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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쉽게, 참으로 너무 쉽게 선생을 만났다. 버릇처럼, 너무 쉽게 선생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이런저런 관련 자료를 찾다가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놀란다. 누가 우리 모임을 통해 선생을 만났으면 하고 희망하면, "글쎄요, 선생님이 혹시 불편해 하실 수도 있어서 어떨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선생을 위한답시고 발뺌해 놓고는, 정작 나 자신은 그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많은 이가 갈망하는 자리를, "소설가는 소설로써 말한다"는 선생의 지론에 기대어 아무 부담 드리지 않고 적당히 유쾌한 시간으로 가꾸어 보자는 우리의 판단은 과연 옳았을까. 선생을 만나러 나섰다가는 "왠지 가슴이 울렁거리고, 이거 괜히 왔나 보다 싶었었는데, 그러다가 선생님 방문이 잠긴 것을 알고는 그토록 마음이 턱 놓이곤" 했다(송하춘), "선생과의 작은 우연도 두고두고 귀중한 기억이 되고, 기억은 세월이 흐르면 개인을 벗어나고 더 큰 유산이 될 것이다"(서정인)는 식의 고백문이 한두 건 나와 있는 것이 아닌 터에, 학생 신분을 벗고도 15년 이상 동안 해마다 적어도 수 차례씩 선생을 가까이서 대한 처지인 나는 그동안 선생에 대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나. 틈이 나면 꼼꼼이 모두 읽어보리라 하고 사둔 선생의 전집을, 그가 떠난 뒤 못 읽은 작품부터 읽기 시작한 것도 작심삼일, 예의 매문(賣文)에 정신이 팔려 버린 내가, 또 어쩔 수 없이 너무 쉽게 선생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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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양에서 가까운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안(齊安). 조선시대 영조 때 일명 '황고집'으로 알려진 효자가 있었으니, 집암(執庵)이라는 호를 쓰는 황순승(黃順承)이라는 사람이 그 사람으로 바로 황순원의 8대 방조가 된다. 가문을 따지는 일이 가부장제 전통을 반성 없이 답습하는 일이긴 하나 어쨌든, 그 '황고집' 집안의 기질은 그의 조부 황연기(黃練基), 부친 황찬영(黃贊永)으로 이어지는 동안에도 끊이질 않고 있었던바, 특히 부친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하기도 한다. 그때 황순원의 나이 만 4세. 아버지가 1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는 동안 어머니 장찬붕(張贊朋)과 단둘이 시골집에서 고독하게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황순원이 맏이이고, 밑으로 아우가 둘이다.
1921년 만 6세 때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만 8세 때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 소학교 시절 이미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는 체증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다. 술 얘기라면 여기서 미리 더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열두어 살 때부터 마신 소주를, 그는 일흔이 넘도록 마셨고, 그 뒤로 몸이 쇠하여서도 타계할 때까지 매일 '마주앙'을 마셨다. 필자는 20세기 후반 그와의 술자리에 자주 끼인 축에 속하는 제자 중 한 사람이다. 그런 자리에서 내가 대취하여 실언을 한 적도 있고, 횡설수설이나 방가(放歌)한 적은 있었어도, 소주 한 홉 정도는 기본인 그가 과음해서 흐트러졌다는 느낌을 받았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주신(酒神)은 밤에 발동한다"는 속언을 지어 말하면서 낮술을 삼간 그는, 그러나 낮술을 마시고 아슬아슬한 파격을 행하는 어린 제자 정도는 적당히 다독거릴 줄 알았다.
1929년에는 정주에 있는 오산중학교에 입학한다. 그곳 교장 출신인 남강 이승훈을 먼 발치에서 보면서 "남자란 저렇게 늙을수록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로구나"(단편 [아버지]) 하고 느꼈다는 황순원의 고백을 뒷날의 제자들은 기억해 냈고, 황순원이 늙어가는 모습에서 그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오산중학교에서는 한 학기를 마치고, 다시 평양으로 와서 숭실중학교로 전입학한다.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 이듬해 무렵부터. 첫 발표는 1931년 7월 {東光}을 통해서인데, [나의 꿈]이라는 시가 그 등단작이다.
