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반씨 세거지
-광주반씨 최초 세거지-
봄은 말가죽골에 깊었고,꽃은 개머리산에 만발하다
다음은 광주반씨의 처음 세거지(世居地)를 살펴보자. 옛날 도선대사의 “도선비결(道詵秘訣)”에 말하기를, “봄은 말가죽골에 깊었는데, 꽃은 개머리 산에 만발하였다”
하였는데, 광주반씨가 처음 세거하게되던 임진왜란과 광해혼기의 때이다. 음성에 마피골(馬皮谷)이란 곳이 있었으니, 지금 음성군 원남면 주봉리 골짜기이다. 이곳 산수 수려한 곳에 반석권(潘碩權)의 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의 농장(農場)이 있었다. 민씨부인은 내금위 민승정(閔承貞)의 따님이신데, 부인의 농장이 이곳에 있었던 것은 시집올때 자기몫의 재산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당시 이곳에는 집들이 없었는데 이곳에 풀을 베고 소나무를 베어 집을 백여칸 지었다. 북쪽엔 네모진 연못을 파고, 흙으로 축대를 쌓고 정자 심어 소요자적하며낚시질하게 하였고, 뒷산 시루산에서 나물캐 반찬 삼게 하였으며, 두 그루의 잣나무 심어놓고 거문고 뜯으며, 덕령(德嶺)에서 불어오는 송풍(松風)에 시운(詩韻)을 얻고, 비파암(琵琶岩)의 물소리가 곡조(曲調)를 화답하는 풍류(風流)를 서로 다투어 흠모하였다 한다.
조선 명종때 학자로 설화같은 삶을 살다간 기인 남사고(南師古)는 역학, 풍수, 천문, 복서, 상법(相法)의 비결에 도통하였다. 그는 명종말년 즉 1575년의 동서분당을 예언했고, 명종19년에는 “내년에 기필코 태산을 봉하리라”하여 문정왕후가 죽어 태릉에 장사지냈으며, “살기가 심히 악하여 임진년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 올터이니 조심하라”하여 임진란을 예언하였다. 이같은 묘결(妙訣) 예언자가 소문을 듣고 이곳 “마피골”에 와서 지상(地相)을 살피기 위하여 패철을 놓고 두루 산수를 살피며, “기묘하다. 이 지국(地局)이여! 아름답다. 이 지격(地格)이여! 상용(祥龍)과 서표(瑞彪)가 左로 받들고, 右로는 걸터 앉았으니 자손이 점점 번성하게 뻗칠 징조요, 역마(驛馬)와 화개(華蓋)가 앞으로 달리고 뒤로 옹위하였으니 문장과 과갑(科甲)이 계속할 자리라. 이른바 길지중(吉地中)에 길지(吉地)이며, 복(福)있는 자의 복(福)될 곳이다.” 하였던 것이다.
□ 영춘현감 반석권
영춘현감 반석권(潘碩權)은 이곳에서 아들 한 사람을 두어 반사렴(潘士濂)이 선교랑(宣敎郞)이었고, 선교랑이 아들 형제를 두어 반인후(潘仁後), 반인경(潘仁慶) 형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반인후공은 임진란에 의병장으로 선무원종공신3등에 책록되고 5형제를 두었고, 반인경공은 선조때 효우(孝友)로 암행어사 추천을 받아 군자감주부에 특제(特除)되어 8형제를 두었으니, 차기 유엔사무총장인 반기문장관은 반인경공의 14세손이시다. 특히 반장관님의 12대조이신 반충익 공은 화탄편작(醫術 第1人者)의 묘술(妙術)로 중생들을 구제(救濟)하여 이름이 중국에까지 퍼졌는데 어의(御醫)로도 활약하여, 반사무총장님의 할아버지는 고향 아랫마을 하당삼거리에서 한약방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마피골에서 살기 시작한 광주반씨는 이후 자손이 번성하여 邑의 동서로 분가되어 오정(梧亭), 가정(柯亭), 조촌(助村), 가산(佳山), 행치(杏峙), 보천(甫川), 적암(適岩) 등지에 터를 잡아 살게되었다. 반기문 차기 유엔사무총장님의 선대가 행치마을에 터를 잡게 된 것은 11대조 증통정병조참의 반윤림(潘潤霖)공을 세장(世葬)하던 숙종6년(1680년)부터이므로 3백년이 넘었다.
특히 이 행치마을엔 왕이 쏘내기를 피해 “왕두골(王逗谷)”에 머물렀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어느시대 어느 왕인지도 모른채 전설로만 전해오는 이야기이지만 그렇게 “왕두(王逗)”란 지명은 이곳에 남아 전설처럼 전해오는 오묘한 곳중 한곳이다. 이제는 이곳들이 광주반씨 세장지(世葬地)가 됐으니 어찌 우연이라하랴
<편집/이현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