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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영원 무궁토록 우리들의 아버지로 계신다.
(이사야64: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1)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영생 구원을 얻는다.
요한복음 17장 3절을 살펴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를 잘 알지도 못하고 단순히 교회만 다니는 것으로 구원을 확신할 수 없는, 자신도 모르게 막연히 종교 생활하는 우상 숭배의 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9~10절에서 구원에 대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기 때문에, 세상 수단이나 도덕적방법이 아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들여 예수님께 속한 자가 되면, 예수님과 함께 영생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로 시인하는 것과 그에게 속한다는 말은 같은 동의어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께 속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함의 길을 마가복음 16장 16절에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말하고 있으며, 로마서 6장 5절에서는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는 말씀으로 구원받는 길에 대하여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성경구절은 마음과 신앙고백 그리고 그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행해지는 성례 약속에 각각 중점무게를 두고 구원받는 오직 하나의 길, 예수님께 속하는 길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10장 9절의 말씀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셨다’면 살리신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살아나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인가 하는 의문과, 요한복음 17장 3절의 말씀처럼, 보내신 자가 하나님이시라면 보냄을 받은 자인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시며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일한 분이 아닌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해야 한다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다만 믿는 자의 주인으로서만 존재하신다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지는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 그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핏 값을 주고 우리를 사신 주님으로만 계시는 분이신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보통 기독론을 설명할 때 삼위일체란 단어를 흔히 쓰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삼위일체 신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삼위일체교리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나 목적, 즉 ‘ 이것이 삼위일체 교리다’라고 확증하여 충분하고도 분명하게 설명하는데 인색한 것이 사실입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다보면 설명하는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만 묘사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교리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말은 어떤 성경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삼위일체의 교리를 고백하는 신학교 교수님이나 교회의 목사님 그리고 직분 자들과 성도들이 ‘삼위일체교리’에 대해 분명히 알거나 확증하지 못해도 구원의 문제와는 정말 상관이 없는 것입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아야 구원 받는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7장 3절 말씀을 대하는 우리들의 솔직한 고백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잘 알고 믿어야 영생구원을 얻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분명히 알고 믿어 구원의 확증을 갖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간혹 학자나 목사님들 또 교회에서 삼위일체교리의 궁극적인 목적과 분명한 내용 인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서로 의견을 달리하면서도 별일 없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삼위일체론’의 정의와 ‘성경적인 가르침’에 대해 무책임한 자세로 맡겨진 성도들의 영혼을 천국까지 잘 이끌 수 있는지 심각하게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삼위일체교리를 설명하기가 거북하고 헷갈리다 하여 자신도 모르게 어떤 영지주의 이단의 교리처럼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며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고 어리석게 가르치고 있지나 않는지 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2)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뿐만 아니라 늘 언제나 예배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찬송과 기도를 받으시는 예배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답해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21절부터 24절을 보면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착한 행실로 하늘에서 상을 받게 되는 때, 상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마5:16,45,48,6:1,4). 기도도 하나님 아버지께 하는 것입니다(마6:6,9,13). 기도응답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마6:8,18). 죄의 용서도 하나님 아버지가 하시는 것입니다(마6:14-15). 세상의 모든 동식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기르시는 것입니다(마6:26). 모든 동식물의 먹고 마심을 다 아시고 준비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마6:32). 구하며 찾고 두드리는 자들에게 응답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마7:11).
