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0일 주일(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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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레위 지파의 사제들을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제1독서). 인간은 내일 일에 대해 알지 못하며 그 생명 또한 한 줄기 연기와 같다. 그러니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며 살아야 한다(제2독서). 밤중에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온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종은 주인을 기다리며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주인께서는 종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므로 깨어 있는 종을 보실 때에 그를 식탁에 앉게 하신 다음 시중들어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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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설을 맞이해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깨어 있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에는 우리말에서 ‘깨’로 시작하는 낱말들을 곰곰이 관찰해 볼 수 있습니다. 깨끗하다, 깨다, 깨뜨리다, 깨닫다, 깨우치다, ……. 이러한 낱말들의 공통점은 ‘깨’라는 말이 무언가 부수거나 치워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의미에서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과거의 묵은 자기 자신을 깨뜨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부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온갖 허물을 깨끗이 치우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지난 한 해의 낡은 삶에서 깨어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주인이신 예수님을 맞이하려면 언제나 깨끗함을 유지해야 하며, 자신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 기쁜 마음으로 주님과 친교를 맺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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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행복할 때가 언제인가 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답을 해 왔습니다. 하루 일을 끝냈을 때, 아침 이슬을 머금은 꽃잎을 볼 때, 냇가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때,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을 바라볼 때, 작은 칭찬을 들을 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때 등 ……. 사람들의 행복은 큰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물결처럼 잔잔히 흐르는 삶을 바라보고 느끼며 경탄할 때 행복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깨어 산다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거창한 삶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 삶의 순간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주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새날을 열어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에는 오늘 하루 주님께서 어떻게 내 삶을 이끌어 주셨는지 살피며 감사의 마음을 주님께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깨어 있는 종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등불을 켜고 살아가는 깨어 있는 사람은 주님의 큰 부르심이 있을 때도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나설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렇게 등불을 켜고 깨어 사는 신앙인들이 여전히 참 많이 있습니다. 이들이 있어 교회가 아름답고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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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긴 안목에서 보면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을 기다리고, 젊은 시절에는 사랑하는 이를 기다립니다. 나이 들면 누구나 자녀들을 보고 싶어 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기다림에는 늘 아쉬움이 함께합니다. 계산과 계획대로 사람들이 따라와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실망을 느끼고 운명을 생각하며 자식 사랑에 ‘모든 것’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느님을 향해 눈뜨라는 메시지입니다. 인생에 외로움이 없으면 쉽게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확실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다’는 것은 이러한 믿음을 갖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주님께서는 작은 선행도 기억하시며 갚아 주십니다. 부족한 기도라도 언젠가는 들어주십니다. 먼저 이 사실을 감사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느낌을 감추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그렇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드러내며 기도해야 합니다. 가끔은 감실 앞에서 자신의 ‘일상사’를 보고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실천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말씀의 실천이 곧 행복입니다.
축복의 원인은 주님이시다. 사제가 아무리 복을 빌어도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소용없는 일이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면 당신도 함께하실 것이라고(제1독서). 사람의 앞날은 주님께 속해 있다. 본인은 모르지만 주님께서 허락하시기에 건강한 미래가 있는 것이다. 내일 일은 언제나 주님께 맡겨야 한다. 그래야 그분의 축복이 떠나지 않는다(제2독서). 주인은 느닷없이 찾아온다고 하신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오실 것이다. 그러니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매일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자. 신앙생활에서 명하는 것을 충실히 실천하자. 이러한 삶이 준비하는 생활의 기초가 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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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라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갑자기 오십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 역시 갑자기 옵니다. 그렇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면 어느새 곁에 와 있는 은총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음은 원숭이를 생포하는 고전적인 방법인데 아직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원숭이가 잘 노는 곳에 커다란 통을 가져다 놓습니다. 통 속에는 맛있는 것들이 잔뜩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통의 아가리는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로 작게 만들어 놓습니다. 사냥꾼은 통 속에서 맛있는 것을 하나씩 꺼내 먹습니다. 그러다 숲 속의 원숭이가 보고 있다는 느낌이 오면 통을 그대로 둔 채 슬그머니 딴 곳으로 가 버립니다. 원숭이는 잽싸게 달려와 통 속에 있는 맛있는 것을 꺼내 먹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씩 꺼내다 욕심이 생기면 잔뜩 쥐고 꺼내려 합니다. 그러나 아가리가 작아 꺼내지를 못합니다. 그때 사냥꾼은 원숭이에게 다가갑니다. 놀라 도망치려 하지만 통 안에 갇힌 손 때문에 바동거리기만 합니다. 손을 놓으면 될 텐데도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원숭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원숭이와 같은 행동을 합니다. 놓고 물러서야 하는데도 놓지를 않습니다. 놓고 물러서면 삶이 훨씬 수월해지는데도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벌써 손을 놓았어야 하는데도 아직도 붙잡고 있는 것이 없는지 가만히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놓으면 은총이 옵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김태훈 수사-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 그분의 부르심을 알아듣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오늘은 조상들을 기억하는 민족의 축제인 설 명절입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조상을 기억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볼 때 이 기억은 성인들의 통공을 상기시키며 또한 우리 각자에게는 이 세상 너머의 삶을 일깨웁니다. 현재 삶의 일시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오늘 제2독서에서 등장하는 장사하는 사람은, 당대 대도시 간의 무역에 종사하던 이들로서 미래를 내다보며 야심 찬 계획을 세우기도 했던 일종의 큰손 상인들을 지칭합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여기서 하느님과 관계없이 자신의 계획을 세우는 이들의 인간적 교만을 단죄합니다. 그러한 모든 계획은 내일의 불확실성이라는 위협 아래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삶의 불확실성 앞에서 합당한 응답은 모든 계획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것인데, 이는 삶과 죽음을 포함한 모든 것이 오직 하느님의 뜻에 의해 조건 지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느님 뜻에 따른 삶, 삶의 근본과 출발점을 하느님에 기초하는 삶, 바로 이것을 오늘 복음은 힘차게 외치고 있습니다. 복음은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해 깨어 있음과 준비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등불을 켜놓고 기다린다는 것은 주인이 집 안으로 들어올 때 주인의 앞길을 비추는 일을 조금도 지체 없이 바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종들은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데 본문은 교회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에의 초대를 가리킬 수도 있고, 오늘 복음이 놓인 전체 문맥의 관점(12,1-13,9)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다가오는 심판에 대한 준비에의 도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깨어 있음과 준비됨은 무엇보다도 주인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을 위한 것인데 ‘즉각적인’이라는 단어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에 때가 있으며, 그 ‘때’를 놓칠 때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응답’이라는 단어 안에서 깨어 있음이 단순한 정신 상태의 각성이 아닌 의지와 마음을 포함한 전인격적 자세임을 제자들의 모범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도둑의 비유가 말해주는 것처럼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내내’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한편 깨어 있는 종이 받을 상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깨어 있을 필요에 대한 동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제시합니다. 제때에 주인을 잘 맞이한 종들은 식탁에 앉아서 주인의 시중을 받습니다. 이런 일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다르고 새롭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그분의 오심을 깨어 기다리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얼마나 관대하게 보상해 주시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이 받을 상급은 칭찬이나 경제적 보상도 아닌 바로 주인이 되는 것, 아니 주인이 시중을 들어준다는 것 안에서 주인보다 더 귀중한 사람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야말로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상급이 아니겠습니까! 이 비유에서 주목할 것은 ‘주인’이라는 단어를 여러 그리스어 중 굳이 예수님에게 적용되었던 ‘주님’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시중들다’라는 동사를 예수 수난의 문맥 안에서 사용된 똑같은 동사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루카 복음사가가 예수님을 시중들며 섬기는 사람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의 주인인 예수님은 바로 우리 모두에 대한 사랑으로 기꺼이 종의 모습을 취하신 분이시고(필리 2,7 참조), 우리를 당신 자신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를 섬기신다는 표징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의 몸값으로 내신 분입니다.(마태 20,28 참조) 이것이 주인한테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종이 받는 상급입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이 상급을 맛보았고 또 앞으로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로서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했기에 이 상급을 받았고,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라는 그분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우리를 열어 나갈 때 계속해서 체험할 수 있는 보상이며, 마침내 그분이 오실 때 온전하게 내 것으로 차지할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Meditatio)
내 생각과 계획 그리고 삶에서 하느님과 그분의 뜻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요? 그분은 내 모든 행동의 시작이요 그분의 뜻이 내 결정의 근본적인 기준이 되는지요? 그분의 뜻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혹시 내게 무거운 짐으로만 느껴지거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게 하는지요? 나는 얼마나 그분 사랑의 보상에 더 마음을 쓰고 기대하고 있는지요?
