杜門不出(두문불출)을 고려의 망국과 杜門洞(두문동) 七十二賢(칠십이현) 고사의 비장감을 결부시켜 우리나라에서 생겨난 성어라고 흔히들 설명하지만, 이미 중국의 역사책인 國語(국어)나 史記(사기)에 두루 나오는 중국의 고사성어이다.
國語(국어)는, 春秋左傳(춘추좌전)을 지은 左丘明(좌구명)의 저작이라고 알려져 오다가, 요즘은 춘추시대 당시 사관들의 공동작업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한, 중국 先秦(선진) 시기의 역사책이다.
國語(국어) 晉語(진어)에는 晉(진)나라 獻公(헌공)의 명령[태자의 자질을 살핀다는 명분이었으나, 실은 태자를 위험에 빠뜨리려는 계모 여희의 모함이 작용하였음]으로 태자 申生(신생-헌공의 아들 恭君. 晉 文公의 배다른 형)이 東山(동산)의 皐落(고락)을 치는 이야기[진 헌공 17년, B.C.660년]가 실려 있다.
신생이 稷桑(직상-고락족 거주 지역. 정확한 위치 불명)에 이르자 狄人(적인-고락족)이 나와 저항했다. 신생이 나가 싸우려 하자, 狐突(호돌- 진의 대부. 공자 중이의 외조부인 伯行)이 신변 위험과 참언[신생을 태자에서 밀어내려는 참언]을 이유로 말렸다. 그러나 신생은 직상에서 적인을 물리치고 돌아왔다. 이후에 참언이 더욱 일어났고, 호돌은 문을 닫고 문밖 출입을 삼갔다. 군자가 이에 대하여 말하였다. '호돌은 사려가 깊도다.'
[...果敗狄於稷桑而反. 讒言益起, 狐突杜門不出. 君子曰 : '善深謀也.']
한편, 史記(사기) 商君列傳(상군열전)에 상앙과 진나라의 숨어사는 선비 趙良(조량)이 논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조량이 다음과 같이 상앙을 책하고 있다.
'...시경에 이르기를 '쥐한테도 예의가 있는데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구나.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으면 어찌 빨리 죽지 않을까?'라고 했습니다. 이 시로 보더라도,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준 목숨을 다 누릴 수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공자 건은 [형벌로 코 베인 것을 부끄럽게 여겨] 벌써 8년동안이나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
[《詩》曰 : 『相鼠有體, 人而無禮 ; 人而無禮, 何不천死.』 以《詩》觀之, 非所以爲壽也. <公子虔>杜門不出已八年矣.]
[빠를 천=(端-立)에 책받침]
廉頗藺相如列傳(염파인상여열전)에는 趙(조)나라 북쪽 변방을 지키던 李牧(이목)이라는 장군의 일화가 실려 있다.
이목은 匈奴(흉노)가 쳐들어오면 성안으로 물러나 싸우지 않아, 흉노는 이목을 겁쟁이라 하였고, 조나라 병사들마저도 장군을 비겁하다고 생각하였다. 조나라 왕은 화가 나서 이목을 불러들이고 다른 사람을 장군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일년 남짓한 동안에 흉노가 쳐들어올 때마다 조나라 군대는 나가 싸웠지만 그때마다 불리하여 잃는 것이 많았고, 변방을 지키는 백성들은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를 수 없었다. 조나라왕이 다시 이목을 불렀지만, 이목은 문을 걸어 닫고 나오지 않으며 병을 핑계로 완강히 사양했다. 조나라 왕이 다시 강제로 그를 조나라 군대의 장군으로 임명했다. 이목이 말했다.
'왕께서 굳이 저를 쓰신다면, 저는 예전과 같이 할 것입니다. [그래도 좋다면] 감히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왕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
[歲餘, <匈奴>每來, 出戰. 出戰, 數不利, 失亡多, 邊不得田畜. 復請<李牧>. <牧>杜門不出, 固稱疾. <趙王>乃復彊起使將兵. <牧>曰: 王必用臣, 臣如前, 乃敢奉令. 王許之.]
또한, 司馬相如列傳(사마상여열전)에는 사마상여와 卓文君(탁문군)이 눈이 맞아 혼인하려 하자 탁문군의 아버지인 卓王孫(탁왕손)이 반대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사마상여는 탁문군과 임공으로 도망가서 말과 수레를 모두 팔아 술집 하나를 사들여 술장사를 한다. 문군에게는 노(흙을 쌓아올려 술을 담을 수 있는 화로)에 앉아 술을 팔도록 하고, 상여 자신은 독비곤[쇠코잠방이]을 입고 머슴들과 함께 허드렛일을 하고 저잣거리에서 술잔을 닦았다. 탁왕손은 이 소문을 듣고 부끄러워 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았다...
[<相如>與俱之<臨공>, 盡賣其車騎, 買一酒舍酤酒, 而令<文君>當鑪. <相如>身自著犢鼻褌, 與保庸雜作, 滌器於市中. <卓王孫>聞而恥之, 爲杜門不出.]
