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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게시판 스크랩 대우그룹과 김우중회장
달맞이꽃 추천 0 조회 93 05.08.06 09:4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30년 만에 무너진 재계의 ‘킴기즈칸’


창업 11년 만에 수출기업 1위로 우뚝… 아시아 금융위기로 환율·금리 압박 못이겨 침몰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5년 8개월간의 해외 도피생활을 청산하고 지난 6월14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 현장에서 검찰에 체포됐다.

김우중(金宇中·69) 전 대우그룹 회장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도피 5년8개월 만에 귀국한 김 회장에 대한 수사가 막 시작된데다, 그의 장점과 단점이 모두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져 돌아다니는 요즘 분위기에는 더더욱 그렇다.

김 회장은 ‘불굴의 도전정신과 천부적인 상술(商術)로 창업 30여년 만에 자본금 500만원짜리 기업을 세계 500위권에 진입시킨 신화적 인물’이라는 칭송과 함께 ‘1970년대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올라타 초원의 불길같이 일어났다가 1990년대 말 IMF의 겨울에 추락해버린 경영자’라는 냉정한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김우중 약력

1936년 12월 19일 대구 출생
1956년 경기고 졸업
1960년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1961~1967년 한성실업
1967년 대우실업 상무이사(창업)
1978년 대우조선 사장
1981년 대우그룹 회장
1998~1999년 전경련 회장
경기고 총동창회장, 연세대 동문회장, 대한축구협회장 등 역임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김우중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수출전문형 기업을 만들어 세계경영을 주창하며 해외로 달려나갔다. 그는 몰락 직전까지 수출 시장의 가능성을 믿었다.

1996년만 보자. 그는 20회의 해외출장을 통해 35개국을 다니며 257일을 해외에서 보냈다. 매일 3시간씩 비행기를 탄 셈이다. 그와 함께 해외여행을 했던 최인호 작가는 “유격훈련을 받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수행비서도 김 회장의 체력을 따라가지 못해 평균 3년 단위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는 IMF 외환위기 전후에 계열사 매각 등을 통한 구조조정보다는 세계경영을 기치로 외부차입을 지속, 결국 엄청난 부채를 안고 무너졌다.

31세의 나이에 500만원으로 창업

김 회장은 1936년 대구에서 교육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 집안을 보살피기 위해 신문배달과 냉차 장사를 했다. 그는 이후 경기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김 회장은 대학 졸업 직후인 1961년 한성실업에 입사, 무역 업무를 배웠다. 당시 한성실업은 원사를 비롯해 파나마모자, 타이어 등을 수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 회장이 싱가포르에서 오더를 받아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수출도 시작하게 되었다. 김용순 한성실업 회장은 오래 전 언론 인터뷰에서 “김우중은 아무리 어려운 업무라도 어떻게 해서든 완벽하게 마무리짓는다. 하도 통이 크고 의협심이 강해 내가 우리 집사람에게 ‘우중이가 크게 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감옥소 들어갈 놈이야’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야심찬 김 회장은 월급쟁이 생활을 청산하고 1967년 3월 31세의 나이에 500만원의 자본금과 5명의 직원으로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뚝섬에 있는 대도섬유의 도재환씨가 동업자로 자본금을 댔다. 경기고 동창으로 금성방직을 다니던 이우복을 비롯, 조동제, 김상봉 등이 창업 멤버로 합류했다. 대우라는 이름은 대도섬유의 대(大)자와 김우중의 우(宇)자를 합친 것.

대우실업은 초반부터 내수보다 수출을 지향했다. 창업 한 달 뒤 태국 시아후아트사(社)로부터 2만야드의 트리코트(tricot·일종의 메리야스 제품으로 고리를 엮어서 짜는 편직제품)를 공급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김우중은 부지런히 뛰어 창업 원년에 트리코트 한 품목으로 58만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김 회장은 당시 해외시장에 대한 정보취득과 선제대응이 중요하다고 판단, 국내기업 최초로 해외지사 설립에 나섰다. 1969년 8월 시드니 지사에 이어 9월에는 싱가포르 지사를 열었다. 당시 싱가포르 1인 지사장이 바로 현재 두산중공업 윤영석 부회장이다.

