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촌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비래동, 남쪽은 동구 용전동과 가양동, 서쪽은 중리동·법동·동구 용전동, 북쪽은 법동과 인접해 있다. 동쪽으로 응봉산을 뒤로 하고 서쪽으로 얕은 구릉지대를 따라 동쪽의 넓게 퍼진 들판을 중심으로 주로 논과 밭이 많았던 지역이며 남북으로 길게 자연촌락이 발달하였던 곳이다. 송촌동의 자연마을로는 윗송촌(상송촌, 원송촌)·양지뜸(양지말, 양지촌)·음지말·욧골·비선거리·팽전말(평전말, 평잿말, 평전)·학댕이(학당이, 학당리)·홈통골 등이 있다.
현재의 송촌동은 2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는 경부고속도로 동쪽과, 도시화 지역으로 변모한 경부고속도로의 서쪽이다.
그런데 이곳을 송촌동이라 하게 된 것은 조선 초기에 은진송씨 쌍청당 송유가 이 곳에 정착한 이래, 대대로 은진송씨가 번성하여 동족마을을 이루고 살아왔기에 송촌이라 하게 되었다. 그 후 마을의 지역범위가 점차 넓어지자 아래송촌(중리동)과 윗송촌으로 나뉘어져 지금의 송촌동은 윗송촌이라 하고, 중리동 지역은 아래송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윗송촌을 크게 나누면 동춘당 송준길의 고택이 있는 마을이 송촌의 가장 중심이 된다하여 원송촌이고, 그 위쪽에 자리한 마을을 윗송촌(상송촌)이라 하였다. 다시 말해 송촌동은 은진송씨 본향이라 할 수 있는 마을이라서 송촌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이다.
본래 송촌동은 은진송씨가 입향하기 이전에는 본관을 알 수 없는 김씨들이 집촌을 이루고 살아 김가쟁이 마을이라 하였다. 그후에는 백씨 등 각성들이 살던 만취촌이었으나 은진송씨가 들어오면서 송씨가 주를 이룬 마을이 되었다. 그래서 일대의 땅들도 대부분 송씨들 소유로 되어 있었다. 당시 송촌동에 살던 각성받이들은 대체로 송씨네 땅을 소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와 같이 은진송씨들의 위세는 해방이후에도 계속되어 여전히 거대 지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 송촌동 택지개발사업이 시작되자 은진송씨들은 토지의 보상을 받고 타지로 이주하게 되었고 송씨의 집성촌 모습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현재 송촌동은 택지개발사업을 통해 주거밀집지역으로 바뀌면서 선비마을아파트 2·3·4·5 단지와 단독주택지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아파트의 밀집으로 인한 인구증가로 송촌동에는 새로이 초·중·고등학교가 들어섰고, 기타 대전상수도 사업본부 등이 세워졌다. 현재의 송촌동에서는 옛 자연마을의 자취는 사라지고 동춘당·동춘선생 고택·송용억 가옥·이시직 정려·송씨3세 효자정려 구허비 등이 남아 송촌동이 예전에 유서 깊은 마을이었다는 징표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 송촌동의 토지이용 실태를『'99통계연보』에 의해 살펴보면 송촌동의 총면적은 1,823,483㎡이고 이중에 전(田)이 237,183㎡ 13%, 답(畓) 206.043㎡로 11%, 임야가 746,585㎡로 41%, 대지가 307,789㎡로 17%이며 나머지는 도로·하천 등이다.
