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녹색글 은 1997년 일기장을 컴퓨터로 옮길 때 기억을 더듬어 쓴 나(어른)의 설명 글입니다.
1978년 6월 1일 목요일
점심 시간에 밥을 먹고 학교에 돌아가니 아이들이 선생님 책상 근처에 와 몰려 있었다.
난 무슨 일인가 싶어 그 곳으로 가보니 30일 날 친 시험 결과가 기록되어 있었다.
역시 난 1등이었다.
평균 86점 !
지난달에는 평균 77점이었는데, 무려 9점이나 뛰어 올랐다.
기뻤다.
난 2등 정도쯤 생각했는데 1등이 되다니….
2등은 유규였다. 평균 81점.
유규도 지난달에 비해 5점이 올랐다. 유규 역시 잘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달에도 힘닿는 데까지 힘껏 열심히 공부해서 꼭 1등을 차지하겠다.
다음 목표는 90점이다.
집안 일만 바쁘지 않으면 가능할 것이다.
1978년 6월 2일 금요일
오늘은 이제 누에치기 중에서 가장 마지막날이다.
오늘 저녁만 뽕잎을 먹으면 내일 아침에는 이제 섶[1]으로 올라가야 할 신세다.
그러니 만큼 오늘이 제일 바쁘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 할머니, 큰 할머니께서도 총출동하여 누에를 올릴 준비를 하시고 계셨다.
나도 힘이 닿는 데까지 돕겠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도왔다. 아버지께서는 회전섶을 맞추는 일을 하셨다. 나의 임무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 중에서 옆에 서서 섶을 주워주는 일이었다. 내가 섶을 주워주면 아버지께서는 거기에 끼우셨다.
나뿐만 아니었다. 형도 동생도 각각 도울 수 있는 일을 힘껏 돕는 것 같았다.
오늘은 보람있는 하루였다. 부모님을 힘껏 도왔으니 말이다.
내일은 더 바쁠 것이다.
내일은 토요일이라 일찍 집에 올 것이니, 내일 역시 힘껏 돕겠다.
[1] 누에가 실을 토하여 고치를 만드는 장소이며 볏짚으로 만든다.
1978년 6월 5일 월요일
학교에서 돌아와 큰집에 놀러 가는데, 큰집 앞집 오두막집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께서 물을 이고 밑으로 내려오고 계셨다.
몹시 무거운 모양이었다.
"제가 가져 갈께요."
"너 누구지?"
난 묵묵히 물만 받아들고 그 집까지 운반해 주었다.
"너 뉘 집에 살지? 누구네 아들이지? 좀 가르쳐 다오. 너희 엄마한테 얘기하게."
난 이름을 밝히라는 것도 거절하고 아무 말없이 큰집으로 갔다.
그 할머니께서는 몹시 기뻐하셨을 것이다.
오늘 처음으로 내 신분을 밝히지 않고 착한 일을 한번 했다.
앞으로 이런 착한 일을 많이 해야겠다.
1978년 6월 6일 화요일
오늘은 현충일이다.
저 북한 괴뢰가 쳐들어 와서 우리 강토를 피로 덮어씌운 것을 제사지내는 날이다.[1]
난 일찍 일어나서 태극기를 조기로 달았다.
10시가 되자,
'국군 아저씨 감사합니다. 그 때 아저씨들께서 목숨을 내 걸었기 때문에 이 한국과 우리들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저 세상에 갈 때 좋은 곳에
갔을 거라고 믿습니다. 우리들도 아저씨들의 충성심을 본받아 나라를 위하여 맡은 일에 충실히 일하겠습니다.'
하고 묵념하였다.
나는 오늘 새삼스럽게 나라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았다.
나라가 없는 개인은 있을 수 없고, 나라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난 국군 아저씨들의 은혜에 꼭 보답하겠다.
조국을 위해 돌아가신 국군 아저씨들의 제삿날을 경건하게 보냈다.
[1] 현충일의 정의를 이렇게 내린 것을 보면 당시 반공 교육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1978년 6월 7일 수요일
난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자마자 아이들이 5학년과 배구하자는 것도 물리치고 집으로 왔다.
오늘 드디어 누에고치를 섶에서 따서 다듬는 날이다.
약 한 달 동안 애쓴 보람이 있었는지 굵고 깨끗하고 흰 고치들이 가득하였다.
