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맡은 강형사역만 위로 끄집어 냈습니다. 밑에까지 쭈욱 읽으면서 찾기 번거로우실까봐요^^;;
* 강형사(김승민) : 20대 후반 이름 강성호. 강력반원. 유도대학 출신으로 별명이 '조폭''깍두기'일만큼 체격이 우람하지만 모델 뺨치게 패션감각이 뛰어나다. 영리하고 민첩하기도 하다. 강력반에서 힘이나 기로 상대방을 제압해야 할 때 제일 앞세우는 인물이다. |
2003년 1월 8일(수) 첫 방송
방송 / 매주 수·목 밤 9시 55분
「삼총사」의 후속으로 방송되는 MBC 수목 드라마 「눈사람」이 오는 1월 8일(수)부터 매주 수·목 밤 9시 55분 방송된다.
70분물 16부작으로 정운현 기획·이창순 연출·김도우 극본으로 방송될 수목 드라마 「눈사람」은 "인생(사랑)은 쓰다. 그러나 아름답다"라는 주제로, 한 소녀의 10년에 걸친 성장사이자 그 청춘을 관통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공효진이 주인공 엽기처제 서연욱 역을 맡았으며, 조재현이 강력반의 형사이자 공효진이 좋아하게 되는 형부 한필승 역을 맡아 열연한다. 또한 오연수가 타고난 미인이며 착하기까지 한 완벽한 여자로 공효진의 언니 서연정 역할을맡았으며, 김래원이 누릴 것 다 누리고 자신이 가진 걸 이용할 줄도 아는 영리한 대학생(아이스하키 선수)으로 공효진 남자친구인 차성준 역을 맡아 극을 끌어간다.
여기에 왕빛나가 공효진과 김래원 사이를 방해하는 영리한 아레나호텔 비서 이수진 역할을 연기하며, 임성민이 연정의 대학선배이자 직장선배 이미영 역할을 맡았으며, 오승은이 공효진과는 달리 현실적인 연욱의 친구 김상희로 출연해 눈길을 끈다. 여기에 중견 탤런트 한인수· 명계남· 박은수·김지영·심양홍 등이 가세해 극에 활력을 넣어 줄 예정이다.
수목 드라마「눈사람」의 내용과 주요 출연진의 프로필 등은 다음과 같다.
【 등장인물 】
* 서연욱 (공효진) : 엽기처제. 17세 26세. 고 1 여경(女警)
◈ 단순명쾌한 엽기발랄녀. 조증과 울증을 수시로 넘나드는 변화무쌍한 감정변화에 관심이 없으면 옆에서 하늘이 무너져도 뚜-웅한 무심함과 명랑솔직함을 두루 갖춘 성격. 말도 손도 행동도 거칠어 때로는 말보다 주먹과 발길질이 먼저 나가지만 상대가 지나치게 성질을 돋구지만 않으면 참는 편이어서 무조건적인 쌈닭은 아니다. 반대로 맘이 맞고 편한 사람한테는 알랑알랑 귀염도 무지 떤다.
◈ 잘난 것 없고 빽도 없고, 미모가 출중하지도 않으며, 뭐가 되고 싶은지, 잘 할 수 있는 게 뭔지 고민하는 이 시대의 보통 아이에서 출발해 필승(형부)의 영향으로 차츰 자신의 역할, 비젼을 찾아나간다. 그 결과 경찰시험에 응시해 여경이 되는데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는 수없이 부딪히고 깨지고 상처받으면서 고통스런 나이테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처절한 로맨티스트다. 그 과정을 거치며 말괄량이 삐삐처럼 엉뚱하고 귀여운 반항아적인 10대에서 책임감 강하고 세심한 20대 여경으로 성숙해나가는데 밝고 긍정적인 모습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표면적인 것으로 자기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원죄의식이 뿌리박혀 있다. 부모님은 그녀의 여덟 번째 생일날 함께 생일선물을 사러 갔다가 삼풍사고로 돌아가시고 그녀만 살아남았다(그 여파로 갑작스런 굉음이나 자동차의 급정거소리 등이 들리면 머릿속이 텅 빈 듯 멍-해지는 증상이 있다). 그래서 가끔 기분이 멜랑꼴리한 날은 심하게 자책을 한다. 아무도 모르게... 그래서 그녀는 가볍다. 심각해지면 아프다는 걸 너무 일찍 깨달은 셈이다. 남들이 보면 천방지축으로 보이는 언행 뒤에는 그런 방어기제가 숨어있다. 아프면 웃고, 힘들면 달리고, 숨이 차면 소리 지른다. 그런 그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언니 연정이다. 연욱에게 연정은 엄마이자 아빠이며 세상에 둘도 없이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욱은 빨리 시집을 가거나 완벽하게 독립하고 싶어한다. 겨우 열여섯에 가장이 된 언니가 자유로워지는 걸 보고 싶은 것이다. 필승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도 너무나 당연히 언니한테 죄책감이 들었다. 게다가 그 사실을 안 언니는 자신을 질타하기는커녕 누구도 흉내 못낼 사랑으로 감싸준다. 그런데 언니는 미안함을 갚을 시간도 안주고 저 세상으로 가버린다. 언니의 죽음, 그것은 연욱에게서 모든 걸 앗아가 버린다. 하늘도 땅도 희망도... 그 삭막한 공간에 필승이 들어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필승은 사랑 이상의 또 다른 의미이다. 그녀에게 필승은 열일곱부터 스물여섯까지 그녀의 푸른 시절을 모두 점령한 '인생의 지팡이'이다. 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을 열어주었고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의 잣대가 되어주었다. 즉, 그녀에게 젊은 날의 초상은 필승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 한필승(조재현): 28세 37세 어리버리 형부.
강력반의 무대뽀 형사 베테랑 형사(일명 탱크)
태권도 3단, 유도 3단, 구라 10단, 권투 조금.
◈ 방송국에는 시청률표가, 강력반에는 막대그래프가 있다. 필승의 막대그래프는 아직 낮은 곳에 임한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고군분투하지만 경험은 부족한데 의협심과 공분(公憤)이 앞서는 그로서는 아직 먼 이야기다. 누가 그랬던가, 형사 똥은 개도 안먹는다고. 아직 필승의 그것만은 안심해도 좋다! 그는 측은지심이 넘친다. 마음이 여리다. 영악하지 못하고 털털하다. 그렇다고 그를 깔보면 큰 코 다친다. 강력반에 들어와서 처음 잡은 잔인한 살인자를 자기가 설경구인 양 착각하고 죽어라 팼다가 반장에게 죽어라 혼난 적이 있다. 인정에 넘어가 놓아줄지언정 지구 끝까지 쫓아가는 끈기와 곤조가 있고 경찰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다. 게다가 학생시절 복싱을 한 덕에 손발이 빠르고 몸도 민첩해 향후 강력반의 기둥이 될 조짐이 보이며 동료애는 단연 표창감이다.
◈ 금실 좋은 부모님과 네형제 사이에서 자란 탓에 어린 폭주족에서부터 경찰서장까지 누구와도 잘 어울릴만큼 털털하고 사교성이 좋다. 중학교 때는 형제들과 경쟁하지 않고도 불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꼬임에 넘어가 복싱반에 들었다가 첫 시합에서 별이 보일 만큼 맞고는 그만 두었다. 그리고 어영부영 고3이 되고보니 눈앞이 깜깜했다. 공부를 잘 하나, 특기가 있나, 넉넉지 않은 부모님은 두 형을 대학 보내느라 매일 죽는 소리, 아무리 생각해도 비젼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등록금 면제에 품위유지비까지 주는 경찰대학이다. 그렇다, 잘난 것 없는 그에게 국가공무원은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그는 그때부터 책을 팠다. 국영수는 안팠다. 암기과목만 팠다. 형들에게 미친놈 소리도 들었고 코피도 여러번 쏟았다. 그리고 떨어졌다. 홧김에 군에 갔다. 제대하고 나서 시내를 하릴없이 걷다가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렸다. 오기가 치솟았다. 꼭 경찰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공부를 시작해 경찰채용시험에 합격하고 몇 년 동안 여러 서를 돌다가 현재는 강북의 xx 경찰서 형사과 강력 3반 반원으로 활동중이다. 계급은 경장. 처음 연정을 만난 건 1년 전쯤 제주도로 도망간 용의자를 잡아 서울로 달고 오던 비행기 안에서였다. 용의자가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연정이 다쳤는데 그만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런데 인연이 되려는지 셋째 형수와 친한 선후배지간이었고 연정이 먼저 사귀자고 했다. 필승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같이 별 볼 일 없는 놈한테 하늘의 천사가 데이트 신청을 하다니... 그녀는 극악무도한 놈을 잡아 혼내주는 내 신분에 반한 것이 틀림없었다. 거기다 그녀가 먼저 결혼신청을 한다. 그녀는 아마 경찰청장 사모님을 꿈꾸나보다. 그럼 어떤가, 영부인도 될 수 있다고 일단 꼬드겨보자. 이혼 안해주면 되지. 꿈같다. 구름 위를 나는 것 같다. 아- 나는 행복하다. 그런데 망나니 예비처제가 태클을 걸어온다. 망나니도 보통 망나니가 아니다. 악의 전령이고 딴지의 여왕이며 엽기공주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엽기든 광기든 처제도 꼬셔야 한다.
* 서연정(오연수) : 25세 팔방미인 언니. 스튜어디스 본사 사무직
◈ 모든 걸 동생 연욱의 반대로 치환하면 그림이 나온다. 연정은 여성스럽고 차분하다. 타고난 미인이며 섹시한데다 착하기까지 하다. 강한 척 하지만 마음 여린 연욱과는 반대로 외유내강의 표본이며, 범인 잡을 줄만 알았지 일상생활에서는 엄벙덤벙대는 필승보다 더 야무지고 현실적이다. 연욱의 말대로 '무슨 복을 타고 났는지' 갖출 건 다 갖춘 완벽한 여자, 뭇 남성들이 이상형으로 그리는 그런 여자다. 하지만 공평한 세상이 완벽한 그녀에게 나눠준 불행이 있으니 부모의 이른 죽음(후에는 그녀의 죽음까지)이다.
