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종교성은 흔히 인간의 영성(靈性)이라고 불리우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인간의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 자체는 긴 역사와 함께 다양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나 (Pannenberg 1993, 123-161) 여기서는 인간 안에 나타나는 "의미있는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성향"이라는 의미로 국한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을 의미있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적 욕구를 지녔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이 가지는 영적 욕구의 내용이나 강도에 있어서는 사람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있다. 심지어 이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를 지녔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서 특히 자신의 영적 욕구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일정한 정도의 완성에 이르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을 일러 종교인이라 부르기로 한다.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는 인간이 지닌 이러한 영성의 근원을 진화의 구도에 따라 과학적으로 추적해 볼 수도 있다. 진화과정 안에서 얻어진 생존본능은 인간의 유전정보 안에 각인될 것이며, 이러한 본능의 일부가 영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분명히 성공적이고 만족스러운 삶에 대한 욕구를 포함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그 무엇에 대한 추구의 성향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추구는 단순히 생존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 한다. 이러한 의미의 추구 특히 삶의 궁국적 의미를 추구하려는 행위는 한 차원 높은 활동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생존 게임의 법칙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렵다. 더구나 여기서 추구하는 의미 그 자체는 과학적 지식이 도달해 낼 수 있는 목표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의 추구를 위해서는 과학적 방법을 통해 얻어진 지식이 요구되겠지만 그것 만으로 충분하지는 못할 것이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우리가 당면한 실재를 이해하는 두 가지 이해양식을 가정하기로 한다. 그 하나는 가능한 최선의 사실적 지식을 지향하는 과학적 이해양식이며 다른 하나는 종교적 이해양식인데, 이 종교적 이해양식이라는 것은 영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 과학적 이해양식에 부가해서 요청되는 그 무엇이라고 정의해 볼 수 있다. 한 사람이 지니는 과학적 지식의 내용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개인적 그리고 문화적 발전의 단계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은 그 어떤 지식의 내용을 검증하거나 반증해 나가는 상대적으로 잘 확립된 과정을 통해 얻어지게 되므로 현실 세계에 대한 신뢰할만한 일면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종교적 이해양식에 있어서는 지식의 진위를 결정할 그 어떤 합의된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종교적 이해양식에 대해 "영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 과학적 이해양식에 부가해서 요청되는 그 무엇"이라는 형태의 수동적 정의로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과학적 지식만으로도 우리의 영적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가 있다면 별도의 종교적 이해양식은 필요가 없으리라는 말을 할 수도 있다. 좀더 현실적으로는 과학적 지식이 발전해나감에 따라 종교적 이해양식의 필요성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고, 마침내는 아예 없어질 수도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가지게 된다. 종교적 이해양식만을 통해 얻어지게 될 제거할 수 없는 본질적인 그 무엇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아직 완벽한 과학지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는 한 인식론적으로 답변가능한 물음이 아니다. 이 보다는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제기하는 것이 좀더 합당하다. 즉 현 단계의 과학지식을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따로 종교적 이해양식을 통해 얻어질 지식이 있다면 그 내용은 무엇인가? 또 그 누가 이러한 지식을 가졌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 혹은 그 누가 이런 지식을 우연히 가지게 되었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의 진위를 가릴 방법이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러한 지식이 당사자의 영적 욕구를 주관적으로 만족시킨다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진리를 정당화시키는 방식은 오직 주관적 혹은 간주관적(inter-subjective) 방식밖에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주장들은 항상 그 어떤 담론이나 신화의 형태로 그 자체로서의 이론을 가진다는 사실이다(Csikszentmihalyi 2000). 다시 말해 이러한 주장은 반드시 그 어떤 언어와 개념구조 안에서 표현된다는 것이며, 그 속에는 과학적 이해양식으로는 정당화 되기 어려운 사실적 지식이 포함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일정한 사실적 주장을 담고 있는 이러한 언어와 개념구조는 그 자체로서 종교적 이해양식의 본질적인 요소들은 아니다. 이들은 기껏해야 이러한 종교적 이해 내용에 대한 가능한 '표현형태'(representation)라고 할 수 있겠는데,;(주1) 이 '표현형태'의 진리치는 이것이 담고 있는 종교적 이해 자체의 진리치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작업가설을 설정하기로 한다. 