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建省(복건성) |
하천은 지루산지 사이를 흐르는 짧고 작은 것이 많고 하류에는 작은 삼각주를 형성한다. 성내의 가장 큰 강은 민장강[툼江]이며 유역면적은 성 전체의 33% 이상을 차지한다. 특히 하천이 산지를 횡단하는 지대에는 경치가 뛰어난 곳이 많다. 기후는 전형적인 몬순기후이고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 연평균 기온은 20℃, 연평균 강수량은 1,200∼2,000mm이다. 해안지대는 타이완[臺灣] 산맥이 비를 가리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내륙지대의 산지 쪽에 비가 많이 온다. 여름에 비가 많고, 태풍이 몰려오는 경우도 잦다. 산이 많기 때문에 경지면적은 적으며, 계단식 경지가 많다. 옛날에는 식량이 수요에도 못미쳐 많은 해외이민(화교)을 내보내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농업이 발달하여 수입의존에서 벗어났다. 주요작물은 벼이고 연안지대에서는 2기작(二期作)도 가능하다. 상품 작물은 사탕수수 ·차 ·잎담배 ·모시가 많고 사탕수수는 남부 지방, 차는 북부 지방의 구릉지대에서 많이 산출되며, 산지에서는 죽순이 많이 난다. 과일은 감귤류 ·비파(枇杷) ·여주 ·용안(龍眼)이 많고 과수원은 남동쪽 해안지대에 분포한다. 장저우[沫州]는 수선화 산지로 알려졌다. 산지에 삼(杉)나무 등의 용재림(用材林)이 많고 민장강 ·팅장강[汀江] 유역에는 목재 시장이 들어서 있으며 장뇌(樟腦) 등의 임산물이 많다. 이 밖에 해안지대에서는 어업이 성하며 싼두아오[三都澳] ·샤먼[厦門]이 어업의 중심지이다. 둥산[東山] 염전을 비롯한 염전도 많다. 지하자원도 풍부하여 석탄 ·철 ·망간 ·알루미늄 ·구리 ·흑연 ·몰리브덴 ·명반(明礬)이 산출된다. 근래 공업건설이 추진되어 싼밍시[三明市]의 제강소를 비롯하여 철강 ·마방직 ·제지 ·전기 ·의약 ·농약 ·화학 ·제당 ·제다(製茶) 등의 근대공업이 발달하였다. 푸저우 ·샤먼 ·취안저우[泉州] ·장저우 등이 공업도시화 되었다. 특산품으로는 종이 ·칠기 ·자기가 유명하다. 한편 전원(電源)개발이 추진되어 여러 지방에 소규모 발전소가 건설되었다. 지형적 장애 때문에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나 근래 잉샤[鷹厦] 철도와 그 지선 와이푸[外福] 철도가 개통되어 샤먼 ·푸저우에서 장시성[江西省] 잉탄[鷹潭]을 거쳐 다른 성과의 연락이 잦아지게 되었다.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하천이 중요한 내륙 교통로였는데, 민장강은 가장 중요한 통로였으며 난핑[南平]이 항행의 중심지였다. 예로부터 해운이 활발하여 푸저우 ·샤먼 ·취안저우 ·싼두아오 등은 연안항로 이외에 홍콩 ·동남아시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중국의 남동부, 타이완[臺灣] 해협에 면하는 성. 성도(省都)는 푸저우[福州]. 인구 약 2천만중국의 화교는 대개 광동성이나 복건성 출신이다. 특히 홍콩은 광동성 출신, 대만은 복건성 출신이 많다. 청나라 때 복건성 출신의 관리 정성공은 반청운동을 하다 대만으로 갔는데, 이때 같이 간 복건성 출신들이 대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후일 장개석 정권이 본토에서 쫓겨 대만으로 왔을 때 이 복건성 출신과 장개석을 따라 내려온 세력 간에 큰 갈등이 있었다. 그만큼 복건성 사람들은 예로부터 해외진출이 많았다. 대만 뿐 아니라 말레이시아, 싱가폴, 인도네시아 등지로 뻗어간 이들은 현지에서 상권을 잡고 있으며 현재 고향인 복건성에 가장 투자를 많이 하고 있다. 복건성은 산이 많은 지역으로 면적의 대부분이 산지와 구릉이다. 성의 서쪽 경계에 우이 산맥[武夷:杉嶺]이 뻗어 있고 성내에도 이 산맥과 나란히 북동∼남서 방향으로 달리는 다이윈산[戴雲山] 등의 지루산지(地壘山地)가 많다. 해안은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이며, 해안선의 길이는 280 km나 된다. 앞바다에는 둥산섬[東山島]·진먼섬[金門島]을 비롯한 섬들이 많이 분포해 있는데, 진먼·마쭈[馬祖] 두 섬은 타이완의 영토이다. 하천은 지루산지 사이를 흐르는 짧고 작은 것이 많고 하류에는 작은 삼각주를 형성한다. 성내의 가장 큰 강은 민장강[江]이며 유역면적은 성 전체의 33 % 이상을 차지한다. 특히 하천이 산지를 횡단하는 지대에는 경치가 뛰어난 곳이 많다. 기후는 전형적인 몬순기후이고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 연평균 기온은 20 ℃, 연평균 강수량은 1,200∼2,000 mm이다. 해안지대는 타이완[臺灣] 산맥이 비를 가리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내륙지대의 산지 쪽에 비가 많이 온다. 여름에 비가 많고, 태풍이 몰려오는 경우도 잦다. 산이 많기 때문에 경지면적은 적으며, 계단식 경지가 많다. 옛날에는 식량이 수요에도 못미쳐 많은 해외이민(화교)을 내보내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농업이 발달하여 수입의존에서 벗어났다. 주요작물은 벼이고 연안지대에서는 2기작(二期作)도 가능하다. 상품 작물은 사탕수수·차·잎담배·모시가 많고 사탕수수는 남부 지방, 차는 북부 지방의 구릉지대에서 많이 산출되며, 산지에서는 죽순이 많이 난다. 과일은 감귤류·비파(枇杷)·여주·용안(龍眼)이 많고 과수원은 남동쪽 해안지대에 분포한다. 장저우[州]는 수선화 산지로 알려졌다. 산지에 삼(杉)나무 등의 용재림(用材林)이 많고 민장강·팅장강[汀江] 유역에는 목재 시장이 들어서 있으며 장뇌(樟腦) 등의 임산물이 많다. 이 밖에 해안지대에서는 어업이 성하며 싼두아오[三都澳]·샤먼[厦門]이 어업의 중심지이다.둥산[東山] 염전을 비롯한 염전도 많다. 지하자원도 풍부하여 석탄·철·망간·알루미늄·구리·흑연·몰리브덴 명반(明礬)이산출된다. 근래 공업건설이 추진되어 싼밍시[三明市]의 제강소를 비롯하여 철강·마방직·제지·전기·의약·농약·화학·제당·제다(製茶) 등의 근대공업이 발달하였다. 푸저우·샤먼·취안저우[泉州]·장저우 등이 공업도시화 되었다. 특산품으로는 종이·칠기·자기가 유명하다. 한편 전원(電源)개발이 추진되어 여러 지방에 소규모 발전소가 건설되었다. 지형적 장애 때문에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나 근래 잉샤[鷹厦] 철도와 그 지선 와이푸[外福] 철도가 개통되어 샤먼·푸저우에서 장시성[江西省] 잉탄[鷹潭]을 거쳐 다른 성과의 연락이 잦아지게 되었다.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하천이 중요한 내륙 교통로였는데, 민장강은 가장 중요한 통로였으며 난핑[南平]이 항행의 중심지였다. 예로부터 해운이 활발하여 푸저우·샤먼·취안저우·싼두아오 등은 연안항로 이외에 홍콩·동남아시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황보산 [黃檗山(황벽산)] 산악유람구는 태노산풍경구의 주체부분이며 구리조천, 국흥사, 일평와, 호로동, 향산사, 백운사, 천문사 등 7개의 경구를 포함한다. 관광객들이 태노산에 들어오면 첫눈에 안겨오는 것이 기봉, 구름을 이고 선 절벽과 떠돌아 다니는 담담한 안갱와 구름이다. 태노산의 최고봉인 복정봉에는 관해정이 있어 유람객들이 이곳에 올라 하늘과 땅이 이룬 전일체와 크고 작은 섬들이 푸른 바다 사이에 끼어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흔상 할 수 있다. 매일 아침해가 뜰 무렵 혹은 질 무렵의 홍일출동해, 명월괘장공은 특별한 풍경이 아니라고 할수 없다. 또 혹시 비내린 뒤 금방 개인후이면 망망한 안개바다속에서 걷노라면 구름을 타고 다니는 신선이 된듯한 기분이다. 원앙계 -- 원앙계는 주녕린현 병남쌍계진 의양촌 경내에 있으며 시내에서 약 30키로 떨어져 있다. 원앙계의 주요 관광점으로는 백수양, 원앙계, 차계, 수죽양, 고계, 원앙호 등이다. 그 중 가장 특색이 있는 것은 백수양과 원앙계이다. 백수양일대는 림목이 우거지고, 환경이 청아하며 시내 중 3개의 거석이 물밑에 깔려있으며 가장 큰 것의 면적이 4만㎡에 달한다. “백수양”은 “수상광장” 혹은 “십리수가”라고도 한다. 원앙계 일대는 “찰수성연”의 백장찰수렴동이 있는데 이는 전국오대수렴동의 제일이며 그 경치의 수려함은 혀를 찰 정도이다. 우리 나라의 첫 원앙자연보호구이며 많지 않는 진귀한 여행자원이며 병남인민은 원앙의 휴식생존 조건을 파괴하지 않는 전제하에서 원앙계를 점차적으로 관광구로 개발하고 있다. 목전 여행차가 풍경구까지 직통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주숙 할 수 있는 호텔 음식점이 없다. 리어계 -- 리어계는 주녕현 포원촌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시에서 약 5km쯤 떨어져 있다. 지방 역사자료의 기재에 의하면 이 시내에서 잉어를 기른 것은 송말에 시작되었는데 당시 시내가 오염되었는지를 알려고 잉어를 넣어 두었으며 잉어를 잡는것을 엄금하는 규정도 지어 촌민들도 이 규정을 엄수하여 대대로 내려오면서 하나의 자연생태이며 또 독특한 잉어보호구를 형성하였다. 시내의 잉어는 사람들과 가까이하여 사람들의 소리를 듣거나 사람의 그림자를 보면 모여들어 꼬리를 저으면서 물속에서 자유로이 다니느너데 마치 유람객들의 도래를 환영하는듯 싶다. 유람객들이 손으로 만져도 온순하게 있는 모습은 한폭의 인어동낙도를 연상케 한다.포원촌의 잉어계외에 순지향소계촌에도 하나의 리어계가 있는데 포원잉어와 틀린다. 포원잉어는 인어동낙이지만 소계잉어는 평시에 자취를 보이지 않으며 혹간 나타난다. 하지만 사람이 죽판, 혹은 교판 같은 것을 치면 시내 중의 잉어는 마치 집합명령이라도 받은 듯이 신속하게 각곳에서 모여드는데 치는 소리가 급하면 급할수록 빨리 집결하는데 참으로 기관이다. 하여 사람들은 이곳의 고기를 “청음어”라고 한다. 하포적안 -- 적안촌은 하포현에서 성동북 5키로 떨어져 있으며 복녕만 북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 연해의