[두문불출이 우리나라에서 생겨난 성어라는 주장과 그 유래]
한편 [杜門不出]이 우리나라에서 생겨난 성어라고 하는 근거로는 고려의 유신인 杜門洞 七十二賢의 고사와 관련 있다고 하는데, 요즘도 종종 접해 볼 수 있는 말이고 그것이 어렴풋이 고려 말의 충신들과 관련 있다는 것은 들은 듯하지만 좀더 알아보고자 여러 문헌을 뒤적여보아도 고작 '杜門不出 : 문을 닫고 출입하지 않는다는 말이니 곧 집안에만 있고 세상밖에 나가지 아니하는 것.' 이 한 줄뿐이고 더 이상 다른 설명을 대하기가 쉽지 않다.
고려와 조선의 변천 과도기에 사회는 폭풍우와 같은 갈등을 겪게 된다.
모든 문물이 바뀌고 제도가 새롭게 형성되며, 사회의 정의가 재정립되는 것이다. 이때에 지식인들은 심각한 모순에 빠지게 된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들이고 국가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권력가들이며,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룩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새로움에 參與(참여)할 것인가, 절개를 지켜 잔류할 것인가의 선택 밖에 없었으며, 어느 쪽이든 내세울 명분은 있었다. 참여를 선택한 사람도, 잔류하여 은거를 선택한 사람도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었고 그것은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 이야기의 주인공은 새 왕조 참여를 거부하고 시골에 내려가 숨어 산 온건개혁파들이니 그들이 이른바 두문동 72현이다. 그들은 고려의 개혁에 있어서 이성계와 행보를 같이 했으나, 조선 개국에는 반대 의지가 확고했던 사람들이다. 물론 수구파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두문동은 경기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으로, 칠십이현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 마을의 동 ·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빚장을 걸어놓고[杜門]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不出]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 두문동(杜門洞)이라는 단어를 추앙하게
만드는 뿌리가 되는 것이다.
한편 조선조 최고의 재상으로 꼽히는 황희 황정승이 실은 두문동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결코 황희가 두문동 정신에 배신행위를 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것은 그의 생애 내내 하나의 부담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으며 그러한 점이 그의 달관한 듯한 여러 일화와 무관치만은 않으리라는 느낌이 든다.
[참조1]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 七十二賢]
조선의 개창에 반대해 두문동에서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바치며 지조를 지킨 72명의 고려 유신(遺臣)을 이르는 말.
고려 말에 고려왕조와 운명을 함께 하면서 잔류를 선택한 사람들을 우리는 두문동인(杜門洞人)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새로운 개혁세력에 대항하기도 하고 목숨을 걸고 투쟁하기도 한다. 두문동인(杜門洞人)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흔히 세간에서는 72명이라고 확정된 숫자를 말하기도 하지만 여러 기록을 (조선왕조실록) 참조하면 대략 50여명에서 117명 혹은 400여명(고려숭의 열전)을 거론하기도 한다.
72명의 이름은 현재 모두 밝혀지지는 않았고, 신규(申珪) ·신혼(申琿) ·신우(申瑀)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이경(李瓊)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서중보(徐仲輔) 성사제(成思齊) ·박문수(朴門壽)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이의(李倚) 등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
두문동(杜門洞)은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光德山) 서쪽과 만수산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조선건국(朝鮮建國)을 반대하고, 고려(高麗)의 신하로 남기를 맹세한 충신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이태조(李太祖)가 등극하면서 고려의 신하들을 안무(按撫)하기 위하여 과거장(科擧場)을 설치하였으나, 그들은 절개(節槪)를 지켜 과거장(科擧場)에 나가지 않고 개성의 북쪽 고개 마루에 조의(朝衣)와 조관(朝冠)을 걸어놓고 만수산(萬壽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곳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면서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켰다. 후에 그들이 넘은 고개를 부조현(不朝峴), 조의관(朝衣冠)을 걸어 둔 곳을 괘관현(掛冠峴), 함께 은둔하였던 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고 불렀다.
조선 건국(朝鮮建國)초기에는 두문동(杜門洞)에 대하여 말하는 것조차 금기하였다가,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어, 350여년이 지난 1783년(정조 7)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다.
이로써 겨우 기록으로 남길수 있었고, 제사를 모실 수 있었다.
[참조2] 황희(黃喜 1363∼1452 공민왕 12∼문종 2)
조선 초기 문신.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尨村). 본관은 장수(長水). 1389년(공양왕 1)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이 되었다.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가 94년(태조 3)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었다. 이후 형조·예조·이조의 정랑, 우사간대부·승정원지신사를 지냈으며, 1408년(태종 8) 민씨(閔氏) 일파의 횡포를 제거한 뒤 형조·병조·예조·이조판서를 지냈으나 한때 파직되기도 하였다. 18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로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폐출이 불가함을 건의하다가 교하(交河)로 유배되었다. 세종의 즉위와 함께 복관되어 좌의정에 이르렀다가 후에 영의정에 올랐다. 49년(세종 31) 치사(致仕)한 뒤에도 계속 세종의 자문에 응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농사개량, 예법개정 등의 치적을 쌓았다. 저서로 《방촌집》이 있으며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익성(翼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