즉 종교적 이해양상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그 어떤 본질적 내용이 존재하며, 우리의 이해 단계에 따라 이를 나타낼 수 있는 여러개의 서로 다른 표현형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크게 보아 이러한 표현형태들은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양자역학적인 용어를 빌려;(주 2) 이들을 각각 유신론적 영상(theistic picture)과 무신론적 영상(atheistic picture)이라 부르기로 한다.;(주 3) 역사적으로는 이 둘 사이의 옳고 그름에 관한 많은 논쟁들이 있어왔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것은 사실적 지식을 바탕으로 그 진위가 가려질 문제도 아닐 뿐 아니라 그 진위를 가린다는 것 자체가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영상들은 기껏해야 오직 도구적 가치밖에 가지지 않는 가능한 표현형태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히려 이 두 표현형태가 서로 대등한 것이라는 주장을 해 볼 수도 있다. 과학적 이해양식을 통해 얻어진 사실적 지식의 측면에서 볼 때나, 많은 종교인들에 의한 증언이 말해주듯, 이들 각 표현양식을 통해 도달한 주체적 만족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들 중 어느 한 쪽이 결정적으로 우월하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한 종교적 이해양상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이들 표현양식의 우열을 말해 줄 기준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들이 있다. 첫째는, 사실성에 관한 과학적 이해가 증대됨에 따라 적어도 내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표현형태 자체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의 과학적 이해에 혁명적 변화가 있는 경우 이에 견줄만한 진전을 종교적 이해에서도 추구해 보아야 하지 않을가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신학적 작업은 주로 이 첫 번째 과제 즉 전통적으로 인정받아 온 종교적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집중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전통 선상에 있는 수정된 표현형태를 통해 동일한 종교적 내용을 표현해내는 작업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좀더 중요한 것은 바로 두 번째 문제, 즉 좀더 깊은 종교적 이해를 지향할 보다 우월하고 광범위한 시각을 확보하는 일이다. 이 경우 우리는 좀더 열린 자세를 취해야 한다. 즉 우리는 전통 선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새 표현형태를 취하게 될 가능성도 열어놓아야 하는 것이다. 역사적 차원의 종교적 도약을 성취해 낼 새로운 입지를 확보한다는 것은 어쩌면 전혀 다른 접근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생명과 그 안에서 지니는 인간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바로 이러한 접근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이 글에서 활용될 과학적 소재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을 묶어 하나의 통합적 전체로 재구성한다든지 (Zhang 1989), 이를 다시 새로운 종교적 이해의 표현형태로 전환해내는 (Teilhard 1965) 작업들은 별로 시도된 바가 없다. 여기서는 하나의 시험적 과제로, 유신론적 영상의 표현형태를 취하고 기독교 신앙의 노선을 유지해 가면서 그 어떤 새로운 입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살펴 보기로 한다.
온생명과 그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
생명 현상이라고 하는 것이 물질 세계 안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과학의 시대라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이것에 대한 온전한 과학적 이해는 아직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줄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생명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주로 이것의 가장 미세한 구성요소들을 구명하는 쪽으로 진행되었으며, 말할 것도 없이 이 방향으로 괄목할만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 속에서 생명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이 찾아질 수 없다는 점 또한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세포 핵 안에 들어있는 DNA 분자들이 결정적인 정보를 지니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것을 생명 그 자체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는 결코 없다. 세포내적인 환경에서 유리된 DNA 분자들은 그저 좀 복잡한 대형 분자들일 뿐 그 어떤 기능이나 정보를 지닌다고 말할 수 없다. 오직 대단히 특수한 세포내적인 환경 안에 놓일 때에 한해서 이들이 살아있는 유기체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 정보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이 만일 존재한다면 이것의 신체 안에 있는 어떤 비밀스런 장소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라 불리울 현상을 나타낼 전체 작동 체계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즉 더 이상 그 어떤 본질적인 외적 지원이 없이 생명 현상을 이루어나가기 위해 이 체계가 지녀야 할 가능한 최소의 영역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온생명이라는 개념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는 곧 자족적 생명 현상의 전모를 하나의 실체로 본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다(Zhang 1989). 이런 뜻에서 '온생명'(global life)은 가장 포괄적이고 자족적인 생명의 단위라고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은 따라서 시간·공간적으로 일정한 영역을 점유하게 되는데, 그 경계 안에 생명에 관련되는 모든 특징적 요소들이 포함되는 것이다.
