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병대 | |
글쓴이 : 장국청 |
조회 : 17 스크랩 : 0 날짜 : 2005.02.28 23:39 |
그때 매일같이 고참들이 돌아가면서 치는 기수 빳따는 인간 고통의 한계점을 넘나들게 했고 졸병들 봉급을 강제로 뜯어내서 고참들에게 아부 성 술대접을 하는 경우가 있는 등 말하자면 군대가 개판이었다. 어찌 보면 그런 분위기가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해병정신의 원동력인지도 몰랐으나 제아무리 세계최강이라고 해도 인격적으로 타락한 부대분위기나 공개적으로 폭력을 사주하는 선배해병들의 분위기가 싫었다. 결국 이렇게 되려고 10:1 이나되는 경쟁을 뚫고 사정사정 해가며 해병대에 죽으러 왔나 하는 반항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던 나는 비가 오는 어느 날 중대한 결심을 한다. 질척거리며 하염없는 여름비가 내리는 어느 일요일 오후 퀀세트 안에서는 엄청난 고참들이 둘러않아 술 파티를 하고 있었다. 돈은 신참들이 내고 저희들끼리만 처먹으면서 돈 낸 놈들은 한잔도 못 얻어먹는 이상한 회식에서, 때로는 멀쩡한 놈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던 나는 성깔대로 현실을 뒤집어 버렸다. 행동개시를 결심한 나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그 안주를 끓이는 곤로를 군화발로 걷어 차 엎어버리는 해병대에서 보기 드문 하극상을 저질러 버린다. 그 비오는 일요일 오후의 파티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돼버렸다. 고참 여러 명이 얼떨결에 찌개국물로 화상을 당했으니 사태는 예상보다 더 심각했다. 그러나 그때 교도소를 가기로 그래서 아주 불명예제대를 각오했던 그 도전의 결론은 고참들로부터 복날 개 두들겨 맞듯 죽지 않을 만큼 만 두들겨 맞는 것으로 끝이 났다. 해병대 창설이래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무지막지한 집단폭행을 당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찌개로 덴 고참들 옆에 나란히 드러누워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강한 것에 대한 특유의 도전정신과 오기로 이때부터 고참들과의 역학 관계를 서서히 상하에서 수평 쪽으로 비 틀어버린다. 소대장도 선임하사도 그 폭행사건에 대해 모른척하는 위선적인 군대생활에 환멸을 느끼던 나는 몇 일간 환자로 누워서 구상한 끝에 자력으로 그 일을 해결해 버린다. "선배 좋아하네 이 좆같은 새끼들 술 안 사준다고 졸병 괴롭히고 술 사주면 취해서 주정하고 폭행하고 씨발 난 어쩌란 말이냐?" 라는 화두를 머리에 둔 채로 선배들을 일대 일로 찾아 나섰다. 현실적으로는 중대본부의 태권도 교관을 하고 있는 터라 격투기에는 일가견이 있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개별적으로는 잘해주는 고참들도 있었지만 단체라는 것과 그 보다 더 한 해병대라는 공조직 내에서는 공과 사를 구별 할 줄도 알아야했다. 내친김에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일대 일로 위협에 가까운 설득으로 향후에는 후배들에게 폭행을 않겠다는 다짐을 일일이 받아내고야 만다.
그리고는 결국 나 때문에 선후배 서열이 애매하게 헝클어져버린 그 부대를 떠나는 것이다.
어쨌든 당시의 하극상 사건으로 나는 인생역정과 역마살의 좁은 통로를 따라 조화로움의 길을 찾아서 또 길을 떠난 것이었다. 그 일의 이면에는 당시 같은 사단의 헌병대에 근무하던 부랄 친구 배동천 해병의 보이지 않는 역할이 있었다. 당시 군법에 회부되면 하사관은 사단교도소를 경유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어서 이등병으로 강등 불명예 제대를 하게되어 있었다. 문제는 안양으로 넘어 가기 전에 그 악명 높던 해병 제1상륙사단 교도소를 통과하는 것이 더 힘들다는 거였다. 당시 졸병이면서도 교도소에서는 나름대로 위세를 갖고 있던 그 친구의 존재는 사단장 보다 더 훌륭한 빽이었다. 그때 헌병대에서 만나던 그 친구특유의 이마를 일그러트리는 표정은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걱정 마라 안양교도소까지는 털끝 하나도 상하지 않고 보내줄 테니. 안양교도소 까지만 가면 거기는 해병대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어 그러니 느네부대 그 선배 새끼들 좆 같이 굴면 다 죽여버려!" 하고 흥분해주던 그 친구는 초등학교부터 50이 훌쩍 넘은 후일까지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대단한 파괴력을 가졌던 이 친구도 일찌감치 서울 등지로 진출해서 강원도 출신으로는 드물게 전국의 조직폭력 들과 어깨를 같이 하는 전국구 건달이 되었고 실제로 조직폭력과 관련되어 그 악명 높은 서울지검강력부에 체포되어 큰집에 갔다오는 일도 있었다.
물론 나는 그친구보다는 좀처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지역을 장악한 지역사령관 역할 정도는 해 왔었다. (나의 해병대 끝) < 계속 > 2003년 8월
PS: 아들 윤석! 그러나 부끄럽더라도 과거를 되새김 해보자 함은 오늘 우리가 선 이 자리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자기와의 약속을 다짐함에 있는 것이리라. 입대 전부터 전방에 지원하라고 억지 같은 당부를 해온 것도 남아로 태어나 치사하게 살지 말자는 아빠의 소망이었느니라. 어쨌거나 너는 이제 독립을 했고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니 네 뜻대로 살아가렴. 휴가 시 당부한 대로 행정병은 지원하지 말고 안테나 말뚝이나 박다가 제대를 하렴. - 일출사진 - 이 때쯤을 미명이라 한다. 미명이 중요한 것은 하루의 출발이기도 하지만 해가 뜬다는 것은, 지난 어두움으로부터의 해방과 앞으로의 기대가능성에 비중을 두고싶어하는 인간들의 작은 소망이 담겨 있음이라. 졸 이윤석 희망을 잃지 마시게 ! 국방부 시계 역시 거꾸로 매달아도 잘만 간다네. ☞ 원래 다음 편은 나의 월남전 편인데 너무 방대해서 힘든 부분이지. 그래서 월남전은 별도의 편집을 하고 있단다. 그 다음 편은 아빠의 건달시절편이란다. |
무야 | 은장아 니 정말 더 훌륭하게 보이네 정말 이런 용기로 남은 여생 후배들에게 좋은 현실담을 남겨주렴. 나도 자주 이용하마 | 2005/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