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김종인, 이게 다 뭐야?"
"곧 할로윈이잖아. 나랑 여친 입을 코스튬."
"할로윈?"
"10월 31일이 할로윈이야."
오후에 잠시 나갔다 오겠다던 김종인은 양 손 한 가득 괴상한 분장 도구와 의상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과제에 시달리느라 10월을 정신없이 보낸 나는 할로윈 날짜도 정확히 몰랐으며, 이 나라 사람들이 할로윈만 되면 코스프레를 빡세게 하고 파티를 즐기는 줄도 몰랐다. 우리나라에선 홍대나 이태원 정도에 가야 볼 수 있는 광경이라 생각했는데...참 재미지고 흥 많은 나라군. 여자친구와 조커 할리퀸 커플 코스프레를 할 거라며 신이 난 김종인은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의상을 정리했다.
"오세훈 너도 해?"
나는 소파에 늘그막히 앉아 맥주를 마시던 오세훈에게 물었다. 니가 알아서 뭐하게. 아 예예, 관심 끄겠습니다요. 말하는 본새를 보아하니 쟤도 나름 준비를 할 생각인가보다.
나도 뭐라도 해야 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봤을 때 할로윈에 나는 백퍼센트 방콕을 할 것이 분명하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 거 있어? 집에서 발 닦고 넷플릭스나 봐야지.
"Hey my boy~" (자기야!)
"Come in, honey." (들어와)
"Let me see my costume!" (내 코스프레 의상 볼래!)
곧 있으니 종인의 여친이 자신의 의상을 구경하겠다며 우리 집에 찾아왔다. 조금 불편했지만 오세훈이 앉아있던 소파 뒤로 물러서있던 나는 그녀에세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고 그녀도 웬일인지 웃으며 받아주었다. 자신의 할리퀸 의상이 쏙 맘에 들었는지 종인의 여친 역시 들떠보였다.
그들을 뒤로 하고, 내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갑작스레 김종인의 여친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것도 엄청 친절한 목소리로.
"Iju! That's your name, right?"
(이주! 너 이름 맞지?)
"Ah...yes.."
(응..맞아)
"I am so sorry i was late for introducing myself to you. I'm Blaire"
(내 소개가 늦어서 미안해. 난 블레어라고 해)
"...."
"Also, i am genuinely sorry for being mean to you. I was totally misunderstanding you."
(그리고 너한테 못 되게 굴어서 진심으로 미안. 내가 너를 완전 오해하고 있었더라구.)
"Never mind. I understand you."
(아니야, 네 입장 충분히 이해돼)
"Ah, That's so kind of you!"
(고마워!)
김종인은 뿌듯한 표정으로 나와 제 여친 블레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조금 갑작스럽지만, 블레어는 나에 대한 경계심이 모두 풀어진 듯 했다. 그녀는 자신이 중국계 미국인이며, 나이는 우리와 동갑으로 21 살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웬만한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듯 했다.
나에 대한 오해도 풀리니 내게 팔짱을 끼기도 하고, 화장품은 뭘 쓰는지, 내 방을 구경해도 되겠는지, 딱 스물 초반의 대학생 친구처럼 말을 걸어왔다. 어리둥절했지만, 생각보다 나에게 진심으로 호의적이게 된 것 같아서 나는 무난하게 이를 받아주었다.
나는 그녀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김종인한테 물었다.
"네 여친한테 대체 무슨 소리를 했길래 저렇게 나한테 친절해진거야....?"
"아,"
"...."
"너랑 내가 진짜 못 볼 거 다 본 사이라는 걸 못 믿더라고."
"근데?"
"그래서...아, 이거 말해야 하나?"
"그래서 뭐??"
"어릴 때 놀다가 네가 내 무릎에 똥 싼 거 말했는데...."
부모님이 그거 찍은 사진도 있다고....
하...저저, 개새끼........(수치심으로 인해 욕도 안 나옴)
윌리스 412번가의 비밀
"Iju, why don't you go clubbing with us on Holloween?"
(이주야, 너도 우리랑 같이 할로윈 때 클럽 가자!)
"No, I don't wanna disturb you guys. You should have some with fun with your boyfriend"
(아냐, 너네 커플한테 방해될 것 같아. 종인이랑 같이 즐거운 시간 보내고 와.)