◈ 강직한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와 현모양처였던 어머니가 일찍이 돌아가시고 동생 연욱과 함께 단 둘이 살아왔다. 아버지의 연금과 살가운 자매의 정으로 그다지 어렵진 않았다. 그러나 영영 사라져버린 부모님의 온기 대신 자신의 체온만으로 동생을 따뜻하게 지켜줘야 했다. 그건 참으로 외롭고 쓸쓸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장학금을 탈 수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하고 아나운서를 꿈꾸었다. 그러나 갑자기 열병이 난 연욱때문에 최종면접을 놓치고 말았다. 그렇다고 취업재수를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어서 항공사에 취직을 하고 혼자 있을 동생이 안쓰러워 국내선만 탄다. 그런 와중에 연애도 했다. 같은 학교의 선배였고 좋은 집안에 좋은 성격을 가진 남자였다, 우유부단한 것만 빼고는. 그 남자와 결혼하고 싶었다. 어서 결혼해 이 쓸쓸한 생활을 청산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아에 동생까지 달고 시집오겠다는 그녀를 그의 집안에서 환영하지 않았다. 양친의 냉대와 그의 우유부단함에 그녀는 참 많은 상처를 입었다. 동생까지 상처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포기했다. 우연(사고)과 필연(미영의 소개)을 통해 필승을 만난 것이 그 즈음이다. 이제 그녀는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동생과 내가 상처 입지 않고 의탁할 수 있는 사람, 장남의 의무가 없는 사람, 많은 형제들 속에서 자라 맺힌 데 없고 털털한 사람, 나를 대단하게 여겨 동생까지 대단하게 여겨줄 것만 같은 사람. 그와 결혼하면 몸과 마음에 구석구석 스며있던 긴장을 풀어도 좋을 것만 같다. 거기서부터 그에 대한 사랑이 출발한 것인데 결혼해 살면 살수록 그 사랑은 더더욱 공고해진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필승을 바라보는 동생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 그녀는, 혼란스럽다.
* 차성준(김래원): 20세 29세. 대학생(아이스하키 선수) 아레나 관광호텔 기획홍보팀장
◈ 세련되고 준수한 풍모에 매사 자신만만하고 직설적이다. 냉소 섞인 삐딱한 말투와 시건방져 보이는 자세만 아니라면 귀족가문의 잘 다듬어진 왕자님 정도로 보일 법도 한데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누릴 것 다 누리고 자신이 가진 걸 십분 이용할 줄도 알면서 욕먹을 짓 따위는 이성적으로 피해갈 만큼 영리하기도 하다.
◈ 그는 사람들이 아버지를 가리켜 '졸부'라 하고 자신에게는 '졸부 2세'라고 하는 것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다면 아버지와 달리 합법적으로 벌어 합리적으로 쓰는 경영자가 될 생각이다. 졸부의 꼬리표를 떼고 건강한 부자의 모델을 선보이고 싶다. 아버지와 사이가 나쁜 건 아니다. 그의 가족들은 쿨하다 못해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는 형과 누나의 뒷바라지를 핑계로 1년 중 300일 이상을 미국에 머물고 아버지는 정부의 집에서 출퇴근을 해도 집안은 아주 평화롭다. 현재의 부와 사회적 위치를 무너뜨리지만 않는다면 각자의 자유(방종)를 암묵적으로 묵인해 주는 게 그들 부모의 입장이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그는 당연히 개인적이고 냉소적이다. 어쩌면 그가 운동에 빠진 건 가족간의 애정결핍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가 교내 아이스하키팀에 들어간 건 중학교 1학년 때다. 그는 아이스하키라는 운동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차가운 얼음 위에서 격렬하게 부딪히며 흘리는 땀, 상반된 그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운동에 미쳐있던 그가 일탈의 시기를 맞는다. 불량써클 아이들이 급우들에게 상습적으로 돈을 빼앗는 것을 보고는 참다못해 자신이 총대를 맨 게 사단이었다. 너희들이 원하는 돈 다 줄테니 아이들에게 빼앗지 말아라. 그때부터 일주일에 한번씩 자신의 용돈을 아껴 그들에게 건넸다. 그랬더니 점점 원하는 액수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비굴해졌다. 결국 그는 돈으로 아이들을 부리는 '숨은 짱' 이 되었다. 그 후로 그는 운동마저 팽개친 채 그 아이들과 어울려 (비밀리에)비행을 일삼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진 게 특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 그대로 그들은 어둠의 자식이었고 자신은 신의 자식이었다. '돈과 돈이 파생시키는 권력의 위력'앞에서 사람들은 무력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에 대해, 인생에 대해, 진실에 대해 다소 삐딱한 시각을 갖게 된다. 그렇게 빛과 어둠을 오가며 방황하던 그는 다시 아이스링크로 돌아와 잘 생긴 외모와 실력 덕분에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는 포워드가 되었고 체육특기자로 대학에 입학해 현재에 이른다. 속내야 어떻든, 남들이 어떻게 보든, 그는 아쉬울 게 없는 황태자다. 인생을 의지대로 계획하고 실천할 자신도 있다. 하지만 연욱을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그의 인생계획은 늪에 빠진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크게 집착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갖고 싶으면 가질 능력이 있었고 영 힘들 것 같으면 포기하면 그만이었다. 그게 안다치는 방법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만큼 그는 영리하다. 그러나 연욱에게만은 그게 통하지 않는다. 그에게 연욱은 갖고 싶지만 온전히 가질 수 없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존재다. 그녀로 인해 한번도 다쳐본 적이 없는 자존심이 끊임없이 상해도 절대 놓지 못한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결국 난생 처음으로 사람에, 사랑에, 그 진실성에 집착하면서 광기도 보이고 스스로도 상처를 받지만 사랑하는 방식이 틀렸다는 걸 깨달은 건 이미 그녀의 마음이 모두 떠난 뒤의 일이다.
* 이수진(왕빛나): 24세~ 아레나호텔 비서실 근무.
미모가 빼어나고 영민하며 두뇌회전, 판단력이 빠르다. 감정을 결코 드러내지 않으며 뭐 하나 흐트러짐이 없다. 그런 성격 때문에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해 오해를 받을 때도 있다. 반면 그런 성격 때문에 차회장의 신뢰를 얻는다. 아레나호텔은 선배의 소개로 입사한다. 전임비서였던 선배가 차회장과 내연의 관계를 맺으면서 물러나게 되자 그녀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처음 입사해서는 단순한 비서업무만 보아왔다. 그런데 상사인 남실장이 지병으로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우게 되자 그녀가 남실장의 비밀업무까지 맡게 되었다. 차회장은 임시방편으로 맡긴 것이었는데 당돌하고 깔끔하게 처리하는 걸 보고는 차츰 중요한 일을 맡기게 된다. 공공관서나 경찰서에 정기적으로 상납을 하고, 호텔에 문제가 생겨 기관장을 구워삶아야 하는 자리에서도 능수능란하게 사람들을 대하고... 그녀는 차회장에게 없어서는 안될 손발이 된다. 그 전까지 그녀는 단지 캐리어우먼으로서의 경력을 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호텔의 비밀을 알게 되고 성준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은밀한 야망이 생긴다. 성준을 통해 신분상승을 하리라는... 선배는 단지 정부로 머물지만 자신은 미래의 호텔오너의 안주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달라진다. 단지 직업인으로서 차회장의 신임을 얻는 게 아니라 장차의 며느리로서의 신임을 얻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성준에게도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계속 발생시키며 그의 시선을 잡으려 한다. 그런데 연욱이라는 여자경찰이 자꾸 눈에 거슬린다. 급기야는 성준이 연욱과 결혼을 하겠다고 하자 그녀의 공격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 김상희(오승은): 17세 26세. 연욱의 친구. 고1 아레나호텔 기획홍보팀.
연욱과 달리 현실적이고 야무지다. 연욱이 성숙한 체 하며 뜬구름 잡느라 허우적대는 낭만파라면 상희는 조용히 현실을 헤쳐나가는 실속파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성준의 추천으로 아레나 호텔에 입사한다. 부모님이 시골의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하자 혼자 살다가 독립해나온 연욱과 합친다. 그녀는 귀엽고 훌륭한 친구이며 동거인이다. 요리도 청소도 참 잘한다. 말하지 않아도 사람의 속내를 읽어내는 재주가 있어 수시로 연욱의 가려운 속을 긁어준다. 그녀는 그 나이에 가질법한 큰 꿈이 없다. 세상에 대해 부정적이지도 않으면서 터무니없는 낙관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뿐이다. 일년 내내 열심히 일 하다가 일년 휴가를 겨울에 몰아 발리 같은데서 유유자적 놀다 오는 것이 그나마의 꿈이다. 그만큼 그녀는 소박하고 현실적이다. 그래서 연욱이 형부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을 때 믿지 않았다. 그녀도 필승을 잘 안다. 연욱이 언니의 결혼을 반대할 때부터 보아왔고 이젠 그녀도 필승을 오빠처럼 따르고 좋아한다. 하지만 형부를 사랑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가 않는다. 그런데 옆에서 지켜보자니 연욱의 감정은 나날이 커져만가고 있다. 심상치가 않다. 정말 사랑하는 것 같다. 옆에서 말리기도 하고 보기 애달플 때는 도움도 주면서 그녀는 차츰 연욱의 사랑에 동화되어 간다. 결국 그녀는 연욱의 등을 떠민다. 가라, 그 사람한테. 사람들이 돌 던지면 나 불러. 행주치마에 다 받아내서 조그만 성을 쌓아줄게. 부실시공 안할테니까 그 성에서 살어, 둘이서만...
