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채하는 한동안 하늘을 올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는, 미동조차 없는 작은 소녀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긴 머리카락은 불꽃을 받아 주홍빛으로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생기로 반짝이고 있을까, 과연 살아 있을까.
“채하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옥빛 유삼을 입은 노인이 그를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남의원. 일찍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포권을 취하는 그에게 노인은 손을 젓는다.
“불꽃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더 일찍 상하실 터이니 그만 들어가자꾸나.”
“하하하. 여기서 더 나빠진단 말입니까?”
노인은 하얗게 샌 눈썹을 모은다. 하얀 유삼으로 몸을 두른 이 작은 소년은 자신의 눈 상태를 가볍게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노인은 의원으로서, 절대 두고 볼 수 없다는 마음이 일었는지 소년의 팔을 잡아끌었다.
“‘더’ 나빠지냐고 노부에게 물었느냐? 그래. 손채하! 더 나빠질 수 있다. 아무렴. 그리도 어둠속에 갇히고 싶으신 게냐?”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발치가... 희미하게 보인다. 사람의 얼굴도, 세상도, 마치 안개에 낀 것 마냥 희미하고 흐릿하다. 죽을 뻔한 고열에 시달리다 살아난 댓가였다.
소년은 노인에게 끌려가면서 다시 한 번 뒤돌아보았다.
아아, 어쩌면-
어쩌면 저리도 불꽃만은 확실하게 보일까.
희미하고 희미한 세상속에서
어째서 그것만은 확연하고 강렬하게, 마치 그것이 이 세계의 진리인 양- 타오르고 있는 모양새마저 이 눈에 분명히 들어오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당신만이-
당신만이 또렷하게 보이는 것일까-
“그런데 기형님과 창영 사형이 보이지 않는군요. 어디가셨나요?”
묵묵히 깨끗한 물로 소년의 눈을 닦아주던 남조홍이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하지 않자, 소년은 피식 웃어버린다. 노인은 그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송강부에 갔다. 뇌평도... 인가, 하여간 친구분과 술마시기로 약속을 했다며.”
“술....... 말입니까.”
손채하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주인이도 힘든겔테지..... 그렇게나 따르던, 우상으로 여기던 영욱이가 그리 갔으니.......”
남조홍은 약상자를 닫으며 침상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채하를 돌아보았다. 내리깐 눈은 초점없이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흔들리는 깊은 슬픔은 누구보다도 클 것이다.
-- 붉고 부드러운 기운입니다. 형님의 격렬함과는 전혀 다르군요. 그것은 마치 가라앉은 호수와도 같습니다. 그런 기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는 피하도록 하십시오. 화(禍)가 보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말한 뒤 한달도 지나지 않아 손영욱이란 이름은 죽은자의 것이 되었다. 시신조차 찾지 못할 급류에 휘말려, 돌아온 것은 오직 피처럼 붉게 빛나는 작은 보석뿐.
채하는 생각했다.
그저 꿈에서 보았던 것일 뿐이었다.
어디선가...... 참으로 따스하고 아름다우며 부드러운 기운이 느껴졌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손영욱이 있었다. 언제나 호탕한 웃음으로 사람을 즐겁게 해 주던 그..... 하지만 그의 눈 안에는 광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오라는 언제나 황금빛으로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영욱을 향해갔고, 영욱은 붉은 기운에 대항 했지만 점차로, 서서히 그 기운에 잠식되어 갔다.
그것은 길한 징조가 아니었다.
화(禍)였다.
그래서 그리 말했던 것이다.
미래를 보고 사람을 꿰뚫어보는 심안을 가진 자신이.
그러나 그것은 어찌되었던가.
충고로 했던 말을 경고로 들었던 창영. 그리고 마침내 손영욱에게 가서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가끔은.”
막 방문을 열고 나가려던 남조홍이 뒤돌아보았다. 채하는 아까와 다름없이 내리깐 눈을 하고서 입을 조그맣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눈. 뽑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 채하야.”
“어차피 ‘사람’의 눈이 아니잖습니까. 온통 흐리멍텅한, 그래서 돌에 걸려 엎어진 것이 몇 번이며 언덕이나 절벽에서 구른 것이 몇 번이더이까.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 이 세상의 색(色 :색깔)조차 못 보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뽑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 마저 없으면 네가 사랑하는 불꽃도,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그 분’도 볼 수 없게 된다.”
냉소를 담아 피식 웃던 채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남조홍은 바르르 떨기까지 하는 채하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가 방문을 닫았다. 채하의 방에서 멀어져가는 그의 입에서 “업이다... 모든 것은 업이야....”라는, 한탄조의 중얼거림이 공기를 타고 소년에게 전해져 갔다. 소년의 두 눈에서 맑은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채하는 기주인의 방문을 열었다. 붉은 갈빛의 탁자와 침상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주인이 없는 방....
채하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탁자위에 엎드렸다.
‘야속하기도 하시지. 슬픈 것은 형님 뿐만이 아닌데. 송강부에서 백화촌이 얼마나 된다고 채하를 부르지 않으셨단 말인가. 술을 마시고 모두 잊을 수 있다면 고주망태가 되어 헛발에 물에 빠져 죽는 한이 있어도 그리 하였을 것인데. 왜 나에겐......’
쓸쓸함과 밀려오는 실망감. 채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는 탁자에 엎드려 침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때, 문득 채하의 눈앞에 기주인이 ‘나타났다.’
‘기사형?’
채하는 흠칫 놀랐지만 마치 가위에 눌린 듯 엎드린 자세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어느새 온 세상은 까맣게 암흑에 둘러싸여 버리고 흐릿한 인영을 한 기주인과 자신만이 남아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고 보이기만 하는 침묵과 정적의 세계. 채하의 눈이 점점 커졌다.
기주인은 뭔가 바쁘게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가 뭐라 입을 움직이자 창영이 흑색 무복을 입고 나타났다. 그리곤 둘이서 뭐라 말을 주고 받더니 기주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버렸다. 눈에서는 살기가 흘러 넘쳤다. 잠시 후, 그가 쾅, 하고 채하의 바로 눈앞을 내려쳤다. 탁자가 그르릉,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주인이 입을 움직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무슨 일인데 저리 노해서......
친우와 술을 나누러 간다는 사람이 왜.......
창영의 표정도 어둡다. 그가 조그맣게 재차 뭐라 말하자 기주인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나왔다.
-- ........ 죽여......!!!
채하의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죽여?
누굴?
-- ......... 전....... 죽여.....!!!
누굴 죽이란 말인거야? 형님, 누굴 죽이시려는 겁니까!
움직일 수 없는 채하의 마음 저 편에서 거대한 외침이 터져나갔다.
기주인과 창영의 모습은 마치 필름을 되돌리듯 그 부분만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기주인이 창영에게 ‘누구’를 죽이라는 부분만이.
채하는 점점 정신을 집중했다. 눈은 기주인의 입술을 향하고 귀는 그의 목소리를 향했다.
누굴 죽이라는 겁니까!!!
-- 개봉부 전조를 죽여라!!!!
시원한 바람이 그의 귓전을 훑었다.
꽉 막혀서,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 같은 답답함에서 풀린 것이다. 그러나 채하는 그 순간 가슴에 비수가 꽂힌 듯 아련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개봉부 전조라면 당시 손영욱의 사건을 맡았던 그 사람이었다. 기주인이 지금- 그를 죽이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기주인과 창영의 모습이 반복되었다.
살기를 가득 담은 기주인의 눈이 창영에게 향하고, 창영역시 그의 일갈을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 개봉부 전조를 죽여라!!!!
“.....주....... 장...... 소장주!!”
“헉?”
손채하가 화들짝 몸을 일으키자 그를 흔들어 깨우던 하녀가 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한걸음 물러섰다. 채하는 허억 허억 몰아쉬는 숨을 고르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내가..... 깜빡..... 아......”
심안.
채하는 식은땀으로 흥건한 손을 들어 옷섶을 꽉 쥐었다. 그의 초승달 같은 눈썹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소장주! 아니, 열흘은 족히 걸리실 거라더니 어떻게-”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손채하를 보고, 장원의 한 청년이 놀라 물었다. 그러나 채하는 자신이 짚은 지팡이를 휘릭휘릭 돌리며 되물었다. 지팡이 손잡이에 달린 방울이 딸가랑 딸가랑 울렸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청년은 채하의 뒤에 서서 무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두 사내를 한 번 힐끗 보다 채하에게 눈을 돌렸다. 그의 눈엔 초점이 없었고 흐릿하긴 했지만- 무엇인가 자신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심안(心眼).
청년은 이 작은 소년에겐 숨겨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 대사형께서 오셨다 가셨습니다.”
..
22. 북협 구양춘과 소협 애호
“대사형이라면.....!”
“창영 사형께서......”
손채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형인 영욱이 죽은 뒤로 백화장엔 얼씬도 하지 않고, 그저 기주인의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기만 한 창영과, 그의 수하들로 구성된 흑룡단(黑龍團)이었다. 그런데.... 그가 백화장에 다녀갔다고?
“무슨 일로?”
“그게... 저, 왠 낭자를 한 분 모셔왔더군요. 중요한 손님이라고 하셔서.....”
채하는 ‘낭자’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창영과 기주인은 분명 ‘전조’를 노리고 송강부로 왔다. 그런데 갑자기 ‘낭자’라니....
청년은 생각에 잠긴 채 말이 없는 채하를 흘끗흘끗 보며 불안한지 손을 매만졌다. 그의 수하로 보이는 두 사내역시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않아, 청년은 안절부절 못하며 채하의 안색만을 살폈다. 곧, 채하가 고개를 들었다.
“안내 해 주시겠습니까?”
몸이.... 무척이나 나른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향기.....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전조는 손끝을 움직여 보았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가위에 눌렸을 때와 비슷한 느낌. 그는 곧이어 나타날 흉측한 손영욱의 몰골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반 시진이 지나도록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들려오던 전음 또한 없었다. 전조는 다시 한 번 손 끝을 움직여 보았다. 아까보다는 나앗으나, 역시나 둔한 감각이었다.
“마비.... 된 건가.....”
