둔했다. 7년 전쟁 중 3년 8개월을 한산도에 머물렀으니 섬은 가히 장군의 섬이라 이를 만하다.
현재 섬에는 제승당, 영당, 충무사, 수루, 한산정 등의 건물이 있지만 이순신 장군 당시에 지은 것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 진영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타 폐허가 돼버렸다. 왜군의 수중에 넘어갈 것을 우려한 조선 수군이 퇴각하면서 소개시켜버린 때문이다. 영조 15년(1739년)에 이르러서야 107대 조경 통제사가 운주당 옛터에 다시 건물을 세우고 제승당(制勝堂)이라 이름 지었다. 운주당이란 이순신 장군이 가는 곳마다 기거하던 곳을 편의상 부르던 이름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 진(陣)을 친 이후 늘 이 집에 기거하면서 참모들과 작전회의를 했다 한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머무는 동안에는 큰 전투가 없었다. 세력균형 상태가 지속됐다. 당시 한산도에는 판옥선 150여 척이 있었고 1만5천-2만 명 정도의 수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승당의 수루에서는 한산도 앞 바다를 지나가는 배들을 환히 다 볼 수가 있다. 하지만 그 배들에서는 한산도 진영을 엿볼 수가 없다. 해갑도란 섬이 가로막고 있어서다.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
이순신 장군이 시름하던 수루(戌樓)는 정자만 하나 딸랑 지어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난중일기에 수루에 도배를 했고 잠을 잤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망루뿐만 아니라 숙직할 수 있는 방도 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루는 한산도뿐만 아니라 전국의 군사기지 어디에나 있던 망루다. 그래서 과거에는 군에 가는 것을 수자리 살러간다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되는 <한산도가(閑山島歌)>는 1592년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서 지은 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지학 전문가이자 <한산도가>의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이종학 전 독도박물관장은 "장군이 1597년 보성 열선루에서 한산도를 바라보며 지은 한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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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수가 공을 이루려면 만 사람의 뼈가 마른다." ⓒ섬학교 |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왜군의 보급창고가 될 곡창지대 호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조선 수군은 경상도 바다에서 왜군을 막아내야 했다. 호남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는데 한산도는 적지였다. 초대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을 여수가 아니라 통영의 한산도에 두게 된 전략적 이유다.
선조 25년(1592년) 7월 8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 등과 연합해 왜군에 맞선다. 조선수군이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의 전함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군을 유인할 전략을 세운다. 조선의 판옥선(板屋船)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하도록 했다. 이에 적선들이 쫓아 나오자 조선 수군은 견내량을 빠져나와 도망치는 척하다가 왜군 함대가 한산도 앞바다에 도착할 즈음 갑자기 학익진을 펼치고 대포를 쏘아대며 왜적을 초토화시켜버렸다.
한산도 전투에서 왜군 대장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554-1626)였다. 육전에서 그는 3천 병사로 용인을 수비하던 중 전라감사 이광이 이끄는 조선군 5만의 공격을 받지만, 야간에 기습공격 하여 패주시킨 맹장이었다. 또 정유재란 때인 1597년 7월에는 도도 다카토라와 함께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역습해 섬멸시켰던 자다.
임진왜란 당시 함포는 조선이 절대적인 우세였다. 하지만 화약에 불을 붙여 철환을 날리는 함포 공격은 다시 포를 쏘는 데까지 중간 간격이 너무 길었다. 전함 숫자가 적은 조선으로서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와키자카는 조선수군이 일자진을 펼칠 거라 예상했고 그래서 전함 숫자가 월등한 자신들이 일자진을 깨버리고 포위해 들어가면 승리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한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이순신은 일자진이 아닌 학익진을 펼쳤다. 학익진은 본래 육전에서 발전한 진법이었는데 이순신은 이를 해전에 응용했다.
학익진과 함께 조선 수군이 한산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원동력은 판옥선의 존재였다. 판옥선은 직사각형 모양의 평저선(바닥이 평평한 배)이다. 한산해전뿐만 아니라 옥포, 당포, 부산포해전 등에서 활약한 전함도 거북선 3척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조선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이었다. 거북선은 적의 지휘선을 공격하고 적 함대의 전열을 흩뜨리는 기동 돌격대의 역할을 했고 실제 전투는 판옥선이 담당했다.