* 차회장(한인수): 50대 60대. 아레나 관광호텔(특2급) 회장. 성준의 아버지.
80년대에 의사·기자·교수 등 소위 인텔리 계층에 불어닥쳤던 부동산 투기바람에 편승해 수백억원대의 거액을 챙겨 현재의 호텔을 인수했다. 서울 외에 경주와 목포에 소규모의 호텔을 더 갖고 있다. 그는 호텔을 특1급으로 키울 생각이 없다. 판만 컸지 실속없는 장사는 그는 안한다. 2급이지만 제법 쏠쏠한 이 상태가 그의 구미에 맞는다. 명분보다는 실리, 그게 그의 인생철학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합리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굳게 믿는다. 많이 배우지 못한 恨이 있어 정치, 경제, 문화 다방면으로 독학을 해 박학다식하다. 비록 학벌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만은 아닌 자발적인 호기심과 학구열이 그렇게 만들었다(그의 집무실은 노석학의 서재 같다). 그래서 미국 명문대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교수직을 하고 있는 큰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중간에 딸아이를 두고 마흔이 다 되어 얻은 둘째 아들 성준에게도 기대하는 바가 크다. 어차피 큰아들은 학계 쪽으로 굳은 몸, 자신을 닮은 성준에게 호텔업을 물려줄 생각이다. 그는 성준이 이중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자식에 대한 믿음은 바로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그는 스스로를 믿듯이 성준을 믿는다. 문제를 일으켜도 조리있게 자신의 입장을 또박또박 설명하는 그 아이가 어찌보면 대견하기도 하다. 아내는 딸의 출산과 육아를 핑계로 미국에 머물고 있다. 부부사이가 좋지 않아 사실상 별거상태고 그는 가끔 전임비서였던 정부의 집에서 출퇴근한다.
* 이미영(임성민): 27세~ 스튜어디스. 연정의 대학선배, 직장선배.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명확한 성격. 외롭게 자란 연정이 속을 다 터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오랫동안 연정은 물론 연욱까지 지켜봐온 사람으로 그들 자매에게 특별한 애정이 있다.
< 필승의 가족들 >
* 필승부(심양홍): 60대 초반
일산 근교에서 농사를 짓다가 신도시가 생기자 땅을 팔아 큰아들의 고깃집을 개업했다. 술 좋아하고 사람좋아하는 허허실실형. 가게 한 구석에 앉아 손님들이 남기고 간 소주를 홀짝홀짝 마시는 게 낙이다.
* 필승모(김지영) 60대 초반
잔소리가 많지만 수더분하고 정 많은 아줌마.
* 큰 형 (필국. 박은수) 37세
일산 근교에서 생고깃집을 한다. 욕심은 없으면서 착하고 근면성실한 장남.
* 둘째 형(필남. 순동운)
은행원.
* 셋째 형(필영. 손민우)
큰 형의 일을 돕고 있다.
* 막내(필준. 백종현) 25세
복학생. 공학도.
* 큰 형수(김동주)
* 둘째 형수
* 셋째 형수(순미. 김정수) 30세
셋째 며느리로서 고깃집 일을 돕고 있다. 바지런하고 싹싹해 장사에 큰 도움이 된다. 형제들 중에서 필승을 가장 좋아하고 가장 친하다. 항상 막내며느리였다가 연정이 들어오자 연정은 물론 연욱까지 친동생처럼 챙겨준다. 편모슬하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맏이로 자랐기 때문에 그들 자매의 고충을 잘 이해한다. 손아래 동서가 잘난 스튜어디스라는 것도 질투의 대상이 아니라 자랑의 대상이다. 후에 연정이 죽자 아기를 잠시 맡아 키운다.
< 경찰서 식구들 >
* 오반장(명계남): 40대 후반 이름 오제표. xx 경찰서 형사과 강력3반 반장.
형사 경력 20년이 넘은 베테랑. 걷는 태, 눈빛, 손짓만 보고도 범죄자를 가려낼 만큼 실전경험이 많다. 항상 부하형사들을 갈구고 닦아세우지만 속정이 깊은 상사. 그가 항상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다. '인간을 사랑할 것''형사는 저 좋아서 해야 하는 일' 그의 이 두 가지 지론에 따르면 미련한 형사가 범인 검거율이 높다. 범인이 제 아무리 지능적인 놈이라도 미련하게 끈질기게 쫓는 형사한테는 당할 재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끈기와 곤조의 필승을 주시한다.
* 김형사(이대연): 40대 초반 이름 김우중. 강력반원.
그 나이에 10년째 승진을 안해(전업할려고) 만년경장이다. 짠지만큼이나 짠 월급봉투와 격무에 시달려 전업을 생각한지 어언 10년, 그동안 생각 안 해본 직업이 없다. 10년 동안 범죄수사가 아니라 직업수사를 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간다 간다 하면서 애 셋 낳고 가는 성격에 소심하다. 그러나 무척 가정적이라 그것만큼은 필승이 존경하는 부분이다.
* 강형사(김승민) : 20대 후반 이름 강성호. 강력반원.
유도대학 출신으로 별명이 '조폭''깍두기'일만큼 체격이 우람하지만 모델 뺨치게 패션감각이 뛰어나다. 영리하고 민첩하기도 하다. 강력반에서 힘이나 기로 상대방을 제압해야 할 때 제일 앞세우는 인물이다.
* 최과장(김승환) : 30대 초반 이름 최주형. 형사과 과장.
경찰사회에서 소위 성골이라 불리우는 경찰대학 출신으로 20대 후반에 이미 경정(경찰대학 출신은 경위부터 출발한다. 경위 경감 경정) 으로 고속승진을 하고 30대 경찰서장(총경)을 꿈꾸는 야심가. 자신감과 투지가 대단하고 냉혹하다. 연륜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훨씬 윗길인 오반장에게조차도 하대를 할만큼 오만해 일선형사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 특히 필승과는 앙숙지간인데 그의 안하무인에 노골적으로 대드는 게 바로 필승이기 때문이다. 후에 필승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 줄 거 리 】
연욱과 필승의 첫 만남은 우연이었다. 그리고 그 날 둘 모두 일진이 안좋았다. 필승은 용의자를 추격하다가 총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 연욱은 삥뜯기하는 여고생들과 시비가 붙었던 것이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필승은 싸움이 붙은 여고생들을 모두 파출소로 연행하고, 연욱은 자신마저 깡패 취급 당하는것이 화가 나 독설을 내뱉다가 입가에 상처를 입는다. 필승을 무식한 꼰대라고 단정한 연욱은 간단한 응급조치를 받으며 필승의 수갑집을 슬쩍한다. 골탕이나 먹일려고 했던 것인데 장난을 치던 끝에 수갑이 철컥 닫히고 만다. 수갑이 없어진 걸 안 필승은 잡히기만 하면 작살을 내겠다고 벼르고 또 벼른다. 그런데 그 여자애가 수갑을 찬 채 자기 발로 나타난다. 하필이면 사랑하는 연정의 동생이라는 이름으로!
연욱은 너무 억울하고 분하다. 세상에서 제일 잘나고 예쁜 언니한테 평범한 경찰이라니... 이건 돌아가신 부모님도 벌떡 일어나 반대할 결혼이었다. 한편으론 '나'라는 혹 때문에 너무 낮춰 상대를 고른 건 아닌가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전에도 그랬다. 언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자신 때문에 그를 포기했었다. 또 한편으로는 착한 언니지만 결혼해서 자기 가정을 꾸리면 달라지겠거니, 아이를 낳으면 그 애가 먼저겠지, 내심 불안하기도 하다. 이래저래 연욱은 필승이 마음에 안든다. 그래서 선언한다. 저 경찰과 결혼하면 죽어버릴 거야.
필승은 연욱이 얄밉지만 태도를 백팔십도 바꾸기로 한다. 연정에게 동생은 그녀의 모든 것이다. 동생이 허락하지 않으면 이 결혼도 무효라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을 마땅치 않아 하는 예비처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노력과 고초를 마다하지 않는다. 선물공세, 밥 사주기는 기본이고 유치장 관광에 잠복근무 동행(스릴만점이라고 꼭 따라가고 싶다고 해서)까지 허락한다. 그럴수록 연욱의 방해작전은 한층 더 뜨거워진다. 언니 험담 늘어놓기, 스캔들 조작하기, 전화 따돌리기, 데이트 방해하기... 수위는 점점 높아지는데 필승은 그런 연욱이 조금씩 귀여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필승은 일전에 놓친 용의자가 아레나호텔 나이트클럽에 나타났다는 첩보를 얻어 그리로 달려간다. 호기심이 발동한 연욱은 몰래 따라갔다가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어리버리해 보이기만 했던 그가 거칠고 민첩하게 범인을 잡는 모습은 열일곱 소녀의 마음을 돌려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연욱은 강력반 한형사에게 필이 꽂혔다. 그래서 언니와 필승의 결혼을 허락한다. 연정과 필승은 왜 갑자기 연욱이 마음을 바꿔먹었는지 아리송할 뿐이다.
연욱을 처음 만나던 날 성준도 일진이 안좋았다. 경기 중에 상대선수들과 난투극이 벌어져 그 주동자로 파출소에 끌려왔는데 웬 형사(필승)가 고1짜리 여학생 때문에 길길이 뛰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학생이 하는 말이 거칠긴 해도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었다. 고 계집애 맹랑하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경기티켓을 선물한다. 그런데 그녀가 오지 않는다. 그는 불쾌해진다. 그는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는 실력있고, 잘 생기고, 돈 많은 아이스하키 선수다. 자신이 경기티켓을 먼저 건넨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연욱은 자신을 돌보듯 한다. 연욱을 여자로 본 건 아니었다. 그저 만나면 재미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아이일 뿐이었는데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괘씸해서 찾아가 보니 연욱은 필승을 언니에게서 떼어놓느라 정신이 없다. 결국은 거기에 그도 이용당한다. 연욱은 필승에게 유치장에 갇혀보고 싶다는 엽기적인 부탁(강압적인 요구)을 했고 얼떨결에 그도 유치장에 갇힌 것이다. 사실 연욱은 성준이 귀찮았다. 친구 상희는 킹카라고 하지만 언니를 구제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는데 자꾸 따라 붙는것이 싫었다.