중요한 대외하구이며 해안의 산석이 적홍색을 띠므로하여 적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당진원 20년(804년) 일본 고승 공해가 17차 전당사 배로 당에 들어가다가 태풍을 만나 적안에서 등육하여 당지의 관민의 방조를 받았다. 공해는 적안에서 40여일 머무른 후 복주를 지나 장안으로 들어가 청룡사의 고승 혜과를 스승으로
모시고 진어종(密宗),중국의 서법, 시, 그림, 조각 등 전통예술을 배웠다. 일본에 돌아간후 불교 진어종을 창간하고 일본 밀종제일조로 되었다. 그 서법예술과 차아천황(嵯峨天皇), 길일세(桔逸勢)삼인은 일본의 “삼필”명수의 영예를 지니고 있다. 오늘 진어종은 신도가 1200여만인이며 사묘 4000여 곳이 있으며 일본 최대의 불교파이다. 당년 공해가 등륙했던 적안은 일본 진어종 불교신도자들의심목중의 승지로 되었으며 매년 비교적
높은 차원의 일본신도들이 여기에 와서 례배를 드린다. 구룡찰폭포 -- 구용찰 폭포는 녕덕지구 주녕현 동남13km되는 지점에 있다. 여기는 해발이 비교적 높고 봉우리가 기이하며 룡강계류가 험아 절벽지간에서 층층이 떨어져 내리는 데 9급의 낙차부동한 크기가 부동한 폭포군을 형성하였다. 그 기세가 웅위하고 경치의 장관은 직접 그곳에 도착하여야 알 수 있다. 유관부문의 측정에 의하면 구급폭포 총낙차는 약 300m, 그 중 제일급폭포의 낙차는 약 47m, 폭포넓이는 76m이며 물이 많을
시기에는 너비가 83m에 달한다. 폭포가 뿌리치는 물보라는 10여m나 달하며 100m외에는 물 안개가 자욱하여
기세가 매우 방대한데 그 아름다움은 저명한 귀주의 황과수폭포와 비길만하다. 폭포의 폭포 우측의 윗 쪽에
직경이 10여m되는 潭穴이 있는데 폭포사이에서 보였다 사라졌다하므로 사람들은 “용안”이라고 한다. 제3,
4급폭포의 낙차는 6~7m, 폭포 너비는 50여m이며 제5급 폭포는 하나의 거석에 의하여 두쪽으로 갈라졌으므로 “용아폭”이라고 한다. 두 갈래의 폭포는 떨어져 내려 천평방미터되는 담을 형성하는데 사람들은 이를 “와룡담’이라고 한다. 유람객들은 여기에서 배를 타고 폭포를 관상하면 또한 별미이다. 제6으로 부터 9급의
폭포는 “사절폭”, 혹은 “사첩폭”이라고 한다. 구급의 폭포는 천자백태이며 “용정”, “용척”, “용각”, “용갑”, “용좌”, “용주” 등 경치는 전부 용으로 명명하였다. 물이 많은 시기 구급폭포가 떨어져 내리는 모습은 마치 구룡이 물에 나타난 듯 하며 그 소리는 우뢰소리와 흡사하다. 구룡찰폭포군은 근년에 새로
발견 개발한 드문 폭포이며 현재 이미 첫번째의 성급풍경명승구에 속하였으며 관광차가 풍경구까지 직통하고
있다. 도원동풍경구내에는 리어석, 귀사진동교, 관음전, 통천정, 비내석, 일선천, 풍동환옥, 선인기반, 풍관정, 양풍대, 망상대, 상비암, 첩채대 등 18곳의 경치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중 “일선천”이 가장 유명하다. 지면에서 우뚝 솟은 절벽에서 길이가 120여m, 높이가 40m이며 너비가 몇 인치밖에 안되며 가장 좁은 곳은 측면으로 지나갈수 밖에 없다. 이렇게 한가닥의 빛밖에 남기지 않은 하늘과 동굴이 이룬 조화는 보기 드물다. 명대의 대여행가 서하객은 자신의 유람기중에 무이, 황산, 부개 에서 볼수 없었던 풍경”이라고 하였다. 도원동과 강을 사이두고 마주보고 있는 것은 갈리, 수죽만, 병여산풍경구, 이며 주로 태극동, 구고천, 보운대, 강선대, 천주봉, 망천괴 등 경치가 있으며 송대 유명한 대신 등노의 고행 및 어릴적 글을 읽던 곳도 여기에 있다. 명대에 세운 병여서원의 유적을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옥화동 -- 옥화고동은 장낙현의 성동남 5키로의 천계산 아래에 있으며 진녕에서 약 60키로 떨어져 있으며 장악 저명한 “삼화”고동중의 하나이며 지금까지 복건에서 발견한 가장 길고 가장 큰 석회암용동이다. 옥화동 내의 암석은 결백하여 옥과 흡사하며 매끄러우므로 소문이 높다. 입구는 “일선풍”의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무더운 여름철에 찬바람이 침입하여 “風洞之最”의 명예를 지니고 있다. 전체 동굴의 길이는 약 7키로이며 두갈래의 주요통로가 있으며 장소, 뢰공, 과자, 황니, 계원, 백운 6개의 동굴이 있으며 3개의 층차이다. 동굴속에 동굴이 있으며 또 석천, 정천, 령천 3갈래의 시내가 있으며 차기를 뼈속까지 스며들며 물이 맑아 밑바닥까지 보인다. “오경요성”의 기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손벽을 칠 정도로 묘하다. 명대 대여행가 서하객은 이 동굴을 “암교쟁기(暗巧爭奇), 편포유오(遍布幽奧)”, “층층유삭옥재운지태(層層有削玉裁云之態)”라고 찬미하였다. 옥허동 -- 옥허동은 명계현의 성동북 2키로 되는 황파산 아래에 있으며 또 적수암이라고도 한다. 전하는데 의하면 옛적에 이 동굴에는 용과 뱀이 당지의 백성들을 해쳤는데 후에 옥허선옹에 의하여 진압되었으므로 옥허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옥허동은 명동, 암동과 외경 3개의 주요경치가 있다. 명동은 옥허동의 주되는 부분이며 도 전동과 중동으로 나뉜다. 암동은 광선이 없어 캄캄한 암흑세계이다. 근년에는 이미 전등 조명을 장치하였다. 주요하게 일선천, 진이석, 선천상, 괴사입동, 동저일월 등 가경이 있다. 명동과 암동의 호상 통하여 있으므로 명동에 들어갔던 기류가 암동으로 새어나오므로 천연 대 에어컨과 마찬가지로 더운 기류를 서늘한 바람으로 변하게 한다. 여행객들은 이곳에 도착하면 발길을 멈추고 휴식을 하며 오랫동안 떠나려 하지 않는다. 태녕금호 -- 금호는 산이 좋고 물이 맑으며 호수와 단산이 서로 어울리고 기봉과 주위의 나무가 전일체를 이룬 한폭의 천연산수화이다. 그 주요한 경치는 백수제폭포, 대적벽, 육지일선천, 공자봉, 수상일선천, 감록암사, 호두암, 정천옥주, 묘아산 등이 있으며 그중 백수제폭포, 대적벽, 수상일선천, 감록사, 묘아산 등이 가장 유명하다. 금호유람선의 제일 첫 경치는 백수제폭포이다. 이 폭포는 상하 두층으로 되어있는데 위가 사제폭포이고 아래가 백수제폭포이다. 백수는 어미봉 구동령에서 발원하는데 폭포소리는 우뢰소리같이 들리며 물보라가 날리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을 이룬다. 상하폭포지간에 평평한 지대가 있는데 현재는 이미 천연수영장으로 건설되었다. 무더운 여름철, 시내의 물은 맑고 푸르러 인어가 함께 즐길수 있다. 대적벽은 천연화병풍으로서 감록사 등안점이남에 있다. 적석기벽은 높이가 약 100여m이고 너비가 약 500m이다. 천만년 대자연의 조각을 거치였으며 절벽에는 여렴풋하게 “선”자와 “수”자가 보일락말락 하는데
유람객들은 그 기이함에 탄복한다. 그외에 또 마아석각, 적벽단아와 초암고혈 삼대 명승구가 있다. 수상일선천은 금호중단에 있다. 배가 이곳에 도착하면 가파르게 솟은 두 봉우리 사이에 틈이 있는 것을 볼수 있다. 높이가 백여미터되고 너비가 2m도 안된다. 물이 많은 시기(7-9월)에라야 배가 지날 수 있으며 수상일선천은 전 호수의 가장 특이한 풍경이며 배가 그 사이를 지날 때 두 봉우리를 바라보면 합치기라도 할 듯 한 기세이다. 배가 액 500m쯤 가면 이 경치의 끝에 이르는데 우측에 하나의 거암이 마치 관음이 련꽃에 앉아 유람객들을 내려다보는 듯하다. 사변이 모두 기암절벽이여서 여기에 있으면 우물안의 개구리 같은 감각이 든다. 그러다가 배머리를 돌려 나오면 마음이 확 트인다. 묘아산은 금호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아창석으로 조성되었으며 배가 십리 평호에 들어서서 북에서 남으로
바라보면 그 봉우리는 마치 머리를 쳐들고 허리를 굽히고 앉아 있는 고양이가 호면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과
흡사하므로 묘아산은 또 “삼검봉”이라고도하며 “삼봉경쟁”의 전설도 있다. 매당 석양이 질 무렵 금빛이
반짝이고 삼봉이 서로 어울려 마치 3명의 소녀가 거울을 마주보며 화장하고 있는 것 과 흡사하므로 또 “금호석조”, “옥녀소장”등 미칭도 갖고 있다. 묘아산은 일산이 4개 경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여 대금호에서
가장 유람객들의 애대를 받는 경관이다. 태녕 “상서제”또는 “오복당”이라고도 한다. “상서제”는 태녕성구중심의 복닫항내에 있으며 총면적이
4500여㎡이고 남북거리가 87m, 동서너비가 52m이다. 주체건축은 5채 삼진이며 5개의 문이 일자로 배열되어
있으며 또 호상 이어져 있다. 전반 택제의 규모가 방대하고 결구가 엄밀하다. 농후한 명대고건축예술 특색을