마지막 기억은 창영이 무언가를 얼굴에 뿌렸다는 것.
“여긴 어디지.......”
전조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탁자와 의자 두개, 그리고 책장과 벽에 걸어놓은 낡은 족자가 보였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방. 탁자 위에 있는 향로에서 부드러운 향이 태워지고 있었다.
-- 원망하려거든 전조를 원망하시오.
-- 초청장을 보내마.
손영욱.... 그리고 흑의 복면인....
분명히 관련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전조’. 분명했다. 아마도 함공도나, 혼약자로 알려진 ‘전소향’을 습격하면 그가 나타날 줄 알고 그랬으리라. 벌려진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전조’는 없는데....
그들은 없는 사람을 찾고 있으니-
“...... 소장주!”
“...... 안돼 옵니다....! 소장....!!”
웅성웅성...
문밖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얼핏 ‘소장주’란 말이 들리자, 전조는 어느 장원에 자신이 와 있음을 짐작했다. 또한, 만약 손영욱과 관련이 되었다면 하릉현의 장원과 백화촌의 백화장 둘 중 하나일 것도.
“시끄럽구나! 모두 물러가라!”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아직 고음을 간직한 목소리가 노기를 담고 온 장원을 울리자 곧 타다다닥 하고 발걸음 빠르게 사람들이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이 삐걱 열리더니 백의 유삼을 입은 한 소년이 지팡이를 짚고 들어섰다. 전조는 대번 그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손영욱에게 어린 남동생이 있음은, 하릉현 사건을 조사하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손채하!
손영욱이 죽고 백화장의 어린 장주가 된 소년.
채하는 앞을 더듬으며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의자에 앉았다. 초점없는 눈이 침상에 누운 전조에게 향했다.
“다시 인사드리지요, 백화장의 소장주, 손채하- 개봉부 전대인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조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포권을 취하는 채하를 바라보는 그의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머리가 마치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백옥당은 송강부 근처를 마구 뒤지고 있었다. 객잔에 머물고 있는 여행객이나, 강호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죄다 붙잡고 자신이 본 것과 같은 검법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다녔지만 소득이 없었다. 슬슬 짜증이 일기 시작한 백옥당은 한 주루 이층에서 쉬기도 할 겸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제길...... 그런 검법은 한 번 보면 못 잊을텐데. 왜 아는 사람이 없지?”
그 때, 아래층이 갑자기 소란스러워 졌다. 백옥당이 내려다보니 검을 든 여러 사내들이 한 소년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죽립을 쓴 소년은 등 뒤에 칼을 둘러매고 있었는데 어째 뒷 모습이 눈에 익었다. 백옥당은 술잔을 내려놓고 난간 가까이로 가 아래를 주시했다.
“네 놈! 우리가 놓칠 줄 알았더냐?”
“이전의 수모를 갚아주마!”
와아- 하고 사내들이 달려들며 검날이 사방에서 지쳐들어왔다. 그러나 소년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몸을 숙여 가볍게 피하더니 위로 뛰어올라 사내들의 머리위로 넘어갔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게 감히 우릴 무시해!!”
얼굴이 시뻘게진 사내들이 재차 소년을 공격하러 달려갔다. 그러나 그들의 검날은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길다란 검집에 가로막혔다.
소년과 같은 죽립을 쓴 중년의 사내. 그는 싱긋 웃으며 그들의 검날을 밀어냈다. 사내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술 좀 사려갔다 왔더니 그 새 소란이냐.”
“또 술입니까?”
“음.(;;) 그런데 이들은 누구냐?”
“얼렁뚱땅 다른 데로 말 돌리지 마세요, 의부님. 저 사람들 일전에 우리 짐을 털러했던 산적 패거리들 이예요.”
“오호~”
중년 사내가 재미있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웃자 사내들이 발끈했다.
“이전처럼 호락호락 하지는 않을 것이다! 타앗!!”
소년이 한걸음 뒤로 뛰었다. 그와 동시에 중년 사내는 죽립을 벗어 하늘로 던져 올리곤 곧장 사내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챙챙챙챙!
섬광과 같은 검날이 순식간에 사내들의 손을 쓸고 지나가자 몇몇 사내들이 자신의 손을 잡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내들이 들고 있던 검은 어느새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놈!”
중년사내의 뒤를 치고 들어오는 거한은 그래도 무공 깨나 했었는지 중년사내와 몇 초식이나 주고 받았다. 하지만 중년사내와 달리 거한의 얼굴은 점점 벌겋게 물들어 갔고, 잠시 후 몸을 빙그르 돌린 중년 사내는 거한이 검을 내지른 틈을 타 그의 품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주루 난간에서 그들의 싸움을 보고 있던 백옥당의 눈이 커졌다.
두 손으로 검을 잡고 크게 휘두르는 동작.
백옥당은 검을 집어들었다.
챙그라랑.....
거한은 두동강 난 자신의 검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그리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어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동안 중년 사내는 하늘에서 팔랑팔랑 떨어져 내리는 죽립을 탁하고 받아내 한손에 들었다.
제대로 면도를 하지 않았는지 수염이 삐죽삐죽 돋아있는 서글서글한 얼굴이었다. 그는 장난스럽게 빙긋 웃으며 그를 기다리는 듯 한쪽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소년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곧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왠 하얀 옷을 입은 인영이 떨어져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갑자기 검을 자신의 목에다 들이대었으니.
“...... 누군가 했더니 구양형님 이셨군요.”
“오랜만이군, 금모서 백대협.”
구양춘은 자기 목에 들이대어진 검날을 슬쩍 밀어내며 웃었다. 하지만 백옥당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구양춘의 파란 눈에서 장난기가 사라지고 차갑게 굳어갔다.
“무슨 짓이지?”
“....... 형님 이었습니까?”
“엉?”
“푸른 눈...... 그리고 그 검법..... 형님 이셨습니까!!”
구양춘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게야?”
“말화촌 쌍협의 장원을 습격하고, 함공도를 습격하고, 전낭자를 납치해 간 사람이 형님 이셨냐고 묻는 겁니다!”
백옥당이 거칠게 외쳤다. 그의 눈에서 언뜻 살기마저 비쳤지만 구양춘은 영문을 몰라 소년과 백옥당을 번갈아 바라 볼 뿐이었다. 그가 소년에게 구조 신호같은 눈빛을 보내자 소년이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백대협. 의부님은 오늘 송강부에 도착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의부님은 아니예요.”
백옥당은 죽립을 벗는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얼굴에 동그란 눈을 가진 귀엽게 생긴 소년.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그가 바로 북협 구양춘의 양아들이자, 칠협 중 하나인 소협, 애호였다.
“어제도 술에 취해서 곤드레 만드레 객잔이 떠나가라 코를 골다가 밖으로 쫓겨났었죠.”
“그럼.......”
구양춘은 어깨를 으쓱하며 백옥당을 마주봤다. 옥당은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래놓고는 오늘 또 술을 드시려 하는군요.”
“앗?”
놀란 구양춘이 두 손을 들어보았다. 사내들을 상대하느라 바닥에 잠시 내려놨던 술동이를 애호가 슥 들어올리고 있었다. 구양춘의 얼굴에 식은땀이 한방울 흘러내렸다.
“애, 애호야..... 이 애비의 ‘사랑’을 어찌하진 않겠지.....? 응?”
“뭐, 술 자시지 않고 그냥 객잔에 되판다면 생각을 달리해 보겠습니다만.”
“에에? 이미 돈 다 주고 산걸 어떻게 되팔아?”
애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구양춘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다 아직 검을 거두지 않은 백옥당에게 말했다.
전조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소년이 심안의 소유자란 것을 안 순간부터 거짓으로 자신의 정체를 꾸며봤자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미래와 사람을 꿰뚫어 보는 심안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던 터였다.
게다가 이미 자신의 정체를 정확하게 짚어내지 않았는가.
“우선....... 제 형과 사형들의 무례를 대신 사과드립니다.”
뜻하지 않게 채하의 입에서 사과의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리곤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전조는 당황해서 얼른 소년의 몸을 일으켰다.
“손공자. 이러지 마시오.”
“아니오. 제 사형들의 생각은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압니다. 전대인의 모습이 지금과 같다면 아마 사형들은 ‘전조를 끌어내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리고 ‘전조’와 연관이 있는 당신을 납치해 온 것.... 아닙니까?”
“....... 내가 밉지 않소?”
“네?”
채하는 갑작스런 전조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공자의 형님을 죽인 사람이오.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사람이오. 사형들과 마찬가지로, 공자역시 내가 밉지 않소?”
“....... 왜....... 밉지 않겠습니까. 영욱 형님은 단 하나뿐인 피를 나눈 형제이고,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저를 애지중지 보살펴 주셨지요. 어떤 이유로든 당신은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간 사람이니까요.”
“.......”
“허나, 그것과 이것은 다릅니다. 형님은 분명 잘못을 저질렀기에 응당 대가를 받아야 했을 따름이지요. 그것이 가혹한 죽음이었을 뿐.”
채하가 주변을 더듬어 의자에 찾았다. 전조는 그의 몸을 조심스레 의자에 앉혀주었다.
“이 눈, 남들이 다 보는 꽃이며 나비며 하늘과 바다를 제대로 볼 수 없지만 다른 세계를 볼 수는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미래라고 하더군요. 어느날 붉고 부드러운 기운이 형님을 감싸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불안한 마음에 충고를 했지요. 하지만 형님은 제 말을 무시했어요. 그래서 결국.....”
채하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전조를 올려다보았다.
“전대인. 혹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화들짝 놀란 전조가 채하의 어깨를 잡았다.
“손공자?”
“전대인의 겉모습이 바뀐 것은 어떤 음기가 것이 몸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 아닙니까?”
“맞소. 혹시 음화단이라고 아시오? 우연한 실수로 그것을 복용하여 이렇게 된 것이오. 허면.... 공자에게 해약이 있단 말이오?”
채하가 고개를 저었다.
전조는 순간, 조란조혜가 음화단의 해약은 태군만이 만들 수 있다고 한 말이 기억났다. 실망감에 한숨을 내쉬려는 그에게 다시 채하의 한마디가 희망을 주었다.