처음으로 김종인, 나, 오세훈, 그리고 블레어까지 네 사람에서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하는 저녁 식사였다. 나는 김종인에게 질 새라 그 새끼가 어렸을 때 개구리 보고 깜짝 놀라서 질질 짰던 것, 밤에 지도 그려서 우리집에 소금 받으러 온 일화 등을 세세하게 일러바치는 중이었다. 숨 넘어갈 듯 웃으며 좋아하던 블레어가 내게 같이 할로윈에 클럽을 가자고 했지만, 나는 괜찮다며 막 거절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블레어는 손을 저으며 내 말을 막았다.
"No, no i mean,"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녀는 타란-하며 손을 벌리는 제스쳐를 취하며 말했다.
"Double dating!"
(더블 데이트 하자고!)
"Of course including you, Sehun! You are going out with Iju nowadays, right?"
(물론 세훈, 너도 포함해서지. 너 요즘 이주랑 만나는 거 맞지?!)
나는 레알 너무 당황해서 손을 허공으로 막 가로지으며 무의식적으로 오세훈과 나는 커플이 절대로 아님을 말하려했지만, 이는 곧 김종인의 말에 의해 제지되었다.
"No way, he and I are not a,"
(말도 안돼, 쟤랑 나는 그게 아니라,)
"Ok, tha...that's good idea honey!"
(좋아, 좋은 생각이야 자기야!)
뭐야, 저 미친 새끼는?! 김종인이 좋은 아이디어라고 하자 이 에너자이저 같은 블레어는 더 흥이 나서 외쳤다.
"See? We should all go!"
(봤지? 우리 전부 다 가야 돼!)
"Yes, you are always right. It will be a great night. Don't you think so, Sehun..?"
(맞아, 자기는 늘 옳아. 엄청 재밌을거야 그렇지 세훈아...?)
김종인은 후다닥 짝짝-박수까지 치며 오세훈과 내게 눈치를 주며 한국말로 블레어가 못 알아듣게 말했다.
얘들아 나 한번만 살려주라, 니네들이 저번에 너네 커플이라 뻥쳐가지고 겨우 넘긴 거였잖니. 얘 아직도 그거 믿고 있단 말이야...
야 김종인 얘 다리는?
오센 너 9일 뒤엔 목발 안 짚어도 되잖아! 왼쪽은 다 나았고!
김종인은 땀까지 뻘뻘 흘러가며 속삭였다. 와 이 도른자. 나는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오세훈의 반응을 살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던 오세훈과 눈이 마주쳤다. 야, 어떻게 거절하지? 눈빛으로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는 혼자 무언갈 생각하더니 이내 말문을 열었다.
"이미 사귄다고 저질러놨는데 별 수 있어?"
"......"
"좇같아도 가야지 뭐."
그러든가. 하고 오세훈이 말하자 김종인이 만세를 외치며 블레어에게 나와 세훈도 간다며 전해주었다. 나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세훈을 노려보았다. 아니 쟨 뭔 생각으로 그냥 간다 하지? 거절할 방법을 찾아야지 간다고 그러면 뭐 어떡하란 거냐고...원망스런 눈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세훈은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자신은 이제 방으로 가겠다며 목발을 짚어들었다.
김종인이 오세훈을 도우러 이층으로 올라간 사이, 블레어는 너무 기뻐하는 눈으로 내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어우, 얘랑 있으면 영어 연습이 되긴 하겠다.
이주 너 좋아하는 코스프레 있어?
음 모르겠는데..
그럼, 디즈니 시리즈 이야기 뭘 제일 좋아해?
아, 디즈니 중에는 나 미녀와 야수?
야, 딱 잘 됐다. 내가 아는 유명한 코스튬 가게 있는데 거기서 벨 드레스 본 것 같아!
엥...? 나보고 벨을 하라고?
뭐 어때! 그 날은 할로윈이잖아~
얼떨결에 미녀와 야수 이야기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더니, 블레어는 자신이 아는 가게가 있다며 뜬금없이 벨 분장을 하라고 한다. 공주 분장을 하라고...? 나는 손사레를 쳤지만 블레어는 걱정 말라며 자신만 믿으란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블레어의 추진력이 이 세상 스피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점심이 되자 샛노란 벨 드레스와 구두, 그리고 머리 장식을 가져왔다. 샛노란 드레스는 동화 그대로는 아니었고, 움직이기 편하게 무릎까지 오는 길이였다. 가발은 내 머리색 자체가 갈색이라 굳이 가져오지 않았다고 한다.
하하 이 친구, 밝아서 좋긴 한데 거 참 당황스럽구만. 나는 괜히 드레스만 만지작거렸다. 할로윈이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날이 될 지도 모르겠다.
