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Betis
창단년도:1907년
연고지:세비야
홈구장:루이스 데 로페라 (62,000)
리그우승:1회
스페니쉬컵:2회
엠블럼
클럽레전드
라파엘 고르디요(1976~1985,1992~1995)
더비전
안달루시아더비 - 베티스 VS 세비야
클럽소개
*은퇴선수도 다시 돌아오게 하는 매력적인 클럽
장님이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고 싶어한다는곳, 이슬람문명의 정취가 살아있는곳, 그리고 피카소, 달리등 스페인이 자랑하는 거장들을 배출시킨곳답게 스페인 남부의 광활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안달루시아는 우리가 알고있는 스페인다운것들이 총망라되어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머리위에서 뜨겁게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탓에 안달루시아인들의 기질 또한 유럽에서 가장 다혈질로 소문이 나 있는데 스페인사람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축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안달루시아에는 많은클럽들이 존재하면서 서로 라이벌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세비야를 연고로 한 두 클럽 즉 "세비야 FC"와 "레알베티스"의 라이벌구도는 우리가 상상하는것 이상으로 격렬한데 두 팀이 맞붙기 1주일전부터 안달루시아의 대표적언론사인 <디아리오 안달루시아>등은 벌써부터 특집으로 두 팀의 동향을 보도하고 있고 경기가 열리기 몇시간전에는 심심치않게 양 팀 팬들의 충돌로 몇명이 다쳤다는 기사를 어렵지 않게 접할수 있을정도다.
베티스의 최대주주, 하지만 경기장이 그의 이름을 땄을정도로 베티스에서는 가히 신이라고 불리어도 부정할수 없는 "루이스 로페라" 역시 열렬한 베티코(베티스팬들을 지칭)여서 세비야와의 라이벌전이 다가오면 세비야진영에게 비난을 , 그리고 베티스진영에겐 응원을 선사하면서 한껏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하는 매게체 역할을 한다. 이런 배경이 있으니 선수들은 열심히 뛰지 않을수밖에 없고, 안달루시아데르비는 그 어느 라이벌매치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고 박진감넘치는걸로 유명하다. [사진 -1 : 녹색과 하얀색이 어울어진 베티스의 로고]
이런 멋진클럽이니 멋진 선수들도 당연히 뒤 따르기 마련이다.
베티스의 아이돌이라고 하는 "호아킨"을 위시로 하여 나이지리아의 올림픽금메달을 이끌었던 "피니디"와 "아데포주", 그리고 90년대중반 스페인의 간판골게터였던 "알폰소" 그리고 현란한 왼발드리블을 바탕으로 98-99시즌 세계최고액으로 베티스로 이적해 주위를 놀라게 했던 "데닐손" 그리고 새로운 밀란의 7번이 된 "올리베라"와 스위스대표팀의 든든한 주장 "보겔", 투지넘치는 찰가머리수비수로 유명한 "후안이토", 브라질대표팀의 미래 "소비스"등은 베티스를 거쳤거나 현재 베티스에 있는 훌륭한 선수들이다.
리그 우승은 30년대에 단 한번이었고 유럽무대 경험도 손가락안에 꼽을 정도(4번)지만 안달루시아의 수많은 사람들은 녹색과 하얀색이 수놓아진 베티스의 베르디브랑코 유니폼을 입고 "Betis, Betis, Betis campeón"(베티스, 베티스, 베티스 챔피언) " Real Betis de mi amor"(나의 사랑 레알베티스)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열광적인 성원을 보낸다.
안달루시아인들의 베티스에 대한 사랑은 선수들에게도 깊은인상을 주었는지 베티스에서 선수생활을 보낸 유명선수가 다시 베티스로 돌아와 감독, 또는 코치직을 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하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아라고네스, 그리고 베티스의 100년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로 평가받고 있는 하드지게비치, 그리고 루이스 델 솔과 에스놀라등 무려 7명의 인물들이 선수와 감독으로 베티스를 위해 일했다.
베티스란 클럽이 이 만큼 매력적이라는걸 잘 보여주는 단면이 아닌가 한다.
*비야마린과 로페라가 꿈꾸웠던 세계최강 베티스의 꿈
베티스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1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7년 12월에 세비야의 한 학교에서 로페스, 후안, 수니가로 알려진 몇몇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베티스의 기원이 되는 클럽, 즉 "세비야 발롬피에"라는 클럽을 만들었다고 한다. 초창기의 유니폼은 지금의 녹색과 흰색이 어울어진 유니폼이 아닌 푸른색유니폼있다고 하는데, 첫 경기는 이미 19세기말에 창단된 안달루시아 최초의 클럽 레크레타리보와의 경기였다고 한다. 그리고 1차대전이 발발한 해인 1914년 바르보야, 파파등의 베티스주축선수들과 임원진들은 스페인축구협회로부터 베티스라는 이름의 개명과 함께 정식 축구클럽으로 인정받으며 같은 해에 출범한 세비야, 그리고 19세기말에 창단된 레크레타리보와 함께 안달루시아를 대표하는 클럽으로 불리우게 된다.