창업 1년 만에 국내 수출기업 서열 141위를 차지했던 대우실업은 2년째 36위로 뛰어올랐고 1972년에는 2위까지 치고올라갔다. 1978년에는 1위에 당당히 올라섰다. 김 회장은 그 단계에서 기계, 전자, 금융으로 경영다각화를 추진했다.

1970년대 초기에는 건설업 진출도 서둘렀다. 당시 중동(中東)건설 붐을 김 회장이 놓칠 리 없었다. 대우의 해외 첫 건설공사는 에콰도르였고, 다음은 수단이었다. 당시 수단은 북한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수단은 한국인에게 입국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김 회장은 수단의 장관급 인사들과 끈질기게 교섭을 벌인 결과 입국에 성공, 니메이리 대통령과 단독 면담을 갖고 1977년 5월 수단의 영빈관 공사를 2000만달러에 수주해 최초로 아프리카 건설 시장을 개척했다.

국내외를 바삐 오가는 그를 위해 비서가 하는 일은 한 가지였다고 한다. 바로 밤 2시가 넘어 잠이 든 김 회장을 새벽 4시30분쯤 눈에 안약을 넣어 깨우는 것이었다고 한다. 김 회장은 일벌레였다. 바이어와의 만남이 밤 10시쯤 끝나면 그때부터 내부회의를 주재했다. 비행기도 주로 밤에 탔다. 시간을 아끼고 호텔비도 절약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1970년대 중반 들어 대우는 중화학 분야에도 진출했다. 한국기계공업과 대한보일러공업, 옥포조선과 새한자동차 등을 속속 인수했다. 김 회장의 사업 다각화는 이렇게 한국의 산업발전 방향과 궤도를 함께 했다. 그는 문제가 많았던 부실기업을 집중적으로 골라서 인수했다. 김 회장은 당시 “바보들아, 부실기업을 헐값에 사서 조금만 노력하면 비싸게 팔 수 있는데 얼마나 좋은가”라고 말했다. 이런 과정에서 김 회장은 경기고 동기동창을 대거 요직에 중용하는가 하면, 한국은행 등의 금융권 엘리트를 대거 영입했다. 이경훈과 김태구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2시간 자고 눈에 안약 넣으며 일어나

김 회장은 현장을 사랑했다. 1980년대 후반 대우조선을 되살리기 위해 경남 옥포에서 1년8개월이나 머물며 정상화를 지휘했다. 근로자 가정을 방문해 아침식사를 하며 현황을 설명했다. 몇 년새 대우조선은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했고, 수익은 계열사 지원에 사용했다. 당시 김 회장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베스트셀러를 펴냈다. 그는

책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말했다.

김 회장의 또다른 관심사는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이었다. 그는 1992년 GM과 결별하고 난 뒤 비상한 각오로 생산현장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외부에선 대우차의 생존을 의심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1996년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등 독자 개발한 3개 모델을 동시에 내놓았다. 사람들은 김우중의 저력에 새삼 놀랐다. 김 회장은 평소 “세계적으로 연산(年産) 200만대의 생산 능력을 확보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기어코 이를 성공시켰다.

1993년부터는 ‘세계경영’이란 구호가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쌈짓돈은 적었지만 탁월한 자금조달 솜씨로 남의 돈을 얻어 해외공장을 사들였고 공장을 돌렸다. 관세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때로 완제품 자동차를 수출한 뒤 현지에서 다시 분해 조립하는 방식도 사용했다. 세계경영은 그렇게 숨가쁘게 진행됐다.