이미 동네 이웃 사람들이 도와줘서 거의 다 땄고 조금 밖에 남지 않았다.
나도 재미나서 정신없이 땄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한 보람이 오늘로써 마무리되는 것이다.
아버지께선,
"누에고치가 깨끗하고 굵게 이번에는 잘되었다."
잠시 후 아버지께서는 따끈한 방에 깔아 건조시켰다.
이번 누에를 치는 데는 할머니 힘이 제일 컸다.
아버지께서 뽕을 베어다 놓으면 잎을 따서 누에에게 주고, 누에 벌레가 어떻게 잘못되지나 않았나 늘 걱정하셔서 몸도 몹시 쇠약해졌다.
할머니의 이 모든 노력이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다. 난 이 은혜를 고이 간직해서 할머니께 나중에 잘해 드리겠다.[1]
[1] 고등학교 다닐 때 대구에서 자취를 했는데, 할머님은 농한기 때마다 대구에 오셔서 손자에게 밥을 해 먹여 학교에 보내고는 긴긴 하루를 아무 친구도 없는 낯선 도시에서 감옥살이를 하셨다. 인생의 노년기에 우리 가족 어느 누구보다도 나한테는 많은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는데, 1987년 임종하실 때는 연락을 받고 서울에서 내려가는 사이에 돌아가셨다. 이 일기를 보니 할머니 생각에 눈물이 저절로 난다.
1978년 6월 10일 토요일
오후가 되자 먹구름이 조금씩 끼더니 나중에는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얼마나 기다리던 비인가!
여태껏 남의 애를 끓게 했던 비가 이젠 제법 많이 와 있다.
아직도 밖에서는 빗소리가 나고 있었다.
동네에서 사람들이 기뻐하는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비는 너무 많이 와도 탈이다.
약간만 많이 오면 홍수가 나고, 물 건너 들에는 배를 타고 가야한다.
'비가 알맞게 왔으면 좋을 텐데.'
만약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지면 위치가 낮은 곳에 있는 보리는 떠내려가고 마는 신세가 된다.
난 제발 이번 비가 알맞게 왔으면 하면서 어느 누구에게라도 간절히 빌고 싶다.
1978년 6월 12일 월요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내 성적이 자꾸 내려간다.
오늘도 시험을 쳤는데, 난 81점을 받았다.
그 반면 성진이는 96점이었다.
'왜 난 점수가 나쁠까?'
내가 노력을 하지 않은 데서 생긴 문제다.
후회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순 놀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집에 오면 매일 농사일을 거들어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렇다고 하면 핑계일까?
'공부에 힘을 기울여야지.'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온갖 분통한 것과 각오가 왔다갔다했다.
시험만 치면 100점이면 얼마나 좋을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으응."
꿈을 꾸었다. 정말 이상하고도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꿈이다.
꿈에서조차도 시험 치르는 것이 나오니 나도 알게 모르게 시험에 짓눌려 있는가 보다.
시험 없는 세상은 없을까?
하기야 시험이 없으면 선생님들께서는 오히려 재미없을 거야.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평생 한 번 때려보지 못할 테니까.
1978년 6월 13일 화요일
오늘은 모내기를 하는 날이다.
나도 일손을 돕겠다는 생각에서 모내기하러 따라 나섰다.[1]
배를 타고 물 건너 논에 가니 벌써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모내는 일 중에서도 가장 쉬운 일인 줄대기를 하였다.
줄대는 일은 사실 지겹기도 했다.
내가 넘기는 줄에 맞추어 직접 모를 심는 동네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분들은 하루 내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였다.
오늘 하루는 나도 도중하차 하지 않고 해가 질 때까지 일을 거들었다.
물 건너 땅에는 오늘 예정된 모내기 양을 오전에 다 마쳤고, 오후에는 산밖골[2]에 그렇게도 많이 흩어져 있는 모든 논에 예상과는 달리 매듭을 지었다. 이렇게 오늘 예정된 양을 모두 마친 것은 우리 집에서 일을 하는 동네 어른들이 매우 열심히 모를 심었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께서도 남의 집에서 모내기를 할 때 이렇게 일을 열심히 했을 것이다. 그 결과 오늘 우리 집 모내기에서 대가를 받은 것이다.
이것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품앗이'이며, 우리 농촌의 미풍양속이다.
이런 아름다운 미풍은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고 끝까지 전해졌으면 좋겠다.