베티스를 그저 학생들의 클럽었던 세비야 발롬피에가 아닌 스페인의 대표클럽중에 하나인 베티스 발롬피에로 만든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바르보야등의 인물들은 세비야를 가로지는 대표적인강 과달키비르의 강변에 그 이름을 새겨넣어 영원한 베티스의 우승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레크레타리보를 필두로, 세비야, 그리고 베티스로 이뤄지는 안달루시아의 축구열기로 인하여 클럽들도 강해질수밖에 없었고 어느새부터인가 프리메라리가에서 뺴 먹으면 섭섭한 강호가 되어버렸는데 베티스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들이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에는 체 30년도 걸리지 않는다.
창단한지 28년후인 34/35시즌에 아직까지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억되고 있는 프리메리가 타이틀을 차지하게 되는데 당시 베티스의 최후방을 담당했던 우르퀴아가는 베티스에게 있어서 유일한 사모라로 기억될만큼 뛰어난 선방능력을 보여주며 팀 우승의 일등공신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당시 베티스는 12개팀이 다투던 프리메라리가에서 종합 승점 33점을 기록해 32점의 마드리드를 1점차로 제치고 처음으로 프리메라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팀의 미드필더였던 우나무노와 골리인 우르퀴아가, 그리고 골게터였던 아레소는 프리메라리가 타이틀을 품에 안고 세비야에 도착하면서 녹색깃발을 흔들며 기다리고 있었던 수많은 베티스의 팬들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당시 세비야시장인 이작시오는 선수들과 베티스 임원진들에게 일일히 악수를 권하면서 수많은 상금과 명예시민 훈장을 안겨주었다고 하는데 안달루시아출신선수들로 대부분 이뤄진 그야말로 본 토박이 클럽이었기 때문에 베티스팬들의 기쁨은 더 했을것이다. [사진 -2 : 처음이자 마지막 리그 우승컵을 들고 있는 베티스선수들]
독재자 프랑코가 일으킨 스페인시민전쟁 이후 베티스는 예전의 강력함은 잃어버렸는지 세군다리가로 추락했고 오랫동안 세군다리가에 머물던 베티스는 46/47시즌에는 결국 세군다리가에서도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세군다B, 즉 3부리그까지 추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안달루시아태생의 고메스가 이끌던 베티스는 세군다B의 6그룹에 편성되어 늘 상위권에 랭크되었지만 세군다리가에 승격하기 위해서는 2위나 3위가 아닌 그룹 1위가 필요했고 베티스가 세군다B에서 세군다리가로 다시 올라오는데에는 무려 8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베티스가 다시 제 궤도에 오른것은 55년 베티스역사상 로페라와 함께 클럽을 가장 알리는데 공헌했던 "베니토 비야마린"의 덕이 컸다. 베티스공식홈피에서 "레전드적인 회장"으로 부를만큼 추앙받고 있었던 비야마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베티스의 전력을 한층 업그레이드 해줄수 있는 연습구장의 건립으로써 당시만해도 스페인에서는 마드리드나 빌바오, 바르셀로나등을 제외하면 전용연습구장을 가지고 있는 팀이 별로 없었다고 하는데 비야마린은 아직도 베티스가 사용하고 있는 연습구장 "엘리오폴리스"를 건립하면서 이곳에서 많은 소년들이 베티스를 위해 뛸것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의 예언은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화되고 있는것은 분명하다.
엘리오폴리스의 건립 이후 베티스의 성적은 눈에 띄게 좋아졌고 56/57시즌에 결국 세군다리가에서 우승을 차지, 57/58시즌에 그토록 기다리던 프리메라리가에 승격되는데 39/40시즌 이후 무려 18년만의 쾌거다. 선수보강면에서도 비야마린은 베티스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60년에는 마드리드에서 델 솔까지 영입하면서 팀에가 두번쨰 프리메라리가 우승을 안겨주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그의 임기에서 리그우승은 보지 못했지만 그는 분명 3부리그의 베티스를 1부리그에 올렸고, 코파 델레이 4강에까지 오르는 강호로 탈 바꿈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66년 8월에 10년여의 총재생활을 마치고 비야마린은 "베티스와 함께 있어 행복했다."라는 말을 남기고 베티스를 미련없이 떠났다.
