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그리고 지리산자락의 종합선물셋트
0 언 제: 2007.8.5 (일요일)
0 찾아본곳 : 대전~경남 함양 상림,백련지와 홍련지~오도재~칠선계곡입구
추성리~마천 소문난 자장면집~성삼재~구례 운조루~문수골 문수사~
구례 산동 수락폭포~대전
0 동 행: 남실장,타잔,지설,킬리만자로 / 걷지 않고 차를 타고 다녔다.
산을 가다 보면 가끔 ‘등산로 아님’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이것은 지정된 등산로 외에는 모두 사람이 다녀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져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다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다.
나무하러 다니고, 장보러 다니고, 능선 너머 이웃동네를 넘나들던 길이고,
삶의 일상 속에 있었던 길이다.
지금은 멧돼지 가족들이 다니고 노루가 가다 말고 서서 잠깐 뒤돌아보는 길이 되었지만
아직도 다 살아 있는 길이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잃어버린 길이고 스스로 차단한 길이 되었을 뿐이다.
‘지리산- 고라니에게 길을 묻다’ 중에서 / 박두규
우리가 여기 있기 전 지리산은 거기 있었다.
그 뒤 우리가 그 산자락에 기대고부터 지리산은 늘 우리와 함께 있었다.
그 산에 가고 싶다.
번개치는 토요일 오후.
지리산을 가기위한 번개산행이 취소되었다.
국지성 호우가 많은 비를 뿌린 까닭이다.
하여 일요일 새벽. 몇명이 모여 다시 길을 떠난다.
일단은 지리산 자락으로 가자. 그리고 거기서 모든 것을 결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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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
비가 흩날리는 대전을 떠나 통영고속도로를 거쳐 함양에 도착했다.
조선 성종때 선비로서 옛 지리산 산행기를 처음으로 남긴 점필재 김종직.
그는 함양군수로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면서 관내의 지리산을 답사한 선구자였다.
조선조 김종직 이전에 신라시대 최치원의 흔적을 좇아 상림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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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양 상림 숲의 여름에서 孝心을 보다.
숲은 쉼과 사색의 공간이다.
그런데 거기에 역사가 덧붙여 ‘천년의 숲’이라면 어떤 모습일까?
함양 사람 누구든 ‘가볼 만한 곳’을 물으면 상림을 단연 첫 손으로 꼽는다.
신라시대 함양 태수였던 최치원이 거창과 함양을 가로질러 흐르는 위천의 범람을
막기위해 조성했다는 인공림 상림은 말그대로 ‘천년의 숲’이다.
숲속 개울을 따라 길이 1.6㎞ 폭 100~200m의 아름드리 숲이 펼쳐진
천연기념물 제154호 상림은 9세기 말 진선여왕 때 고을부사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했다.
일제시대 마을이 생기면서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었으나 지금은 상림만 남아있다.
이 숲은 단연 낙엽지는 가을이 최고지만, 여름의 짙은 녹음의 맛도 그에 버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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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내리는 이른 새벽 젖은 숲속이라 사진이 확실치 않다.
2만여 그루의 낙엽활엽수의 녹음이 워낙 짙어서 숲 속은 어둑어둑하다.
숲길로 들어서자 하늘을 가리는 갈참나무와 졸참나무, 떡갈나무, 단풍나무 등이 감싸 안는다.
상림 숲에는 ‘사랑나무’가 두 그루 있다.
100년 된 느티나무와 서어나무가 한 몸이 된 연리목이다.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몸통이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을 연리목이라 하고
가지가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을 연리지라 부른다.
연리목과 연리지는 금슬이 좋은 부부나 남녀 간의 애정이 깊음을 비유하기 때문에
이 나무 앞에서 서로 손을 꼭 잡고 기도하면 부부의 금슬이 더 깊어지고
남녀 간의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전해지는 희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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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서늘한 기운마저 감도는 울창한 숲그늘 사이로 나있는
흙길을 타박타박 걷는 맛이 그만이다.
숲속의 정자인 사운정이나 함화루에 올라 숲의 향기를 맡아본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숲이지만, 입장료도 없다.
숲을 거닐면서 최치원의 후손인 경주 최씨문중이 세운 문창후 최치원 신도비와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 사운정, 함양읍성의 남문으로 쓰였던 누각 함하루,
심원정, 일제시대 독립운동에 참가한 애국지사들의 기념비등 옛 유물들을 만난다.
큰 도로쪽 모서리에는 대원군 시절 쇄국정책의 표상이었던 함양 척화비가 비를 맞고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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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림에는 최치원과 얽힌 전설이 많다.
어느날 그의 어머니가 상림을 거닐다가 뱀을 보고 깜짝 놀란 이야기를 하자
곧바로 숲으로 달려가서 “모든 해충은 다시는 이 숲에 들지 마라”고 꾸짖어
벌레 한마리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는 전설도 남아있다.
그 때문인지 상림에는 지금도 뱀이나 모기같은 벌레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숲을 만들고 떠나면서 "상림 숲에 뱀이나 개미가 나타나고
숲속에 설죽이 침범하면 내가 죽은 줄 알라" 고 했다고 한다.
지금 뱀은 아직 나타나지 않지만 가끔 개미가 보이고 숲속에는 설죽이 많이 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는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을 것이라고들 한다.
하늘이 낸 효자로 알려진 최치원의 흔적을 보고 새삼 숙연해진다.
이곳 상림 숲은 단풍이 든 가을에 다시 찾고 싶은 여행지로 내 기억 속에 남게 될 것이다.
상림에서 병곡면 쪽으로 가다가 위천 건너편으로는 쭉뻗은 금강송 군락지가 눈에 들어온다.
맵시있게 자란 송림 숲의 운치가 그만이다.
이곳은 진양 하씨 문중 소유의 숲이다. 상림이 낙엽활엽수로 이뤄진 숲이라면,
이쪽은 소나무로 가득한 숲이다. 비록 규모는 훨씬 적지만 솔숲 그늘에서는 상림과는
또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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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3.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ZLR0dAZnMz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UvNTMwLmpwZy50aHVtYg%3D%3D%26filename%3D530.jpg)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4.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ZLR0dAZnM0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UvNTQ5LmpwZy50aHVtYg%3D%3D%26filename%3D549.jpg)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4.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ZLR0dAZnM0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UvNTUwLmpwZy50aHVtYg%3D%3D%26filename%3D550.jpg)
#2 여백이 꽃을 더 아름답게 한다…함양 상림의 연꽃
상림 옆에는 함양군이 조성해 놓은 연꽃 밭이 광활하다.
부여의 궁남지보다 나은 듯하다.
백련지와 홍련지로 나뉘어 위아래 두군데 연못을 조성해 놓았다.
각종 연꽃과 수련이 활짝 피어 있었다.
이른 아침이지만 곳곳에 사진작가들도 보인다.
‘연꽃잎 위에는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고 굴러 떨어진다.’ 는
연꽃이 주는 교훈을 음미하며 연꽃 길을 거닐었다.
연꽃과 수련을 구별하는 방법.
수련은 수면에 잎이 밀착되어 떠서 꽃이 피고...
연꽃은 토란잎처럼 물 위로 자라 꽃을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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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굶어 죽어가는 한 천한 여인으로부터 누더기 옷을 공양 받아,
이 옷을 이 연못에 에서 빨자 그 옷에 담긴 정성들이 알알이 연꽃으로 피어났다는 전설이
있듯이 불교의 상징은 연꽃이다.
처염상정(處染常淨)요, 화과동시(花果同時)이기 때문이다.
사는 곳이 진흙이라 더럽지만 그 더러움을 꽃잎에 묻히지 아니하고,
맑고, 깨끗함과 주위의 향기까지 퍼져 나가는 깨달음의 꽃이다.
또 꽃이 진 후에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꽃과 열매가 같이 피고 맺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봉오리가 막 피어날 때의 모습이 불교 신도가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연꽃은 많은 생활의 지혜를 주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2.blog.daum.net%2Fimage%2F32%2Fblog%2F2007%2F08%2F06%2F18%2F20%2F46b6e7a34091e%26filename%3DDSCN3526.jpg)
연꽃은 많은 생활의 지혜를 주고 있다. 그중 몇개를 소개한다.
유연불삽(柔軟不澁)
연꽃의 줄기는 부드럽고 유연하다.
그래서 좀처럼 바람이나 충격에 잘부러지지 않는다.
이와같이 생활이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으면서도 자기를 지키고 사는 사람이
연꽃처럼 사는사람이며, 연꽃의 유연불삽(柔軟不澁)의 특징을 닮은 사람이라 한다.
면상희이(面相喜怡)
연꽃의 모양은 둥글고 원만하여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온화해지고 즐거워진다.
얼굴이 원만하고 항상 웃음을 머금었으며 말은 부드럽고 인자하다
이런 사람은 옆에서 보아도 보는 이의 마음이 화평해진다.
이런 사람이 연꽃처럼 사는사람이며, 연꽃의 면상희이(面相喜怡)의 특징을 닮은 사람이라 한다.
불여악구(不與惡俱)
연꽃잎 위에는 한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는다.
물이 연잎에 닿으면 그대로 굴러 떨어진다.
물방울이 지나간 자리엔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
이와 같이 악과 거리가 먼사람 악이 있는 환경에서도 결코 악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며, 연꽃의 불여악구(不與惡俱)의 특징을 닮은 사람이라 한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2.blog.daum.net%2Fimage%2F10%2Fblog%2F2007%2F08%2F06%2F18%2F20%2F46b6e7ace92e0%26filename%3DDSCN3537.jpg)
홍련부터 조세핀이며 갖가지 이름을 가진 연꽃이며 수련들이 앞다퉈 꽃을 피워올렸다.
