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舒川고향소식 스크랩 내 고향 판교는
백복균 추천 0 조회 108 09.07.24 22:5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내 고향

 

 

 

내 고향 板橋는

글 ; 溫洞




서천(舒川) 판교(板橋) 상좌리(上佐里)는 내가 태어난 고향이다.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고향에서 살다가 40여 년을 직업 따라 전국을 다니면서 누구나 힘들고 외로울 때 생각하는 고향은 항상 포근했다.



인구 3000명 정도가 모여 사는 차령산맥의 마지막 산자락에 자리 잡은 판교(板橋)는 전형적인 농촌 산간 마을이며 생활은 옛부터 내려오는 벼농사와 밭농사가 주종이며 특산물이라야 도토리 녹말, 버섯, 포도 같은 농작물과, 소규모 양돈과 한우를 기르는 축산업이며, 주민들은 대부분 나이 많은 분들이 고향을 지키고 있는 낙후된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한적한 시골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행정구역 개혁은 조선시대 태종(太宗). 13년(1413)에 큰 개혁이 있었으나 그 후 조선시대 말기를 지나서 1914년에 큰 개혁이 있었다. 1914년 이전에는 서천군, 한산군, 비인군으로 되어 있던 3개 군을 통합하여 지금처럼 서천군으로 개편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비인현에 속해 있는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판교가 비인읍내의 동쪽이 있었으므로 동면(東面)에 속했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이 곳의 고 지명(古 地名) 너덜이 즉 나무판자로 다리를 놓았다 해서 널다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너덜이 판교(板橋)의 이름을 따서 판교면이라 하고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1930년대만 하여도 광천(廣川) 논산(論山)과 함께 충남의 3대 시장으로 꼽혔으며 특히 우시장(牛市場)이 유명하다.

면내에 거주하는 대성(大姓)은 경주 김씨(慶州金氏)가 140여 호 평산 신씨(平山申氏)가 130여로 충주 지씨(忠州 池氏) 80여 호 홍주 이씨(洪州 李氏)가 50여 호 양근 김씨(楊根金氏) 30여 호 통천 김씨(通川 金氏) 25호 광주 이씨(廣州 李氏) 21호가 뿌리를 내리고 거주하는 성씨이며 그 씨족의 집성부락도 있다.

판교면은 마대, 만덕, 문곡, 복대, 상좌, 수성, 심동, 우라, 저산, 판교, 현암, 후동, 흥림, 등고, 금덕리 등 15개 행정구역상 리로 형성되어있고  그 속에 취락부락이 포도송이처럼 올망졸망 자리하고 있다.


마대리(馬垈里)는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이 곳에 있는 녹마산(綠馬山)과 비대(飛垈)의 이름을 따서 마대리라 하고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갈로(葛老); 칡이 많은 마을이라 갈로 또는 가루개라고 부른다.

난딧 굴; 계곡에 자생하는 난이 많다하여 난곡(蘭谷)이라고도 부른다.

당 마루; 마을에 산제 당(山祭 堂)이 있어 당 마루라고 부른다.

범 울; 큰 짐승 즉 범이 자주 나타났던 마을이라 범 울이라고 부른다. 마을지형이 범을 닮았다고도 한다.

비대(飛垈); 비대리(飛垈里)라고도 부른다. 매를 비롯하여 나르는 새들이 많이 모여드는 마을이라 그리 부른다.


만덕리(萬德里); 비인군 이방면 (二房面)의 지역으로서 옛날부터 덕을 베푸는 사람이 살았다 하여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만덕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충주 지씨(忠州池氏)가 많이 살며 그 집성촌도 있다.

선팽이; 옛날부터 선인들이 자주 드나들었으며 선비들이 많이 대를 이어 사는 마을이라 해서 선풍, 선풍리, 선팽이라고도 부른다.

왜재; 옛날 이 마을에서 기와를 구웠다 해서 왜재, 와티라고 부른다.