이와 같은 통계에서 송촌동이 경부고속도로의 동쪽으로는 전부가 개발제한구역으로 대부분의 임야와 전답으로 되어 있고, 경부고속도로 서쪽은 택지개발로 인구가 밀집한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따라서 송촌동의 서쪽은 개발로 인한 인구집중으로 대덕구 내에서 가장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를 형성하고 있어, 거주지의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 바로 송촌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송촌동의 연혁
송촌동 지역은 백제 때는 우술군이었다가, 신라시대에는 비풍군으로 개명하였고, 그 밑에 유성현과 적오현(뒤에 덕진현)을 그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 초기에는 비풍군을 회덕현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이후 현종 9년(1018)에는 공주의 속현으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유성현과 덕진현이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현종 9년의 군·현의 개편 시에 유성현과 덕진현이 회덕의 속현에서 벗어나 공주의 속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회덕현은 고려 명종 2년(1172)에 처음으로 감무(조선시대의 현감과 같음)를 두게 되어 주현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행정구역을 서울→도→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 체제로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회덕은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회덕현이 되었다. 이와 같이 8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소현의 병합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에 유성현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회덕현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
정조 13년(1789)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지금의 송촌동은 회덕현 내남면송촌(松村)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미 조선중기 이전부터 송촌이란 지명과 행정구역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호구총수}에는 송촌이 한자로 송촌(松村)이라 되어 있으나, 이는 송촌(宋村)의 오자이다. 왜냐하면 {호구총수} 보다 먼저 간행 된 {여지도서}(영조 35년, 1759)에도 상송촌리(上宋村里)와 하송촌리(下宋村里)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송촌동은 상송촌리를 말하는 것이고, 하송촌리는 중리동이다. 그후 조선후기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태종이래 실시되었던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종래의 부(府)·목(牧)·군(郡)·현(縣) 등의 지방행정 단위를 모두 폐합하여 336개 군을 신설하고 이를 23개의 부에 속하게 하였다. 이로서 회덕현은 공주부에 속하는 27개 군의 하나인 회덕군으로 개편되었고, 송촌도 회덕군 내남면 송촌리가 되었다. 이 당시 회덕의 구역은 기존의 회덕 7개 면(현내면, 동면, 외남면, 내남면, 서면, 근북면, 일도면)에 공주군의 5개 면(천내면, 유등면, 탄동면, 구즉면, 산내면)과 청원군 주안면이 편입되어 이전보다 크게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덕군과 진잠군이 통합되어 대전군이 되면서 송촌은 비래리·송촌·중리등 각 지역의 일부가 합하여져 대전군 내남면 송촌리가 되었다. 1931년에는 대전군 대전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대전군 1읍 11개 면으로 되었고 1935년에는 대전읍이 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부와 대덕군으로 분리되는데, 이때 송촌동은 대덕군 내남면 송촌리가 되었다. 1983년 시역 확대로 대덕군의 송촌이 대전시 동구로 편입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대덕군의 폐지와 동시에 대덕구가 설치되었다. 현재의 송촌동은 법정동으로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2동에 소속되어 있다.
◎ 송촌동의 전통마을과 씨족
○ 윗송촌(상송촌, 원송촌) : 윗송촌은 동춘당과 고택이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송씨들이 집촌을 이루고 살아서 송촌이라 하였는데, 이를 윗송촌과 아래송촌으로 나누고, 윗송촌이 송촌의 중심이 된다 하여 원송촌이라 불렀다. 아래송촌은 지금의 중리동에 속한다. 윗송촌을 세분하면 원송촌, 양지뜸, 음지말로 나눌 수 있다. 송씨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 마을은 김씨들이 집촌하여 김가쟁이 마을이라 하였고 그후에는 이곳을 만취촌이라 불렀는데 백씨와 각성들이 거주하였다. 이후 은진송씨가 입향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윗송촌의 원송촌에 130호 정도가 거주하였고, 양지말에 10호, 음지말에는 7∼8호 정도 거주하였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은진송씨들이 20호 정도 세거하였고, 그후에는 10호 정도 거주하였다. 기타성씨로는 청풍김씨 4호, 이씨, 박씨 등과 기타 여러 성씨들이 거주하였다.
○ 욧골 : 욧골은 비선거리와 보령아파트 사이를 말한다. 당시 안동권씨 4∼5세대 기타 성씨들이 거주하였고 은진송씨는 거주하지 않았다. 지금은 마을이 형성되었다.