꽃 안쪽의 밝은 색조의 꽃술이 마치 등불을 켜놓은 듯 환하다.
고요하게 물 위에 봉오리를 내민 연꽃들은 활짝 피면 핀대로,
봉오리를 접으면 접은대로 운치가 느껴진다.
펼쳐진 연꽃에서는 절정의 순간이 느껴지고, 두손을 모은듯 올린 봉오리는
마음을 고요하게 해준다. 절정의 시간을 넘어 꽃잎이 하나둘씩 떨어진 것 조차도 애처롭다.
이렇게 연꽃 앞에 서면 무더기로 피어난 것보다 청초하게 한송이씩 피어난 것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백이 주는 맛이 살아나서일까.
꽃이야 다 같은 꽃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심상이야 다 다를 것이다.
와글와글 무리지어 경쟁하듯 피어나는 다른 꽃보다 하나 둘씩 꽃대를 올리는
연꽃에서는 더 깊은 품격과 정신이 느껴진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2.blog.daum.net%2Fimage%2F29%2Fblog%2F2007%2F08%2F06%2F18%2F20%2F46b6e7b7df983%26filename%3DDSCN3538.jpg)
#3 함양에서 오도재를 넘어 지리산으로....
함양에서 지리산으로 가자면 지안재와 오도재를 넘어 마천쪽으로 붙어야 한다.
함양읍에서 마천면의 벽송사와 서암(서암정사)로 넘어가는 길목에 지리산 능선을
타고넘는 구절양장의 고갯길 지안재와 오도재가 있다.
지안재를 넘어 마천면 방향으로 가면 변강쇠와 옹녀가 지리산으로 들어갈 때 올랐다는
전설의 고갯길인 오도재가 나온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2.blog.daum.net%2Fimage%2F28%2Fblog%2F2007%2F08%2F06%2F18%2F22%2F46b6e8644d74d%26filename%3DDSCN3560.jpg)
▲함양에서 오도재로 올라 가는 길이 재미있다...일명 S 라인...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9.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ZLR0dAZnM5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IvMjAwLmpwZy50aHVtYg%3D%3D%26filename%3D200.jpg)
지안재는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이 그대로 볼거리가 되는 곳이고, 오도재는
지리산의 천왕봉이며 중봉 제석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특급 전망대다.
오도재란 이름은 마천면 삼정리 영원사(靈源寺) 도솔암 (삼정산 자락)에서 수도하던
청매(靑梅) 인오조사(印悟祖師)(서기1548~1623년의 西山의 弟子)께서
이 고개를 오르내리면서 득도한 연유로 오도재라는 이름을 얻었다.
옛부터 하늘과 맞닿은 고개라는 뜻의 ‘천령’의 땅 함양의 옛 사람들이 장터목으로
가기 위해 괴나리봇짐을 지고 넘었던 험한 길이었다.
오도재 정상에 세워진 지리산 전망공원에 오르면 지리산의 하봉, 중봉, 천왕봉,
백소령, 형제봉, 반야봉 등이 한눈에 잡힌다.
함양 땅의 서남쪽으로는 풍만한 지리산의 거대한 능선이 마치 병풍처럼 펼쳐져있다.
오도재는 남쪽 하동이나 진주, 고성에서 보자면 지리산을 다 넘고서 만나는 마지막 고개였고,
북쪽 함양에서 치자면 지리산을 넘어가는 첫 고개였다.
옛날 함양 마천 사람들은 오도재를 넘어 장터목까지 가서 산청의 사천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했다.
지리산의 장터목이란 이름도 이런 연유로 붙여진 것이다.
오도재를 넘는 길은 지리산을 관통하는 정령치나 시암재처럼 골이 깊지 않다.
오도재 정상의 높이는 해발 773m.
지리산 제1문은 오도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부터 이 곳에는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방장 제1문이 2개 있었으나 나무로 된 문은 6.25때 불타고 없어졌으며
돌로 만든 문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
2005년 초에 오도재 옆 금대산에서 돌로 만든 방장 제1문의 표지석과 바위에 새겨진
방장 제1문에 관한 칠언시를 찾아냄으로써 지리산 제1문의 역사성이 증명 되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2.blog.daum.net%2Fimage%2F22%2Fblog%2F2007%2F08%2F06%2F18%2F23%2F46b6e885b96c3%26filename%3DDSCN3589.jpg)
▲ 함양군에서는 2006. 11. 1일 지리산 제1문을 오도재 정상에 준공 하였다
오도재(773m)는 삼봉산(1,187m)과 법화산(991m)이 만나는 지리산 관문의
마지막 쉼터로 예로부터 영남학파 종조인 김종직 선생을 비롯하여
정여창, 유호인 선생, 서산대사, 인오조사 등 많은 시인 묵객들이 걸음을 멈추며
지리산을 노래했다.
또한 벽소령과 장터목을 거쳐 온 남해, 하동등지의 해산물이 이 고개를 지나 전라북도,
경상북도, 충청도 지방으로 운송된 육상 교역로였다.,
이 때문에 지난날 지리산을 찾는 함양의 관리들도 이 고갯길을 넘어갔다.
1472년 8월 지리산 등정에 나섰던 당시 함양군수 김종직(金宗直)은 귀로에
오도재를 넘어왔고,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은 1489년 4월 오도재를 넘어
지리산 등정에 나섰다.
김일손은 이 등정을 <두류기행록>이란 글로 남겼는데, 오도재를 넘을 때의
기록이 재미있다.
[종자가 “말(馬)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내가 누구에게 절을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하기를 “천왕(天王)입니다”고 했다.
나는 천왕이 무엇인지도 살피지 않고 말을 채찍질하여 그냥 지나쳐버렸다...]
김일손은 말이 가는 대로 몸을 맡겨 등구사(登龜寺)에 도착했다는데,
오도재 남쪽에 등구사 절터와 등구마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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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9.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ZLR0dAZnM5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EvMTk1LmpwZy50aHVtYg%3D%3D%26filename%3D195.jpg)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9.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ZLR0dAZnM5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EvMTk2LmpwZy50aHVtYg%3D%3D%26filename%3D196.jpg)
2003. 11. 30일 지리산 천왕봉과 마주선 이 곳 오도재에 『지리산 가는 길』이
새로이 뚫려 전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되면서 비로소 함양 지리산 관광시대의 서막을 열게 되었다.
靑梅 印悟祖師께서 득도한 神靈스러운 곳이며, 한양가는 길이었던 오도재가
앞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으로 찾아드는 가장 짧은 길목이며
관광도로로써 지리산의 기를 받는 곳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오도재 부근에는 장승이 줄지어 서 있으며 휴게소와 "지득정(智得亭)"이라는 전망대가 있고,
오도재 정상에서 삼봉산으로 조금 오르다보면 "관음정(觀音亭)"이란 전망대가
새로 생겨나서 지리산 능선이 한 눈에 쏙 들어온다.
함양읍 전경과 오봉산의 모습, 지리산 능선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야말로 전망좋은 전망대다.
오도재의 소재지는 경남 함양군 휴천면 월평리.
2006년, 건설교통부에서 발표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중에,
경상도의 아름다운 길 18선에 지안재와 오도재(지방도 1023호선)의 길이 선정되었다.
이 1023번 지방도로는 ‘지리산 가는 길’이란 별칭을 달고 있다.
500년 전의 김종직이나 김일손처럼, 지리산을 찾을 때는 이 길을 따라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겨울철에는 많은 눈과 빙판으로 인해 통행불가....
이 고개를 넘어가면 지리산의 숲이나 자연보다는 산자락에 기대고
사는 주민의 ‘삶의 냄새’가 더 짙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구비구비 넘어가는 길 옆으로 난 다락논들.
비탈면에 일일이 돌담을 쌓아놓고 계단식으로 논으로 개간해 다듬어놓은 다락논은
이곳 마천의 명물로 꼽힐 만하다.
▲오도재 정상에 서있는 지리산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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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청 홈페이지에 게시된 사진
#4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을 따라 지리산 자락을 밟고...
지리산 자락에는 숨은 이야기가 많다.
산의 높이만큼 깊은 계곡과 나무, 돌 하나에 이르기까지 이야기 거리가 빠지지 않고
사연이 묻어있고, 전설이 배어있다.
그중 하나가 변강쇠와 옹녀 이야기이다.
계집을 좋아하는 인간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변강쇠전’은 작가와 창작연대는 알 수 없다.
신재효가 개작한 판소리 12마당에 속하여 전할 뿐이며, 일명 ‘가루지기전’이라고도 한다.
지리산 골짜기가 배경 무대이다.
바로 등구 마천. 좀더 자세히 말하면 함양군 마천면 등구 마을 일대가 변강쇠가의 배경 무대인 셈이다.
오도재에서 지리산 제일문 올라가는 길 옆에 오도재 주막이 있다.
주막에 차를 세우고 옆으로 200m쯤 가면 변강쇠와 옹녀의 무덤이 있다.
가는 길에는 ‘옹녀샘’이 있고, 변강쇠와 옹녀 묘도 만들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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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녀샘이라고 표시는 해 놓았는데 흐르는 물을 모아 놓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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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 앞에는 최근에 변강쇠와 옹녀가 발가벗고 합일(合一)한 모습을 돌로 조각하여 세웠는데,
변강쇠의 거대한 성기가 그야말로 압권이다.
