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조금은 지난날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지난 시즌 전기리그의 가장 큰 이변은 바로 부산의 예상치 못했던 우승이었다. 대전과의 경기를 무승부로 마치고 전기우승을 확정짓던 그날, 부산 서포터스 POP는 골키퍼 김용대를 전기리그 우승의 1등 공신으로 추켜세웠다. 모든 선수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어느 한 명을 꼽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김용대가 전반기 동안 펼친 활약에 의문부호를 다는 사람들은 없었다. 팀 내의 다른 선수들조차 김용대가 부산의 득점왕이라며 추켜세웠다. 매 경기 두 세 개의 실점을 막아내는 활약에 혀를 내두르며 지어낸 ‘최고(?)의 칭찬’ 이었다.
돌이켜보면 아쉬웠던 한 시즌이 끝나고 새롭게 한해가 밝았다. 전기리그 우승을 이끌었지만 후기리그 동안 끝없는 나락에 빠지며 비참한 기분을 맛봤고 국가대표 명단에 꾸준히 이름을 올려왔지만 결국 주전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대표팀에서 탈락하는 안타까움도 느꼈다.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했던 2005년. 그 한해를 뒤로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김용대를 찾아갔다.
부산 아이파크가 휴가를 마치고 동계훈련을 시작한 지 3일 째 되는 날이었다. 김용대의 얼굴을 보니 생각보다 많이 그을린 모습이다. 궁금증은 일단 뒤로 하고 휴가기간 동안의 근황을 물으니 의외로 쉽게 답이 나왔다. “아는 사람들 만나러 서울이랑 여기저기 다녀왔어요. 고향인 밀양에도 갔다왔구요. 그리고 (심)재원이 형이랑 스키장에 보드 배우러 다녀왔습니다. 잘 타지 못해서 계속 넘어지고 사람들은 또 알아보고 그러니 얼마나 창피하던지.” 행여나 다치면 어쩌냐고 물으니 손사래 치며 그럴 일은 없단다. “직업이 맨날 땅바닥에 넘어지는 일이라 숙련이 되어 있어요. 안 다치고 넘어지는 법을 터득했죠.”
웃음을 자아내는 예상 밖의 농담을 들으니 행여나 힘든 인터뷰가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기우가 되 버렸다. 편한 마음을 가지고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갔다.
도입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굴곡이 많았던 부산의 지난 시즌이었다. 롤러코스터를 탔다는 표현이 적합할지 모르겠다. 정상의 기쁨을 맛보기도 하고 절망의 나락에 까지 빠지기도 했다. 팀의 주전 골키퍼였으니 김용대 본인 역시 그 굴곡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간단하게 지난 시즌의 느낌을 부탁했다.
“아쉽기도 하고 조금은 어이없기도 하고 그랬던 시즌이었습니다. 전기리그 우승할 때 까지만 해도 너무 좋았죠. 저희 선수들조차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던 우승이었으니까요. 정말 하나의 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수들 11명이 함께 뭉쳐져 엄청난 힘을 만들어냈고 뭘 해도 다 마음먹은 대로 되었거든요. 그런데 후기리그 부터는 그 반대였어요. 이상하게 뭔가 부족하고 뭘 해도 다 안 되고 선수들도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고 그렇게 악순환이 반복되었죠. 저희들도 힘들었지만 감독님도 고생이 참 많으셨어요. 한 10년은 늙었을 것 같습니다. 경기 끝나고 미팅에서 매번 다음경기는 이기자며 다짐을 했는데 결국은 다짐만 계속 하다가 시즌이 끝나버렸어요.”
<사진-부산아이파크>
군 입대 연기도 그런 아쉬움이 녹아 있는 선택이었다. 지난 시즌 끝나기 전 까지만 해도 올 시즌은 광주 상무의 김용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짙은 아쉬움과 미련에 ‘1년 더’를 외쳤다. 부산에서 무언가 하나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단다. 개인적으로도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고 홀가분하고 입대하고 싶은 김용대였다. 그런 덕택에 올 시즌은 군인에서 민간인이 된 정유석과 주전 경쟁을 펼치게 되었다.