기도 (Oratio)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 (시편 9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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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음
-남상근 신부-
우리 설 풍습 중에 섣달 그믐날 밤에는 잠을 안 자는 풍습이 있습니다.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이야기에 졸린 눈을 비비며 지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설핏 잠이 든 형제들에게는 장난으로 분필가루를 묻히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풍습은 설을 준비하기 위해 모두 바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이를 ‘해지킴’ 혹은 ‘수세守歲’라고 부르는데 상당히 복음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새해를 기다리는 밤샘이 주님을 기다리는 ‘깨어 있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죠. 복음은 깨어 기다리는 종에게 주어질 보상으로 주인이 시중을 들어준다고 이야기합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역전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대접은 깨어 있는 종들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자리에 눕고 싶은 욕구를 이겨낸 종, 편안을 선택하지 않고 불편을 마다하지 않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보상입니다. 주인이 아무 때나 온다고도 불평할 수 있지만, 내가 편안한 시간은 주인이 오는 시간이 아니라는 게 분명합니다. 세상의 흐름에 휘둘리지 않음을, 자신의 이기적 욕구에 매몰되지 않음을 주님은 확인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가장 확실히 드러내 주는 표지는 나의 스케줄이 아니라 하느님의 스케줄을 실행하는 것에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신희준 신부-
올해도 새해는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올해에는 이런저런 일을 하겠다고 결심할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새해에는 꼭 해야지 결심하고 작성한 목록을 들여다보면 작년에 작성한 목록과 별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실 매년 연례행사처럼 확인하게 되지만 말입니다. 문득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야고 4, 14)라는 야고보서 저자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내일 일을 모르기에 결심한 일은 ‘오늘’, ‘지금’, ‘여기서’ 실행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에 주님 앞으로 불려간다면 무엇을 가장 후회하게 될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가장 후회할 일은 무엇일까요 ? 제 생각에는 갖가지 인연들 때문에 생긴 여러 가지 상처와 오해를 풀지 못하고, 그 인연의 주인공들과 화해하지 못한 일이 가장 큰 마음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막상 용서하고 화해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건강에도 좋다는 사실을 알지만 몸이 기꺼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차일피일 미루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년에 또다시 공허한 ‘결심 목록’ 을 작성하게 되겠지요. 새해에 복 받고 싶으시지요 ? 만일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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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복 많이 받으라는 것의 뜻은
-김찬선신부-
매주 화요일, 저는 노인 시설에 가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몇몇 형제들은 치매노인과 미사 드리는 것 힘들지 않냐고 하지만 저는 벌써 5년째 가고 있습니다. 제가 그 미사를 수락하고 지금도 계속 나가는 것은 제 어머니께 잘 하지 못하지만 제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사랑해드려야겠다는 마음 때문이지만, 저는 이 치매 어르신들과 미사 드리는 것도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래서 한 번 갔다 오면 오후 한 나절이 다 깨져도 계속 나갑니다.
치매 어르신들은 어린이와 똑 같습니다. 그래서 강론을 할 때 질문을 드리면 어린이 수준의 답이 나와 미사 때마다 웃음바다가 되곤 합니다. 그저께도 미사를 드리며 설날 인사를 미리 드렸는데, 복 많이 받으시기를 원하시는지 여쭙고 누구의 복을 받고 싶으신지 여쭈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드리는 복 받고 싶으시냐고 여쭈니 모두 제 복을 받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음으로 수녀님이 드리는 복은 받고 싶으시냐고 여쭈니 그 복은 싫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바탕 웃었는데, 왜 수녀님 복은 싫고 제 복은 좋으냐고 여쭈니 제가 드리는 복은 제가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복이기 때문이라고 정답을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새 해 첫날, 새 해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이 인사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겠습니다.
그 첫 번째 의미는 우리가 모두 원하는 행복은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서 행복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가끔 새 해 인사로 “새 해 복 지으소서!”라는 인사를 받는데, 이것 맞는 말이고 참 멋진 말이면서도 잘못하면 마치 하느님 없이 내가 복을 지을 수 있고, 그래서 하느님 없이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이해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없이 나 행복할 수 없음을 확실히 알아야 하고, 그러니 하느님으로부터 복 받아서, 다른 사람이 아닌 꼭 하느님으로부터 복 받아서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복 받아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복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갈망해야 하고, 아예 복 주시는 하느님을 갈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풀어서 얘기하면 주님께서 복 주시고,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주님께서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주님께서 평화 주시기를 비는 오늘 민수기의 인사보다 부자 되시라는 인사가 더 좋아서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며칠 전에 한 분을 만났는데 그분은 매주 로또 복권을 산답니다. 그 이유는 복권을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한 주일이 뿌듯하고 든든하여 행복하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제가 느끼기에 그것은 한 번에 떼돈을 벌겠다는 천박하고 볼썽사나운 욕심이 아니라 어쩌면 매우 소박하고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그분의 희망과 갈망의 몸짓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희망하고 갈망하는 것이 로또 복권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면 더 완전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주인께 깨어있는 종의 얘기를 들려주며 그렇게 깨어있는 종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해를 시작하며 한 해의 운세가 어찌 될지 점쟁이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 등불을 켜놓고, 허리에 띠를 두르고 주인님을 깨어 기다리는 종, 이 종이 행복하다시는 주님의 말씀을 더 귀담아 들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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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09년 1월 1일을 맞이해서 새해 인사를 했던 것 같은데, 지난 25일 동안 제대로 살지 못한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또 다른 새해를 주신 것 같네요. 따라서 1월 1일부터 계획하던 것을 충실히 이행하셨던 분들은 계속해서 열심히 생활하시고, 작심삼일이 되신 분들은 다시 계획을 세워서 열심히 생활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열심히 생활하는 모습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원하는 것이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열심한 생활의 자세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가장 훌륭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을 보면 끊임없이 준비하고 있음을 동식물을 통해서 또한 사람들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추위가 찾아오면 동물들은 활동을 줄이고 지방을 많이 흡수하고 저장합니다. 식물은 나뭇잎의 엽록소를 사라지게 해서 단풍으로 물들게 하고 낙엽이 되게 하여 잎이 떨어지게 함으로써 영양분을 뿌리나 줄기에 저장합니다. 이 모습들이 바로 겨울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지요.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겨울을 잘 나기 위해 김장을 하고, 연탄을 쌓아 두었습니다. 또한 배추와 무를 땅 속에 묻었으며, 문풍지를 붙이고 솜이불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언덕길에는 모래함과 염화칼슘을 준비해 눈 피해에 대비합니다.