(앞에는 옹녀, 뒤에는 변강쇠 상이다)
전국을 떠돌던 변강쇠와 옹녀가 순후하고 살기 좋은 곳을 골라 찾게 되는데
결국 지리산 오도재로 와서 살게 된 것이다.
변강쇠는 옹녀가 나무를 해오라 하여 나무하러 갔다가
산에서 등구 마천 나뭇꾼들과 어울려 논다.
날이 저물어지자 그냥 빈 지게로 집에 가면 마누라 바가지 등살이 있을 거라며 걱정을 한다.
변강쇠전 원문에 ‘사면을 둘러보니 등구 마천 가는 길에 우뚝 서 있는
장승을 발견하고 뽑아다가 불 때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등구 마천 가는 길은 오도재 길과 일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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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앞에 있는 석상.
한 몸에 전면은 여자 뒷면은 남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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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강쇠전’은 판소리로 공연이 되었던 작품이다.
신재효가 정착시킨 판소리 사설 중에 이 작품이 들어 있다.
따라서 고종 때까지 변강쇠전은 판소리로 불려졌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송흥록과 장자백이 ‘변강쇠가’를 잘 불렀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
근래에 들어와서 판소리 기능보유자인 박동진옹이 신재효의 사설에 곡을 붙여 그 맥을 이어왔다.
변강쇠가는 이렇게 시작된다.
중년에 맹랑한 일이 있던 것이었다.
평안도 월경촌에 한 여인이 살고 있으니, 얼굴은 춘이월에 반개도화가
옥반에 어리었고 초승에 지는 달빛이 아미간에 비치었다.
세류같이 가는 허리는 봄바람에 하늘하늘, 찡그리며 웃는 것과 말하며 걷는 태도는
서시와 양귀비라도 따라갈 재간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디 사주팔가가 어떻게 더럽게 타고 났던지 서방을 잡아먹는듸 지긋지긋하고
징글징글하게 잡아먹는듸 꼭 이렇게 잡아먹딘 것이었다.
남편을 잡아먹는 팔자를 타고난 옹녀로 인해, 그가 사는 삼십리 안팎에는 상투 올린 사내는
한 사람도 볼 수 없고 열 댓살 먹은 총각 도 볼 수가 없으니 여자들이 밭을 갈고 처녀가 짐을 지게 되는 형편이었다.
평안도 함경도 사람들이 합세하여 쫓아내니, 남쪽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때 삼남에서 빌어먹다가 양서지방으로 올라가는 천하잡놈 변강쇠라는 사람과
개성부근 청석골 좁은 골짜기에서 마주쳤다.
두 남녀는 서로 눈이 맞아 부부의 인연을 맺고 각처를 떠돌며 옹녀는
먹고살기 위해 들병장수 막장사를 할때, 변강쇠는 주색잡기로 세월을 보냈다.
하루는 옹녀가 변강쇠를 보고 말하기를
“당신 성질가지고 도망살이 하다가는 맞아죽기 알맞겠으니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서
팥밭이나 파서 먹고 땔나무나 베어 때면 노름도 못할 것이요, 강짜도 못할 테니 산중으로 들어갑시다” 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변강쇠와 옹녀는 지리산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이들의 정착지가 바로 등구 마천이다.
마천은 지리산 북쪽 관문을 통틀어 부르는 지명으로 행정구역상 함양군 마천면이다.
등구는 마천면에 속해 있는 마을 이름이다.
변강쇠와 옹녀는 각처를 떠돌다가 남으로 내려와 함양 땅에 도착해 오도재를 넘어 마천 땅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함양읍 구룡리 조동 마을에서 지안재와 오도재를 넘으면 마천 등구 마을로 이어진다.
마천장이 없었던 일제 때는 마천 사람들은 오도재와 지안재를 넘어
30여 리 떨어진 함양장까지 나가 가축과 소금 등을 사왔으며
집에서 기르던 돼지새끼를 지게에 짊어지고 함양장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변강쇠가 중 “약간 남은 살림살이를 짊어지고서 지리산 중을 찾아가니,
첩첩한 골짜기에 기와집 한 채가 덜름 서있구나.
이 집은 어떤부자가 임진왜란 때에 난리를 피해서 산중으로 들어왔다가,
이 집을 짓고 살다가 난리가 평정되어 뜯어갈 수 없어 그저 두고 갔는지라.
호랑이 여호 맷도야지 다람쥐가 집을 짓고 살고 있는지라”라는 대목이 있다.
변강쇠가 지리산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 산속의 폐 기와집은
이곳 사람들이 빈대궐터라고 부르는 구양리 마을 뒷산일지도 모른다.
빈대궐터는 가야의 마지막왕 양왕의 대궐터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또, 한편으로 빈대궐터에 등구사가 있었다고 한다.
등구사의 창건 년대나 폐찰 년대는 알 수 없으나 500여 년 전 탁영 김일손은
그의 지리산 산행기인 속두류록에서 산의 모습이 거북과 같다고 하여 절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변강쇠전에 나오는 폐기와집은 빈대궐터에 있었던 폐사된 등구사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리산 중 기와집에 정착한 변강쇠는 낮이면 낮잠자고 밤이면 배만 타니 옹녀가 견디가 못해
“건장한 저신세에 밤낮으로 하는 일이 낮이면 낮잠만 자고 밤에는 나를 조르니
굶어죽기는 고사하고 우선 얼어서 죽겠소. 오늘부터는 지게를 짊어지고 나무나 좀 해다 주시오”하고
변강쇠를 밖으로 내몰았다.
게으른 변강쇠. 나무는 하지 않고 점심 단단히 먹은 후에 솔그늘 잔디밭에
돌베개를 높이배고 한숨 자고 일어나 눈을 뜨고 바라보니
하늘에는 별이 총총 났는지라. 마음이 급했다.
이때 “사방을 둘러보니 등구 마천 가는 길에 장승하나 서있구나”라고 하면서
서슴없이 장승을 쑥 빼어 지게에 지고 집으로 의기양양돌아와 군불을 지폈다.
한편, 원통한 함양 장승 목신은 서울 노량진 나루터의 장승대방을 찾아 나섰다.
성이 난 장승 대방은 팔도에 통문을 돌려 수만 장승을 새남터에 모이게 하고
변강쇠란 응징방법을 강구해 결국 8백여가지 병으로 변강쇠를 죽게 만든다.
결국 변강쇠를 죽게 만든 등구 마천의 장승.
지금도 함양군 마천 일대에는 장승들이 많이 남아 있어, 변강쇠가 나무했던 시절엔
이보다 훨씬 많은 장승들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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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천 벽송사의 목 장승 한쌍
특히, 함양 벽송사 목장승은 등구 마천의 대표적 장승으로서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벽송사 건립년대인 152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재료는 밤나무이다.
왼쪽의 장승은 머리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고, 입은 홀쭉하게 꼭 다물어 뺨이 움푹 패였으며,
그 아래 짧은 수염이 나 있다. 얼굴의 표정은 과장과 질박함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어
장승의 신앙성격 잘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옹녀는 남편의 초상을 치르기 싫어 그것을 맡아 해주는 사람과 살겠다고 소문을 낸다.
이 소문을 들은 호색한들인 파계승 초란이며 각종 풍각쟁이들이 덤벼들었다가
변강쇠의 송작에 붙어 횡사하고 만다. 여기에 각설이패 마중들도 끼어들어 죽을 고생을 다 한다.
그중에는 덥득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등에 붙은 송장을 때려고 소나무며 절벽사이를 요리조리 빠진다.
그러다가 겨우 송장들을 떼어버리고 혼이 나서 부리나케 고향으로 떠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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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강쇠의 무덤과 옹녀의 무덤이 나란이 있다.
변강쇠전의 배경무대 함양 마천.
우리나라 성(性)해학의 극치라고 일컬어지는 변강쇠전.
사람들이 한잔 걸죽하게 마시면 우스갯 소리로 더러 입에 올리는 변강쇠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변강쇠나 옹녀가 그릇된 성문화의 대표 주자는 아니다.
조상의 해학과 사회 풍자가 담겨있는 뛰어난 문학작품인 것이다.
함양 등구 마천을 배경으로 한 변강쇠전은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라는
봉건적 윤리 법도를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음탕한 짓을 다하는 옹녀라는 음녀와
어지럽기 그지없는 생활을 하는 변강쇠라는 인물을 통해
조선 사회 말기의 부패한 사회상을 풍자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변강쇠전의 배경 무대를 두고 전북 남원시는 백장암 일대가 장승들이 모여 회의한
곳이라고 주장하면서, 관광지로 조성해놓고 있다.
이제 머지않아‘변강쇠전’도 관광 상품화가 될 것으로 보인다.
변강쇠전의 배경무대 ‘등구 마천’을 가진 함양군에서도 여기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함양군은 최근 군내 마천면 오도재 일대가 변강쇠전의 지리적 배경이란 공연대본이 발견돼
변강쇠전을 무대로 한 관광개발에 나서고 있다.
심지어 함양농협에서 생산된 쌀 명칭도 변강쇠쌀로 판매되고 있다.
#5 칠선계곡 끝 서암정사에서 만나는 경이로운 인공미
함양 마천면은 한신계곡·백무동계곡·광대골과 칠선계곡·국골·어름터계곡을 품고 있다.
임천강을 따라가다가 추성리로 접어든다.
추성리는 칠선계곡·국골·어름터계곡 물줄기가 만나 임천강으로 흘러간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도착했다.
추성리는 옛 가락국의 기운이 서린 산마을이다.
추성리 마을 건너편에는 신라 말에 창건되었으나 화재를 입어
조선 중종 15년(1520)에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한 벽송사와
제2의 석굴암으로 불리는 서암정사가 나즈막한 야산을 끼고 마주보고 자리잡고 있다.