이런 온생명 개념을 예컨대 우주 자체를 포함하는 어떤 '보편적 존재'로 확장시켜 이해해서는 안된다. 온생명은 생명이 아닌 여타 양상들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생명현상이 지니는 특징적 양상만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하나의 엄격한 과학적 개념이다. 사실상 우주 안에서 이러한 온생명은 매우 찾아보기 어려운 희소한 현상에 해당하며, 공간적으로 보더라도 이것은 알려진 우주의 규모에 비해 매우 작은 지극히 국소화된 존재이다. 지금까지는 우주내에 오직 하나의 이러한 온생명이 알려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태양계에 형성된 온생명이다. 태양-지구 체계 위에 자리를 잡은 이 온생명은 대략 35억년 전에 출생했으며, 그 이후 성장을 지속해 왔다. 이것은 지금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이미 살았던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며, 그 안에는 우리들 자신과 최초의 살아있던 존재에까지 이르는 우리의 선조들 모두가 포함된다. 이것은 또한 유기체 무기체를 불문하고 생명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필요요소들을 하나의 기능하는 전체로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주 4)
온생명 개념은 또한 생명 현상에 나타나는 이런 모든 신체적 측면 외에도 마음이라든가 지능과 같은 비교적 늦은 단계에서 출현한 모든 상위 속성들도 포함한다. 이것은 다시 시간의 차원에서 출생과 성장의 전과정을 이것의 정체성(identity)을 나타내는 본질적 양상으로 포함한다. 이는 마치도 한 사람을 그 신체적, 정신적 측면과 함께 그 생애-이력 양상까지 포함하는 다차원적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그 구성원들 (특히 인간)의 정신적, 문화적 측면을 통해 나타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초월적인 정신적, 영적 속성을 지닌다고는 보지 않는다. 온생명 개념의 강조점은 생명 현상의 모든 국면 사이에 존재하는 나누어질 수 없는 연결성에 놓여있다. 이러한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 실체로 파악함으로써, 지금까지는 지니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해석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 개념이 지닌 이러한 총체적 상황을 '사람'이라고 하는 개념에 나타나는 총체성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사람'이라는 개념은 결코 '인간 세포의 집합'이라는 개념으로 대치될 수는 없는 것이다.