“음화단의 해약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하게 전대인의 몸을 돌려놓을 방법이 있습니다.”
“무슨......”
“저에게 금양분이라고 하는, 음화단에 비례해 양기가 강한 비약이 있지요. 그것이라면 분명 원래 모습으로 돌아 갈 수 있을 겁니다.”
“....... 그걸 나에게 내 주겠다는 것이오?”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
“사형들이, 형님과 같이 죄를 저지르고 혹여나 주변의 누군가 죄 없는 생명을 앗지 않도록 막아주십시오.”
채하는 품속으로 손을 넣더니 금색의 주머니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주홍빛으로 빛나는 가루가 사라락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전조는 채하가 펼친 금양분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마치 깃털을 만지는 것 같은 부드러움이 손끝에서 전해져 왔다. 전조는 한순간 손채하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죽이기 위한 하나의 연극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채하의 눈을 보는 순간 모두 사라졌다. 비록 초점은 없지만 맑은 그것은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전조는 금양분이 든 천을 손에 들어올리며 말했다.
“어차피..... ‘전조’가 나타나면 공자의 사형들은 모두 그에 집중 될 것이오. 애꿎은 생명을 빼앗을 틈도 없겠지.......”
전조는 금양분을 입안으로 털어 넣고 채하가 건네주는 물을 받아 마셨다. 곧, 눈앞이 하얗게 흐려지면서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허어....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구양춘은 자신의 턱을 손가락으로 슬슬 쓰다듬었다. 그의 자색빛 눈썹이 미간으로 모아졌다. 소협 애호역시 가느다란 눈썹을 모으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가끔 술동이로 시선을 보내는 자신의 의부를 노려봐 주면서.
“정장원에 이어, 함공도까지. 아주 대범한 놈들이로군. 무엇 때문에 남협을 그렇게 노리는거지?”
“지금 그 이유를 쌍협이 알아보러 갔습니다. 이제 곧 소식이 있겠지요. 그런데 구양 형님. 대체 그 검법은 어디서 배운 것입니까?”
백옥당이 묻자 구양춘이 빙긋이 웃었다.
“배웠다기 보다는 훔쳐보고 익힌 게 맞겠지.”
“무슨?”
“지인(知人)이 있어서 말이네. 그 사람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그 사람의 아들이 연습하는 것을 보았지. 특이하길래 따라해 봤는데 꽤 쓸만하더군.”
“구양형님! 어디서 보았단......!”
다급하게 묻는 백옥당을 보며 구양춘은 여전히 능글맞게 씨익하고 웃었다.
“백화촌 백화장.”
“백화장?”
이히이이이잉~~~!!!
갑작스레 들려온 말 울음소리. 구양춘과 애호, 백옥당의 시선이 모두 주루 입구로 향했다. 잠시 후 땀에 흠뻑 절은 똑같은 얼굴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백옥당을 발견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군요. 구양대협.”
“그쪽도, 정이관인. 그런데 뭔가 단서라도 발견했소? 엄청 다급해 보이는군.”
조혜가 놀란 눈으로 구양춘을 쳐다보다 백옥당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 말했소. 그리고 이쪽도 소득이 있으니까.”
“그럼 가면서 이야기 합시다. 한시가 급하니까요.”
“어디로?”
“백화촌 백화장!”
구양춘과 백옥당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들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져갔다.
“우리도 막 그리 갈 참이었네. 그럼 가 볼까!”
구양춘과 애호가 일어섰다. 조란은 당장 몇 필의 말을 더 구해왔고, 그들은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아 백화장으로 향했다. 쌍협은 달리면서, 전조가 이전에 맡은 사건이 백화장주 ‘손영욱’과 관련 있었다는 사실을 간단히 말해주었다. 백옥당은 “악당이 잘못을 해서 지가 죽을 걸 왜 이제와서 난리법썩이야!”라고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지만 구양춘의 얼굴에선 서서히 장난스런 웃음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애호는 그런 의부를 잠시 바라보다 말 옆구리를 차 속도를 높였다.
송강부 뇌평도의 집. 그곳 후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기주인은 하늘위에 날고 있는 전서구를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이내 새가 기주인의 팔 위에 앉았고, 그는 전서구의 발목에 묶인 비합전서를 뽑아 펼쳤다.
[소장주 귀환(小場主 歸還)]
기주인의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비합전서를 두 손으로 꾸기며 몸을 거칠게 돌렸다.
“창영! 창영!”
“기대인?”
검은 무복을 입고, 후원에서 부하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던 창영은 다급한 기주인의 목소리에 얼른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기주인은 그를 보더니 비합전서를 그에게 내밀었고, 글귀를 읽은 창영의 눈이 당황감으로 커졌다.
“백화장으로 가야겠다!”
기주인은 냉큼 뇌평도의 서재로 달려갔다. 뇌평도는 갑작스레 돌아가 봐야겠다는 기주인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집에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얼른 그를 보내주었다. 기주인은 창영과 함께 말을 타고 곧장 백화장으로 향했다.
..
24. 집결!
전조는 깨끗한 남색의 유삼으로 갈아입었다. 그 옆엔 검도 한 자루 놓여 있었다. 거궐만큼 명검은 아니었지만 칼날이 깨끗하고 고른 것이 이름깨나 있음직한 장인의 것이었다.
이것들은 전조가 깨어난 후 발견 한 것이었다. 금양분을 먹고 그대로 정신을 잃듯 잠들어 버린 것이다. 창 너머를 보니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깨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탁자 위에 곱게 놓인 남색의 유삼과 검이 있었다.
그리고.... 몸은....
기채하가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전과 다름없는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동안 낮은 키에서 발치를 바라봤음인가. 마치 발돋움을 해서 발치를 보는 것처럼 바닥이 멀어보였다. 몸의 움직임은 전소향일적보다 부드럽지 못했지만 확실히 이쪽이 훨씬 익숙했다.
‘좋아!’
전조는 주먹을 꾹 쥐어 자신을 확인 한 뒤 검을 챙겨들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채하가 다녀가서인지 방문앞을 지키고 있던 남자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천천히 어두운 복도로 나아갔다.
조혜는 야트막한 산 하나를 다 오르자 눈앞에 펼쳐지는 절경에 감탄했다. 논과 밭이 있는 작은 마을인 백화촌 중심에서 벗어나 얕은 산들에 둘러싸여 있는 장원. 게다가 봄날에 맞추어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 있었다. 말 그대로 백화만발. 어두워지는 하늘과 그림자 속에서 그 꽃들만은 불빛처럼 빛났다.
“이제 어쩌죠? 구양형님. 저번에 말씀하신 지인을 불러보면....”
조란의 말에 구양춘이 고개를 저었다.
“그 분은 이미 백화장에 계시지 않아. 하지만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몇가지 질문에 대답정돈 해 주겠지.”
쌍협과 북협, 소협 애호와 백옥당은 천천히 백화장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 때였다. 다급하게 말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두두두두두두...... 일행은 모두 근처 수풀쪽으로 몸을 날렸다. 좁은 길이었기에 그대로 있으면 말에 치이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두두두두두.....
두 필의 말이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장원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아니? 저 자는?“
조란이 조혜의 말에 말에서 내리는 두 사람을 살폈다. 조란의 눈도 둥그렇게 커졌다.
“형님! 저 자는 뇌대인의 친우라 했던 기주인이 아닙니까? 왜 백화장으로 가는거죠?”
“모르지. 하지만 그 옆의 사람도 우리가 아는 사람이군. 그 때 기주인의 사람이라며 우리에게 보여줬던 그 무리 기억나나, 동생? 그 중에 있던 한 사람이야. 얼굴은 모르지만 기가 날카로워서 기억하고 있지.”
“어이, 정대관인- 그게 무슨-”
“쉿!”
백옥당이 물어오자 조란은 얼른 손가락을 세워 입에 대었다. 그들은 수풀과 나무에 몸을 숨기고 백화장의 동태를 살폈다.
창영이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문지기가 문을 빼꼼 열더니 창영의 얼굴을 확인하고 놀라며 문을 열었다.
문지기는 다급해하는 기주인과 달리 굉장히 반가운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한편, 수풀에 숨어 그들을 살펴보던 백옥당과 쌍협은 그 말을 듣고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형님. 들으셨어요? ‘사형’ 이랍니다!”
“기주인..... 이라는 저 자, 혹시 그 손영욱이란 인간과 관계가 있는 것 아니오?”
백옥당의 물음에 조란은 이때까지의 일을 짚어 보았다.
전조가 정장원에 오고, 음화단에 전소향이 되었다. 며칠새 말화촌 일대에 소문이 퍼지고, 전조의 혼약자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오갔다. 백옥당이 다녀가고, 습격이 있고, 행방불명된 전소향을 찾아주겠다며 기주인이 나타났다...... 함공도로 가려 할 때 자신들을 잡은 건 뇌평도였지만 그 옆에도 기주인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그 사내!
“설마?”
조란이 고개를 퍼뜩 들려는 찰나, 옆 수풀로 몸을 날렸던 구양춘과 애호가 옆으로 다가왔다. 구양춘은 어두운 표정으로 세 사람에게 물었다.
“자네들, 저 자를 아나?”
“누구 말씀입니까?”
“아까, 그 검은 무복의 사내 말이네.”
조란과 조혜가 고개를 끄덕이자 구양춘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검집을 꽉 움켜쥐며 백화장을 올려보았다.
“창영...... 백대협, 자네가 그렇게나 궁금해 하던 그 ‘검법’의 원래 주인이네.”
채하는 탁탁탁탁 하고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곧, 쾅하고 방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기주인이 들어섰다. 채하는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기주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흥분으로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기주인이 담담하게 앉아 있는 채하의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채하. 일찍 돌아왔군.”
“그리 되었습니다.”
기주인은 긴 속눈썹을 내리까는 채하를 향해 뭐라 말하려고 막 입을 벌리던 차였다. 창영이 서재로 들어서며 채하에게 곧장 질문했다.
“사제. 내가 데려온 낭자는 어디 있나?”