반대로 성준의 호기심은 증폭된다. 유치장에서 풀려난 성준은 왜 그녀가 언니와 필승의 결혼을 반대하는지 그 속내를 알게 된다. 그녀에게 언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고, 소중한 사람에게 소외당할지도 모른다는 외로움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언니의 결혼식 날, 그녀의 눈물을 보고는 기분이 묘해지는 걸 느낀다. 하지만 그 뒤로 2년 동안 그는 그녀를 보지 못한다. 연욱이 연락도 없이 이사(신혼집으로)를 갔고, 학교로 찾아가면 되겠지만 그런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에게 연욱은 여전히 '아이'일 뿐이다.
온갖 해프닝 끝에 연정을 얻고 덤으로 연욱까지 얻은 필승은 아직도 연욱이 얄밉다. 일부러 그러는건지 우연인지 툭툭 끼어드는 바람에 바람직한(?) 신혼을 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연욱이 동생처럼 딸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금이야 옥이야, 오빠가 동생을 돌보듯 엄마가 딸을 키우듯 하면서 흐믓해한다. 한편으론 매일 티격태격이다. 두 사람은 결혼만들기의 최민수와 심혜진이나 된 양 식사습관에서 욕실사용법까지 별별 유치하고 시시껍절한 싸움으로 으르렁거린다. 그런데 깔끔한 쪽은 필승이고 그렇지 못한 쪽은 연욱이라 필승은 저것이 커서 시집이나 갈지 걱정이다. 그래서 밥을 비벼 양푼째 끼고 먹는 걸 보면 예쁜 접시에 담아 깔끔하게 먹으라고 가르쳐도 보지만 연욱은 남자랑 사는 게 이렇게 귀찮은 거라면 시집 같은 건 안가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아웅다웅하면서도 가족으로서의 정을 쌓아가며 연욱은 고3이 된다.
고3이 된 연욱은 요즘 머릿속이 복잡하다. 수능시험은 얼마 안남았는데 모의고사 성적은 바닥이고 딱히 대학 갈 생각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고, 온통 오리무중이다. 그런데 언니는 계속 대학진학을 강요하고 필승은 아버지나 된 양 사사건건 간섭이다. 필승은 학부모 상담을 하러 와서는 죄인처럼 고개를 조아리고 경찰서내 독서실에 앉혀놓고 감시하기도 한다. 연욱은 언니의 사랑이, 형부의 간섭이 참 성가시고 싫다. 그러거나 말거나 필승은 계속 사랑을 베푼다. 경찰서에서 대기를 하다가도 잠깐 들러 새벽잠 깨워 도시락 두개 싸들려 보내고, 방 청소는 물론 마구 벗어던진 속옷도 빨아넌다. 공부를 잘 하는지 어쩌는지, 남학생들이 찝쩍거리지는 않는지, 틈틈이 야자시간에 정찰도 나가고 사식(야참)도 넣어준다. 이제 연욱은 아내인 연정뿐만 아니라 필승 그 자신에게도 세상에 둘도 없이 사랑하는 존재인 것이다. 연정은 그런 필승이 고맙다. 그러니 필승의 가족들한테도 지극정성이다. 그렇게 연정과 필승은 만족스런 결혼생활을 지속해나가지만 차곡차곡 쌓인 연욱의 불만이 터지는 일이 생긴다.
그날은 연욱의 생일이었다. 연정은 새벽부터 서둘러 정성스런 생일상을 준비하고 필승은 특별히 권투 글러브를 선물한다. 오늘부터는 만18세를 넘어 성인이 되었으니 훅을 날리듯 멋지게 세상을 향해 도전해보라는 뜻이다(연욱은 그동안 필승에게 복싱을 배워 제법 할 줄 안다). 그러나 연욱은 일년 365일 중 생일이 가장 싫다. 아침엔 생일잔치를, 밤엔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야만 하는 그 날이 정말 싫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 우울해진 연욱은 그날 밤 제사에 불참하고 오히려 평소 알고 지내던 남자아이와 함께 술을 마시고 오토바이를 타며 갑갑한 현실을 잊어보려 한다. 사고가 생겨 파출소로 넘어가지만 않았으면 그런대로 잘 버틸 수 있는 하루였다. 파출소의 아는 순경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달려오는 필승과 연정. 연정은 속이 상해 눈물을 터트리고, 연욱은 마음이 아프면서도 더 삐딱하게 나간다. 그러자 필승은 손찌검을 하고 미안해하는 필승에게 연정은 오히려 잘했다고 한다. 이젠 필승이 정말 가족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연욱은 분노가 치솟는다. 내 뺨을 쳐? 네가 뭔데? 네가 아버지야? 제발 내 일에 참견 마! 홧김에 쏟아낸 말이었지만 연욱은 주워담을 생각이 없다. 오히려 생각할수록 형부가 괘씸해진다. 왜 아무도 내 맘을 모르는 걸까. 연욱은 우울과 분노로 범벅이 된 채, 필승이 기껏 만들어놓은 눈사람을 짓밟아버리고 집을 나온다. 그저 혼자 있고 싶을 뿐이다. 연욱은 청량리역에서 아무 기차나 집어타고 경주에 내리지만 지갑을 잃어버려 곤경에 처하고, 구세주처럼 성준과 마주친다.
대학교 3학년인 성준은 (심한 부상을 당해) 진로문제를 고민하느라 경주에 있는 아버지의 호텔에 잠깐 머물고 있었다. 사실 그는 연욱을 거의 잊고 있었다. 하지만 가출한 것임에 틀림이 없는 그녀의 행색을 보며 그녀에 대한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또렷이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연욱은 여전했다. 성숙해졌다는 것만 빼고는 게다가 연욱은 그의 진로고민을 너무나 쉽게 해결해준다. 그의 호기심은 '아이'에서 '한 여자'에 대한 관심으로 바뀐다. 그런데 연욱의 형부가, 한형사가 들이닥친다. 필승은 그를 못 알아보고 단박에 성추행범으로 몰아붙이더니 연욱을 데리고 표표히 사라진다. 성준은 연욱의 가족들만 생각하면 의아하다. 가족간의 정을 별로 못느끼고 살아온 그로서는 그들 자매의 사랑도, 처제형부의 정도 몹시 낯설 뿐이다.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리고 상희를 다그쳐 경주로 달려간 필승은 우여곡절 끝에 연욱을 찾아내 수갑까지 채운 채 서울로 데려온다. 그리고는 형님의 고깃집으로 가 연욱에게 술을 따라준다. 너 술 잘 마시지? 이제 미성년자 딱지 뗐으니까 실컷 마셔. 연욱과 필승은 내기하듯이 술을 마신다. 술이 오른 필승은 연욱에게 도대체 뭐가 불만이고 뭐가 문젠지 솔직히 털어놓으라고 하고, 역시 술이 오른 연욱은 머뭇거리다가 하나 둘 얘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막막한 미래, 언니와 형부에게 짐이 되는 것 같은 부담감, 이젠 사진을 봐야만 기억나는 부모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어정쩡한 이 시기. 필승은 쓴웃음이 난다. 자신이 딱 연욱의 나이만 할 때 하던 고민들이다. 한때는 지구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배신감과 절망감...
필승은 연욱에게 체험에서 우러난 이런저런 충고를 해주며 글러브를 끼워준다. 나를 '맘에 안드는 세상''나를 몰라주는 세상'으로 생각하고 실컷 치라며. 처음엔 주저주저하다가 한 대 두 대 치기 시작하던 연욱은 실컷, 미친 듯이 필승을 치다가 주저앉아 펑펑 운다. 그러자 암담했던 미래가 밝아오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형부처럼 흔들림없는, 낮지만 진실한 삶을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폭탄선언을 한다. 나 형부처럼 멋진 경찰이 될 거야.
연욱은 언니의 반대와 필승의 찬성 속에 경찰채용시험준비를 한다. 필승이 시험준비를 도와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는 그녀가 강한 여자가 되어 이 세상 거침없이 살아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연정은 다르다. 왜 하필 경찰인가. 남편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경찰로 산다는 게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보통 부모의 마음처럼 동생이 남들과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 열여섯에 부모를 잃고 가장이 된 그녀로서는 '남들과 같은 삶'이란 것이 그만큼 절실하다. 그녀는 시험준비를 도와주는 필승과 처음으로 부부싸움을 한다.
서울로 돌아와 운동을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한 성준은 연욱이 여경시험을 본다는 사실을 알고 또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다. 연욱은 항상 그랬다. 어디로 튈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성준은 시간이 갈수록 연욱에게 끌린다. 그동안 여자들에게 써먹던 수법을 쓰면 온갖 욕이 되어 돌아온다. 돈 되게 밝히는 것처럼 얘길해도 딱 분수만큼만 필요로 한다. 그녀 처지로는 평생 가보지 못할 곳에 데려가도 꿀림이 없고 당당하다. 이제껏 만나본 사람들 중에 가장 순수하고 솔직한 사람이다. 성준은 연욱을 통해 여자에게 갖고 있던 편견들이 하나씩 깨져나감을 느낀다. 그녀가 입교하는 날, 성준은 여자친구를 군대보내는 듯한 기분에 피식 웃고 만다.