현대과학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이 온생명의 한 부분이라는 점이다. 우리 각 개인은 물론 살아있는 존재이며 존중받아야 할 생명의 단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의 단위는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과 떨어져서는 자신을 존속시켜 나갈 수 없다는 점에서 매우 불완전한 생명 단위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 문제에 새롭게 부딪히게 된다. 정말 진정한 '나'라고 함은 무엇인가? '나'라고 함은 지난 수 십년간 존재해 오면서 그간 경험한 내용들을 개인적 기억장치 속에 담아 온 그 어떤 존재인가, 혹은 지난 35억년을 지속해 오면서 그간 경험한 내용들을 DNA 와 기타 기억장치 속에 담아 온 그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의식의 단위를 자기 정체성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중추신경계와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신경 세포들이 오직 개인 신체의 범위 안에만 퍼져 있으므로 이 의식의 단위는 우리 신체에 국한된다고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똑같은 이유로, 우리 정보의 체널이 온생명의 전영역에 미치고 있으므로 우리 의식의 단위도 온생명 전체로 확장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사실상 우리가 이러한 정보 체널을 마련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졌으며, 우리 인간의 문화가 사람의 신체 안에 작동하는 중추신경계와 매우 유사하게 작동한다는 점 또한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온생명 안에서 인간이 지니는 위치는 인간 신체 안에서 신경 세포가 지니는 위치와 매우 유사하다. 한편 인간 문화에 의해 마련된 이 확장된 의식은 온생명을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파악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해 보면, 온생명 자체가 바야흐로 자의식을 지닌 존재로 깨어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다. 인간은 다른 한편으로 온생명의 정상적인 생리를 심하게 왜곡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를 아예 사멸시킬 수도 있는 존재가 되었다. 온생명에 대한 이러한 인간 행위는 신체에 대한 암 세포의 행위에 비교될 수 있다. 암 세포란 신체에 침입해 온 외부의 침범자가 아니라 바로 자기 신체의 일부이다. 이것은 단지 신체 안에서 스스로를 무제약적으로 증식시켜나가는 성질을 가지는데, 이것이 신체의 정상적 기능을 가로막게 되고 급기야는 죽음을 불러 오는 것이다. 인간 또한 암 세포와 같이 온생명의 주요 부분을 점유하여 서식하면서 이를 자신의 번영과 증식만을 위해 변형시켜 나가고 있다.
온생명이 출생이후 35억년이 지나 비로소 하나의 지적이고 자의식을 지닌 존재로 깨어나게 되었는데, 바로 이 순간에 자신에게 자의식을 가능하게 해 주는 바로 그 존재들로 인해 암적 질환에 걸리게 되었음을 발견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기막힌 우주사적 역설이며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종교적 질문과 신의 섭리
이제 이러한 것이 바로 온생명 안에서 인간이 처한 상황이라고 한다면 의식적 삶의 한 주체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엄청난 재앙의 가능성 앞에 못본 척 눈을 감고 암 세포와 같은 행위를 계속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눈을 크게 뜨고 이 어려운 난제에 정면으로 맞서나가야 할 것인가? 과학은 오직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뿐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을 내리지는 않는다. 엄격히 말해서 이러한 것은 종교적 결단의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설혹 깊은 종교적 명상을 거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는 거의 명확하다. 제 정신을 지닌 사람으로서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나서도 여전히 암 세포 노릇을 굳이 택해서 하겠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가 이러한 중대한 결정을 함에 있어서 과학적 이해양상 이외에 부가적인 종교적 이해양상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에 대해 여러 면에서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다. 다른 생물종이나 마찬가지로 사람의 경우에도 생존의 본능이 유전정보 안에 각인되어 있다. 이 본능은 자연히 두 가지일 수밖에 없다. 그 하나는 개체로서의 자신을 보전하고 증식시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과 협조하고 이를 보존하는 일이다. 만일 그러하지 못하다면 개체와 종의 존속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상반되는 이 두 가지 경향 사이의 균형은 항상 이상적인 위치에 놓여있기가 어렵다. 인간의 문명이 출현하면서 유전자 정보 안에 각인된 본능만으로는 불충분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별도의 사회적 협동에 대한 필요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할 경우 자체 보전 쪽으로 치우치는 성향을 보정하기 위해 사회윤리와 같은 그 어떤 문화적 장치의 도입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의 보정은 예컨대 가정이라든가 공동체 또는 국가와 같은 상위 자기 정체성을 획득함으로써 좀더 자연스럽게 마련될 수 있다. 이러한 새 자기 정체성을 가지게만 된다면 기왕에 지닌 자기 보전 본능을 작동시켜 이를 단지 이 새로운 상위 자기 정체성에로 지향토록 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인간은 기묘하게도 인위적인 자기 정체성을 조작해 낸 후 이에 심정적으로 경도되는 성향까지 가지고 있다. 이런 성향은 예컨대 스포츠와 같은 현상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일단 그 어느 한 쪽을 자기 편 (인위적 자기)이라 생각하게 되면 이를 편들려고 하는 성향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 자신들이 '인간 가족'의 성원이라 생각하게 되면, 인간 모두를 하나로 묶는 일종의 집합적 자기 정체성이 출현하게 되고, 이것은 인간 사회의 윤리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가게 되면 온생명의 의식에까지 이를 수 있다.