○ 비선거리 : 비선거리는 성락교회와 회덕신협 송촌분소 사이를 말한다. 옛날에 비석들이 서있어 비선거리라 하였다. 옛날에는 5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현재는 마을이 형성되고 있다.
○ 팽전말(평전말, 평잿말, 평전) : 팽전말은 윗송촌과 용전동 신동아아파트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윗송촌에서 남서쪽 벌판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평지로 되어 있어 평전말이라고 부르며 또는 평잿말, 팽전말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세거 호수는 5∼6세대 정도였고 고성이씨, 풍천임씨가 거주하였다.
○ 학댕이(학당이, 학당리) : 학댕이는 윗송촌과 진날등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학댕이 마을 동쪽에 있는 산에는 옛날에 큰 소나무가 많이 있었는데, 이 나무에 학들이 날아와 앉았기 때문에 학당이라고 부른다. 또 옛날 조선 초 성종 때 28세로 요절한 송여즙이 학당을 짓고 공부를 한 마을이라 하여 학당이라고도 했으며 또한 이 곳에 송씨 문중에서 아이무덤을 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춘 송준길 선생이 지은 학당산비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이 마을에는 은진송씨의 산직이들이 5∼6세대 정도 거주하였다.
○ 홈통골 : 홈통골은 용전동 일양약품과 대한적십자혈액원 사이에 있는 마을인데 지형이 홈통 같다고 해서 홈통골이라 하였다. 또한 동춘 송준길 선생이 고개 너머 들판에 물을 대기 위해 이 곳에서 용전동까지 홈통(수도)을 가설한 골짜기라 하여 홈통골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옛날에는 골짜기였으나 지금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당시는 15세대가 거주하였는데 풍천임씨, 밀양박씨, 기타 여러 성씨들이 거주하였다.
◎ 송촌동의 세거성씨
○ 은진송씨(恩津宋氏) : 입향조 송명의는 은진송씨의 비조, 판원사부군 송대원의 증손으로 고려 공민왕 때 과거를 거쳐 사헌부집단에 올랐으나 시대가 혼란하자 벼슬을 버리고 처향이었던 회덕의 토정(土井, 토물) 마을로 은둔하였다. 은진송씨가 회덕에 입향한 시기는 14세기말에서 15세기초로 생각되며, 입향하게 된 것은 송명의가 회덕황씨 황수의 사위가 되어 이곳에 온데서 비롯되었다. 송명의의 아들 송극기가 죽자 그의 처 고흥류씨는 개경에서 4살 난 송유를 데리고 시부모가 사는 회덕의 백달촌(중리동)에 와서 정착하게 되었다. 송유는 중앙정계에서 활약하다가 어머니가 살고있는 회덕의 백달촌으로 낙향하여 은진송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송유는 백달촌에 쌍청당을 짖고 인근의 사족들과 교류하였다. 황간(영동)의 박연과, 회덕 흥농의 박팽년, 영동의 김수온 등 당시의 명사와 문장으로 교류하였다. 그 후로 송씨들이 번성하여 백달촌을 송촌(宋村)이라 하고, 나아가 그 촌락의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상송촌과 하송촌으로 나누어지기도 하였다. 이후 자손들이 더욱 번성하여 인근에 사는 순천김씨, 안동권씨 등 사족과 교류 혼인하여 그 위상이 높아졌다. 따라서 은진송씨는 조선후기까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사족으로 번성하여 제월당파·사우당파·동춘당파·우암공파 등 37개 파로 확대되었다.
◎ 송촌동의 옛 지명
● 금바우(금바위, 금암) [바위] : 송촌과 양지말 사이의 계곡에 있었다. 동춘 송준길이 이 바위에서 제자들과 자연을 즐기며 놀았다 한다. 바위에 새긴 두 글자는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 없다. 금암은 거문고를 켜는 바위라는 뜻인데 금바우·금바위라고도 한다. 현재는 소대헌 앞으로 옮겨 놓았다.