오랫동안 조선 전함은 평선(平船)인 맹선이었는데 왜선의 규모가 커지고 화력이 강해지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명종 10년(1555년)에 새롭게 개발한 전함이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2층 구조의 높은 배였으니 왜구들이 쉽게 기어오를 수 없었다. 왜구들의 장기인 배에 올라 백병전을 전개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였던 것이다. 또 높은 구조의 판옥선에서는 아래를 향해 활을 쏘기 유리했고, 함포의 포좌 또한 높아 명중률도 높았다. 판옥선의 승선인원은 130명이나 됐으니 노를 젓는 노꾼의 수가 많아 상황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기동성과 견고함을 동시에 갖춘 전함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판옥선은 앞 쪽 뿐만 아니라 옆과 뒤에도 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판옥선은 속도가 느린 대신에 360도 급회전이 가능했다. 앞쪽에서 포를 쏘면 배가 바로 돌면서 옆쪽 포문에서 연달아 포탄을 쏟아냈고 다시 뒤쪽, 옆쪽으로 쉬지 않고 이어졌다. 1척이 앞쪽에서만 포를 쏘는 전함 몇 척의 몫을 해냈다. 이러한 판옥선에 날개를 달아 준 것은 학익진이었다. 판옥선들이 학 날개처럼 펼쳐져서 왜선을 포위하고 연달아 포를 쏘아대니 왜선은 감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조선수군 전함 55척은 손실 없이 왜군 전함 73척 중 46척을 부수고 12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또 이틀 뒤인 10일에는 창원 안골포에 있다 나온 왜선 42척과 마주 싸워 이 또한 섬멸시켜버렸다.
한산해전은 조선이 수세에 있던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고 왜군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전투였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라 평가하지만 실상 한산해전은 세계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왜군의 전력은 막강했고 명나라 군대는 무능했다. 이순신 함대가 한산대첩에서 왜군을 격파하지 않았다면 파죽지세의 왜군은 그들의 호언대로 조선을 멸망시키고 명나라로 진격했을 것이다. 그 시절부터 이미 일본의 동아시아 식민지 지배가 시작됐을 개연성이 컸던 것이다. 그러므로 왜군의 야망을 좌절시킨 한산해전은 동아시아의 질서를 뒤바꾼 세계적 사건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산해전 이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대적인 함선 건조를 명하고 준비가 될 때까지는 조선 수군과 결전을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한산해전 뒤 조선 수군 100척이 부산포를 공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왜선 5천 척 중 단 한척도 싸우러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 함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산해전이 갖는 해전사적 의미 중 하나는 이 전투에서 본격적인 함대 함 전법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한산해전 전까지는 해전이라 해도 그것은 육전의 연장에 불과했다. 전함끼리 머리를 대면 배에 올라 1대1 전투를 했다. 그런 싸움에서 100년의 전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단병술과 칼싸움의 고수가 된 왜군에게 물고기 잡고 농사짓다 입대한 조선수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은 함대 함 전법을 통해 병사들끼리 직접 싸우지 않고 전함끼리만 싸우게 했다. 학익진 전법은 함대 함 전법의 전형이고 근대적 전법의 시작이었다. 임진왜란 중 한산해전의 또 하나 의미는 전면전에서 최초의 승리였다는 것이다. 한산해전 전에도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그것은 기습전이었다. 전면전을 통한 한산해전의 승리로 조선군은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했다.