띠고 있으며 비교적 완정하게 보존된 건축으로서 비교적 큰 연구가치를 가지고 있는 명대고건축이다. 원형토루는 객가 주민의 전범이며 하나의 거대한 버섯이 땅위에 솟아난듯하며 하늘에서 날아온 비행접시 같기도 하다. 원형토루의 대표적인 것은 호갱향 호갱촌의 진성루와 고죽향 고두촌의 승계루이다. 원형토루의 큰 것은 이삼권으로 조성되었으며 안으로부터 겉으로 환환이 에돌아 있으며 외성은 10여미터 높이가 되며 일반적으로 3~4층까지 일이백개의 방이 있다. 일층은 주방이고, 이층은 창고이며 3, 4층은 침실이며 제이권은 2층으로 되어있으며 삼오십개의 방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객방으로 하며 중간은 조당이며 이 층에서 생활하는 수백명의 연회석을 베푸는 공공장소이다. 루내에는 우물, 욕실 등 시설이 있으며 심지어 서당선생을 루내에 청하여 글을 가르치는 학당특색도 있다. 원형의 벽은 나무로 구성되었는데 내측은 복도이다. 건축상에서 토루는 많은 건축특색이 있다. 예하면 일층은 주방이며 안전성을 고려하여 연통을 밖으로 설치하지 않았으며 벽의 내층을 통하여 직접 지붕으로 통하게하였다. 토루의 벽은 당지의 생토로 수축하여 견고하여 보통벽과 틀리며 창문은 3층에 와서야 개설하였으므로 적들의 침입을 방지할 수 있다. 토루의 대문은 이삼십센치의 두께가 되는 잡목으로 제조되었으며 밖에는 철판을 대였다. 어떤 문에는 땅크가 있어 물을 문에 뽑아 올려 적들의 불공격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어떤 토루는 전망대, , 혹은 수협도가 있어 방어공능을 강화하였다. 루내에는 우물이 있고 돼지, 닭, 오리 및 모든 양식도 모두 루내에 있으며 장기동안 토루를 나가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것이 또한 영정토루의 특점이다. 이로부터 볼수 있는 바와 같이 영정토루는 방어, 방지, 방화 등 특점을 지니고 있다. 영정토루의 특색과 우점을 모르면 어떤 여행객은 가능하게 영정토루가 재미없다고 여길수도 있지만 일단 건축할때의 의도와 교묘한 결구를 알게 되면 영정토루의 심오함에 감탄할 것이다. 용공동 -- 용공동은 신선동부, 천연미궁이라고 하며 용암시 용강촌에 위치하고 있으며 용암시에서 48키로 떨어져 있으며 장평시구와 26키로 되며 복건성의 성급풍경관광구이다. 지리적위치에서 보면 용공동은 무이산맥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풍경구의 면적이 3.47㎢되며 핵심 풍경구인 용공동의 형성은 3억년 전 고생대, 해양이 3차례의 지각운동으로 형성되었으며 우리 나라에서 발견한 용동중에서 특대형의 하나이다. 용공동 내부는 공간이 널직하여 8개의 대청, 16개의 동굴, 2천여미터의 여행노정, 면적이 5.4만㎡이며 상, 중, 하 3층으로 분류되며 산중에 동굴이 있고 동굴중에 산이 있으므로 동굴속에서 유람하노라면 미궁에 들어 온 듯 하여 만약 가이드의 안내가 없으면 신선도 이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용암의 용공동은 계림의 칠성암을 초과하였으며 노적암에 못지 않고 항주요림선경과 그 아름다움을 비길 수 있다. 용공동 중 석유, 석순, 석주의 발육이 완정하고 기이하며 특히는 대소석순이 희기를 얼음과 같으며 수정궁에 들어온듯한 감이 난다. 용공동 밖은 군산에 둘러싸여 있고 경치가 수려하여 풍부한 산림경관도 여행객들의 여행 분위기를 더해 준다. 풍경구는 버스가 직통하여 교통이 편리하며 사계절 모두 여행할 수 있다. 관포산풍경구 -- 녕성현 성동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시내에서 1.5km떨어져 있다. 전체 풍경구는 침적암에 올라와 형성되었으며 이 산은 평지에 우뚝 솟아 있으며 복건성의 십대 풍경구의 하나이다. 관포산은 산이 준험하고 돌이 기이하며 멀리서 보면 마치 피어날 듯한 연꽃 같으며 또 연화산이라고도 하는데 그 봉우리가 거관과 같으므로 관치라고 한다.산중의 풍경이 아름다워 사람들은 확대한 화분경치(盆景), 축소된 선경이라고 한다. 이곳에 있으면 계림의 산수 중에 있는듯하며 도화원에 잘못 온 것 같은 감이 든다. 관치산풍경구의 면적은 12.3㎢이며 관치산, 석문호, 죽안채, 기석채 4개의 풍경구로 조성되었다. 이미 관치산, 석문호, 죽안채 부분 풍경구를 개발하였다. 관치산의 “치”자는 당지발음이 zhai이며 zhi로 읽지 않는다. 전하는데 의하면 치는 고대의 일종 시비를 분간할 줄 하는 발이 하나밖에 없는 신양으로서 “해치”라고 한다. 초문왕은 이 형태를 모방하여 왕관을 만들고 이산의 최고봉 영지봉과 오노봉은 마침 하나의 형태가 “해치관”과 같으므로 이산 이름은 이렇게 얻어졌다. 산중의 경치는 창옥협, 단제운잠, 일선천, 설동, 연화동, 저매암, 옥녀지가 있다. 산의 동남면은 석문호, 호약십리, 산환수요, 승주유탕, 쌍유봉, 호로항, 동자견마, 대상음수, 풍승대모 등 경관이 있다. 관치산 중에서 가장 사람을 경탄하게 하는 것은 “생명지근”, “생명지문”이다. 이씨대종사 -- 상항임전향 전촌의 하곡분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씨 자손은 팔민시조 이화덕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이씨 대종사는 결구가 엄밀하고 기세가 웅위하며 주위의 풍경이 매우 수려하다. 이화덕이 민남에 들어온지가 800여년이 되며 그 후대가 복건, 대만, 오문, 절강, 계림 및 동남아에 분포되었으며 특히 해외 이씨자손이 자신의 선조를 찾아 이곳에 오는 것이 끊이지 않는다. 매화산자연보호구 -- 무평에서 용암의 319국도로 돌아와 북으로 가면 상항연성 신로삼현구 교차점의 매화산자연보호구를 유람할 수 있다. 민서토산물 -- 용암토산물은 매우 많은데 대다수 유람객들은 용암에 오면 토산물을 산다. 용암시에서는 팔대간이 가장 유명하다. 팔대간으로는 연성고구마간, 장정두부간, 영정채간, 상항무우간, 장평순간, 용암미간, 무평주담간이다. 그 외에 용암의 침독주, 수선차병, 염취땅콩, 죽통석, 청사죽람 등도 유명하다. 구곡계풍경구는 무이산풍경의 가장 특이하고 가장 집중된 곳이다. 유람객들은 성촌에서 물을 따라 떼목을 타고 물을 따라 내려가면서 구곡계 유람을 할 수 있다. 떼목을 타고 구곡유람을 하노라면 시야가 넓어져 산의 경치를 관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을 구경할 수도 있다. 떼목공은 노를 저으면서 흥미진진하게 아름다운 전설을 들려 주므로 무이산 여행중에서 가장 편안하고 재미있는 여행항목이다. 호소암 -- 호소암은 이곡계남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요경치는 천성선원, 호소팔경이 있다. 호소암의 중간에 하나의 거동이 있는데 산바람이 동굴의 입구를 지날 때 호랑이의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내므로 호소암이라고 하였다. 또 전설에 의하면 옛적에 선인이 탄 범이 이 암석위에서 울었다고 하여 “호소”라 하였다고 한다. 청의 강희 46년(1707년), 천성중이 무이산의 호소암의 구적에서 천성선원을 건축하였는데 거석을 이용하여 지어졌으며 전체 전당은 천연적으로 구성되었다. 천성 중은 여기에서 또 백연도, 집운오, 파선제, 보문두, 법양현하, 어팔천, 불랑주, 빈희동 등 팔경을 지적하였다. 호소팔경중 어아천이 가장 묘하다. 콸콸 흐르는 샘물이 돌틈으로 새어나와 낭떠러지를 따라 흘러내리는데 물과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어린 아이가 말을 배우는 소리와 흡사하므로 어아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샘치는 맑고 달다. 어떤 사람은 모처럼 이곳에 물병을 가지고 와서 물을 떠 차를 담근다. 그외 호소암 부근에는 도 주진동이 있는데 청대 농민기의 주재의 산채 유적 및 근년의 새로 개척한 대형 암석의 관음불상, 향로 등 경치가 있다. 도원동 (桃源洞) -- 도원동은 또 소도원이라고도 하며 구곡계의 육곡 이북에 있으며 사방에 북낭암이 있으며 삼층봉, 창병봉이 줄지어 있다. 위치가 비교적 편벽하므로 일반적으로 와서 유람하는 관광객들이 적은데 사실은 한곳의 관상할 만한 가경이다. 도원동풍경구내에는 또 삼앙봉, 봉연첩취, 삼층봉이 있으며 동굴내에는 개원당, 금전천, 수도석, 도원, 죽림 등이 있다. 동굴의 옆에는 하나의 높이가 16m, 너비가 11m, 두께가 10mehl는 노자의 조각상이 있는데 그 크기가 목전 세계의 최고이므로 “노자천하제일”이라고 한다. 일선천 -- 일선천은 무이군봉의 서남단에 있으며 또 명영암이라고도 한다. 일선천은 무이의 가장 기이한 동굴로서 영암, 풍동, 복의 3개동굴을 덮고 있다. 암석의 꼭대기는 틈이 있는데 길이가 약 백여미터되고 너비가 일미터도 안된다. 왼쪽의 복의동으로 들어가면 파란 무지개같이 하늘에 걸려있는 일선천을 볼수 있다.중간의 풍동도 일선천으로 통하고 있는데 바람이 동굴내로부터 솔솔 새어나오는데 하나의 거대한 자연에어컨을 연상케
한다. 무더운 여름철 유람객들은 이곳에 조금만 앉아있어도 더위가 가뭇없이 사라진다. 왼쪽의 명암동에는 샘치가 있는데 성수정이라고 한다. 고영암동은 또 갈선동이라고도 한다. 무이궁 -- 무이궁은 무이산의 가장 오랜 궁전이며 또 천보전, 무이관, 충우관, 만년궁이라고도 한다. 다으이 천보년간(기원742~75년)에 건설되었다. 무이궁은 일곡계의 부근 대왕봉의 아래에 있으며 무이산 여행관광구와 하나의 강을 사이두고 있다. 80년대 후 국가에서는 무이궁 일대에 거액을 투자하여 방송고가, 가관, 만정산방, 무이산장, 팽조산거, 취연소사 등을 건설하였다. 청대의 궁전 만년궁과 삼청전은 이미 수복되어 각각 주희기념관과 무이산국제난정학원으로 되었다. 주희기념관 정원내에는 두그루의 계화나무가 있는데 전하는데 의하면 송대에 심어진것으로서 당지 사람들은 “계화왕” 혹은 “송계”라고 한다. 삼청전의 서남쪽에 있는 “만촌원(萬村園)”에는 지지암, 수광석, 표본실 등이 있다. 어차원 (御茶園) -- 어차원은 구곡계의 사곡계 이남에 있으며 운와천유 풍경구의 입구처에 있다. 역사자료의 기재에 의하면 어차원은 원대덕 6년에 건축되었다. 원내에는 인봉문, 배발전, 청신당 등 건축이 있으며 현재는 통선정, 함산대 등 유적이 있다. 80년대 이후 국가는 어차원의 구적에 선후하여 무이산차 연구소와 차예관을 건설하였다. 여경교 (余慶橋) --여경교는 무이산시 남문 밖에 위치하고 있으며 복건의 저명한 나무 아치형다리 중의 하나로서 남문화교라고 한다. 지방 역사자료의 기재에 의하면 여경교는 청의 광서 10만년(1889년)에 건축된 것으로서 현재까지 백여년의 역사가 있다. 이 다리의 사람을 경탄하게 하는 것은 다리 기둥이 돌로 쌓은 외에 다리 전체가 나무를 교차하여 휘어서 형성 된것으로서 못같을 것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형성된 것으로서 조형이 아름답고 결구가 합리할 뿐만 아니라 또 현대력학의 원리에도 부합되어 고대 다리건축의 걸작이다. 운와천유 -- 운와천유는 무이산수의 “제일승처”라고 하며 구곡계의 “오곡”과 “육곡” 사이에 있으며 여행지까지 직통하는 버스가 있다. 운와는 음병봉의 접순봉 밑에 있으며 주위에는 향성암, 단로봉, 만대봉, 천유봉, 음병봉 등 기봉이 줄지어 있다. 명의 만력 11년(1583년)에 병부사랑 진승이 여기에서 은거하면서 유계초로와 “운”을 이름으로 하는 서운각, 소운루, 빈운당, 생운대, 지운정 등 십여곳의 정자루각이 있으며 현재에도 여전히 그 유적을 찾을 수 있다. 여기는 기봉, 거석이 많아 십여개의 동굴을 형성하였으며 일년내내 안개가 감돌고 있으며 변화무쌍하여 운와라고 하였다. 80년대이래 수월정, 백운정, 망선정, 석조청연정 등 이 유람객들에게 휴식장소를 제공하였다. 