믿는 자들의 삶의 길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마7:21). 자녀는 종이 아닙니다. 자녀는 의무감으로 아버지 일을 돕지 않습니다. 어떤 보상이나 계산도 하지 않고 당연히 동역합니다. 자녀는 종의 멍에를 지지 않고 자유 합니다(갈5:1). 자녀는 아버지의 것을 유업으로 잇는 상속자입니다(갈4:7). 그들에겐 하나님 자녀의 영광의 자유가 있습니다(롬8:21). 자녀는 모든 것을 스스로 다 책임지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준비해 놓으신 것을 받고 누립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들입니다(롬8:15,갈4:6). 하나님 그 존재 자체가 믿는 자들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예배 대상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그 분께 예배로 나아가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거룩한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영으로 계십니다(시139:7-8).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절대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의 영을 ‘성령’ 또는 ‘예수의 영’과 같이 쓰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이라든지 하나님의 영이라든지 예수의 영이라든지 어떻게 부르든지 같은 분을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누구이십니까?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 바로 그 분이 성령이십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나옵니다. 그들은 베드로 앞에서 땅값의 얼마를 떼어놓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사도행전 5장 3절에는 “성령을 속였다”고 말하고 4절에서는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9절에 서는 “주의 영”을 시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과 “하나님”과 “주의 영”은 모두 같은 분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셈입니다. 더 나아가 로마서 8장 9절부터 10절을 보면 9절의 “하나님의 영”과 10절의 “그리스도의 영”을 한 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7절을 보면, 14절에서는 “아버지” 16절에서는 “성령” 17절에는 “그리스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이나 아버지나 성령이나 아들의 영이나 예수의 영 그리고 그리스도라고 하는 단어들이 다 함께 골고루 한 분의 하나님을 지칭하는데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 선택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 본체가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그 분이 아니시라면 그 분께 예배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대상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이시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존재에게 예배하면 안 됩니다. 아주 그럴듯한 존재라 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바로 하나님 바로 그 분이 아니면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를 받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형상이고 창조주 하나님 바로 그 분이라고 크게 선언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빌2:6-8,히1:3,골1:15-17,요1:10딤전6:14-16,요8:24-25).
베드로는 사도행전 14장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하여 가이샤라 고넬료 집에 가게 됩니다. 거기엔 주변 친척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이때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엎드려 경배하자 급히 만류하며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해야 한다고 강하게 질책했습니다(행10:25-26). 바울 역시도 사도행전 14장에서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를 고친 후 자신보고 하나님처럼 경배하며 제사 드리려고 하는 그들을 향해 비통해 하며 옷을 찢고 꾸짖는 모습이 나옵니다(행14:13-15). 여기서 베드로와 바울은 오직 하나님만이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는 분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조차 육신 가운데 계셨을 때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눅4:8,딤전3:16,계19:10,22:8,9)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을 때 예수님은 어떤 자세를 취하셨습니까(마28:9,17)? 예수님께서는 ‘내게 경배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그 경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으셨으며 오히려 경배하는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후, 이제 육체를 벗으시고 영체를 입으신 후 경배를 받으시며, 스스로 영존하신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 바로 그 분이 아니시라면 그 경배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의 경배를 받으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근본 본체가 바로 사람으로부터 마땅히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딛2:13,고전8:6,골1:15-17).
이사야 43장 10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에나 후에도 결코 지음 받은 신이 없음을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이사야 43장 바로 직전 42장 8절에서는 여호와 그 이름 외에 영광이나 찬송을 다른 자인 우상에게 주지 않을 것임을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예수님의 본체가 여호와 하나님, 다시 말해 근본이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시라면 예배의 대상으로 모시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인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사43:7,42:8,45:18,63:16,64:8,52:5-10). 그리스도인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릅니다(롬8:15,갈4:6).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의 근본 본체가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그의 영은 성령이십니다(빌2:6). 그러므로 예수님께 예배드림은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영과 진리로 자신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근본이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성령이십니다. 때문에 예수이름 앞에 마음껏 예배를 드려도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더 큰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 드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근본 본체가 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시다.
신구약 성경을 전체로 잘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태어 난 시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편 2편 7절을 살펴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시편 2편 7절에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며, 그는 어떤 특정한 날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들’이란 자리는 원래부터 줄곧 있었던 위치가 아닌 것임을 반증합니다. 아들로서도 영원 전부터 계셨다고 한다면 태어 난 시점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태어난 시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영원 전부터 아들로서 계셨다고 말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신약성경에서도 계속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6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들에게 생명을 주신 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면 그 아들이 그 생명을 갖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는 뜻인 것입니다. 로마서 1장 3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도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라고 말씀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동정녀 마리아가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타나신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도 말씀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 몸을 빌려서 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미래 시점으로 말하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눅1:32,35).