이순신이 기습전 전술을 버리고 위험부담이 크고 아군의 사상자가 많이 날 수 있는 전면전을 택한 이유는 백성들 때문이었다 한다. 기습전을 하다 보니 왜군들이 배를 버리고 뭍으로 도망가면서 백성들을 살육했다. 그래서 바다 한가운데로 왜군을 불러내 전면전으로 몰살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불가피하게 기습전을 하는 경우에도 꼭 몇 척의 배는 남겨줬다. 도망갈 퇴로를 열어둔 것이다. 그래야 백성들의 피해가 적었다. 그 전투가 백성을 희생할 것 같으면 왕의 명령도 단호히 거부했다. 백성을 위한다는 그것이 왕의 미움을 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왕에게 백성은 왕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으니 백성을 왕조보다 우위에 두는 이순신의 애민정신은 왕의 증오를 사고 불안을 부추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오늘 전쟁의 흔적은 간데없고 한산도 바다는 더없이 맑고 푸르다. 인류의 사전에서 전쟁이란 단어가 사라져버릴 날이 올 수나 있을까. 이순신 장군도 그런 날을 꿈꾸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순신 장군을 전쟁영웅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그네는 장군이 전쟁영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군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 백성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건 평화를 지키기 위한 고투였다. 흔히 전쟁영웅들은 국가나 왕조를 위해 백성들을 희생시키는 행위를 정당화했다. 전쟁의 승리가 무엇보다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그들과 확연히 달랐다. 장군은 왕조의 존속보다 백성의 안위와 평화를 우선시했다. 그래서 끝내 무능한 왕의 눈 밖에 났고 핍박을 받았다. 그러니 장군은 전쟁영웅이 아니라 평화영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산도에 가서 배워야 할 것은 장군의 평화정신이고 애민사상이다. 더불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곧잘 간과하지만 장군이 공을 이룬 것은 수하 장병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란 사실이다.
一將功成萬骨枯
(황송, 비전시(非戰詩) 중에서)
"한 장수가 공을 이루려면 만 사람의 뼈가 마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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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휘하 병사들이 망을 보기 위해 오르내리던 망산 길 ⓒ섬학교 |
한산도 망산 트레일통영 사람들은 한산도에 이순신 장군의 혼백이 서려있다고 믿는다. 한산도의 지명들은 거의 모두가 임진왜란과 관련이 깊다. 한산면 소재지가 있는 진두(陣頭)마을은 조선군이 진을 치고 있던 곳이다. 창동은 군수창고가 있던 곳이고 염개는 소금을 만들던 곳이다. 망산은 왜적의 동태를 살피며 망을 보던 곳이다. 대섬은 화살을 만들 대나무를 조달하던 곳이다. 왜군의 시체를 매장했다는 곳은 왜매치, 조선군이 신호로 고동을 불었다는 곳은 고동산이다. 장군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갑옷을 벗고 땀을 씻었다는 섬이 해갑도다. 의암(衣巖)마을은 군복을 만들던 곳이다. 야소(冶所)는 무기를, 여차는 병선을 수리하던 곳이다. 두억개는 왜적의 머리를 수도 없이 베었다는 곳이다.
한산도에도 등산로를 따라 트레일이 생겼다. 한려해상국립공원에서 만든 바다백리길 중 역사길 구간이다. 제승당 뱃머리에서 진두마을로 가는 도로를 따라 5분 남짓 걷다보면 트레일이 시작된다. 길의 초입은 좀 가파르다. 한동안 방부목으로 만든 데크 길이 이어진다. 국립공원이 트레일을 만들며 기존의 등산로에 나무계단을 만든 것이다. 계단 길이 끝나면 한동안 또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길은 몇 번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지만 크게 힘든 길은 아니다. 하지만 등산이 아니라 가벼운 마음으로 트레일을 걸으러 온 사람들은 평탄한 숲길을 걷다가 갑자기 가파른 길을 만나면 더러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걸어보면 금방이다. 남도 속담에 "눈이 길릅다"는 말이 있다. 눈이 게으르다는 이야기다. 눈에 속지 마란 소리다. 눈이 걷는 것이 아니라 다리가 걷는 것이다.