풍경구내의 주요가경은 또 허운동, 집낙동, 복의동, 복호암, 라한석, 수운로 , 소일선촌 등이다. 운와에서 계속 안쪽으로 들어가면 천유봉이다. 사람들은 구곡계의 뗏목에서 천유봉을 보면 그 웅위함밖에 볼 수 없으며 그 준험함은 직접 그 곳에 가 보아야 그 풍채와 매력을 감지할 수 있다. 차동은 근년에 새로 개척한 등도는 838급의 계단으로 되어있으며 유람객들이 이곳을 오르면 마치 천궁 속을 유람하는 듯하다. 하여 “천유”의 칭호도 가지고 있다. 봉우리의 중간에는 관폭정이 있다. 꼭대기에는 천유정, 일람대가 있으며 이 곳에서 멀리 바라보면 구곡의 기이한 경치가 한눈에 안겨온다. 고대 여행가 서하객은 이곳을 “其不臨溪而能盡九曲之勝, 此峰固應第一也.”라고 하였다. 현대의 유람객들은 “천유봉에 오르지 않으면 무이에 왔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천유봉의 봉우리에는 천유관, 묘고대, 호마간 등 경치가 있다. 천유관내에는 무이군, 팽무, 팽이의 좌상이 있어 유람객들은 휴식하면서 차를 마실 수 있다. 묘고대에는 한그루의 보기 드문 남원 상사수가 있으며 가을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령롱한 紅豆가 땅에 떨어져 정을 소주히 여기는 사람들이 즐기는 물건이다. 호마간은 천유봉의 동벽에 있으며 남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묘고대의 서쪽에서 흘러내리면서 설화천폭포의 기경을 형성하였다. 천유봉 아래는 하나의 칼로 깎아 세운듯한 거대한 암석 절벽이며 높이가 500여m, 너비가 1000여m이며 넓고 반듯하며 무이산풍경구 중의 가장 큰 암석이다. 장기간의 비물에 씻기고 대자연의 도끼로 만들어진 암석에는 줄기줄기의 비물의 흐름 흔적을 볼 수 있다. 천유봉과 마주보고 있는 것은 음병봉이 있는데 마치 하늘에 기대여 있는 병풍과도 같기 때문에 음병봉이라고 하였다. 차동의 우측으로부터 올라가노라면 하늘에 오른 듯하다. 봉우리의 중간에 하나의 큰 동굴이 있는데 이름이 관천동이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노라면 연도에는 보허, 제운석각, 계흉암, 선범계, 운룡동천, 용척, 음병차실, 여우동 등의 경치가 있다. 음병봉의 서쪽에 높이가 90여m되는 접순봉이 있는데 중간에 3개의 흔적은 마치 끊어진 후 다시 이어진 듯하여 접순봉이라고 하였다. 음병봉의 아래에는 도 하나의 암석이 있는데 모양이 나한과 같다하여 나한암이라고 하였다. 운와천 유람은 유람객들로 하여금 무이 운해의 변화무쌍을 충분히 볼 수 있게 하며 험봉을 오른 재미를 직접 맛볼 수 있으며 무이여행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이다. 당요동천 -- 당요동천은 또 수렴동이라고도 하며 무이산 풍경구 중의 최대의 동굴이며 높이와 너비가 모두 백미터를 초과하였다. 동굴 꼭대기의 거암은 밖으로 나와 있으므로 하나의 천 연적인 처마이다. 유람객들이 발길을 멈추고 멀리 바라보면 백여미터 높이의 산봉우리에 두갈래의 사시장철 흐르는 샘치가 떨어져 내리는데 바람에 흩날려 마치 하늘에 걸려있는 주렴이 동굴의 입구에 내리드리운듯 하여 그야말로 “赤壁千尋晴拂雨, 明珠萬顆晝垂簾”이다. 비천이 흘러내리는 곳에는 푸른 못인데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이 마치 명주가 옥쟁반에 떨어져 내리는 듯하다. <무이산지(武夷山志)>에서는 수렴동을 “산중최승지경(山中最勝之境)”이라고 하였다. 수렴동의 계단을 따라 남하하면 응주암의 웅위한 모습을 볼수 있다. 수렴동의 북쪽에는 거용과 같은 용봉과 형태가 사자와 같은 청사암이 있다. 그외 또 연자봉, 단하장, 화염봉, 대홍포차수, 류향간 등 경치가 있다. 특히 단하장은 “석색적자, 완여천반주하(石色赤紫, 宛如天半朱霞)”로 소문이 높다. 적색의 불과 같은 암야에는 여전히 령롱한 작은 나무집이 보존되어 있는데 마치 공중누각과 같다. 기재에 의하면 청의 함풍년간에 당지의 토신(土紳)이 태평천국의 난을 피하여 건축한 것으로서 “천차가(天車架)”라고 하는데 수렴동 풍경구중 지방특색이 있는 인문경관이다. 중외에 이름있는 “차중지왕(茶中之王)”-대홍포차수(大紅袍茶樹)는 깊고 험한 구용과내에 있다. 대홍포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많은데 그중 비교적 일치한 것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천심묘 노방장이 구용과의 신차로 한분의 과거시험을 치르러 가는 선비의 병을 치료하였는데 후에 그 사람이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무이신차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황제가 선사한 “대홍포”를 노방장이 차잎을 따낸 나무에 덮어놓았다고 하는데 이 차나무는 이리하여 “대홍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옛날 한 황태후가 배가 아파서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였는데 황제가 천하의 명의를 청하여 영단묘약을 써도 효과를 보지 못했는데 후에 구용과암벽상의 신차가 황태후의 병을 치료하였다. 하여 황제는 대신을 명령하여 대홍포를 가지고 무이산의 구룡과 차나무에 감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대홍포”를 차나무에 덮어 주었으며 이 차를 “대홍포”하고 하였다. 대홍포차나무가 “차나무중의 왕”의 미칭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주요하게 환경이 환경이 조용하고 기후가 독특하고 토양이 적합하고 대홍포차의 일년내내 안개가 감돌며 샘치가 흐르는 구용과내에 있고 또 재배인의 세심한 관리로 대홍포차로 하여금 독창적인 품질과 약효를 가지게 하였다. 이 “대홍포”차나무는 모두 네그루인데 일년산량이 반근좌우밖에 안되며 가장 많이 난 해에도 1근이 안된다. 주희고향 -- 주희 고향은 오부진 부전천에 있으며 남송 14년(1144년)에 시공되었으며 현조하고 있는 것은 자양루, 주자항, 병산서원, 흥현고가, 흥현서원, 주자사창 등 유적이 있다. 그중 자영루는 주희의 고거이다. 안에는 주희가 어릴적 글을 읽던 곳-“반무방당”, 영천고정, 자자장 등이 있는데 현재는 시급문물보호단위이다. 주자사창은 주희가 당년에 창건한 것이며 혜민선정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선유경제성적(先儒經濟盛迹)”이라고 불리운다. 주희사창은 역대의 수복을 거쳐 지금까지 완정하게 보존되었는데 시급중점문물보호단위이다. 무이정사는 또 자양서원, 무이서원, 주문공사라고 하며 음병봉 아래의 평임도 구곡계의 옆에 있으며 주희가 송의 순희(淳熙) 십년(1183년)에 건립되었다. 인지당, 음구실, 지숙요, 석문오, 관선재, 한서관, 만대정 등 건축이 있으며 “무이의 거관”이라고도 한다. 무이비림 (武夷碑林) -- 무이비림은 성촌의 떼목 3호부두 부근에 있다. 비림의 내용은 무이산수 명승, 주자학설, 종교문화, 무이암차 등을 소재로 하여 각인하였다. 그 중에는 현재 전국에서 가장 큰 와비(臥碑)가 있다. 한성유적 (漢城遺址) -- 한성유적은 무이산시 흥전진 성촌서남에 있으며 시구에서 약 40키로 떨어져 있다. 1958년 이 유적은 남북길이가 860m이며 동서너비가 약 550여m이며 총면적이 48만㎡에 달하며 목전 우리 나라 남방지구에서 발견한 년대가 가장 일찍하고 규모가 가장 크며 가장 완정하게 보존한 고성유적이다. 성의 중부에서 대형의 궁전건축 유적을 발견하였는데 그 면적이 수십만 평방미터에 달하며 그중 대문, 정원, 주전, 측전, 상방, 회랑, 천정, 배수통로 등 배치가 엄밀하고 규모가 방대하여 강남 고대 건축의 독특한 풍격을 반영하였다. 1996년 한성유적은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로 되었다. 남평망탕산 (南平茫蕩山) -- 망탕산은 남평시 서북에 위치하고 있으며 시에서 약 15키로 떨어져 있다. 여기는 최고봉이 1363m, 풍경구 면적이 약 120㎢이며 주로 계원협곡, 석불산, 삼천팔백감(三千八百坎), 몽경양 등 풍경이 있다. 계원협곡에는 백장비포, 계원암, 서용교, 합마석, 선인첩석, 청어수, 등 풍경이 있으며 “십리청계, 백인벽입, 천층태계,만목심위( 十里淸溪, 百刃壁入, 千層台階, 萬木深尉)”의 칭호가 있다. 망탕산은 이미 도로가 개척되어 구내의 망탕산장 등의 여행서비스시설은 유람객들에게 숙식을 제공한다. 천심영낙선사 -- 영낙선사는 천심풍경구 북쪽의 천심암 아래에 있으며 구용과의 대홍포차나무에서 십분정도의 행정이다. 이 절은 무이산 현존의 최대의 사원이며 원래의 천심영낙암이다. 명의 가경 7년(1528년) 도사 한동허가 재건하여 천심암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청대에 와서 영낙선사로 확대 건설하였다. 역사자료의 기재에 의하면 영낙선사의 가장 성한 시기에 학도 백여명이 있었으며 복주의 고산 용천사의 지파에 속한다. 근년 해내외의 많은 사람들이 돈을 지원하여 왼쪽에 규모가 웅대한 대웅보전을 건축하였다. 무이산자연보호구 -- 무이산자연보호궈는 무이산풍경궈의 서족 40여키로 되는 곳에 있으며 유엔이 확인한 A급자연보호구이며 총면적이 85만무이고 평균 해발고가 2158m이며 우리 나라 대륙 동남부의 최고봉이다. 100여년 전 유럽 등지의 생물학가들이 여기에서 대량의 생물표본을 수집하여 무이산이 세계에 이름있는 “생물의 창구”로 되게 하였다. 초보적인 통계에 의하면 “활화석”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은행 등 진귀한 식물이 200여과, 2000여종이 있다면 수목의 종류가 유럽의 17배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대자연식물원”, “뱀의 왕국”, “조류의 낙원”과 “곤충의 세계”로 불리운다. 무이산자연보호구의 주요경치로는 삼항(三港) “무이산자연박물관”, 괘돈(掛墩), 선봉령(先峰嶺), 황강산(黃岡山) 등이다. 삼항은 구곡의 상류에 있으며 자연보호구관리국소재지이며 무이산과학고찰참의 소재지이다.