사도요한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하나님은 말씀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그 말씀이 1장 14절에서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느 시점에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셨습니다.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요1:14,골5:19). 예수님의 사람됨 즉 인자는 육체적 성육신과 관계되는 사건으로써 육신을 입으시고 고난 속에 순종함을 배워, 육신을 가진 사람 가운데서 자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입니다(히5:8-9,7:28).
오히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보다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몇 배 더 많이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의 유전인자를 다 가지고 있는 완전한 사람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아들로서만 계시지 않고 하나님으로서 영원히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근본이시며 상고의 태초이신 하나님으로서 영원히 계시는 분이신 것입니다(미5:2). 예수님의 근본 본체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빌2:6-8,히1:3). 여호와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창1:1). 예수님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골1:15-17).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아기로 태어나셨는데, 그 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사9:6).
요한복음 12장에서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믿고 보는 것이라”(요12:44-45)고 한 것으로도 보내신 하나님과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이라는 사실을 넉넉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근본이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으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영원한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어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습니다(고후5:19). 우리 사람들 마음 성전에 성령으로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바로 그 분이 예수님 전체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결코 크신 하나님과 작은 하나님으로 나누어 따로 계시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보다 작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디도는 예수님을 오히려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딛2:13-14,).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십니다(고전8:6,갈4:6-7,롬8:14-16,고후6:17-18,마7:11,요17:11-12,요13:19,사41:4,48:12,사44:6,계1:8,17,22:13,사45:22). 그 크기를 측량할 수 없으신 정말로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께서 그 분의 생각과 섭리 방법으로써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류 모든 죄의 댓가를 다 지불해 놓으신 것입니다(요3:16,골1:19). 성경은 줄곧 끊임없이 꾸준하게 ‘한 하나님 아버지’와 ‘한 주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고전8:6).
4)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의 동일하신 창조주이시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세상 우주만물을 지으신 분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3).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었고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골1:15-17).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창1:1). 이 세상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결코 누구의 도움이나 간섭을 받지 않고 홀로 세상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창1:1,출3:14-15,사37:16,42:8,43:7,10,44:6,8,24,45:5,18,22,46:9,48:12-13,54:5).
이 세상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면 절대로 사람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면 안 됩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만이 예배를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요4:23-24). 말라기에서는 창조주가 아니면 그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말2:10,사61:10,요8:41). 때문에 요한복음 1장 3절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바로 그 자신이다’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다른 어떤 창조주가 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상 우주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만물을 존재하도록 하신 당사자이심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라고 확고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요1:14).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기에(요1:10) 이 땅에 주인은 당연히 예수님이십니다(요1:11). 요한복음 1장 11절의 ‘자기 땅’ 이란 말은 소유권을 의미하며 이 땅의 주인으로서 자기 세상 자기 자신의 소유지에 오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었으되 하늘과 땅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있었느니라(골1:16-17). 그렇습니다. 여기서 ‘그’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창조된 모든 것은 오직 예수님을 위한 것이며, 창세기 1장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시다’ 라고 선언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도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으며, 아무리 거칠고 격한 풍랑일지라도 “잔잔하라”고 명령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어떠한 질병에 걸리고 심각한 장애나 죽은 지 삼일이나 되어 썩는 냄새 썩은 물이 흐르는 시체 ‘나사로’라 할지라도 명령하여 그 즉시 고쳐 살아나 활동하도록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근본 본체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히1:3,빌2:6-8). 말씀으로 하늘을 지으신 그 만상을 그 입 기운으로 이루어 놓으신 바로 그 하나님이신 것입니다(시33:6).