서암정사는 사월 초파일 TV방영을 계기로 최근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신라말이나 고려초에 창건됐다가 조선 중종 때 중창됐다는 벽송사는 6·25전쟁의 처참한
비극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전란이 한창일 때 벽송사에는 인민군 야전병원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절집은 초토화됐으며 이후 새로 중창했지만
옛 흔적은 석탑과 유명한 목장승외에는 이렇다 할 것이 없다.
벽송사 들머리에는 사천왕상 대신 잡귀의 출입을 막고 사원의 풍수를 지켜주는
신장상인 한쌍의 목장승 금호장군과 호법대장군이 이채롭다.
왕눈과 주먹코의 4m 높이 목장승은 왼쪽의 금호장군이 머리 부분이 산불에 타서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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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을 만들고자 원을 세우고 원력을 모은 분은 원웅(元應)스님이지만,
그 일을 받들어 10여 년 동안 동굴에 부처님과 불보살 그리고 그 권속들을
조각한 사람은 홍덕희라는 분이라고 한다.
원웅스님이 밑그림을 그리면 석공 홍덕희님이 정으로 한뜸한뜸 자수를
하듯 조각을 하였다고 한다.
한 때 다른 석공들이 일을 하기도 하였지만 불심이 없거나 미약한 관계로
제대로 불사가 진행되지 않아 모두 그만두었다고 한다.
나이 33세인 홍덕희님은 91년에 서암에 들어와 10여 년 동안 햇볕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며
굴법당 조각에 전념하다 44세가 되어서야 제대로 햇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홍덕희님은 서암정사보다 조금 더 남쪽인 사천근방에서 또 다른
조각으로 불심을 다듬고 있다고 한다.
서암정사는 주지인 원응스님께서 1960년 초 벽송사로 오시면서 원력을 세워
현재 40여 년째 진행되고 있는 원력 불사의 결정체라고 한다.
6·25때 지리산에서 무고히 죽어간 수많은 원혼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을 기원하며 아직도 대치하고 있는 남북한의
화합과 통일을 기원하고자 불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좀체 수그러들지 않아 민심을 피폐케 하고 있는 동서 지역감정의
발로가 되는 모든 이기심과 분열을 없애고 부처님의 품안처럼 평안하고
자비심으로 살자는 마음에서 발원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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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문 (大方廣門: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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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極樂殿 :아미타여래가 주불이 되어 무수한
불보살이 조각된 부처님의 이상 세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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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운대(光明雲臺 : 구름 일듯이 무수한 불보살이 상주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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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정사는 벽송사에 따른 암자로 근대에 지어진 사찰이지만
바위굴에 모셔놓은 석불과 오밀조밀한 기암괴석, 아름다운 정원 등으로
벽송사보다 더 유명세를 타면서 함양군의 관광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서암정사는 인근 벽송사의 암자. 벽송사의 주지였던 원응 스님이 6·25전쟁 때
지리산에서 죽어간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1989년부터 조성했다.
서암정사는 절집에 대한 생각을 뒤집어놓는다.
석굴을 법당으로 삼고있는데다, 곳곳에 돌을 정교하게 쪼아만든 불상들을 세워놓았다.
잘 알려진 절집들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을 하고 있는데,
서암정사는 온통 인공적인 불사로 채워져 있다.
그 ‘인공’이 어찌나 정교하고 정성스러운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절집 입구의 사천왕을 지나 바위를 뚫어만든 ‘대방광문’이란 문을 들어서면서부터는 놀라움의 연속이다.
특히 굴법당으로 들어서면 탄성부터 나온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굴법당은 불상은 말할 것도 없고 벽이며 천장까지도 섬세한 조각들로 가득하다.
아미타부처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나한, 사천왕은 물론이고,
용이며 구름이며 연꽃 등이 빈틈없이 조각돼 있다.
조각작품이 아니라 마치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의 벽지를 바른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굴법당 옆의 연못도 인공적이긴 마찬가지지만 독특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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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리 마을에서 끝나는 칠선계곡은 지리산의 대표적인 계곡이다.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그리고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으면서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가 펼쳐지는 대자연의 파노라마이다.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과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손꼽힌다.
지리산 최고의 원시림 칠선계곡 대부분이 이 자연휴식년제 적용구간이 된 덕분에
산행 들머리 추성리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어찌어찌 칠선으로 산행에 나선 사람들은 졸지에 범법자가 된다.
그래서인지 마을에는 칠선계곡을 개방하라는 플랭카드가 사방에 나붙어 있다.
여러번 찾아 단골이된 칠선휴게소에서 이곳 명물인 흑돼지 바베큐로 점심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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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천의 소문난 자장면집 <나의 프로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지리산 주변의 사람들은 대개 지리산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지리산이 만들어주는 물로 농사를 짓거나 깊은 산속에서 약초를 캐고,
지리산을 찾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여 생활을 영위한다.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는 지리산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지리산 자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마천 명물중의 하나가 바로 ‘소문난 짜장(055-963-3799)’이다
KBS-TV <이것이 인생이다>에도 출연해 일약 유명해진 ‘소문난짜장’이다.
하나뿐인 팔로 자장면 면발을 뽑아내는 솜씨가 일품인데, 외팔이 사장 강상길 씨는
<나의 프로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소문난 자장면 공장'을 설립하는 꿈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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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전사람이다.
대전신흥초등학교와 충남중학교를 나와 대동연탄공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한때 프로권투 프로모션을 하기도한 다채로운 이력의 소유자다.
마천의 ‘소문난 자장면집’이 유명해진 것은 부산 국제신문 논설주간인
'최화수의 지리산 통신’ 제7~9호에 세 차례나 글이 실리기 시작부터다.
지리산 마천에서 자장면 집을 열고 있는 한쪽 팔이 없는 장애인 강상길님!
이 사람이 자서전 <나의 프로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를 펴내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사연을 소개한 글이다.
“지리산에서 ‘지리산을 닮은 지리산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알고 보면 그 행운은 쉽게 접할 수 있다.
지리산 북부 관문 마천(馬川), 이곳의 ‘소문난 짜장면’ 집을 찾아보라.
‘지리산을 닮은 지리산 사람’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강상길님은 순박한 품성, 열린 마음, 넉넉한 가슴으로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호남자이다.
그는 6순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순진무구한 인상은 만년소년과 다름없다.
지리산처럼 넓은 가슴으로 두루 인정을 베푸는 것으로 참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강상길님의 자서전 <나의 프로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에 대한 필자의 ‘추천의 글’ 일부이다.
이 책을 처음 펴낸 것은 지난 2003년 7월10일이다.
그 이후 오자 탈자 등을 바로잡은 재판(2쇄)이 나왔다.
3쇄 부수는 2000부, 일부는 서점에도 낼 것이라고 한다.
강상길님은 갖은 역경을 극복하고 지리산 자락에서 ‘소문난 자장면’집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렇지만 자신의 ‘프로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지리산 자락에 노인들의 요양소를 만들겠다는 꿈을 이제부터 실천에 옮기겠다는 것이었다.
그이는 그것을 위해 대학이나 사회단체 등에 특강도 나가고,
또 자서전 판매 수익도 기대하고 있다.
강상길님은 그 사이 TV에 여러 차례 출연했다.
자신의 인생역정을 드라마로 엮은 것에서부터 휴먼 다큐 등에도 그의 삶이 소개됐다.
KBS TV 휴먼 다큐는 20분 동안 그의 새로운 도전을 담아 방영했다.
그의 ‘프로 인생’은 노인 요양원 꿈을 잠시 접어두고 장애인 취업의
문을 넓혀주기 위해 ‘자장면 공장’ 건립으로 뜻을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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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장면 한그릇을 먹고, 저자의 즉석 사인을 받고 책 한권을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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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길 님이 자장면을 만들고 있다.
마천의 ‘소문난 자장면’ 집.
오른팔이 없는 강상길님이 만드는 이 지리산의 ‘소문난 자장면’이
'소문난 자장면’ 라벨을 달고 공장에서 대량 생산과 대량 판매를 하여
장애인들의 의지를 꽃피우는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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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상사 약사전에 모셔져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실상사 철제여래불상의
시선방향은 천왕봉을 넘어 일본 후지산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7 성삼재 고개를 넘어 넘어 구례로.....
다시 길을 나선다.
마천에서 뱀사골 입구인 달궁을 가기전에 실상사를 지난다.
조계종 금산사의 말사인 실상사는 구산선문 최초 가람이다.
구산(九山) 또는 구산 선문(九山禪門)이라함은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에 형성된 선종(禪宗)의 9개파.
신라 말기 당나라에 들어가 구법 수행한 선승들이 귀국하여 구산 선문을
크게 일으켰는데 9산 선종 중 가장 먼저 생긴 것이다. 실상사는 구산선문의 본산인 셈이다.
실상사는 산 속이 아닌 동네 앞, 들판 한가운데 있다. 예전에는 이곳도 산중이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홍척국사가 시대에 왜구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서 일본의 발원을 막을 자리에
절을 하나 세웠는데, 그 절이 바로 지리산 산내면에 있는 실상사이다.
그래서 이 절이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약해지고, 반대로 이 절의 기운이 쇠하면
일본이 흥해진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 이곳에는 중학과정의 대안학교인 ‘실상사 작은 학교’와 귀농한 도시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실상사 귀농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소문난 자장면’ 집의 가장 큰 고객이라고 한다.
몇해전 새만금 간척사업 문제로 삼보일배의 땀을 뿌린 스님중 한 분이 바로 이 절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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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재 가는 길에 달궁이 있다.