“우선 유석이 형이랑은 정말 친해요. 저 보다 두 살이 많은데 중고등학교 선배거든요. 부산에 입단해서도 같이 방 쓰면서 많이 친해졌구요. 주전 경쟁을 한다는 느낌 보다는 저랑 마음이 통하는 동료가 온다는 생각에 기쁘구요. 실력이 뛰어난 형이 오니깐 같이 열심히 하도록 해야죠. 올 시즌은 팀 수비라인에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재원이 형도 돌아오고 좋은 선수들이 보강이 될 것 같아요. 그 선수들과 수비 호흡을 잘 맞출 수 있도록 신경 쓰는게 주전경쟁 걱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 아니겠어요?”
우문에 현답이 나왔다. 벌써 K리그 4년차에 접어드는 주전 골키퍼니 가치관도 분명했고 또한 틀림이 없었다. 그렇다면 질문의 방향을 바꿔 K리그 공격수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느낌을 물어봤다. 네 시즌 동안 100경기가 넘는 출장 경험을 십분 활용해 주길 바라면서.
“우선 특정 팀의 공격이 무섭기 보다는 외국 용병들의 공격이 참 까다로워요. 타이밍이 반 박자 빠르고 템포가 독특하거든요. 그만큼 예측하기 어렵죠. 누구를 꼽기 어려울 정도로 공격 탑 랭커에 이름을 올린 외국선수들 모두가 그래요. 작년에 같이 뛰었던 선수들 중에서는 뽀뽀가 좀 힘든 스타일이었습니다. 뽀뽀는 슈팅 타이밍도 어렵지만 슛팅이 너무 강해서 막는데 힘들어요. 연습할 때 눈치 없이 세 개 공찰 때는 너무 미웠습니다. 국내 공격수들도 그런 모습을 잘 배운다면 더욱 성장할 거 같습니다.”
골키퍼란 포지션, 축구경기에 있어서 상당히 특이하고 또한, 중요한 포지션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외로운 자리다. 어떻게 해서 골키퍼 김용대가 되었는지 궁금했다. 큰 기대와 달리 들은 답은 고작 ‘우연히’, ‘어쩌다가’였지만 아무튼 우연 치고는 참 좋은 우연인 듯 했다. 이렇게 프로선수로 유명한 골키퍼가 되었으니 말이다.
“특별한 계기는 없고 어릴 때 우연히 맡은 포지션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네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의 꾐(?)에 넘어가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얼마 안 있다가 그만 뒀어요. 처음 몇 경기는 필드에서 뛰었는데 어느 날 골키퍼가 안 나온 거예요. 그래서 우연히, 정말 우연히 제가 뽑혀서 골문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사실 축구부에 인원이 별로 없었거든요. 처음 그렇게 골키퍼를 하게 되다보니 어느덧 제가 골키퍼로 고정이 되어버렸더군요.” 다른 포지션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지 덧 붙여 물었다.
“다른 골키퍼들 보면 필드플레이 경험이 많은 선수들도 있는데 저 같은 경우는 계속 골키퍼 고정이었어요. 중학교 때 까지는 지겹고 심심했죠. 공도 자주 안 오고 나도 뛰면서 골도 넣고 싶고 실점하면 욕먹고. 그렇지만 고등학교 진학하면서 점차 발전하는 모습을 보니깐 골키퍼란 포지션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사실 참 축구경기에서 특별한 임무를 가진 사람이 바로 골키퍼잖아요. 다른 선수들이랑 유니폼도 다르고 발이랑 손 모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은근히 매력이 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그런 특별한 임무에 대한 자긍심과 그 누구보다 경기에 큰 영향을 주기에, 책임감을 그 누구보다 많이 가져야 하는 포지션이죠.”
