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 광풍각
제14영: 담장 아래로 흐르는 물
한 걸음 한 걸음 물을 보며 걷자니 한걸음에 시 한 수 생각이 깊어지고..
물의 참 근원이 어디인지 모르고 담장 통해 아래로 흐르는 물만 바라보네
제15영: 살구나무 아래 물은 굽이치고
조금만 흘러가면 지척엔 연못인데 분명히 오곡으로 흐르네..
그 옛날 본 천상의 뜻을 오늘날 살구나무 주위에서 찾아보세.
재16영: 가산의 풀과 나무
산을 위한 경비와 인력이 필요 없으니 만들어진 산의 모습은 거짓이로다..
형세에 따라 숲을 이루니 역시 산야 그대로 이네.
제17영: 하늘이 만든 소나무와 돌
조각난 돌이 굴러와 언덕을 이루니 결국 뿌리를 내려 작은 소나무가 되었네..
온갖 꽃이 널려 비록 작지만 파란 하늘을 이루었네.
제18영: 돌에 두루 낀 푸른 이끼
돌은 오래되어 안개구름이 촉촉하니 푸른 이끼가 꽃이 되었네..
자연히 언덕과 골짜기가 바탕을 이루니 번화를 향한 뜻이 없구나.
제19영: 좁고 기다란 바위에 조용히 않아
벼랑에 오래 앉아 있으니 계곡의 바람에 깨끗하게 씻기운다..
무릎이 상하는 것은 두렵지 않으니 세상 구경하는 늙은이에겐 더없이 좋구나.
제20영: 맑은 물가에서 거문고를 안고
거문고 튕기기가 쉽지는 않아 세상천지에 알아듣는 이 없네.
한 곡조가 깊고 맑은 물에 메아리치니 마음도 즐겁고 듣기도 좋네.
인연!
그리 멀지 않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난 해 봄, 담양답사 길, 우리 일행은 일정에 없는 오월의 바람으로 대잎을 스치듯이 지나갔지요
그때 그 분들은 푸르른 竹으로 서 있었지요.
열심히 최선을 다 하시는분들이구나!
언제 다시 이곳에 온다해도 이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거라는
욕심은 내지를 못하였지요?
그 아쉬운 인연 때문인지, 2004년도 충주시에서 주관한 충주시문화유산
해설사,충주전통문화회 임원진이 선진연찬 견학지로 담양을 다시 밟았
습니다.
2004년 12월 23일, 바람의 인연으로 만난 그분들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큰 감동
을 주었습니다.
.
곳곳에 묻어나는 人情과 精誠 ,그리고 살아있는 그 고장의 이야기는
우리들을 이곳에서 오래 머물러 살았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긍지를 갖고 사시는 분들 그들은 진정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
다.
전라도나 충청도나 사람사는 것은 매 한 가지이지요.
이번 담양 방문은 우리에게 대동적인 삶을 다시 깨닫게 해준 그런 인연
의 소중함이였습니다..
이것을 거울 삼아 충주를 찾아 주시는 모든분께 모두 다 되돌려드리
겠습니다.
그것은 가사문학관, 식영정,소 쇄원, 명옥헌, 환벽당, 당간지주, 오층석탑,
메타세콰이어길, 관방제림, 죽녹원이 다하지 못한 것을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사람들께 그 마음을 배우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은 관방제림 국수집에 깊은 멸치육수 맛이요,약도 되고 요기도 되
는 따근따근한 약계란이었습니다.
약계란 같은 숲과사람님 ,이춘홍님,이정옥님,하얀민들레님,고구
마깡님이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게으름 피우다 때 늦은 사진과 글 올립니다.다 같이 못 가신 회원님에
서운함이 조금이라도 풀리시기를 비는 마음도 담았습니다.
다시 한번 양해를구합니다.
이춘홍 선생님, 추운날씨에 아침 9시에 나와 우리들을 위해 제월당 군불을 때 주시고,
명강의로 소쇄원 진수를 보여주셨습니다.정말 감사드립니다.
장관님들도 제월당 따뜻한 구들장 쉽게 구경못한답니다.
그것은 문화재이고 후손들 재산이라서 그분들 허락없이는 안된다고합니다.
숲과사람님과 이규현님
광풍각과 제월당을 가로 지르는 오솔길,
하나의 경계이지만 자연스럽고 소박한 길이라고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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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당
숲과 사람님, 고구마깡님, 하얀 민들레님이 정성스럽게 차와 떡, 다식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다도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바쁜일정에 예와 도를 배우지 못하고 왔습니다.
하얀민들레님이 밤새워 직접만드신 떡과 다식,
숲과 사람님이 준비해오신 다기와 손수만든 따뜻하고 향기 그윽한 녹차와 국화차 .
감사합니다!
우직하시고 풍류와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산내음님!
제월당 앞마당에 서 있으니 딱 어울립니다.