“자금회전을 너무 소홀히 했다”

1996년 7월 19일 우즈베키스탄 공장 준공식 때였다.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 대통령은 김우중 회장을 칭기즈칸에 비유하면서 ‘킴기즈칸’이라고 불렀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만 해도 오죽 대우그룹이 잘나갔으면 한 재벌그룹의 보고서는 대우그룹의 대망론을 예언했을까. 1996년 12월 LG그룹 회장실 재무팀이 작성한

▲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과 환담하는 김우중 전 회장.
‘2005년도 재계 순위’를 보면 대우가 1위, LG 2위, 현대 3위로 나와있다. 삼성은 4위로 떨어질 것이며, 선경(지금의 SK)은 5위에 머물 것으로 전망됐다. 이유는 이렇다. 1970년대부터 런던에 본거지를 두고 현지 금융계와 계속 접촉해 해외자금 차입이 용이하고, 준(準)중형 승용차를 소형 가격에 파는 등 저가전략으로 재계 1위 구축이 가능하다는 것. 이 보고서는 “김 회장이 직접 현지에 가서 계약을 하기 때문에 신용도 구축에도 유리하고 신속한 업무처리도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분식회계나 자금 해외도피 시비는 모두 이때부터 싹이 커지고 있었다. 킴기즈칸의 운명도 1997년 11월 대한민국을 강타한 IMF 관리체제 도입으로 한계에 봉착했다. 국가신용등급이 6단계나 떨어지자 세계 곳곳에 가장 많은 사업장을 갖고 있던 대우는 해외 채권자로부터 극심한 상환압력을 받게 됐다. 국내에서는 ‘부채비율 200%’ 등 온갖 까다로운 기준이 신규 차입을 어렵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환율까지 폭등해 외화자산이 유난히 많았던 대우는 1997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8조5000억원의 환차손(換差損)을 입게 됐다.

김 회장은 “1달러당 800원이었던 환율이 최고 1960원까지 뛰었다. 해외 빚이 달러로 표시하면 변동이 없지만 원화로 표시되면 2배 이상 뛰는 거다. 그러니 해외에 투자된 11조원을 갚아나가기 위해 갑자기 국내로부터 26조원을 조달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회사의 부채비율이 3 대 1이었던 것이 갑자기 5 대 1로 뛰어버려 엄청난 부실기업으로 둔갑해버렸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IMF가 터지니 은행 금리가 30%까지 올라갔다. 그래서 자금조달 방식을 회사채로 돌렸다. 회사채 발행 금리가 약 20% 선이어서 더 유리했다. 그런데 얼마 뒤 은행이 회사채 발행한도를 제한했다. 자금의 단기유동성에 문제가 터져 나왔지만 이때는 속수무책이었다. 대우가 시장점유율 같은 것에만 신경쓰고 자금회전을 너무 소홀히 한 탓”이라고 회고했다.

이 과정에서 김 회장은 새로 들어선 김대중(DJ) 정부에 강력한 ‘생존의 러브콜’을 보낸다. DJ와는 1990년대부터 남달리 깊은 인연이 있는 것으로 정치권에는 소문이 나있었다.

관료집단에 미운털 박혀

김 회장은 1998년 1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 ‘환란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500억달러의 무역흑자론’을 주장했다. 김우중의 아이디어에 DJ는 공감을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경제9단인 김 회장이 정치 9단인 DJ와 잦은 독대(獨對)를 하면서 결국 엘리트 관료집단의 미움을 샀다. 세계경영을 하면서 그 나라 국가원수와 1 대 1로 만나 문제를 해결해온 김 회장이 국내 문제도 그렇게 풀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 회장이 낸 온갖 아이디어는 관료집단에 의해 거부당했다. 관료집단은 “김 회장이 부채비율은 낮추지 않고 외상수출로 장난을 치려한다”고 몰아쳤다. 김 회장과 관료들은 외환위기의 원인을 놓고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감정의 골도 깊어졌다.

▲ 김우중 전 회장은 잠자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비행기도 주로 밤에 탔다.