이렇게 동식물이나 사람이나 끊임없이 겨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겨울 준비가 필요하지만, 인생의 겨울을 준비하는 슬기는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인생의 겨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순식간에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준비에 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릴 때 곧바로 문을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지요. 여러분도 생각해보세요. 먼 길을 다녀왔는데, 집에 아무도 없다면 기분이 매우 좋을까요? 그런데 힘들게 집에 들어왔는데, 금방 문을 열어주고 반갑게 맞이한다면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서 항상 깨어 준비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충실하게 항상 깨어 준비하는 종에게 주님께서는 어마어마한 행복을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종과 주인의 위치가 거꾸로 됩니다. 종이 주인처럼 대접을 받으면서 주님이 그의 종처럼 처신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이런 대접을 받을 때 얼마나 행복할까요?
우리는 주님께서 오신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깨어 준비해야 하겠지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고,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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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양승국신부-
<한 줄기 연기일 따름>
또 다시 한해가 돌고 돌아 설날입니다. 다시금 한 살을 더 먹게 되는군요. 어린 시절, 어떻게 해서든 한 살이라도 더 나이 들어 보이고 싶은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정반대입니다. 올해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세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나이 먹는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혈기왕성할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 걸기도 하고, 큰 의미 없는 일에 핏대 세우기도 참 많이 했었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조금씩은 포기가 되니 참 편안합니다.
아웅다웅, 바득바득 살다가도, 상주는 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하면서 즉시 태도를 바꿉니다. 앞장서는 것도 좋지만 뒤에 서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가끔씩 얼굴이 확 달아오를 정도로 열 받다가도 즉시 이렇게 생각을 바꿉니다. “그래봐야 나만 손해지. 인생 뭐있어? 적당히 즐기면서 사는 거지.”
공동묘지에 가보면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무덤들이 줄지어서있는지 모릅니다. 다들 한때 나름대로 한 가닥씩 하셨던 분들입니다. 다들 떵떵거리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분들에게도 보송보송 솜털 같던 시절, 꽃 같은 시절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덩그러니 흙무덤 하나, 그 속에는 퇴색된 유골만이 몇 평 남짓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인 야고보서의 말씀, 백번 생각해봐도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수명이 길다 하더라도 100세를 넘기기 힘듭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할지라도 백일 붉은 꽃이 없습니다. 오늘의 아름다움, 지금 이순간의 상승무드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오늘의 이 꿈결 같은 행복, 이 순간의 축복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도 잘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순환의 법칙은 때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흐른 어느 순간, 꽃 같은 젊음도 가고, 인생의 절정기도 가고, 그 좋았던 시절도 가고, 결국 우리 앞에 남게 되는 것은 시들고 메마른 육체, 그리고 임박한 죽음뿐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예외적으로 특별대우를 받게 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깨어있는 종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는 바처럼 주님의 오심을 잘 준비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사람들과 달리 죽음에 대한 시각이 철저하게도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 죽음으로 인해 끝입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죽음은 공든 탑이 무너지는 순간, 그간 일궈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다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은 우리에게 죽음을 준비시킵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죽음은 결코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임을 일깨워줍니다. 죽음은 나약한 우리 인간과 사랑 지극한 하느님이 온전히 합일되는 감사의 순간입니다. 죽음은 부족한 우리 존재가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충만히 실현되고 완성되는 은혜로운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신앙인들과는 달리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힘입어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이 절망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희망에 찬 또 다른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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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전삼용신부-
찬미 예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차례 지내셨습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정초부터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일까?’
우리는 ‘죽음’이라하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조상들은 새해 첫날부터 죽은 조상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예절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사실 이 전통은 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어남에 기뻐하는 동시에 사실은 죽음의 시간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선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향하고 있지만 그 죽음이 너무 멀리 있는 것인 양 생각하며 살기에 막상 마지막 순간이 닥치면 ‘조금 더 살았으면~’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부제 때 이태리 어떤 시골 본당에 실습을 나갔을 때였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병자성사를 청하기에 주임신부님과 함께 병원으로 갔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분은 운명 직전에 눈을 뜨고 저에게 인사를 하고 웃어 주었습니다. 그 전 해에 저와 인사를 했었다고 사람들이 말해 주었지만 저는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다른 사람들이 “방금 인사한 자매님은 암 말기 환자에요.”라고 말했지만 워낙 발랄해 보여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겨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분은 그날 저녁으로 운명을 하셨습니다. 아주 편안한 표정이셨습니다.
그분의 장례식은 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성당에 발 디딜 틈이 없어서 40도가 넘는 뙤약볕에도 사람들이 밖에 서서 장례미사에 참례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태리에서는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주일미사도 자리가 텅텅 비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시장을 비롯하여 높으신 분들도 서서 미사를 했고 많은 이들이 눈물을 훔쳤습니다. 홀로 남은 남편과 대학생인 두 아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다녔습니다.
저는 이때부터 이 분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 분은 성녀처럼 사셨다고 했습니다. 누구든 길에서 보면 멀리서도 달려와서 인사하고 성서 모임과 가정 모임 등을 조직하여 봉사활동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성당에서는 교리교사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하셨고 또 이웃의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분이 2년 전에 이미 암 말기판정을 받은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여 집에서 요양을 하라 했는데 해오던 활동을 지속했고 갑자기 쓰러지기 전 날까지는 어떠한 통증도 호소한 적이 없다고 남편이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세 달도 못 살 거라는 의사의 말과는 달리 2년을 더 살며 봉사를 했던 것입니다. 이분은 정말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살았던 것이고 하느님께서 통증도 없애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새해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항상 준비하고 깨어있는 종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허리에 띠를 두르고 불을 켜놓고 깨어 있어야 하는데, 신랑은 그리스도이고 신부는 바로 교회이며 영적 혼인은 마지막 날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는 도둑처럼 예상치 못한 때에 오게 될 죽음을 잘 깨어 준비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제 2 독서에서도 내일 이렇게 저렇게 해서 돈을 벌어야지 하며 계획을 세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내일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공포이고 행복의 마지막인양 이야기합니다. 저도 한 때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만큼 우리와 가까운 친구도 없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없음을 느낍니다.
저의 첫 번째 기억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억입니다. 앞에서 기어 다니던 모습, 자라를 잡아오셨을 때 제가 손을 넣으려고 하는데 자라가 손가락을 자를 수 있다고 했던 기억,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장례 때 상여 나가던 모습들입니다. 그 때 저는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알고 보니 죽음을 알아서 운 것이 아니라 옆집 형이 때려서 울었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하튼 저는 자라오면서 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공포를 갖게 되었습니다. 함께 계셨던 분들이 언젠가는 사라져가고 저도 언젠가는 죽어야한다는 생각에 죽기 전에 이 세상에서 해볼 것 다 해보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는 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머리가 아프면 뇌종양인지 알았고 배가 아프면 위암으로 죽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안을 어른들은 웃음으로 넘겨버리셨습니다. 저는 이 공포를 혼자서 이겨내야 함을 알았고 이 공포를 이기는 힘은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믿기만 하면 죽어도 지옥가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는 성당을 빠지는 일이 없었고 죽음의 공포를 깨끗이 씻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 스스로 죽음으로 뛰어들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우리의 공포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하느님께로 가는 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이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죽음은 이제 우리에게 아주 유익한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렇게도 소원하던 내일이었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는 하루가 그렇게 소중한 것이니 시간을 낭비하며 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들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는 10년, 누구는 50년이 될 수도 있지만 누구는 오늘이 마지막 날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50년을 살아도 2년 동안 이 분이 사신 것만큼 가치 있게 살 수 있을까요?
