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光山金氏) 장영공(章榮公) 김진(金禾+眞 1292년∼미상)선생과 우리 추씨선조에 대하여
우리 추문의 가승(家乘)을 살펴보면 고려시대 광산김문(光山金門)의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김진이라는 분을 접할 수 있습니다. 추씨가승 내지 노당실기에는 이 분께서 노당 추적선생과 상당한 교분(交分)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습니다만, 저가 연대(年代)등을 고찰(考察) 비교 분석한 바로는 이분과 교유 하셨던 분은 노당선조라기 보다는 노당선조의 아드님이 되시고 공민왕(恭愍王)조에 병부상서의 벼슬을 하신 것으로 되어있는 추진(秋震)선조로 생각되어집니다. 즉 광산김씨 문중에는 선대 김장영공의 호적(戶籍)문서를 비롯한 서지(書誌)류가 다수 보관되어 있는데 추상서(秋尙書)라는 분과 시(詩)를 주고 받았으며, 서찰(書札)을 주고 받기도 한 유문(遺文)들이 있다합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추상서(秋尙書)라는 분이 민부상서를 하신 문헌공 노당 추적(秋適)선조인지, 병부상서를 하신 경재 충효공 추진(秋震)선조인지에 대한 고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광산김씨하면 조선조에 문묘배향 2명, 정승 5명, 대제학 문형 7명, 청백리 4명, 왕비 1명을 배출한 명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진이라는 분은 광산김씨 중에서도 양간공파(良簡公派)에 속하시는 분인데 양간공 연(璉 1215∼1291)이라는 분은 광산김씨의 14세로 바로 장영공 김진선생의 조부가 되시는 분입니다. 장영공의 부친은 광산김씨 15세 정경공(貞景公) 사원(士元1257년∼1319)이라는 분인데 곧 안향선생의 사위가 되시는 분입니다. 조선조방목의 광산김씨 문과급제자 265명중 187명이 양간공파이고, 특히 김진선생의 후손으로는 문묘에 종향된 사계 김장생선생, 신독재 김집 선생을 비롯하여, 3부자 대제학, 형제 대제학의 광산김문 대제학 일곱분이 모두 김진선생의 직계후손입니다. 즉 27세의 김장생, 28세의 김집 부자(父子)분이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29세의 김익희, 30세의 김만기, 김만중, 31세의 김진규, 32세 김양택, 36세 김상현, 37세 김상현 이상 일곱분 양관대제학입니다. 본건의 관련 고찰자료를 카페에 올려 종친 분들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關聯小考
1869년의 기사추씨가승(己巳秋氏家乘)의『續編 金章榮公答秋尙書書, 請秋尙書書, 月夜懷秋尙書奉呈一紀(金章榮)』와 1959년 기해년 광산 김문옥(金文鈺)이 서문하시고 전남 장흥 황산사(黃山祠)에서 인출한 죽탄(竹灘)추용희(秋鏞禧)공의 노당실기(露堂實記)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전남 장흥(長興)의 종친들께서 추진위원으로 1999년 5월 추계추씨 한헌공 제2자 남미계 가승보 발간시 번역 출판한 사실이 있는 노당선생실기(露堂先生實記)의 시(詩) 부분 내용 중 광산김씨 대제학 김진공과 관련한 화김대제학진월야시(和金大提學진月夜詩), 부예문관대제학김진공월야회추상서시(附藝文館大提學金진公月夜懷秋尙書詩) 그리고 서(書) 부분의 여김대제학진(與金大提學진禾+眞), 부김대제학답서(附金大提學答書), 청우회음서(請友會吟書)등과 관련한 노당선생의 관련자료들은 광산김씨(光山金氏) 제16세 양간공파(良簡公派) 김진공의 1333년 충숙왕(忠肅王)후원년 호적(戶籍)에 의한 연대 등을 고찰(考察) 하여본 바로는 노당(露堂)선생의 관련자료라기 보다 노당선생의 제1자이신 충효공(忠孝公) 경재(敬齋) 추진(秋震)공의 사료(史料)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아니한가라 하여 그 검토한 바를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가장 중요한 부분이 출생년대 부분인데 각주에 기재된 바대로 장영공(章榮公) 적재(迪齋)김진공은 1292년 고려 충렬왕 18년 임자생으며, 노당(露堂)선생의 1246년 고려 고종33년 병오생과는 46년의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김진공은 1307년 충렬왕 34년에 추장제술과에 급제하여, 1332년 충혜왕 2년에 중헌대부 성균제주, 1333년 충혜왕 3년에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이었으며, 1342년 충혜왕후 3년에 지공거가 되었다. 이에 대하여 노당(露堂)선생은 고려원종원년 1260년에 문과(文科), 1302년 민부상서(民部尙書), 1303년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1306년 평장사(平章事), 1310년 배(拜) 문하시중(門下侍中)하였다.