시험에 합격한 연욱은 6개월간의 교육을 위해 중앙경찰학교(충주)에 입교한다. 첫날 밤, 손을 흔들며 멀어져가던 언니부부를 생각하며 연욱은 외로움을 느낀다. 이렇게 오래 언니와 떨어져 있어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처음 맞는 객지생활이 두렵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연욱은 필승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경찰로서의 동질감을 교류하는데 문득문득 그가 참 보고싶어진다. 언니보다도 더... 필승도 연욱의 방이 비어있는 걸 보며 허전함을 느낀다. 신혼초에는 귀찮고 얄미웠는데, 통제불가능의 망아지 같았는데, 그 부재감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그래서 첫 면회를 가는 날은 마치 군에서 첫 휴가를 나올 때만큼이나 설레인다. 면회를 온 건 연정과 필승뿐만이 아니다. 외박을 나온 연욱은 성준의 출현에 황당해한다. 이럴만큼 그와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준도 그냥 바람 쐬러 온 거라며 너스레를 떤다. 그 날 밤, 필승과 성준은 한 방을 쓰게 되는데 성준은 필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일전에 자신을 성추행범 취급을 하지 않았는가. 성준이 보기에 필승은 공권력을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무식한 형사일 뿐이다. 필승도 성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일단 연욱에게 붙는 남자는 의심하고 본다. 우리 고운 처제, 누가 망가뜨릴까 겁난다. 한 방을 쓰면서 필승과 성준은 악감정만 쌓여간다. 또 다른 방에서는 연정과 연욱이 오랜만의 회포를 푼다. 연정은 성준이 마음에 든다. 동생이 그와 친해지기를 바란다.
면회를 갔다온 이후, 성준은 호텔 기획홍보팀의 팀장으로 첫 출근을 한다. 면회를 하고 온건 자신이 정말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기분전환차 간 것이었다. 성준이 팀장으로 오자 호텔 내 여직원들이 술렁인다. 여직원들에게 그는 모든 걸 다 갖춘 황태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바라기하는 여직원들과 달리 수진은 얼음여왕처럼 꼿꼿하다. 몇 달 전 입사한 그녀는 가끔 차회장을 보러오는 성준과 마주치곤 했다. 이젠 업무상 거의 매일 드나드는데도 그녀의 무표정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야망이 들끓고 있다. 차회장의 신임을 받기 시작한 수진은 성준이라는 한 남자, 미래의 호텔오너가 될 그에게 이미 관심을 갖고 있다. 무관심은 작전의 일환이다. 그녀는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자꾸 연출하면서도 무관심을 가장한다. 성준은 수진이 매력있는 여자라고 생각하지만 얼음여왕 같다. 게다가 그는 요즘 연욱을 생각하며 피식피식 혼자 웃곤 하는 중이다.
언니와 형부가 면회를 다녀간 이후, 연욱은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는다. 집이, 언니와 형부가, 스파게티와 친구들이, 자유로운 시간들이 그립다. 아니 어쩌면 필승이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자꾸 필승의 얼굴이 떠오른다. 빡빡한 훈련 중에도, 잠을 청하다가도, 사격을 하다가도. 그럴때면 전화를 해 실없이 굴어보기도 한다. 나 형부 되게 좋아하나봐. 표적이 왜 자꾸 형부얼굴로 보이지? 그러면 필승은 폭소를 터트린다. 내가 그렇게 미워? 쏴죽이고 싶을 만큼? 연욱은 전화를 끊으며 허전함을 느낀다. 연욱은 자기가 왜 그러는지 모른다. 사랑의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한 걸 아직 모른다. 그즈음, 연욱은 짝사랑하던 남학생이 다른 여학생과 사귄다는 소리를 듣고는 완전히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는다. 게다가 언니와 형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소외감이 그녀를 외롭게 한다. 결국 연욱은 영하의 추운 겨울에 산악훈련을 하다말고 대열에서 빠져나와 그 길로 서울로 올라온다. 그리고는 또 폭탄선언을 한다. 나 경찰 안 해!
연정은 지금부터 대입준비를 해도 늦지 않다며 대찬성이다. 필승은 맞불작전을 놓는다. 그래? 그럼 하지 마. 그리고는 네 멋대로 살아보라며 무관심을 가장한다. 연욱은 화가 나고 서운하다. 이젠 나한테 관심도 없구나. 그러자 눈 앞이 깜깜해진다. 암담하다. 관심을 받고 싶다. 언니가(언니는 언제나 연욱에게 관심을 가져주므로) 아닌 형부의 관심을. 결국 연욱은 필승의 관심을 끌려면 자신이 경찰이 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학교로 향하는 차 안에서 연욱은 필승과 자신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다. 형부가 그때 나 수갑 채웠었잖아요. 복수하는 거예요(이후로 연욱은 존댓말을 한다). 필승은 갑자기 존댓말을 하는 연욱에게 이질감을 느낀다. 그건 이젠 다 컸구나,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구나, 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는 흐믓하기도 하면서 낯설기도 하다. 그렇게 수갑으로 연결된 채 고속도로를 달리는 두 사람. 하지만 전과는 다르다. 그때는 처제와 형부로서 연결돼 있었지만 지금은 연욱의 마음 속에 이미 한 남자가 들어와 버렸다. 형부라는 이름의 남자가. 학교 근처에 도착한 그들은 철공소로 향한다. 필승이 수갑열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수갑이 잘려져 나가는 걸 보며 연욱은 불길한 예감을 한다. 앞으로 참 힘들 거라는. 필승은 연욱을 들여보내고 나오며 자꾸 뒤를 돌아본다.
교육이 끝나고 필승과 같은 경찰서에 발령받아 첫 출근을 한 날, 연욱은 일부러 강력반에 와 발령신고를 한다. 고등학생 때부터 연욱을 보아온 강력반 식구들은 연욱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필승은 연욱에게 최고의 수갑을 선물한다. 같은 경찰서 안에서 연욱의 시선은 자꾸 필승에게로 향한다. 해바라기처럼. 그런 감정을 언니와 형부에게 숨겨야 한다는 건 무척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독립을 모색하지만 언니와 형부의 반대로 무산된다. 그러던 어느 날, 연욱은 간통건으로 현장증거를 잡기 위해 아레나호텔에 출동했다가 수진과 맞부닥친다. 수진은 호텔의 이미지가 있으니 룸을 열어줄 수가 없다고 한다. 연욱은 수진과 크게 싸우고 성준이 나타나 일을 수습한다. 연욱은 갑자기 그가 나타나자 놀라워한다. 그녀는 이제껏 그가 호텔오너의 아들이라는 것도, 이 호텔 기획홍보팀장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친구 상희를 연욱 몰래 기획홍보팀에 앉혀놓았었다. 연욱은 뭔가 단단히 속은 것 같은 기분에 성준에게 화를 내고 성준은 오해를 풀려하지만 더 꼬이기만 한다. 상희가 가운데서 중재를 하고, 연욱은 상희의 설득으로 심하게 화낸 걸 사과하러 가지만 수진과 함께 있는 걸 보고 돌아선다.
요즘 수진은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건 성공적이었다. 성준은 자기를 본 척 만 척 하는 그녀가 계속 거슬렸다. 그런데 이제 그녀가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 같다. 그는 회사동료로서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녀를 대하며 인간적인 유대감을 쌓아간다. 수진은 연욱의 출현으로 잠깐 긴장하지만 일개 여경이라는 것을 알고는 안심한다.
연욱은 동료로서 또는 선배로서 필승을 가까이에서 접하게 되자 그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되고 아직도 직장생활을 하는 언니가 아내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게 못내 미안하다. 그래서 언니 대신 아내노릇은 그녀가 도맡아한다. 잠복근무지까지 도시락과 속옷을 나르고, 간만에 집에 들르면 온갖 서비스를 해주고,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사소한 업무도 대신 해준다. 3년 전 필승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일들을 고스란히 갚는 것이다. 하지만 필승은 다르다. 손발이 되어 궂은 일을 도맡아 해주는 서순경이 고마우면서도 격의 없이, 때로는 버릇없이 굴던 처제가 그립기도 하다. 그래서 예전처럼 짖궂은 장난을 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연욱은 민망할 정도로 버럭 화를 낸다. 그녀는 아직도 아이 취급을 하는 필승이 서운하다. 처음엔 필승 역시 내외를 하는 연욱에게 서운해했지만 차츰 그녀에게 감정변화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챈다. 하지만 설마, 하며 그냥 넘겨버리곤 한다. 연정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 대신 필승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쏟는 동생이 고맙지만 문득문득 동생에게서 낯선 표정, 낯선 분위기가 느껴진다. 때로는 남편을 바라보는 동생의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음을 체감하기도 한다. 그래서 연욱에게 장난처럼 떠보지만 연욱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일축해버린다. 마침 그때 연정이 임신을 해 집안에는 긴장감 대신 평화가 찾아든다. 연욱은 첫 조카가 생긴다는 게 무척 기쁘지만 너무나 좋아하는 필승을 보고는 문득 서운함을 느낀다. 저렇게 기다렸구나, 언니의 배를 빌어 태어날 아기를. 연욱은 언니가 그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게 기쁘면서도, 외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서글퍼진다.
그 즈음, 강력3반은 오래전부터 수사하고 있던 호스트바를 덮칠 계획을 세우고 함정수사에 쓰일 미끼로 연욱과 다른 여경 두 명을 차출한다. 드디어 작전 개시일, 연욱과 여경들은 손님으로 가장해 적진에 뛰어들고 밖에서 대기중이던 강력반과 기동대가 급습한다. 연욱도 민첩하게 적들을 제압해 나가지만 연이어 터지는 공포탄 소리와 비명소리에 순간 멍-해진다. 사격연습을 할 때도 괜찮았건만 1,2년에 한번쯤 일어나는 그 증세가 도진 것이다. 그 순간 연욱은 위기에 처하고 필승이 연욱을 구하려다가 칼을 먹는다. 구급차 안에서 연욱은 필승을 부등켜안고 울부짖는다. 죽지 마. 형부 죽으면 난 뭐야. 청상과부가 될 언니걱정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난 뭐야' 소리가 튀어나온 걸 연욱은 모른다. 그 상황을 동료형사들(그들은 저런 처제 있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한다)로부터 전해들은 연정은 마음이 복잡하다. 문득문득 연욱에게서 느껴지던 낯선 눈빛, 낯선 표정들이 새삼 떠오른다.