5)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은 같은 한 분의 주님이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마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합니다(행10:36). 또한 요한복음 20장에서도 도마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있는 곳에 오셨습니다. 이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요20:24).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의심했습니다. 직접 예수님의 손바닥이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 후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본 도마는 요한복음 20장 28절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주 하나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라고 강조해서 말씀합니다(막12:29). 사도행전에서도 베드로는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행2:36). 사도 바울도 에베소 사람들에게 “주도 하나이요”라고 선언하고(엡4:5), 오직 그에게는 예수님만이 주님이라고 단호하게 고백합니다(고전8:6,롬10:12,11:34,36). 요한일서 2장 28절과 29절에서도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 말하면서 “주께서 나타나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나 도마의 신앙고백처럼 모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신 것입니다. 결단코 그리스도인들의 주님이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외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이사야 63절 16절을 보면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와 아버지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주’와 ‘아버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전반절과 후반절에 연거푸 강조하고 있습니다. 64장 8절에서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주님’이신데, 그 분은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시89:26).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사야 64장 8절의 말씀처럼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주님이신데, 신약에서는 주님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주님은 한 분 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일한 분으로서 “주님”이시고 “하나님”이십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 본체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므로 근본이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의 주님이시고 그 근본 본체가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도마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에 대해 분명한 깨달음과 인식을 가지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구약성경에서 줄곧 예수님은 여호와이시며 주님이시고 근본 본체가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고린도전서 8장 6절과 에베소서 4장 6절에서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다”는 표현과 일치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호와 바로 그 분이 아니라고 하거나 근본이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그 자리에 계시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도상에서 빛으로 오신 하나님을 만났는데, 여기서 예수님을 “주”로 부르고 있습니다(행9:5,17). 그 바울이 후에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빌2:10,11,딤전6:14-16,고전16:22).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과 근본 하나님 아버지가 동일하신 한 분이심을 강조하며 분리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도 에스겔 1장 24절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로 고백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분명히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계19:6,22:20).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직접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3:13). 이 말은 예수님이 한 분의 “주님”이신데, 그 분의 근본 본체가 “하나님 아버지”가 되신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3장 11절에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를 분리해서, 디모데전서 2장 5절에서는 하나님과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분리해서 말하는 것처럼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시고 다만 주님이시며 중보자라는 것입니까? 그러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위의 구절들은, 예수님이 영으로서는 근본 하나님 아버지의 본체이시고 성육신하신 상태인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으로가 아닌 주님으로만 불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영이신데, 그 분 근본 본체가 하나님 아버지시지만 이 땅에는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야 했음을 이해하면 모순같이 보이는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시지만 육신을 입은 사람이셨기에, 그의 근본인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나 사람의 아들 그리고 주님으로 불려 져야만 한다는 것을 넉넉히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마23:9,요10:30).
혹자는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셨는가라고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결코 예외 없이 누구든지 자신을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일컬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민23:19).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외 없이 남자에 의해 태어난 존재는 ‘하나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육신을 가지시고 사람이 되신 예수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육신으로 계실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만 합니다(막14:36). 그리고 사람으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하나님이라면,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나 딸인데 다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사람은 본래가 흙으로 빚어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 받고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스스로 오신 임마누엘 창조주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십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그 근본 본체가 하나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의 주님이십니다(마7:21-23). 이사야 선지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그 분만이 우리 아버지시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주님이시면 그 분은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라는 말은 ‘주인’ ‘소유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행17:24,고전10:26,사37:16,시24:1).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딤전6:14-16,히1:3,골1:15). 영이신 하나님께서 구속자로서 피를 흘려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었고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골1:15-17,히1:10-12,시102:25- 27). 그는 우주만물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시고 소유하고 계신 ‘모든 그리스도인의 주님(계22:20-21,마16:16,요20:28)’이시며 바로 근본 본체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사63:16,64:8).