또 가파른 길에서는 위를 보지 말아야 한다.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이 아니다. 길을 가기 위해 나선 걸음이다. 기록을 세우기 위해 걷는 길이 아니다. 발 아래를 관찰하며 가라. 길 주변의 나무와 풀들을 보라. 새들과 풀벌레 소리에 귀 기울여보라. 길의 끝을 보지 마라. 한치 앞만 보라. 한 발자국만 내딛고 거기에 집중하라. 그러면 오르막도 평지와 다름없다. 그렇게 걸음에 집중하고 길가의 온갖 생명들과 대화하며 가다보면 어느새 길의 끝에 도달하게 된다.
옛 병사들이 다니던 숲길은 내내 솔밭길이다. 아무래도 역사길이란 이름은 너무 추상적이다. 한산도에만 역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이 나라를 지킨 이름 없는 병사들을 기억하는 길이라면 얼마나 의미 있을까. 그도 아니면 '이십리 해송숲 길'은 어떤가. 섬에서 이렇게 긴 솔밭 길은 좀채로 만나기 어렵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내내 흔들리는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도 있다. '이십리 솔바람길'은 또 어떤가.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의 등장 이후 지방마다 걷기 길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많은 길들이 급조되다보니 예산만 낭비하고 사람들의 외면을 받는 경우가 많다. 등산로와 트레일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등산로 또한 트레일의 하나지만 대체로 걷는 사람들의 인식에서 등산이란 정상을 향해 수직으로 오르는 것을 의미하고 트레일은 수평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레길 같은 걷기 길, 트레일은 좀 더 부담없이 걷는 산책길 같은 길인 셈이다. 등산로와 트레일이 같은 의미라면 기존의 등산로를 가게 하면 되지 굳이 새 이름을 달고 트레일이라 선전할 이유가 없다.
역사길은 산 하나를 넘고 다시 산 하나를 더 넘어야 한다. 망산교를 건너는 순간 다시 망산 정상까지 수직의 등산로가 이어진다. 기존의 등산로에 이름만 역사길로 바꿔 달았을 뿐 등산로와 차이가 없다. 나무 데크 조금 깔고 출입문 만들었다고 새로운 트레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길도 지자체들이나 국가기관에서 만든 수많은 트레일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듯해서 안타깝다. 이 길은 그냥 등산로다. 등산객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길이지만 길에서 놀기 위해 나온 사람들에게는 조금 버거운 길이다. 물론 망산 정상에서 펼쳐지는 한려수도 섬들과 바다의 풍경은 등산로를 오르는 수고로움을 충분히 보상해 주고도 남는다. 망산교에서 망산 정상까지는 30분이면 충분히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선택은 걷는 이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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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봉도에는 통영 사람도 모르는 비경이 많다. ⓒ섬학교 |
[추봉도] 포로수용소의 기억벌바위 마을의 환생 솔숲추봉도 봉암마을 바다에서는 해녀들의 물질이 한창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해녀라면 제주를 먼저 떠올리지만 지금도 이 나라 많은 항포구와 섬들에는 해녀들이 살고 있다. 통영의 해녀만도 2백여 명에 이른다. 봉암 해변은 휴가철이면 피서객들로 붐빈다. 아담한 몽돌해변의 정취는 그윽하고 바다는 더없이 푸르다. 봉암은 벌바위란 뜻이다. 봉암 해변 앞바다에는 '벌여'라는 바위섬이 있다. 이 바위섬에 벌이 많이 살았다 해서 마을은 봉암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한적한 포구지만 한 때는 한산면 어업조합이 있었을 정도로 은성했던 마을이다.
해변 서쪽에는 아름드리 솔숲이 있다. 이 솔숲의 이름은 독메다. 홀로 외따로 있다 해서 홀로산, 독메. 저 아름다운 솔숲이 한때는 섬사람들의 기피 장소였다. 조선시대 말엽 을유, 병술(1885년-1886년) 대기근 때 굶주림과 괴질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들은 거적에 쌓여서 솔숲에 버려졌다. 그래서 오랜 세월 주민들은 솔숲을 두려워했다. 가끔 소들이 사람의 뼈를 우두둑 우두둑 씹어 먹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니 그 두려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이제 더 이상 솔숲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슬픔은 파도에 씻겨갔고, 원통하게 스러진 목숨들은 모두 소나무의 양분이 되었다. 그때의 서러운 죽음들이 저처럼 낙낙장송으로 환생했으니 사람의 목숨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고맙고 또 고마운 숲이다.