비야마린이 베티스를 떠난 후 베티스를 마치 우리가 언제 코파 델레이 4강까지 올라가는 팀이었냐는듯이 프리메라리가와 세군다리가를 들락날락하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76/77시즌 베티스는 사상 첫 코파 델레이를 차지한다. 4강에서 지역라이벌 세비야를 물리치고 결승에 올라온 베티스는 결승상대였던 아틀레틱 빌바오를 맞은 경기는 아직도 베티스골수팬들에게 이야기될만큼 명승부였다고 한다. 발렌시아 국립경기장에서 후안카를로스국왕과 소피아 왕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 날 경기장에서는 3만명의 베티스팬들과 7천명의 빌바오팬들이 모여 그야말로 장사진을 이룬 가운데, 0대0으로 우열을 가리지 못했던 양팀은 승부차기에 들어갔고, 골리인 에스나올라가 빌바오의 다니의 슛을 선방해낸 가운데 그가 직접 다섯번째 키커로 나와 골을 성공시키며 베티스에게 첫 코파 델레이를 안겨주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우승컵을 들고 세비야로 들어오자 베티스팬들은 선방과 골을 성공시킨 에스나올라의 이름을 외치면서 당시 스페인최고의 골리였던 빌바오의 이리바르와 에스나올라를 비교하며 그들에게 이리바르가 있다면 우리에겐 그보다 몇배 더 훌륭한 에스나올라가 있었다라고 말하며 기뻐했고 세비야시는 베티스의 코파 델레이 우승을 축하해주기 위하여 자체 기념 우표까지 발행했다고 한다.
50년대 3부리그클럽이었던 베티스를 1부리그로 끌어올린 인물이 비야마린이었듯이 95년 레온의 뒤를 이은 "로페라"는 비야마린만큼이나 베티스를 사랑하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팀이 코파 델레이 결승에까지 진출했고 마드리드에서 영입해온 알폰소가 엄청난 골러시를 보여주며 스페인대표팀의 간판골게터로 자리잡는것을 보면서 베티스란 클럽의 세계화를 꿈꾸기 시작했는데 97/98시즌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당시 상파울로에서 뛰었던 왼발의 귀재 "데닐손 올리베라"를 당시 세계최고액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했다는 깜짝 발표를 했던것이다.
이 발표와 함께 로페라는 나의 목표는 베티스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뛰어넘는 클럽이 되는것이라는 야심찬 발언을 하기도 한다. 게다가 프랑스월드컵에서 보여준 데닐손의 뛰어난 활약등은 로페라의 말이 어쩌면 현실로 이뤄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던것은 사실이다. [사진 3 - 베티스소속으로 스페인대표팀의 간판역할을 했었던 "알폰소 페레스"]
하지만 로페라의 야심작이었던 데닐손은 지나친 개인플레이로 팀내 적응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재정적으로도 휘청거리던 베티스는 99/2000시즌에 19위를 기록하며 지역라이벌 세비야, 그리고 명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함께 세군다리가로 추락하게된다. 로페라는 베티스를 살려보기 위하여 히딩크, 그리고 하제그베기치와 같은 노련한 명장들을 데려왔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 00/01시즌부터 세군다리가에서 리그를 시작하게된다. 베티스에서만 70골을 넣었던 알폰소는 구단의 배려에 따라 바르셀로나로 이적했고, 피니디는 마요르카로 이적하면서 베티스는 다시 프리메라리가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새로운 리빌딩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00/01시즌부터 베티스의 지휘봉을 잡은 "후안데 라모스"는 그러한 새로운 피들을 원하는 베티스팬들의 희망을 잘아는 인물이었고 그는 곧바로 베티스B에서 뛰고 있었던 호아킨, 카피, 카사스, 다니등을 중용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을 발판으로 베티스는 00/01시즌 세군다리가 2위를 차지하면서 01/02시즌을 프리메라리가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카사스가 시즌개막과 함께 5경기에서 5골을 넣는 골폭풍을 시작한 가운데 오른쪽라인의 호아킨은 당시 나이 20살에 어울리지 않는 과감한 돌파력으로 순식간에 프리메라리가 최고의 날개반열에 올라섰고 2002년 월드컵에서 카마쵸는 호아킨에게 한국行티켓을 주면서 스페인의 붉은셔츠를 안겨준다. 물론 호아킨은 한국과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를 실축하면서 스페인의 숙원인 4강진출의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지만 세비야열렬한 관중들은 씁슬한 표정으로 돌아온 호아킨을 열렬히 환영했고 세비야시장은 호아킨에게 명예시민상을, 그리고 로페라총재는 "6.800만유로 이상 주지 않으면 호아킨을 팔수없다."라고 말하는등 우르퀴아가 ->델 솔 -> 링콘 -> 알폰소의 뒤를 이어 호아킨을 새로운 베티스의 얼굴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노력이 결과로 창조된것은 04/05시즌의 일이었다.