자라실; 자라리(者羅里) 별곡(鱉谷)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지형이 자라처럼 생겼다 해서 지은 이름이다.


문곡리(文谷里); 문덕(文德)과 신곡(薪谷)의 이름을 따서 문곡리라 하였다.

문덕이; 문덕(文德) 문덕리(文德里)라고도 부른다. 문수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서 덕을 쌓는 사람이 그 산 아래에 산다 해서 문덕이 문덕 문덕리라고 부른다.

섭실; 마을과 마을부근에 섭이 많이 있다 해서 섭실 신곡(薪谷)이라고 부른다.

수랑굴; 마을에 습지라 불리는 수렁(수랑)이 많이 있다 해서 수랑굴 또는 주항(酒缸)이라고 부른다.

장재울; 장좌(長佐)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장자가 살았다 해서 지은 이름이다.

와매; 기와를 굽던 마을이라 와매라고 부른다.


복대리(卜大里)는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복대(卜大)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복대리(卜大里)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가실(柯室); 마을에 가래나무가 많으므로 가실 가곡(柯谷)이라고 부른다.

부소 티(扶蘇티); 부소산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부소 티라고 부른다.

분돌(分洞); 마을이 분지에 놓여 있으므로 분동이라고 부른다.

유춧골; 옛날부터 마음에 여유 있는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유춧 골이라고 불러온다. 옹기점도 있는 마을이다.


상좌리(上佐里)는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산(上山)과 가좌(可佐)의 이름을 따서 상좌리(上佐里)라 하였다. 이때 윗사람을 도운다는 뜻의 상좌리(上佐里)를 앉을좌(坐)를 써서 상좌리(上坐里)로 이름을 지었다면 이 동네 출신중에 사장을 많이 배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가자울; 마을 지형이 가재처럼 생겼다 해서 가자울 가좌(可佐)라고 부른다.

광촌(光村); 음지가 별로 없는 마을로서 빛이 솟는 마을이라 해서 광촌이라고 부른다.

노적봉(露積峯); 가자 울 서쪽에 있는 금수산 자락에 있는 노적봉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산 이름을 따서 노적봉이라고 부른다.

누릉굴; 흙의 빛깔이 황색인 지역에 마을이 있다 해서 누릉굴 또는 황곡(黃谷)이라고도 부른다.

능마궁(陵馬宮);명당자리로 지목되는 마을로 왕족이 묻힐 곳이 있다 해서 능마궁이라고도 부른다. 뱃골에서 저수지를 끼고 비인 성산리로 가는 길목에 있다.

묵티(墨티); 먹재라고도 부른다. 옛날에는 똥메산에 나무가 우거져서 어둠침침한 고개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묵티 먹재라고 부른다.

뱃골; 주동(舟洞)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의 지형이 배와 같다 해서 뱃굴 주동이라고 부른다. 현재 상좌저수지 연안에 잇어 배를 띄울 수 있는 곳이다. 선인들의 예견력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상산(上山); 금수산중에서 제일 높은 산 아래 동네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네 사람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컸던 기억이 잇다.

온동(溫洞); 냉정(冷井)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샘이 있는데 여름에는 여름 같고 겨울에는 물이 덥다는 샘이 있으므로 온동 또는 냉정이라고 부른다. 개발하면 온천이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지명이다.

한티; 가재울에 있는 학티 재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한 티라고 부른다. 큰 고개라 해서 한티 재라고 부르는 고개 아래에 있다.


수성리(水城里)는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방망이처럼 생겼으므로 솔맹이 소을망리 또는 설명 설맹이 변하여 송수침 또는 송암이라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수성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골 말; 마을이 골짜기에 있으므로 골 말이라고 부른다.

