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 들었다..^^;
성극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어려울까...
흐...오늘 모임인데 아직 괜찮은 성극을 못 찾았다...
메신저에서 보영이 만나서 /봉숭아 학당/ 읽어봤는데 올릴테니 읽어보려무나~어디 올릴까? 자료실? project2002?
--------------------- [원본 메세지] ---------------------
소년의 불행은 아버지가 6.25 때 공산주의에 물들어 월북하면서 시작됐다. 마을사람들은 그의 남은 가족들을 모두 빨갱이로 취급했다.
"빨갱이 집안은 모조리 쏴 죽여야 해!"
이런 협박과 야유를 늘 받아오다가 어느날 소년의 어머니는 마을 청년들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소년의 소매를 붙잡고 간신히 우익 청년들의 감시망을 빠져나왔다. 소년은 그 집안의 칠대 독자였다. 할아버지는 쌀자루와 부싯돌을 차고 소년과 함께 숨어 지냈다. 나중에는 손자를 그의 딸네 집에 맡기고 혼자 은신하다가 1952년 12월 17일 북풍한설에 꽁꽁 얼어붙은 몸으로 발견됐다.
소년은 고모댁에 양자가 되었으나 고모마저 병환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고모부는 곧 새로운 아내를 맞이했다. 소년과 그들과의 관계는 더욱 멀어졌다. 그들은 온갖 궂은 일을 시키며 여섯 살의 소년을 박대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논밭으로 나가 종일 김을 매거나 돼지풀을 뜯곤 했다. 그러다가 지치고 피곤해서 논두렁에서 잠이 드는 일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발견한 소년의 고모부는 발길질로 조카를 마구 깨워 두들겨 팼다. 소년은 제대로 먹지도 못해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았다.
그래도 동네 앞에는 한없이 넓고 푸른 바다가 있어서 좋았다. 특히 황해 바다는 간만의 차가 심했다. 마냥 신비한 바닷물의 규칙적인 변화는 소년을 비롯해 동네 아이들로 하여금 즐거운 놀이를 하도록 했다. 물이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밀물 때는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 아이들이 부리나케 달려나오곤 했다. 해가 멀리 바다끝에서 진홍색으로 타오르며 세상의 흑암을 걷어내는 장면은 언제 봐도 장관이었다. 소년은 자연의 위대한 조화에 곧잘 넋을 잃었다. 그 순간 만큼은 외로움도 잊고 행복해질 수 있었다.
1953년 어느날이었다. 소년은 그날도 종일 바닷가에서 놀았다. 그런데 저녁에 돌아오는 길에 이상한 돌을 발견했다. 벼가 한참 자라고 있는 논길가에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돌 하나가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주먹보다 더 크고 오돌토돌하게 생긴 돌이 참으로 신기했다. 소년은 먼지를 털고 그것을 주워들었다. 당장 아이들에게 가져가서 자랑하고 싶었다. 늘 주눅이 들어 있던 소년으로서는 다른 아이들이 갖지 못한 것을 모처럼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 참을 수 없이 기뻤다. 그러나 힘센 아이들에게 뺏길 것 같아 함부로 자랑할 수가 없었다. 남자아이들과 훨씬 떨어져서 오다가 만난 두어 명의 여자 아이들에게는 그것을 보여주었다.
"얘들아, 나 오늘 이상한 부싯돌 주웠다, 봐라!"
"어머! 무슨 부싯돌이 그런 게 있니?"
"틀림없이 부싯돌 같은데, 한번 돌로 쳐보면 알지."
소년은 그것을 돌로 쳤다.
꽝-!
너무나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온 섬을 뒤흔들 듯한 폭음과 함께 소년은 까무러치고 말았다.
소년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그러나 하늘에 총총히 박혀서 빛나야 할 별들이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 소리가 가까이서 나는 데도 전혀 그림자를 볼 수 없었다. 세상이 이렇게 깜깜할 수가….
"두 눈알이 튀어나가고 오른팔도 달아났군."
"그래도 생명이 모질어서 죽지는 않았어. 쯧쯧…"
소년은 그제서야 운명의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년은 양팔의 감각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왼팔만이 손끝까지 무사한 채 헛되이 오른 쪽을 더듬고 있었다. 소년이 아까 건드린 돌은 수류탄이었던 것이다. 다소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던 소녀들은 하나가 다리를 약간 다쳤을 뿐 큰 변을 당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나저나 출혈이 심해서 이대로 놔두면 죽겠는데…."
