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설교를 읽으시는 분들에게 삶의 위로와 힘으로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 모든 사로교회 성도님들 건강하시고 행복한 안식일 오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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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27일 안식일
제목 : 정거장 유감
포인트 :
1. 우리는 자신의 부분적 깨달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약속으로 산다.
2. 우리는 설명에 의지해 사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의지해 산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감당할 만큼만 설명하신다.
그 나머지는 이해의 몫이 아니라, 신뢰의 몫이다.
4. 시험당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고, 믿음으로 기다리고, 소망으로 바라보자.
5. 울면서 태어났지만, 웃으면서 살 수 있다.
도입 : 하박국의 시대상황!
선한 임금이 죽고, 백성들은 방자하게 행함. 희망이 보이지 않음.
<상황> 매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짐 -
선한 임금이 요시야가 죽은 것입니다. 성전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높였던 그 선한 임금 요시야가 죽은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손에 잡힐 것 같았던 행복한 삶이 달아나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되었다고 했더니, 그 고백의 메아리가 들리기도 전에 더 큰 절망의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오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죽고 뒤를 이어 악한 왕들이 뒤를 이었습니다.
여호아하스도,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도 불의한 왕이었습니다.
심지어 여호야김은 예레미야가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불태운 악한 임금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방자히 행함. 영적 삶에는 관심이 없고,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혀 생활함.
(렘 36장, 왕하 22장-23장)
주변 어디를 보아도 소망을 찾아볼 수 없음.
위기가 닥쳐오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위기의식이 없음.
거짓 선지자들은 평안을 외치면서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데, 여전히 바닷가에서 여흥을 즐기는 사람들처럼 무감각하다.
위로 임금은 타락했고, 옆으로 백성들은 영적인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밖에서는 바벨론이 침입하려는 순간이었다. 요시야가 죽고 불과 4년 뒤에 바벨론이 침공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내 고민에 대해, 내 아픔에 대해, 내 상실에 대해, 내 한숨에 대해.....
하박국 이름은 <부둥켜 안다 또는 씨름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기 이름처럼 누군가를 부둥켜안아야 했습니다. 누군가와 치열하게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누군가를 뼈가 으스러저라 붙잡아야 했습니다.
문제가 산적해 있던 그 순간 그는 <씨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도피하거나 숨는 대신에 그는 정면으로 맞서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경험하는 허탈감, 공허함, 절망감, 소망 없음, 답답함을 당시 하박국도 겸험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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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오늘 우리들은 하박국을 주목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박국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는지를 확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충만했던 하박국의 문제해결을 위한 시도들을 살펴보십시다.
문제가 심각했던 상황 속에서 하박국은
먼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어떻게 부르짖었습니까? 간절히 외쳤습니다. 민족의 죄를 회개하는 중보의 기도를 했습니다.
강포에 대해서, 간악에 대해서, 패역에 대해, 공의롭지 못함에 대해 하박국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응답이 없어도 외친 것입니다. 지칠 상황인데도, 포기할 지경인데도 하박국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합 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적용>우리들도 문제가 있다면 부르짖어야 합니다. 포기하지 말고 간구해야 합니다.
포기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을 담대히 하고 하늘 아버지께 살려달라고 외쳐야 합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소리를 들어주실 큰 귀를 가지신 아버지가 계십니다.
둘째, 기다렸습니다.
기도하고 기다렸습니다. 어떤 경우는 기도 응답이 지체될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기대했던 것과 반대의 응답을 허락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박국의 예가 바로 후자의 경우입니다. 살려달라고 구원을 요청하며 기도했는데, 오히려 더 큰 시련이 온 것입니다. 더 악한 바벨론이 유다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억울합니다. 공정하지 않습니다. 대답이 없어도, 응답이 지체되어도 계속 기도했던 하박국에게 기도한 보람이 이것이었습니다.
경쟁하려면 공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찌 더 불의한 이들에게 핍박당하도록 허락하셨습니까?
(합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는 것입니까?
내가 더 악하지 않음을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더 악한 자가 심판을 받아야지 어찌 더 악한 자가 덜 악한 자를 심판하는 것입니까?