탑 거리; 마을에 탑이 있었으므로 탑 거리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심동리(深洞里)는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장대봉 아래의 깊은 골짜기가 되므로 깊은 골 또는 심동(深洞)이라 하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심동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월봉(月峯) 마을 지형이 달처럼 생겼다 해서 월봉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달맞이를 즐기는 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깊은 골; 깊은 골짜기 아래 마을이 있으므로 깊은 골 심동(深洞)이라고 부른다. 상심(上深), 중심(中深), 하심(下深)으로 세 개 마을로 구분이 되어 있다.


우라리(右羅里)는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와우형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 하여 우라실 우리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우라리라 하여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경주 김씨(慶州金氏)가 오래 동안 뿌리를 내린 고장이다.

가추개; 까치가 많이 서식하는 까치고개 작(鵲)티리라고 불렀으며 변하여 가치고개라고도 부른다.

우리실; 마을과 그 지역에 와우형의 명당이 있다는 마을이다.


저산리(苧山里)는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저동(苧洞)과 산동(山洞)의 이름을 따서 저산리라 하였다. 평산 신씨(平山 申氏)가 오래도록 뿌리를 내린 지역이다.

강당(講堂); 글을 읽고 깨우치는 강당이 있었으므로 강당이라고 부른다.

모시울; 저동(苧洞)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서 저마도 많이 생산하였으며 모시도 많이 직조하는 마을이라 옛날부터 모시울 저동이라고 부른다.

산동(山洞); 산악지대에 마을이 있으므로 산동이라고 부른다.

점말; 마을에 사기점이 있었던 마을이다.

짐사굴; 마을이 골짜기에 있으므로 짐사굴이라고 부른다.

큰골; 큰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이라 해서 큰골이라고 부른다.


판교리(板橋里)는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너다리가 있으므로 너다리 널다리 또는 판교(板橋)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판교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감동(甘洞); 옛날 한 도승이 말한 대로 단 음식을 경작하면 마을이 번창한다 해서 감 감자 강낭콩 같은 종류의 생산으로 마을이 흥해졌다 해서 강동 강랑굴이라고 부른다 한다. 고려 때 이 곳의 감은 진상품이었다.

고랙굴; 이 부근에서는 가장 오래된 마을로 한 선비가 전원에 묻혀 명성 있게 살은 마을이라 고락(古樂)이라 부른다 한다. 일설에는 고락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놋점이; 녹점 유점이라고도 부른다. 놋점이 있었던 마을이다.

대섶 말; 대나무 숲이 있는 마을이라 대섶 말이라고 부른다.

서당 굴; 서당이 있었던 마을이라 서당 굴이라고 부른다.

절굴; 옛날에 절이 있었던 마을이다.


현암리(玄岩里)는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검고 큰 바위가 마을 중간에 있었으므로 검은 바위 검은 배 또는 현암(玄岩)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현암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도래(都來); 옛날에는 타향에서 이곳에 들어와서 정착하는 사람들이 많은 부락이라 도래라고 불렀다 한다.

구풋 굴; 옛날에는 옴팡진 땅이 많았으나 그 곳을 정리하고 마을이 생겼다고 하여 구풋 골이라 부른다.

돌장 굴; 마을에 돌이 많았던 마을이라 그리 부른다.

등대; 옛날에는 집이 많이 들어섰던 마을로 밤이 되면 이 지역을 밝히듯 등불이 찬란하였다 하는데 꼭 판교의 등대 같았던 마을이라 한다.

분뭇 골; 부처가 있었던 마을이다.

질마제; 마을 뒷산이 꼭 길마처럼 생겼다 해서 질마제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후동리(後洞里)는 비인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뒷골 또는 후동(後洞)이라 하였던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후동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충주 지씨(忠州池氏)가 많이 살고 있다.

갓골; 마을 가에 새로 마을이 생겼으므로 갓 골 각동(角洞)이라고 부른다.

방선(訪仙) 마을이 처음 생길 때부터 신성한 백성들만 모여서 마을이 이룩되었으며 그 후에도 선지로 이름난 마을이라 방선(方仙)이라고 부른다 한다.