블레어는 세훈이 야수 역을 맡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오세훈은 이미 킹스맨 분장을 위해 정장을 준비했다며 딱 잘라 거절했다. 다행이다, 커플 같아 보이진 않겠네.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야, 너무 걱정마. 쩌는 코스프레 한 사람들 많이 지나다녀서 네가 평범하게 느껴질 걸."
"진짜..?"
"어, 여기 장난없어. 그리고 이 때 아니면 이런 걸 언제 하냐? 다 추억이지."
솔직히 엄청 부끄러울 것 같긴 하지만, 김종인의 말로는 우리나라와 다르게 그 날 만큼은 사람들 모두 고퀄리티의 코스프레를 하고 다니기 때문에 덜 수치스럽다고 한다. 확실히 우리나라와는 정서가 달랐다. 하긴, 진짜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걸 해보겠어? 뻔뻔함이 생긴
나는 블레어에게 고맙다고 하며 코스튬 비용을 주려했지만 그녀는 돈을 받기를 거절했다. 친구가 된 기념으로 주는 선물이란다.
나는 블레어에게 담엔 꼭 맛있는 음식을 사겠다고 했다. 둘이서만 보자고 장난스레 말했는데 그녀는 아주 좋아하며 나를 껴안았다. 얘도 생각보다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아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오세훈은 더 이상 목발을 짚지 않아도 되었으며, 운전을 빼면 대체적으로 모든 것을 혼자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른쪽 다리에 반깁스를 한 것이 전부였는데, 자주 자주 땀이 차니 근근히 새 붕대를 감아주라는 주치의의 지시가 있었다.
아주 늦은 밤이었다. 자다가 얼떨결에 잠이 깨버린 나는 목이 말라 1층으로 내려갔는데, 모든 불이 꺼진 거실에서 텔레비전이 무음 모드로 켜져 있고, 소파엔 파자마를 입고 있는 오세훈이 앉아 있었다. 처음엔 귀신인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익숙한 뒷통수인 걸 깨닫고 잠이 덜 깬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를 불렀다.
"야....뭐해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너야말로."
"나? 자다 깼지...어, 붕대 가는거야? 내가 해줄까?"
"됐어 꺼져."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가 다리 붕대를 갈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조금 버거워보였다. 내가 해줄까? 역시나 꺼지란 소리가 돌아왔지만 척하면 척 알아듣는 집요정 아닌가. 나는 그의 옆에 앉아 붕대를 뺏어들었다. 다리 줘. 됐다고. 주시죠? 아 씨... 오세훈이 마지못해 다리를 내놓았다.
"와, 오세훈 너 발 냄새."
"냄새 안 나거든?"
"넝담"
"다친 발로 대가리 찍혀볼래?"
"어우 야, 너 말로 따지면 지금 몇사람이나 죽었겠다. 말 좀 이쁘게 해."
나는 붕대를 감다 말고 오세훈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튕겼다.
오세훈은 살짝 충격받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지금 장난하냐? 아랑곳않고 붕대를 감자, 꿀밤이 돌아왔다. 아씨!! 오세훈 니 주먹 존나 아파!! 눈물이 찔끔 난 나는 짜증이 나서 그를 양껏 째려봤다.
"그러게 집요정이 어디 주인을 때려?"
"...씨..."
" 다 감았으면 들어가서 자라."
"...넌? 왜 아직까지 안 자?"
"알 거 없어."
"나 너한테 꿀밤 맞고 잠이 다 깬다 나쁜 놈아."
"꼬셔죽겠네."
"나도 티비 보다가 잠 오면 들어가야지. 볼륨 좀만 키워봐."
나는 오세훈의 반대편에 머리를 두고 옆으로 길게 누워 티비를 바라봤다. 웬일로 군말없이 텔레비전 볼륨을 조금 키운 오세훈은, 내가 다리를 오므린 채 자기 쪽으로 뻗게 되자 툭, 내 다리를 한대 쳤다.
"이 족발 안 치워?"
"족발 아니거든요. 그리고 안 닿게 해주잖아! 너 편히 앉으라고."
"집요정 요새 제대로 싸가지 밥 말아먹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티비에 재방송으로 방영되고 있는 아주 옛날 드라마 프렌즈를 보면서 작게 웃었다. 덜 떨어지고 여자 좋아하는 캐릭터를 맡은 배우의 대사가 너무 웃겨서 근근히 웃었고, 그 때마다 오세훈이 답지 않게 조금씩 웃는 것도 신기했다.