골키퍼 김용대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99년 청소년 대회를 준비하는 U-19팀에 뽑히면서 부터이다. 당시 청소년 팀은 이동국, 김은중, 설기현, 송종국 등이 포진되어 있던 스타군단이었다. 더구나 98월드컵 직후 한국축구판에 불어 닥친 오빠부대의 열풍은 청소년 대표팀에게도 고스란히 옮겨졌던 상태. 김용대 역시 헌칠한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 덕분에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는 것은 자신의 실력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청소년 대표팀에 처음으로 뽑혔는데 당시는 제 체격적인 조건이 큰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중학교 3년 동안 30cm 가까이 크면서 지금의 키와 비슷하게 되었거든요. 처음에 뽑혔을 때만 하더라도 저는 2순위 였는데 운 좋게 1순위였던 선수가 실수를 많이 하는 틈에 제가 주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되었죠.”
99년 나이지리아 대회에서 아쉽게 1승 2패에 만족해야 했던 당시 청소년 대표팀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다시금 의기투합했다. 올림픽 팀의 수문장 역시 김용대의 몫이었다. 사실 동년배의 골키퍼 중에는 그와 대적할 선수가 없었다. 하지만 즐거운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99년 일본올림픽팀에게 당한 2연패는 잊을 수 없어요. 원정 가서는 4:1로 졌고 홈에서는 1:0으로 졌죠. 그 전까지 승승장구하던 저희였는데 일본전 2연패로 상황이 완전 뒤집혀버렸습니다. 언론들도 난리가 났었고 팀 내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았었죠. 하지만 결국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고 호주행을 확정 지을 수 있었습니다.” 시드니 올림픽은 결과적으로 김용대에게 짙은 아쉬움이었다. 2승1패를 하고도 조별예선에서 탈락을 한 것이다.
“팀 분위기는 정말 좋았어요. 이번에는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죠. 첫 경기(스페인0:3패)를 어이없이 지긴 했는데 경기 끝나고 나서도 그렇게 낙담하지는 않았습니다. 남은 두 경기를 잡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남은 두 경기를 이겼는데 돌아오는 소식은 예선 탈락이었어요. 무척 아쉬웠습니다.”
비록 청소년 대회와 올림픽에서 두드러진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두 번의 국제대회를 통해 김용대는 적지 않게 성장했다. 언론의 관심 속에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보였고 외국 선수들에 대한 경험도 많이 쌓을 수 있었다. 그렇게 2000년대 초반까지 김용대는 김병지-이운재에 이어 대한민국의 골문을 지킬 차세대 수문장으로 자리매김 해 나갔다.
그러나 정작 온 국민이 열광했던 2002년의 감동은 김용대를 빗겨갔다. 꾸준히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지만 정작 최종 엔트리에는 들지 못했다. 항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던 김용대에게 처음으로 드리워진 큰 장벽이었다. 2002년 월드컵과 관련된 김용대의 잘 알려진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바로 ‘김용대 아이스크림 사건’. 대표팀 소집 당시 김용대에게 살을 빼라고 특별히 지시를 했던 히딩크 감독이 김용대가 식사 후 아이스크림을 한 아름 퍼가는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하며 그를 대표팀에서 제외시켰다는 이야기다. 김용대에게 있어서는 두고두고 아쉽고 쓰라린 추억일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모름지기 한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서는 그 일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래야 진실을 알 수 있다. 이 사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히딩크 감독의 입에서만 나온 이야기만 널리 퍼졌으니 김용대 본인의 입장도 들어 볼 필요가 있었다. 해명을 부탁했다.
“저로서는 정말 억울하고 어이없는 일입니다. 아이스크림을 먹은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히딩크 감독이 봤다던 그 많은 양의 아이스크림은 다 제 것이 아니었거든요. 같이 밥을 먹었던 테이블의 다른 선배들의 것까지 퍼서 같이 먹는다고 했던 건데 그 모습이 히딩크 감독에게는 전혀 엉뚱하게 비춰진 거죠. 당시 해명을 하려 했지만 쉽게 기회도 나지 않았고 말 해봤자 구차한 변명이 될 뿐이었어요. 그것 말고도 다른 일들이 있었는데 돌이켜 보면 히딩크 감독과는 인연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 앞서 실력으로서 증명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고요.”