성무일도 끝기도에서 우리는 시메온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여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
만민 앞에 마련하신 주의 구원을 이미 내 눈으로 보았나이다.
이교 백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시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되시는 구원을 보았나이다.”
시메온은 구원자 그리스도를 보고 감격하여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체험이 있다면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고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일이 있을 것이라 자신하지 말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끝기도의 마지막에 이렇게 마칩니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이 기도는 하루를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은 바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 되게 해 달라는 간절한 소망은 하느님께 가고 싶은 열망을 표현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 수고의 값이 바로 평안한 잠자리와 죽음이라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새해 첫 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하며 조상들에게 ‘감사’하고 또 첫 출발하는 날이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저 조상들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진정 ‘복’을 많이 받는 것은, 바로 하느님과 조상과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 또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살겠다는 결심’, 이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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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덕담
- 김연희 수녀(예수 수도회)-
우리네 아름다운 명절, 설날입니다. 그믐밤 잠을 뜬 눈으로 새고, 설날 아침에 설레는 마음으로 서둘러 설빔을 입고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께 세배를 드렸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봅니다. 어르신들의 새해 덕담은 “공부 열심히 해라,” “건강해라” 하고 늘 비슷한 말씀이셨기에, 관심을 별로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잔뜩 기대한 것은 세뱃돈이 얼마큼 올랐냐였습니다. 한 살씩 더 먹으면 세뱃돈도 언니오빠들과 비교해서 더 얹혀주시리라는 기대를 내심 했다가 똑같이 주시는 세뱃돈에 실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랑과 자비가 가득 담긴 주님의 덕담을 듣습니다. 천 냥, 만 냥보다 더 귀한 덕담을 1년 동안 간직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올해의 덕담은 “깨어 있어라!”입니다. 준비하고 주인을 기다리며 곧바로 문을 열어주는 종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음이란 첫째 자리에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하시는 권고는 대림 시기나 사순 시기에만 명심할 말씀이 아닙니다. 매일 매순간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고자 할 때에, 주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손수 주관하실 것입니다. 매일 성체의 식탁에 초대받아 생명의 양식을 받아먹는 종은 얼마나 행복한 종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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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김찬선신부-
어제는 늘 하듯 본당에 가서 주일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그랬기도 했겠지만 분위기가 쫙 가라앉은 것이 명절증후군 현상이 분명했습니다. 성체를 모시러 나오는 자매님들의 몸에서 음식 냄새가 났습니다.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고 나오셨을 텐데도 냄새가 나는 것을 보면 며칠 계속 음식을 하여 그 냄새가 몸에 배어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명절이 되었다고 좋아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연세 드신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모두 모여서 명절이 기쁠 것이고 아이들도 세뱃돈 받고 맛있는 음식 먹고 친척을 만나 기쁠 것입니다. 나머지에게 명절은 집안청소하고 음식준비하고 손님 접대 하는 것 때문에 피곤하고 번거로운 행사치례일 뿐이고 요즘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는 명절기분을 내기는커녕 돈이 없어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곱씹게 되는 속 쓰린 시간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명절에서 한 발짝 빗겨 서있는 사람으로서 요즘 명절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어렸을 때의 명절과 비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뭘 모르는 어렸을 때였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옛날 명절은 지금보다 더 살기 힘들고 지금보다 더 오랜 기간 명절을 치렀는데도 정말 모두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것 같습니다. 반대로 지금 명절은 옛날보다 더 잘 사는데도 초라하고 더 짧은 데도 더 힘겨워만 할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는 너무 배부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음식을 다른 때는 못 먹고 명절 때만 먹을 수 있다면 명절이 매우 기다려지고 기쁘고 풍요롭겠지요. 얼마 전 남미 원시부족의 축제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1년에 한 차례 축제일에만 돼지를 잡아먹는데 이 돼지 바비큐를 마을 사람 모두 모여 같이 먹으면서 축제를 즐깁니다. 그러고 보니 제 어렸을 때 명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명절이 되면 다른 때는 먹을 수 없는 소를 잡아 같이 나눠먹는데 며칠 전서부터 누구네 소인지, 얼마나 큰 소인지 집집마다 또는 모이기만 하면 그 얘기하면서 마음이 들뜹니다. 그 소고기를 1년에 한 번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명절은 충분히 기쁘고 그 기쁨 때문에 모든 힘든 것을 기꺼이 감수하게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원하기만 하면 소고기를 아무 때나 먹을 수 있고 너무 많이 먹어서 걱정이던지 광우병 때문에 걱정하고 있습니다. 늘 배부르니 축제가 기다려지지 않고 기다리지 않으니 기쁨도 풍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명절을 기쁘게 하는 것이 명절 음식만이 아닙니다. 같이 명절을 준비하고 같이 먹고 같이 명절을 즐기는 것입니다. 준비도 누림도 같이 하는 것, 여기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大同이라고 합니다. 작년 우리는 달걀을 같이 만듦으로써 부활 축제가 더 기뻤던 경험이 있고 그제는 눈을 같이 치움으로써 눈치는 일이 즐거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대동을 하면 하는 일이 사랑과 보람, 심지어 즐거움이 되는데 혼자 하면 괴롭고 힘들고 지치게 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명절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만남입니다. 너무도 보고 싶지만 평소에는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을 명절에는 만날 수 있기에 명절이 기쁩니다. 명절이 되어도 아무 만날 사람이 없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날 사람, 찾아와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람은 명절이 기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슬픕니다. 그래서 어제는 제가 아는 탈북자들에게 전화로라도 새해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새 해의 복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이 받아야 할 새 해의 복은 북에 남은 가족을 데려오는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이 명절은 사랑하는 가족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날이고 가족의 소중함을 더욱 깊이 새기는 날이며 다른 한 편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만족의 대상이 되어주기를 바람으로써 불만하고 미워했던 지난 한 해를 반성하며 새롭게 사랑하기로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 이창걸-
올해 유럽에서 개최된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차를 빌려 학회장으로 가는 길에 아미앵이라는 작은 도시에 들렀다. 그곳에는 1200년대에 지은 최고의 고딕양식 성당인 노트르담(성모)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짓는 데만 70년 정도 소요되었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성지이다. 또 광야에서 살며 회개와 세례로 예수님 오실 길을 예비한 세례자 요한의 두개골이 모셔져 있어 유명하다.
한때 이 유해는 이슬람 지배 아래 있다가 십자군 전쟁 때 다시 찾아왔다고 한다. 헤로데 왕에게 직언을 하여 감옥생활을 하다가 헤로디아의 딸의 청에 의해 목이 잘려 순교하신 성인의 두개골을 보니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바로 그 세례자 요한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가고 있는 이 신앙의 길이 성경으로만 알고 있던 지식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분명한 사건이었고 실제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미국 연수 시절 귀국이 가까워 오면서 미루어 온 연구를 짧은 기간에 마무리하느라 밤늦게 귀가하는 길에 과속으로 경찰 단속에 걸린 적이 있다. 피곤해서 졸리기도 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차를 몰다 100불이나 되는 벌금을 물게 되었다. 당시 IMF 시절 고환율이어서 1달러도 아껴가며 생활하던 시절에 100불 벌금은 큰돈이었고 내심 아까웠다. 그러나 내가 아낀다고 해도 어느 날 갑자기 사고가 나거나 병이 나면 생각지도 않은 큰돈이 들어갈 수도 있으며 심하면 장애가 생기거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이 자동차 과속 벌금 사건은 나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더 큰 사고가 되어 돌이킬 수 없는 때가 되기 전에 이런 작은 사건으로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된 것이 주님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랴. 미루다가 급하게 하지도 말고 미리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과 급하더라도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급할 때 서두르면 더 큰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회개와 세례로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한 것과 같이 우리도 언제 어디서 그분을 만나더라도 나의 신앙생활이 정리·준비되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분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오실 수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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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여러분들은 학창 시절에 어떤 친구가 가장 부러우셨어요? 학창 시절 때에는 공부가 가장 중요하니까, 아무래도 공부 잘 하는 친구가 부럽지요. 그런데 그중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 같은데 기억력이 좋아서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좋은 성적을 얻는 친구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실제로 시험 공부하면서 이러한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느님, 제 머리가 좋아져서 제가 지금 읽고 있는 것들을 다 외울 수 있도록 해주세요.”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 공부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 나이가 되어보니, 기억력 좋은 것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지금 신부(神父)로써 살고 있다 보니, 철부지 같았던 저의 기도를 안 들어주신 하느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몇 가지만 이야기해보지요.