유람객들은 이곳에서 무이산자연보호구의 개황을 전면적으로 요해할 수 있다. 괘돈은 무이산 자연보호구의
핵심 중의 하나이며 세계상에서 조류 자원이 가장 풍부한 지구 중의 하나이며 “조류의 천당”이라는 미칭이
있다. 석비방 -- 전국중점보호단위이다. 모두 4개가 있는데 명대의 2개는 남쪽의 쌍문정에 위치하여 있으며 각각 “삼세재이”와 “상서탐화”방이다. 모두 만력년간에 건축되었다. 청대의 2개는 악구가에 위치하여 있으며 각각 “민월웅성”, “용장간역”방으로서 강희년간에 건축되었다. 이런 패방은 체적이 웅위하고 조각이 정교하여 봉건시대 사회생활의 한 개 측면을 반영하였다. 조가보 -- 장포현 호서향의 석고산 밑에 있으며 조가성이라고 한다. 조가성의 시조는 남송말년의 황족민총군왕 조약화이다. 남송 명망시 조약화는 이름을 숨기고 여기에 와서 은거하였다. 명의 만력년간에 조약화의 십세손자 조범이 건축을 확대하여 오늘의 조가성을 형성하였다. 조가성은 규모가 방대하고 주위에는 높이가 6m, 길이가 천여키터되는 돌담이 있으며 동, 서, 남, 북 4개의 성문이 있다.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뉜다. 버스를 타면 일반적으로 동문에 이르는데 들어가면 내성이다. 주요건축은 삼층사합식의 보형루이며 “완벽루”라고 하는데 “완벽귀조”의 뜻이 있으며 조씨가 대송강산을 회복할데 대한 기대를 기탁하고 있다.천정중에는 지하통로가 성외까지 통하며 방어공능도 있다. 완벽루는 현재 현재 송사진열관으로 개척되었다. 내부에는 조씨의 세대로 내려오면서 송조 18황제의 화상 및 일부 문물, 명가서법 등이다. 외성은 오열오진의 부제이고 해열제오진은 2층이며 정연중에 위엄이 있어 주인의 일반인과 다른 신분을 표현하고 있다. 그 외에 성내에는 선조들을 신씨의 사당,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는 독서처, 화원 등이 있다. 비교적 중요한 문물으로는 “우비”, 미비필적”묵지”집불보탑 등이다. 강동교 -- 장주동북의 16키로 떨어진 곳의 구용강 북계에 있으며 하나의 큰 다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나리 고대의 십대명교중의 하나인 강동교이다. 강동교는 송의 가정 칠년(1214년)에 건축되었다. 원명이 “통제교”이며 “호도교”라고도 한다. 여기는 강이 넓고 물살이 급하므로 다리는 지으면 무너지군 하였는데 다리를 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당년에 이 다리를 건축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 때 범 한마리가 새끼범을 업고 강을 건느는 것을 보고 범이 지나가는 행적에 따라 다리를 건설하였다. 현재의 강동교의 어떤 돌은 큰 것은 무게가 200톤에 달하는데 700여년 전에 채굴한다는 것은 진작 놀랄만큼하다. 삼평사 -- 평화현의 문봉진에 위치하고 있다. 절은 회창5년(845년)에 건축되었다. 현존의 “삼진반”의 모형은 청대에 구축되었다. 산문을 들어서면 즉 대웅보전, 이진은 조사전, 삼진은 탑전이다. 동산 -- 동산도는 장주에서 140여키로 떨어져 있다. 복건의 새로 개발한 중점 여행구이다. 동남연해에는 7개의 쪼각달 같은 해만이 있으며 수십키로 까지 뻗어있다. 풍동식-탑여는 성급풍경명승구이다. 풍동석은 동릉진에 있다. 무게가 200톤이 되며 큰 바람이 불어오면 움직이지만 떨어지지 않는다. “천하제일기석”의 미칭을 가지고 있다. 부근의 동산고성은 명의 홍무 20년(1387년)에 건축되었다. 성벽은 높이가 7m이며, 길이가 1900여m이며 한마리의 거룡이 바다에 엎드려 있는 듯하며 매우 웅위하고 장관이며 당년 척계광은 여기에서 몇번이나 왜구를 물리쳤다. 고성내에는 성황묘, 관제묘, 보지사, 황도주기념관 등 건축 및 다처의 마애석각이 있다. 관제묘는 대만 170여개의 관제묘의 조묘이며 해마다 많은 대만 동포들이 와서 “괘향해조(掛香諧祖)”한다. 관제묘의 건축은 령롱하고 정교하며 “쌍봉조양”, “이용희주” 등의 조형은 선명한 민남지방 특색을 띠고 있다. 현재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이다. 탑여와 동산고성은 바다를 사이두고 마주보고 있다. 위에는 문봉탑, 운산석실, 독수리형태의 석동 등 경치가 있다. 남단의 오각해면에는 용, 호, 사, 상사여는 형태가 생동하고 진실하다. 남산사 -- 장주시 서부 교외에 있다. 민남의 저명한 불교사원으로서 당의 개원년간에 시공되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태부 진읍의 사택이였다고 하는데 규모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에게 고발당하여 죄로 되었는데 해를 피하기 위하여 사원으로 증정하였다. 현존의 건축은 청의 광서년간에 다시 수복한것이다. 사내에는 오보팔승이 있다. 오보는 대종, 혈서, 장경, 패엽경, 홍차화수이며 팔승은 대웅보전, 옥불전, 석불각, 태부사, 수진정실, 매화, 栗, 姑娘묘이다. 그중 대종은 대웅보전 전우이며 원연우 6년(1319년)에 주축되었으며 무게가 650여키로 된다. 석불각은 사의 좌측에 있으며 당대의 천연석으로 조각된 가장 큰 불상이다. 옥불전은 사의 왼쪽 후측에 있으며 안에는 순대리석조각의 옥불이 있는데 청의 광서년간에 버마의 화교가 증정한 것 이다. 선자담 -- 장주의 서북방향으로 34키로쯤 가면 화안현 태계중류의 석벽에는 기괴한 형태의 문자가 있다. 큰 것은 반미터되고 작은 것은 10센치 좌우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신선이 쓴 것이라고 하여 이 지방을 “선자담”이라고 하였다. 현재의 학자들은 당연히 이런 관점을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여족선민의 문자라고 하며 어떤 사람은 오월문의 유전이라고 하며 어떤 사람은 고대의 암화라고 한다. 여태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는 선자담에 신비의 색채를 더하여 많은 여행객을 흡인하고 있다. 자산홍루 -- 장주 시정부내에 있으며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집이다. 1932년 모택동이 홍군을 거느리고 장주를 보호할 때 여기에 주둔하였다. 후에는 “모주석이 홍군을 거느리고 장주를 보위한 장주기념관”으로 되었다. 내부에는 많은 관련문물 및 사진자료를 진열하였다. 앞의 조형이 깜찍한 기념비와 호상 조응되면서 장주의 이 한단락의 휘황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운동암 -- 또 학명산, 동자암이라고도 하는데 성급풍경 명승구이며 용문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공공버스가 산밑까지 통하고 있다. 산위에 하나의 동굴이 있는데 안개가 흩날리고 있는 지방이다. 안개는 매번 비내리기 전에 동굴에서 날려 나오며 비온 뒤는 또 날려 들어가므로 운동암이라고 하였다. 동, 암, 안개 및 마애석각은 운동암의 경관을 형성하였다. 백화촌, 구호여해 -- 백화촌은 용해 구룡진의 장복촌에 위치하고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명조의 영낙년간에
주희의 후대 주무임이 개간하기 시작하여 후에는 세세대대로 내려오면서 꽃을 심었다. 민간에서는 “매화장복(賣花長福)”이라고 하기에 장복촌이라고 하였다. 현재는 화포가 백여무가 있고 각종 꽃이 천여종에 달한다. 소문을 들은 유람객들은 종종 이곳에 와서 꽃을 관상하고 각종 꽃, 분경을 구매한다. 중국여자배구삼연관기념비 -- 장주신화북로 부구의 삼차로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여자배구가 1981년 세계여자배구경기, 1982년 세계여자배구錦標賽, 1984년 올림픽여자배구경기에서 연속 최우승을 따낸 것을 기념하여 건축한 것 이다. 주체는 하나의 삼각 릉형의 기둥이며 배구뽈을 떠이고 있으며 아래에는 여자배구 삼연관의 경기이름 및 여자배구 성원의 싸인이 각인되어 있다. 기둥의 앞에는 여자배구선수가 왼쪽에 금배를 들고
오른손에 생화를 들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다. 기둥 뒤에는 배구장에서의 멋진 모습이며 전체 설계는 의도가
선명하고 조형이 간결하여 당년 여자배구대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오늘날 중화민족의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진(秦)시대부터 개발된 오랜 도시로, 당(唐)의 중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북송(北宋) 이후 푸젠성의 중심이 되었다. 대외 무역항으로서는 취안저우[泉州]가 쇠미한 명대(明代) 이후에 번영하였고, 청말(淸末)의 난징[南京] 조약으로 개항장이 되었다. 중국 남동 연해의 주요 대외 무역항으로 관터우[琯頭]와 마웨이[馬尾]가 그 외항(外港)에 해당한다. 따라서 본래는 상업도시였으나 최근에는 시가지 남부에 공업화가 진척되었다. 구톈강[古田溪]에 세워진 수력발전소를 동력원(動力源)으로 하여 제강(製鋼)·기계·제재·식품·제지·방적·의약품 등의 공장이 건설되었다. 전통 공업으로는 탈태칠기(脫胎漆器)·목각·목화(木畵) 등이 유명하다. 민장강 유역에서 생산되는 차·목재·종이·잎담배 등을 집산한다. 사범대학, 농학·의학계통의 단과대학이 있고, 동쪽 교외에 구산산[鼓山]이나 시후[西湖]공원 등의 명승지도 있다. 병산 (屛山) -- 병산은 해발고가 62m이고 면적이 2㎢이며 민월왕이 여기에 호를 세워서 월왕산 이라고도 하였는데 월왕산이 병풍과도 같다 하여 병산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였다. 주위에는 西단(홑옷 단)寺, 涌泉寺, 華林寺, 開元寺, 林陽寺, 崇福寺, 金山寺, 地藏寺를 포함한 10여개의 유람지가 있어 중국유람명승지로 되었다. 고산 (鼓山) -- 시 동쪽 교외에 솟은 해발 969m의 산이다. 산정에 북 같은 거대한 바위가 있으므로 고산이라고 한다. 버스를 타고 꾸불꾸불한 산길을 올라갈 때 오른편에 민강의 도도한 흐름이 보인다. 웅대하기 그지없다. 산 중턱에 푸저우 5대 선사의 하나인 용천사(湧天寺)가 있다. 절 앞에는 송(宋)대의 천불도탑(千佛陶塔)이 있고 백옥와불(白玉臥佛)이 안치되어 있다. 절에는 이 밖에 역대의불교경전, 특히 명(明). 청(淸)시대 불전의 석각판(石刻版)이 중요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복주개원사 (福州開元寺) -- 548년에 건설한 개원사는 고루구 경원항에 위치해 있으며 복주에서 규모가 제일 큰 사원으로서 면적이 당시 복주의 1/10을 차지하였으며 사원에 영지산, 연화못, 보탑등 관광지가 있다. 제일 이름있는 곳으로는 鐵佛殿내의 철로 만든 부처인데 높이가 5.3m, 넓이가 4m이다. 서단사(西단(홑옷 단)寺) -- 서단사는 당나라시기에 건설하였으며 복주시 서쪽 시산 봉미촌에 위치해 있으며 말레네시아, 월남, 신가포르에 널리 알려졌으며 고산 용천사, 설봉 충성사, 상봉 충복사, 루이봉 일양사와 아울러 복주 5대 사원으로 불리운다. 사원은 면적이 100무로서 크고 작은 건축물이 36개가 있는데 그중에서 당나라시기에 건설한 天王殿, 大雄寶殿, 羅漢閣가 주요한 건물이며 제일 독특한 특색으로는 송나라, 명나라시기에 심은 려지나무림이다. 온천공원(溫泉公園) -- 온천공원은 복주시 중심 오사노 동남온천일대에 위치해있다. 복주삼림공원 (福州森林公園) -- 복주시에서 7㎞ 떨어진 신점진 적교촌에 위치해 있으며 전체 면적이 85㎢로서 중국의 9개삼림공원중의 하나이다. 공원은 중아열대상녹활옆림구, 남아열대우림구, 산지야생과일나무구와 해안홍송림구, 지귀한 식물원, 월계산 차원등 풍경구로 나누었는데 지금 이미 중국과 외국의 2500여종의 나무와 식물을 재배하여 독특한 삼림박물관으로 되였다. 