한바탕 병문안객이 휩쓸고 간 조용한 병실에서 연욱은 형부를 흘긴다. 다신 다치지 말아요, 피 흘리지도 말고. 안그러면 내가 죽여버릴 거예요. 그 말을 뱉는데 그만 눈물이 핑 돈다. 처제가 진심으로 날 걱정해주는구나 생각하니 필승도 울컥한다. 사랑스런 마음에 눈물을 닦아주는데. 참 이상하다, 기분이 묘해진다. 연욱도 마찬가지다. 찰나만큼의 짧은 시간, 둘 사이에 형언할 수 없는 미묘한 시선이 오가는데. 병실 밖에서 연정이 이 장면을 보고 만다. 이후 세 사람은 각자 물어볼 수 없는 질문 하나씩을 가슴에 품게 된다.
형부는 왜 갑자기 손을 치우고 딴청을 했을까...
처제는 왜 그렇게 묘한 눈길이었을까...
연정은 더더욱 복잡하다. 동생과 남편이... 심상치 않다.
동생을 볼 때마다 연정이 매번 느끼는 건 한가지에서 난 자매가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야 공통점을 발견한다. '한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남편이고 동생에게는 형부인 그 남자를... 처음 남편을 바라보는 동생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을 땐 선생님을 좋아하는 사춘기 여고생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잘 다독여주면 금방 제자리로 돌아올 것 같았다. 그런데 필승은 연욱을 구하려다 다쳤고, 병실에서 미묘한 시선을 나누는 그들은 단순한 처제형부 사이가 아니었다. 연정은 무척이나 혼란스럽다. 그래서 연욱이 독립하겠다고 했을 때 그녀는 말리지 못한다. 전에는 별 것 아니라고, 함께 살며 노력하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자신의 판단이 틀린 것이다.
이제 필승을 편하게 대할 수 없는 연욱은 다시 독립을 모색한다. 그 사건 이후로 연욱을 전처럼 대할 수 없게 된 필승도 말리지 않는다. 연욱은 상희와 함께 집을 얻어 독립을 하고 부서도 필승과 마주칠 일이 적은 교통계로 옮긴다. 마음은 자꾸 필승에게로 향하고, 의지는 필승을 언니에게로 밀어내는 것이다. 또 다른 의지는 성준에게로 향한다. 연욱은 성준의 부탁대로 복싱을 가르쳐주기 위해 만남이 잦아진다. 수진이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연욱은 성준을 만나면서 편해지는 걸 느낀다. 비록 의지로 그와 가까워지긴 했지만 혼자만의 고독한 전쟁을 벌일 때만큼 외롭지가 않다. 그녀는 생각한다. 어쩌면 이 미로를 빠져나가는 방법은 성준에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필승은 연욱이 독립을 하고 부서마저 옮겨 부딪힐 일이 없자 묘한 허탈감을 느낀다. 연욱이 쓰던 방에서 뒹굴기도 하고 미처 가져가지 못한 상자들 속에서 연욱의 추억을 꺼내보기도 하며 혼자 웃곤 한다. 한편으론 연욱이 성준과 자주 만나는 것을 알고는 몹시 불쾌해한다. 필승은 여전히 성준이 마음에 안들어 연욱에게 조심하라는 충고를 해주다가 말다툼까지 벌인다. 연욱은 자기마음을 모르는 척 하는 그가(필승은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해는 하면서도) 서운하고, 필승은 이제 연욱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씁쓸하다. 말다툼 이후 소원해진 두 사람은 연정의 출산으로 화해를 한다.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행복해하는 연정과 필승. 그걸 보며 연욱은 언니의 행복을 지켜줘야 한다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연욱은 성준에게 가슴 아픈 제의를 한다. 우리 한번 사귀어볼래요? 농담처럼 말하는데도 성준은 웃지 않는다. 그는 심각한 일일수록 가벼운 척 말하는 연욱의 특징을 이미 간파했다. 남들 앞에서는 그러면서 뒤돌아 혼자 많이 아파한다는 것도. 연욱은 진지하게 받아주는 성준이 고마워 어퍼컷을 한 방 날린다.
연욱은 연정과 필승에게 남자친구라며 성준을 소개한다. 필승은 성준을 의심어린 눈초리로 관찰한다. 그게 질투임을 필승은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연욱과 필승이 가까워지자 수진도 긴장한다. 수진은 성준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한다. 그게 가능한 건 그녀가 차회장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비서업무는 물론 집사처럼 집안일까지 도맡아했던 비서실장이 지병으로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우자 자연스럽게 수진이 그 일을 맡게 되었고 성준의 사생활에 관여해도 될 만큼의 상황이 된 것이다. 수진은 차회장에게 성준과 연욱의 관계를 은밀히 흘리고 차회장은 성준에게 호통을 친다.
그즈음 경찰서에서는 최과장을 필두로 대규모의 교통사고 보험사기단 수사에 착수한다. 필승과 연욱도 차출된다. 연욱은 필승과 계속 부딪히는 것을 막기 위해 조용히 최과장을 찾아가 개인적인 이유를 대며 빼주기를 부탁한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필승도 최과장에게 자신을 빼달라고 한다. 최과장은 두 사람의 행동에 호기심을 갖는다. 사이 좋은 처제형부로 유명한 두 사람이 각자 찾아와 자신을 빼달라고 한다? 이때부터 최과장은 두 사람 사이를 예의주시하게 되고 심술궂게도 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 결국 연욱과 필승은 수사팀의 일원으로 매일 얼굴을 맞대게 된다. 연욱은 힘이 든다. 이제 겨우 성준과 잘 되어가고 있었는데. 필승도 비슷한 심정이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연욱과 필승은 일에 몰두한다. 사고다발지역에서 밤새 감시하고, 수십명의 용의자들을 미행하고, 사기수법을 연구하고,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진술을 확보하고. 연욱이 더 열심이다. 수사결과가 좋으면 승진심사에 걸려 있는 필승이 경장에서 경사로 승진하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사를 진행하던 중, 피의자를 속초지청에 인계할 일이 생긴다. 필승이 속초지청에 가는 날, 여자피의자가 여자경찰을 원해 연욱도 함께 가게 된다. 폭설이 아니었다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을까? 공교롭게도 그 날은 기록적인 폭설이 쏟아져 모든 길이 끊긴다. 필승은 비상책으로 국도로 빠져들지만 결국은 그마저도 끊겨 두 사람은 산장의 방을 빌어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눈 내리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오는 깊은 산속의 겨울 밤, 연욱과 필승은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눈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옛이야기로 깔깔거리지만 둘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는 긴장감은 숨 막힐 듯 두 사람을 조여온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충동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다. 연욱은 그동안 희미해진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감정이 오히려 깊어졌음을 느낀다. 이젠 옛날이 그리워도 돌아갈 수가 없다.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렇다, 그녀는 필승을 사랑한다. 열일곱부터 보아온 그를, 그의 모든 것을, 눈살 찌푸리며 싫어했던 나쁜 점까지도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필승 또한 그녀에게서 여자를 느낀다.
그 시간 연정은 긴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고 있다. 연욱이 독립하고 부서도 옮기고, 아기가 태어나고, 게다가 연욱이 성준과 사귀게 되자 연정은 마음을 놓았었다.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음을, 연욱의 감정은 단순한 바람이었음을 그녀는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폭설로 길이 끊기고 필승과 연락도 끊긴 그 날 밤, 연정은 연욱이 필승과 함께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연욱과 필승이 산장에서 미묘한 감정과 싸우고 있을 때 연정도 자신과의 싸움을 벌인다.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두 사람을 믿어야 한다고. 다음 날 늦게야 간신히 서울에 도착한 필승은 거짓말을 한다. 혼자 갔다왔다고. 모른 척 연욱에게 전화를 해 안부를 물으니 연욱도 거짓말을 한다. 어젯밤 집에 있었다고. 연정의 마음은 복잡다단하다. 거짓말을 한 두 사람에 대한 배신감, 한편으론 자신이 걱정할까봐 선의의 거짓말을 했을 거라는 이해심,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에 대한 걱정. 연정은 형언할 수 없이 복잡한 마음을 감추려 하지만 폭발할 일이 생기고 만다. 그동안 필승과 연욱이 파트너로서 같은 수사팀에 있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연정은 그 사실을 한달 넘게 모르고 있었다. 연욱은 일을 핑계로 한동안 집에 들르지도 않았다. 연정과 필승은 크게 다툰다. 그동안은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었다.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일이었기에 감정을 드러내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연정이 단단히 화가 났다. 필승은 연정의 오해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마침 집에 들른 연욱은 자신 때문에 둘이 다투고 있다는 사실이 또 괴롭다. 연정은 몇날며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연욱을 찾아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옛 남자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남자를 사랑했고 필승과 결혼한 건 지쳐서 였다고. 필승이 편하긴 했지만 사랑해서 결혼한 것 같진 않다고, 하지만 살면서 사랑하게 됐노라고, 지금은 너무나 그를 사랑한다고, 함께 있다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네 마음도 나와 같을 거라고, 이해한다고. 연욱은 변명도, 해명도,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싶다.