6)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신 구원자 하나님이시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있어서 줄곧 빈틈없이 강하게 선포한 중요한 사항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시라는 것입니다(사9:1-7,12:2,25:9,63:16,64:8). 그래서 그는 언제나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이시라고 노래하며 고백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사12:1-2,43:3,11,59:1,16,20-21,61:10,말4:6).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이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이 아니십니다. 오직 죄악 가운데 구원받지 못하는 인생들을 보시고 안타까이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시켜야 할 중재자가 없음을 보시고 하나님의 팔로 열심을 가지시고 스스로 구원을 베푸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사59:15-21).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의 구원의 팔로 나타나신 분이십니다. 그는 연한 순 같고 고운 모양이나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으며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셨으나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셔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분이십니다(사53:1-12). 호세아 선지자도 오직 여호와 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을 동일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호13:4).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케 하셨습니다(요3:16). 그렇다면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주신 독생자 예수는 다른 분이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심의 결과는 독생자인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 영혼의 구원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팔이시며 사랑이신 예수님 외에 결코 없음을 성경은 여러 선지자를 통해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전체에서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말하고 있습니다(요1서4:14,딛2:13). 특별히 마태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고 가만히 끊고자 했던 요셉에게,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 예수가 장차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마1:21)”을 분명하게 고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로서 죄악 속에서 사망의 쇠사슬에 매여 고통당하는 자들을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로 굳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 아담’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죄 없는 사람의 피가 필요했습니다. 남자의 후손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그래서 여인의 후손으로 마지막 아담으로 오사 생명을 주는 영이 되어야만 했습니다(고전15:45,47). 우리는 첫 째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죄의 멸망에서 스스로 벗어 날 힘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 예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거저 의롭게 된 것입니다(엡1:7,롬5:18-19). 예수님께서는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모든 능력을 소유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저희 생각을 아시는 분이십니다(눅6:8,9:47). 그리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 죄 사함과 구원을 선포하시는 분이십니다(눅7:48,막2:5).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죄 사함과 구원을 주시는 권세자로 있으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죄 사함과 구원함을 선포하는 예수님을 어떤 서기관들이 보고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이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모르면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막2:6-12).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마28:18,엡1:21).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십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근본 본체인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구원자이심을 거침없이 단호하게 선언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7)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인자”의 뜻
사도행전 7장 55절에서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이 죽어가면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스데반은 부르짖으며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7:59)”라고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인자”라는 말은 어떤 상황을 설명하는 말입니까? 더 나아가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오른 편에 계신 예수님, 하나님 따로 예수님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 우편에 있는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계시다는 것으로 하나님이시다고 그냥 무조건 믿어야만 합니까?
모세는 출애굽기 15장에서 또 다윗은 시편 118편에서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출15:6,시118:16).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24:3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우편 또는 오른 팔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사40:10,53:1,59:16). 예수님은 오른 편을 말씀하실 때 ‘아버지’의 오른편이 아닌 ‘하나님’의 오른편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 편이라고 했다면 오른 편에 계신 분은 그냥 ‘아들 하나님‘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편’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인식하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처럼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권능이시라”라고 말합니다(고전1:24). 그렇습니다. 오른 편이란 말은 종종 ‘권능’ ‘위엄’ ‘위대함’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히1:3,8:1). 다시 말해 하나님의 우편이란 말은 하나님의 권능 위대하심 위엄을 표현하는 동의어인 것입니다.
때문에 에베소서 1장 20절과 골로새서 3장 1,3절에서 하나님 오른 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광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해야만 합니다. 만약 사도 바울의 표현을 이와 같이 해석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하나님 우편에 계신 분’은 ‘서로 다른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4-25절에서 예수님께서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가 오는데,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골1:13).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인자로서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영원히 가지고 계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은 예수님의 근본 본체 하나님 아버지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 말세 교회 시대에 육신을 입으시고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잠시 맡고 계시다가, 원수 마귀를 영원한 지옥 불에 가두실 그 때가 되면 근본 본체 하나님 아버지로서 다시 맡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보좌는 영원한 것입니다(히1:8). 잠시 얼마간 정해진 시간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근본 본체가 하나님 아버지이시기에 그는 영원한 왕이시며 영원히 왕 노릇하시고 그의 나라가 영원무궁한 것입니다(눅1:33,사9:6-7). 만약에 예수님의 본체가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시라면 불가불 잠시 잠깐이라도 왕 노릇하시거나 만유의 주가 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엡1:20-21,23,4:10,골3:11,빌2:6-12,히1:3). 때문에 고린도전서 15장 24-25절의 말씀은 예수님이 아들로서 나라를 장차 아버지께 바칠 때가 있으며, 또 모든 원수를 발아래 두는 그 때 이 후 영원토록 본체 하나님 아버지로서 만왕의 왕 만유의 주가 되시어 통치하신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권능이시다’라는 말과 같은 뜻인 것입니다.
