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부 개인전
정의부의 낭만과 판타지아세계
나의 공간은 단순화된 형체와 색채로 정리되고 그 속에서 무한한 상상의 나래로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다.
따라서 나의 공간은 단순화된 형체와 색채로 정리되고 그 속에서 새로운 꿈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그런 세상이 된다.
글 | 박용숙(미술평론가)
[2009. 10. 14 - 10. 20 인사아트센터]
[인사아트센터]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02-736-1020
홈페이지로 가기 http://www.insaartcenter.com
어릴 적 저 남쪽 시골고향에서 철새들의 묘기에 넋을 잃고 바라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자란 나는 그림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이 방면에는 전혀 소질도 취미도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고1이던 어느 날, 옆집에 사는 미술반 반장 집에 놀러갔다가 그냥 그의 흉내만 내 보았는데!! 이것이 내 평생의 업(業)이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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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였던 내가 마지막엔 이런 저런 고충을 겪으면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림을 한 시도 떼놓지 않고 그려온 지 이미 고희를 넘고 있다. 그럭저럭 그림으로 50년이란 세월을 살아오면서 숫한 좌절과 희망이, 안타까움과 즐거움이 교차하면서 내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그래도 지금까지 잘도 버텨왔다.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이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살아간다면 이 역시 군자의 길이 아니겠느냐”는 뜻의 (人不知而不慍이면 不易君子乎也)라는 이 구절이 지금까지 나의 자존심을 지키며 나를 지탱하며 내 손에 붓을 쥐게 하며 하였다. 새들에 대한 나의 추억은 하나의 환상이요, 또 다른 미지의 세계다. 새들이 사는 곳은 인간이 살 수 있는 과학으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세계다. 그 속에서 나는 고향을 찾고 파라다이스를 찾으며 환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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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간은 단순화된 형체와 색채로 정리되고 그 속에서 무한한 상상의 나래로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다. 따라서 나의 공간은 단순화된 형체와 색채로 정리되고 그 속에서 새로운 꿈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그런 세상이 된다. 그것이 나의 그림세계요, 새들의 공간이다.
작 가 노 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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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풍경화라고 하면 양화를 뜻하지만 정의부의 풍경화를 보면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사실 오랫동안 우리는 양화에서처럼 화려한 색채화는 아니더라도, 우리 나름의 풍경화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산수화라고 말하지만, 어쨌건 발상적으로는 그것도 양화와 마찬가지로, 자연에 대한 동경심을 나타낸 그림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단지 자연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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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의부가 이 점을 누구보다도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독특한 색체미학이나 자유로운 공간해석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런 현상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풍경화의 역사가 전적으로 인류의 낙원 콤플렉스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풍경화의 기원은 낙원사상에 있으며, 이때 낙원이라는 말은 고대 이란어의 ‘Paradise’에서 왔다. 하지만 낙원은 결코 서양미술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고전소설을 통해서 동자를 거느린 신선들이 사는 불로장생의 낙원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유럽보다도 더 먼저인 12세기 중국의 자연시인 도연명(陶淵明)은 낙원에 대한 시를 지었고, 그 시(桃花源記)는 사실상 송나라 시대의 모든 산수화가들의 바이블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대가 훨씬 뒤가 되지만 18세기 유럽 낭만주의 화가들이 자연풍경을 그리는데 심취했던 것도 낙원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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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화는 단지 바라보고 서 있는 그림이 아니라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가 있다거나 혹은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처럼 우리는 정의부의 풍경그림 앞에서 색채와 공간이 우리에게 환상을 불러내게 한다는데 있다. 그러니 이 유혹은 모든 사람의 명제가 아니라 사악한 것에서 벗어나 있는 복 받은 사람들의 몫이라고 해야 옳다. 그것은 일찍이 칸트가 ‘무관심’이라고 했던 그 순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