어리기만했던 호아킨은 확실한 베티스의 스타가 되어있었고 그 시즌에 베티스는 리그 4위를 기록하며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거머쥐었고, 코파 델레이에서는 오사수나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호아킨 그 개인적으로는 리그 최다어시스트까지 기록하면서 베티스의 앞길은 순탄해보였지만 05/06시즌에는 호아킨의 부진가 맞물려서 팀의 골게터 올리베라의 예상치 못한 조기 시즌아웃, 그리고 챔피언스리그까지 치뤄야하는 일정의 빠듯함까지 겹치면서 베티스는 하마터면 세군다리가의 추락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 시즌에서 베티스에게 있어 유일한 기쁨은 프리미어리그 챔피언 첼시를 물리쳤다는것쯤이었다고 할수 있겠다.
팀의 성적과는 관계없이 호아킨과 올리베라의 인기는 상종가를 달렸고 결국 두 선수는 거액에 발렌시아, 그리고 AC밀란으로 팔려가는데 로페라는 이 선수들을 영입한 금액으로 소비스, 보겔, 오돈코르같은 선수들을 영입했고 2007년 창단 100주년을 맞이해 그 어느떄보다 높은 순위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결과는 썩 좋진않다. 명장 이룰레타는 베티스에서 체 반년을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고 믿었던 소비스는 생각만큼의 위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티스의 팬들은 성적과는 관계없이 베티스를 응원하고 있다.
1월1일 세비야 기차역광장에서 베티스의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하여 1만여명의 팬들이 모였다는 기사가 바로 그 예이다.
안달루시아인들, 그리고 스페인인들에게 있어서 베티스는 언제까지나 매력적인 클럽으로 남을것이다.
*베티스의 스타플레이어들
루이스 델 솔 (Luis Del Sol) : 1938년 소리아에서 출생해 17세때 바다호스에서 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미 19세에 스페인대표팀에 선발되어 칠레월드컵과 잉글랜드월드컵을 치를만큼 어릴떄부터 천재로써의 능력을 인정받았는데, 60년대 베티스의 총재였던 비야마린이 당시 6백만페세타의 거액으로 마드리드로부터 영입해왔다. 베티스 역사상 성공적인 영입으로 꼽히기도 한 델 솔은 3시즌간 베티스에서 뛴 후 이탈리아무대로 건너가 유벤투스와 로마에서 뛰었다. 수아레스와 함께 몇안되는 이탈리아무대 성공자로 꼽힌다.
에스나올라 (Jose Ramon Esnaola) : 30년대 우르퀴아가와 함께 베티스 역사에 남을 골리로 기억되는 명 수문장, 바스크태생으로 소시에다드 유스를 거쳐 베티스로 이적해와 여덞시즌동안 팀의 수문장 역할을 해주었다. "고리티"라는 별명으로 팬들에게 잘 알려졌다고 하는데 빌바오와의 코파 델레이 결승에서는 선방과 함께 직접 키커로 나와 슛을 성공시키면서 베티스의 사상 첫 코파 델레이 우승에 기여했다. 90년과 92년에는 베티스의 골리코치로 활동하기도 했다.
알폰소 페레스 (Alfonso Perez) : 자신이 베티스를 사랑한다는것을 말이 아닌 실력과 득점으로 보여준 선수, 95/96 시즌 라울에 밀려 마드리를 떠나 눈물속에 베티스를 선택하긴 했지만 99/2000시즌을 마지막으로 베티스를 떠날때까지 197경기를 뛰며 69골을 성공시킨 고감도 득점포를 자랑했다. 베티스가 세군다리가로 떨어지자 잠시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긴 했지만 02/03시즌에 다시 베티스로 돌아온 경력도 있다. 유로2000 유고슬라비아와의 예선 3차전에서 우르사이스의 헤딩패스를 받아 루스타임에 스페인에 극적인 역전승을 안겨준 알폰소의 4번쨰 골장면은 아직도 입에 오르내릴정도다.
호아킨 산체스 (Joaquin Sanchez) : 안달루시아의 포트 산마리아에서 태어난 그야말로 안달루시아와 베티스를 위해 태어난 선수라고 해도 틀린말이 아니다. 지독한 안달루시아 사투리를 쓰는 선수로도 유명한데, 180경기를 뛰며 25골을 기록했으며 베티스가 챔피언스리그 진출 티켓을 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06/07시즌 개막을 앞두고 천문학적인 거액으로 발렌시아로 이적하긴 했지만 <마르카>에서는 호아킨에 대하여 "베티스 역사에 남을 기린아"라고 말하면서 베티스팬들은 오랜시간동안 호아킨이란 천재선수를 그리워할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홈구장인 루이스 데 로페라
레알베티스의 홈구장 "루이스 데 로페라"
52,500명 수용이 가능한 축구전용경기장이다.
(출처: 네이버까페 정열과 낭만의 스페인축구 | 충여니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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