50여명이나 되는 사기단이 구속되고 수사가 막바지에 이르자 연욱은 심한 허탈감에 휩싸인다. 이유는 몰두하던 일이 끝나서라고 주장하지만 계속 지켜보던 상희는 그게 아님을 안다. 그동안 연욱이 필승과 함께 했던 시간이 행복이었다는 것을 상희는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수사가 끝나면 각자 자신의 부서로 돌아갈 것이고 그러면 얼굴을 마주할 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수사가 완전히 종료되고 모두가 모인 회식자리에서 최과장은 필승과 연욱의 관계를 빗대어 농지거리를 하고 분노한 필승은 최과장에게 주먹을 날린다. 다음 날, 필승은 승진심사에서 누락되자 최과장과 고성이 오가는 말다툼을 벌인다. 연욱은 몇 달 동안 쌓인 피로와 어젯밤의 만취, 그리고 정신적인 허탈로 쓰러지고 만다. 필승이 그녀를 업고 병원으로 항하고 연욱은 열에 들떠 해서는 안될 말을 하고 만다. 한필승 씨. 우리 이대로 지구 끝까지 가면 안될까?... 안되겠지?... 필승은 전율한다. 연욱의 감정이 이 정도로 깊었구나! 필승은 아프다. 아내인 연정과는 다른 류의 사랑이지만 연정과 연욱 모두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만큼 소중한 사람들 아닌가. 다만 받아줄 수 없음이, 그래서 홀로 가슴앓이 해야만 하는 연욱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필승은 병원에 연욱을 눕히고 성준에게 연락을 한다. 그게 화근이 된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연욱이 성준을 필승으로 착각하고 감정을 토로한 것이다.
한편 수진은 급한 업무로 성준을 만나러 병원까지 찾아왔다가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다. 성준은 심한 충격을 받는다. 처제가 형부를? 그동안 짝사랑하던 남자가 형부였다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게 세상에 있을법한 일인가. 생각다 못한 성준은 연정을 찾아가 심중을 떠보고 연정은 웃으며 이렇게 해명한다. 둘 사이엔 나도 끼어들 수 없는 그런 게 있다고,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으니 이해하라고. 성준은 연정의 설명에 어느 정도 납득을 하고 돌아간다. 그러나 막상 연정은 더 불안해진다. 성준이 눈치챌 정도로 연욱의 감정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일까?... 며칠 동안 고열에 시달리던 연욱이 정상을 회복하자 성준은 필승에 대한 의구심을 접고 연욱에게 프로포즈를 한다. 연정의 설명이 백프로 납득은 안되지만 가족처럼 지내왔으니 별 거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열병을 앓고 난 연욱은 필승을 내보낸 자리에 성준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연욱은 프로포즈를 받은 사실을 언니와 형부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건 언니를 안심시키고 그동안의 죄책감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이었으므로 특별한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그 전에 필승이 먼저 알게 된다. 필승은 걱정이 많다. 과연 성준에게 연욱을 맡겨도 좋을지, 벌써 결혼이라는 걸 해야 하는지, 혹시 나 때문에 성급한 판단을 내린 건 아닐지. 그 즈음 호텔에서 폭력배가 한달 째 무전취식을 하며 난동을 부리는 일이 생기자 성준은 필승에게 해결해줄 것을 부탁하고 필승은 조용히 그 일을 처리한다. 그 일을 계기로 필승과 성준은 서로의 인간됨을 다시 보게 된다. 계속 알게 모르게 갈등하다가 처음으로 서로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 날 필승은 성준과 술을 마시며 연욱에 대한 그의 마음이 진심인 걸 깨닫고 씁쓸해한다. 그는 아직 연욱을 떠나보낼 준비가 안되어 있다. 드디어 연욱이 언니에게 결혼사실을 발표하는 날, 연욱은 특별한 자리에 연정과 필승을 초대한다. 필승이 먼저 도착하고, 연정은 회사일로 늦는다고 한다. 필승은 아직도 걱정스럽다. 성준의 마음은 알았지만 과연 연욱의 마음도 진심인지 모르겠다. 필승은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낸다. 혹시 나 때문이냐고... 연욱은 눈물을 흘리고 만다.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맞아요, 당신 때문이에요'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도착한 연정은 야릇한 분위기에 온 몸이 얼어붙는다. 둘의 분위기는 오해를 하기에 충분했다. 연정은 처음으로 동생의 뺨을 때린다. 그녀로서도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이었다. 들끓는 분노와 배신감으로 뛰쳐나간 연정은 차에 치이고 만다. 모처럼 차려입은 연욱의 성장은 피로 새빨갛게 물든다.
장시간의 수술이 끝나고 수술실 문이 열린다. 그러나 연욱, 필승, 성준을 기다리는 건 혼수상태에 빠진 연정이다. 연욱과 필승은 피가 마르는 것 같다. 성준은 연정을 살리기 위해 최고의 병원에서 최고의 의료진을 모아 2차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연정을 살리기 위한 성준의 노력은 연욱과 필승 못지 않다. 워낙 연정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없는 필승은 그를 불안하게 하기 때문이다. 셋의 바램도 외면한 채 연정의 혼수상태가 몇 주째 지속된다. 연욱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언니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언니, 일어나 봐. 나 할 얘기가 있어. 나 결혼해. 언니가 축하해줘야 하잖아. 언니, 나 땜에 그동안 힘들었지. 이젠 안그럴께 제발 일어나. 연정은 혼수상태에서 연욱의 속삭임을 듣는다. 그녀는 동생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 날 뺨을 때려서 미안하다고, 널 믿지 못한 걸 용서해달라고.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연욱의 지극 정성으로, 연정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연정은 희미하게나마 의식을 회복한다. 흐릿한 연정의 시야로 필승과 성준 두 남자가 보인다. 연정은 어린 아기만큼이나 연욱이 걱정스럽다. 부모 잃고 자신마저 잃을 동생이 안쓰러웠다.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가여운 동생을 성준이 아닌 필승에게 부탁하고 뇌사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며칠 후 숨을 거둔다.
필승은 연정이 죽은 후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처음엔 샤워를 하다가 '여보 속옷!'하고는 쓴웃음을 짓는 정도였는데 이젠 대화를 한다. 요리나 청소를 하며, 아기를 돌보며, 가끔 소주를 홀짝이며 마치 연정이 살아있는 것처럼 중얼중얼 소곤소곤. 그는 연정이 죽은 게 아니라 출장을 간 거라고 믿고 싶다. 연욱은 자신 때문에 언니가 죽었다는 죄책감에 젖어 일상을 포기하고 어둠과 침묵 속에 빠져있다. 부모님을 눈앞에서 놓쳤는데 언니마저 눈앞에서 놓쳤다. 그녀는 차라리 죽고 싶다. 필승은 연욱의 입을 열게 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굳게 닫힌 연욱의 눈과 귀와 입은 열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먹지 않는 연욱은 탈진해 쓰러지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필승은 한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연정의 얘기를 꺼낸다. 그동안은 연욱이 자극받을까봐 연정의 얘기를 하지 않았었다. 필승은 오늘 하루만 연정을 생각하기로, 연정을 얘기하기로 한다. 필승이 먼저 연정에 대한 추억을 늘어놓자 연욱도 입을 열기 시작한다. 흉보듯이 연정을 얘기하던 그들은 울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그들은 그렇게 치유해간다...
1년 후.
필승의 집은 구석구석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다. 아기는 본가에서 데려가 사람의 살내음도 없다. 필승은 미친 듯이 일을 하며 거의 매일을 경찰서 숙직실에서 보낸다. 가끔 들러 청소와 빨래를 하곤 하는 연욱은 집안의 먼지만큼이나 필승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이 쌓여감을 느낀다. 연욱은 조카를 보러 본가에 갔다가 이젠 그만 오라는 말을 듣고 크게 상심한다. 필승의 가족은 서서히 필승의 재혼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연욱의 출입이 그다지 반갑지 않다. 죽은 연정에게 미안하고 홀로남은 연욱이 가엽지만 현실은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연욱은 자고 가라고 울며불며 떨어지지 않으려는 조카를 뒤로 하고 돌아온다. 상심한 연욱은 필승에게 재혼할 거냐고 넌지시 떠보고 필승은 처제가 결혼한 뒤에나 생각할 거라고 한다. 그 말에 더욱 낙담하는 연욱. 자신이 결혼하고, 필승마저 재혼해버리면 필승과 아기와는 영영 남남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성준이 결혼을 서두르는 게 불안하다. 필승은, 처음엔 연욱을 볼 때마다 연정이 생각나 괴로웠지만 이젠 연욱에게서 연정을 보며 위안을 찾는다. 자매가 참 닮지 않았는데도 연욱에게는 분명 연정의 모습이 서려 있었다. 만취한 날, 그는 연욱을 안고 만다. 연욱은 그를 뿌리칠 수가 없다. 그의 상처를, 외로움을 안아주고 싶었다. 자신이 열아홉살 때 그가 그렇게 해주었듯이. 아니 어쩌면 언니의 대용으로라도 그의 품에 안겨있고 싶은지도 모른다.
필승은 자신이 연욱을 안았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면서 실은 연정을 안은 것이라고 자위한다. 하지만 연욱에게서는 연정의 잔영이 차츰 사라지고 있다. 연욱은 연정의 대신이 아니라 한 여자로서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안개비처럼 소리도 없이 필승은 그 마음을 밀어내려 애를 쓰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연욱에 대한 생각은 커져만 간다. 흔들리던 그는 성준을 찾아가 왜 결혼을 서두르지 않느냐며 호통을 친다.
성준은 필승의 호통에 용기를 얻는다. 사실 그동안 성준은 불안했다. 연정의 죽음으로 연욱은 프로포즈에 대한 대답을 기다려달라고 했었다. 이제 1년이 지났으니 그로서는 기다릴 만큼 기다린 셈인데 연욱은 대답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필승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게 신경에 거슬렸다. 성준은 연욱의 확답을 기다린다.
