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갑 도명문화원장님께서 최근 지리산 다녀 오신 감상문입니다.
도명문화원 홈페이지에서 무단으로 옮겨 붙임니다 .
저작권법 위반이지만 설마 후배를 고소까지야 하겠냐는 거이 제 생각입니다.
일목요연하며 깔끔한 필치로 전문가의 냄새가 풍기는 글로서
산행기의 모범답안을 보는 것 같습니다. 박수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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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왕봉을 다녀오다
서성갑(도명문화원)
기간 2008. 9. 14(일) 12:00 ~ 15(월) 20:20
2008년 추석날인 9월 14일 밤 12시, 지리산 대원사로 가기위해 남부버스터미널에서 진주행 시외버스(말이 시외버스지 27석 우등고속버스, 진주행 고속버스는 진주까지 갔다가 다시 나와야 되기에 시간과 경비가 더 소요됨)에 몸을 실었다. 배낭에는 5식용 쌀, 반찬으로 깻잎과 고추장 그리고 멸치, 간식용 빵(2봉지), 사과(2), 오이(4), 양파즙(6), 취사도구인 버너와 코펠 과 물통 그리고 수저 세트,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1벌)이 들어있다. 너무나 빈약한 산행 준비이다. 당초에는 2박 3일 일정으로 대원사 - 화엄사 구간(50Km)을 종주하려고 한달 여 전에 계획을 세웠는데, 출발하기 하루 전에 사단이 터져 종주를 포기하고 대원사 - 천왕봉 - 백무동을 산행하기로 해서 준비는 대충했던 것이다,
아무튼 버스에 몸을 싣자마자 눈을 감는다. 버스는 쉬지 않고 달린다. 요금소도 하이패스차로를 이용해서 멈춤이 없다. 밤이 늦어서인지 원지에 도착할 때까지 추석연휴 기간임에도 한번의 주춤거림도 없이 단숨에 달렸다. 눈은 감았으되 머리로는 지나온 경로를 그리고 있었다.
02시 50분 원지(지리산 천왕봉을 가기위한 길목인 중산리, 대원사로 가기위해 하차하는 곳)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는 달이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다. 구름이 가득인가 보다. 배낭을 정리하고 개인택시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콜을 하니 조금 후 택시가 왔다. 어쩌다 한번씩 지나는 자동차와 마주하며 25분을 달려 대원사 일주문 앞에서 차를 내렸다. 요금 27,000원(미터기 요금으로)지불하고 수고했다고,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나눈 후 밝은 빛을 비춘 택시는 캄캄한 길에 나를 두고 휭 달아난다.
대원사 일주문 앞에 선 나는 랜턴을 꺼내 주위를 살펴보고 배낭을 어깨에 메었다. 캄캄한 가운데 하늘만 희미하게 윤곽을 나타내고 있다.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오로지 대원사계곡의 물소리만 들린다. 물소리를 위로 삼으며 잠시 걸으니 불빛이 보인다. 대원사다. 시계를 보니 03시 30분, 바루소리가 들린다. “스님들, 일어나실 시간입니다”하는 신호다. 대원사를 뒤로하고 유평마을로 향한다. 유평마을은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목으로 여기까지는 자동차가 다니는 넓은 길이다.