"이 섬에는 병원도 없고, 배에 싣고 육지로 나간다 해도 너무 시간이 걸려 위험해. 무슨 수가 없을까."
"그러면 죽도록 내버려 둬야 하나?"
"달리 방법이 없잖아. 쯧쯧… 불쌍한 녀석 그만 지난 번 난리 때 자기 엄마 하고 같이 죽는 게 더 좋았을텐데. 혼자 살아남아 비참하게 죽는군."
"그러게 말야."
정말 소년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교동도에서 인천까지 배편이 이튿날 아침에 있었으나 지금 당장 갈 수 있다고 해도 여섯 시간 넘게 걸려 응급후송에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마을사람들은 안쓰러워서 혀만 차고 있는데, 이때 그들의 머리 위로 느닷없이 헬리콥터가 나타났다. 미군 헬기였다. 헬기가 사고지점 근처에 착륙하자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소년을 부둥켜 안았다. 소년은 곧장 헬기에 실려 김포에 있는 미군 야전병원으로 옮겨졌다.
소년은 거기서 육 개월 간 치료받고 1953년 12월 2일 퇴원했다. 그러나 잃어버린 두 눈은 되찾지 못했다. 영원히 앞을 볼 수 없는 장애인으로 새출발해야 했다. 의지할 가족조차 없는 소년은 강화읍에 있는 영생원이라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소년은 곧잘 넘어지고 엎어지고 부딪히며 깨지곤 했다. 게다가 고아원 아이들조차 소년을 조롱거리로 삼아 더욱 슬펐다.
"꼬마 장님! 꼬마 장님…"
"용용…, 누가 때렸게?"
"봉사야 날 잡아봐라! 히히히…"
"외팔이 장님, 오른팔은 어디 팔아먹었지?"
철없는 아이들은 소년을 꼬집고 때리며 마구 놀려댔다. 그때마다 소년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세상을 보고 싶은 욕망으로 몸부림쳤다. 그렇지만 운명을 뒤집을 수 없는 현실에 빈번히 기가 질리고 말았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원장이 소년에게 눈을 밝히는 비결을 가르쳐줬다.
"예수를 믿어. 예수님께서는 죽은자를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앉은뱅이와 문둥병자를 고치셨고, 눈 먼 자에게 눈을 뜨게 해주셨어."
"원장님!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로 예수를 믿으면 세상을 볼 수 있나요?"
그야말로 소년에게는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영생원의 강아기 원장은 감리교의 신실한 여자장로였다. 그녀는 미군부대에서 나온 통조림이나 빵조각 따위를 소년에게 은밀히 주는 등 평소부터 각별한 사랑을 베풀었다.
소년은 원장의 전도를 받고 열심히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여덟 살의 나이에 크고 작은 부흥집회를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눈을 뜰 수 있다는 소망 때문이었다. 그렇게 육 개월을 예수에 미치다시피 했으나 소년에게 기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소년은 다시 절망에 빠져 원장에게 말했다.
"원장님, 예수를 믿어도 소용없습니다."
"육신의 눈보다 영의 눈을 떠야 하는 거야!"
"하지만 저는 이런 꼴로 서럽고 불편해서 도무지 살 수 없습니다. 눈을 뜨고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너와 같이 앞 못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이 있단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늘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래서 너도 그런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좋은 길이 생겼어. 미군부대에 계시는 목사님이 주선해서 너를 대구의 라이트하우스로 보내기로 했단다. 거기 가면 너와 같은 처지의 친구들이 많아 외롭지 않을 거야. 또 공부도 시켜준대."
소년은 귀가 솔깃했다. 벌써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던 것이다.
1956년 어느날 소년은 부푼 꿈을 안고 대구로 갔다. 라이트하우스에는 모두 맹아들만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 쉽게 친숙해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맹아학원에 진학해 초급과정부터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소년은 이제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다만 풍족하게 먹을 수 없었던 시절이어서 배가 자주 고팠던 게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고통은 방학 때마다 겪는 향수병이었다.