남원군 산내면은 뱀사골과 달궁 계곡을 끼고 있다.
성삼재라는 명칭은 유래가 있다.
우리 민족이 부족국가 사회를 이루고 있던 삼한시대에 부족 상쟁으로 크게 전쟁이 일어났다.
이때 마한의 대군에 쫒기던 진한왕이 전쟁을 피하여 문무백관과 궁녀들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와 심원계곡에 왕궁을 세우고 적을 막으며 오랫동안 피난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때 임시 도성이 있었던 곳을 달궁이라 이름지어 불렀다 한다.
동쪽은 황 장군이 맡아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그리고 노고단에서 발원한 계곡물이
반야봉을 구비구비 감돌아 흐르는곳에 자리잡았던 심원 달궁은 지리산 중에서도 가장 깊은 산골이었다.
이곳이 소수로서 다수의 적을 막기에 천혜의 요지였다.
그 당시 진한왕은 달궁을 방비하기 위하여 서쪽 10리 밖의 영(영)마루에 정장군을,
서쪽 20리 밖의 영마루에 황장군을, 또 북쪽 팔랑치(바래봉 철쭉으로 유명하다) 능선-
30리밖의 높은 산령에는 8명의 젊은 장병을 배치하여 일당 백으로 외적의 침공을 막아냈다- 하여
정령재,황령재,팔랑재의 이름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남쪽은 가장 중요한 요지이므로, 남쪽 20리 밖의 산령에는 姓이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방어케 하였기에 성삼재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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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삼재에서 내려다본 산동의 온천마을 풍경
▲ 성삼재에서 내려다본 시암재 휴게소
이같은 전설의 고장 달궁 마을에도 이제 그 옛날의 궁터는 찾아 볼 길 없다.
달궁을 지나 성삼재 굽이 굽이 돌아가는 길을 오른다.
성삼재는 비가 개었으나, 노고단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다시 시암재로 내려서서 천은사를 지나 구례로 향한다.
비오는 날, 구례는 근심걱정 다 내려놓은 신선의 마을과도 같다.
구례는 지리산 능선을 타고 내려온 안개로 뒤덮였고, 경남 하동에는 섬진강을 따라
벼가 한창 자라고 있다.
흙내가 풍기는 길이며, 함빡 젖어가는 한옥의 기와까지. 비오는 구례에서는
마음을 끌지 않는 것이 없다.
구례에서 화엄사를 지나 화동방향으로 섬진강을 따라 19번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오른쪽 길가에 문수사의 안내판이 크게 적혀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수사는 노고단에서 흐르는 두개의 능선(밤재능선과 왕시루봉능선)
사이의 골짜기 깊은 곳, 해발 800m 높이에 아주 깊게 깊게 자리하고 있다.
들어가는 길 입구 바로 옆에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99칸의 양반가옥 운조루가 있다.
반달곰으로 유명한 문수사 가는 길에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우리나라 99칸의 전통 한옥 운조루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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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운조루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생각하다.
“젊었을 때는 설악산이 좋고, 나이 먹어서는 지리산이 좋다”는 말이있다.
설악산의 호쾌한 암벽들은 루틴한 일상에 지친 샐러리맨들의 정신을 번쩍 나게 만든다.
반대로 지리산은 사람을 훈훈하게 감싸고 어떤 허물이라도 용서해 줄 것처럼 후덕한 육산(肉山)이다.
쉬지 않고 3천리를 달려오던 백두대간이 숨을 멈추고 결국(結局)을 이룬 지리산.
그 지리산의 노고단을 배산(背山)으로 하고 은빛으로 흐르는 섬진강을 임수(臨水)로 삼아
류씨 집안의 고택 운조루는 자리잡고 있다.
이 운조루는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이라고 한다.
소위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가장먼저 둘러 보아야할 장소다.
명당에 붙혀진 수식어인 3대 진혈인 금구몰이,금환락지,오보교취인 3대 진혈이 다 모인 곳이다.
이 혈을 잡아 집을 짓고 살면 그 터의 발복으로 천운의 도움을 받아
부귀 영달한다는 명당중의 명당이다.
운조루는 (雲鳥樓)‘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
그 호방한 품격만큼 이름도 낭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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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이 훤히 트여 있어 하루종일 밝은 햇빛을 받을 수 있고,
집앞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북쪽에는 겨울 찬바람을 막아줄 큰 산이 있고,
좌우에는 마을을 안온하게 감싸안은 좋은 집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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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내려앉은 기왓장과 세월의 무게만큼 손때 묻은 기둥과 대청마루가 이루는 조화는
그대로 한폭의 그림이다.
운조루는 거대하면서도 미세한 목공예품 같다.
박물관의 매끈한 유리 상자로는 결코 근접하지 못하는
구수함과 정겨움이 그 자연스러움에는 베어 있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고택의 진면목이 어디 화려함에만 있으랴.
애써 나이를 속이지 않으며,자연과 교감하는 고색창연한 풍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이와 가치를 더해간다.
페인트칠해진 나무 기둥보다 비와 바람과 햇빛에 해지고 시달린 흔적 그대로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집에 바로 조선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정수(精髓),
‘없는 이들에 대한 배려’의 정신이 담겨 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는 조선 영조 52년(1776년)에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胄)가 세운 집이다.
99간의 대저택이었던 이곳 사랑채와 안채의 중간 지점에 곳간 채가 있고,
그 곳간 채에 지금도 쌀뒤주가 하나 놓여져 있다.
둥그런 통나무의 속을 비워 내고 만든 뒤주라서 네모지지 않고 둥그런 원목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뒤주의 특이한 장치는 하단부에 가로 5센티 세로 10센티 정도의 조그만
직사각형 구멍을 만들어 놓고, 그 구멍을 여닫는 마개에다가 ‘타인능해(他人能解)’
라는 글씨를 새겨놓은 것이다.
‘다른 사람도 마음대로 이 구멍을 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뒤주는 누구라도 와서 쌀을 마음대로 퍼갈 수 있는 뒤주인 것이다.
류씨 집안에서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베풀기 위한 용도의 뒤주였다.
보통 가난한 동네사람들이 주 대상이었고, 그 외에도 운조루를 찾아오는 지리산 일대의 과객들도
조금씩 쌀을 가져가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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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열어 쌀을 퍼갈 수 있다는 의미의 ‘타인능해 ’글귀를 새겨 넣은 뒤주
그런데 왜 주인이 직접 쌀을 주지 않고 이처럼 곳간 채에 별도로
뒤주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서 가져가도록 했을까?
이 집 후손인 류응교 교수(60·전북대)는 자존심을 배려한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이 주인에게 직접 쌀을 받아 가면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곳간 채에 설치한 쌀뒤주는 주인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편안한 마음으로 쌀을 가져갈 수가 있다.
아름다운 마음씨는 이렇게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법이다.
이 쌀뒤주에는 쌀이 약 2가마 반이 들어간다고 한다. 상당히 큰 뒤주이다.
뒤주 하단부의 타인능해 마개는 옆으로 돌리게 되어 있다.
마개를 옆으로 돌리면 쌀이 나온다.
한 사람이 가져가는 쌀의 양은 보통 1~ 2되 분량이었다고 한다.
주인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5~6되씩 몽땅 가져가는 양심불량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가난하긴 하였지만 불문율과 염치가 살아 있는 사회였다.
운조루에서 지은 논농사가 2만평, 연평균 200가마를 수확했는데
쌀 뒤주에 들어간 쌀이 1년 36가마 분량이었으니 유씨 집안은 1년 소출의 약 20%를
없는 이들에 대한 배려로 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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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9 남한의 3대명당과 "금환락지" "금귀몰니"
남한 3대 명당
지리산은 그 후덕한 기운 탓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3대 명당인
금환락지(金環落地)를 만들어 놓았다.
해발 1506m의 노고단이 형제봉을 타고 내려오다 섬진강 줄기와 만나면서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하였는데 그 천하대지가 구례 들판 어느 곳엔가 위치한다는 비기가 전해 왔다.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가 그곳이다.
구례읍에서 경남 하동포구 쪽으로 가는 19번 도로를 타고 약 5km쯤 달려 가면
기름진 들판을 만나게 되는데 들판 아늑한 곳마다 옹기종기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다.
속칭 '구만들'이라 부르는 이곳의 마을들은 모두가 금환락지 명당터를 잡기 위해
외지인들이 몰려와 개척한 곳이라고 한다.
특히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난세를 피해 찾아드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에 대한 좋은 기록이 남아 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토지면 가구수와 인구 변동의 연도별 통계를 살펴보면
1918년 70호에 350명이었던 인구가 1922년 148호에 744명에 이르고 있어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의 대이동을 볼 수 있다.
나라는 망하고 일제의 수탈은 날로 가혹해지고 난데없이 몰려온 서양문물이 판을 치는
격동기의 급류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였던 사람들은 환란의 세월로부터 몸을 숨겨
안위를 구하고자 찾아들었던 것이다.
옛 사람들이 믿었던 비기인 즉 봉성(구례의 옛 이름) 현 동쪽에 대지가 있는데
이곳에 터를 잡으면 무장이 천명 나오고 문장이 만명 나오며 백자천손으로 후손이 벌족하여
가히 만 호가 살 수 있는 땅이고, 모든 성받이가 함께 발복할 명당이라는 것이었다.
지리산 미녀와 ‘금환락지’라는 곳
옛 지사(地士)들은 한반도를 절세의 미인 형국으로 보았고 지리산이 자리잡은 구례땅은
그 미녀가 무릎을 꿇고 앉으려는 자세에서 옥음(玉陰)에 해당하는 곳이라 했다.