유평마을 등산로 입구는 천왕봉으로 향하는 안내소가 있는 곳도 아니고 조그만 안내판 하나만 있어 자칫 잘못하면 지나기 쉬운 곳이다. 다행히 가로등이 켜 있어 어렵지 않게 산길로 들어섰다. 캄캄하다, 아니 깜깜하다. 숲이 우거져 하늘이 어떻게 생겼는지 윤곽도 없다. 랜턴이 없이는 아무것도 분간을 할 수 없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는 밝은 달 아래서 운치 있는 야간산행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날씨가 흐려져 야간산행의 백미인 보름달 아래에서의 산행이 무산되어 아쉽다. 날씨만 좋았으면 보름달 아래서 유유자작 하는 멋있는 산행이 되었을 터인데 아쉽다. 하지만 어떠랴, 아무도 없는 이 큰 산의 주인이 나인 것은 큰 기쁨이지 않은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깊은 산중으로 나는 떠난다. 비록 몇 시간 후에 다시 복잡한 세상 속으로, 평범한 한 사람으로 돌아가겠지만 …
들리는 소리라고는 졸졸거리며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 내 옷 스치는 소리와 발자국소리뿐이다. 풀벌레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도 없이, 흐르는 물과 나 이외에는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자동차소리, 사람소리로 고요함을 느낄 수 없었는데 참으로 좋다. 거기에 달과 별도 조용히 숨어주었다. 풀 섶 사이로 난, 돌무더기 사이로 난 길을 랜턴으로 비추며 한걸음씩 나간다. 나의 곁에 아무도 없는, 말이 필요 없는, 걱정을 해야 할 일이 없는 이 시간이 정말로 좋다.
길을 찾는 눈이 비교적 괜찮아 걱정은 없다. 한참을 걸으니 물소리도 곁을 떠나 이제 완전한 나 혼자이다. 계곡을 벗어나 능선으로 오르는 중이다.
랜턴에 의지해 어둠을 뚫고 돌길, 나무계단, 철 계단을 통해 능선을 넘으니 발아래 저 만치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희미하게 길도 보인다.
시계를 보니 05시 35분이다. 유평리에서 4시 정각에 출발해서 1시간 35분이 경과했다. 이 시간동안 나는 깜깜한 산중의 주인 역할을 아무 탈 없이 한 것이다. 이제 이 산은 자연으로 돌려주는 시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풀벌레, 새들이 주인일 것이다. 6시가 되니 랜턴이 필요 없을 정도가 되었다. ‘치밭목대피소 1.8Km’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캄캄한 산중 밤길을 4.4Km 걸어온 것이다. 이십여 분 후 지리산계곡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무제치기폭포입구에 도착하였으나 폭포를 보려면 100여m를 내려가야 하는 귀찮음이 있고, 갈 길이 멀어 그냥 통과한다. 마른 계곡을 이리 건너고 저리 건너 치밭목으로 향한다.
아무도 없던 산에서 앞서가던 두 사람이 보인다. 인사를 하니 유평리에서 3시에 출발 - 나보다 더 한 사람도 있네 - 했다고 하며 천천히 가겠다고 한다. 치밭목 대피소가 가까이 되니 대원사로 하산하는 사람들이 이따금 씩 보인다. 저 사람들은 추석차례상을 올리는 것을 생략하고 지리산종주를 한 사람들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7시 10분 치밭목대피소에 닿았다. 식수장에서 물을 가져와 취사준비를 하고 밥이 되는 동안 잠시나마 휴식을 취한다. 오랜만에 해보는 밥으로 매년 지리산에서나마 하는 연례행사다. 다른 곳에서는 취사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 밥이 다 되어 반찬을 꺼내니 깻잎 절임과 고추장 그리고 멸치 -모두 웰빙 식단- 가 전부다. 여러 가지로 준비할 분위기도 되지 않아 초라한 밥상이 되어버렸다. 대피소에 판매하는 반찬이 있나 했더니 반찬이 될만한 것은 없다. 할 수없지,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나? 그런대로 아침식사를 마친 후 8시 15분, 4Km 밖에 떨어져있는 천왕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 후에 써리봉에 올랐다. 중봉과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위를 둘러보니 군데군데 빨간 꽃이 피었다. 진한 단풍이다. 여기는 벌써 단풍이 시작되었네! 오이와 사과와 양파즙으로 요기를 하고 다시 중봉을 향해 오른다. 이 길은 2년 전 역으로 종주를 하던 길이라 간간이 기억이 난다. 쉽지 않은 길이다. 돌아가면 멀 리가 있고 또 다가가면 돌아가 있고 하지만 10시 15분 드디어 중봉에 올랐다. 칠선계곡, 백무동계곡에서 흰 구름이 뭉게구름을 만들며 올라오고 있다. 능선에 닿았다 싶은데 이내 없어진다. 참으로 신기하고 멋있는 장관이다. 반대편인 대원사, 중산리 방향은 옅은 박무만 끼었을 뿐인데, 남과 북이 확연히 다르다.