답답했던 하박국은 결심을 합니다.
나보다 못한, 나보다 헌신하지 않는, 나보다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고, 나보다 성실하지 않고, 나보다 잘난 것도 없는 누군가는 일이 잘 되는데, 왜 나는, 왜 우리는 이런 것입니까?
셋째, 그는 다시 결심합니다. 올라가자!
(합 2: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절망의 골짜기에 있을 때 우리들은 믿음의 눈으로 해답이 있는 언덕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높은 곳으로 옮기자, 내 문제를 보다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가자. 그리고 기다리자!
우리들의 대부분의 삶의 형편은 내가 낮는 곳에 있다는데 있습니다.
바닥에 있다는데 있습니다. 남보다 아래 있는데 있습니다.
답답하고, 외롭습니다.
키가 작은 것도 억울한데, 삶의 무게는 남보다 더 무거우니 갑갑할 뿐입니다.
그 때 하박국은 결심을 합니다. 그래 다시 시작하자. 여기서 내가 주저앉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자. 그리고 앞으로 인도하실 그분의 섭리를 붙잡자.
호소> 우리도 하박국같은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기 위한 구별된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소음 때문에 때때로 듣지 못하는 거룩한 음성을 분별하기 위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넷째, 허락하신 약속을 믿고 감사했습니다.
변치않은 약속의 시여자, 약속의 집행자를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전히 암울하고, 여전히 답답합니다. 하지만 하박국은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괴롭고 힘들었지만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기다리다가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방은 이렇습니다.
말씀을 기록하라. 말씀을 가까이 하라, 달려가면서 읽을 수도 있어야 한다.
심화> 무슨 뜻입니까? 왜 달려야 합니까?
(합 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바쁘기 때문입니다. 급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달려야 합니다. 때로 속히 움직이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 <무한경쟁>속에서도 날 살리는 것은 <내 100미터 달리기 순발력>에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살 수 있는 것은 <내가 달리면서도 묵상해야하는 말씀에 순종함>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은 분명히 보장하고 있습니다.
(합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호소>
말씀은 보여줍니다.
1. 우리 인생의 여정이 끝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끝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도, 우리의 괴로움도, 때로 맛보는 인생의 쾌락도 다 끝이 있습니다.
하루의 끝이 있듯, 우리 삶에도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2. 그 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속히 이를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을 말씀의 약속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 우리들이 예상하고, 우리들이 판단하고 있는 것보다 빨리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때로 더디게 느껴지더라도 정령 응할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재림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가난으로 괴로운 우리들의 문제를, 배고픔에서 오는 탄식을, 허기짐에서 오는 무력감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결론
부르짖되 지치지 맙시다. 기대하는 응답이 아니더라도 실망하지 마십시다.
상황에 대해서도 놀라지 마십시다. 오히려 감사하셔야 합니다.
결론 -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살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적, 개인적 깨달음이 없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설명이 날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날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 2000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오싱젠]이란 중국의 작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쓴 희극중에 [버스 정류장]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내용은 버스 정류장에서 각자 시내에 가기 위해서 기다리는 인간군상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정류장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정차하지 않고 가버리는 버스에 대해 성토하면서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펼쳐 보이는 희극입니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일곱명입니다.
말없는 사람, 노인, 아가씨, 청년, 안경잡이, 아이 엄마, 숙련공, 마 주임
교외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다 쓰러져가는 글자가 다 지워진 팻말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번 두 번 버스는 멈추지 않고 지나가 버립니다. 그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시내에 가려는 이유가 분명함을 목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대학시험을 치러야 하는 학생, 남편 밥을 챙겨 주어야 하는 아이 엄마, 일을 해야 하는 숙련공, 시내 구경을 해야하는 건달 청년, 평생을 갈고 닦은 장기 시합을 해야 하는 노인, 처음으로 데이트 약속을 잡은 노처녀의 기다림...
모두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의 꿈이 깨어짐을 고백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버스는 오지 않고, 오던 버스는 그냥 스쳐 지나갑니다.