만약 고해성사를 통해 교우들의 죄를 듣는데, 그 죄들을 모두 기억한다면 어떨까요? 또한 기억하는 것이 많다면, 강론도 무척이나 길어질 것 같습니다. 말하는 동안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떠올려질 테니까요. 그리고 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하느냐 등의 말로써 교우들을 피곤하게 하지 않을까요?
얼마 전에 어떤 책에서 니체가 말한 이러한 글을 읽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이유 하나로 훌륭한 사색가가 되지 못하고 있다.”
즉, 좋은 기억력으로 인해서 새로운 창조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억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세계 백과사전을 가지고 있는 아이를 따를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부러워하는 기억력이지만, 사실은 창조적 사고보다도 훨씬 뒤떨어지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쓸모없는 것들을 계속해서 원하며 살고 있습니다. 더 중요하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항상 맨 마지막에 생각하면서 결국은 후회하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오늘은 설입니다. 설날에 어른에게 세배를 하고 나면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세뱃돈? 아니지요. 바로 어른이 내게 말씀하시는 덕담입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에는 덕담보다는 세뱃돈을 얼마나 주실까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설날을 맞이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물질적인 세뱃돈이 아닌, 우리에게 피와 살이 될 수 있는 덕담을 복음을 통해 해주십니다.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그 날을 위해서,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만 관심을 쏟기보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에 관심을 갖고 늘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제1독서를 통해 주님께서는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을 기억하면서 항상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과 가까운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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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양승국신부-
<삶에 대해 Yes라고 대답하십시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청아출판사)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 다시 말해서 가장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하는군요.
부드러운 식빵 두서너 개,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 담배 한 모금, 따뜻한 물로 샤워 한번 하는 것...
수용소 생활이 막바지에 도달했을 때에는 하루에 단 한번밖에 빵이 배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수감자들은 그 한 덩이의 딱딱하고 보잘 것 없는 빵을 어떤 방식으로 먹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끝도 없는 논쟁을 벌였답니다.
생각은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그 중 한편은 빵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다 먹어치우는 것이 낫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에 다 먹게 될 때 비록 잠깐 동안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하루에 한번은 극심한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도둑맞거나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는 장점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편은 배급받은 빵을 여러 차례에 걸쳐 야금야금 나누어 먹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자는 수용소의 일상 안에서 이런 순간을 아주 큰 은총의 순간으로 여겼답니다.
고된 하루 일과가 끝난 후, 잠자리에 들기 전, 아주 짧게나마 자유시간이 주어졌는데, 사람들은 그 시간 동안 이를 잡았습니다. 가끔씩 공습경보가 울리면 전등불이 꺼지곤 했는데, 그럴 경우 이를 제대로 잡지 못하게 되고, 밤새 이의 공격으로 잠을 설치곤 했답니다.
그래서 이 잡는 시간,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고 희미한 전등이 그나마 켜져 있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행운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루 일과가 끝난 수감자들은 취사실로 들어가 줄을 길게 서서 기다리는 데, 수감자들은 다들 요리사 F 앞으로 난 줄에 설 때 그렇게 다행스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빠른 속도로 수프를 퍼주면서 그릇 내민 사람을 쳐다보지 않는 유일한 요리사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친구나 고향 사람들에게는 몇 알 안 되는 감자를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위에서 살짝 걷어낸 희멀건 국물만 주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던 공평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랍니다.
이렇게 보니 행복이란 참으로 상대적인 것 같습니다. 정말 행복해야할 사람이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 그래’하며 사는가 하면, 정말 행복할 구석이란 단 한군데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행복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각자 나름대로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대단한 이유는 비극 속에서도 낙관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 숱한 비극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지속적으로 ‘예스’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대단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고 당부하십니다. 등불을 켜놓고 있으라는 말씀은 불안초조해하며 있으라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전전긍긍하며 기다리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 하느님 은총의 선물인 앞으로의 삶, 최대한 행복하게 만끽하며 지내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사방이 온통 고통으로 둘러 쌓여있다 할지라도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기쁜 얼굴로 지내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설을 맞아 오랜만에 가족, 친지들과 한 자리에 앉아 계시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마음은 굴뚝같으나 홀로 고독을 씹으며 지내는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괴로우실까요? 얼마나 외로우실까요?
그러나 너무 힘들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시기 바랍니다.
‘아, 그래도 거기보다는 여기가 낫지 않은가?’ ‘그나마 나는 아직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시며 다시 한 번 마음을 추스르시기 바랍니다.
존재하는 한 희망이 있음을, 살아있는 한 가능성이 열려있음을, 그래서 끝까지 여유와 유머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만 합니다. 부디 매일 다가오는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삶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삶
-정인준 신부-
몇 년 전, 사무실에서 일하던 한 자매 때문에 힘든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곳 일을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얼마 있다가 자신을 헐뜯는 내용이 든 익명의 편지를 받았나 봅니다. 그는 그 편지를 여러 장 복사해서 함께 근무하던 몇 사람에게 보냈습니다. 나중에서야 그의 숨은 의도를 알았습니다. 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지 그는 그 편지를 제가 보냈다고 몇 사람에게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란 그 편지 겉봉 우표에서 제 지문이 판독 결과로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거짓말하는 것이 어이없기도 해서 그 판독 자료를 보내달라고 요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계속 저에 대한 인신공격의 글을 보냈습니다. 결국 오고갔던 말들 때문에 감정의 골만 깊어졌지 무죄가 증명된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누명을 쓰고 침묵을 지켰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뒤늦게 했지만, 왜 그땐 그렇게 속상하고 약이 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괴편지나 보내는 “치사한 신부”라는 소문이 왜 그렇게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남들에게 착하고, 열심하고, 신심이 깊고… 그렇게 인정받고 드러나고 싶어 하는 허상에서 서성이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제 부족함 때문에 씁쓰레한 심정입니다. 오늘 주님 말씀에서 드러나는 외적인 행동에 대한 묵상과 함께 뜻 있는 사순절을 보내고 싶습니다.