이후 중학교 시절 거듭 시를 발표하다가 1934년 졸업과 함께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와세다 제2고등원에 입학한다.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극예술 연구단체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립. 이 단체 명의로 27편의 시가 실린 첫 시집 {放歌} 간행. 이듬해 여름 방학 때 귀향했다는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하려고 동경에서 시집을 발간한 것이 사유가 되어 평양경찰서에서 29일간 구류를 산다.
1935년 1월, 평양 숭의여고 문예반장 출신으로 일본 나고야 금성여자전문 재학중인 동갑의 처녀 양정길과 결혼. 이들 부부 사이에는 이후, 나중에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성장하는 맏아들 동규(東奎)를 비롯, 차남 남규, 딸 선혜, 3남 진규 등이 태어나 자라게 된다. 황순원은 이북에서 살다가 월남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직계 가족간의 이산의 아픔이나 비극을 겪지 않은 다행스런 가족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런 중에도 피할 수 없는 6.25 전쟁기 피난 시절의 가난과 그 이후의 생활고를 몸소 부딪쳐 해결해낸 부인의 내조가 오늘날 황순원의 이름을 그토록 뚜렷하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36년 와세다 제2고등학원을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 5월에 두 번째 시집 {骨董品}을 낸다. 첫 시집 {放歌}가 청소년기의 낭만적 열정이 결기어린 어조로 드러난 시집이라면, {골동품}은 사물의 인상을 촌철살인적인 예지로 빚어낸 짧은 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시집이다. 만일 황순원이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시인으로 더 뻗어나갔다면 두 시집도 여러 의미에서 더 큰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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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황순원은 시인으로의 행로를 크게 진전시키지는 않는다. 대신 그 시적 이력을 소설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그 첫 작품은 1937년 7월 {創作} 제3집에 발표한 [거리의 副詞]. 이 작품은 원고지 30장 정도의 길이인데, 동경에서 이 집 저 집 떠돌아다니며 사는 조선인 유학생의 궁핍한 일상이 극명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듬해 10월에 [돼지系]를 발표하고, 이 두 작품을 비롯해서 창작 연대가 확실치 않은 다른 11편의 단편을 함께 묶어 그로부터 3년 뒤인 1940년에 {황순원 단편집}(나중에 이 책을 {늪}이라는 제목으로 개판한다}을 내게 된다. 이때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지 2년 뒤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의 특징은 '현재형 문장'의 쓰임이 많고, 게다가 감각적 묘사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김현은 이를 두고 "그가 단편까지를 시의 연장으로 본 것이 아닐까"([안과 밖의 변증법])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오후에는 종내 비가 온다. 빗줄기가 누워 내린다. 유리창 너머로 우산이 빗줄처럼 누워 떠다닌다. 비안개가 지붕보다 높다.({거리의 副詞])
검은 바다에서 밀려오는 물결의 흰 혀끝이 모래톱을 핥는다. 꽥꽥 갈매기가 모래톱으로 밀리는 물결을 거슬러 난다. 앉아만 있는 섬은 어둠 속에 아주 멀리 물러나 앉는다.([소라])
와 같은, 시에서 쓰임직한 감각적이면서도 주정적인(主情)으로 이어지는 묘사들을 보노라면, 그런 추측은 자연스러운 감이 있다. 이러한 특징은 사실 그 이후의 황순원 소설 전반에 나타나는 것이기도 해서, 그의 소설을 '시적인 소설'로 평가받게 만드는 요인도 되었고, 무수한 후배 작가들이 따르고 흉내내며 소설 문장을 배우는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그리하여 그의 소설 문체에 대한 탐사가 이어져 우리의 소설 문체론이 한층 심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필자 역시 어린 시절부터 그의 문장을 공책에다 옮겨 적으며 문장 수업을 하던 밤들의 기억을 쌓은 바 있다.