철지난 해변은 한적하다. 해녀들은 가까운 해변에 딱 붙어서 군소를 잡는다. 해삼이나 소라 전복 따위는 아주 드물다. 민달팽이처럼 생긴 집이 없는 소라인 군소는 아직 흔한 편이다. 해녀들이 의지하는 부표는 모두 주황색이다. 통영시에서 주황색으로 통일시켰다.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서다. 바다에는 수도 없이 많은 부표들이 널려 있다. 그물, 통발, 양식장의 위치를 알려주는 부표들. 항해하는 선박들은 주황색 부표가 눈에 띄면 근처에 해녀가 있는 것을 눈치 채고 조심해서 배를 몰아 갈 것이다.
추봉도는 한산도의 이웃 섬이지만 두 섬은 더 이상 별개의 섬이 아니다. 2007년 여름 개통된 추봉대교로 두 섬은 하나가 되었다. 다리로 연결된 두 섬은 하나의 생활권이다. 다리 덕분에 추봉도와 육지간의 교통도 편리해졌다. 통영-추봉도간 직항은 하루 두 편뿐이지만 한산도를 거치면 한 시간에 한 번씩 배를 탈 수 있다. 하루에 배가 두 번 다니는 것과 한 시간에 한 번 다니는 것은 횟수 증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육지와의 간격이 좁혀진 만큼 고립감이 줄어들었다. 면적 3.835㎢의 추봉도는 여의도 절반에 조금 못 미치고 한산도의 4분의1 크기다. 봉암, 추원, 예곡, 곡룡포 등 4개의 마을이 있다.
옛날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까지 한반도 바다의 가장 큰 위협은 일본의 해적 집단인 왜구였다. 왜구는 단순한 도적이 아니었다. 지방 호족인 사무라이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통솔된 수군 집단이었다. 왜구들은 중국 해안을 비롯해 한반도 연안의 각 고을을 노략질하고 강간과 납치, 방화와 살인을 일삼으며 조정의 세곡선까지 약탈해 갔다. 심지어 고려 말에는 강화의 교동도 등 섬들을 점령한 뒤 주민들이 농사를 짓도록 하고 소작료까지 받아갈 정도였다. 멀리 중국 해안까지 가서 살인과 노략질을 일삼기도 했다.
그 왜구들의 근거지가 대마도였으니 대마도가 지척인 통영, 거제 일대는 왜구의 안마당이나 다름없었다. 왜구들의 약탈과 살상을 일시적으로 잠재운 것이 삼도체찰사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었다. 추봉도의 주원방포(현 추원마을)는 대마도 정벌군의 최종 출전지였다. 1419년 6월 19일 227척의 전함에 1만7285명의 정벌군은 주원방포 앞바다에 함대를 결집시킨 뒤 출정식을 갖고 왜구 소탕을 위해 대마도로 출발했다. 추원마을은 그런 역사의 땅이었다. 추원마을은 통제영 시대에도 역참이 있었고 근래까지 군부대가 주둔해 있었던 군사상 요충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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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봉도 몽돌해변. 바다는 아픔도 슬픔도 다 씻어주는 마법의 물이다. ⓒ섬학교 |
마을주민들 강제로 쫓아내고 생긴 포로수용소추봉도의 추원마을은 또 예곡마을과 함께 한국전쟁 때 유엔군의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1952년 5월부터 포로수용소가 설치돼 1만 명의 공산 포로가 수용됐다. 그 흔적이 지금껏 남아있다. 추봉도에서 거제도는 코앞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던 포로들 중 일부가 추봉도와 용초도 등지로 옮겨지면서 수용소가 생겼던 것이다. 예곡마을에는 포로수용소였던 사실을 알려주는 입간판이 서 있다.