방학이 되면 한솥밥 먹던 친구들은 고향에 가버리는데, 소년 혼자 버려지듯 남아야만 했다. 겨울에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은 운동장같이 넓은 방에서 혼자 누더기 담요를 감고 지내기란 여간 고통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에 자신도 고향에 한번 가봤으면 하는 소원이 간절했다. 그에게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주소는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 인사리'였다. 비록 따뜻하게 맞아줄 어버이도 없고, 반겨줄 형제도 없지만 먼 일가친척이라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귀향길에 올랐던 것이 1963년 12월 23일의 일이었다.
무일푼의 몸으로 나섰기 때문에 대구역 개찰구를 통과하는 것 부터가 난관이었다. 그래도 용케 플랫폼으로 기어들어가 용산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튿날 새벽 영등포역에 내렸다. 강화행 시외버스를 타야만 했다. 그러나 새벽에는 물어볼 사람조차 귀했다. 날이 점점 밝아오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오히려 시각장애인을 만난데 대한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뱉아내고 지나갔다.
"아침부터 재수없어, 퉤퉤......, 장님을 만날 게 뭐야!"
심지어 침을 뱉기까지 했다.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시각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갖고서 친절하게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년은 오전내 헤매야만 했다. 나중에 가까스로 시외버스 터미널을 찾고 보니 영등포역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소년은 강화도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버스 안에서도 소년은 달가운 손님이 아니었다. 안내양이 재수없다고 내리라고 했다. 소년은 버텼다. 그녀는 사정없이 소년의 소매를 문쪽으로 끌어당겼다. 소년은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버스의 지붕과 바닥을 받치고 있는 기둥을 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잡고 거머리처럼 매달려서 버텼다. 결국 안내양이 두 손 들었다.
다섯 시간만에 강화도 외포리의 선착장에 도착했지만 고향은 여전히 멀었다. 또다시 배를 타고 가야만 했다. 날이 저물어 막배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려야 배를 탈 수 있었다.
소년은 파출소에서 잠을 자고 이튿날 아침 배를 탔다. 교동도의 선착장에 도착해도 인사리까지는 또 이십리 시골길이 남아 있었다. 인도자 없이 혼자 더듬어가야 했으므로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몹시 지치고 허기진 소년은 고향이 바로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간신히 힘을 내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온통 눈밭이라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푹푹 빠지면서 힘겹게 걸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그만 쓰러진 채 의식을 잃고 말았다.
깨어보니 따뜻한 방안이었다. 그 부근의 어느 교회 전도사가 소년을 발견하고 자신의 방으로 옮겨왔던 것이다. 거기서 그는 식사를 대접받고 파출소로 인계됐다. 소년은 수상한 사람으로 찍혀 다시 면사무소로 가 신원확인을 받았다.
"야! 이 사람 재환이 아닌가? 너 그때 수류탄 갖고 놀다가 사고를 당했던 황재환이지?"
마침 거기 인사리 사람이 일을 보러 왔다가 어릴 때 소년의 모습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황씨가 아니고 한재환입니다."
"글쎄, 지금은 자네가 한씨 성으로 조상을 바꿨는지 몰라도 그때 자네 어른들의 성은 누를 황(黃)자를 쓰는 황씨였어. 그것을 기억하는가?"
"네…?"
소년은 무척 놀라고 말았다. 자신은 조금도 의심없이 한씨 성으로 들어왔는데, 고향 아저씨의 그럴듯한 이야기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곧 사실로 확인됐다. 면서기가 호적서류를 뒤져 소년이 황씨 성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제서야 소년은 어린시절 글자를 깨치기 전 자신의 성을 잘못 구전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재환"을 비슷한 음의 "한재환"으로 잘못 듣고 가는 곳마다 한씨 성의 이름으로 밝혀서 적게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부터 성을 황씨로 바로잡아 쓰기로 했다. 그것이 최고의 소득이었다.
가까운 친지로서 외가를 찾게 되었지만 그리 달가운 혈육이 아니었다. 처음에 반겨주던 외할아버지도 한 며칠 머무는 동안 외손주가 짐이라도 지울까봐 냉담해졌다. 결국 그는 허탈한 가슴을 안고 대구로 돌아왔다.
이제 다시는 고향에 가지 않으리라.
소년은 육신의 친척보다도 진정 기댈 곳은 하나님 아버지 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도 인간적으로 외롭고 허전한 마음을 메울 길이 없었다. 바로 그때 그의 마음에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열망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두 눈 어두운 곳은 고사하고 왼손 하나 뿐인 그로서는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그래서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신 성경말씀을 기억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고교 1년생이 된 어느날 교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교장 선생님 제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뭐? 네가 피아노를 배운다고?"