세 번째가 되는 소설집 {기러기}를 낸 것이 1951년인데, 여기 실은 15편 중 [별][그늘] 두 편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 밑에서 창작되어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보관되고 있던 것들이었다. 필자가 작가에게 들은 바로는 그 즈음 이광수에게 보낸 어떤 작품에 대해 이광수가 그 재능을 칭찬하면서 앞으로는 일본어로 작품을 쓰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온 바 있다고 했다. 빼앗긴 모국어로, 언제 발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채로 혼자서 소설을 창작하고 있었던 한 고집스러운 신예작가와, 이미 대가가 되어 민족의 앞날까지도 예견할 만한 위치에 서 있던 香山狂郞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는 한 노회한 작가의 모습을 동시에 떠올려봄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시절 황순원은 자신의 그 고독한 창작물을 평생의 친구 평론가 원응서(元應瑞)에게 들려주곤 한다. 두 사람의 이런 특별한 관계가 저 유명한 단편 [소나기](1953년작) 무렵까지로 이어져, [소나기]의 마지막 대목을 원응서의 충고를 받아들여 고쳐 발표한 것이 지금 알려진 작품이 되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게 된다. 원응서가 작고(1973년)한 후에 오랜 동안 황순원이 술자리마다 그를 위해 꼭 소주 한 잔을 따뤄 두고 있고, 그 얘기를 [마지막 잔]이라는 소설로도 썼다는 얘기를, 필자는 대학 시절부터 무슨 신화처럼 전해 듣곤 했다.
일제의 간섭을 피해 1943년부터 고향 빙장리에 머물러 있던 황순원은 해방되고 9월에 평양으로 돌아가지만, 곧 공산 치하에서 지주 계급으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이듬해 가족들과 월남한다. 그해 9월에 서울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취임한다. 그때까지 가끔 시도 쓰고, 주로는 단편소설도 써왔는데, 처음으로 장편 구조를 가진 {별과 같이 살다}를 부분적으로 발표하게 된다. '곰녀'라는 한 여성의 육체적 신분적 수난을 중심으로 일제 말기에서 해방전후의 열악한 시대상황을 부각시키고 있는 이 작품이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된 것은 1952년의 일이다. 이 작품에는 대구 지방 사투리가 자주 쓰이고 있는데, 문학과지성사 판 전집 중 한 권으로 다시 출간될 때인 1981년 무렵에 그 지방 출신인 필자가 정확한 사투리 말의 확인을 위해 작가의 집에서 함께 교정을 본 적도 있다. 낱말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는 황순원의 소문난 버릇을 필자는 몸으로 부딪쳐 확인한 셈이다.
1948년에 단편집 {목넘이마을의 개}를 낸다. 단편 [목넘이마을의 개]의 배경인 '목넘이마을'은 작가의 외가 마을(대동군 재경면 천서리)이라 한다. 이 작품집에는 모두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개인적 체험이나 토속적인 배경 상황, 전래적인 설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생략과 압축이 강한 시적인 산문형으로 인상깊은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이다.
6.25 전쟁 때 황순원은 제자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 광주로 피난했고, 1.4 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난 간다. 필자는 그의 부부를 함께 모시는 말년의 정기적인 주석에서, 결핵 환자를 가장한 남편을 리어카에 싣고 첫 번째 떠난 피난길에서 검문검색의 위기를 모면해 나간 부인의 얘기를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들은 바 있다. 부산에서의 피난 생활 또한 부인이 살림을 이끄는 가운데, 황순원은 임시 학교의 교사로 일하면서 김동리, 손소희, 김말봉 등 문인들과 교유하는 한편으로 창작에 몰두해서 앞에 말한 단편집 {기러기}(1951.8)를 낸 외에 11편의 단편을 담은 단편집 {곡예사}를 1952년 6월에 낸다. 뒤를 이어 1953년 5월에 저 유명한 단편 [학]과 [소나기]를 발표하고 있으니, 요즘 시절에 견주어도 결코 적지 않은 창작량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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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의 이름을 단편 작가로 머물지 않게 한 평판작 {카인의 후예}는 1953년 9월부터 {문예}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5회를 연재하고, 잡지는 폐간되지만 작가는 그 뒷부분을 따로 써두었다가 이듬해 겨울에 단행본으로 출간한다. 평양에서 지주로 살던 작가 집안이 북한 공산주의 체제가 성립되면서 뿌리뽑힘을 겪어야 했던 실화가 바탕이 되었다고 알려진 이 소설은, 그 시기의 북한의 실상을 다루면서도 오작녀, 도섭 영감 등 토착적 삶을 배경으로 하여 급박하게 변화를 겪으며 살아 움직이는 인간상을 창조하여 존재의 의미와 사랑의 가능성을 묻고 있는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5년에는 6.25 전쟁기의 궁핍과 그로 말미암은 인간성 해체를 다룬 [인간접목](원제:천사)을 일년간 연재한다. 이것이 책으로 나온 것은 1957년의 일. 그 사이 1956년 말에 단편집 {학}을 발간하는데, 거기에 실린 14편 단편소설들이 대개는 전쟁을 겪으면서 생명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 작가의 의식이 투영된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1957년 만 42세인 황순원은 4월에 경희대학교 국문과 조교수로 직장을 옮긴다. 그의 경희대학교로의 전직을 전후하여 김광섭, 주요섭, 김진수, 조병화 등 문인 교수가 같은 길을 걷게 되면서, 문학적인 분위기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확보한 상태에서 더욱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울 수 있게 된다. 그 해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된다. 스스로의 다산의 창작과 그 성취를 기반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얹어지는 가운데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시기가 이때로부터 열렸다. 경희대학교에서는 특별한 보직 없는 평교사로 23년 6개월을 봉직하고 또 말년까지 계속 명예교수로 남아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주어왔다. 많은 제자들이 그의 이름 뒤로 줄을 서기를 자랑스러워하고 황감스러워하는 원인이 그 가르침 속에 있다.