8) 위엄의 복수형 “우리가”의 하나님
신약성경의 하나님과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서로 다른 분이 아니십니다. 신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한 분의 유일하신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뿐이십니다(사37:16,신6:4). 하나님은 한 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신약성경의 하나님과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다른 분이 될 수가 없으며 똑같은 속성을 가지신 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불붙는 가시덤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라고 소개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하실 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시작된 존재가 아니라 그분이 시작이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위대한 분으로 소개하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8장 58절에서 예수님 본인이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선지자들에게 스스로 있는 자로 소개하셨던 그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의 “스스로 있는 자”와 요한복음 8장 58절의 “내가 있느니라”는 말은 똑같이 'ㅣ AM'이란 뜻으로 예수님의 여호와 하나님 되심을 선언하는 동의어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신구약 전체가 예수님을 증언하는 말씀의 책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해야 하는데 있어서 ‘예수“가 중심이고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눅24:44,히1:1-2,고후3:14-16).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진리의 말씀입니다(요17:17).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알고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또 이 말의 뜻은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와 예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알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한사도는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여호와 하나님 되심을 바르게 알고 신앙 생활해야만 온전히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알려진 종파에서는 예수님을 유일한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여호와 하나님 되심을 인정치 않는 것입니다. 또한 ‘몰몬교’라는 종파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님을 완전히 분리되고 구별되는 다신론적인 두 인격체라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같은 성경을 읽고 사용하지만 그 성경을 읽는 기준을 달리하면 이상하리만큼 다른 해석이 출현되게 됩니다. 성경의 증언의 초점은 ‘예수님’과 그로 말미암은 ‘영생’에 대한 것입니다(요5:39). 때문에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 할수록 ‘예수’를 더욱 더 잘 알게 되어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넉넉하신 ‘하나님 바로 그분이심’을 더 깊게 깨달아야 정상적인 것이고 바른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우주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창1:1). 그는 홀로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단독으로 만드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은 창조주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알아 잊지 말고 자손들에게까지 명심하여 가르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신6:4,사45:21,46:9).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라는 단어는 복수 형태를 지닌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복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어서 27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앞 절과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27절은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과 따라 하나님의 실행하심을 강조한 말씀이며 26절은 하나님 말씀 그 자체의 장엄 성을 강조한 심사숙고를 나타내는 히브리의 관용적 표현방법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라는 말은 천국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둘러 싼 거룩한 존재들인 ‘천사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만 서로 충돌되지 않고 바르게 해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왕상22:19,욥1:6,사6:8,시29:1).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엘로힘(Elohim)이라는 말이 복수형이기 때문에 그 이름이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인 하나님 안에 있는 인격체의 복수”를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는 복수형으로 쓰고 있는 단어들 대다수가 단수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사사기11장 24절에 보면 이방신 ‘그모스’나 8장 33절에서의 ‘바알브릿’, 16장 23절에서의 블레셋의 신 ‘다곤’도 열왕기하 1장 2,3절에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 19장 37절에서의 앗수르의 신 ‘니스록’도 ‘엘로힘’이란 복수형태의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런 이방 우상 신들도 삼위일체 신이란 말입니까?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물’ ‘삶’ ‘얼굴’이란 단어가 ‘엘로힘’처럼 복수형을 쓰고 있지만 복수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고 단수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엘로힘’은 복수형이지만, 히브리어에서는 충만한 힘을 암시하는 ‘위엄의 복수’로 흔히 사용되는 형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이신 한 분이 세 위격으로 계신 분이십니다(칼바르트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성령으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심으로 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여 사람이 되신 하나님, 그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서로 다른 분이 아닙니다. 유일하신 한 분의 하나님을 줄곧 여러 서술 언어로 표현하며 설명하고 있는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 권고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8장 24절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 죽으리라”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 본체가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알고 믿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실질적인 믿음의 고백과 경배가 따라야 구원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 약속의 선물인 ‘구속사’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은 한 아기 아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칭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예수님을 일컫는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임마누엘의 예수님의 근본 본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마태와 바울 사도가 증거 하기 약 700여 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습니다(사9:6). 뿐만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 하나님의 대로를 예비하라고 선포하고 있는데(사40:3), 세례 요한이 그 여호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마3:1-3).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요3:16,창3:21,요일4:16,마3:17,막1:11,눅3:22,마17:5,막9:7,벧후1:17,요3:35,5:20,15:9,17:26,요일4:9-10,요10:17,16:27,17:24,요일3:1,롬8:39,살후3:5,롬5:5,요일5:3-4).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주신 독생자이십니다(요3:16).