1952년 5월 어느 날, 마을 주민들은 모두들 보리타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거대한 함정(LST)이 들이닥쳤다. 함정의 아가리에서 불도저가 기어나왔다. 군인들은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주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살던 집들을 파괴해버렸다. 멋모르고 쫓겨난 주민들은 한산도의 진두마을과 추봉도의 곡룡포 등에 천막을 치고 피난민 아닌 피난민 생활을 해야 했다.
유엔군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11월 27일 거제도 360만 평의 땅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인민군 15만, 중공군 2만 명, 여성 포로와 의용군 3천 명 등 17만 3천 명의 포로가 수용됐다. 수용소 안에는 공산포로와 반공포로가 함께 수용됐다. 포로 수용소장 F.T 도드 준장은 제네바 협약을 어기고 포로들의 본국 귀환을 포기시키려고 갖은 협박과 고문을 일삼았다. 이에 포로들은 격렬히 저항했고 수많은 포로들이 살해됐다. 그 과정에서 수용소장이 감금됐다 풀려나기도 했다. 그 후 일부 포로들이 인근의 추봉도, 용초도 등으로 분산 수용됐고 포로 수용소장은 해임당했다.
집과 농토를 빼앗긴 예곡, 추원마을 주민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휴전협정이 되고도 한참 뒤인 1955년, 수용소가 폐쇄된 다음에야 재입주할 수 있었다. 느닷없이 집과 농토와 마을을 빼앗겼던 주민들은 돌아온 뒤에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다. 당시 열 네 살이던 마을 노인은 그 일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 때 젤 첨에 해군 다이버들이 와서 순찰해 갔어. 그리고 얼마 있다가 크나큰 배가 와서 입을 떡 벌리더라고. 그리고 이상한 차가 와서 오두막을 다 때리 빠 뿌리고. 한두 번 밀어 삘면 희뜩 넘어가고. 우리야 가만 구경만 하고 있었지. 머시 머신지도 모르고 나가라니까 나가고 그랬지."
노인은 당시 주민들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것은 "군(軍)이 추봉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면서 추봉도를 무인도라고 상부에 보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는 사람이 안사는 곳이다. 무인도라고 속이고. 그때 사람이 얼마나 살았는데. 이 섬에 학생만 380명이나 됐는데."
수백만이 죽어간 전쟁 통에 천 명이 사는 섬 하나쯤 무인도로 만드는 것이야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추봉도에 수용된 포로들 중에는 추봉도 사람도 있었다. 제 살던 고향마을에 포로가 되어 갇히게 된 마음이란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동족상잔의 비극은 이 나라 어느 땅 한 곳도 비켜가지 않았다. 노인은 예곡마을 출신 포로는 후일 어찌 됐는지 행방을 모른다. 추원마을 출신 포로는 석방 후 다시 고향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 추봉도 포로수용소에서도 서로간에 죽고 죽이는 참극이 멈추지 않았다.
"똥통에 빠뜨려 죽여 버리기도 하고. 죽은 걸 똥통에다 버리기도 하고 그랬대."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은 수용소 건물과 도로 등의 시멘트를 걷어내고 다시 밭으로 만들었다. 그 힘든 일을 온전히 손으로만 했다.
"그 당시에는 못 묵고 살아서 밭 만든다고 허물어 삘었어. 호빡 공구리 해 논 걸 손으로 깼어."
그래서 지금 예곡마을에는 수용소 정문 기둥만 하나 달랑 남았다. 포로수용소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노인은 그것이 조금 아쉽기도 하다. 거제도수용소처럼 관광자원이 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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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득하고 망망한 추봉도 바다 ⓒ섬학교 |
기생촌(女妓谷)이 예곡(禮谷)으로노인은 마을 앞 바다에서 가두리 양식을 한다. 조피볼락(우럭)과 참돔, 각시볼락 등을 키운다.
"이깝(먹이) 값도 안 돼요. 너무 헐해. 키는 사람, 먹는 사람들만 죽어나제. 중간에서 다 채버리고. 못 살아. 못 살아."