사실상 과학을 통해 온생명을 인식하게 되기 훨씬 전부터 인류는 생명이 지닌 이런 온생명적 성격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이에 대한 바른 마음가짐을 다짐해 온 일이 종종 있다. 전통 종교들이 중시해 온 많은 가르침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라든가 동물과 식물들을 소중히 여기라고 한 것들은 일단 온생명의 개념을 명료하게 이해하고 나면 받아들이기가 매우 쉬운 것이다. 우리는 단지 이들을 내 몸의 일부로 생각하고 자체 보전의 본능에 호소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분명해지기 전에는 인간이 온생명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의식은 강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이것이 개체적 자아를 지향하는 성향을 극복해내기는 쉽지 않았다.
이와 함께 우리는 인간의 영적 성품 또한 자기 정체성과 연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고차적 자기 정체성을 가지게 되면 이에 해당하는 고차적 영성이 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인간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그 어떤 집합적 의미의 인간 영성이 나타나게 된다. 이제 우리 자신을 온생명이라고 보게 되면 온생명적 영성이 출현할 것이라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영성은 우리 문화 안에서 온생명 의식이 점점 뚜렷해지면서 출현하게 될 그 어떤 것일 뿐 그 이상의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러한 온생명적 영성이 마침내 출현했다고 하면 이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대답을 던져 줄 것이다.
이제 우리가 (개인으로서의 영성과 온생명으로서의 영성을 함께 가지는) 이중의 영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좀더 본질적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 온생명이라는 것은 정말로 의미있는 존재인가? 나는 왜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온생명으로서의 나 자신을 보전해야 하는가? 나는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온생명에 대한 과학적 이해만으로는 답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이제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 이해양상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한 가지 가능한 방식은 궁극적 '실재'를 유신론적 영상을 통해 표상하는 일이다. 이 영상에 의하면 의미의 궁극적 근원은 신(神)이데, 그가 세계와 온생명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개체들을 창조했으며, 또한 이들을 의미있는 동반자로 부양해 나간다. 하나의 의식을 지닌 산 존재로서 우리는 이제 우리 존재에 관한 궁극적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신의 응답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잠간 다른 종류의 질문들을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말로 신의 응답을 기대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일 이러한 것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것이 진정한 신의 응답인지를 알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가능한 그리고 아마도 최선의 대답은 우리가 우선 이러한 신을 믿고 최대한의 진지성을 지니고 그 응답을 들으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그 어떤 형태로든 질문을 던진 당사자에게 충분히 확신이 서는 답을 얻게 된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이것 이상 신과 교신할 그 어떤 다른 수단도 가질 수가 없다.