‘고지가 저긴데’하는 고지가 아닌 ‘천왕봉이 저기에’ 있다. 한참을 내려선 후에 다시 오르막이다. 마지막 오르막이다. 내려오는 사람에게 잘 가시라고 인사를 하면서 오르니 이내 천왕봉이다.
10시 45분, 천왕봉 정상 부근은 각종 풀뿌리들이 뽑혀져있고, 돌들은 이리 저리 자리를 옮기느라 어수선하다. 아마도 폭우와 등산객들로 인해 훼손된 부분을 정비하는 모양일 게다. 이곳에 오르게 된 것을 감사하며 준비한 간식으로 영양을 보충한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 서, 남, 북으로 눈을 돌려 본다. 멀리로는 노고단에서 가까운 곳으로는 연하봉까지 주 능선이 천왕봉을 향해 도열해 있다. 장관이다. 지리산 소리만 들어도, 지리산에 간다고 하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데 이곳 지리산 주봉 천왕봉에서 지리주능선을 바라보는 감회는 비할 곳이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다.
오늘 새벽녘 깜깜한 밤길에 수 없이 고민하고 생각했던, 많고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하면서 왜 한사람에게만 소홀했는지 반성한 것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면서‘새롭게 가자’고 마음을 굳혔다. 이제부터는 가벼운 발걸음이 되리라.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해서 점심식사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내려선다. 마음이 가벼우니 올라오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마다‘얼마 안남았습니다’ ‘힘 내세요’‘수고 많이 하셨습니다’인사하니 한 시간 거리인 장터목이 벌써 목전이다. 참 즐거운 일이다. 어려운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는 일이 … 11시 45분이니 이제 점심을 해결할 시간이다. 점심식사를 하고 가능한 백무동에서 동서울로 출발하는 버스 시간을 보니 14: 50, 16:00, 18:00에 있다. 마음 느긋하게 먹고 코펠에 라면을 사서 끓여 아침에 한 밥을 말아 먹으니 없는 반찬은 자동 해결이다. 배낭을 정리하고 12시 35분에 장터목을 나선다.
참‘장터목’은 예전에 백무동쪽 사람들과 중산리 쪽 사람들이 물물교환 하던 곳(장터)라지! 옛날 어르신들 참으로 고생 많으셨겠다. 모두가 호구지책이거나 자식을 위해 이 깊은 골을 등짐을 지고 올라 물건을 팔고 사가고했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으랴!
아직도 오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수고하시라는 인사를 남기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장터목에서 백무동으로 가는 중간 지점에는 참나무 군락지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몰라서? 아니면 갈 길이 바빠서? 그냥 지나치는 곳이다. 작년 교회 산행 시에 우리의 회장께서 이곳의 참나무 군락지는 세계적인 것이라고 하셨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참나무 군락지는 영국에 있는데 이 곳의 참나무 군락지는 그 것보다 규모가 크고, 나무의 수령도 ‧ 크기도 크다고 헸다. 그런데 우리에게 아직 그런 것이 인식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곳(지리산국립공원)을 관리하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몰라서일까? 이제 세계적인 것이 하나 더 늘어날지 모를 일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남은 길을 재촉한다.
참샘에서 목을 축인 후 너덜 길을 부지런히 내려간다. 아직도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천왕봉을 가겠다고? 늦겠다! 나무사이로 숲이 아닌 곳이 보인다. 민박집에서 운영하는 간이 주차장이다. 이제 다 왔네.