마미 (馬尾) -- 복주시에서 15㎞ 떨어져있는 마미는 옛적부터 서로 다투는 군사요지로서 청나라시기의 중국, 프랑스 마강해전이 여기에서 진행되였다. 여기에는 羅星塔이 있는데 탑위에 올라서면 멀리에 있는 민강의 바다입구를 볼수있으며 昭忠祠도 참관할수 있다. 우산 (于山) -- 별칭 주셴산(九仙山)이라고도 하는 이 산은 옛날에 하씨(何氏) 형제 9명이 불로장생의 약을 만들어 선인이 되기 위해 수도를 한 곳이라고 한다. 산에 오르면 시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화림사 (華林寺) -- 화림사는 964년에 건설한것으로서 지금은 대청만 남아있으며 후에 문과 좌우청, 랑을 지었다. 전체 건물은 모두 못 하나 쓰지않고 나무로 지은것으로서 중국남방에서 역사가 제일 오랜 나무건축물이다. 소충사(昭忠祠) -- 소충사는 마미의 마현산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1884년 8월 23일 프랑스 침략자들이 복건수병을 불이습격하여 중국, 프랑스 마강해전이 일어났는데 청나라 정부의 부패로하여 이번전역에서 중국 수병이 796명이 희생되였으며 그중에서 400여명의 시체를 건지여서 각기 9개의 무덤에 파묻었으며 2년후에 무덤의 동쪽에 소충사를 지었으며 1920년에 무덤을 재건설하고 1983년에 소충사를 재건설하여 마강해성기념관으로 정하였다. 좌해공원(左海公園) -- 좌해공원은 서호공원의 서북쪽에 위치해있으며 전체 면적이 51㎢인데 그중에서 호수면적이 18㎢이다.좌해공원의 북문의 정면에는 5대주를 상징하는 5개의 조각이 있으며 공원의 중심에는 면적이 23㎢인 풀밭이 있는데 여러가지 나무와 꽃을 심었다. 북문에서 남쪽으로 가면 유럽풍경구가 있는데 거기에는 영국의 붉은색 집과 웨이니스의 “물성(水城)”이 있다. 남쪽은 좌해수족오락성으로서 수족관, 급류모험등 오락시설이 있으며 여행휴가촌과 노인활동중심도 있다. 북문에서 서쪽으로 가면 모험궁, 종합오락성, 아동활동중심, 괴상한집, 해적배등 오락시설이 있으며 아세아풍경구에는 만리장성, 서유기예술궁, 일본원, 유람선 부두 등이 있다. 서호공원(西湖公園) -- 면적이 4.5㎢인 서호공원은 복주시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282년에 이곳을 개간하여
밭으로 만들었으며 당나라 말년에 유람지로 만들어 지금의 공원으로 되였다. 나성탑 (羅星塔) -- 푸저우 시의 대외수륙 교통으 창구로써 근년에 대외무역 관광 등으로 크게 발전하고 있는 마웨이(馬尾) 항의 상징이다. 높이 31.5m, 8각 7층 석탑이다. 1884년의 프랑스와의 전쟁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임칙서사당 (林則徐祀堂) -- 청(淸) 왕조의 정치가, 임칙서의 생가이다. 시내 澳門路의 주택지에 있으므로 좀 찾기 힘들지만 현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으므로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오산풍경구 ( 烏山風景區) -- 오석산을 오산이라고도 하는데 해발고가 84m이며 산에 나무가 무성하고 기암괴석이 많아 옛적인 당나라시기부터 유람명승지 였는데 여기에서는 복주시의 주요 시내 구역을 볼수있으며 200여곳의 벼랑에 새긴 글이 있다. 당나라 李陽氷, 송나라 蔡囊, 李綱, 朱熹, 원나라 薩都刺以, 명나라 葉向高등 사람들도 여기게 글을 남기였으며 이로하여 여기는 서법을 연구하기 적합한 곳으로 되였으며 유람하고 휴식하기도 좋은 곳이다. 절의 점유면적은 3.2만여 평방미터이며 건축면적이 1.6만 평방미터이고 돌담의 길이가 1키로 쯤 되며 결구가 엄밀하고 층차가 분명하며 배치가 고르며 기세가 웅위하고 그 규모는 전성 절 중의 제일이다.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조벽, 패방, 산문, 방생지, 천왕전, 대웅보전, 법당(위가 장경각), 조당(위가 와불각) 등이다. 대웅보전은 전사의 주체건축이며 전성의 절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이다. 궁전내에는 3개의 대불이 있으며 중간에는 석가모니불상이고 동쪽에는 소재연수약사불로서 동방 유리세계의 교주이며 서쪽은 아미타불, 서방길낙세계의 교주이다. 절의 동쪽에는 송의 건도원년(1165년)에 건설한 석가문불석탑이 있으며 또 사리탑이라고도 하는데 이 탑의 조각은 섬세하고 조형이 생동하며 시간이 800여년이나 되며 그동안 포전지구에는 8급이상의 대지진이 있었지만 이 탑은 여전히 서있으며 고대의 뛰어난 건축과 정교한 조각예술을 보여주고 있다. 구리호 -- 선유현에서 31키로 떨어져 있다. 풍경구는 자연경치와 독특한 “기몽(祈夢)”문화로 유명하다. 고초루(古憔樓) -- 성급중점문물보호단위이며 북송 태평흥국 8년(983년)에 건축되었으며 자성 성문과 문루이며 또 고루라고도 한다. 역사상에서 몇번이나 건축되고 또 훼멸되었는데 현존의 건축은 청의 강희 36년(1697년)에 재건되고 가경 8년(1803년)에 수리한 것 이다. 복건성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루이며 국내 소수의 완정하게 보존되어 있는 고루의 하나이다. 맥사암(麥斜岩) -- 구리호에서 약 10키로 가면 맥사암인데 자고로 “소무이”의 칭호를 가지고 있다. 맥사사는 송대에 건축되었으며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것은 청대의 건축이다. 맥사암의 최고봉은 “종석”이며 매번 비바람이 불 때면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낸다. 종석 부근에는 “잠성석’이 있는데 전하는데 의하면 송대의 저명한 역사학자 정교가 천상을 관상하는 곳이라고 한다. 미주도(湄州島) -- 포전시에서 출발하여 미주도로 가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 미주만이다. 미주만과 대만기융항은 바다를 사이두고 마주보고 있으며 삼면이 산과 잇대어 있고 만구(灣口)는 동남방향을 향하여 열려있으며 형태가 눈썹과 같으므로 미주도하고 하였다. 미주만의 경치가 아름답고 산수가 그림같다. 만의 북반부에 천연병풍이라고 하는 미주도가 있다. 미주도는 마조의 고향이며 마조신앙의 발원지이다. 배를 타고 미주도에 접근하면 멀리서 마조석상이 바라보인다. 마조(960~987년)의 원명은 임묵이며 생전에 어민과 상선을 도와줌으로써 소문이 높으며 죽은 후 해신으로 되었으며 또 “천비”, “천후”, “천상성모” 등 존호를 수여받았다. 섬의 “천후궁미주조묘”는 송의 옹희4년(987년)에 건축되었으며 세계상의 26개국가와 지구 천여개의 마조묘의 조묘이다. 매년 3월 23일은 마조의 생일과 9월 9일 마조의 “승천”기념일이 되면 수천만의 신도들이 구름처럼 미주도에 모여와 거대한 묘해가 진행되는데 해내외의 많은 유람객을 흡인한다. 미주도는 일년 평균기온이 20℃이며 년강우량이 1000㎜이며 전섬의 해안선길이는 30키로이다. 그중 질이 좋은 모래가 13곳이나 되며 총 길이가 20여키로이며 방풍림대가 천여무에 달한다. 여기 해안의 암석은 상대적으로 연한 휘녹암이기에 장기적인 파도의 침습에 의하여 천연적으로 오무러들어가 있으며 바다물을 삼켰다 토했다하는 메아리는 멀리서부터 가까이로 처음에는 관현악기가 빈번히 울리는 듯 하지만, 다음에는 북과 종이
울리는 듯하다가 최종에는 우뢰소리처럼 울려오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포전24승경(勝景)중의 하나인 “미여조음(湄輿潮音)”이다. 미주도자연풍경구는 산, 바다, 동, 묘, 나무가 하나로 융합되어 있으며 황금사탄, 미여조음 등 30여 곳의 경치가 있다. 벽옥구(碧玉毬) -- 이슬람교도의 묘지 바로 가까이에 천연의 거석(巨石)이 바람이 불면 움직일 것 같은 모습으로 판판한 대모양의 바위 위에 서 있다. 이 거석에는 '碧玉毬'라는 세 문자가 새겨져 있다. 바람에는 끄떡도 하지 않지만 손으로 밀면 살며시 흔들린다고 한다. 구일산 (九日山) -- 구일산은 “산에 글을 새기지 않은 돌이 없음”으로 이름났는데 송원이래의 석각 70여개가 있다. 그 중 주희, 채양 등 인물의 서법이 있는가 하면 또 진귀한 송조 祈風석각도 있다. 송조시기 천주는 중국의 주요한 대외무역항구로 당시의 선박들은 바람에 의거하여 항행하였으므로 매번 항행의 순리를 위하여 바람을 기도하는 의식을 진행하였는데 의식을 진행 후 글을 새겨두었다. 기풍석각은 송조시기 천주의 해외교통사를 연구하는 진귀한 역사자료이다. 산문을 들어서면 延福寺에 도착하는데 당시 바람을 구하는 의식을 이곳에서 진행하였다 한다. 산은 동, 서 두개 봉우리로 나뉘는데 서쪽 봉우리는 당조시기 시인 秦系가 은거하였다 하여 사람들은 “高士峰”이라 부르고 있다. 산중턱의 석벽에는 “九日山”이란 세글자가 큼직하게 새겨져 있는데 이곳이 석각이 제일 많이 집중된 곳이다. 위로 올라가며 “일조석”, “번경석”, “은군정”, “고석불” 등 경치가 있다. 안평교 (安平橋) -- 평안교는 안해진(安海鎭)과 남안시(南安市) 수두진(水頭鎭)사이; 천주에서 남쪽으로 30㎞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총길이가 오리로서 “오리교(五里橋)”라고도 하며 중국에서 제일큰 돌다리이다. 평안교 주위에는 13개의 다리를 수리한 년대의 년도수와 사실을 새긴 비석이 있으며 다리에 있는 정자의 기둥에는 “天下無橋長此橋(천하에 평안교보다 긴 다리가 없다.)는 글이 있다. 평안교는 1138년에 건설하여 1152년에 완공하였는데 평안교의 장군조각, 비석은 모두 화강석으로 만들었으며 다리면에 놓은 돌은 모두 너비가 8~11m, 넓이와 두께가 0.5~1m, 중랴이 5톤이다. 이 돌은 모두 바다의 썰물과 밀물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놓았으며 다리밑의 지형과 물의 변동에 따라 기둥을 장방형, 배형, 반배형 세가지로 만들었는데 이는 중국고대 다리건축의 발전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청수암 (淸水岩) -- 청수암은 안계현(安溪顯)에서 17㎞ 떨어진 안계봉래향(安溪蓬萊鄕)에 위치해 있으며 지금은 복건성 성급풍경명승지로 되였다. 청수암은 높은 산등성이에 있으며 사면에 괴석이 많고 나무가 무성하며 반령정(半嶺亭), 각정(覺亭), 암도부조비(岩圖浮雕碑), “지지조북(枝枝朝北)” 대장숙, 천년라한(千年羅漢) 소나무등이 있으며 1083년에 건설하였다. 청수암은 3층으로 되였는데 1층은 호천구(昊天口); 2층은 청수조사(淸水祖師)을 모시는 “조사전(祖師殿)”; 3층은 “역가루(역(번역 역)迦樓)”이다. 청수암에는 청수조사를 모시고 있는데 청수조사의 신앙이 역대로 내려오면서 전해져 대만과 동남아 각지까지 널리 전해졌으며 특히 청수조사 봄맞이 민속활동은 제를 지내러 오는 사람과 많은 유람객을 끓었다. 동관교 (東關橋) -- 동관교는 영춘현에서 8㎞ 떨어진 영춘현 동평향 동미촌의 湖洋溪에 위치해있으며 “도선교(道仙橋)”라고도 하며 지금은 성급문물보호지로 되였다.이 다리는 송나라 다리건축의 특점을 보류한 복건성에서 보기 힘든 지붕이 있는 다리이며 1963년에 재건설을 하여 지금은 더욱 견고하고 아름답다. 청원산 (淸源山) -- 천주시 북쪽교외에 위치, 시구에서 2.5㎞ 떨어져 있으며 산에는 샘터가 많은데 北山, 泉山, 齊雲山이라고도 불린다. 청원산은 경치가 수려하고 문물고적이 많은데 36암동, 18풍경이 있다. 현재 주요 경치로는 노군암, 천수암, 미타암, 벽소암, 남대암, 사은암, 청원동 등이 있다. 완벽하게 보존된 문물고적으로는 도교, 불교의 대형석각 7군데 9종; 역대 마애석각 500여개; 원, 명, 청시기 화강암으로 건설한 목질구조를 모방한 불상석실 3개 및 근대 고승 弘一법사의 舍利塔 등이 있다. 老君岩의 원명은 羽仙岩인데 노군의 조각상이 있음으로 하여 노군암이라 하였는데 청원산 우측비탈에 위치하였다. 송조시기 천연적인 암석을 이용하여 조각하였는데 조각상의 높이는 5.63m, 두께는 6.85m, 너비는 8.01m, 면적은 55㎡로 중국에서 제일 큰 도교 돌조각상이다. 