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예수님으로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시고 계시며(골1:19,요14:7-9), 예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계십니다(골2:9,요14:10-11). 하나님은 말씀이신데, 그 말씀이 인격적으로 이 땅에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요1:1).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스스로 아들이 되어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6). 이것은 이사야 9장 6절에서 한 아기 아들 예수를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말한 것과 빈틈없이 일치되는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때문에 주저 없이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묘사하였습니다(빌2:6).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이신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으로 나타나신 것이라고 증언한 것입니다(딤전6:15-16). 그렇습니다. 오직 한 분의 하나님은 창조 때엔 아버지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성육신 하셨을 때는 한 아기 아들로,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서는 성령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에서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도 없고 나의 후에도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사43:10,44:6).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4-27),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14:7).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요4:23-24). 찬양과 기도도 하나님 아버지께 하는 것입니다(마6:6,8,9,13,15,시148:12,렘17:14). 예수님은 우리들의 예배와 찬양과 기도를 마땅히 받으셔야 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일찍이 예언 증거 한 이 놀라운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 본체가 하나님 아버지이심(사9:6,63:16,64:8,빌2:6)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 그때 모든 사람 앞에 더욱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나, 영원토록 감격하며 마음껏 찬양 경배 영광 돌리게 될 것을 기대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계3:21,고전15:24-25,계21:5-7,22:13).
<참조>
칼바르트의 그리스도론적 삼위일체(이종성박사 삼위일체론 요약 글)
삼위일체론을 새롭게 조명하고 재건했다고 평을 듣는 칼바르트는,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주님으로서 계시하는 ‘자아계시의 기초와 내적 진리와 능력’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영원한 부성(父性)이 우리에 대한 부성과 주성(主性)의 기초가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유는 하나님 자신인 영을 통하여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성령으로서 사는 그 존재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자유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who)이며, 자신을 통하여(through) 자기를 계시하며(how), 자신이 자신(himself)을 계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계시란 하나님이 직접 사람을 그의 대화의 상대로(thou) 실존적 관계로 인정하고 그 사람에게 자신을 밝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 앞에 서 있는 하나님은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who)은 자신을 통하여(through) 자기를 계시하며(how), 자신이 자신(himself)을 계시하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을 주로 계시하시는 주체이며 그리고 계시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칼바르트는 성경책은 하나님의 주되심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아들이 되실 수 있는 자유와 자아계시에 있어서 계시자인 동시에 계시 자체인 것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론도 예수 그리스도 즉 아들을 중심으로 작성되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설명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칼바르트는 하나님은 자신을 영으로도 계시하시는데, 하나님의 영을 아버지와 아들의 영으로서 자신을 계시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칼바르트는 영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상태의 하나님을 아들로 부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은 모두 믿는 자들의 주가 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권위와 신성은 하나님 아버지의 주되심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역사화(歷史化)하는 일이 성령의 사역인데, 계시를 객관화하는 것은 하나님의 실재요, 그의 영이요, 그의 존재가 주관적으로 임재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래 하나님의 영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 자체가 계시도 계시의 내용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밝혀주며, 성령의 사역은 계시 안에서 하나님 자신에게만 돌릴 수 있는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 있어서 분명한 종속주의이면서 예수님의 주권과 그 주권이 아버지의 주권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기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 주권에 관한 계시를 앞세우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칼바르트는 예수님의 주권이 하나님의 주권과 동일하다는 것을 힘써 주장하지만, 예수님의 주권은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의 주권과는 다르다는 것을 또한 말합니다. 우리를 향하여 사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은 직접 우리를 한 인격자로 취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써 우리와의 관계를 갖기를 시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주시는데, 창조 때의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이 아닌 화해에서의 아들로서의 주권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창조주 하나님 바로 그분이시면서도 또한 성육신의 아들로서는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과, 한 하나님이 여기 계시는데 아버지를 떠나서가 아니라, 분명히 아버지의 아들로서 또는 말씀으로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이는 그분이 아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아들이며 말씀입니다. 그분이 아버지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와 화해는 우리에게는 전적으로 다른 두 가지 사건이지만 그러나 그 근원에서는 완전히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종속과 동등이 아버지와 아들의 순서적 질서로써 설정되어 있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의 질서와 말씀으로서 아들의 화해의 질서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칼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의 유일의 근거를 밝히려는데 그 목적을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위격(persons)의 복수성을 앞세우고 그의 통일성을 제이차적으로 취급하는 사회학적 삼위일체론을 극구 반대하는 칼바르트는 성경 안의 모든 단어 언어가 ‘매순간’마다, 또는 ‘매 요소’안에 한 분의 하나님으로 계시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각자가 창조적 화해적 질서적 관계이면서 본래 한분의 하나님이심을 축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들과 성령이 동시적으로 동일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셋 안에서의 하나’로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통일에 대해서도 문제가 되지 않으면서 오히려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을 최종적이면서도 결정적으로 확인하는 말인 것입니다.