그리고 그 미녀가 성행위를 하기 직전 금가락지를 풀어 놓았는데 그곳이 명혈(名穴)이 되어
금환락지라는 것이다.
가락지는 여성들이 간직하고 있는 정표로서 성행위를 할 때나 출산할 때만
벗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가락지를 풀어 놓았다는 것은 곧바로 생산 행위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금환락지라는 곳은 풍요와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땅이라는 것이다.
현재 토지면(土旨面)의 지명도 본래는 금가락지를 토해 냈다는 토지면(吐指面)이었는 바
모두 이와 같은 풍수형국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또 어떤 이들은 금환락지는 지리산의 선녀가 노고단에서 섬진강에 엎드려 머리를 감으려다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라고도 하고 그때 비녀도 함께 떨어뜨렸는데
그곳은 금잠락지(金簪落地)라 표현하기도 한다.
구례 금환락지의 풍수적 형국은 지리산의 주봉 노고단에서부터 그 신령스러움이
흘러오는데 월령봉을 타고 내려온 노고단의 용(龍)이 천황치에서
건너편 왕시루봉 줄기와 어우러져 섬진강을 끌어안은 모습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이고 안산(案山)으로는 강 건너 오봉산이 머리를 조아리며 춤을 추고 있다.
또 이곳은 우리나라 풍수지리가 태어난 탯자리이기도 하다.
구례에서 금환락지를 찾아가기 바로 전 마을이 장수촌으로 이름난 상사리(上沙里)와
하사리(下沙里)인데 도선국사가 이곳 모래밭에서 우리나라 산천 모습을 그려 놓고 공부하여
풍수지리의 오묘한 이치를 깨우쳤다는 곳이다.
그래서 도선국사가 모래밭에 그림을 그린 곳이라 하여 사도리(沙圖里)라 부르기도 한다.
금환락지는 또 다섯가지가 아름답다 하여 오미동(五美洞)이라 불렀다.
마을의 안산이 되는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의 산들이 다섯 별자리가 되어 길하고,
물과 샘이 풍족하며, 풍토가 윤택하여 다섯가지 아름다움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좋은 터전인데다 관청과의 거리도 멀어 관리의 횡포로 부터도 안전하였고
난세에는 지리산 깊은 골짜기로 몸을 숨길 수도 있는 곳이었기에
혹자들은 이곳을 가리켜 두 마리의 학이 춤추고 있는 쌍학지지(雙鶴之地) 청학동으로 비정하기도 했다.
아흔아홉칸 기와집 운조루
구례 금환락지에 자리잡은 대표적인 양택지는 운조루(雲鳥樓)이다.
이 들판의 영화로운 시절과 슬픈 이야기를 한 몸에 담고 있는데 호남지방에서는
대표적인 양반가옥이다. 운조루는 오미동 유씨 집안의 사랑채 누마루의 이름이지만
문화재 이름이 구례 운조루라 되어 있어 흔히 이 아흔아홉칸 기와집을 운조루라 불러온다.
이곳에 아흔아홉칸의 대저택을 세운 사람은 삼수공(三水公) 유이주(柳爾胄)였다.
유이주는 1726년 경북 해안면 입석동 출신으로 28세 되던 1753(영조2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낙안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낸 무관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개와 힘이 뛰어났고 문경새재를 넘다 호랑이를 만났을 때
채찍으로 호랑이의 얼굴을 내리쳐 쫓아 버렸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로 담대했다.
또 벼슬에 있을 때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함흥성 축조작업 등 대규모 건축사업에 봉직하여
운조루 창건자로서 손색없는 경력을 보여준다.
창건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말해주는 유이주의 행장에는 "세상 사람들이 이 오미동
집터를 길지라고 했으나 바위가 험하여 누구도 감히 집터로 할용하지 못한 것을
공(公)이 '하늘이 이 땅을 아껴두었던 것은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리신 것'이라고 말하며
수백 명의 장정을 동원하여 터를 닦았다."라고 나와 있다.
유이주는 경북 대구 사람인데 그가 이곳으로 이주해 온 배경은 전라도 승주에서
낙안 군수로 재직하였던 시절 금환락지 명당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낙안 군수 시절, 관직에서 은퇴하면 이곳에 세거를 이룰 것을 작정하고
그때부터 운조루 건축사업을 시작하였다. 운조루의 대역사는 7년에 걸쳐 진행되는데
1776년에 유이주가 함흥성 오위장으로 발령이 났을 때는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천리길을 오가며 작업을 독려했다는 전설도 있다.
또 구례 오미동에는 금환락지와 더불어 3대 진혈(眞穴)인 금구몰니(金龜沒泥)와
오보교취(五寶交聚)가 있는데 유이주가 잡은 터는 금거북이가
진흙 속에 묻혀 있다는 금구몰니 명당이라고 한다.
집터를 잡으면서 땅을 파보니 금구몰니의 명당을 입증이라도 하듯
어린아이 머리크기만한 돌거북이가 출토되었다는 것.
그래서 집을 앉힐 때 부엌자리에 안방을 배치해야 할 구조였으나 거북자리를 안방으로
사용하면 아궁이에 불을 때기 때문에 거북이가 말라 죽는다고
거북이가 나온 곳을 습기 많은 부엌자리로 배치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보교취는 금, 은, 진주, 산호, 호박 등 다섯가지 보물이 쌓여 있기 때문에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하늘의 도움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명당으로 통한다.
이 세 명당은 오미동 구만리 들에서 상대 중대 하대를 이루고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서로 자기네 집터가 그 자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운조루 주인은 자기집 안채가 상대 금구몰니이고, 중대 금환락지는 행랑채 밖 연못자리이며
하대는 면 소재지에 있는 돌탑자리라고 한다.
한편 환동(環洞) 박 부자 집터 역시 그곳이 금환락지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원내리(垣內里) 사람들도 자기네 마을을 오보교취의 하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 금내리(金內里) 사람들은 금환락지가 자기 동네 안에 있기 때문에 금내리라고 말한다.
이렇듯 오미리 일대 풍수촌들은 도선국사가 풍수지리를 깨우친 탯자리답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무수히 간직되어 있어 가히 풍수지리가 춤추고 있는 땅이라 할 수 있다.
(운조루 닷컴 발췌)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41/13_cafe_2007_08_07_08_48_46b7b361ecf7f)
▲ 섬진강변에서 바라본 사성암 (산꼭대기 부근)
* 우리나라 36명당(明堂)은 어디를 가리키는가?
제일 먼저 꼽는 곳이 구례의 사성암(四聖庵)이다.
한국 풍수의 원조인 도선국사가 공부했던 곳이다.
구례읍에서 약 2km 남쪽인 죽마리 오산(鰲山 / 530m)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원래 오산암이라 불렀는데, 544년(성왕 22) 연기조사가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성암은 4명의 고승, 즉 원효(元曉)·도선국사(道詵國師)·진각(眞覺)·의상(義湘)이
수도하였다고 하여 사성암이라 부르고 있다.
이 사성암 근처에 있는 동네가 사도리(沙圖里)인데, 도선이 어떤 이인(異人)으로부터
풍수의 이치를 전수받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사성암은 풍수의 ‘산진수회(山盡水廻)’의 원리가 교과서적으로 나타나 있는 터이기도 하다.
산자락이 끝나는 곳을 섬진강이 반달처럼 둥그렇게 감싸면서 흐르고 있는 모습이 아주 볼만하다.
운조루는 배산이 지리산이고, 임수는 섬진강이다.
그 사이에 너른 들판이 있어서 먹고 살기에도 풍족하다.
산에서 나물과 땔감이 나오고, 들판에서 곡식이 나오고, 섬진강에서 각종 고기들이 잡히므로
굶어 죽을 염려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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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 ’이란 뜻을 가진 운조루의 사랑채.
남에게 베풀고 배려할 줄 아는 조선시대 ‘가진 자의 철학 ’을 실천에 옮긴 집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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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도록 굴뚝을 낮게 설치했다.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배려했다.
운조루에 남아 있는 타인에 대한 배려의 또 한가지 유물은 굴뚝이다.
이 집은 다른 집에 비해서 굴뚝이 아주 낮게 설치되어 있다.
1미터 높이도 안된다. 건축적으로 볼 때 굴뚝이 높아야 연기가 술술 잘 빠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낮게 설치한 이유는 밥하는 연기가 높이 올라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쫄 쫄 밥 굶고 있는 사람들이 부잣집에서 펑 펑 올라가는 굴뚝 연기를 보면
자연히 증오와 질투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운조루의 나즈막한 굴뚝을 보면서 조선의 선비정신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동학과, 여순반란사건, 6.25의 한 가운데인 지리산에 있었으면서도 운조루가 불타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까지 고택이 남아 있는 집안들은 주변의 존경을 받아왔던 명문가임이 분명하다.
존경받는 집안이 아니었다면 동학농민혁명이나 6·25때 고택이 모두 불타버려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리산 밑에 있는 구례의 대저택 ‘운조루’(雲鳥樓)만 하더라도 여순반란이나 6·25때
불에 타 없어졌어야 했다. 대지주 집안이었으니까.
그러나 지리산 빨치산에 가담했던 이 집안의 머슴들도 자기 상전 집이던 운조루를 불태우는 것은
적극 반대했다고 한다.
운조루 출신의 머슴들이 반대하니까 다른 빨치산들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운조루는 적선을 많이 한 덕가(德家)로서 그 평판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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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사회에 부자는 있지만 귀족이 없다.