[1] 당시 시골 학교에서는 가끔씩 '가정실습' 이라 하여 며칠씩 학교에 등교하지 않고 집에서 농사일을 돕는 기간이 있었는데 이날도 가정실습 기간이었는가 보다.
[2] 우리 시골에 있는 들 이름.
1978년 6월 15일 목요일
모처럼 5학년 배구 선수들과 시합을 했다.
1세트에 들어서자 우리 6학년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시합을 시작했다. 이는 5학년이 우리를 이겨 사기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랬더니 진짜 우리를 앞서기 시작했다.
"우리 6학년이 져서야 되나?"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5학년의 사기는 제껴두고 우리들은 힘껏 싸우기 시작했다. 결국 한 학년이 높은 우리 6학년이 승리했다.
2세트에 들어서기 전에 우리들은 '이번에는 정말 져주자' 라는 작전을 세웠다.
2세트엔 우리가 정말 져주었다. 우리가 짜고서 져준 것도 모르고 5학년들은 좋아하였다.
3세트엔 우리가 힘껏 하려고 해도 5학년의 사기가 높아져서 오히려 우리들의 사기가 풀이 죽었다.
결국 패했다.
오늘 처음으로 우리가 5학년에게 졌다.
우리가 5학년을 위한다고 봐주기 게임을 했기 때문에 결국은 꼴좋게 패한 것이다.
우리가 만약 처음부터 열심히 했다면 분명히 이겼을 것이다. 역시 운동 경기에서는 실력보다는 힘껏 정정당당히 하는 팀이 이긴다고 생각했다. 혹시 경기에서는 지더라도 전체적으로는 그런 팀에게 박수를 보낼 것이다.
오늘 우리가 진 것은 이런 측면에서 수치스럽지만, 그래도 우리가 한 번 져 줌으로써 그들은 앞으로 '하면 된다'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1978년 6월 16일 금요일
우리 집에는 오늘도 모내기를 하였다.
나는 학교에서 늦게 돌아와서 일을 거들어 주지 못했다.
오늘 모를 심은 논에는 마늘이 있었다. 이 마늘을 캐내고 모내기를 한 것이다.
올해는 아버지께서 마늘 농사를 지으신 이후 보기 드물 정도로 마늘이 잘되었다고 한다. 이런 해는 여태껏 2번밖에 없었다고 한다.
모를 심어야 했기 때문에 마늘을 캤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마늘이 벌써 집에 와있었다.
저녁을 먹고 우리 식구들은 마늘을 다듬고, 상, 중, 하로 나누어서 묶었다.
2접을 심었는데 12접이 났다.
이 정도면 아버지 말씀처럼 풍년이라고 볼 수 있다.
"올해 비만 자주 왔다면 더 잘되었을 텐데. 워낙 날이 가물어서."
아버지께서는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물을 줄 걸. 하루에 한 양동이만 주었어도 더 잘 되었을 걸.'
또 아버지께서는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하다. 작년에는 마늘 씨값도 못 나왔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부모님께서는 저렇게 훌륭하게 마늘을 가꾸어 놓았다.
나도 기분이 좋았다.
1978년 6월 18일 일요일
아침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우리 집에는 오늘도 모내기를 하였다.
동네 어른들과 함께 아침부터 나도 모내기에 참가했다.
매우 서그프다.[1]
왜 하필이면 좋은 날 두고 이런 날을 택했을까?
비닐 옷을 덮어쓰고 일하시는 모습들이 무척 고달프게 보였다.
나 역시 비닐을 덮어썼다. 오늘도 나는 못줄을 대었다.
이렇게 겨우 물 건너 논에 모를 모두 심고,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들어갔다. 비만 오지 않았으면 들에서 먹는 점심이 무척 맛있었을 텐데….
"세억이 안 춥나?"
"안 추워요."
이렇게 어머니께서는 날 걱정하셨다. 점심을 먹은 후에도
"이제 따뜻한 밥을 먹었으니 들에 나가면 덜 추울 거다. 비닐을 많이 감아 가지고 가거라."
난 어머니 말씀에 따라 속에는 옷을 많이 입고, 비가 못 들어올 만큼 비닐을 감았다.
막상 들에 다시 나가니 비가 더 많이 내렸다.
추웠다.
옷을 많이 입고 비닐을 많이 두른 것이 다행이다. 이래도 추운데 아침처럼 차리고 왔다면 큰일 날 뻔했다.