칼바르트는 하나님은 한 분의 하나님이시라는 통일성을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신약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단일 사역을 증거 하는 것으로, 그 단일 사역 안에서 자신을 우리의 주로, 화해와 구속 안에서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 바로 그 자신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칼바르트는 하나님의 위격을 하나님의 본질과 연결시킵니다. 그 하나님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한 분의 주요, 한 사역자요, 한 분의 당신입니다. 거기에는 복수의 주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주권과 아버지의 주권의 경쟁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하나님의 본질, 신성, 신적 실체, 본체, 본성 또는 실체와 동일시합니다. 단지 삼신론에 빠질 것이 두려워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세 위격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경계해야 할 삼신론의 최악한 말이며 가장 뚜렷하게 표현한 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며 한 분으로 혼자 계신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어떤 분별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신적 존재와 실재의 구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일성을 “통재론(通在論)과 삼위일체론의 대외 사역의 불분할률”로써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그들 사이에서 하나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하나의 본성이 그가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그리고 성령으로서 존재하는 그 실재 안에 진실로, 그리고 분리됨이 없는 실존임의 이해입니다.
칼바르트는 양태론자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구별되는 것은, 그의 본성에서의 구별이었으며, 그 구별에 따라 우리에게 계시되었기에 본체에서, 계시에서, 인간의 경험에서 다 같이 셋으로 이해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양태론과는 달리 그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그의 자체의 본질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존재양태는 일시적이거나 단순한 현상이 아닌 하나님의 존재의 실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칼바르트에게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또한 우리의 아버지로 계시됩니다. 또한 그 아들은 자신이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 안에서 아버지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성(父性)은 신적 본질의 존재의 영원한 존재양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관계개념을 하나(일체, 한 하나님)로 강조하나, 동시에 그 한 하나님 안의 구별도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세 위격 사이에 있는 각 위 간에 관계와 세 위격이 한 분의 하나님과 갖는 관계입니다. 전자에 대한 이해가 바르지 않을 때에는 다신론이 될 것이요, 후자가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으면 군주신론이 될 것입니다.
칼바르트는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본성 또는 행위 안에 먼저 순수한 근원이 있고, 그 다음에 두 가지 다른 것이 나왔다는 사실로써 구성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산자이십니다. 그는 이중적이고 독특한 뜻에서 자기 자신의 생산자이십니다. 그는 자신을 아버지로 갖습니다. 즉 순수한 수여자(受與者)이십니다. 그러나 아들로서 그는 받는 자이면서 수여자이십니다. 그분은 발언자이십니다. 그분 없이는 말씀도 의미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발언자의 바로 그 분의 말씀이며 의미를 지닌 자이십니다. 이것은 특이한 신적 단일성 안에서 특이한 신적 셋 됨입니다. 칼바르트는 분명히 하나님의 일체성을 더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우선권(優先權) 또는 주권을 강조하기 위해서 신적 주권을 언제든지 삼위일체론 앞에 두고, 그 주권 안에 있는 하나이신 한 분의 하나님 주체성을 확보하고 난 후에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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