철학과 도덕성을 갖춘 귀족,제대로 된 상류층의 부재가 오늘날 한국사회가 직면한 문제이다.
존경받는 계층이 없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이자 병든 사회이다.
근세이전의 한국 사회는 이렇지 않았다.
아무리 재산을 늘리려 해도 흉년에는 남의 논을 사지 않았고
파장에는 물건을 사지 않는 금도가 있었다.
지조와 의리를 꺾으면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명예를 목숨처럼 지키려는 집안이 있었다.
청렴, 강직, 기개, 남에 대한 배려, 예의….전통사회의 명문가들이 지녔던
이같은 선비정신,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제(상류층의 도덕적 책임)의 회복이 시급하다.
이젠 부(富)와 귀(貴)를 맞트레이드해야 할 때다.
-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조용헌...발췌...-
입장료 천원에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
지리산 자락에서 또 하나의 마음공부 하나를 하고 간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지리산 서쪽에 있는 문수골에 지리산 반달곰이 산다는
문수사로 향했다.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자리한 최고의 명당 운조루를 거쳐 시작되는 문수골은 무척이나 골이 깊다.
운조루를 지나 표지판을 따라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오미리의 작은 마을이 나온다.
금환낙지라는 오미리 마을을 지나 문수제에서 뒤돌아 보면 섬진강이 기물거린다.
그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다 보면 시원스럽고 아주 넓은 저수지가 문수골의
아기자기한 모습을 소롯이 품고서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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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문수제... 전국 비경 촬영팀이 자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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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골 계곡은 조용하고 깨끗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지금 관광지로 뜨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7.blog.daum.net%2Fimage%2F30%2Fblog%2F2007%2F08%2F06%2F19%2F06%2F46b6f2c078ab6%26filename%3D12.jpg)
▲가파른 경사지에 계단식 다랑이 논에 빌 붙어 사는 영암촌이다.
영암촌 마을은 사진작가들의 단골메뉴이다.
거대한 산 지리산은 사방으로 열릴 만한 곳 어디에나 우람한 골을 열고 있다.
남쪽으로 난 골 가운데 서쪽에서부터 문수골, 피아골, 화개골, 악양골 등은
너른 벌과 우렁찬 계곡 등으로 인하여 활력과 넉넉함이 철철 넘쳐흐르는
지리산의 대표적인 큰 골짜기들이다.
이 골짜기들엔 대부분 하나의 면 단위 이상 마을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길이나 집들의 형색을 보면 윤기가 좔좔 흐르는데,
이는 지리산이 큰 골짜기를 통해 내려주는 풍물이 풍성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문수골은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서 시작된다.
운조루가 있는 오미리는 지리산의 용맥이 노고단으로 솟구쳤다가
화엄사 쪽으로 급히 떨어져 멈춘 곳이다.
예로부터 풍수지리설이나 비기(秘記)에 오미리는 '남한 최고의 명당'
또는 '노령·소백 최고의 명혈'이라는 등의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문수골엔 여행객들을 위한 두 개의 명물이 있다.
하나는 운조루라는 옛 집이고 다른 하나는 문수사라는 작은 절이다.
문수골은 운조루에서 시작되어 문수사에서 끝난다고 할 수 있다.
포장도로가 시작되는 들머리에 운조루가 들어서 있고 그 길 끝머리에 문수사가 막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도에서 3㎞ 정도까지는 아스팔트가 잘 깔렸지만 그 이후부터는 콘크리트 포장길이다.
내년까지 나머지 도로도 확포장할 계획이다.
형제봉 줄기를 따라 구불거리며 가는 길 오른 쪽 벼랑 아래 계곡에는 하얀 물이 흐른다.
노고단 아래서 시작하여 문수리 저수지까지 10km에 달하는 청정계곡이다.
차가 산길을 따라 오르면 좌우로 기세 좋은 산줄기가 파노라마처럼 다가 온다.
문수골은 아직 이름이 나지는 않는 산 높고 골 깊은 전형적인 산골이다.
산굽이를 돌아 돌아 오르면 우뚝 솟은 노고단이 먼저 반긴다.
포장이 끝날 즈음 건너편에 옹기종기 작은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이어지는 문수골의 소박한 경치는 눈을 잠시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지금도 박물관에나 있음직한 전통 초가가 보존되어 있어 취재 기자들의 호기심 대상이다.
다랭이 논을 배경으로 국내 사진작가들이 사진 소재로 많이 찾는 산골 마을이기도 하다.
행정구역은 문수리지만 지역이 워낙 넓어서 위치에 따라 상죽, 중대, 불당, 밤재,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밤나무가 많아서 밤재, 절터라해서 불당 했단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왕시루봉, 서쪽으로 형제봉 양대 산줄기가 섬진강변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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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에서는 가장 후발 주자인 곳이다.
절 아래 밤재 마을은 요사이 관광지로 개발되어 현대식 펜션과 민박을 하는 집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리산 자락에서 가장 늦게 알려진 조용하고 깨끗한 피서지여서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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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리산 반달곰이 절집境內에서 뛰어노는 문수사
구례에서 하동 방면 19번 국도를 따라 5km 정도 가면 오미리 길가에 문수사 입간판이 서 있다.
문수사 찾아 가는 길은 지리산 열두 계곡의 하나인 문수계곡을 따라 오르면 된다.
국도에서 문수사까지 8㎞로 20여분이 걸린다.
문수사는 해발 700m가 넘은 높은 곳에 숨은 듯 자리하고 있으니
산굽이를 한참이나 올라야 한다.
과거에는 좁은 시멘트 길이서 불편했지만 지금은 반 정도 확포장이 되어 있어 조금은 수월하다.
그러나 처음 찾는 사람들은 지금도 이런 산골이 있구나 하고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하다.
구불구불한 초행 길을 신경쓰며 운전한다.
마음과 눈으로만 주변의 경치를 부지런히 담는다.
특히 영암촌의 모습은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는다.
자꾸 뒤돌아보다가 차를 세우고 급기야 사진을 한장 찍는다.
산골 정취에 취해 굽이굽이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오르면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편이 밤재, 오른편이 문수사 가는 길이다.
밤재는 예전에 화엄사를 넘나들던 길목이었다.
밤나무가 유명하여 밤재라는 마을은 이제 밤나무는 간 곳이 없고 고로쇠 약수와 약초가
농가수입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문수골 고로쇠는 특산품으로 등록할 정도로 맛이 좋아 전국에 공급하고 있다.
해발 500m에서 1000m 산중에서 자라는 고로쇠나무에서 채취한 것이니 만큼
우리나라 제일의 품질을 자랑한다.
밤재는 전형적인 산골마을로 터를 잡은지 300년 이상 되었다는 것을
마을 뒤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증명해 주고 있다.
예전에는 질매재로 해서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었지만
지금은 반달곰 프로젝트로 인해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산에 의지해 살아야 하는
밤재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문수골 삼거리 수퍼에서 오른 쪽길로 가면 문수사이다.
시멘트 포장이 잘 되어 있다. 계곡이란 어디나 다 마찬가지지만 골짜기가
좁아서 오르는 길옆으로 내내 숲이 우거진 계곡이 물과 함께 따라온다.
계곡이 깊고 산이 높아 물이 많아서다.
사철 바위를 돌아 흐르는 작은 폭포들의 물소리가 시원하다.
삼거리에서 가파른 길을 1.5㎞정도 오르면 문수사 주차장이다.
여기서 500m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하지만 붐비지 않으면 절 입구까지 차로 갈 수 있다.
시멘트로 길을 다 닦아 놓아서 가는데 불편함은 없지만 군데군데 경사가 장난이 아니다.
해발 800m를 올라오니 귀가 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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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에 아치형 터널이다.
아직은 덩쿨이 완전히 자리잡지 않아 인공적인 것이 눈에 띠는데 조금 지나면 운치있을 것 같다.
사찰로 올라가는길은 돌담을 쌓아 소담스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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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집 입구의 해우소 바닥엔 낙엽과 인분이 자연발효되고 있다.
고봉스님의 땀방울이 절집 구석구석에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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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안내판에 새겨진 문수사의 연혁을 살펴본다.
좌청룡 우백호의 기운이 뚜렷한 문수골 문수사는 백제 성왕 25년 (서기 547년)에
연기조사께서 창건하였고, 그 뒤 원효대사, 이상법사를 비롯하여
윤필, 서산, 소요, 부유, 사명대사 등 여러 고승 대덕께서 수행정진한 제일의 문수도량이다.
임진왜란때 일부가 왜병의 난입으로 파괴된 뒤 불당을 조성하지 못한채 6.25사변을 맞아 전소되었다.
그 후 1984년 요사체를 세우고, 1988년에 대웅전 터에
지금의 고금당선원을 건립하고 진입도로를 완성함으로써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어 문수전, 삼성각,고봉선원,방장굴, 실선당 등을 건립, 석축을 쌓고
삼층법당 대웅전(목탑)을 건립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연기조사는 신라 경덕왕때의 고승으로 화엄사를 창건한 분이다.
15년 전에만 해도 버려진 절이나 다름없었던 곳이었는데 지금의 주지 스님이
번듯하게 중창을 해서 제법 절 모양을 갖추었다.
연중 많은 관광객들이 찾을 뿐만 아니라 가끔 대형버스로 신도들이 찾아 온다.
워낙 심산유곡에 자리해서인지 무척 조용하고 적막해서 찾는 이들이 잠시나마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에 좋은 절이다.
문수사 절 마당에서 보면 왕시루봉의 능선이 우람하게 다가 온다.