기주인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깜짝 놀라 창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창영은 파란 눈으로 채하를 쏘아볼 뿐, 대답을 기다리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만 두십시오.”
한숨같이 흘러나온 대답. 기주인의 눈에서 불이 일었다. 그는 채하의 손에서 지팡이를 뺏들며 외쳤다.
“그만 두라고? 네가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네 형이었다! 내 형이 아니라! 네 친형이 아니더냐! 시신도 찾지 못하고 그리 보냈다! 분하지도 않느냐!”
“인과응보(因果應報)입니다!”
얌전하고 침착한 채하의 입에서 비명과 같은 외침이 터져나오자 기주인은 주춤, 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여인들을 납치해서 서하에 팔았습니다! 그 와중에 여러 사람을 죽이고! 혹은 형님이 죽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사주하였습니다! 형님을 원망하며 죽어간 원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무엇이 억울하여 다시 되갚겠다 하십니까!”
기주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가슴이 답답한 듯 하, 하, 하고 몇 번 헛웃음을 토해내었다. 창영이 놀라 그의 어깨를 잡았다. 기주인이 그를 바라보자 창영은 고개를 저었고, 기주인은 지팡이를 한쪽에 내던지며 거칠게 몸을 돌렸다.
“채하! 네가 제 아무리 미래와 사람을 꿰뚫어보는 심안(心眼)이라고 한다지만, 세상엔 네가 모르는 일도 있기 마련이다!”
기주인이 뛰쳐나가자 창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바닥에 떠러진 지팡이를 주워 채하의 손에 쥐어주었다. 채하는 기주인의 말이 무슨 뜻이냐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사제. 영욱이 왜 인신매매 따위를 했는지, 이유를 알고 있나?”
“돈을...... 교단에 돈을 보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창영이 큰 손으로 채하의 손등을 탁탁하고 부드럽게 두드렸다.
“그래..... 그랬었지.”
힘없는 목소리.
채하는 창영이 나간 후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지팡이를 쥐고 있는 손이 떨려 그 끝에 매달린 방울에서 딸가랑, 딸가랑 소리가 울렸다.
..
25. 전조 등장
쾅! 쾅! 쾅! 쾅!
백화장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한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무슨 일이냐!”
“일전에 오셨던 북협과 여러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창영은 기주인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안색이 바뀌어 얼른 장원 마당쪽으로 뛰어갔다.
어지러운 복도를 헤매던 전조는 사람들이 다가오자 몸을 숨겼다.
“어서!”
“대체 무슨 일이래?”
“북협과 다른 놈들이 장원에 들어왔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전조는 백화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그들의 뒤를 쫓으며 생각했다.
‘북협.... 구양춘? 구양형님이 무슨 일로?’
창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옆에 있는 기주인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곧 평정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앞에서 검을 뽑아들고 둥글게 등을 맞대고 선 일행. 그들은 백화장 장정들을 견재하며 창영과 기주인을 쏘아보고 있었다.
북협 구양춘.
그의 양아들인 소협 애호.
쌍협 정조란, 정조혜
그리고 함공도 오의 중 막내 금모서 백옥당!
실로 엄청난 구성이었다.
만약 이들과 검으로 맞붙는다면 창영이라해도, 또는 흑룡단의 단주인 기주인이라 하더라도 승산이 없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 그것을 가장 먼저 끊은 것은 북협 구양춘이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창영.”
“.......”
“자당과 돌아간 줄 알았는데, 백화장에 있을 줄이야. 뜻밖이네.”
“무슨 일로 찾아 오셨습니까?”
구양춘의 입가에 조소가 걸린다. 그는 검을 쥐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 무슨 일이냐고 나에게 묻는 것인가? 그럼 내 한 가지 보여 줄 것이 있네.”
순식간에 앞으로 파고 들어오는 구양춘. 놀란 장정들이 검을 들고 와아아 달려들었다. 그러나 구양춘의 적수가 될 수는 없는 법. 구양춘은 장정들의 검을 가볍게 받아넘기며 몇 명은 주먹과 발길질로 넘겨버렸다. 그리곤 몇 번 검을 막아내더니 장정들 사이에 빈틈이 보이는 순간, 두 손으로 검을 잡았다.
“하아앗!”
크게 검이 도는 절기(絶奇). 검압이 멀리 떨어져있는 기주인과 창영까지 밀어붙이는 것 같았다. 창영은 눈을 크게 떴다. 일격필살, 온 힘으로 내려치는 검법. 백화장의 장정들도 놀라 머뭇거리다 구양춘의 검에 모두 검을 놓치고 말았다.
구양춘은 품새를 다시 가다듬으며 검을 창영쪽으로 향했다.
“재미있었나?”
“....... 어디서 그것을.......”
“미안하네. 내 일전에 자당과 만나 뵈었을 때 자네가 검술을 연마하는 것을 보곤 우연히 따라하며 익혀버렸네. 그런데 여기 있는 금모서 백대협이 내 검법을 보고 놀라지 뭔가. 쌍협은 이것을 정장군댁에서, 백대협은 함공도에서 봤다고 하더군. 이게 어찌된 일인지?”
한동안 구양춘과 창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만 보았다. 마침내 창영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 나오고 그는 뒷 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챠라랑 소리를 내며 긴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쌍협과 백옥당은 그것이 눈에 익었다. 분명했다.
“전낭자는 어디 있소!”
백옥당이 외쳤다. 창영은 싸늘한 눈빛을 그에게 던졌다. 백옥당은 순간 식은땀이 등 뒤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차갑고, 살기를 담은 잔잔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 이전에 그를 상대할 때가 생각나서 검 끝마저 바르르 떨렸다.
“여기 없소."
대답한 것은 기주인 이었다. 그가 앞으로 나서자 조혜가 뻑 소리를 질렀다.
“야! 이 허연놈아! 네가 감히 우릴 우롱해? 뇌평도도 너와 한패냐!!”
“뇌형까지 끌어들이지 마시오! 그는 아무 상관도 없소!!”
“니...!”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가 뒤져보면 되는 일이지!”
백옥당은 그렇게 말하며 일행을 둘러싸고 있는 장정들을 향해 검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들려온 음성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전낭자는 여기 없소.”
남색의 유삼자락이 흔들렸다. 노을의 붉은 빛과 대조되어 더욱 눈에 띄었다. 손에는 장검을 들고 장원 안쪽에서부터 걸어 나오고 있는 인영.... 백옥당의 안색이 밝아졌다.
“전조!”
분명 남협이자 개봉부 4품 호위인 전조였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입가, 즐겨입는 남색의 유삼으로 몸을 감싼 그는 진정 전조였다.
조란과 조혜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게 어찌된 노릇이지? 전형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니! 혹시 전형의 모습으로 변장한 적이 아닐까?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백옥당과 달리 쌍협은 은근히 경계의 빛을 내뿜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전조...... 네 놈......!”
기주인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전낭자는 내가 돌려보냈소. 듣자하니 날 많이 찾으신 모양이오.”
“찾았지. 손형이 원한! 내가 갚겠다!”
기주인의 검이 순식간에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전조는 얼른 그의 일격을 받아내며 한 걸음 뒤로 뛰었다.
채앵! 채앵!
검날에서 불꽃이 튀었다. 전조는 기주인의 검을 막으며 다시 뒤로 뛰었다. 허나 기주인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며 검을 두 손으로 그러쥐었다. 이전에 창영이 썼던 것과 같은 수법. 전조는 놀라 검으로 앞을 막았다.
카앙!
날카로운 소리가 나면서 검날이 날아갔다. 전조는 두동강이 난 검을 보며 당황하다 짓쳐들어오는 기주인의 검을 피해 몸을 숙이며 빠져나갔다. 그는 기주인과 어느 정도 간격을 벌려 놓았지만 자루와 검날 반쪽만 가지고는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알고 잇었다.
기주인의 검은 빨랐다. 속도로 말하자면 쾌검(快劍)을 쓰는 조혜와 맞먹었다. 완력도 자신과 비등하거나 그 이상. 그리고 몸놀림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흑룡단...... 비밀리에 움직이는 암살 등을 맡은 집단. 그 흑룡단의 단주인 기주인이다. 한낱 서생은 아니었던 것이다.
전조는 낭패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서서히 기주인의 검이 올라가고 있었다.
“전조오-!”
부우웅-
귓전을 가르는 바람소리. 전조는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알고 몸을 돌려 그것을 잡아챘다.
검.
거궐!
전조는 그것이 날아온 방향을 보았다.
장정들과 얽혀 검을 휘두르고 있는 쌍협과 북협, 애호. 그리고 ...... 하얀 옷깃이 보였다.
거궐은 함공도에서 창영에게 납치되어 오는 중에 떨어뜨린 것.
백옥당은 전조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고 그 와중에서도 빙긋 웃어주었다.
“새 검을 잡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 그럴까?”
한편, 창영과 맞붙은 것은 구양춘이었다.
끼이끼이익....
마주 댄 검날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일었다. 바로 코앞에서 두 사람은 마주보며 검날을 멈춘 것이다.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두 사람 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가고 있었다.
“인신매매라. 손영욱, 그 바보 녀석이 생각해 낼만한 방법이구만.”
창영이 움찔했다.
“........!”
“하지만 잘못된 방법이었어.”
카앙!
검날에서 불이 일고 두 사람이 뒤로 뛰었다. 간격을 벌리고 다시금 대치 상황. 어느새 주변 장정들은 거의 다 바닥을 구르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쌍협과 애호의 검이 창영을 향했다. 구양춘과 격돌중이니 끼어들진 않겠지만 그들은 여차하면 검날을 들이댈 것이다. 창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만~! 그만 하세요!!”
창영과 구양춘의 고개가 돌아갔다. 장원에서 뛰쳐나오고 있는 소년. 그는 늘 짚던 지팡이도 어디론가 던져버리고 밖으로 뛰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앞도 못 보는 소년이 고르지 못한 마당을 지팡이도 없이 뛰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는 바로 앞에 있는 몇 칸 되지 않는 계단을 보지 못하고 헛발을 딛었다.
“채하!”
데구르르 구르는 소년을 향해 창영이 뛰어갔다. 구양춘 역시 검을 거두었다.