조각이 정교로워 중국 석상조각의 예술보배라 할 수 있다. 노군암에서 남쪽으로 층계를 따라 올라가면 千手岩에 도착한다. 이곳은 매년 늦가을이 되면 단풍나무로 마치 산에 불이 붓고있는 듯 하다. 천수암의 작은 사찰에는 원래 천수관음이 있었는데 지금 이미 그 자취를 감추고 오직 원조시기 미타불 석각상이 있다. 천수암에서 조금 올라가면 곧 彌陀岩이다. “천굴관폭”, “일소대”, “일선천”, “천풍해월” 등 경치가 있으며 “동천별관”이란 석실에는 원조시기 아미타불 조각상이 있는데 성급중점문물이다. 미타암에서 더 올가가면 南臺岩이다. 남대는 청원산 우측봉우리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이곳에는 유교, 도교, 불교의 건축형식을 통일한 건축물이 있으며 또 일출을 구경하기에 제일 적합한 곳이다. 미타암에서 동쪽으로 가면 벽소암이다. 이곳에는 중국에서 년대가 제일 오라고 제일 완벽하게 보존된 라마교 “三世佛” 조각상이 있다. 賜恩岩은 좌측 봉우리 산중턱에 있는데 불전, 공덕당, 서재, 허씨종사 등이 있다. 불전에는 백옥관음상이 있는데 북송시기에 천연적인 암석으로 조각한 것이다. 사찰 뒤에는 2개의 거대한 암석으로 구성된 천연적인 석실이 있는데 전하는데 의하면 이곳은 당조시기 천주의 첫 진사 歐陽詹이 공부하던 곳이라 한다. 개원사 (開元寺) -- 개원사는 천주시의 西街에 위치하였는데 복건에서 제이 큰 불교 사찰이다. 당수공2년(기원686년)에 건설하여 이미 1,300여년의 역사가 있는바 연화사, 흥교사, 용흥사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당개원26년(738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지금 보존된 개원사는 남북길이 260m, 동서너비 300m, 면적은 78,000㎡이다. 사찰의 규모가 웅장하고 구조가 엄밀하며 사찰의 정면과 서쪽에는 백색 난간이 있고 자동나무가 재배되어 있다. 산문을 들어서면 바로 천왕전인데 좌우 양측에 각기 천왕 조각상 하나씩 있는데 두눈을 부릅뜨고 위엄있게 앉아있다. 천완전 뒤로는 “拜庭”이 있는데 배정은 전부 돌로 깔았으며 그 면적은 2,800㎡이다. 배정의 끝머리는 바로 대웅보전이다. 대웅보전은 개원사의 주체건물로 금빛 휘황하며 기백이 비범하다. 전내에는 86개의 돌기둥이 우뚝 솟아있으며; 모시고 있는 5개 불상은 五方彿이라고 하는데 동서남북중 5개 위치를 대표하는바 온갖 대지가 부처의 보살핌을 받고 있음을 대표한다; 대전의 대들보에 조각한 24개 비천악기는 1년의 24개 절기를 대표하며 그들의 머리에 있는 화관은 지탱작용을 하여 건축과 예술의 완미한 조합을 이루었다. 전앞에 있는 노대기초에 있는 사람 머리에 짐승의 몸을 가진 청석조각과 전뒤 복도처마아래에 고인도 신화를 조각한 청석주는 모두 희유한 문물이다. 유명한 동서탑은 사찰의 양측에 있는데 동탑의 이름은 鎭國塔, 서탑의 이름은 仁壽塔으로 모두 남송시기에 건설한 것으로 지금 중국에서 제일 높고 제일 큰 목질구조를 모방한 누락식 석탑이다. 탑은 8각5층으로 40여m의 탑에는 384폭의 정교한 조각상이 조각되어 있다. 괴성암 (魁星岩) -- 괴성암은 永春縣에서 서남쪽으로 6㎞ 떨어진 奎峰山麓에 위치해 있으며 원명이 “詹岩”이 였는데 후에 “규봉산”을 “괴성산” 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면서 “괴성암”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괴성암에는 10여곳의 경물이 있으며 산위의 벼랑사이에는 역(번역 역)迦, 文殊, 普賢 3개의 불상; “大雄寶殿”이 있으며 “大雄寶殿”뒤의 벼랑에는 7곳에 글을 쌔기였다. 낙양교 -- 또 만안교라고도 하며 낙양강이 바다에 흘러 들어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천주시에서 10여키로 떨어져 있다. 명대시인 릉등명은 “낙양지교천하기, 비홍천장횡강수(洛陽之橋天下奇, 飛虹千丈橫江垂)”라고 칭찬하였다. 낙양교는 북송의 황우오년(1053년)에 건설되었다. 전 다리의 길이가 약 천미터이고 너비가 5미터이다. 다리기둥이 40여개 있고 다리란간이 500개 있다. 강과 바다와 화합하는 곳에 건설되어 있으며 저명한 “벌형기초”와 “종력고기법”을 채용하였다. “벌형기초”라고 하는 것은 먼저 대량의 돌을 던져 돌언제를 쌓고 다리아래에 부착력이 강하고 번식이 빠른 굴을 양식하여 생물학을 교량공정건축에 사용하는 선례를 창조하였다. 하여 낙양교는 우리 나라 교량건축의 기초로 되었으며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되었다. 낙양교의 남쪽은 충혜사이며 채양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축하였다. 현재 교두에는 채양의 조각상이 있다. 채양은 천주의 지부이며 낙양교를 건축을 책임지었으며 후에는 단명전의 대학사로 되었다. 충혜사내에는 그가 쓴 <만안교기>가 있는데 문장, 서법, 조각이 아름다워 “삼절(三絶)”로 불리운다. 다리의 북쪽에는 “조혜사”, “진신암”이 있으며 각각 해신과 다리건축에 공헌이 있는 중을 위하여 제를 지낸다. 마니초암 (摩尼草庵) -- 마니초안은 보강현에서 서남쪽으로 10㎞에 있는 라산진(羅山鎭) 초암마니교유지(草庵摩尼敎遺址)에 위치해있으며 “명교(明敎)”라고도 하는데 공원3세기중엽 파사인(波斯人) 마니(摩尼)가 창건하였으며 공원7세기에 중국에 옮겨왔으며 명나라시기에 차차 쇠퇴해졌으며 중국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마니유지로서 지금 중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되였다. 초암은 1139년에 건설하였으며 지금 남아있는 증舍는 1922년에 건설한것으로서 건축물이 작고 아담하며 주위에 소나무와 백양나무가 무성하며 초암내에는 마니불상이 있으며 초상이 장엄하고 준엄하게 조각하였기에 중국에서 처음으로 진행된 마니교류토론회에서 이 초상을 마니교류토론회의 상징 도안으로 정했다. 초암에는 “은거교(隱居橋)”, “팔봉지(八鳳池)”, “천년고회(千年古檜)”, “만석봉(萬石峰)”, “옥천(玉泉)”등 경물이 있다. 정성공릉묘 (鄭成功陵墓) -- 정성공릉묘는 천주에서 30㎞떨어진 남안시 수두진(水頭鎭)부근의 강점촌(康店村) 복船山에 있는데 지금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로 되였다. 정성공은 중국에서 이름있는 민족영웅으로서 제일 큰 공헌은 대만을 수복하고 화란침략자를 물리치고 대만을 건설한것이다. 정성공은 장기간의 전역과 과도한 피로로하여 39세 해인 1662년에 병으로 죽었다. 정성공묘의 비석은 높이가 0.75m, 0.158m인 화강석으로 산자형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전체면적이 997㎡이다. 정성공기념관은 천주에서 40㎞떨어진 남안시(南安市) 석정진(石井鎭)에 있는 원 정성공이 수병을 연습시키는 훈련기지에 위치해있다. 이슬람교성묘 -- 이슬람교성묘는 천주 동문밖 영산의 남쪽비탈에 위치. 비단 같은 잔디가 깔려 있으며 천연적인 암석 하나가 받침대 위에 우뚝 솟아있는데 암석에는 “碧玉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이 암석은 바람이 불면 움직인다는데 이상하게도 헤아릴 수 없는 태풍과 지진에는 견디어 냈다. 민간에서는 그를 “風動石”이라고 부르는데 천주의 유명한 경치이다. “風動石”의 뒤는 바로 이슬람교 성묘이다. 명조시기 何喬遠의 《민서》 기재에 따르면 당무덕 년간에 이슬람교 창시자의 네 제자가 이슬람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중국에 왔었다고 한다. 제3, 4제자가 사망한 후 그들을 영산에 매장하였는데 아라비아학자들은 이를 이슬람교의 제3성묘로 간주하고 있다. 보강석사유람선 (普江石獅游覽線) -- 천주(泉州)에서 남쪽으로의 유람지를 보강석사유람선이라고 부르는데 이름있는 천주에서 18㎞떨어진 교향(僑鄕)에 있다. 보강석사유람선의 상징건축으로는 보개산(寶盖山)위에 지은 고수탑(姑嫂塔)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옛적에 오빠,형수,시동생 세사람이 있었는데 오빠가 외국에 일하러 갔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형수와 시동생이 보개산 위에서 기다리다 바다에 뛰여들어 죽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보개산위에 탑을 짓고 고수탑이라고 불렀다. 고수탑은 보개산위에 우뚝 솟아 밤낮없이 바다를 지켜보는데 이는 고향사람들이 외국에서 일하고 있는 친인들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표현해 준다. 석사의 복장과 일상용품은 아주 이름있어 많은 유람객들이 석사에 와서 쇼핑한다. 석사 영녕진(永寧鎭)의 남황금해안(南黃金海岸)관광구는 유람하기 좋은 곳으로서 전체적으로 해면, 해안선, 유지 세곳으로 나뉘였으며 구체적으로 민속문화촌, 동남아소경원, 술집, 오락원, 골프구락부, 뽀트구락부, 해빈해수욕장, 실탄사격장, 별장등 구역으로 나뉘였다. 그리고 바다밑세계관, 돌고래표현관, 해양과보(科普)관, 잠수관, 물밑표현관등 5개의 주요한 표현관 및 괴석박물관, 나무뿌리조각관 2개의 표현관에 호텔, 판점, 차집, 백화점등 시설도 있으며 지금 유람할 수 있는 해양세계관에는 200여종의 15,000여마리의 바다고기와 바다짐승이 있고 괴석박물관에는 300여종의 2,000여건의 괴석이 있으며 기타 관람청도 곧 유람을 시작 할 것이다. 민남황금해안의 해양세계가 준공되면 이는 중국에서 제일 큰 해양공원으로 될 것이다. 남안채자심고민거 (南安蔡資深古民居) -- 남안채자심고민거는 천주시에서 20㎞, 하문시에서 80㎞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는데 16개의 건축물로 분포되여있으며 민서의 영안토루(永安土樓)와 아울러 복건성의 2개의 민족건축물이다. 청나라 동치을추(同治乙추)년 봄에 필리핀 화교 채계창(蔡啓昌)이 궁교장리촌(宮橋장里村)에 와서 채씨 주택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는데 후에 그의 자손들이 계속 건설하여 지금의 남안태자심고민거로 되였는데 당시의 많은 장식재료는 동남아세아에서 운수해온것이며 건축물의 많은 조각은 님남의 독특한 조각예술과 장식방법으로 된것으로서 중국과 외국의 종합장식으로 되였다. 채자심고민거의 매개 건축물의 벽과 복도에는 모두 인물이야기, 봉황그림등 조각이 있고 명서법가의 글이 쌔겨져 있다. 채자심고민거는 백여년의 기나긴 역사가 있음으로하여 지금은 이름있는 명승지로 되었다. 해외교통사박물관 (海外交通史博物館) -- 개원사 동쪽 이웃에 있는 세 건물로,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취안저우 만고선진열관(灣古船陳列館)이다. 1976년에 위안저우 만 안에서 송(宋)대의 목조선이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파 일으켜 그 실린 짐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하문 샤먼은 송(宋)·원(元)시대부터 외국 무역으로 유명했던 장저우[州]의 문호를 이루면서 만 내의 여러 섬들과 더불어 해적이나 밀무역의 거점이 되어왔다. 명(明)나라 때인 1394년(洪武 27)에는 해변 방어를 위한 성이 구축되었고, 청초(淸初)에는 정성공(鄭成功) 일족이 사명주(思明州)라고 개칭하여 1680년까지 30년간 청에 항거하는 거점으로서 지배하였다. 청조(淸朝)는 정씨 일족을 토벌한 뒤 샤먼청[厦門廳]을 두고 취안저우부[泉州府]에 소속시켜 수사제독총병진수(水師提督總兵鎭守)를 주재시켜서 해상방어의 중심지로 삼는 한편 파괴된 성벽을 수축·확장하여 1685년에 새 성을 완성하였다. 외국 무역은 1544년에 포르투갈인이 처음 도착함으로써 시작되었으나 곧 추방되었다. 