빛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따라오기 마련. 2002년 월드컵 대한민국에는 눈부신 빛이 났다. 하지만 김용대는 그 빛 이면에 감추어진 그림자에 머물러 있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부활한 라이온 킹’ 이동국이 2002년 월드컵 당시의 심정을 털어놓은 기사가 축구팬들 사이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대표팀 최종 엔트리 탈락 후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 동안 한국의 경기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며 시련에 빠져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김용대가 겪은 아픔 역시 이동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으로 겪었던 너무나 큰 시련의 시간이었다.
“일부러 경기를 보지 않았습니다. 너무 속이 상했거든요.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 자리에 내가 함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절실히 원했었는데 현실은 그 반대가 되어버렸잖아요. 상실감과 허탈감이 온 몸을 휘감았습니다. 하지만 온 나라가 들썩들썩 했는데 저 혼자서 경기를 보지 않는다고 모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그렇게 2002년 월드컵동안 가슴앓이를 하면서 많이 위축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언제나 성공만 있었는데 처음으로, 그것도 너무나 중요한 순간에 내리막을 맛보게 되니 심리적으로 크게 흔들렸죠. 그 해가 프로진출 첫 해였습니다. 몸이나 마음에서 너무 쳐져있다 보니까 경기에도 자주 나서지 못했어요.”
하지만 다행히도 김용대는 아픈 시간들을 잘 이겨냈다. 부산의 주전 골키퍼로 도약했고 다시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었다. 부모님과 가족들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일이라고 그 순간을 돌이켰다. “부모님 역시 제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뒤에서 많이 안타까워 하셨어요. 하지만 제 앞에서는 결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죠. 언제나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힘내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릴 번한 순간이었는데 정말 고맙죠.”
선수들을 인터뷰 할 때마다 묻는 질문이 있다. 축구선수로서 가장 기뻤던 순간과 가장 힘들고 그만두고 싶었던 순간들이 언제였냐고. 맞다. 뻔한 질문이다. 하지만 그 질문만큼 선수가 가지고 있는 애환과 굴곡을 쉽게 알 수 있는 물음도 흔치 않다. 일부러 집어 물은 것은 아니지만 힘들었던 순간은 앞서 듣게 되었으니 이제 기뻤던 순간을 물어보았다.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남들과 같이 저도 국가대표팀에 처음 선발 되었을 때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평범하니까 대학시절 이야기를 해 볼게요. 사실 대학을 가고 싶어 하는 축구선수라면 연세대나 고려대 같은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하죠. 저 역시 그랬구요. 그래서 살펴보니 고려대에는 한 학년이 높은 주전 골키퍼가 있었어요. 3년 동안 후보가 될 수도 있었다는 말이죠. 하지만 연세대에는 제가 1년만 있으면 주전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택한 학교가 연세대였습니다.”
“그렇게 진학한 연세대학교였는데 정작 대학팀 경기에는 자주 나서지 못했어요. 청소년 대표, 올림픽 대표 팀 등에 불려 다니게 돼서요. 그리고 대표팀 훈련과 대학팀 훈련을 병행하느라 체력적으로도 조금 어려웠죠.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기쁜 기억을 남기고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4학년 때 추계연맹전 결승전이었습니다. 상대는 고려대였구요. 당시 청소년 대표팀 주축이었던 이천수, 최성국, 김정우까지...정말 호화 멤버였죠. 사실 그 이전까지 전국대회 우승 경험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 경기에서 승부차기 끝에 승리를 거두고 첫 우승을 차지한 겁니다. 비록 많이 알려진 일은 아니지만 제 개인적으로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기뻤던 일이었습니다.”