결국 그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희극이 막바지에 이르러 작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제시합니다.
청년 : 정류장 팻말 좀 봐요. 이게 무슨 역이에요? 당신 그 전자시계 지금은 몇 시죠? 다 적어서 자동차 회사에 따져야지.
안경잡이 : 어? 정류자 이름이 없네.
노인 : 이상한 일이군.
청년 : 정류장 이름이 없는데. 팻말은 왜 세워? 다시 자세히 봐요.
아가씨 : 없어요.
청년 : 아저씨. 우리 헛고생했군요. 그 자동차 회사 불러다 파내라고 해!
노인 : 다시 봅시다. 팻말이 있는데 어떻게 정류장 이름이 없지?
청년 :(팻말의 다른 면으로 달려가 본다) 이리 와봐요. 종이를 붙였던 것 같죠. 도장 자국이 조금 남았어요.
안경잡이 : 아마 공고가 붙었던 것 같군.
마 주임 : 그 공고는 어디로 갔지? 찾아보자!
아가씨 : 비바람에, 벌써 흔적도 보이지 않는데요.
청년 : 종이 붙였던 흔적도 안보이는데. 도대체 언제 일이지?
아이 엄마 : 뭐라고요? 이 정류장이 없어졌다고요? 그렇지만 지난 토요일날 내가 여기서....
아가씨 : 언제 토요일이요?
아이 엄마 : 아니 지난, 지난.....
안경잡이 : 몇 년 몇 월 몇 일 토요일이요?
청년 : 볼 필요 없어요. 바보같이. 벌써 건전지를 갈았어야죠.
숙련공 : 어쩐지 차가 서질 않는다 했지.
노인 : 우린 여기서 헛되이 기다렸단 말야?
안경잡이 : 아니 헛되이 기다린 것 이니에요.
노인 : 이 팻말은 뭐 때문에 아직까지 세워뒀어. 사람 놀리는 거야?
아가씨 : 우리 가요! 우리 가요!
마 주임 : 아니지, 그들을 고발하러 가야지!
안경잡이 : 누굴 고발하겠다는 거예요?
마 주임 : 자동차 회사지, 이런 식으로 승객을 조롱해서 되겠어? 난 주님 자리를 걸고 해볼 거야.
안경잡이 : 당신 자신이나 고발하세요. 누가 우리더러 자세히 보지 말랬나? 누가 우리더러 마냥 기다리라고 했나? 가요. 뭐 더 기다릴 이유가 없잖아요.
결론 >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버스도 기다리고, 합격도 기다리고, 승진도 기다립니다. 내 집도 기다리고, 새 차도 기다립니다. 남이 인정해 주기를 기다립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간절히 기다립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가오싱젠]의 말처럼 [이미 옮겨진 정류장]에서 멈추지 않는 버스를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지만 우리들은 후회할 일이 없습니다. 잘못 기다릴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는 항상 큼지막하게 사인을 보내주시기 때문입니다.
(암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선지자가 누굽니까? 화잇부인만 선지자가 아닙니다. 말씀을 기록한 모든 성경기자가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모든 선지자들이 표상하는 한 인물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민족을 위해 간절히 외치고, 우리의 구원에 누구보다 강하게 관심을 보이시는 한 분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시고, 엘리사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진짜 선지자이십니다.
그분은 혹 잘못된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릴까 크게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보라, 만져라 수없이 주님은 <보여주셨습니다. 외치셨습니다>!
멀리서 소리치실 수도 있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선심쓰듯 알려주실 수 있으셨지만,
주님은 하늘을 버리시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직접 오셨습니다.
버스회사 사장보자 더 크신 온 우주의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알려주시러 오셨습니다.
흥미로운 하박국의 결론을 보십시다.
(합 3:8) 『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하수를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대하여 성내심이니이까』
구원의 병거를 타신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하수와 강 때문이 아닙니다.
(합 3:13)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셀라)』
주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십니다.
결론 및 호소> 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 앞에서 문제 중심의 삶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제 앞에서도 하나님 말씀 중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믿기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순종하겠다고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합 3:17-19)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