"야, 오세훈. 나 너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봐."
"웃으면 안되냐?"
"너 맨날 비웃는 거 밖에 못봤는데..."
"집요정 너 지금 누운채로 나 보면서 말하는 거 좆나 못생긴 거 알지. 턱이 대체 몇겹이야."
"에라이씨, 말을 말자."
오세훈은 웃다가 살짝 웃음기를 거두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아무튼 우리는 한동안 긴 소파에 같이 앉아 (물론 나는 누운 상태지만) 말 없이 티비를 봤다.
그렇게 얼마나 본 걸까, 화면에서 눈을 뗀 나는 별 생각 없이 오세훈을 쳐다봤고, 어느새 소파에 살짝 머릴 기대고 잠들어있는 그를 발견했다.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갈텐데. 깨우려고 했지만 어쩐지 조금 깊게 잠든 것 같아서 그러면 안될 것 같다는 직감이 왔다. 나는 주변에 있던 담요를 조심스레 그에게 둘러주었다. 텔레비전 전원을 끄고 나니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그렇게 그를 지나쳐 계단 쪽으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내 소매를 누군가 조심스레 붙들었고, 어둠 속이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그게 오세훈임을 알아차렸다. 깜짝 놀라서 심장마비가 올 것 같았지만, 이내 진정을 한 뒤 왜 그래? 하고 그에게 물었다. 내가 움직이는 소리에 오세훈이 잠이 깬 것 같았다.
간간히 들어오는 달빛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암전이어서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고, 사뭇 입을 떼지 못하는 그가 한참을 망설이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세훈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야 집요정."
"......."
"미안한데."
"....."
"..나 불면증 있어."
"....."
"지금 며칠 째 잠 설치는 중이니까."
"....."
"...아까처럼 내 옆에 좀 있어라."
어? 어...그래...나는 얼떨결에 대답하면서도 큰 이질감을 느꼈다. 이게 내가 알던 오세훈의 모습이 맞나? 내 몫의 담요를 챙겨 그의 옆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그는 내가 완전히 누울 수 있게 더 끝으로 붙으려 했지만 나는 괜찮으니 편하게 앉아도 된다고 속삭였다.
웅크려 누워서 한 소파에 앉아있는 그를 보니 옅은 달빛으로 어느새 또 눈을 감은 오세훈의 옆얼굴이 보였다.
나는 괜스레 아까 오세훈이 붙잡았던 소매를 조심스레 부여잡았다.
너무 낯설었다. 매일같이 나를 쪼아대기만 하던 그가 뭔가 조금 더 나한테 자기를 보여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놀라움에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이라 생각했다. 남들은 모르는 오세훈의 치부에 대해, 또는 내가 그런 부분에서 그에게 모성애 같은 걸 느낀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작게 떨려오는 몸을 움츠리며 나도 곧 잠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오세훈은 온데간데 없고 내가 덮어주었던 그의 담요가 이중으로 내 몸 위에 덮혀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윌리스 412번가의
비밀
"Blaire, isn't it awkward..?"
(블레어, 이거 좀 어색하지 않아?)
"No, you look so gorgeous! Please do that for me too!"
(아냐 너 너무 예뻐! 나도 그거 해주라)
할로윈이 되자, 정말 대낮부터 사람들이 코스튬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을 본 나는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저녁 쯤에 블레어가 내 방에 들어와서 함께 나갈 준비를 했는데 오랜만에 화장을 공 들여 한 나는 내 얼굴에 어색함을 느꼈다. 드레스도 생각보다 가슴이 좀 파여 있어서...아...좀 싫은데. 나는 또 걱정이 많아졌다.
하지만 성격 좋은 블레어는 예쁘다며 자기 얼굴에도 화장을 해달라며, 역시 한국 메이크업 스타일이 최고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내 화장을 마친 뒤 블레어의 전담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어 유튜브로 섭렵한 할리퀸 메이크업을 블레어의 얼굴에 얹어주었다.
"Iju, you looks so pretty!"
(이주야 너 너무 예뻐 지금)
"No way...stop saying like that Blaire"
(아니야, 그러지마 제발)
블레어가 하도 칭찬에 칭찬을 더 하는 바람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던 나는 후다닥 바깥 화장실로 대피해서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벨 머리를 하기에는 조금 오글거리는 감이 없잖아 있어서 그냥 반묶음 머리를 하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블레어는 준비 다했으려나?