백무동탐방지원센터 옆에 있는 쓰레기 분리수거 대에 치밭목대피소를 지나면서부터 주워온 쓰레기를 버리고 나니 손과 마음이 가볍다. 서울의 북한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도봉산, 북한산성)에서는 주워온 쓰레기를 받지 않으려는 공단 직원들과 싸움 직전까지 가고, 억지로 관리사무소 사무실에 넘겨주고 온 일 있었는데(쓰레기를 받지 않으려면 등산객 눈에 쓰레기가 띄지 않게 당신들이 청소를 하든지, 하지 않으려면 당신들은 필요 없는 사람들이니 내가 낸 나라세금 축내지 말고 집에 가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었다. 이 후에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전화를 해도 아직도 그 타령이다) 이 곳의 지리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백무동탐방지원센터 055-963-1260)는 제 몫을 다 하고 있는 것이다. 칭찬합니다!!!
2시 15분 백무동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여유 있게 무사히 도착을 했다. 표를 사려하니 버스는 2시 50분에 있는데 좌석이 없단다. 4시 버스도 좌석이 없단다. 6시 버스도 … 그런데 6시 버스에 딱 한자리 운전기사 옆 보조석이 있단다. “좋습니다. 그거라도 주세요”해 놓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출발하는 버스에 예약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잽싸게 타려고 버스 앞에서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예약한 승객이 모두 왔다. 이제 1시간 10분 후를 또 기다려 봐야지 …
그 사이 샤워라도 해야겠다.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식당에서는 식사를 하는 등산객에게 샤워장을 빌려주고 있다. 비누와 수건도 주면서 - 인심 좋은 곳이다. 할머니에게 식대를 먼저 건네고 샤워 좀 하겠다니 먼저 샤워부터 하란다. 개운하다. 식사시간은 일러 4시 버스를 못타면 그때 식사를 하겠다고 하면서 식대를 건너니 한사코 받지 않으신다. 흐르는 물을 쓰는데 무슨 돈이냐고, 해서 할머니에게 양파즙을 드리며 건강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4시에 출발하는 버스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출발 3분전이다. 한 사람이라도 오지 않았으면(이러면 않되는데 …) 했는데 출발 직전까지 정말로 딱 한사람이 오지 않아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땡큐! 땡큐! 오지 않은 분 감사합니다. 오늘 고생을 많이 할 날인데 여러 가지로 감사한 일이 생겼다. 추석연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예약을 하지 않은 잘못 - 알았어도 일정을 단축해 백무동으로 하산하리라는 생각을 안했기에 예약을 못했겠지 - 이 있었지만, “우짜든지”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냐? 운 좋게 일찍 버스에 탔으니 …
함양에서 고속도로에 들어선 버스는 대진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며 - 죽암휴게소에서 15분을 것 이외에는 - 한번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곤지암을 지날 때 까지 달렸다. 웬일이니! 추석연휴에 이렇게 차가 없니? 오후 8시 20분,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함으로서 예정하지 않은 지리산 무박산행을 마치었다.
이번 산행이 비록 종주산행에서 구간 산행으로 바뀌었지만, 소득은 더 클지 모른다. 체력은 괜찮았고 - 힘들었거나 피곤함이 없으니 - 마음의 준비는 부족했지만 그것은 다른 것으로 채워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이동, 산행, 취사 및 식사시간 포함 = 20시간 20분
총 산행 거리 = 17.5Km
구간별 산행 결산 (대원사 - 유평마을 - 치밭목 - 천왕봉 - 백무동)
- 거리(총 17.50Km) 1.50 6.20 4.00 5.80
- 산행시간(총 7:45) 0:25 3:10 2:30 1:40
첫댓글 역시 대단하시네요.... 체우산악회에서 목숨 부지하려면 글줄께나 써야 겠어요..걱정입니다.
훌륭하십니다. 선배님....장터목에서 백무동 계곡을 날아 오셨군요....건강하세요
참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부럽습니다. 읽으면서 산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기국대장님 이런 좋은글 있음 또 퍼오시구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