진정한 복
-김은주 수녀-
오늘 우리는 ‘복’에 대한 말씀을 듣는다. 주님께서는 모세의 축복을 통해 당신께서 복을 내리시고 지켜주시고 은혜와 평화를 베푸시겠다고 하신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는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줄기 연기일 따름이므로,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동안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우리의 본분에 대해 말한다. 예수께서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고 하신다. 그렇게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의 모습으로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신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의 내용을 보면, 그것은 인간의 영역 넘어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어떤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복’을 깨어 기다리는 자세로 사는 것이 곧 행복임을 알려주신다. 시골 마을에 세 아들을 둔 농부가 있었다. 임종이 다가온 것을 안 농부가 세 아들을 불러놓고 “내가 우리 밭에 보물을 숨겨놓았으니, 너희 중에 그것을 찾는 사람이 갖도록 하여라.”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세 아들은 밤낮으로 보물을 찾기 위해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보물을 찾고 싶은 욕심에 땅을 파고 또 파헤쳤다. 여러 해가 지났다. 그들은 보물을 찾지 못했지만, 날로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묻어두었다는 진정한 보물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예수께서 깨어 기다리는 자세로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런 뜻이 아닐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상선신부-
설을 맞이하여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가족들을 만나는 기쁨에 많이 분주하시지요. 이럴 때 일수록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이들도 함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저희 수도원에서도 어제 저녁 설날 기념 놀이를 하였습니다. 24-5명의 형제들이 4개조로 나뉘어 빙고게임, 재기차기(단체전, 개인전), 윷놀이 등으로 함께 명절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특히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중국신학생들과 필리핀 신부님들에게 가족의 그리움을 달래는 좋은 자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명절이 되어도 친가에는 못가도 우리 영적 가족들끼리 재미나게 지낸답니다.
새해 시작에 우리가 듣는 메시지는 아론의 축복처럼, <복을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복을 받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복을 받기를 원하면 <복을 빌어주라>는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칼 한데 이렇게 맘 씀씀이가 고와야 복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 옛 어르신들이 체험적으로 깨달아 알게 된 진리이기도 하지요.
금년 한해 오늘만이 아니라 365일 내내 남에게 복을 빌어줍시다. 그게 복받는 방법이니까요. 복을 많이 빌어주면 줄수록 그 사람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나에게도 복이 넘치게 흘러 들어오니까요.
이렇게 설날은 남에게 복을 빌어줄 줄을 아는데 왜 평소에는 내 복만 챙기려드는지 참으로 이상하지 않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늘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시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 않으면 또 욕심만 부리는 나니까요.
나이가 한 살 더 먹은 만큼 금년에는 좀더 어른스러워집시다. 어른스럽다는 것은 그만큼 남을 배려하고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이 아니겠어요.
사랑하는 님들, 금년 한해 매일같이 깨어서 복을 빌어줌으로써 축복을 넘치게 체험하는 해가 되길 축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가 상상치도 못하는 축복을 마련해 놓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넝쿨째 굴러오는 복을 무심코 발로 차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봅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또 복을 많이 빌어주십시오.
"주님께서 님에게 복을 풍성히 내리시고, 님을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님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빕니다. 님께서 님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님에게 평화를 베푸시기를 빕니다."(민수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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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 천대웅 신부
오늘은 우리 민족 고유의 설날입니다. 아마 지금쯤 고향 집에서 친지들과 함께 차례를 지내고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기쁨의 시간 속에서도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밤낮없이 독서만 하고 있다면 이런 사람을 우리는 ‘독서광’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람에게도 밥 먹을 때와 잠 잘 때가 있겠지만 그에게 있어 최대의 관심사는 독서일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다른 것은 하지 않고 오직 독서에만 자신의 모든 신경을 집중시킬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종의 모습도 이와 비슷합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은 밤중이든 새벽이든 언제나 깨어 기다립니다. 그 종의 눈과 귀, 그 밖의 모든 감각 기관은 모두 주인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이 내 안에, 나의 삶 모든 곳에 사시게 할 것을 그분께서는 바라십니다. 주님의 이런 뜻에 따르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님 아닌 것을 바라본다든지, 그것을 고집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 돈이나 명예, 어떤 능력있는 사람을 예수님 앞에 놓아두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자’고 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우리를 온전하게 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힘들고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 곁에 친한 동료가 있고, 부모님이 계신다 하더라도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훤히 알고 계시고, 나보다 더 내 마음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 밖에는 마지막까지 우리를 도와주실 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모범이시며, 구세주이시고 스승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만을 따르며 바라본다는 것은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구체적인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삶, 예수님을 위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두고 지금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세상 돌아가는 것도 살피는 나의 시선은 지금 어느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물론 육신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루 24시간 잠도 자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예수님만을 기다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눈길을 돌리며 한가하게 주님을 믿는다면 어느 세월에 신앙이 자라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나의 삶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제 그만 그런 생각과 표현을 과감하게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 일 속에서 예수님이 계시게 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로 고민이 있을 때 예수님께 여쭤보면서 그분과 함께, 그 분의 도움으로 일을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고백했던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온유하고 겸손한 그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간직하고 언제든지, 어떤 처지에서든지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일이 잘 풀리고 좋은 일만 가득할 때 그분을 바라보고 따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련 속에서 고통을 받는 어려운 순간이 오면 우리의 신앙은 유혹을 받게 되어 그분을 따르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럴 때라도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으실 분입니다.
나에게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을 주시며 죄에서 해방시켜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는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내 삶을 봉헌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뽑힌 것입니다. 주님의 일꾼이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의 오심을 깨어 준비하고 있을 때 주님의 나라에 우리는 초대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 그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받기 위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예수님께로 돌리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
참된 그리스도인
-이정호신부-
어느 신부님이 밤길을 가다가 발을 헛디뎌 그만 낭떠러지로 굴렀습니다. 다행히 떨어지는 중간에 나뭇가지를 붙들어 허공에 매달렸습니다. 어두움이 눈을 가려 바닥이 보이지도 않고 얼마나 높이 매달렸는지 알 길이 없던 신부님은 소리쳐 도움을 구했습니다. “살려주세요.” 그러자 위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손을 놓아라.” 그 어처구니 없는 대답에 신부님은 놀라서 “뭐라고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느님이다”라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그 목소리는 “살고 싶다면 그 손을 놓아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손을 놓으면 떨어져 죽을 것 같았던 신부님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소리쳤습니다. “하느님 말고 누구 다른 사람은 없어요?” 복음을 믿고 그 길을 따라 살고 싶다지만 그 길은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는 있지만 안전하게 보이는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정한 평화와 안정은 다른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대로 사는 데에 있습니다. 설날 함께 모인 가족들 안에서 지난날의 미움을 털어버리고 용서와 화해를 이룸으로써 참다운 사랑과 구원의 기쁨을 나누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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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오늘은 우리의 설날입니다. 차례도 지내고 떡국도 먹고 세배도 드립니다. 요즘은 세배의 의미가 세뱃돈에 있는 것같이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만, 세배를 받은 어른들께서는 건강하고 좋은 한 해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기대로 덕담을 해주시지요. 음력 새해 첫날인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덕담은 무엇일까요?
오늘 제1독서는 민수기 6장 말씀입니다. 이 대목은 대축제의 전례, 특히 가장 중요시했던 신년축제 전례가 끝날 때 사제들이 백성에게 어떤 말로 축복을 빌어주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이보다 더 좋은 복이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은 온갖 좋은 것은 하느님한테서 비롯되고, 하느님과 생활을 함께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인식을 전제합니다. 그 하느님의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을 충실히 지킬 때, 곧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 몸의 소생과 너희 땅의 소출도, 새끼소와 새끼양을 비롯한 너희 가축의 새끼들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 28,3-6). 광주리와 반죽통까지 복을 받는다니 신나지 않습니까?