어느새 옷에 빗물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다 심어 갈 무렵이었다.
오늘처럼 힘들게 집안 일을 거들었던 적은 없다.
아마도 내일은 감기가 들 것 같다.
그러나 오늘 내가 비교적 쉬운 못줄 대기를 맡아서, 일 잘하는 어른 일꾼 한 분이 대신 모를 심는 데 기여를 해서 일을 무사히 끝마쳤다고 생각하니 기뻤다.
[1] 날씨가 춥거나 쌀쌀해서 일하기가 선뜻 내키지 않는 그 느낌을 사투리로 '서그프다'로 표현한다. '슬프다'와는 완전히 다른 뜻이다.
1978년 6월 19일 월요일
오늘부터 제4조로 우리가 선도 일을 시작한다.
아침에는 각 교실로 돌아다니면서 아침 자습을 권하고, 1학년 아이들에게는 특별히 덧셈 문제 몇 문제를 칠판에 내주었다.
이렇게 아침에는 비교적 성실하게 선도 일을 했으나, 점심 때는 그렇지 않았다.
아직도 우리 집에는 모내기가 끝나지 않은 논이 조금 남아 있어 집안 식구들끼리 총출동해서 모를 심는다. 그래서 집에는 아무도 없다.
난 아침에 학교 마치면 집에 빨리 돌아와서 소죽도 끓이고, 집안 청소를 하겠다고 할머니와 약속을 했기 때문에 선도 일을 덜 마치고 일찍
돌아와야 했다.
아침에 선도 조회 시간에 선생님께서 오후에는 교무실에서 일 좀 거들어 달라고 하셨는데, 이것도 무시하고 집으로 왔다. 물론 선도 일지와
모든 것을 다른 아이들에게 맡기고 왔다.
그래도 내 걱정은 태산 같다. 집에 올 때 우리 선생님의 허락은 받았지만, 선도 선생님의 허락은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에 와서 소죽도 끓이고, 비가 올까봐 마당 설걷이도 깨끗이 했다.
이렇게 집안 일을 거들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무엇인가 답답한 것이 있다.
'과연 내일 학교에 가면 선도 선생님께서 꾸중은 하시지 않을까? 사실을 이야기하면 용서해 주실 거야.'
1978년 6월 22일 목요일
- 외할아버지의 하직 -
학교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세봉이네 집에서 아이들과 어린이 연속극 '쌍룡검'을 보고 우리 집 쪽으로 내려오고 있는데, 저 아래쪽에서 눈에 익숙한 다인 중학교 체육복을 입은 아이 두 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조금 후 내 곁으로 왔는데, 들여다보니 내가 외가에 가면 제일 친하게 노는 외갓집의 친척 아이였다.
"야, 너 인섭이 하고 상철이 아니니!"
"잔소리 말고 빨리 따라와."
몹시 급한 목소리였다. 그들은 우리 집을 지나서 저 위쪽으로 계속 올라갔다.
"어디 가는데?"
"너희 집에."
대강 외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짐작되었다.
"우리 집은 저 아래인데, 우리 외할아버지 돌아 가셨지? 응?"
"그래, 너무 급해서 너희 집을 분간 못했어."
나는 이 한마디 대답에 정신이 아찔하였다.
내가 외갓집에 가면 그렇게도 귀여워 해주시던 외할아버지였는데….
우리 외할아버지는 마음이 정직하고 남의 것을 탐내는 적이 없어 동네 사람들로부터 항상 존경을 받아왔다. 그래서 더욱 그리워지고 슬퍼졌다.
"얘, 빨리 우리 집에 가서 밥 먹고 기다려."
난 이 한마디를 남기고 그들이 타고 온 자전거를 타고 들로 갔다.
얼마나 세게 달렸을까?
가다가 한 번 넘어졌다. 아프지도 않았다. 다만 슬픔만 가득하였다.
"아버지요."
"왜? 왜 그렇게 서둘러?"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
"뭐? 넌 빨리 집에 가있거라. 내가 엄마한테 연락할 테니."
나는 계속 눈물이 났다.
집에 돌아와서 인섭이와 상철이를 배웅하러 강까지 따라갔다.
집에 돌아오니 벌써 7시가 넘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외갓집에 갈 준비를 서둘렀다. 여태껏 너무나 바빠서 그 동안 옷 하나 빨아놓지 않아서 입을 옷도 없이 가셔야 하는 어머니, 얼마나 슬플까?