그리고 김진공은 어머니가 안문성공(安文成公) 유(裕)의 따님으로 안향(安珦)선생이 외조부(外祖父)가 된다. 또한 배(配) 영가군부인 권씨(權氏)의 어머니는 첨의평리 권준명공의 부인으로 상락군 김방경장군의 3녀인데 김진선생의 부인이 즉 김방경장군의 외손녀이시다. 시대적으로 볼 때에도 1260년 고려원종 원년 노당선생 15세, 안향선생 18세였다 하는 바, 안향선생이 노당선생보다 3세 위인데 노당선생이 안향선생의 외손(外孫)과 벗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노당(露堂)선생의 제1자(子)이신 경재(敬齋) 추진(秋震)공은 1296년 고려 충렬왕22년 경상남도 밀양부 상서동에서 태어났다. 충숙왕 원년 1314년 문과에 급제하시고 교서랑, 원주판관, 중산대부 병부시랑 등을 거쳐 공민왕 초기에 광록대부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승진하시고, 공민왕13년 1364년 치사하고 궤장을 하사 받았으며, 공민왕 17년 1368년 무신 1월15일 별세하셨다 한다. 추진(秋震)공의 첫째부인은 감찰사 채우(蔡禑)의 따님이었으며, 둘째부인은 추밀원 어사대부 조공(趙共)의 손녀이시다. 시호 충효공(忠孝公)이라 하심은 젊어서 효성을 다하시고 말년에 국토방위와 국력신장에 전심전력 하셨기 내리신 것이라 하였다.
김진공 보다는 4세 아래이며 문과급제 또한 1314년으로 7년이 늦다. 김진공이 1333년 예문관대제학인데 공민왕 즉위가 1352년인 점을 볼 때 추진(秋震)공의 병부상서는 1355년 전후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추삼술저 『추씨900년사』의 「연대별로 본 선조의 행적」에 의하면 추진(秋震)공은 1286년 병술에 출생, 1314년 문과급제, 1366년 병부상서(兵部尙書) 1368년 무신에 별세한 것으로 정리하고 있으나 출생년대와 병부상서 일자가 착오에 기한 듯 생각되어진다. 공민왕 초기에 병부상서가 되신 것으로 각종 문헌에 기록이 있는바, 1366년은 공민왕 15년으로 공민왕의 말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진(秋震)공의 병부상서 연대를 공민왕 초기인 3년 1355년으로 가정할 때 김진공은 63세, 추진(秋震)공은 59세 전후가 될 수 있다.
대제학 김진공의 부탁을 받고 서문(序文)을 지어 붙여보낸 서찰의 내용 중 일부를 살펴보면 『이 사람 제(弟)는 날마다 제생(諸生)들과 함께 앞에 나누어 서서 읍(揖)을 치고 또 읍(揖)을 한 다음 날마다 제생(諸生)들과 함께 강당(講堂)으로 올라가서 고도(古道)를 강론하고 있으나...』라 하였으니 당시 국학강론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데 추진(秋震)공이 국학(國學)에서 강론(講論)한 기록을 현재 문적(文籍)으로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영남문헌록(嶺南文獻錄)에 의하면 추진(秋震)공께서는 문무를 겸전하셨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도 올랐다는 기록이 있는 점을 볼 때 추진(秋震)공 또한 공민왕(恭愍王)때에 국학에서 경서(經書)를 강론하였을 수도 있었다는 점도 설득력이 있다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추진(秋震)공이 김진공에게 「이 사람 제(弟)는」이라 할 수는 있다 하여도, 노당(露堂)공이 김진공에게 「이 사람 제(弟)는」이라 하였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닌가?
따라서 이러한 제반사항을 종합해 볼 때 이는 수정 재고(再考)되어져야 할 부분일 수도 있는 바 정확한 연대의 고찰 등 면밀한 고증이 노력으로 필요한 부분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