제2독서 야고보서 4장은 장사에만 정신이 팔려 돈 벌 궁리만 하는 사람들, 자만심에 사로잡혀서 자신들이 모든 상황과 생명까지도 다스린다고 생각하면서 돈으로 안정된 삶을 확보하려는 자들에게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4ㄴ-15)라고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정녕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저희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시편 90,4-12)라고 노래한 시편 작가의 가르침과 통합니다. 곧 우리가 삶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인식하며 살아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아침에 피어났다 저녁에 말라버리는 풀잎 같은 인생의 유한한 날수를 셀 줄 아는 것, 베네딕토 성인의 말씀처럼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사는’ 지혜를 말함입니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 날인 듯 진지하게 정성을 기울여 하루를 살 수 있다면 정녕 깨어 있는 날들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말씀은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주님의 당부입니다. 짧은 구절 안에 ‘주인’이란 말이 다섯 번이나 나오니 ‘주인’이 중요한 분인가 봅니다. 깨어 기다려야 할 이유가 주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는 종들이 얻는 보상은 ‘행복’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얻는 행복입니다. 이제는 주인이 오히려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서 시중을 들어주시니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묵시록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깨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제때에 문을 열어드릴 때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깨어 있는 종의 태도는 탈출기에서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과월절 음식을 먹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12,38). 주인이 그토록 기다릴 만한 분이었을까요?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시편 130,6)라고 할 만큼? 사실 보고 싶은 마음, 그리운 마음이 없다면 종들이 주인을 만났을 때 행복해할 리가 없습니다. 깨어 있는 종들은 주인이 맡기고 간 탈렌트를 기쁜 마음으로 능력껏 불려놓은 충실한 종들과도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1테살 5,2) 오지만 그들은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쓰고 깨어 있는 자들입니다.
늘 깨어 준비하고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늘 긴장하고 있으란 말일까요? 어떻게 잠도 자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늘 깨어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우리의 삶을 엮어가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에서 하루의 기둥은 아침·점심·저녁 그리고 끝기도입니다. 기도의 네 기둥 사이사이에 일과가 들어가서 지붕도 만들고, 벽도 만들고 문도 만들어 하루라는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간경은 나머지 일들을 성화시킨다고 믿습니다. 수도자들과 똑같이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새날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그날의 영적 양식으로 복음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 일하면서 틈틈이 그 말씀을 되새기는 것, 밤에 성난 채 잠자리에 들지 않는 것, 곧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듯 정리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을 하루의 중심축으로 삼고, 다른 모든 일이 그 사이에 들어가게 하여 하루가 돌아가게 한다면 분명 우리는 깨어 있는 종으로 사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삶은 광주리와 반죽통까지 복을 받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새해 덕담입니다.
-강영구 신부-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고유의 최대 명절인 설날을 맞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올 한 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또 여러분의 가정이 주님의 평화와 기쁨 누리는 가정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을 대축일로 정하고 우리 겨레 모두와 함께 설날의 기쁨을 함께 나누려고합니다. 설 혹은 설날을 한자로 신일(愼日)이라고 씁니다.
설날 곧 신일이란 근신하여 경거 망동을 삼가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슬기로운 우리의 조상들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첫날에, 그 해의 운수가 결정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이 좋아야 끝도 좋은 법입니다. 그래
서 우리 겨레는 옛날부터 한 해의 첫날을 설날이라고 이름을 짓고 몸과 마음가짐을 경건하고 바르게 가짐으로써, 벽사초복(?邪招福), 즉 사악함을 몰아내고 복을 불러들였던 것입니다.
설날에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기 위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경거 망동하여 화를 불러들이고 재앙을 초래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의 고유 명절인 설날은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리길이 멀다 하지 않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신 조상들을 위하여 제사를 바치는 것도 그 때문이고, 웃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향을 찾음으로써,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됩니다. 고향이라는 텃밭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고향은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고, 친척과 가족들, 그리고 정답던 이웃들이 살던 곳입니다. 고향, 바로 그 속에서,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합니다.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라 하지만, 그러나 타향은 남남이 모여서 사는 곳입니다. 타향에서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두가 남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향은 그렇지 않습니다. 끈끈한 인정으로 서로 인간 관계를 맺고 살았던 곳이 고향입니다. 고향 안에서 나는 조상들의 후손이며, 한 가족의 대를 이어 온 사람이며, 아버지이며, 아저씨이며, 그리고 자식입니다. 그래서 고향은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하며 아늑할 뿐 아니라 나의 위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명절이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고향으로 고향으로 발길을 향하는 것은, 그곳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명절이면 조상들을 위한 차례를 지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조상 제사를 통해서 우리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이며,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온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단순히 우리보다 먼저 가신 조상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조상들의 유업을 기리게 하고, 그분들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로부터 충효(忠孝)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던 우리 겨레는, 이렇게 제사를 통해서 선조들의 유업을 기리게 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법과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법을 터득하게 했던 것입니다.
정조 차례(正朝茶禮), 즉 설날 아침에 조상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나면, 웃어른들에게 새해의 첫 인사를 큰절로써 올렸는데, 이것을 세배라고 합니다. 이 세배 역시 우리 자신들이 누구이며, 또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어른들은 어른답게 아랫사람들로부터 세배를 받고, 절 값과 더불어서 덕담(德談)으로 아랫사람들에게 한 해의 축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아랫사람들은 어른들에게 세배를 함으로써,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자리를 알게 된다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알게 되는 지름길이 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어머니는 어머니답게, 그리고 자식은 자식답게 행동하게 되는 것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풍습을 잘 지키고 따를 때,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경거 망동으로 화를 자초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이며, 그리고 자신이 앉을 자리와 설자리가 어디인지를 구별하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인륜 도덕의 타락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인륜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자신의 신분에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우리의 고유 명절인 설날은 이 땅의 인륜 도덕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참으로 좋은 풍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분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종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지 주인을 반갑게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종은 참으로 축복받을 종입니다. 그러나 종이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마치 주인이나 되는 양 행동한다면 주인으로부터 호된 꾸중과 질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종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란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제대로 깨닫고, 그 위치에서 신분에 걸맞은 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종다운 생활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합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독불장군처럼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서도 안됩니다.
人間이라는 글자가 잘 말해 주듯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사람다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었을 때 여기에 참된 평화와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은, 이런 관계를 바르게 해주는 축복된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명절을 우리에게 물려주신 우리 조상들은 오늘 우리와 같은 신앙 생활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더 철저한 신앙인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알았고, 돌아가신 부모님들은 물론이지만 살아 계신 부모님들을 잘 모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우의를 나누는 데도,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만큼 철저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고유의 명절을 잘 지냄으로써 우리 조상들의 삶을 본받아야 할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이 아름다운 전통을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산업화, 도시화되면서 옛날 우리 조상들이 물려주었던 아름다운 전통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서양의 온갖 사조와 풍물들이 밀려와도 우리가 우리의 것을 제대로 지키기만 한다면, 우리 민족 우리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본받아서, 우리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의 종다운 삶을 지키는 것이고,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일입니다.
오늘 설날이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 가득한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히 내려서 올 한 해는 모두 건강하시고 또 소망하시는 일들이 성취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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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호 신부-
우리는 오늘 정해년의 첫날인 설을 기념하며 조상을 기억하고 한 해 동안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한 해를 늘 첫날처럼, 늘 마지막 날처럼, 그리고 유일한 날처럼 모든 것을 채우고 비우길 희망합니다.