사실상 이러한 점에 관해서는 종교인들로부터의 수 많은 증언들이 있으며, 이것을 우리는 우리 기본 가정들에 대한 긍정적 증거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들이 있다. 그 첫째는 신의 응답이라고 증언된 내용들이 서로 크게 다를 뿐 아니라 심지어 서로 모순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상당 수는 보통 사람들의 눈에도 도저히 신의 반응이라고 생각될 수 없는 것들이다. 둘째로는 신의 응답을 구하는 사람들의 진지성에 의문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얼마나 진지해야 신이 응답할만큼 진지한 것인가? 행운을 비는 행위라든가 병이 낫기를 비는 마음은 신이 응답해 줄만큼 진지한 것인가? 셋째로는, 이것이 아마도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인데, 어떠한 모습을 지닌 신을 보고 우리는 정말 신답다고 할 것인가? 만일 우리가 이러한 점들에 대해 적절한 해명을 할 수 없다면 유신론적 영상 자체의 효용성이 의문시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점들과 관련하여 다시 다음과 같이 가정하기로 한다. 즉 우리가 그리게 되는 신의 모습은 우리가 실재를 이해하는 각각의 단계에 따라 크게 다를 수 있으며,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지닌 과학 지식의 내용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신은 오직 인간이 이를 이해하는 정도만큼만 그 모습을 드러내며 또한 인간이 자기 역량에 의해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에서 인간의 노력에 응답한다는 말이 된다. 왜 그런가?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노력이라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신은 그 피조물을 자동 인형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의미있는 동반자로 창조하고 보살피는 것이다. 심지어 신이라고 하는 관념 그 자체도 우리가 그를 향해 의미있게 지향해 나가고 있는 그 어떤 '궁극적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의 창조물인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신을 향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는 오직 각 단계에서 가능한 최대의 진지성을 지니는 일이다. 이것을 사후에 되돌아 본다면 (또는 신의 눈으로 본다면) 충분히 진지한 것이라 판정되기 어려운 것일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주 5)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해답이 이미 우리의 세계에 (심지어 우리의 몸 안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인지, 혹은 현 세계의 바깥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인지를 물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식론적으로 볼 때 대답이 가능한 질문이 아니다. 적어도 해답을 추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그가 현재 의식하고 있는 지식의 밖으로부터 와야 하는 것이기에 그 이상의 출처를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그 어느 쪽에서 온 것이든 간에 (만일 그 해답이 충분한 질적 내용을 지닌 것이라면) 이것의 출처 때문에 신에게 온 것이냐 아니냐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은 이것을 사전에 이 세계 안에 준비해 두었을 수도 있고 또 매 순간에 이를 새롭게 준비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의 개인적 판단으로는, 우리가 찾는 해답이 우리가 아직 이를 의식적으로 찾아내지 못하고 있을 뿐 이 세계에 그리고 우리 안에 이미 들어있는 것으로 봄이 좀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제 이러한 이해를 전제로 우리의 최종적인 과제로 되돌아 가자. 온생명으로서의 우리 삶이 지닌 의미는 무엇이며, 온생명의 마음의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들로서 온생명의 미래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이 신의 섭리(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에 적합한 일인가?
이런 기본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며 또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의문의 여지도 없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우리의 온생명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이 지닌 놀라운 국면을 살피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은 이것의 생애를 들여다 보는 일이다. 대략 35억년 전 비교적 단조로운 모습으로 출생한 이래, 이것은 점점 더 놀라운 형태로 성장하여 각종 동식물들을 배출했으며, 최근에 이르러는 인간의 마음이라든가 인간의 문화와 같은 놀라운 양상들을 출현시키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이 전체의 몸 즉 온생명 자체가 스스로를 의식하는 존재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 진전의 최첨단에 서있는 인간으로서, 우리는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이 전체의 모습을 한 눈에 펼쳐 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며, 놀랍게도 이것이 바로 내 몸이며 내 생애였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발견과 더불어, 우리가 일단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을 취한다고 할 때, 우리는 이 모든 것 안에 그 어떤 형태의 신의 섭리가 들어있으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안에 있는 신의 섭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우리는 한편으로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놓는 가운데,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가장 분명한 것들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의 섭리가 무엇이 되었든간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 온생명을, 그 속에 함축된 모든 놀라운 양상들과 함께, 잘 보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신은 우리에게 이 놀라운 모습을 알아보게 해주었을 것인가? 우리가 일단 이것을 신의 섭리라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곧 온생명의 현 상태로부터 매우 엄중하고 긴박한 메시지를 읽어내게 된다. 