후동(後洞);마을 뒷쪽에 마을이 자리해 있으므로 후동 뒷골이라고 부른다. 임진왜란 때는 피난처로 유명했었다 한다.


흥림리(興林里)는 비인군 이방면(二方面)의 지역으로서 숲이 차츰 우거져감으로 흥림(興林)이라고 불렀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서천군 종천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에 판교면에 편입되었다.

궁 곡(宮谷);마을지형이 궁궐 같다 해서 궁 곡 궁 국이라고 부른다.

동지매; 조선시대 격동하는 사화 때 비인으로 유배된 한 선비가 유배지에서 도망쳐 나와서는 이곳에 이르러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한다. 그 후 그 선비는 사화에서 풀려나고 조정에 들어가 큰 벼슬을 하면서 일년에 한 번씩 그 은공에 보답하기 위하여 자기가 방문하던지 사람을 보내든지 하였다 하는데 그 날이 동지(冬至)날이었다 한다. 그래서 그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동지매 동지리(冬至里)라고 부른다 한다.

두지실(斗只實); 마을 뒤쪽에 자리해 있으므로 뒤 실이라 부른다.

띠울; 마을이 띠로 둘러있다 해서 띠울 모곡(茅谷)이라고 부른다.

새야; 산과 들 사이에 아담한 들을 끼고 마을이 자리해 있다 해서 새야라고 부른다.


등고리(登古里)는 서천군 문장면(文章面)의 지역으로서 높고 험한 고개가 있으므로 등 고개 또는 등고(登古)라 불렀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등고리라 하여 문산면에 편입되었다가 뒤에 판교면에 편입되었다.

소현골; 등 고개 위쪽 작은 산줄기 아래에 마을이 있어 윗말이라고도 부른다..

등 고개; 험한 고개아래 있으므로 등고(登古)라고 부른다.


금덕리(金德里)는 서천군 문장면(文章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금단(今丹)과 만덕(萬德)의 이름을 따서 금덕리라고 하였다. 안동 권씨(安東權氏) 50여 호의 집성부락이 있다.

만덕(萬德); 마을에 망덕사(望德寺)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이에 연유하여 만덕이라고 부른다.

산막 골; 사방으로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산막 골 산막곡이라고 부른다.

원닷골; 골짜기 안쪽으로 마을이 있으므로 원다곡(元多谷)그리 부른다.

금단(金丹); 조선시대에 권좌에 올랐던 안동 권씨가 사방에 씨족의 권세를 위하여 금단의 서약을 많이 하였었다. 명문으로서 자리를 지키는 인물들이 사는 마을이라 금단(金丹)이라 부르고 변하여 검단이라고도 한다.

-서천군청 홈페이지 참조


판교는 충청남도와 전라북도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금강을 끼고 넓은 평야와 서해를 바라보며 자리한 서천군에 북쪽에 속해 있는 면소재이다.

판교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으로는 천방산이, 서쪽으로는 상좌리 뒷산인 금수산 자락이, 남쪽으로는 종천 희리산 자락이 바람막이를 하고 있다. 북쪽으로 심동의 장구봉과 판교의 진산인 장태봉이 버티고 있다. 이렇듯 판교는 산자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사이사이로 발달한 고개를 통하여 인접한 마을을 연결시키고 있다.


교통의 중심지인 판교에서 동으로는 놋점 고개를 넘어 문산으로 쉽게 갈 수 있다. 또 금복리 작은재를 넘으면 문산 동 뫼 마을로 갈 수 있다. 물론 등고리에서는 문산 북산리로 넘어가는 길도 있다.

서쪽으로는 월봉에서 둔덕재를 넘으면 비인 율리로 갈 수 있고, 남당리, 구복리로 넘어 갈 수 있다.