올해 한국축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사는 바로 2006독일월드컵이다. 행정과 운영의 중심이 월드컵에 맞춰져 있고 대표팀의 전력강화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12월에는 아드보카트호의 전지훈련에 탑승할 23명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2006독일 월드컵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결정적인 옥석가리기가 진행될 중요한 전지훈련이다. 그러나 김용대의 이름을 찾아 볼 수는 없었다. 아직 최종 엔트리가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이번 원정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은 월드컵 대표팀 경쟁에서 상당히 뒤처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냉정한 현실이지만 김용대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아드보카트 감독이 온 이후로 대표팀에 뽑히지 못했습니다. 월드컵 팀에 다시 들어가는 게 어려워 졌다는 것도 느끼구요. 지난 2002년 때도 그랬고 어떻게 보면 저랑 월드컵은 지독하게도 인연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지난 월드컵의 아픔을 겪었기 때문일까? 예상과는 달리 김용대의 표정은 이 대화 가운데서도 그리 나빠지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의 마음을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성숙해진 것이다. “마음을 비워야죠. 제가 할 수 없는 일인데 집착해 봤자 저한테 좋을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월드컵에 출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 4년 동안 다시금 기다려 온 일이구요. 하지만 집착하면 할수록 더욱 나빠질 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것보다는 마음을 비우고 현실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제가 완벽하지 않다면 다시 기회가 온다 해도 잡을 수 없게 되잖아요. 만약 이번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지난 번 처럼 흔들리지는 않을 거구요.”
현실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현재에 만족한다는 것은 분명 아니다. 모다 먼 미래를 보고 준비를 해 나가는 과정의 하나인 것이다. 더구나 ‘골키퍼’아닌가? 그 누구보다 선수로서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현재에 급급해 허둥대서는 더더욱 안 된다. 다행히도 김용대는 그 진리를 이미 깨닫고 있었다.
“골키퍼 김용대는 적어도 2014년까지는 그라운드에서 그 모습을 찾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제 나이 35살 까지죠. 아직 많은 시간과 기회가 저에게는 남아있어요. 현재의 내 모습에 조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부산 아이파크의 수문장으로서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 김용대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멋진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비록 이번 시즌을 마치면 입대를 해야 하지만 제대 한 후 더 뛰어난 골키퍼가 될 수 있도록 할 거구요. 많은 팬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골키퍼 김용대로 기억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김용대와의 인터뷰는 쉽지 않은 자리였다. 지난 시즌, 끝내 팀의 우승을 일궈내지 못했었고 대한민국 대표라는 정상의 자리에서마저 한 발짝 물러나 있는 김용대였다. 어쩔 수 없이 선수의 아픈 곳을 끄집어내며 다시 한 번 상처를 건드려야 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김용대는 더 이상 상처에 아파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아파도 참을 줄 알고 아물게 하는 법을 아는 듬직한 성인이었다. 비록 지금은 스포트라이트에서 잠시 벗어나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그의 멋진 모습이 화려하게 빛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확신한다.
김용대 선수... 성남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길 바랍니다 ㅠ_ㅠ
암튼 김용대 선수 트레이드는 잘할거 같네요... 어차피 1년있다가 상무가고 오면 FA되니...
암튼 김용대 선수 새로운 시작 잘하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첫댓글 김해운있는데 과연주전할까? 성남골리 김해운-김용대-박상철-양영민-전상욱 5명이나 됨 김해운은 예전부터주전이엿고 양영민 04챔프떄 많이나섯고 2군리그 주전이고 박상철은 05 하우젠컵대회떄 주전으로 나섯고 김용대는 05 부산에서 주전으로 나섯고 진짜 경쟁치열!!
부산팬으로서 아쉽다 진짜-_- 부산의 간판이엇는데ㅜ
어떻게 보면 낳았다고 볼수도 있죠... 김용대 선수 내년 뛰고 나면 상무 가고, fa되죠
저도 그건 알고 잇지만, 그래도 다른팀에서 뛴다는게 아쉽네요ㅎ
김용대선수 열심히 해요~!!
헉 김용대도 성남행?
김용대 선수가 그럼 주전인가요??? 해운이형도 상당했는데.........
아직 누가 주전될지 몰라요
김해운 실책이 가끔 있는 선수죠.삽질하면 김용대 나올듯
아이콘스님이 말머리에 성남다신거 처음보네 ㅋ
ㅠㅠ 인제 성남선수이니깐 달아줘야겠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