더 이상 성준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연욱은 큰 결심을 하고 필승에게 묻는다. 그날 나를 왜 안았느냐고, 나를 사랑하는 것 아니냐고... 필승은 당황한다. 그 날의 실수로 연욱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게 못내 미안하다. 그는 연욱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 내가 사랑하는 건 네 언니뿐이라고, 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동생일 뿐이라고, 내가 재혼하는데 넌 장애물이 될 테니까 앞으로는 안봤으면 좋겠다고... 그 말을 듣고 돌아서서 연욱은 참 많이 운다. 그에게 나는 그랬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필승도 그녀를 그렇게 보내놓고 많이 아파한다. 하지만 잘 한 짓이라고, 앞으로 또 그런 질문을 한다면 똑같은 대답을 할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연욱은 성준과의 결혼을 결심하고 성준에게 노력하기 시작한다. 현실에 순응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성준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결같이 그가 보여준 애정이 그러했고 언니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모습이 그러했다. 연욱은 20대의 보통 연인들처럼 사랑스런 데이트를 해나가면서 정말 성준이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는 실마리라고 믿는다. 성준에 대한 고마움은 필승도 갖고 있다. 연정을 살리려던 그의 모습은 진심이었다. 필승은 성준을 불러 이런저런 부탁을 한다. 우리 처제 성격이 어떤지, 우리 처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 처제는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우리 처제는 어떤 버릇이 있는지, 우리 처제는 어떤 상처가 있는지... 말끝마다 우리 처제, 우리 처제... 성준은 필승에게 질투심을 느낀다. 그리고 문득문득 연욱에게서 낯선 표정을 볼 때면 필승을 떠올린다. 그때 일련의 사건들이 그들을 갈라놓기 시작한다.
일단 차회장이 그들의 결혼을 반대한다. 고아에 대학도 안나온 일개 여경이라니, 실리는커녕 명분도 없는 결혼이었다. 게다가 수진에게서 들은 해괴망측한 소문이 노여움을 일으킨다. 형부와 이상한 사이라니! 차회장은 집요하게 자신을 설득하는 성준에게 그 사실을 알기나 하냐고 호통을 친다.
성준은 당황한다. 지나간 일이라고 묻어두었던 불안감이 고개를 내민다. 게다가 연정이 눈을 감기 전 자신이 아닌 필승에게 연욱을 부탁하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거기에 수진이 불을 붙인다. 수진은 그동안 알아낸 연욱과 필승의 비밀을 조금씩 조금씩 알아낸다. 은밀히, 정확하게... 성준이 아버지를 설득하는 동안, 수진은 연욱과 필승의 관계를 경찰서에 투서한다. 공무원 사회에서의 투서는 한 공직자를 생매장할 수도 있는 무서운 무기이다. 투서에는 필승이 나이트클럽 등 유흥업소로부터 장기적으로 상납과 향응을 받아왔다는 거짓내용도 있다. 이를 접수한 최과장은 사건을 왜곡, 확대해 필승을 체포한다. 수진은 또 투서를 성준이 한 것처럼 꾸며 연욱에게 정보를 흘린다.
연욱은 분노한다. 어떻게 자신과 형부의 명예를 그렇게까지 짓밟을 수 있을까! 분노하기는 성준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내가 그렇게 졸렬한 방법을 썼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을 그 정도의 인간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연욱이 서운하고, 오로지 필승의 안부만을 걱정하는 행태 또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킨다. 성준은 필승을 도와달라는 연욱의 눈물어린 부탁을 철저히 외면한다. 계속 신경에 거슬리는 필승이 추락하기를, 그래서 연욱에게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빗나간 욕망이 이성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치졸함을 자책하면서도 쉽사리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 그러다가 연욱이 계속 필승을 두둔하자 해서는 안될 말을 하고 만다. 그 사람이 그렇게 중요해? 언니도 없는데 이젠 남남이잖아. 아니, 언니가 없어서 다행인가? 이젠 맘놓고 만날 수 있겠네. 분노한 연욱은 뺨을 올려붙인다.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설령 눈치챘다 하더라도 그런 말은 입에 올려서는 안되는 거였다. 죽은 언니와 형부를 그렇게 모욕해서는 안되는 거였다. 게다가 그건 다 지나간 감정인 것을... 그 날 이후, 성준의 빗나간 사랑에 불이 붙는다. 연욱에게 더 집착하고, 사랑에 목말라하고, 그러면서도 속에서 끓어오르는 배신감과 분노로 스스로도 괴롭다. 그렇게 愛와 憎으로 마음의 병이 깊어가는 성준... 결국 그는 애증이 들끓을 때마다 수진을 찾아가 공허한 마음을 채우게 되고, 수진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에 남모르는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이 든다. 자신을 찾는 성준은 항상 술에 취해있었고 말과 행동은 사뭇 거칠었다. 그리고 떠나갈 때의 그 헛헛한 표정이라니... 수진은 자신을 찾는 성준의 마음이 진심이기를, 누군가의 대용이 아니기를 바라기 시작한다.
투서의 내용이 드디어 가족들에게까지 알려지자 필승의 가족들은 함께 서러워하며 인연을 끊자고 한다. 그게 서로를 위하는 길이라며. 아무것도 모르는 조카는 이모랑 살거라며 서럽게 울어댄다.
조사를 받으며 유치장에 갇힌 필승은 연욱의 안부가 걱정스럽다. 자신으로 인해 연욱이 해를 입을까, 결혼에 지장을 받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는 연욱이 불행해지는 건 참을 수 없다. 자신이 옷을 벗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가 탈없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연욱은 면회를 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린다. 연욱은 마음 속의 응어리를 모두 풀어내며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필승은 속으로 눈물을 삼킨다. 이미 그도 자신의 감정이 사랑임을 깨닫고 있었다. 연정의 대용이 아닌 서연욱이라는 한 여자에 대한 사랑임을. 그러나 아직 그의 머릿속에는 이성이, 현실이 버티고 있다.
연욱의 고백은 최과장의 음모에 의해 녹음이 되고 이는 수진을 통해 차회장에게로, 다시 차회장에게서 성준으로 넘어간다. 설마 하던 것이 너무나 확연하게 드러나자 성준은 성난 분노를 어쩌지 못하고 연욱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정신을 차린 건 이미 연욱의 몸과 마음에 너무나 큰 상처를 준 뒤였다. 다음 날, 연욱은 사라진다.
불구속기소(최과장에 맞서는 동료들의 노력으로)로 유치장에서 나온 필승은 상희를 통해 연욱이 상처받았음을, 그리고 사라졌음을 알고 성준에게 달려가 주먹을 날린다. 성준도 필승에게 분노하기는 마찬가지. 두 사람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뒤엉켜 싸운다. 1차적인 분노가 가라앉자 두 사람은 일단 연욱을 찾기로 합의하고 정보를 주고받는다. 그러자 하나의 장소가 유추된다. 바로 속초에 다녀오다가 필승과 연욱이 고립되었던 그 산장... 성준도 그 산장을 안다. 어느날 갑자기 연욱이 다녀오고 싶은 곳이 있다며 성준을 채근해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때 연욱은 그곳에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며 돌아오면서도 내내 그곳을 쳐다보았었다. 그곳이 필승과의 추억이 어린 곳이라는 것을 알자 성준은 또 한번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절망한다.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 없을 거라는 예감에, 연욱을 포기해야 할 거라는 불길함에.
연욱은 산장에 며칠 째 머물며 성준과 헤어질 것을 결심한다. 이렇게까지 서로의 치부를 할퀴며 상처를 낸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눈 덮인 산간도로를 간신히 달려온 필승은 산장 앞에 서있는 수많은 눈사람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그 날 밤도 그랬다. 어색함을 피하려 추위에 떨며 그렇게 눈사람을 만들었었다. 필승을 발견한 연욱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 옛날 필승이 선물했던 수갑을 서로의 손목에 채운다. 다신 풀지 않을 거예요.
성준은 뒤늦게나마 이성을 되찾는다. 그동안 수진이 모든 일을 꾸민 걸 알고는 그녀의 빗나간 사랑이, 무조건적인 집착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건 곧 자신의 사랑, 집착조차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필승을 도와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아버지에게 무릎까지 꿇어가며 필승이 오명을 벗을 수 있도록 손을 쓴다. 필승의 기소는 중지된다. 성준은 연욱에게도 사과하고 마지막 기회를 달라고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연욱의 마음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만큼 단단해져 있다. 연욱은 그녀 청춘의 정점에 자리잡고 있는 한 남자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구애를 시작한다. 연욱은 이번만큼은 이기적이고 싶다. 사랑하는 언니에게도, 미안하기만한 성준에게도, 무책임한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번만큼은 눈을 딱 감고 등을 돌리고 싶다. 법, 관습 따위 신경쓰고 싶지 않다.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사랑한 필승과 단 하루라도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 연출 및 주요 출연자 프로필
☞ 연출 이창순
- 1959년생
- 주요 연출 작품 : 주간 단막극 「한 지붕 세 가족」,「베스트극장」다수, 미니시리즈 「애인」, 주말 연속극 「신데렐라」, 미니시리즈 「추억」 등 다수
☞ 공효진
- 생년월일 : 1980년 04월 04일
- 주요 출연 작품 :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화산고 (火山高, 2001), 품행제로 등
☞ 조재현
- 생년월일 : 1965년 6월 30일
- 학력 : 경성대학교 연극영화과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공연영상학과
- 취미 : 골프 권투
- 데뷔 : 1989 「야망의 세월」로 데뷔
- 경력 : 백상예술대상(신인상, 1993), 청룡영화상(신인상, 1993),KBS,SBS 남자조- - 주요 출연 작품 : 「피아노」「줄리엣의 남자」 등
☞ 김래원
- 생년월일 : 1981년 3월 19일
- 학력 :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2학년
- 주요 출연 작품 : 청소년 드라마 「나」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내 사란 팥쥐」 등
☞오연수
-생년월일 : 1971년 10월 27일
-학력 :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
-데 뷔 1990, MBC 공채 19기
- 주요 출연 작품 : 「춤추는 가얏고」「아들과 딸」「전쟁과 사랑」 등
기획 : 정운현
연출 : 이창순
홍보 : 김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