장항선에서 제일 긴 십리굴이 뚫려있는 동구재를 넘으면 보령시 주산면으로 넘어간다. 그 동구재에는 풍수지리의 대가 토정 이 지암의 며느리 묘가 있다. 남쪽으로는 판교천을 따라서 종천, 서천으로 갈 수 있다.

북쪽으로는 부소티 고개를 넘으면 부여 옥산으로 가는 길이며, 가루개를 넘으면 보령댐이 있는 보령시 미산으로 넘어간다.

이렇게 판교는 교통의 요지이며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산간 마을이다.


골이 깊어 생긴 하천 중에 판교천은 황해에 주입하는 하천 중에서 가장 크며 서천군내에서는 두 번째로 긴 하천이다. 길이 19.5km로 서천군의 북단인 판교면 복대리에서 발원하여 서천읍내로 흐르다가 다시 종천면 장구리로 흘러 바다로 유입한다. 그 중류에 큰 흥림 저수지가 있어 광대한 서천면과 마서면 유역에 농사용 물을 공급하고 있다.

종천천은 길이 10.5km로 판교면 심동리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상좌리 상부와 중심부를 지나며 상좌리 하단부와 종천면 종천리로 주입하는데 1960년경에 준공한 상좌(鍾川)저수지는 종천평야와 당정평야를 관개하고 있다. 어릴 적 송사리 피리를 잡던 기억과 참게를 잡던 기억이 새롭다. 옛 어른들이 지명을 지을 때 저수지가 축조될 것을 알고 지었는지 오래전부터 뱃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판교면은 두 개의 저수지 상류에 있으면서 아랫마을에 농사짓는데 물을 공급하여 도움을 주지만 당사자인 판교 주민은 상류지역에 살면서 개발에 따른 많은 제약을 받고 살고 있으며 저수지 축조에 따른 농지 손실로 실농하여 주민들은 타 지역으로 떠나고 인구는 감소하여 이제는 판교면민은 3,000명 정도가 된다.


옛날에 너다리로 불리던 시절에 판교의 중심지는 판교리이다. 모든 고개 마루의 길은 판교리로 통한다. 그러하기에 판교리에는 시장이 발달하였다. 사방으로 뚫인 고개를 넘어 판교장 즉 너다리장을 찾았다.

판교는 널 판(板)자에 다리 교(橋)자로 널다리가 있던 마을이다. 즉 널다리는 지금의 판교리 노인회관 앞에 나무로 제작한 다리가 있어 유래된 지명이다. 지금도 그 노인 회관의 이름이 너다리 노인회관이다.

사방으로 통하는 길을 중심으로 발달한 판교장에는 서천, 비인, 문산, 주산, 미산, 옥산 사람들이 다녔다. 이 지역의 경제 활동이 판교장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특히 판교장은 한우가 거래되던 소시장으로 유명하다. 광천 우시장, 공주 우시장, 마산 새장 등으로 유명한 우시장의 중심지가 판교였던 것이다. 그 시장의 흔적이 판교중학교 입구 주변에 남아 있다.

1931년 장항선이 개통되면서 판교의 중심지는 지금의 현암리로 옮겨 가게 되었다. 즉 판교역을 중심으로 상가와 음식점이 발달하자, 1942년에 현암리에 있던 판교역의 이름을 따서 동면을 판교면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장항선 직선화 사업으로 새로운 노선이 8km가 변형되여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 판교역도 300m 위로 올라가 오성초등학교를 지나 저산리 입구 쪽에 역이 생기면 판교면의 판세는 다시 이동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판교는 수공업이 발달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판교 장시로 가는 길목에 사기그릇과 놋그릇을 만들던 사기점이 형성되었다. 심동리 월봉, 저산리, 금덕리, 판교리 등에는 가마터가 잘 남아 있다. 백제 시대에는 공주 대통사 건축을 위한 기와를 굽던 장소가 금덕리에 남아 있다. 선조들의 손재주가 이어온 것인지 지금 판교에는 도토리 묵 공장이 전국에서 알아주는 특산물이다.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 옥균의 동생이 판교로 피신하여 숨어살던 곳이다. 천주교의 박해를 피하여 판교면 금복리 작은재에 교우 마을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황석두 세례명 황루가가 피신하였다가 잡혀서 보령 수영에서 안주교, 민신부와 함께 참수되었다.