옛 대우그룹 고위관계자는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회장이 직접 과장들을 불러모아 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회장이 거물이 된 양 했다. 주변에서 ‘대통령을 하셔야 합니다’라며 부추기는 사람도 있었다. 은행 대리에게도 90도 절하던 김 회장이 어느 날부터 고위 관료를 가리키며 ‘이리로 오라고 그래’라는 말을 쉽게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998년 4월. 서울역 뒤 힐튼호텔 23층의 김우중 회장 집무실로 찾아온 강봉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향해 김 회장은 수출금융지원 요청이 거부당하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이, 강 수석. 당신이 뭐하러 그 자리에 앉아있나. 당신이 비키면 다른 사람이라도 와서 일이나 하지.”

결국 이런 일이 겹치면서 김 회장과 정부 사이는 멀어졌고 대우가 휘청댈 때 대우의 목을 죄는 정책이 쏟아졌다. 장·단기 차입금의 만기연장이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여기에다 DJ마저 구조조정에 미온적이던 김 회장을 곱게 보지 않았다. 대우의 운명은 그렇게 흘러갔다.

당시 런던에 있는 BFC(British Finance Center)를 통한 해외법인의 운영자금 조달 기능도 한계에 부닥쳤다. 다급해진 그는 1997~1998년 사이 4개 계열사를 통해 41조원대의 분식회계를 하고, 부풀려진 재무재표를 이용해 금융기관으로부터 10조원대의 대출을 받았다는 것이 검찰 측 설명이다.

여기에 1998년 10월 29일 일본 노무라증권 서울지점에서 나온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Alarm bells is ringing for the Daewoo Group)’는 제목의 보고서가 대우에 일격을 날렸다. 심각한 유동성 위기로 해외채권이 회수되기 시작하면 워크아웃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요지였다. 즉각 대우중공업의 회사채 발행계획이 취소됐고 금융권의 본격적인 자금회수가 시작됐다.

“전경련 회장 맡아 우쭐한 것 후회”

김 회장은 충격으로 머리에 실핏줄이 터져 쓰러진 뒤 뇌경막하혈종 수술도 받았다. 하지만 임원들 만류를 뿌리치고 금방 퇴원한 김우중은 삼성자동차·대우전자 빅딜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삼성이 김 회장의 전략에 말려들지도 않았고, 대우의 약한 모습을 본 시장은 마치 하이에나처럼 대우에 잔인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김 회장은 고군분투했지만 운명을 바꾸진 못했다. 1999년 8월 대우는 결국 워크아웃이라는 사약(死藥)을 받았다. 채권 금융기관이 부도처리 위협을 가하는 동안 매일 밤 전화통을 붙들고 채권회수를 유예시키던 날이 흘러갔다. 결국 그해 10월 20일 중국 엔타이 대우차부품 공장 준공식 참석을 끝으로 김 회장은 잠적하고 말았다.

김 회장은 지금도 당시 전경련 회장을 맡았던 일을 후회하고 있다. 그는 1998년 9월 16일 최종현 회장의 타계로 전경련 회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 2002년 12월 문화일보에 게재된 도올 김용옥씨와의 인터뷰에서 “최대 실수는 전경련 회장을 맡은 것입니다. 마치 경제 대통령이나 된 것처럼 우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의 대사(大事)만을 염려했습니다. 따라서 대우 자체의 문제에 충실하게 대처하고 풀어나가는 현실적 안목이 부족했습니다. 정말 ‘설마’ 했을 뿐이었습니다. 어리석었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전경련 회장 시절, 다가오는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그까짓 수출로 갚으면 되지”라며 특유의 낙천성으로 덮어버렸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최홍섭 주간조선 기자

 

 
가져온 곳: [펄프 뒷골목]  글쓴이: kornan 바로 가기
 
산신령이란 닉네임을 가지셨던 김회장님 일대기를 한눈에 보고 존경하지 않는 다면 바보일까요? 진정으로 존경하는 회장님의 일대기를 오늘의 젊은이들이 배워 밤을 낮같이 일하는 사람에게 찬사를 보내는 사회가 오늘의 불경기를 이겨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기에 스크랩을 해 알리기로 했습니다.
 
가져온 곳: [하나님의 사랑을 나눕시다]  글쓴이: yspark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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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5.10.14 17:04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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