세란이는 방구석에 앉아서 아무 말이 없었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슬픔에 잠겼다. 난 내일 오후에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토요일 아침에 외가에 가야겠다.
1978년 6월 23일 금요일
공부가 좀처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도 난 외할아버지 생각을 자꾸 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아직 겨우 59세인데 , 왜 환갑도 못보고 저 세상으로 가야하지?'
또, 반드시 할아버지는 천당에 갔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공부는커녕 오히려 내 머리가 아프고 열이 심하게 났다.
'난 내일 외갓집에 꼭 가겠다. 가서 할 일은 없지만 외할아버지의 명복을 꼭 빌겠다.'
방과 후 집에 와서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니, 내일 장례식을 한다고 소식이 왔다고 한다.
내일 나도 일찍 가서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지만 학교 공부 시간을 어길 수도 없는 일이다.
'내일 아침에 조퇴를 할까?'
그러나 이 생각 역시 적당치 않다.
내가 '선생님,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저도 외가에 가보고 싶습니다. 좀 보내 주십시오' 하면 선생님께서는 허락하실까?
내 마음은 외갓집에 가고 싶지만 글로써 다 표현할 수 없는 지금의 심정이 안타깝다.
1978년 6월 24일 토요일
4시간의 공부가 지루하다.
4교시 때 선생님께서는 자습을 시키시고, 일기장 검사를 하셨다.
나의 일기장을 읽어보시는 것을 옆 눈으로 보았다. 이제 어제까지의 일기를 선생님이 보시면 오늘 오후에 내가 외가에 간다는 것을 선생님이 아실 거다.
"찌르르 찌르르."
4교시 마침벨이 울렸다. 선생님께서는
"장세억이는 오늘 외가에 꼭 가야하면 청소는 안하고 그냥 가도 좋아요."
난 선생님이 무척 고마웠다.
오후 늦게서야 외가에 도착했다.
이미 장례식은 끝나고 쓸쓸하기만 한 외갓집이었다.
이모님께서 저기에 계셨다. 약 6년 동안 못 보았던 이모다. 얼굴도 처녀 때와는 많이 변해 있었다.
이모는 내 얼굴을 모르는가 보다. 내가 곁으로 가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외가에는 이모 이외에 몇 명만 있었고, 나머지는 아직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는가 보다.
저녁때가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오셨다.
모두 우울한 표정이다.
모두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이 모든 광경이 나에게서도 저절로 눈물이 나게 하는 모습이다.
1978년 6월 25일 일요일
남의 집에서 자서인지 몹시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후두두 후두두…."
밖에서 소나기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이 화끈 단다. 오늘 집에 못 가면 내일은 학교에 결석을 해야한다.
여태까지 6학년 때는 한 번도 결석을 하지 않았는데, 내일 결석하면 나는 6년 동안 한 번도 개근상을 못 받아보는 신세가 된다.
1학년에서 지난 5학년까지 한 번도 개근상을 못 탄 나로서는 꼭 이번에는 개근상을 타야겠다는 단단한 각오로 여태껏 한 번도 결석하지 않았는데…….
무너지는 것 같았다.
비가 그칠 거라고 생각하면서 점심때까지 기다렸지만, 폭우로 변한 비는 계속 왔다.
'이놈 비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애도하는 것은 좋은데, 빨리 그쳐라.'
다행히 조금 있으니까 비가 멎었다. 몹시 기뻤다.
그러나 기쁜 것도 몇 분 정도.
내가 집으로 먼저 가겠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선 비가 이렇게 많이 왔으면 우리 마을 앞 강물이 많이 불어 배가 다닐 수 없고, 혹시 또 가다가 비를 만나면 어찌 하냐고 하시며 가지 말라고 하셨다.
하필이면 오늘 이렇게 비가 많이 올 줄이야…….
결국 오늘 저녁도 외가에서 보낸다.
안타깝기만 하다.[1]
[1] 이 일기를 보고 그랬는지 선생님께서는 다음날 결석한 것을 결석으로 처리하지 않으셨다. 그 결과 나는 초등학교 6년 동안 사상 처음으로 졸업식날 1년 개근상을 받아 보았다. 5학년까지는 몸이 아픈 적이 많아 1년에 10일 정도는 결석을 밥 먹듯이 했다.