그래서 판교는 다른 지역에 비해 빠르게 개신교를 받아 들여 1932년에 판교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판교는 자유와 진리를 지키기 위한 피신처이기도 했다. 산과 산으로 연결된 판교의 계곡마다 사연을 담고 있다. 그 이름을 대신하고 있는 마을 명칭이 심동리이다.

마을이 깊은 곳에 위치했다는 것이다. 상심, 중심, 하심으로 불리는 심동리는 흔히들 토끼하고 발맞추고 잔다는 곳이다. 이런 골짜기에서 이 지역 출신이 면장으로 있을 때 납골당을 유치하여 정부의 많은 자금을 지원받아 발전하고 있다. 문곡리 석정 신 명휴는 1870년대 경학에 밝아 비인을 대표하는 유림이기도 했다.

 

이런 역사 유적과 문화가 잘 남아 있는 것은 판교가 갖는 지형적인 특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방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산간 지형이기에 문화교류도 있었지만 판교 사람들만이 간직한 고유한 문화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 문화 중 하나가 그 주변의 농경문화 중 하나인 백중날이다, 머슴이 한 해 동안 일을 하고 주인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용돈을 받아 5일장에 나가 술을 먹고 노는 백중장이라는 독특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머슴들은 백중장에서 보신탕으로 일년 동안 일하다 지친 몸을 보신하게 되였고 이것이 먹거리로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향토음식으로 자리매김하여 유명세를 치루고 있다.

그래서 판교가 보신탕의 원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최근에는 보신탕 먹거리 축제를 계획하다가 애견동물협회와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제사상에 개고기가 올려졌다는 설도 있지만 1970년대 서천지방에 콜레라가 발생하여 사람이 죽어 행사를 치룰 때 돼지고기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에 개고기를 대신 사용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상가에서 개고기 먹는 풍습은 이어오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판교역에서 철길을 따라 2,3km를 올라오면 온동 굴이 나오고 350m의 굴을 지나면 상좌리가 반긴다. 온동 먹제 상산 광촌 뱃골(舟洞)이 금수산의 끝자락에 13호 정도씩 포도송이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전형적인 산골이며, 더구나 내가 태어난 상산은 닭 모이를 주면 절반은 꿩이 내려와 먹고 가는 서천에서도 가장 깊고 조용한 산골마을이다.

펼 서(舒)에 내 천(川)이라 이름 붙인 서천은 금강 하구를 뜻하며 이곳에서 살려면 물의 성질을 잘 알아야 하고 그 물을 잘 관리할 줄 알아야 재난에서 살아남기 때문에 농업토목을 배워야하고. 널빤지 판(板)자와 다리 교(橋)자는 나무로 만든 다리라는 뜻으로 철근과 콘크리트가 우리 생활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방법이 최선이였으며 그것은 토목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름에 터 기(基)자는 택지를 뜻하며, 별 태(台)는 집 대(臺)자의 약자로도 사용하기 때문에 건축을 뜻하여 이 모두를 합하면 종합건설을 뜻하기 때문에 내 고향은 내가 이처럼 건설업에 30년을 종사하게 하는 운명적 인연으로 다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비록 낙후되고 외진 고향이지만 나에게는 항상 힘들고 외로울 때 생각나는 곳이다. 그곳에는 오늘도 나를 기다리는 엄니가 계신다.

대설주의보가 내리면서 눈 폭탄이 쏟아져  온 대지가 하얀 그곳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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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9.07.24 23:00

    첫댓글 溫洞 님은 서천군 판교 출신의 수필가입니다. 내용이 풍부하여 우리 고향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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