식영정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연분(緣分)이며 하날 모랄 일이런가. 나 하나 졈어 잇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졸 대 노여업다…".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정자.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환벽당,
송강정과 함께 정송강유적이라고 불린다. 식영정은 원래 16세기 중반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임억령이 지었는데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식영정 바로 옆에는 김성원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고 이름
붙인 또 다른 정자를 지었는데, 없어졌다가 최근 복원되었다.
《서하당유고》 행장에 따르면, 김성원이 36세 되던 해인
1560년(명종 15)에 식영정과 서하당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으로 정철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정철이 이곳 성산에 와 있을 때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문이다.
식영정 건너편에 있는 환벽당은 어린 시절 정철의 운명을 바꾸어놓게
한 사촌 김윤제가 기거했던 곳이다.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高敬命), 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식영정이십영은 후에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 외에 정철은 식영정잡영 10수, 하당야좌(霞堂夜坐) 1수,
차환벽당운 1수, 소쇄원제초정 1수, 서하당잡영 4수 등 수많은
한시와 단가 등을 남겼다. 그는 이곳을 무대로 하여 송순, 김인후,
기대승 등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고경명, 백광훈, 송익필 등과
교우하였다.
정자의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2칸이고 단층 팔작지붕이며,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한다. 가운데 방을 배치하는 일반 정자들과 달리
한쪽 귀퉁이에 방을 두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깐 것이 특이하다.
자연석 기단 위에 두리기둥[圓柱]을 세운 굴도리 5량의
헛집구조이다.
식영정 옆에는 1973년에 《송강집(松江集)》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장서각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에는 부속건물로 부용당(芙蓉堂)을
건립하고, 입구에 《성산별곡》 시비를 세웠다. 주변에는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紫薇灘), 노자암, 견로암,
방초주(芳草州), 조대(釣臺), 서석대(瑞石臺) 등 경치가 뛰어난 곳이
여러 곳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광주호의 준공으로 거의 물 속에
잠겨버렸다.
광주호가 내려다 보입니다.
식영정에서 바라본 무등산
조선 중기의 문신 김윤제가 후학을 가르치던 정자.
1972년 1월 29일 광주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광주광역시
북구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로,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낸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낙향하여
창건하고 육영(育英)에 힘쓰던 곳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목조와가(木造瓦家)이며, 당호는 신잠(申潛)이 지었다.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고, 임억령(林億齡)·조자이(趙子以)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김윤제는 광주광역시 충효리 태생으로, 호는 사촌(沙村)이다.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그후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
그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鄭徹)과 김성원(金成遠)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과 김덕보 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에 관계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는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사연이 전하는 곳이다.
조부의 묘가 있는 고향 담양에 내려와 살고 있던 당시 14살의 정철이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기 위하여 길을 가던 도중에 환벽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때마침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창계천의 용소에서 용 한마리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꿈을
깬 후 용소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소년을 데려다가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 사이에 그의
영특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순천에 가는 것을 만류하고 슬하에 두어
학문을 닦게 하였다.
정철은 이 곳에서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등 명현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다. 후에 김윤제는 그를 외손녀와
혼인을 하게 하고 그가 27세로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환벽당 인근에 취가정, 독수정, 소쇄원이 있다. 환벽당은 정철의
4대손 정수환(鄭守環)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현재 연일
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환벽당을 뒤로하고 명옥헌으로....
명옥헌 돌풍의 흔적들
명옥헌을 꾸민 사람은 오명중(1619~1655)이다.
그의 아버지 오희도(1584~1624)는 외가가 있는 이곳에 와 살면서 ,
광해군 시절의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집옆에 망재(忘齋)라는 서재로 시작된다.
그후 30년이 지난 1652년 넷째 아들 오명중이 아버지가 살던 터에 명옥헌을 짓고
아래 위 두 곳에 연못을 파고 배롱나무를 심어 오늘에 이른다.
예전에는 계류에서 내려 오는 물소리가 옥에 부딪치는 소리 같다고 하여 명옥헌이라 이름하였 다.
명옥헌 초입 왕버드나무
이 오층석탑은 고려시대 탑으로 높이 7미터이며 보물제506호 이다.
고려 시대에 이 부근에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그 절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나 다른유물.유래, 전설은 전해지지 않는다.
당간지주
보물 제505호로 지정된 이 당간은 기단과 지주, 당간이 온전할 뿐아니라
보윤 등의 장식이 잘 남아 있어서 조선시대 당간의 원형을 보여준다.
담양읍이 행주형(行舟型)이라서 배의 돛을 상징하는 당간을 세웠다.
길 건너 오층석탑과 그 절이 있었을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2002년 아름다운 전국숲대회 대상을 탔던 담양 메타세콰이어길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죽녹원에서
2004 아름다운 전국 숲 대회 대상을 탄 관방제림
죽녹원에서 바라본 석양
석양이 죽녹원에 지고 있다.
이제 답사에 마무리 시간이다.
해가 지는 것과 해가 뜨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인연의 윤회에 감사함을 느낀다 .
오늘이 짐으로 내일이 뜬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