1958년에 여섯 번째 단편집 {잃어버린 사람들}을 발간하고, 1960년에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사상계}에 연재한 직후 출간한다. 이 장편은 6.25라는 동족 상잔의 비극 속에서 살아가는 매우 다양한 인간상을 제시하여 인간의 생존 이유를 캐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평론가 백철과의, 황순원으로서는 보기 드문 논쟁을 낳기도 한다. 1962년에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 장편 {日月}은 3년 만에, 그 무렵 창우사에서 내기 시작한 {황순원 전집}의 제 6권으로 발간된다. 백정 집 신분이라 상당한 불이익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통해 인간 소외와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을 위해 작가가 취재와 자료 수집을 하던 때의 일은 필자의 대학 시절까지도 여러 소문을 만들며 전해 내려왔다. 그 취재 여행에 동행했다는 제자도 있었고, 소설 속 등장인물 한 사람이 자기라고 주장하는 제자도 있었다. 쉽게 다룰 수 없는 소재, 철학적 깊이에 가닿은 주제의식, 그것을 구조화하는 뛰어난 조탁 능력을 빛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1964년에 40대 중반에 이른 작가의 노련한 필치가 돋보이는 단편집 {너와 나만의 시간}이 간행된다. [모든 영광은] 등 작가 자신의 실제 체험과 일상이 담긴 작품을 통해 그의 개인사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길을 걸어볼 수 있는 작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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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부터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 장편 {움직이는 성}이 발간된 것은 1973년이다. 분량으로 치면 황순원의 작품 중에는 {일월}보다 조금 더 많은, 가장 긴 장편이다. 우리 민족의 근원적인 '유랑민 근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천착하는 가운데 인간의 진정한 지향을 탐색하는 소설로 황순원 문학의 정점을 보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6년에 단편집 {탈}을 발간한다. 이 무렵에는 이미 황순원이라는 이름이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로 평가받아온 세월이 얹어져 있었다. 각종 교과서에서 [소나기][별][학][목넘이마을의 개] 등의 작품이 게재되고 있어서 그 작품을 교과서에서 접한 학생들이 그의 이름만 보고 대학을 지원하는 사례가 늘 정도가 되고, 외국어 번역으로 세계에 그 작품이 알려지고 있었으며, 국내의 무수한 지면에서 그를 심사위원, 기획위원으로 모시고 있을 때였다. 단편 [탈]은 10장밖에 안 되는 분량의 소설로 이후의 소설 강의 때 참으로 논의하기 적절한 소설 텍스트가 되기도 한다. 이 무렵, 신춘문예 심사 과정에서 동참한 심사위원이 당선권으로 미는 작품이 제자의 것인데도 차석으로 내린 일화가 두고두고 화제가 되기도 한다.