교장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 바탕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말과 태도는 당당하고 자신이 있었다.
"이 손 하나로 피아노를 배우겠습니다."
"안돼! 한 손으로 화음 넣고 또 한 손으로 멜로디 넣자면 두 손을 다 가져야 가능한데, 어떻게 왼손 하나로 피아노를 제대로 칠 수 있나?"
"하나님께서 능력 주실 줄 믿습니다. 배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안돼!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지."
교장은 만만하게 물러설 태도가 아니었다. 소년은 자신의 의지를 너무 쉽게 꺾어버리는 교장이 원망스러웠다. 계속 조르고 애원해도 교장의 태도는 여전했다. 끝내는 분통이 터져 소년은 홧김에 교장실의 테이블을 엎어버리고 나왔다. 다시 복도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울며불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소년의 무모해 보이는 소원은 교장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병신육갑을 떨어도 분수가 있지. 뭐, 지가 피아노를 배워?"
그러나 그런 비웃음과 조소는 소년에게 더욱 강한 의지와 행동을 불러 일으켰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혼자라도 배워야겠다는 각오였다. 소년은 결심하고 곧바로 실천에 들어갔다.
매일 밤 열 시가 되면 피아노가 있는 방에 살그머니 들어갔다. 문단속이 허술한데다 기숙사와는 다소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서 소년은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맘껏 건반을 두드릴 수 있었다. 불을 켜지 않아도 되었다. 악보도 필요없었다. 어차피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았다. 음악시간에 배운 노래든 찬송가든 귀에 익은 노래의 음을 따라 서툴게 건반을 더듬어 짚으면 되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으면 소년은 밤이 가는지 낮이 가는지 모를 정도로 도취되어 버렸다. 손가락에서 피가 날 정도로 두들겨댔으며 그래도 안될 때는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고전1:27).
이 말씀을 언젠가는 증명해 보이리라. 그렇게 한 3년을 연습하고 났을 때 놀라운 일이 나타났다. 정상인 피아니스트처럼 연주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첫 연주장소를 대구 원대동에 있는 원대교회로 택했다. 교장 박영생 장로가 출석하는 교회였다. 소년은 먼저 담임목사를 만나 돌아오는 주일밤예배 시간에 특송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물론 자신이 직접 피아노를 치며 찬송가를 부르겠다고 말했다. 남루한 옷차림에 왼팔뿐인 눈먼 소년이 피아노 연주를 하겠다는 이야기가 목사의 귀에는 참말로 들리지 않았다. 목사는 소년을 구걸하러 온 거지로 보고 동전을 내밀며 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소년은 손을 내저으며 목사를 설득해서 가까스로 특송순서를 받아냈다.
다음주일 밤 목사의 설교가 끝나고 왼팔의 눈먼 소년이 피아노 앞에 가 앉았다. 호기심과 불안이 교차하는 수많은 교인들의 눈빛을 의식하면서 소년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여유있게 몇 개의 건반을 짚어 으뜸음을 확인했다. 이어서 장엄한 전주가 흘러나오고 소년이 우렁찬 목소리로 찬송하기 시작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교인들은 깜짝 놀랐다. 분명히 소년은 왼팔 하나로만 피아노를 치는데, 완벽하게 화음을 넣은 멜로디를 연주하며 찬송하는 것이었다. 소년도 너무 감격해서 목이 메어 2절을 부를 수가 없었다. 교인들이 한 목소리로 합창하기 시작했다. 함께 찬송하는 동안 온 교회가 눈물바다가 되었다. 예배 후 박 교장은 3년전의 일을 기억하고 소년에게 사과를 했다.
그후 소년은 대구대학교에 입학하여 특수교육을 공부했다. 졸업과 동시에 자신의 모교이기도 한 대구광명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이태 후에는 음악교사자격시험에도 합격하여 후배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구열이 강한 그는 교직생활을 하면서도 대구대 대학원에서 계속 공부했으며. 대구신학교에도 들어가 신학을 하기도 했다.
그는 왼팔의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와 음악교사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 후 하나님께서 지극히 미련하고 약한 자신을 복음 전하는 도구로 쓰시기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간증하러 다니느라 매우 바쁜 몸이 되었다.
올가을 2학기 개학과 동시에 황재환 전도사는 대구광명학교 교감으로 승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