아오 진짜 왜 굳이 클럽을 간다 했지 오세훈은...세훈을 원망하며 방 안에 들어가려는데 하필이면 딱, 나는 정장을 입고 방에서 나오던 오세훈과 마주쳤다. 나는 얼른 얼굴을 가리며 엉겹결에 인사했다.
"아...안녕?"
"....니가 꾸민다고 벨이 되겠냐."
"에이씨, 저리 비켜."
"존나 구려. 옷이 그게 뭐야?"
"알 바야, 저리 꺼지라니까."
"블레어! 김이주 오세훈! 얼른 나와!! 차에 시동 걸어놨으니까!! Blaire, it's time to go!"
때 마침 아래층에서 김종인이 우릴 부르는 소리가 났고, 준비를 마친 블레어가 방 안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김종인네 차 앞까지 왔다. 하지만, 김종인이 자신은 가는 길에 세차를 한 번 하고 갈 예정이라며 나와 세훈은 따로 타고 오라고 지시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아직 반깁스를 한 오세훈을 대신 해 또 한 번 운전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출발해."
"...왜 차가 안 가지..?
"야 이 멍청한 집요정아."
엑셀 대신 또 한 번 브레이크를 즈려 밟고 있던 나는 오세훈한테 욕을 한 바가지 먹고 정신을 차렸다. 다운타운으로 가는 길에 세훈은 한껏 볼륨을 높여 음악을 틀었는데, 나도 모르게 흥이 나긴 했던 모양이다. 무의식적으로 어깨 춤을 들썩거리며 운전을 하자 오세훈이 픽-하고 비웃는 소리를 낸다.
왜 뭐, 난 흥도 못 내냐?
꼴 보기 싫으니까.
ㅅㅂ 시비 고만 좀 터세요.
운전이나 똑바로 해.
한 바탕 또 싸울 게 뻔해서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클럽가면 스트레스나 존나 풀어야지.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다운타운 유명 클럽은 한마디로 인산인해였다. 별의별 코스튬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망아지가 뛰어다니기도 하고, 대왕 스펀지밥이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클럽의 대기 줄은 정말 너무너무 길었는데, 다행히 우리끼리 돈을 모아 테이블을 잡았기에 금세 입장할 수 있었다. 사실 한국에서 클럽을 한 두 번 가본 게 전부였던 나는 외국 클럽의 분위기에 할 말을 잃었다. 백인 여자애들이 대부분 빅시 속옷만 입고 엉덩이를 흔들고 있어서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몰라 멘붕이 왔다.
"We need some shot!"
(우리 얼른 샷 한잔 하자!)
블레어는 테이블에 비치되어 있던 술을 가득 따라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안 그래도 나는 술 없이는 춤을 출 깡이 없어서 정신없이 샷을 받아먹었다. 김종인과 블레어는 서로 러브샷을 존나 때리고 이미 알딸딸해진 모양이었다. 클럽 안이 너무 시끄러워서 대화는 커녕 소리를 겨우 질러야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화를 포기하고 몇 번을 연속으로 들이켰다.
옆에 앉아있던 오세훈이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한마디했다.
"술에 미쳤냐?"
"......"
너 그러다가 저번처럼 그러면 뒤져."
"즉당히 마실 거니까 신경 좀 꺼주세요."
"야, 나 여친이랑 춤추고 올게!"
김종인이 들뜬 블레어를 데리고 스테이지로 나가자 오세훈과 나는 더더욱 할 말이 없어져 서로 앞만 보고 홀짝 홀짝 술을 들이켰다. 내가 그렇다고 오세훈과 춤 추기에는 어...오세훈 표정이 좇같아보여서 관두었다. 나는 사람들 구경을 했는데, 은근히 한국 사람도 많이 보였다.
"저희 여기서 술 좀 받아먹어도 될까요?"
그 중에 캣우먼과 경찰 코스프레를 한 한국 여자 두 명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나에게 허락 받는 투였지만 두 명 다 눈길은 오세훈에게 가있었다. 별 생각이 없던 나는 그러세요, 라고 하고 오세훈에게 눈짓을 했다. 나 스테이지에 다녀올게! 뒤를 돌아보니 여자 둘은 어느새 오세훈의 양 옆에 앉아 열심히 말을 걸고 있었다.
그의 대답은 뒤로 하고 나는 클럽 중앙을 헤집어나갔다. 적당한 비트에 술도 취했겠다 흥이 좀 나서 몸치지만 얼렁뚱땅 춤을 추려고 했다. 들고 나온 샷을 한 잔 더 비우는데,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저기 한국분이세요?"