그 뒤 정씨 일족의 지배 아래 있을 때부터 영국과 네덜란드의 선박이 출입하면서 ‘아모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명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1842년의 난징조약[南京條約]에 의해 상하이[上海]·광저우[廣州] 등과 더불어 5항의 하나로 개항된 이후 상하이·홍콩[香港]·남양(南洋) 등지를 연락하는 중계 무역항으로서 크게 발전하였다. 타이완[臺灣]의 차·설탕을 중계무역해 온 샤먼은 청·일전쟁 후 일본이 타이완을 영유하자 한때 큰 타격을 받았으나, 중국 본토 연안 및 남양 각지에 넓은 통상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곧 회복할 수 있었다. 타이완과의 관계가 밀접하여 타이완에 사는 한인(漢人)의 대부분이 샤먼항구를 거쳐 이주했고, 또 남양화교(南洋華僑)의 출입항으로도 유명하다. 재산을 모은 화교가 이 곳에 돌아와 기업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시(市)의 교육·수도(水道)·전기·전화 등 공공사업이 화교의 출자에 의해 설립, 운영되는 일이 많았다. 샤먼항은 차·종이·과일 등을 적출하고, 쌀·면사·비료 등을 반입한다. 공업 발전에도 주력하여 식품가공·방직·유리·고무·피혁·조선·기계 등 공업도 일어나고 있다. 1956년에 잉샤철도[鷹厦鐵道]가 개통되어 장난[江南]지방을 배후지로 흡수하게 되었고, 섬의 북쪽 끝과 육지 쪽의 지메이[集美] 사이에 제방이 구축되어 육로로 대륙에 이어지게 되었다. 대안(對岸)의 구랑섬[鼓浪嶼]은 1904년에 영국조계로 개발된 곳으로 각국 영사관·별장 등이 산재하여 시가지가 아름다우며, 관광 휴양지로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1979년 심천(深川)·주해(珠海)·산두(汕頭)와 함께 경제특구로 지정되면서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하고 있다. 호월원 -- 화원과 같은 호월원은 섬의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다와 잇대어 있다. 정원에는 정성공의 소상이 있는데 중국역사 인물 소상중 가장 큰 것 중의 하나이다. 원 중의 광장에는 한조의 청동조각상 군이 있는데 정성공 당년의 풍채를 재현하였다. 고랑여는 섬 전체가 풍경이며 바다가에서 조개를 줏는 다거나 섬을 따라 산보를 하거나 박물관을 참관하거나 하는 것은 모두 재미있는 일이다. 고랑서 (鼓浪嶼) -- 고랑서는 하문에서 제일 인기있는 경치이며 중국에서 유명한 관광구이다. 고랑서는 아름다운 섬으로 면적은 1.78㎢밖에 안되며 700m의 鷺江은 고랑서와 하문본도를 격리시켜 매일 선박으로 양안을 오가고 있다. 고랑서의 경치는 아주 수려한바 “해상화원”으로 불린다. 해안선이 구불구불하고 천연해수욕장이 주위에 널려있으며 기이한 초석들은 사람들의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섬의 최고봉 日光岩은 하문의 상징으로 일광암에 가지 않으면 하문에 갔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설법도 있다. 고랑서는 4개 특징이 제일 관광객을 끌고 있는데: 1, 대자연은 수목, 화초로 섬을 큰 화환으로 단장하였으며 19세기 구라파식 건축이 그 사이에 박혀있는데 사람들은 고랑서를 “만국건축박람회”라고 부르는데 비록 좀 과장은 하였지만 고랑서 건축의 특색을 설명하고 있다; 2, 고랑서의 붐비는 차량이 없는바 행인들은 보행으로 차량을 대체하여야 하는바 섬의 공기는 아주 신선하다. 원래 고랑서에서는 사람마다 모두 보행하여야 하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평등도라고 불렀는데 지금 일부 행동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하여 전자차량을 구입하였기에 전통적인 명성과 좀 차이가 있다; 3, 고랑서 주민들의 음악소질은 비교적 높은바 보편적으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즐겼는데 50년대 이곳에는 이미 500여대의 피아노가 있었으며 또 많은 음악가도 탄생하였기에 “피아노고향”, “음악의 섬”이라는 칭호가 있다; 4, 밤이 되면 고성능의 야경공정, 눈부신 등불은 일광암, 숙장화원, 호월원을 불빛바다에 싸이게 하는데 오색찬란한 등불은 고랑서를 다채롭게 단장하고 있다. 고랑서에는 경치가 비교적 많은데 일광암, 숙장화원, 호월원, 민원, 관해원, 금원, 음악청, 해저세계, 정성공기념관, 필산동오락궁, 영웅산 등 경치가 있다. 일광암 (日光岩) -- 일광암은 “晃岩”이라고도 하는데 고랑서 중부 용두산위에 위치하여 해발은 92.68m로 고랑서에서 최고봉이다. 일광암에 오르면 하문과 고랑서의 풍경이 한눈에 안겨온다. 용두로를 따라 일광암의 입구에 도착하려 대문을 들어서면 몇십미터 높이의 거석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데 거석에는 “天風海濤”, “鼓浪洞天, 鷺江第一”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돌층계를 따라 올라가면 산에는 괴석들이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각종 제사가 새겨져 있다. 가다가 보면 두 무사가 지키고 있는 山寨門이 보이는데 거석사이에 쌓은 산채문은 당시 鄭成功의 抗淸(청조를 반대) 웅심을 보여주고 있다. 鄭成功은 대만을 수복하기 전에 하문에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일광암이 당시 중요한 거점이였다. 비록 3,4백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당시의 유적이 뚜렷하게 보이는데 이 역사유적을 보존하기 위하여 복건성정부에서는 그를 “龍頭山寨遺址”이라고 이름을 정하고 보호를 진행하고 있다. 일광암에 올라서 뒤산으로 내리면 바로 당년 鄭成功이 수병을 훈련하던 곳이다. 鄭成功기념관에는 그의 평생사적에 대한 비교적 소개가 있다. 남보타사 (南普陀寺) -- 지리위치에서 구분하면 하문대학 주변에 위치한 南普陀寺, 胡里山砲臺 등은 남보타관광구를 구성하는데 이곳은 인문관광자원이 위주이다. 남보타사는 五老峰 산기슭에 위치, 하문대학과 이웃하고 있는데 “천년고찰”로 불린다. 당조시기에 건설하였는데 역사기재에 따르면 금방 건설하였을 때 문앞은 바다였으며 경치가 아주 아름다웠다고 한다. 남보타사는 역사가 아주 긴바 그 지위도 아주 높다. 사찰의 천왕전, 대웅보전, 대비전, 장경각 등은 산세에 따라 건축하여 층층이 높아지고 좌우가 대칭되는데 아주 장관이다. 매년 음력 2월19일, 6월19일, 9월19일은 관음탄생일로 건강, 재부, 평안을 기도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하문대학 廈門大學 -- 남보타사 바로 남쪽에 궁전식 건물의 하문대학이 있다. 안뜰의 아름다운 연못에는 물이 찰찰 넘칠 듯이 고여 있고 보트가 뜬다. 초록색의 유리와 기와로 인 지붕, 학생 숙사도 마치 궁전 같다. 유명한 작가 루쉰도 이곳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으며, 학교 내에는 루쉰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집미학촌集美學村 -- 현재 하문도 와 집미는 화강암을 포개 쌓은, 길이 2212KM의 두 방파제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 방파제를 건널 때 맞은편에 15층의 다보탑 모양을 한 웅대한 건물이 보인다. 이곳이 엄청나 부를 쌓은 화교 천자겅(陳嘉庚)의 고향이다. 문자 그대로 '아름다움을 모은'학원촌이며, 1950년에 집미해방을 기념해 4년 걸려 조성하였다. 호리산포대 (胡里山砲臺) -- 하문대학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간 해변의 언덕에 있는 호리산포대는 샤먼 하을 지키는 해방(解防) 요새로서 1891년부터 5년 걸려 만들어 졌다.호리산포대는 청조 광서년간에 건설하였는데 화강암으로 쌓아올려 돌대문은 아직도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석판으로 된 길 양켠의 고목은 포대의 긴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포대에는 하문에서 출토된 여러가지 청조 화포가 진열되어 있는데 이런 구식대포는 중국역사의 진실한 반영으로 제일 큰 대포는 청조정부가 독일에서 구입한 것으로 항일전쟁시기 일본전함을 한척 격침하여 공을 세웠었다. 포대 내에는 지금도 1문의 거포가 남아 있는데 이것은 독일 공장에서 제조된 것으로 포신의 총길이는 14M, 무게가 60t이나 된다. 눈앞의 망망대해에는 대만에 속하는 섬들이 점점이 있다. 거포 옆에 설치된 망원경으로 이들 섬을 보면 대만 국기(청천백일기)와 삼민주의, 통일중국(三民主義, 統一中國)의 구호가 선명하게 보인다. 바로 최근까지 이들 에서 보내는 선전방송이 잘 들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만석식물공원 -- 시 동쪽 변두리에 있으며 면적은 4km²이다. 남국의 식물을 모은 식물원 외에 사원이나 정원, 호수가 있고 마애석각(摩崖石刻)이 있는 기암괴석도 볼 만하다. 태펴암(太平岩)에 있는 태평석소(太平石笑)는 이공원의 명물이며 마치 거석(巨石)이 웃고 있는 듯이 보인다. 만석산관광구 (萬石山游覽區) -- 만석산관광구는 園林植物園, 萬石岩, 虎溪岩 등 경치가 있다. 식물원은 그중 제일 좋은 관광구이며 또 중국중점풍경보호구이기도 하다. 만석산은 하문도의 獅山산맥에 위치하였는데 시구와 1리 떨어져 있으며 천,만가지 자태의 기암괴석으로 인하여 만석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만석산광광구는 암석경치와 아열대식물 경치가 위주로 하문 24경에서 “천계소종”, “만순조천”, “중암옥순”, “태평석소”, “자운득로”, “고독금동”, “호계야월” 등이 모두 이곳에 있다. 층계를 따라 올라가면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이 만석호인데 잔잔한 수면에 푸른 하늘과 구름이 비끼고 산수가 서로 어울려 생동한 산수화폭을 이루고 있다. 만석호 좌측에는 松杉園, 竹徑, 多肉植物區가 松杉園에는 삼나무가 백여종 있는데 그 중 “활화석”으로 불리는 수삼, 은행이 있으며 세계3대 관상나무 중국금전송, 일본금송, 남양삼이 있다. 만석호 우측에는 鄧小平이 친히 재배한 大葉樟이 있다. 종려식물구는 핵심위치에 있다. 종려원 옆에는 백화정이 있는데 만약 계절이 적합하면 각종 진귀한 화초들이 만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도취되게 한다. 장미원은 象鼻峰과 이웃하고 있는데 象鼻峰은 마치 코끼리가 코를 하늘로 쳐들고 고함을 지르는 모습과 흡사하다. 象鼻峰 맞은편은 비림구인데 곳곳마다 각종 제사가 새겨져 있는데 서법을 즐기는 관광객들은 필연적으로 이곳에서 큰 수확이 있을 것이다. 시내 교통 -- 廈門市區의 노선 버스는 7편인데, 특히 시내 관공에 필요한 노선은 불과 3편뿐이어서 알기 쉽다. 역전에서 1路버스를 타면 中山路으 상점가를 지나 종점인 하문대학(廈門大學)으로 간다. 여기서 2路 버스를 타면 역시 시 중심가를 지나 종점인 페리 선착장(輪渡碼頭)까지 간다. 또 3路 버스를 타면 시 중심가를 지나 역전으로 간다.역삼각형의 세각에서 그 중심에 있는 상점가, 中山路를 세 버스가 경유하므로 아주 편리하다. 게다가 마이크로형 택시(小巴士)가 빈번히 동라다니고 있어 빠르고 편리하다. 요금도 보통으 택시(出租汽車)에 비해 월씬 싸다. 샤먼에서는 '중국 명물'인 버스를 탈 때으 그 필사적인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