소년을 일으킨 창영은 몸 여기저기에 묻은 모래를 털어주었다. 채하는 창영의 등 뒤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만! 그만 하세요! 이제 되었어요! 기형님도! 창영사형도 그만해요!”
채하는 울고 있었다.
무서웠다.
기주인과 창영이 그렇게 나가고 다시 심안(心眼)으로 미래가 보였다.
검고, 무서운- 그리고 무척이나 밝은 무언가가 그들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놀란 채하는 장원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고, 검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나자 지팡이고 뭐고 챙기지도 못하고 무조건 달려나온 것이다.
“사제......”
채하의 등장에 쌍협과 애호도 검을 거두었다. 그들은 진정된 분위기 속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득, 뭔가 머릿수가 모자르다는 생각이.......
“백형과 전형은요? 그 허연 놈은 어디 갔어요?”
조혜. 그는 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두리 살폈다.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린 북협과 애호도 세 사람을 찾았지만 그들은 장원내에 없었다.
“구양대협.”
창영은 구양춘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구양춘은 자신을 부른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잘못된 방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허나...... 그런 방법 외엔....... 다른 게 없더군요.”
검은 인영이 훌쩍 뛰어올랐다. 채하도 놀랐다. 창영이 순식간에 뛰어올라 그들의 범위에서 벗어난 것이다. 놀란 구양춘이 다시 검을 빼들었지만 채하가 그를 붙잡는 바람에 쫓아갈 수는 없었다.
창영은 잠시 그런 채하와 구양춘을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장원 밖으로 뛰어나갔다.
“저희가 쫓아가 보겠습니다!”
한 발 늦긴 했지만 쌍협이 얼른 검을 추스르고 창영의 뒤를 쫓았다. 구양춘은 자신의 허리를 붙잡고 있는 채하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보는 애호의 눈 역시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
26. 빙혈장
“새 검을 잡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 그럴까?”
카차앙!
검날이 다시 부딪혔다. 그러나 이번엔 아까와 달랐다. 전조의 손에 익은 거궐과, 그런 검은 이미 차원이 달랐다.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초식들. 기주인은 숨을 들이켜며 검날을 밀어쳤다.
“쳇!”
갑자기 기주인이 뛰어올랐다. 그는 쉽게 장원의 담장까지 올라섰다. 그리곤 잔인한 미소를 만면에 띄우며 전조에게 외쳤다.
“어디, 날 잡을 수 있으면 잡아보거라!”
“서라!”
전조 역시 뛰어올랐다. 그런데 그런 그의 옆으로 같이 뛰어 오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백형?”
“저 자식 검 쓰는 거 보니까 너 혼자서는 좀 힘들겠더라! 같이 가자!”
“방해나 하지 마!”
“흥, 나중에 나에게 고마워할걸?”
전조는 피식 웃었다.
기주인은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놈의 자식들은 왜 뻑하면 숲으로 몰아??!!”
“암기를 쓰기 좋은 환경이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백옥당은 전조의 한마디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보면 숲은 별로 좋은 기억이 아니다. 조혜, 조란을 돕겠다며 등장하구선 창영에게 져 버린 곳도 숲 속이었고, 전소향과 함께 있었으면서도 그녀가 납치되는 걸 막지 못한 곳도 숲 속이었다. 백옥당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몸을 떨면서도 앞서 가고 있는 하얀 옷깃을 쫓아갔다.
꽤나 넓은 공터가 나왔다. 기주인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들을 맞았다. 전조와 백옥당은 검을 겨누며 그를 마주봤다. 기주인 역시 검을 들어올렸다.
“타앗!”
선공은 백옥당.
그러나 기주인은 그의 검을 가볍게 받아 넘기면서 뛰어 올랐다.
“네 놈에겐 볼 일이 없어!”
“뭣!”
백옥당의 검을 미끄러뜨리듯 받아낸 기주인은 곧장 전조에게 검을 들이밀었다. 전조는 옆으로 검날을 피하며 거궐로 쳐냈다. 다시 몇 번의 검날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고... 엄청난 속도로 짓쳐들어오는 검날 속에서, 전조는 쳐내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죽어라! 전조!!”
다시 한 번. 두 손으로 검을 잡는 기주인이 보였다. 전조는 이번엔 물러서지 않고 망설임 없이 자신 역시 두 손으로 검을 잡았다. 엄청난 빈틈이 노출되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기주인과 같은 방식으로 내리그었다.
카아아앙!
“크윽!”
“읏!”
엄청난 힘이 공중에서 맞붙자, 두 사람은 그대로 튕겨나가 버렸다. 전조는 얼얼하게 져려오는 자신의 손에서 거궐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있는 힘껏 검을 쥐었다. 그것은 기주인도 마찬가지인지,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는 가운데서도 검만은 놓지 않고 있었다.
“전조!”
파파팟!
암기가 쏘아졌다. 전조는 얼른 검을 들어올렸으나 지이잉~ 하고 울리는 느낌에 제대로 휘두를 수가 없었다. 기주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카가가가강!
“제길, 나는 언제나 잔챙이 처리 담당이냐~!”
백옥당이 그 앞을 막아섰다. 암기들은 힘없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네 놈---!!!!!”
기주인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기주인의 입에서 대성일갈이 터져나오며 전조를 일으키기 위해 등을 돌린 백옥당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백형, 위...!”
기주인의 손에서 하얀 무언가가 뻗어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기주인의 동태를 알아차리고 얼른 백옥당의 앞을 막아선 전조의 가슴을 때렸다.
“커억!”
전조의 입에서 한 움큼의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백옥당과 함께 뒤엉켜서 나무 둥치가 있는 곳까지 밀려가 부딪혔다. 백옥당이 띵한 뒷머리를 붙잡고 상체를 일으키자 가슴을 잡고 괴로워하는 전조가 보였다.
“야! 고양이!”
“크....... 으욱!”
다시 피를 토했다. 백옥당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얼른 전조의 손목을 잡아보았다. 잘은 몰랐지만 기혈이 이상하게 엉키고 있었다.
“너-!”
막 기주인을 죽을 기세로 일어서려던 백옥당은 자리에 주저앉아 헐떡거리는 기주인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곤 순간 멈칫, 했다. 방금 그 일격에 무언가 잘못되었는지 식은땀까지 줄줄 흘리고 있었다.
백옥당이 막 검을 쥐고 일어서려는 순간,
퍼엉!
“뭐, 뭐야!”
그와 기주인 사이에 작은 연막탄이 떨어지며 시야 가득히 연기를 피워 올렸다. 백옥당은 연기를 손으로 흩으며 기주인이 쓰러져 있던 자리까지 가 보았지만 벌써 누군가가 데리고 갔는지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제길!”
백옥당은 몸을 돌렸다. 전조는 여전히 가슴 앞섶을 잡고 괴로운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입가로 가는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야.... 야! 고양이, 괜찮은거야! 어이, 이봐!”
전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백옥당은 얼른 그의 옷고름을 풀고 상처를 살폈다.
“뭐......야..... 이건......”
왼쪽 가슴에 선명하게 찍힌 낙인과 같은 푸른 자국. 멍이 아니었다. 분명 아까 그 장(掌)에 의한 것이었다.
“설마- 빙혈장(氷血掌)?”
백옥당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얼른 전조의 혈도를 찍었다. 그 바람에 전조가 의식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백옥당은 얼른 그를 들쳐 업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추워....,,”
전조를 들쳐 업고 민가를 찾아 헤매던 백옥당은 귓전에서 들리는 전조의 가느다란 음성에 그를 내려놓았다. 전조는 꼭 눈 위에 버려진 아이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더니 팔로 어깨를 감쌌다. 덜덜덜 떨리는 그의 몸을 보며 백옥당은 낭패감에 빠져들었다.
빙혈장(氷血掌).
말 그대로 피를 얼린다는 이야기다.
빙혈장을 맞은 사람은 처음엔 감기에 걸린 것처럼 춥다고 하다가, 나중엔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다. 몸속을 흐르는 피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결국엔 멈춰버리게 되는 것이다. 마치, 한겨울 얼어붙은 강 속에 퐁당 빠진 사람처럼.
“야! 전조! 정신차려!”
백옥당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미 해는 지고 땅도, 공기도 차가워지고 있었다. 하다못해 싸늘한 공기를 막아줄 곳이 필요했다. 그런 그의 눈에 어두컴컴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폐가가 띄었다. 백옥당은 전조를 들쳐 업고, 폐가 주변을 겹겹이 두른 잡초와 나뭇가지를 쳐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구양춘은 백화장에 머물렀다. 한순간에 장원을 쑥대밭으로 만든 그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곱지 않았으나, 왜인지 그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치면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원망의 말도, 갖은 욕지꺼리도 하지 않았다.
“의부님!”
서재에서 쌍협을 기다리던 채하와 구양춘은 문을 열고 들온 애호의 뒤에 선 조란과 조혜를 보고 물었다.
“찾았느냐?”
조란이 고개를 저었다.
“창영도 놓쳤습니다. 정말 빠르더군요. 빌어먹을 노, 컥!”
막 육두문자를 입에 담으려던 조혜의 옆구리를 조란이 콱 하고 찔렀다. 그는 얼른 채하의 눈치를 살폈다. 뭐가 어찌되던 사형인데, 그의 앞에서 대놓고 욕을 하면 어쩌자는 건지. 그러나 채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조란을 대했다.
“전대협과 백대협은...... 두 사람이 함께 있으니 별 문제야 없겠지만.”
“아, 하지만 그 놈 진짜 전형이 아닐지도 몰라요!”
“무슨 말이지?”
“조혜!”
“앗!”
일순간에 모두의 시선이 조혜를 향했다.
또 말실수한 정조혜군.
땀 뻘뻘 흘리며 입을 손으로 가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특히나 퍼런 눈을 날카롭게 뜨고 무슨 말인지 빨리 말하라고 무언의 재촉을 하는 구양춘 앞에선, 사람 발아래 개미의 기분을 느껴야 했다.