● 김가쟁이(김가쟁이들) [들, 마을] : 음지말에서 동쪽, 송촌정수사업소에서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들이다. 옛날 이 마을에 송씨가 들어오기 전에 김씨가 살았다 하여 김가쟁이 마을, 김가쟁이들이라고도 한다.
● 다롱고개(다른고개, 월현) [고개] : 금바위와 비래동의 옥류각 사이에 있는 고개로 송준길과 송시열이 옥류각·비래암으로 공부하러 가기 위해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양지뜸에서 비래골의 비래마을, 즉 다른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다른고개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다롱고개라 부른다. 또 송촌정수장 입구에 있는 고개를 다롱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월현이란 한자명으로 볼 때 달과 관련된 지명이 변하여 다른고개, 다롱고개로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매봉산(응봉산) [산] : 송촌과 법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봉우리가 마치 매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매봉이다.
● 비선거리 [거리] : 성락교회와 회덕신협 송촌분소 사이를 비선거리라 부른다. 옛날에 비석이 많아 비선거리라 하였다. 그 당시에는 5가구의 주택이 있었으나 현재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 윗송촌(상송촌, 원송촌) [마을] : 동춘당이 위치한 마을이다. 송씨들이 살아서 송촌이라 하였는데, 이는 상송촌과 아래송촌 중, 상송촌이 송촌의 중심이 된다하여 원송촌이라 부르고, 아래송촌은 현재의 중리동이다.
● 양지뜸(양지말, 양지촌) [마을] : 금바위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이 양지쪽에 있기 때문에 양지뜸 또는 양지말이라 한다.
● 욧골 [마을] : 비선거리와 보령아파트 사이를 말한다. 낮은 산골짜기에 외딴집 한 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마을이 형성되어있다.
● 음지말 [마을] : 이전의 윗송촌과 송촌정수장 사이로 음달진 곳에 마을이 있기 때문에 음지말이라 한다.
● 진날등(긴날등) [산] : 학댕이골에서 북쪽, 매봉산에서 학댕이골 쪽으로 산등성이 길게 이어져 있어 이를 긴날등, 진날등이라 부른다.
● 평전말(팽전말, 평잿말, 평전) [마을] : 송촌동과 용전동 신동아 아파트 사이에 있던 마을로, 지형이 편평한 곳에 위치해 있어 평전말이라 부르며 팽전말, 평잿말이라고도 한다. 옛날에 평전말에서 생산된 곡식은 불티나게 팔렸고 특히 쌀은 주로 제사지내는 제물로 많이 썼는데, 이곳 쌀로 제사를 지내면 명현이 나온다 해서 한양의 쌀장사들이 앞다퉈 선약하였다 한다. 이는 송촌에서 많은 명현이 배출 된데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 학댕이(학당이, 학당리) [마을] : 윗송촌과 진날등 사이에 있다. 학댕이 마을 동쪽에 있는 산에는 옛날에 큰 소나무가 많았는데, 이 나무에 학들이 날아와 앉았기 때문에 학당이라고 불렀으며, 또 옛날 조선초 성종 때 28세로 요절한 송여집이 학당을 짓고 공부를 한 마을이라 하여 학당리라고도 하였다. 또한 이곳 학당산에는 송씨 문중의 아이들 무덤이 있으며 동춘 송준길이 짓고 세운 학당산 묘표가 있다.
● 학댕이골 [골] : 학댕이 마을과 진날등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 홈통골 [마을] : 용전동 일양약품과 대한적십자 혈액원 사이를 말한다. 지형이 홈통 같다고 해서 홈통골이라 불렀고, 또 동춘선생이 고개 너머 들판에 물을 대기 위해 이곳에서 용전동까지 홈통(수도)을 가설한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은 마을이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