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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에 닿지 못하고 떠돌다 간 두 조선인 음악가 이야기
민족과 국경을 허무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광시곡
『랩소디 인 베를린』은 우리가 방관했던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삶을, 음악예술과 시공을 넘나드는 액자식 구성을 통해 변주한다. 18세기 말 독일 바이마르와 평양, 그리고 21세기 독일 베를린, 일본, 한국을 잇는 거대한 배경 안에서, 작가는 자유로운 예술혼과 인간애,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소설에서도 소외되었던 디아스포라, 즉 국외자들의 존재 의미와 아픔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간결하고 정제된 언어로 해부하며 독자의 미의식과 양심을 동시에 두드리고 있다.
저자는 바흐의 오르간 곡을 즐겨 듣다가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파이프오르간이 연주되는 동안 그 거대한 악기 뒤에서 바람을 넣는 이들이 얼마나 고생스러울지 헤아리다가, 임진왜란 때 나가사키에서 중부독일로 팔려 간 조선인 악공의 후손인 풀무꾼 캐릭터를 떠올린 것이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를 연상시키는 유명 음악가 ‘아이블링거’에게 발탁되어 신분이 해방되고 그와 경쟁하며 대등한 음악가로 성장하는 입지전적인 인물인 ‘힌터마이어’. 작가의 상상력은 독일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자라난, 언어도 외양도 모두 독일인인 힌터마이어의 핏줄 깊이 흐르는 조선인의 피에 가닿는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디아스포라들의 이야기가 자유로운 형식 속에 변주되는 광시곡, 즉 랩소디가 되어 역사와 음악, 민족과 사랑 속에 울려 퍼진다. 이 작품은 결국 아버지와 국가와 민족과 혈통이란 오늘의 우리에게, 그리고 방치된 한국인 디아스포라들의 아픔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되짚는 이야기이다. 변방의 역사와 낮은 곳에서 숨죽이며 떠돌던 개인의 삶이 모여 울려 퍼지는 거대한 광시곡이다.
작가 한 마디
삶과 죽음, 존재를 보는 시선이 조금 바뀐 것 같아요. 무섭고 피하고만 싶었던 죽음을 이제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소멸`이나 `상실`이 삶의 또 다른 면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프롤로그
1. 평생 가닿고자 했던 곳
2. 삶이여 헐벗으라
3. 먼셀 표색계 5P 3/10
4. 배초향 피었던 자리
5. 그런 애였니?
6. 빌헬름 도안연구소
7. 빛이 내게로
8. 알비노니 아다지오
9. 벌거벗은 생명 1
10. 세월이 가면
11. 벌거벗은 생명 2
12. 강 이편과 강 저편
13. Das ist mein
14. D장조 콘체르트
에필로그
작가 후기
18세기 말 독일 바이마르와 평양, 그리고 21세기 베를린, 일본, 한국을 잇는
두 천재 음악가의 불꽃 같은 삶!
자유로운 예술혼과 시공을 초월한 인간애, 먹먹한 반전이 심장을 울린다
저는 이 소설이 작중 화자, 하나코의 소설이 되길 바랐습니다.
국가 자본 민족 인종 종교 등으로 에둘러진, 추상의 공동체에 가두거나 갇혔던 근현대사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지점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코는 이 소설에서 종종 공간적 개념으로 등장합니다.
세계는 몇 개의 블록으로 재편되고 관세 장벽이 없어지며 통화(通貨)와 언어가 통일되어 갑니다. 세상은 좁아지고, 지구 반대편 이웃을 만나는 속도는 무척이나 빨라졌습니다. 우리를 가로막던 과거의 경계들은 허물어집니다. 그러나 과연 가둠으로써 갇히는 시절이 끝났는지를, 돌이켜 묻고 싶었습니다. 피부로 느꼈던 물리적 장벽은 없어졌습니다만, 우리를 더 크게 가두려는 전지구적 화폐의 움직임은 마침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미래의 불행한 디아스포라로 불러올지도 모릅니다.