“혀, 형니임~”
얼른 조란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조혜. 그러나 조란은 싸늘하게 그의 손을 쳐내버렸다. “니가 알아서 해!!”라고 바락 소리를 지르며. 영문을 알 수 없는 애호는 그 큰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구양춘은 이야기 할 때까지 안나가겠단 모양새로 팔짱을 끼며 묵묵히 분위기를 잡았다.
백옥당은 전조의 몸을 좀더 불가로 끌어당겼다. 이젠 입술까지 파랗게 변해버린 그의 몸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백옥당이 장포를 벗어 걸쳐주고, 바닥에선 한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짚까지 깔아주었지만 다 소용없는 것 같았다.
“어이, 전조! 이봐!”
다급해진 백옥당이 그를 부르자 눈꺼풀이 살짝 올라갔다. 희미하게 가라앉은 갈색 동공이 잠시 백옥당을 향하다 다시 닫혔다. 입에서는 새액새액 힘겨운 숨소리가 이어졌다.
“제길. 빙혈장, 빙혈장- 말만 들었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있나!”
끄응. 끄응.
백옥당은 아예 앓는 소리를 냈다.
“고양이가 죽으면.... 아니, 죽으면 안돼지.... 아직 나하고 결판도 못냈고- 아니, 그것보다 네가 죽으면 내가 꿈자리 사나워서 어디 살겠어?”
백옥당은 장작개비를 하나 더 불속으로 집어 넣었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 그는 가픈 숨을 쉬고 있는 전조의 뺨에 가만히 손을 대 보았다. 이만하면 열이 좀 오를 만도 하려만, 차갑게 식어버린 그의 몸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손을 잡아보았지만 손 역시 차갑긴 마찬가지였다.
“제길. 그래~ 내가 전생에 너한테 무지막지 큰 빚을 져서 그런가 보다~!”
백옥당은 전조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결가부좌를 잡게 하곤 그의 등 뒤로 자신의 기를 불어넣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고, 백옥당은 마지막 힘으로 기합을 내지르며 전조의 등을 쳤다.
“쿨럭!”
일장을 받은 전조가 피를 쏟아내고 옆으로 쓰러졌다. 백옥당은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며 그의 상처를 살폈다. 빙혈장의 푸른 멍같은 상처가 조금은 옅어져 있었다. 전조의 숨소리도 많이 나아졌지만 몸이 찬 것은 여전했다.
백옥당은 다시 전조의 몸에 장포를 걸쳐주곤 불가로 데리고 가 한쪽 벽에 앉혔다. 그리고 전조의 몸을 살포시 끌어안았다. 마치 얼음 덩어리를 안고 있는 듯, 엄청난 한기가 몰려들었지만 백옥당은 그저 꾸욱, 자신의 몸으로 그를 끌어당길 뿐이었다. 살짝 손을 잡아보자 약간 온기가 돌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백옥당은 불속으로 다시 장작을 집어넣었다. 슬슬 눈꺼풀이 감기는 것이 아까 공력과 진기를 소모한 탓에 몸이 피로한 모양이다. 백옥당은 몸을 벽에 기대었다. 한쪽 팔에 전조의 무게가 걸렸지만 그리 무겁진 않았다. 그는 전조의 손에 온기가 돌아오는 안도감에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조혜야, 지금 재담(才談) 시간이냐?”
“.......(ㅠ_ㅠ)”
기나긴 조혜의 이야기가 끝나자 구양춘이 처음으로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는 턱을 괴고서 눈썹을 묘한 각도로 찡그리고 있었다. 물론 그 ‘황당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거린 조혜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자길 노려보는 구양춘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낼 수 밖에 없었다.
“전조가 여자가 되었다구?”
“.......”
“음화단 때문에-?”
구양춘의 시선이 옆에 앉은 조란에게 향한다. 조란은 찔금하며 눈을 내려 깔았다.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콱 쳐박히고 싶은 심정이었다.
“근데 갑자기 남자로 변했으니 전조가 아니다아~? 지금 날 놀리냐!”
구양춘이 조혜의 멱살을 확 잡아 올렸다. 지은 죄가 있으니 아무 말도 못하고 동생 당하는 것만 볼 수밖에 없는 조란. 더욱더 고개를 숙일 따름이다.
“아, 하지만.”
켁 켁 거리는 조혜의 멱살을 더 치켜들며 노기로 타오르던 구양춘은 갑자기 채하가 입을 열자 그를 돌아보았다. (그동안 조혜는 조란의 등 뒤로 숨듯이 피할 수 있었다;;)
“그건- 맞는 말인데요......”
“뭐?”
채하의 옆에 앉은 애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천하의 남협이!
개봉부 어전 사품 호위가!
여자?!!
여자가 되었다고!!!!
“음화단이 절대적 음기를 지닌 엄청난 비약이란 것, 알고 있다. 잘 못 쓰면 사람이 죽어버린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망발이야! 여자가 된다고?”
“그게- 음화단의 기운이었군요. 무언가 엄청난 음기가 몸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아, 그리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셨어요. 제가 금양분을 드려서-”
“금양분?”
“네. 음화단이 절대 음기의 비약이라면, 금양분은 절대 양기의 비약이지요.”
조란과 조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아, 전형이 원래대로 돌아오다니.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조란은 아예 대놓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럼, 그 분이 전대협이 맞는 거죠?”
“그야.......”
애호의 질문에 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 알아서들 돌아오겠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우선 정신없긴 하지만, 소란에 일단락을 지은 구양춘. 그는 진지한 눈을 들어 채하를 바라봤다. 채하는 구양춘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기가 정리되고 안정되면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채하. 아무래도 이 일은- 자당께서 오셔야만 할 것 같구나.”
채하의 눈이 커졌다.
백화촌 외곽의 작은 객잔.
창영은 숨을 헐떡이는 기주인을 침상에 눕히며 책했다.
“단주! 빙혈장을 쓰시다니! 제정신이십니까!”
“시끄러워!”
헉헉... 가쁜 숨을 내쉬는 기주인의 눈은 몸 상태와 달리 화르륵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이 사이로 갈 듯이 창영을 향해 내뱉었다.
“개봉의 흑룡단에게 전해....... 계획을 실행하라고.....! 전조...... 이대로 끝나진 않아.... 반드시 네 놈을 죽일테다.....!!”
--------------------------------
끄응.
쓰고도 어색한 저
구양춘이 전군의 변모를 알고서도 그럼 넘어가자! 하는 부분.
뭐, 비상쟈의 구양군(군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참;;)은
그런면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하하하.
제가 쓰고도 저기엔
(이봐, 이봐, 그렇게 넘어갈 일이 아니잖아!! >0<)
라고 한마디 해 주고 싶은;;;
그제야 지난 기억이 떠오른다. 전조가 자기를 대신해 빙혈장에 맞았고, 추워서 얼어 죽기 일보직전인 녀석을 보다 못해 끌어안아 주었다. 다 큰 사내들끼리 민망한 일이건만 그때는 그런 거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슬쩍 손을 잡아본다. 부드럽고..... 온기가 흐르고 있다. 백옥당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아, 다행이야. 역시 고양이는 목숨이 여러개라니까.
그러면서 다시금 손을 잡아보는 옥당.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피부의 감촉은- 빳빳하고 울퉁불퉁한 사내의 손이 아닌, 뭔가 보들보들하고 촉촉한 ...... 음.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여인의 손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뭔가, 한기가, 한기가 돈다.(;;)
백옥당은 감고 있는 눈을 떠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응....... 추워.......”
라고 하면서 품으로 파고 들어오는 건 좋은데 말이지!
목소리!!!
백옥당은 눈을 번쩍 떴다.
뺨을 간질이고 있는 것은 긴 검은 머리카락.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었다. 게다가 분명 전조 정도의 앉은키라면 백옥당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게 딱 알맞건만, 무려 가슴쪽으로 머리를 기울이고 있었다! 게다가! 이 아담(?) 사이즈에 품에 폭 안긴 부드러운 느낌이란!
백옥당은 깜짝 놀라 몸을 확 뒤로 뺐다. 덕분에 그에게 기대고 있던 전조는 건초 위로 푹 엎어질 수밖에 없었다.
“추워.......”
초승달같이 고운 눈썹이 모아지면서 걸쳐진 장포가 이불인 양 끌어당긴다. 그러다 문득 찬 공기에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그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눈 앞에 새파랗게 질려 주저앉은 백옥당이 보였다.
“백...형.....?”
백형이 여긴 왜?
아아, 어제 기주인을 쫓아가다.... 뭔가 일장을 가슴에 맞았고.... 추워서....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왜 백형은 저렇게 새파랗게 질려있지?
“백형?........!!!!!”
전조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손으로 가렸다.
뭐지?
뭐야!
왜 또 목소리가-!!
전조는 놀라서 상체를 일으키다 뭔가가 머리채를 쫙 잡아당기자 다시 앞으로 꼬구라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바로 옆을 살피니 상체를 받히느라 짚은 손바닥 아래 머리카락이 깔려 있다. 그것 때문에 일어나려다 머리채가 당겨진 것이다. 전조는 바닥으로 치렁치렁 늘어져 있는 머리카락들을 끌어당겼다. 자신의 안색도 백옥당과 마찬가지고 새파랗게 질렸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파란 걸 넘어서 하얗게.
“저, 저기-”
“......;;;”
“저어-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어제 내가 안고 잤던(뭐야!!!) 인간은 분명 남자에다가, 원수 같은 놈에다가, 만날 개봉부니 포대인이니 법이니 딴지나 걸고 넘어지는 고양이 녀석인데 말이지요. 어이하여 낭자가 그 녀석하고 교대하고 계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게.....;;;;;”
“게다가, 그 고양이 녀석이 분명 전소향 낭자는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했는데 말이지요....”
백옥당! 너 다 짐작 가면서 괜히 물어보는거지!!!! (>0<)
허나 이 말을 어찌 내뱉을 수 있으리요..... 전조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인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전.... 조....?”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설마가 100번은 담겨 있는 듯한 한마디.
하지만 전조는 그 기대를 산산히 조각내야 했다.