1978년부터는 장편 {신들의 주사위}를 {문학과지성}에 연재하기 시작하는데, 5공 직전 신군부의 등장 때 자행된 언론통폐합 조치로 잡지가 등록 취소되는 바람에 연재가 중단되자, 이를 {문학사상}에 이어 연재하여 마침내 완성, 1982년에 전집 제10권으로 간행하기에 이른다. 새로운 문물의 도입으로 급격한 가치 혼란을 겪고 있는 사회 세태를 한 가족사를 중심으로 풀어헤치고 있는 소설로, 일흔 가까운 나이까지 혼신의 힘으로 밀어올린 노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황순원의 문학을 시적 문체와 서정적 이야기 세계로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그의 장편까지를 두루 고려하여 그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이 점 오늘날 황순원의 소설을 전범으로 하여 창작 훈련을 해온 많은 작가들도 반성할 문제인데, 황순원의 장편은 대하소설의 분량이 아닌데도 주요 등장인물이 많고 그 관계가 의외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무수한 작은 이야기들을 이끌게 되고 나아가 그 인물, 그 이야기들이 전체적 구성으로 무르녹는 소설 세계를 보이고 있음을 눈여겨 성찰해야 한다. 그의 소설은 시가 녹아 있는가 하면, 소설이 요구하는 풍성한 이야기 세계와 인간의 근원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을 세련된 작법으로 너끈히 소화해내고 있는 아주 다면적인 소설이다. 즉, 그의 소설은 시적 서정과 감각을 기반으로, 절제와 생략이 두드러진 단편 미학을 일구어내고, 나아가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담긴 이야기 세계를 현대적이고 현재적인 문체와 방법론으로 이끈 장편소설의 세계까지 확장해 갔다고 볼 수 있다.
1985년에 고희 기념집으로 낸 {말과 삶과 자유}는 수필류를 쓰지 않은 황순원 문학에서는 보기 드문 산문집으로, 그의 인생관, 문학관, 미래관 등을 엿볼 수 있는 짧은 산문들로 채워져 있다. 고정관념을 뒤흔들고, 헛점을 찌르는 명쾌한 논변이 빛나는 이 산문들은 몇 차례 되읽어도 쉽게 읽히면서 곰곰 생각게 하는 면이 있어, 필자는 심심찮게 이 책을 펼쳐 들고 어떤 글은 뽑아서 강의실로 가 자칫 지겨워하기 쉬운 수강생들을 위한 소설론 교재로 써먹기까지 하고 있다.
생존시 전집 발간의 모범적인 사례도 황순원에게 찾을 수 있다. 이 전집 작업은 원래 1973년부터 삼중당문고로 유명한 삼중당에서 시작했는데, 1980년부터는 문학과지성사 판 전집이 발간되기 시작하여 1985년까지 소설 10권, 시 1권에 연구가들에 의한 {황순원 연구}까지 해서 모두 12권으로 확정된다.
이 뒤로 더는 소설 작품을 세상에 더 내놓지 않는다. 다만 간간이 시를 발표한 일은 있다. 1992년에 발표한 [산책길에서] 연작과 [죽음에 대하여] 등의 시편들인데, 평일에는 부인과 산책을 하고 일요일에는 교회를 다니며, 몇 달에 한번 제자들과 저녁을 드는 일 외에 바깥 나들이를 삼가는 나날의 일 부분이 이 시편들에 나타난다. 이로써 그의 공식 작품은 시 104편, 단편 104편, 중편 1편, 장편 7편 그리고 산문집의 글로 집약된 채 마감되었다.
1995년 봄에는 {작가세계}의 특집 작가로 집중적인 연구 대상이 되었는데, 특히 연로하신 이후로는 극히 이례적으로 대담까지 허락한 경우였다. 선생의 육성을 문자화한 보기 힘든 대담기(대담자 송하춘)와, 그때까지의 종합적인 문학적 연대기(김종회)가 여기에 게재되는바, 사실 이 글은 만일 그때의 선행 작업이 없었던들 씌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타계한 후, 유작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터이고 어쩌면 그런 귀중한 자료가 실제로 공개될 수도 있겠지만, 살아 생전에 전집을 냈고, 평소에 책으로 내기 전의 교정본까지 모두 버리게 하는 꼼꼼함을 알면 그런 글이 나오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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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나 같은 제자들이 선생을 모신 자리에서 좀더 지혜롭게 떼를 써서 선생의 육성을 문자화해 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제자들과의 일년 네 차례씩의 '보신탕' 모임에는 선생과 함께 사모님이 동행하시게 되고, 그러는 사이 쉽게 피로해지는 선생에 비해 사모님에게 두 분의 인생사를 듣곤 하면서, 우리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들어보자' 하는 심정으로 선생의 작품 뒷면을 듣고자 애쓰기는 했다. 선생이 좋아하는 스포츠 얘기를 꺼내 선생과 몇 마디 말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간도 더 가져보려고 애를 썼다. 가끔씩 총기를 빛내며 단호하게 '그건 아니다' 하시거나, 좌중에 오가는 농담을 알아채시고 예전의 감각으로 한두 마디 거드시며 슬몃 미소 띠는 모습을 보며 안도감을 느끼는 것으로도 우리의 소임을 다하는 것인 줄 알았다.
