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2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 5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7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새, 9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장 1-10절)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 날을 기념하여 우리 교회에서는 부활절 기념 달걀을 드리고 기념 연주회를 하며, 또 맛있는 점심 식사도 제공해 드립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다시 산 사람이 없습니다. 할아버지도 죽었고, 증조 할아버지도 죽었고, 고조 할아버지도 죽었고, 옆집 할아버지도 죽었고 할머니도 죽었습니다. 그들 중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 살펴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잠깐 동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저의 할머니는 중년에 죽어서 혼이 마당을 지나 대문에 나가다가 그만 대문에 받혀서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이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소위 ‘가사 체험(near death experience)’이라고 불리는 현상인데, 이런 체험들이 세계적인 주간지 [타임](Time)에 몇 차례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드물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 죽었었는데, 엘리야가 가서 기도하니 죽었던 아이의 혼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수넴 여인의 아들은 머리가 아파서 죽었는데, 엘리사가 와서 기도하니 아이의 몸이 차차 따뜻해지며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신약 시대에 어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가셔서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니, 죽었던 소녀가 살아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나인성에 한 과부의 아들이 죽어 청년들이 관을 메고 행렬을 지어 가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 죽은 청년을 잡아 일으키니 다시 살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났습니다만, 예수님이 가셔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큰 소리로 부르시니 나사로가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 자신이 장사 지낸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과 다른 사람들의 부활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살아났다가도 다시 죽었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의미에서의 부활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다시 죽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육체로 다시 부활하셔서 다시는 죽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즈음은 무엇이든지 증거를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증거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I. 그 첫째 증거는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무덤이 없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계의 종교지도자들은 다 무덤이 있습니다. 석가는 죽어서 화장되어 그 사리를 중부 인도의 8개 부족에게 보내어 탑에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탑들이 석가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지요. 공자는 죽어서 산동성 공부현 공림에 묻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는 아라비아의 메디나에 묻혀 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그곳을 순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스라엘에 가봐야 빈 무덤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무덤에 계시지 않고 하늘에 계십니다.
천사들이 울고 있는 여자들에게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이 여자들은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따라온 여자들이었습니다. 죽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넣기 위해 이른 새벽에 예수님을 두었던 동굴로 찾아왔습니다. 이런 여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자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것을 보라”(6절). 예수님을 두었던 동굴 안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쫓아가서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달려가 보았습니다. 동굴 안에 들어가 보니 정말로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둘러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감쌌던 수건만 있었습니다. 수건은 차곡차곡 개어서 한쪽 옆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도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무덤 속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무덤에서 예수님을 찾지 마십시오. 예루살렘에서도 찾지 마십시오. 예루살렘에 가보아야 예수님의 무덤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II.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두 번 째 증거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직접적이고 강력한 증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들은 여자들입니다. 갈릴리에서 온 막달아 마리아와 요안나와 다른 마리아 등이었습니다. 이 여자들이 천사들의 말을 듣고 제자들에게 달려갈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서 “평안하뇨?”라고 물었습니다(9절). 이것은 유대인들의 인사말입니다. 그러자 여자들은 나아가서 그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습니다.
다음에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인 다음에는 그의 제자들도 죽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쑥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상처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때 도마는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했으나 도마는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니? 나는 도저히 못 믿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겠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8일 후에 제자들이 다 모여 있었는데 그 때는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전에와 마찬가지로 문을 닫아놓고 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쑥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합리적인 도마, 의심 많은 도마도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고 그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고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도마는 나중에 인도에 가서 선교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많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처음에는 자기 형을 믿지 않았지만,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를 믿었습니다. 자기 형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말하였습니다(약 1:1) 사도 바울도 처음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핍박하였으나,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의 열렬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백여 형제들에게도 일시에 보이셨다고 합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것이 우리에게 실제로 중요합니다. 시간관계상 두 가지만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지상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죽음 너머에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 다라면 우리는 얼마나 슬프고 허무하겠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허탈하고 쓸쓸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늙은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늙은 것도 서러운데 무시하면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으니까 덜 슬퍼요. 오히려 힘이 나고 즐겁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몇 살, 몇 살 하는 것은 사람이 정한 것이고 사람들이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는 오히려 하늘 나라에 오기 몇 년 전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시지 않을까요?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는 태어나기 몇 달 전이다, 몇 주 남았다는 식으로 계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아기가 세상에 태어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을 다 마치고 천국에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몇 살 먹었다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주의 일 잘 하다가 주께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여튼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저 세상에서의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참된 삶의 시작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성도의 죽음은 ‘영생에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결코 쓸쓸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슬프지 않으며 늙어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더 나은 삶에 대한 소망을 줍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물론 어느 정도 만족하는 사람이야 더러 있겠지만 아주 만족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학교에서 교수들이 식사를 하는데 이런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가정 사역을 하시는 어떤 유명한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부부 세미나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의 도중에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시 태어난다면, 현재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손 드십시오” 하니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쪽에 여자 한 분이 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손을 들었는지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분의 대답이 “남자는 이 x이나 저 x이나 다 마찬가지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우리는 모두 씁쓰레하게 웃고 말았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제가 말했습니다. “첫째로, 불가능한 일을 가정해서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괜히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부부싸움 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 부부 세미나를 한다면서 도리어 부부싸움을 붙이는 것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 이것이 중요합니다 - “만일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면(이것은 순전히 가정입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좀 어렵지요? 쉽게 풀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더 나은 삶을 위해, 즉 나보다 더 좋은 신랑, 더 좋은 신부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는 뜻입니다. 사람은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항상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냐는 뜻입니다. 저의 이 말을 잠잠히 듣고 있던 원장님은 그것 참 좋은 대답이라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마도 집에 가서 부인에게 대답할 말이 생겼다는 뜻이겠지요.)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그냥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시 태어나면 다른 남자와 결혼하시오, 다른 여자와 결혼하시오라는 뜻도 아닙니다. 괜히 부부싸움을 시키려고 이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 말의 의도는 - 잘 들으십시오 - 현재와 똑같은 삶이 다시 반복된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삶과 똑같은 삶이 저 세상에서 반복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고통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우리의 삶에 대한 아무런 해답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런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현재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 곧 건강 문제, 남편 문제, 아내 문제, 자녀 문제, 경제적인 문제 등이 다음 세상에서 또 다시 반복된다면, 그런 삶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소위 ‘윤회’란 것은 결코 문제 해결이 될 수 없습니다. 윤회란 있지도 않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문제 해결은 오직 우리 몸이 부활하여 전혀 새로운 삶을 살 때에만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몸이 부활할 때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서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 낳는 일도 다시 없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몸은 다시는 썩지 아니하고 병들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삽니다. 왕자와 공주처럼, 아니 그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참된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아 하나님 앞에 경배 드리러 나오신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고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은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신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전에 늘 죽은 귀신들을 섬겼어요. 죽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 등등, 이런 죽은 조상들에게 제사하고 섬기다보니 살림이 절단 나고 말았습니다. 죽은 사람들 때문에 산 사람들도 다 죽게 되었어요. 이게 다 잘못된 종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죽은 신이 아니라 살아 계신 예수님을믿습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까?
따라서 예수님을 잘 믿으면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기도해 주시고 또 도와주시니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안심입니다. 무슨 일을 당할지라도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예수님이 계시니 걱정이 없습니다. 부활의 소망,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니 즐겁습니다. 현실을 보면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될 때도 있지만, 그러나 눈을 들어 지금도 살아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솟아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 지금도 살아 계신 예수님을 굳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 속에 평안과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예수님을 굳게 믿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비록 현재의 삶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