전조는 이젠 아예 체념하고 대답해 주었다. 백옥당의 뜨악한 표정이 볼만했다. 전조는 앞으로 쓸려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넘겨 귀 뒤에 걸었다. 정말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라 해도 손색없을 여인의 자태가 그대로 풍겨오고 있었다. 물론 본인은 머리카락이 앞으로 쏠리니까 별 생각없이 한 행동이겠지만.
‘저게 남자... 저게 남자....’
완전히 속은 기분에 휩싸인 백옥당. 그러다 갑자기 퍼뜩, 무언가 머릿속에서 경종이 땡그랑 땡그랑 울리는 바람에 다시 한 번 묻는다.
“그, 그럼! 내가 그 때 차루에서 한 말-!!!!”
경악하는 백옥당을 향해 전조가 씨익 웃어준다. 약간 쑥스러워하는 듯, 베시시시싯....
“아아,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는 그거?”
“끄아아아아?”
백옥당, 머리를 잡고선 괴성을 질러댔다. 전조는 ‘정체를 알았을 때 백형의 반응’이 예상과 틀린게 하나 없자 쿡쿡쿡 하고 웃어버렸다. 허나 백옥당은 전조가 웃자 자길 비웃는 것인줄 알았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잊어!”
“아?”
“나 금모서 백옥당! 하늘에 맹세하고 땅에 걸고서 천하의 남협 전조가 여자가 되었었다는거! 무덤까지 가지고 갈테니까! 너도 잊어! 천하의 금모서가 고양이 좋다고 했다는 거!!!”
“하아?”
“잊어! 알았지? 사나이 대 사나이의 약속이야! 잊어!”
뭐야.
그게 그렇게 싫은 건가?
전조는 문득 심술이 일었다.
그 전까지 진지하게 ‘전조’란 인물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고. 어찌보면 정말 진정한 친구로서 가질 수 있는 마음이나 감정에 대해 다 털어놨으면서 그걸 잊으라니. 게다가 전소향이 전조란 걸 안 후로 180도 변해버린 이 태도....!
백옥당은 이미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을 전소향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전조역시 정체가 들통났으니 여자 말투를 버리고 본래의 말투를 쓰고 있었고, 덕분에 백옥당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와도, 자신의 귀에서 이미 전조의 목소리로 바꿔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눈엔 전소향은 인식되지도 않았다. (놀라운 능력;;)
전조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말했다.
“소녀는 지금 ‘여인’의 몸이라 사나이 대 사나이의 약속은 무립니다만, 백대협.”
말투가 바뀌니 그제야 여인의 목소리가 좀 들리나. 백옥당의 얼굴이 벌게졌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라 하였으니, 이만 가 봐야겠군요. 다들 걱정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야아.... 고양이....”
“어머? 제 어디가 고양이죠? 제 이름은 ‘전.소.향’ 입니다만?”
“야!”
전조는 뒤에서 자길 부르는 백옥당의 소리를 싹 무시했다.
그는 산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면서 이것저것을 확인해 보았다.
가슴에 맞았던 빙혈장의 자국은 사라지고 없었다. 공력은... 다행히 무사했고, 전소향으로 다시 돌아간 것을 제외한다면 바뀐 것은 없었다.
‘왜지? 금양분의 힘으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나? 가만... 음화단의 힘으로 여자가 되었으니까, 금양분의 힘으로 남자 모습으로 돌아가고, 빙혈장이라면 음기가 강하겠지. 그럼 뭐지? 금양분의 양기와 빙혈장의 음기가 부딪혀서 소멸하고, 남은 것은 음화단의 음기뿐이니 도로..... 도로..... 전소향으로 변한건가......?’
전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결국 태군을 만나 뵙는 수 밖엔 방법이 없겠군.’
한숨 푹.
“야아~ 고양이! 그래도 이 몸이 공력도 주고, 너 살리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뻣뻣한 사내 몸 안고 자는 게 뭐가 좋, 커헉?”
백옥당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버린 전조가 던진 두툼한 나뭇가지가,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강타했기 때문이다.
“..... 당시 금낭자는 심마니들에게 우연히 구출되어 살아났다고 하더군요. 허나 손영욱이 너무 무서워 집으로도, 기루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심마니들이 숨겨주는대로, 그들의 움막에 머물렀나 봅니다.
-- 사실은 너무 무서웠어요. 개봉부라는 말로만 어떻게 믿겠어요! 게다가 심마니 아저씨들은 소호와 같은 소년이 같이 있는 것도 보지 못했다고 하고.... 혹시나 현령과 똑같을까, 저는 너무나 무서웠어요. 그런데 꿈속에 진미가 나타나더군요. 구해달라고..... 그래서 저는 산을 내려갔어요. 얼굴을 가리고... 걸인의 행색을 하고 고개를 숙인 채 마을로 내려갔어요. 그리고....... 객잔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고 있던 전대인을 만났지요.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어요. 그런 분...... 그런 분은 정말 드무니까. 그렇게....... 빛이 나는 사람은.
그리고 전대인은 금낭자를 만난 것입니다. 허나 전대인은 이미 손영욱의 장원을 수색했었고, 아무 소득도 없었지요. 금낭자는 그 말을 듣고 의아했나봅니다. 분명 그 많은 여인들이 있었는데 어디로 갔을까? 그러다 퍼뜩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었어요.”
“현령이겠군.”
“네.”
조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양춘은 슬쩍 곁눈질을 해 채하를 보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의 전말이었지만 이렇게 세세하게 듣는 것은 처음인지, 채하는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눈을 감은 얼굴인 아까보다 더 핏기가 없어보였다. 그러나 구양춘은 조혜에게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턱짓을했다.
저 아이는.
알아야 해.
조혜는 걱정스런 눈으로 채하를 바라보다 구양춘이 턱짓을 하자 잠시 머뭇거리다 곧 이야기를 계속 해 나갔다. 채하의 옆에 앉은 애호가 소년의 떨리는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전대인이 하릉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사람을 시켜 손영욱에게 알린 것이지요. 그리고 장원을 수색할때, 다른쪽으로 사람을 시켜 여인들을 빼돌렸던 겁니다. 여인들은...... 금낭자와 전대인이 예상한데로 하릉현령저에서 발견되었어요. 바로 당일의 일이었답니다. 전대인은 그 즉시 하릉현 장원으로 갔고, 그곳에서 손영욱을 체포하려했는데 그는 도망을 갔죠. 전형은 뒤쫓았고요. 손영욱은 절벽까지 도망가다 사면초가임을 깨닫고 자결했다 합니다.
그렇게 우선 하릉현령의 파관면직, 손영욱의 죽음, 금낭자가 마을로 돌아오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 되었지요. 다만 하릉현령도 그렇고, 금유유 낭자와 많은 낭자들이 말했던 ‘서하와의 거래’에 대해서는 현령도 극구 부인해 끝까지 진상을 알 수 없었답니다.”
구양춘의 시선이 다시 채하를 향했다.
가엾은 소년은 이제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애호가 측은한 눈길로 그의 손을 잡고 어깨를 도닥거려 주었지만 떨리움을 억누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채하.”
구양춘의 목소리.
채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걸로 끝일까?”
“의부님.....?”
“구양형님. 무슨 말씀입니까?”
옆에서 조란조혜와 애호가 되물었지만 그는 진지한 시선을 채하에게 던질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채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창영사형이 묻더군요. 형님이 왜 인신매매 따위를 했는지, 아느냐고-”
“.......”
“지금 북협의 말씀을 들으니, 제가 알고 있는 게 진실이 아니군요.”
채하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구양춘은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아니, 그것도 맞을 거다. ‘돈’. 필요했겠지. 하지만 영욱이 정말 원하던 것은 다른 것 일게야. 인신매매로- 다른 것을 얻을 수 있기에- 그리했던 것이지.”
조란과 조혜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인들을 팔아서 남는 건 돈 뿐이지, 대체 또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 아마 영욱이 서하와 거래를 했다는 건 사실일거다.”
애호와 쌍협의 눈이 커졌다.
구양춘은 허둥대는 그들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채하를 똑바로 응시했다. 차갑게 얼어붙는 푸른 눈동자.
“채하, 여기까지 말했으면 짚이는 데가 있어야지.”
채하의 몸이 아까전보다 더 심하게 떨렸다. 애호가 얼른 어깨를 잡아줬지만 그는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밤하늘로 올라가는 불길.
미친듯이,
애타게,
슬픔을 가득 담고서......
그리고 그 불길처럼 뻗는 하얀 손과 팔.
별과 달을 그 손에 넣으려는 듯이-
하지만 손은 허공을 쥐고 곧 힘없이 서서히.... 땅으로 떨어진다.
불길이 외치고 있다.
멀구나!
너무나도 멀구나!
같은 하늘 아래인데도 너무나도 멀구나!
“북협.......”
떨리는 목소리로 채하가 그를 불렀다. 구양춘은 무언가 깨달은 그의 표정을 보고 씁쓸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래. 그래서 자당이 오셔야 할 것 같다고 한거다.”
구양춘은 눈을 떴다.
어느새 아침..... 어스름하게 해가 밝아오고, 장원은 서늘한 아침 기운에 싸여 있었다. 어제의 소란으로 피곤한 사람들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쌍협이나 애호 역시 깨어나지 않았는지 옆방들도 조용했다.
그는 어깨에 기울여 안아든 검을 챙겼다. 문을 나서니 입김이 하얗게 번져 나왔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저 눈만 감고 있었다.
어제 밤 채하의 표정..... 생각 깊은 그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구양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당신도....... 모를 리 없을텐데.......”
당신이.
모를 리가 없는데. 절대로-
구양춘은 두 손으로 난간을 꽉 움켜잡았다.
언제나 그렇듯, 강호란 살기와 위험과 언제 어디서 닥쳐올지 모를 위협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가는 곳이다.
그 때도, 그런 위험과 마주하여 저승사자와 대면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을 갈 때가 아니니까, 좀 봐주시오- 좋은 얼굴로 그렇게 타협해볼 요량으로.
하지만 저승사자는 지금까지 상상해온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타오르는 붉은 불길을 등 뒤에 업고, 그 황금빛과 같은 출렁이는 긴 머리카락을 넘실대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바다처럼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
출혈이 너무 큰 탓에 온 세계가 흐릿하게 보였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붉게도 보였다. 그런 가운데 마치 번개가 치는 듯 머릿속으로 파고들어오는 선명한 푸른 눈동자.