이 무렵, 우리는 예에 어긋나는 짓임을 알면서도 후배들에게 보여주도록 선생님과 제자들이 함께한 책을 만들자는 제의를 했는데 선생이 흔쾌히 동의하셔서 선생의 초기 시 구절을 딴 소설모음집 {옛사랑으로 돌아오라}으로 제자 작가, 평론가가 선생의 작품과 한 자리에 묶이는 남다른 인연을 쌓기도 했다. 더욱 예에 어긋나지만, 이 무렵에는 사모님이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서로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는 순서도 넣었고, 일년에 한 차례는 야외로 나가 점심을 먹기도 하였는데, 선생은 예의 [철도가]의 한 부분인 [평양정거장]을 가사 하나 틀리지 않고 사투리를 어감을 살려 부르시며 어깨춤을 추셨고, 어김없이 다음 노래할 사람을 지명하셨으며, 우리 중 한 제자는 부지런히 사진기 셔터를 눌러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또, 모일 때마다 선생의 친필 싸인을 중심으로 제자들 모두 돌아가며 이름을 적은 서명판을 남겨 한 사람씩 가져가기로 해서 선생이 직접 한글로 쓰시는 이름을 간직할 수 있게 했는데, 그 서명판이 채 열 개를 채우지 못해 오히려 십수년 동안 선생과의 모임에 결석 한 번 없는 제자들이 가지지 못하는 아쉬움도 남게 되었다.
그 제자들이 또 한 차례의 모임을 준비하고 있을 즈음인 2000년 9월 추석 연휴가 끝난 이튿날, 14일 아침 8시 경. 전날 감기 기운이 지니고 잠자리에 드셨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식사하시라고 깨우니 이미 영면한 상태였다는 사모님의 말씀이 전해지기 시작한다. 신문과 방송에서 유례없이 20세기를 치열하고 고집스럽게 살고 간 한 작가 얘기로 그날 뉴스의 중요 지면을 열었으며 제자들은 갑자기 선생을 기리는 '잡문'을 쓰고 인터뷰에 응해야 했다. 미국에서 귀국하는 자녀들을 기다리느라 5일장이 된 그 빈소에는, 수년 전에 선생이 거부해서 또 한 차례 화제가 된 바 있던 훈장의 급수를 한 단계 더 높여 가지고 온 정부 고관을 비롯해서 원로, 중견 문인, 제자, 후학, 제자의 제자, 공직자, 언론인 등에다 작품만으로 선생을 존경해온 노인, 학생들까지 줄을 이었다. 장례 절차를 상의하면서 '이 경우 아버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끊임없이 생각했다는 장남인 황동규 시인. 9월 18일, '사회장'이니 '문인장'이니 하는 그 어떤 명칭도 없는 장례식이 다니던 교회의 의식과 일부 문단의 절차를 섞어 행해지고, 마침내 선생은 천안시 병천면 풍산공원묘원 무궁화 묘역에 안장된다. 필자가 휴강할 수 없는 아침 강의를 끝내고 학생들 차를 얻어 타고 달려가니 이미 의식은 끝나고, 선생은 둥그스름한 봉분으로 남아 계셨다. 이제야 이것이 보통 인연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나는 묵념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제자 일행들과 어울려 상경해서 좌표를 잃은 전함처럼 웅성거리며 술을 마시다가, 밤늦게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 '매문'할 거리를 더듬던 나는 갑자기 속에서 울컥 치미는 기운을 다스리려 애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