워낙 높은 곳이라 절터가 둥실 떠 있어 반야용선을 타고 천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기분이 든다. 앞 뒷산 자락을 비집고 뻗어내린 계곡이 천혜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펼쳐 보인다.
하늘이 한 뼘일 만큼 계곡이 좁다.
높은 봉우리와 산자락, 계곡, 그리고 그 아래 아스라하니 보이는 섬진강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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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탑처럼 생겼다고 탑대웅전이라고 한다.
절터가 좁아서 일주문도 없다.
절 마당에 들어서면 특이한 모습의 대웅전이 있다.
목조삼층탑 형태이다. 화순 쌍봉사 대웅전(보물 163호)을 본떠 지은 것이다.
쌍봉사 대웅전은 1690년(숙종 16) 이중창 때 모습이 그대로 남아 목조탑의 원형을
보여주는 문화적 가치가 높았으나 애석하게도 1984년 4월 신도의 실수로 인해 불타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원본 설계도에 의해 복원하였고 여기 문수사도 또한 그 모습을 본 따 지은 것이다.
법당이 참 작다.
여러 사람이 함께 기도하기는 어려울것 같다.
대웅전의 처마는 이제 막 비상하려는 한마리 새의 날개짓 처럼 화려하고 기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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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안내판의 그것처럼 정말 문수사에는 반달곰이 있었다.
몇년 전 방사한 4마리 곰 중에 두 마리는 죽고 두 마리만 살고 있다고 했는데
다른곳에서 시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새끼로 보이는 2마리를 합해 4마리가 있었다.
참외 하나에 5000원으로 보시물을 팔았다.
겨울철에는 주로 사과를, 여름철에는 참외를 간식으로 주고 있다고 한다.
곰이 참외를 그렇게 좋아하는줄 처음 알았다.
와작와작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었다.
절집을 둘러보는 사이 갑자기 주위가 소란해졌다.
철창속에 갇혀있는 수놈 반달곰 한마리가 밖에 나와 스님과 한바탕 개구쟁이 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반달곰은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니다가 참외를 물고 나무위로 올라간다.
참외 2개를 먹고 한참을 놀다가 우리로 다시 들어간다. 마치 잘 조련된 서커스단의 곰과도 같다.
방학을 맞아 부모들과 같이온 아이들이 무척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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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마셔보아야 할 감로수다.
졸졸졸 흐르는 약수와 달리 문수사 약수는 수량이 많아 꽐꽐꽐 쏟아낸다.
한모금 마시면 가슴이 확트이는 청량감을 느낄 수 있다.
절집들은 공간이 좁아서인지 대웅전을 중심으로 산비탈에 석축을 쌓고 비집듯 자리 잡고 있다.
전에는 자그마한 암자여서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터이다.
석축 계단을 따라 오르면 문수전과 산신각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절 마당이 그리 넓지 않고 건물을 계단식으로 배치한 것이 특이하다.
산이 높고 깊을 수록 고요는 더 무겁나 보다.
해질 녁 문수사 저녁 풍광은 일품이라고 한다.
범종 소리 따라 산골도 덩그렁하고 울 것 같다. 그러나 어두어워지기전 일찍 절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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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구례 수락폭포...지리산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풍광좋은 폭포
이제 지리산 자락 답사는 막바지로 향한다.
문수계곡을 내려와 다시 길을 거슬러 구례로 향한다.
마지막 답사지인 구례 수락계곡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산동면 소재지 원촌마을에서 지리산 자락을 따라 4㎞ 정도를 더 들어간 곳에
자리한 수락폭포는 15m 높이의 낙차에 수량도 풍부하다.
해마다 인근 주민의 여름철 물맞이 폭포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폭포입구에는 신경통, 근육통, 산후통 등에도 효험 있다는 글이 있다.
실제 “10번의 세수보다 1번의 알탕이 낫고 10번의 알탕보다 1번의 폭포탕이 낫다.”
라는 말이 있다.
이곳 수락폭포의 내력은 깊다.
예로부터 근동 주민들이 모내기, 김매기를 마치고 허리통증, 신경통을
다스리기 위해 요긴하게 찾던 일종의 민간 치료처였다. 이른바 '천연 워터 테라피'의 원조격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이 곳은 국악의 성지로도 통했다.
동편제의 국창 송만갑 선생 등 남원을 중심으로 한 동편제 소리꾼들이
인근 주천 구룡폭포와 더불어 득음처로 활용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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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리 수락폭포의 명성은 빼어난 입지 때문이다.
웬만한 계곡이라면 크고 작은 폭포 한두 개쯤은 거느리고 있다.
하지만 모두 물맞이폭포가 될 순 없다. 입지와 여유공간을 지녀야 한다.
구례 수락폭포는 접근성과 수온, 낙차의 세기 등의 여건을 고루 갖췄다.
제 아무리 멋진 폭포라 해도 폭포수 아래가 깊은 소를 이루면 다가갈 수가 없다.
하지만 수락폭포는 물줄기가 떨어지는 곳까지 긴 턱이 이어져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또 물을 맞는 곳, 물줄기 안쪽으로도 여유 공간이 있어 여러 명이 함께 물맞이를 할 수 있다.
특히 지리산 심산유곡이지만 이제는 길이 잘 닦여 주차장과도 지척이다.
거기에 워낙 산이 깊다보니 가뭄에도 좀처럼 수량이 줄지 않고,
물줄기나 수온도 오랜 시간 물맞이를 할 수 있을 만큼 적당하다.
폭포 원줄기 말고도 통나무 수로 등을 설치해 작은 규모의 물맞이 장소도 있다.
풍치도 빼어나다. 기암괴석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고, 주변에는 이끼류와 돌단풍,
소나무 등이 자라고 있어 멋진 경관을 연출한다.
물맞이에는 시도 때도 없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여명 무렵 결가부좌를 튼 채 물맞이에 나선
'도사급' 피서객이 있는가 하면 대낮엔 폭포아래가 피서객으로 만원이다.
차림새는 수영복 아저씨, 비닐 포대를 둘러쓴 아주머니, 셔츠를 받쳐 입은 아가씨 등
각양각색이지만 더위를 떨쳐냈다는 후련한 표정만은 한결같다.
청정 지리산 풍광 속에 자리한 수락폭포야말로 더위는 물론 마음의 때 까지
씻어낼 수 있는 최고의 세심처(洗心處)임에 틀림없다. (조선일보 인용)
ㅇㅇ
♣ 길 위 에 서---이 정 하
길 위에 서면 나는 서러 웠다
갈수도 안 갈수도 없는 길 이었음으로
돌아 가자니 너무 많이 걸어 왔고
계속 가자니 끝이 없이 너무 막막했다
허무와 슬픔 이라는 장애물
나는 그것들과 싸우며 길을 간다
그대라는 이정표
나는 더듬 거리며 길을 간다
그대여
너는 왜 저만치 멀리 서 있는가
왜 손 한번 따스하게 잡아 주지 않는가
길을 간다는 것은
확신도 없이 길을 간다는 것은
늘 쓸쓸 하고도 눈물겨운 일 이었다
누군가가 <모든 풍경은 일생에 단 한번 뿐이다.>고 했던가.
내년을 기약 할 수 없는 바로 지금의 지리산 풍경들...
왠지 그 말이 오늘따라 가슴에 와 부딪힌다.
그곳에 있던 나무와 바위와 안개들....
그 곳에 걸려있는 하늘이 올해와 내년이 같을 수는 없겠지...
모든 풍경은 일생에 단 한번 뿐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녀 온 길이지만 어제의 길은 수년전 다녀온 길과는
또 다른 모습 이었다.....
ㅇㅇ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9.blog.daum.net%2Fimage%2F6%2Fblog%2F2007%2F08%2F06%2F19%2F06%2F46b6f288799a9%26filename%3DDSCN3719.jpg)
인류에게 목소리 다음으로 오래된 악기는
타악기라 했던가.
두드림 그 날소리의 원초적 미학이 삶의 전부인 이가 있다.
최소리(본명 최경섭)...
최소리의 음악인생은
초등학교 시절 도시락 뚜껑과 책상을 두드리며 시작됐다.
12살부터 북채를 잡았단다..
특히 5년여 동안 지리산에 입산해
몰두하고 찾아 헤매던 것은
“우주 만물의 에너지를 각각의 특이한 소리를 메시지로
되살리는 작업”이었다고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41/5_cafe_2007_08_07_10_53_46b7d095458f3)
1989년~1992년까지 3년여 동안
록그룹 ‘백두산’의 드러머로 활동하며 인기 드러머로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처럼 여유를 누렸다.
그러나 좀더 자신의 색깔이 있는 음악을 하고 싶어 두번째 산행을 감행,
가평산에서 손수 악기를 만들며 음악을 연구했다.
마침내 1997년 첫 음반 ‘두들림’을 냈다.
그의 음악에서 강한 한국적 정체성을 느끼게 된다.
그는 전부터 소음성, 신경성, 난청질환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청력을 잃는다면 오히려 상상의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편안하다”는 그다.
온 몸을 전율케 하는 그의 음악은
그런 ‘자유정신’에서
‘최소리’라는 고향 남도의 장단과
록 드럼의 비트가 절묘한 조화를 이뤄 창조된다
格外仙堂(격외선당) - 최소리
(Dharma`s best shrine)
* 격외선당(格外仙堂) : "격식밖에서 노니는 신선의 집"이라는 뜻으로
소설가 이외수의
춘천집 사랑방 현판에도 쓰여져 있음.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45/1_cafe_2007_08_07_10_53_46b7d0b446d78)
춥나?...ㅋ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