1978년 6월 26일 월요일
아침에 깨어나니 비는 다행히 그쳐 있었다.
오늘은 외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날부터 3일째 되는 날이다. 즉, 삼오날이다.
아침부터 동네 어른들이 많이 모였다.
모두들 아침을 먹고 마지막 제사를 지냈다.
우리 어머니를 비롯하여 친척들이 모두 격렬하게 울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나도 눈물이 저절로 났다.
제사가 끝났다. 이제 할아버지는 영원히 우리들 곁을 떠나셨다.
오후에 나는 어머니와 함께 집을 향해 발을 옮겼다.
강가에 닿았다.
어제 어머니의 예상대로 강물이 굉장히 많았다. 저녁 늦게 들에서 모내기했던 분들과 힘을 합쳐서 노 젓는 배를 탈 수 있었다.
학교가 보였다.
오늘 결석을 해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후회가 되기도 했다.
1978년 6월 27일 화요일
학교에 가니 아이들이 오늘 '군내 고사'를 친다고 떠들썩하였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며칠 동안 전혀 공부를 못 했기 때문이다.
첫째 시간부터 시험이 시작되었다.
감독 선생님은 2학년 선생님이셨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문제가 쉬운 편이었다.
첫째 시간의 국어는 가장 쉬운 것 같았다.
둘째 시간에는 산수, 산수 역시 쉬웠다.
셋째 시간의 사회 역시 쉬웠다.
넷째 시간은 자연, 오늘은 다섯 문제만 시험을 보았고 내일 실험 문제를 다섯 문제 본다고 하였다. 자연이 제일 어렵다고 생각된다.
오늘 시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여름이 되고는 모내기 하랴, 외할아버지 돌아가셨지 해서 통 공부를 하지 못했다.
성적이 잘 나오길 빌지만, 노력도 하지 않고 좋은 열매를 거두길 바라는 내 심보가 도둑놈 심보와 똑 같다.
1978년 6월 28일 수요일
첫째 시간부터 어제와 같이 기타(도덕, 음악, 미술, 실과)와 자연 실기를 시험 보았다.
먼저 기타부터 쳤는데, 굉장히 까다로웠다. 기타에는 항상 자신이 없다. 아니 자신이 없다기 보다는 아예 모른다고 하는 게 더 적합할 것이다.
'이젠 유규나 성진이에게 지게 생겼구나.'
그러나 자신을 갖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풀어 나갔다.
다음은 자연 실기를 보았다. 이건 누워서 떡 먹기다.
시험을 다 치르고 오후 점심 시간이 되었다. 그 때 진달이가 어디 나갔다 오더니,
"어제 친 시험지가 2학년 교실에 있어."
아이들이 달려갔다. 나도 따라갔다.
내 시험 성적은 다음과 같았다.
국어-95, 산수-100, 사회-90, 자연-4개, 기타-75 였다.
나중에 유규하고 맞추어 보았더니 내가 월등하게 점수가 더 높아 1등이었다.
노력도 안하고 1등 하니까 어딘지 모르게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솔직히 기분이 좋은 것은 숨길 수 없다.
1978년 6월 30일 금요일
아침때의 일이다.
도시락을 가지고 등교 하려고 생각했다. 매주 금요일은 점심을 집에 와서 먹는 대신 학교에 도시락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친구들이랑 점심을 먹도록 선생님께서 권장하셨기 때문이다.
"엄마, 도시락 줘."
"오늘 도시락을 준비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좀 하면 어때서."
"네가 오늘은 도시락을 가지고 간다고 미리 말해 줘야지. 이제 와서 그러면 내가 어떻게 준비하니."
어머니께서는 화가 나셔서 꾸짖었다.
어머니께서 늦게라도 어떻게 서둘러 도시락은 가져갔지만, 점심 시간에는 입맛이 전혀 없었다.
왜 그럴까?
아마도 엄마랑 도시락 때문에 싸움을 해서 그럴 것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도시락 때문에 부모님과 싸움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난 다짐한다. 앞으로는 도시락을 가져가는 날에는 어머니께서 아침을 해놓으면 내가 직접 밥이랑 반찬을 도시락에 챙겨서 학교 가겠다고.
오늘 같은 일이 한 번 있고 나면, 다음은 반성을 해서 마음이 조금 풀리지만 그래도 엄마한테는 죄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