"그런데요?"
"너무 예쁘셔서 그런데, 저희랑 같이 놀아요."
모르는 한국 남자 두 명이 내게 미소를 지으며 같이 놀자는 제안을 했다. 얼굴도 반반하게 생긴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같이 춤을 췄다.
한 삼십분 정도 땀이 조금 날 정도로 뛰어놀아서 목이 좀 말랐고, 남자 중 한명이 술을 사오겠다며 바 쪽으로 걸어갔다.
곧 이어 그 남자가 돌아왔고, 총 세 잔의 잔을 나와 제 친구한테 하나씩 나눠줬다.
"여기, 샷 한 잔 드세요."
"감사합니다"
목만 조금 더 축이고 놀려고 얼른 한 모금 마시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거칠게 내 잔을 낚아채 바닥에 던져버렸다. 유리잔이 바닥에 큰 파찰음을 내며 산산조각 나버렸다.
뒤를 돌아보니 오세훈이 개빡친 표정으로 나타나 술을 가져온 남자의 멱살을 거칠게 잡았다. 나는 영문을 몰라 넋을 잃고 말았다.
"얘 잔에다 뭐 탔냐.”
"...네?!"
"다 봤어 병신아. 개새끼 둘이서 여자애 하나 데리고 뭐하려고?”
"죄,죄송합니다 그냥..!"
"미국에 다시는 발 못 들이고 싶은가봐."
"죄송합니다, 실수,"
"좋은 말로 할 때."
"...."
"아가리 여물고 꺼져."
니 발정난 면상 박살내기전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쳐다보자, 오세훈은 상황파악이 덜 되어 충격에 휩싸인 나를 끌고 곧장 클럽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곧장 나를 차에 태워 완치도 되지 않은 다리를 가지고 빠른 속도로 운전을 했다. 아까 나랑 같이 옆에 있어서 술 좀 마셨을텐데...오세훈에 비해서 내가 훨씬 많이 마신 건 알지만 그래도 얘가 잔을 들긴 했던 기억이 나긴 나서 걱정이 됐다.
"오세훈 너 술 마셨잖아.."
"닥쳐."
"너 그러다 사고나면,"
"샷 한 잔 마셨으니까 닥치라고."
오세훈의 기분이 너무 좋아보이지 않아서 더 이상 뭐라 말 할 수 없던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제야 머리에 상황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는 방금, 오세훈이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약 탄 술을 마시고 어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거. 손이 떨려왔다. 심장도 뒤늦게 미친듯이 뛰었다. 정말 방금 너무 너무 위험한 상황이었구나....겁이 뒤늦게서야 엄습했다.
"기다려."
집 앞에 도착하자 오세훈은 기어를 내리고 시동을 껐다. 내가 차에서 내리려고 안전벨트를 풀려 하자, 기다리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곧 그는, 나에게 미친듯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김이주 너 미쳤어?"
"....."
"주는대로 그걸 넙죽넙죽 받아먹어?"
"....."
"유학 와서 길바닥에서 죽어갈 일 있어?"
오세훈이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 내 이름을 부르면서, 나를 무서운 눈으로 똑바로 노려보며 마구 소리친다. 첫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뭐라하는지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눈물이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아까 전의 상황과 지금 나에게 마구 화를 내는 오세훈의 모습이 뒤섞여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겁도 나고, 화도 나고, 억울했다.
그래서 나 역시 울면서 소리질렀다. 그러자 오세훈이 화를 내다가 말문을 잃고 나를 바라봤다.
"그게 내 잘못이야?!"
"...."
"나쁜 짓 한 건 그 새끼들 짓이지 내가 뭐 잘못 한 거 있냐고!"
"......"
"제일 무서운 건 난데 왜 나한테 넌 지랄인데!"
물론 오세훈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 맞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도무지 겁에 질려 진정이 되지 않아 미칠 지경이었다.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나왔고, 그런 나를 보던 오세훈은 노려보던 시선을 곧 거두었다. 이내 그의 손이 내게로 다가왔다.
나를 동여맸던 안전벨트를 풀고, 그대로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건 확실히, 나를 위로해주려는 손짓이었다.
나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꼭 안고 천천히 등을 토닥이며 중얼거렸다.
"알아, 미안."
"......."
"네 잘못 아니야."
"......"
"아닌 거 아는데,"
"....."
"그냥."
"....."
"그냥...."
"....."
"...네가 내 친구라서 그래."
그가 한참을 고민하다 한숨처럼 토해낸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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