사람의 마음과 사고능력은 몸과는 달리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뛰어넘습니다. 과거를 오늘 기억하고 미래를 오늘 희망할 수 있으며, 내가 머물고 있는 이 자리를 넘어 지구 저편을 생각하고 때로는 내가 이 세상에 있기 전의 세상을, 그리고 내가 떠난 피안의 세계까지 그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간과 공간을 우리의 뜻대로 조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마음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비록 마음으로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을지라도 시간과 공간은 엄연히 몸짓의 터이면서도 동시에 삶의 제약이기도 합니다. 마음과 몸은 그렇게 물과 그릇과 같아서 따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내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이며 제공된 공간은 ‘여기’일 뿐입니다. 지나간 과거를 되돌릴 수도 없으며 앞으로의 미래는 당겨올 수 없습니다. ‘저기’는 바라만 볼 뿐 내게 허용된 공간이 아닙니다. 오늘의 삶은 영원한 삶을 채워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삶이며, 내가 있는 이 자리는 온 세상을 완성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자리입니다. 내 삶의 ‘지금’과 ‘여기’는 유일함이며 처음이며 마지막입니다. 오늘의 삶이 온전하지 않으면 결코 내 삶의 전부는 온전할 수 없으며, ‘여기’의 삶이 충만하지 않으면 결코 내가 가꾸는 세상이 온전할 수 없습니다. 오늘이 소중하고 이 자리가 귀한 이유이며 그 안에 내 모든 것을 담아야 할 이유입니다. 이렇게 지금과 영원, 여기와 온 세상은 부분을 담고 있는 전부, 전부를 이루고 있는 부분처럼 따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축복이 실현되는 때는 지금이며 하느님께서 지켜 주는 자리는 내가 있는 이 자리입니다(민수 6,24).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에 늘 준비하고 있어야(루카 12,40) 하며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야고 4,14), ‘지금’이 내 생명이 충만할 때이며 ‘이 자리’가 내 삶을 온전하게 실현할 공간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삶을 허락하신 하느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입당송) 동고동락하신다니 삶은 그 자체로 거룩함이며 축복입니다. 내가 늘 만나는 그 사람, 내가 하는 매일의 일이 그다지 유별해 보이지 않더라도 혹은 대단한 것으로 보이더라도 그 모든 것은 처음이며 마지막이며 유일한 하느님의 축복의 선물이기에 내 모든 정성을 아낌없이 담아야겠습니다.
그렇게 정성을 쏟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지금의 이 자리의 삶을 가꾸는 것이 아름다움이라면 때가 되어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나는 것 역시 아름다운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떠남, 곧 죽음이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때가 되어 비우고 물러나는 것도 축복입니다. 아낌없이 채우고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세 개의 고향을 가진 행복한 신앙인 -이기양 신부-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 이래요."
신이 나서 노래 부르며 설레는 마음으로 가래떡이 쏟아지는 방앗간을 서성대던 어린 시절 설날이 떠오릅니다. 새벽부터 친척들이 모여들면 떡국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설빔을 차려입고는 어른들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를 드리고 기쁜 마음으로 받았던 세뱃돈도 그립습니다. 천주교 집안인지라 차례는 지내지 않고 성묘만 했던 그 좋은 날이 새삼 그리운 오늘, 축복의 설에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축복받는 법에 대해서입니다. 오늘 독서인 민수기에서는 사제들을 통해 백성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데, 사실 복이란 그 복을 받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주고 싶어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가뭄에 비가 아무리 쏟아져도 그릇을 준비해야 단비를 모아 받을 수 있듯이, 복 받을 준비가 돼야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복 받을 준비란 아주 단순합니다. 새해 첫날 하듯이 남에 관해 좋은 것을 말해주고 빌어주며 부족한 부분은 감싸주는 것입니다. 1년을 이런 마음으로 산다면 설날인 오늘 서로서로 축복해 주고 하느님께 청했던 복이 1년 내내 지속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저는 여러분에게 세 개의 고향(故鄕)을 가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고향이 세 개나 되나?"하고 놀라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세 개의 고향이란 이렇습니다.
첫째는 육신의 고향, 즉 내가 태어난 곳이고, 둘째는 신앙의 고향, 즉 하느님을 알게 된 곳이며, 셋째는 영원한 고향, 즉 우리 조상이 계시고 내가 죽은 후에 가야할 궁극적인 곳입니다.
첫 번째 육신의 고향은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고향입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지요. 오랜만에 찾아가도 어린 시절 추억이 배어 있고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낯설지 않으며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곳입니다.
두 번째 고향인 신앙의 고향도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저에게는 육신의 고향보다 더 중요한 신앙의 고향이 있습니다. 바로 사제로 수품된 성당입니다. 신부 생활이 그저 기쁘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은 서 있는 길이 안 보일 정도로 화가 나거나 낙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가끔 제가 사제품을 받은 성당에 가서 기도합니다. 나를 그렇게 만든 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나를 사제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기도합니다. 그러면 순식간에 다시 힘이 살아나지요. 사제로서 첫 마음이 다시 회복됨을 느낍니다. 신앙의 고향이 주는 이 신비한 힘을 알기에 저는 여러분들에게 신앙의 고향을 가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신앙의 고향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쉽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은 곳이 신앙의 고향이 될 수가 있습니다. 정말 어렵고 힘들 때 내가 찾아갔던 그 성당, 거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위로를 받았다면 바로 그 성당이 신앙의 고향이 될 것입니다. 또 내가 결혼했던 성당이 신앙의 고향이 될 수도 있지요. 배우자와 일생을 함께할 것을 하느님과 많은 친지들 앞에서 서약하고 맹세했던 그 성당, 그리고 부부 사랑의 결실인 아이를 낳아서 유아 세례를 시켰던 그 성당은 신앙의 고향이 돼 큰 힘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고향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제일 중요한 고향이 있습니다. 옛날부터 많은 신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본 고향, 근본적 고향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갑니다. 영원한 하느님이 계신 그 곳, 우리 선조들이 이 세상을 떠나서 돌아간 그 곳, 본 고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신앙인이 돌아가야 할 곳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 고향을 믿고 희망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육신의 고향, 신앙의 고향, 본 고향, 이렇게 세 개의 고향을 가지라고 말씀드립니다. 찾아갈 육신의 고향만 있어도 행복할 텐데 나에게 힘을 주는 고향이 세 개씩이나 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 중에서도 우리 선조들이 가 계신 영원한 고향, 본 고향이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다 죽습니다. 영원한 고향이 있는 사람은 죽음에서조차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믿기에 이 세상의 삶이 더 행복하고 죽은 뒤 더 큰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세 개의 고향을 다 가진 행복한 여러분 되시기를 바라며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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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자기를 버리는 것... -강정웅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뒤를 따르는 행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두 가지 전제를 다십니다. 그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과 ‘매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당신 자신을 온전히 십자가의 죽음에 맡기셨고, 그것도 모자라 매일 우리들의 밥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우리 생명의 양식으로 아낌없이 다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말로서가 아닌 행동으로서 이렇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체험한 우리는 이제 그 모범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손수 보여주신 모범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수적으로 따라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버리는 것, 죽이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ㄱ)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 있도록 자신을 버리고 비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 내킬 때에 어쩌다가 한 번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지속적이고 항구하게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고 행복할 때에만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처지나 상황에서라도 흔들림 없이 예수님의 길, 고난의 십자가 길을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오직 한 분이신 스승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 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그대로 본받으려 합니다. 예수님을 뒤따르는 제자로서 개개인에게 주어진 몫이 ‘자기를 버리는 것’과 ‘매일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신앙 공동체에게 주어진 몫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앙 공동체가 올바른 길, 주님을 따르는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들 각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주장만 강하게 내세우기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면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신명기에서는 모세가 백성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그것은 너희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신명 30,19-20ㄱ).....모세는 오늘 우리 앞에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 복과 저주를 내놓습니다. 생명과 행복과 복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죽음과 불행과 저주를 택할 것인지 하는 것은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들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선택은 우리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써 생명과 행복을 얻을 것인지, 아니면 자기를 내세우고 매일 제 십자가를 내팽개치는 삶으로써 죽음과 불행을 얻을 것인지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온전히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충실히 따를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합시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희망 속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신앙인은 결코 요란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봄을 알리는 새싹이 드러나지 않게, 아무도 모르게 새 생명을 시작함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 은혜로운 사순 시기를 맞이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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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