고생해서 키워봐야 사료 값도 안 나온다고 노인은 푸념이다. 어디서나 수산물의 이득은 중간 상인들 차지다. 어민들은 헐값에 팔고 소비자는 비싼 값에 먹는다. 그것이 바다에서만 그럴까. 산지에서 어부들을 떠난 물고기는 소비자에게 10배도 넘는 가격에 팔린다. '시장'의 주인은 언제나 따로 있다. '어시장'에서도 어부와 손님은 '봉'이다. 노인은 바다 고기는 겨울에 먹어야 제 맛이라고 일러준다.
"못해도 음력 9월은 돼야 고기에 기름기가 있어서 먹을 만하지. 여름에는 썰어 놓으면 10분도 못돼 물이 나와. 그게 다 기름이 빠지고 없기 때문이지."
예곡마을 입구에는 마을의 역사를 알려주는 비석이 서 있다. 임진왜란 전부터 거제에 있던 경상우수영에서 이 마을에 관기들을 거주시켜 기생촌을 만들었다. 그래서 여기골창[女妓谷] 혹은 여곡(女谷)이라 했었다. 1925년 참봉 이강도가 한산면장을 지내던 시절 마을 이름을 부끄럽게 생각한 한 유지들의 뜻에 따라 예곡(禮谷)으로 개칭했다. 기생촌이 예절을 숭상하는 마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상전벽해다. 지명 유래 설명이 없었다면 알 수 없는 사실이다. 다니다 보면 이름자의 뜻풀이만 가지고는 알 수 없는 것이 마을의 내력들이다. 이 땅의 많은 지명들이 그렇다. 그러나 예곡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유래를 제대로 알려주는 이 비석도 못 마땅하다. 마을의 부끄러운 역사를 기록했다는 이유에서다. 노인도 탐탁치 않은 눈치다.
"뿌셔 삐라, 해 쌓고 말들이 많구만."
그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그네는 사뭇 궁금하기도 하다. 다음에 다시 찾았을 때도 저 비석이 무사할까. 혹 '예로부터 예절 바른 마을이라 예곡이라 했다'는 새로운 지명 유래석이 서 있게 되지는 않을까.
섬학교 제24강 <한산도와 추봉도> 1박2일의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2월 8일(토)>07:00 서울 출발 (뱃시각에 대야 하니 출발시각 엄수 바랍니다.
0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24강 여는 모임
11:00 통영 도착
11:30-12:30 점심식사(생선구이정식)
13:00 통영항 출항
13:30 한산도 도착
13:40-17:30 첫째날 한산도 걷기
A팀: 선착장→대촌삼거리→망산교→망산정상→진두마을(8km)
B팀: 가파른 오르막이 부담스런 분들
선착장→대촌삼거리→망산교(4.5km)→
버스이동→진두마을
17:30 숙소 도착(<추봉팬션>. 다인실)
18:00 저녁식사(생선회와 매운탕)
20:00 자유시간 및 취침<2월 9일(일)>07:00 기상
08:00-09:00 아침식사(해물된장과 생선구이백반)
09:00-11:00 둘째날 추봉도 걷기
봉암솔숲→몽돌해변→한산사→추원마을 윗길→추봉분교→예곡마을(3km)
11:20-12:10 제승당 탐방
12:30 한산도 출항
13:00 통영항 도착
13:20-14:10 점심식사(통영식 해물탕)
14:20-15:00 북신시장 장보기. 제24강 마무리모임
15:00 서울 향발![](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ressian.wcms.newscloud.or.kr%2Fdata%2Fphotos%2FIMAGE_ROOT%2Fimages%2F2014%2F01%2F06%2F98140106145108%288%29.JPG) |
▲섬학교 제24강 한산도·추봉도 답사로 ⓒ섬학교 |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방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스틱, 무릎보호대, 아이젠, 보온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다음의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걷고 싶은 우리 섬 - 통영의 섬들>http://www.yes24.com/24/goods/11818460?scode=032&OzSrank=1<섬을 걷다>http://www.yes24.com/24/goods/3261557?scode=032&OzSrank=1<어머니전>http://www.yes24.com/24/goods/6996168?scode=032&OzSrank=1섬학교 제24강 답사 참가비는
23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숙박비, 5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master@huscho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