즉 온생명은 현재 한층 더 높은 문화적 단계로의 영적인 도약을 성취하는 길과 암적 질환으로 인한 생리적 파멸에 이르는 길 사이의 결정을 서둘어야 하는 갈래 길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 유일하게 책임을 지고 있는 존재는 바로 우리 인간이다. 그는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지만, 아직 어느 방향을 취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할 능력 또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죄'와 '구원'이라고 하는 기독교적 개념들을 이 맥락에 연관지워 볼 수 있다. 인간의 의식적인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갈래 길에서의 선택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며, 여기서 이상적인 선택을 취하지 못할 때 이를 일러 '죄'라 부르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이상적인 선택에는 미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죄인이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죄'라고 하는 기독교적 교의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것은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에서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었으나, 온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의외로 쉽게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은 인간과 같은 귀중한 산물을 낳아 준 원시 생태계를 파손하면서 시작되었다. 인간 문명의 창시자라고 할 아담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생태계를 파괴하는 최초의 죄를 짓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존재도 의식적인 결정을 내릴 능력이나 여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 어떤 죄도 원칙적으로 지을 수가 없었다. 아담 또한 당시의 상황에서 이러한 '원죄'를 짓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이후 '인간'이라고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속해 온 '집합적 의미로서의 인간'은 책임을 면할 도리가 없다. 이러한 점에서 이 인간은 죄를 지은 것이며 아직 이에 대한 회개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구원'이라고 하는 기독교 교의는 회개를 강조한다. 오직 그 행위에 대한 적절한 회개가 이루진 후에라야 죄인은 신의 섭리 안으로 돌아올 수 있으며, '구원'이라 불리울 마지막 목표에 합류할 수 있다. 온생명 안의 인간은 이러한 점에서 중대한 죄를 범했으며, 이를 아직 회개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운명의 결정적 갈래 길에 서 있는 온생명의 현 상황 속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기독교 교의에 대한 해석을 시도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비교적 쉽게 '성부'를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보살피며 특히 개체와 온생명으로서의 우리를 주체적인 산 동반자로 여기고 있는 그 어떤 궁극적 실재와 일치시킬 수 있다. 한편 성육화한 섭리로서의 '성자'는 우리 온생명의 신체와 역사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신의 뜻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영적 교류의 상대자로서의 '성령'은 인간이 취하는 영적 추구 노력에 대한 신의 응답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의 속에는 아직 채워야 할 많은 빈 틈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온생명 안에서 그 어떤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에 있어서 특정 형태의 유신론적 이해양상이, 최소한 적절히 해석된 기독교적 교의의 틀 안에서나마, 그 효용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새로운 시각은 결과적으로 온생명과 그 안에 담긴 인간 문명의 존속을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영적 도약의 성취를 위해 그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주 1) 나는 이 '표현형태'(representation)라는 용어를 양자역학에서 빌려왔다. 양자역학에서는 물리계의 '상태'가 매우 추상적이어서 오직 일정한 '표현형태'를 통해서만 구체적으로 나타내질 수 있다. 이는 공간상의 위치가 일정한 좌표계를 통해서만 나타내질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주 2) 양자역학에도 이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즉 동일한 이론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서로 다른 수학적 형태가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 가장 현저한 예가 이른바 하이젠베르크 영상과 슈레딩거 영상 사이의 동등성이다.
주 3) 나는 여기서 이들 각각의 영상이 그 어떤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 두 영상 사이의 주된 차이는 오직 인간이 이것의 주체적 동반자(partner)로 인정되느냐 혹은 이것의 단순한 한 부분으로 인정되느냐 하는 데서 오는 듯하다. 유신론적 영상에서는 신과 인간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반면, 무신론적 영상을 택하는 경우에는 궁극적 실재와의 완벽한 합일을 추구하는 일이 많다.
주 4) 이러한 온생명 개념은 'global life'라는 영문 용어로 최초로 소개되었다 (Zhang 1989).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특히 장회익, {삶과 온생명} 서울: 솔 출판사 (1998)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최근 Margulius and Sagan (1995, 197)은 그들의 책 {What is life}에서 'global life'라는 용어를 특별한 정의없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우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주 5) 부가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과학적 '진리'를 추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궁극적 진리에 도달했는지 알 방법이 없다. 오직 각 단계에서 가능한 최선을 취할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