구양춘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피에 절은 손을 들어올려 저승사자를 만져보려 하였다.
그랬더니 저쪽에서도 손을 뻗어주었다. 작고, 하얀 손을.
그 손이 구양춘의 손을 잡는 순간, 그는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달리아......”
“구양형님!”
난간을 쥐고 조용히 내뱉던 구양춘의 머리위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구양춘은 얼른 몸을 날려 백화장 담장 위를 살폈다. 곧, 하얀 옷깃이 펄럭이며 떨어져 내렸고, 바로 뒤를 따라 남색의 인영이 내려섰다. 긴 검은 머리카락이 한순간 시야를 지배한 듯도 했다.
“그.......”
구양춘의 눈에 백옥당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담을 넘어 들어온 것이 그라는 것 정도는 아까 자신을 부른 목소리로 알아챘다. 다만, 그가 놀라고 있는 것은 백옥당과 함께 월담한 남색의 헐렁한 유삼을 두른 여인 때문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거궐. 구양춘을 마주한 그녀역시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배.... 백대협!”
여인이 얼른 백옥당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응? 으응? 하던 백옥당은 아, 하더니 곧 버벅거리며 무언가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구양춘 쪽이 먼저였다.
“전조?”
..
30. 전서(傳書)
“하나....”
“자나깨나--!!!”
“둘.....”
“이, 입조시임~~!!!”
“하나....”
“자나, 깨애애애 나아아아아~~~”
“둘....”
“입, 입조-”
털썩.
“다시!”
퍼억.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백화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갑자기 쳐들어와 여러사람 상처 입히고 사형과 기주인을 쫓아냈으며, 소장주(이젠 장주지만)인 손채하를 위협했던 무리들이 이젠 아주 안하무인 장원에서 소란을 피우는구나, 하고 씩씩거렸다. 그나마 소장주가 사람들에게 빌고, 양해를 얻어 머물게 해 주었더니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그러나-
소란스러움을 따지러 간 장정들은 머쓱한 표정으로 돌아나올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며 웃음짓는 소장주의 한마디 때문도 아니오, 소란의 정점에 있는 눈이 번쩍 뜨일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의 여인 때문도 아니오, 그 앞에서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엎드려 뻗혀 팔굽혀 펴기를 하고 있는 한 수려한 젊은이 때문도 아니었다.
당당하게!
그것도 바로 어제!
백화장 정문을 밀어젖히고 들어온 무뢰배들이(북협, 소협 애호와 조란, 백옥당) 파아랗게 질린 얼굴로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하염없이 땅만 내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봐요들-”
“쉬잇!!”
막 따지려 그들을 부르려하자 그들은 똑같이 이구동성으로 쉬잇, 바람 소리를 내며 새파랗게 질린 입술 위에 손가락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들이 놀라 손채하를 바라보자 한쪽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채하는 “미안하지만 이쪽으로 사람들을 보내지 말아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결국 돌아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본전도 못찾고.
조혜는 팔이 저릿저릿 거려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려 있고 싶었다.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앙칼진 “다시!”란 외침과, 무언지 모를 둔탁한 것이 등을 후려치고 가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다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앞에는.
염라대왕이 이 보다 더할까. 개작두를 열라고 명하는 포대인이 이 보다 더 무서울까.
가늘게 내려 뜬 눈에 긴 속눈썹이 아름다웠지만, 그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정도, 용서도 없었다. 조혜가 머뭇거리자 그녀의 입에서 조용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 엄청난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을 더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조란은 기어이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는 그의 눈매에서 하얀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면 그건 눈물인가, 아니면 여인에 대한 공포심에서 흐른 식은땀인가. (-_-;)
고개를 파묻는 그를 구양춘이 도닥여 주었다.
얌전한 사람 화나면 무섭다던가.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어.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구양춘은 전조- 즉, 전소향을 보자마자 남협 전조란 걸 알아 맞췄다. 놀란 전조와 백옥당이 어버버 거리며 구양춘을 바라보자 그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던 것이다.
“조혜한테 다 들었네. 음화단 때문이었다며? 고생 많았네- 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이렇게 고와서야. 오히려 꼭 남자로 돌아가야 되겠냐고 묻고 싶은걸?”
백옥당이 사방에서 손을 내젖고 발짓을 해가며 구양춘의 터져 나오는 말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전조는 그 길로 조혜의 방문을 박차고 들어가 그를 끌고 나왔다. 조란조혜, 심지어 채하까지 남자로 돌아간 전조가 어째서 다시 여자가 되었는지 알고 싶었지만 그럴 새도 없었다. 전조는 조혜를 바닥에 팽개치고 자신은 난간에 걸터앉으며 명령했던 것이다.
“하나 하면 ‘자나깨나’ 둘 하면 ‘입 조심’. 자, 하나.”
막 잠에서 깨서 어리벙벙한 조혜. 어디서 날아온 둔탁한 물건에 이마를 정통으로 맞았다.
“하나 하면 ‘자나깨나’ 둘 하면 ‘입 조심’. 자, 하나.”
공력을 실어보낸 작은 돌맹이었다. 조혜의 이마가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조혜는 너무나도 억울하고 영문을 몰라 대체 뭐냐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자신을 보고 씨익-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살레살레 흔드는 북협 구양춘을 보고 아차,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알아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하나 하면 ‘자나깨나’ 둘 하면 ‘입 조심’. 자, 하나.”
“자나깨나!”
그리고 그것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점심때도 지나고 미시(未時)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혜는 이젠 잘 펴지지도 않는 팔을 억지로 억지로 펴고 굽히며 전조의 구령에 맞추었다. 지은 죄가 죄니 어쩌겠는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괴로운 막내의 여정.(실상 칠협의 막내는 애호지만 그는 전조 성격을 빼다 박았다 할 만큼 신중하고 조용해서 치일 일이 없었다;)
‘아이고 어머니~~~ 아들 죽어요~~~~~!!!’
먼 곳에 계시는 태군.
선친에게서조차 이러한 모진 벌을 받아본 적 없는 막내,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다.
....... 모성(母性)은 위대하다 했던가!
“정장원에서 쌍협께 사람이 왔습니다만.”
조혜는 반가운 표정을 지을 힘도 없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는 전조를 보며 아, 이제 그만해도 되는구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퍽 엎어져 버렸으니.
“대관인.”
“뭐지?”
“이것.”
급하게 뛰어 온 듯, 전령은 땀에 절어 숨을 헐떡이며 조란 앞에 고이 접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조란은 그것을 펼쳤고, 그 안에는 작은 비합전서가 들어있었다.
[포대인 납치. 전호위 복귀 요. - 태군, 공손책 (包大人 拉致. 展護衛 復歸 要)]
곁에서 글을 보고 있던 북협과 백옥당의 표정도 싸늘하게 굳어갔다. 비합전서 한켠에 찍혀있는 선명한 붉은 도장은 분명 태군의 것이었다. 조란은 놀라 전령을 잡고 물었다.
“이게 언제 왔는가?”
“오, 오늘 아침이었습니다. 전서구가 날아오길래....... 정총관께서 보시고는 얼른 대관인과 이관인께 가져다 드리라고-”
조란은 더 듣지 않고 몸을 돌려 전조에게 다가갔다. 전조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전조는 조란이 넘겨주는 쪽지를 보자마자 하얗게 질려버렸다.
“납치........ 대인을.......?”
“네?”
엎어져 있던 조혜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 돌아가야 해.”
전조는 거궐을 들고 달려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의 앞을 가로막는 구양춘에 부딪히고 말았다.
“구양대협!”
“개봉이 아니야!”
막 노기를 담고 외치던 전조는 구양춘의 일갈에 주춤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구양춘의 파란 눈동자에 살기가 가득 넘실대고 있었다.
“어리석은 것들....... 기어이 일을 치고 말았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채하의 안색이 눈에 띄게 하얗게 질려갔다. 사태를 짐작한 애호가 그의 손을 꼭 붙들어 주었다. 채하는 애호에게 몸을 의지에 일어나며 조용히 말했다.
“기형님과 창영사형이군요.......”
“채하. 자당을 모셔와야 한다! 되도록 빨리!”
“대체 무슨 말입니까? 소공자의 자당이라니, 그 분이 왜-!”
자기 앞을 가로막은 구양춘이 답답한 전조가 따지듯 물었지만 구양춘은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잡아 눌렀다. 전조가 신음을 흘리며 기세를 누그러뜨리자 구양춘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번일은 모두 그녀에게 돌아간다. 그녀가 와야 해. 영욱의 일도, 그리고 이번 기주인의 일도. 마무리를 짓기 위해선 그녀가 필요해. 그렇지 않으면 일은 끝나지 않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갈거야.”
“구양대협........”
“백대협! 그리고 조란, 조혜! 전대인과 함께 개봉으로 돌아가 주시오. 나는 애호, 그리고 여기 있는 채하와 함께 ‘그녀’를 데리고 오겠소. 아마 포대인을 납치한 사람은 기주인과 그의 수하인 흑룡단(黑龍團)일거요. 경고하지만 그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 각별히 주의하고-”
꽈악.
전조는 어깨를 쥐는 구양춘의 악력(握力)에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올려다 본 구양춘의 눈매가 전에 없이 진지하자 되려 걱정이 되었다.
수많은 사건을 맡고 수많은 일들을 접하면서 사람들의 표정을 보아왔다. 그래서 전조는 표정만 보아도 대강 사람의 심리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구양춘의 표정은...... 무언가, 무언가 아주 무겁고 힘든 결심을 하고 나아가려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전조는 저도 모르게 어깨위에 놓인 구양춘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개봉으로 가게. 모습이 어떻든 결국 자네가 돌아가야 할 곳이니까.”
구양춘은 손에 힘을 풀고 그- 아니, 지금은 ‘그녀’인 전조의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전조는 채하에게 마차를 준비시키라고 이르는 구양춘의 뒷 모습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문득, 구양춘과 같이 파란 눈을 가졌던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