- 구효서(「연재를 종료하며」에서)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가 구효서의 신작 장편소설
다채로운 주제를 늘 새로운 소설 양식을 통해 선보여 온, 우리 시대 대표 작가 구효서의 신작 장편소설 『랩소디 인 베를린』(Rhapsody in Berlin)이 문학에디션 뿔에서 출간되었다. 2009년 7월부터 2010년 1월까지 《문학웹진 뿔》에 연재되어 6개월간 매회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작품과 작가에 반한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팬카페를 결성한 화제작이다. 『랩소디 인 베를린』은 우리가 방관했던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삶을, 음악예술과 시공을 넘나드는 액자식 구성을 통해 변주한다. 18세기 말 독일 바이마르와 평양, 그리고 21세기 독일 베를린, 일본, 한국을 잇는 거대한 배경 안에서, 작가는 자유로운 예술혼과 인간애,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소설에서도 소외되었던 디아스포라, 즉 국외자들의 존재 의미와 아픔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간결하고 정제된 언어로 해부하며 독자의 미의식과 양심을 동시에 두드리고 있다.
잊히고 버려진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삶을 음악 예술과 변주하다
일본인 여인 하나코는 40여 년 동안 연락 두절되었던 첫사랑 야마가와 겐타로(한국명 김상호)의 행적을 쫓아 독일로 향한다. 재일교포 2세이자 재독음악...18세기 말 독일 바이마르와 평양, 그리고 21세기 베를린, 일본, 한국을 잇는
두 천재 음악가의 불꽃 같은 삶!
자유로운 예술혼과 시공을 초월한 인간애, 먹먹한 반전이 심장을 울린다
저는 이 소설이 작중 화자, 하나코의 소설이 되길 바랐습니다.
국가 자본 민족 인종 종교 등으로 에둘러진, 추상의 공동체에 가두거나 갇혔던 근현대사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지점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코는 이 소설에서 종종 공간적 개념으로 등장합니다.
세계는 몇 개의 블록으로 재편되고 관세 장벽이 없어지며 통화(通貨)와 언어가 통일되어 갑니다. 세상은 좁아지고, 지구 반대편 이웃을 만나는 속도는 무척이나 빨라졌습니다. 우리를 가로막던 과거의 경계들은 허물어집니다. 그러나 과연 가둠으로써 갇히는 시절이 끝났는지를, 돌이켜 묻고 싶었습니다. 피부로 느꼈던 물리적 장벽은 없어졌습니다만, 우리를 더 크게 가두려는 전지구적 화폐의 움직임은 마침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미래의 불행한 디아스포라로 불러올지도 모릅니다.
- 구효서(「연재를 종료하며」에서)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가 구효서의 신작 장편소설
다채로운 주제를 늘 새로운 소설 양식을 통해 선보여 온, 우리 시대 대표 작가 구효서의 신작 장편소설 『랩소디 인 베를린』(Rhapsody in Berlin)이 문학에디션 뿔에서 출간되었다. 2009년 7월부터 2010년 1월까지 《문학웹진 뿔》에 연재되어 6개월간 매회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작품과 작가에 반한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팬카페를 결성한 화제작이다. 『랩소디 인 베를린』은 우리가 방관했던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삶을, 음악예술과 시공을 넘나드는 액자식 구성을 통해 변주한다. 18세기 말 독일 바이마르와 평양, 그리고 21세기 독일 베를린, 일본, 한국을 잇는 거대한 배경 안에서, 작가는 자유로운 예술혼과 인간애,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소설에서도 소외되었던 디아스포라, 즉 국외자들의 존재 의미와 아픔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간결하고 정제된 언어로 해부하며 독자의 미의식과 양심을 동시에 두드리고 있다.
잊히고 버려진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삶을 음악 예술과 변주하다
일본인 여인 하나코는 40여 년 동안 연락 두절되었던 첫사랑 야마가와 겐타로(한국명 김상호)의 행적을 쫓아 독일로 향한다. 재일교포 2세이자 재독음악가였던 겐타로, 다시 말해 토마스이기도 하고 김상호이기도 한 그가 고향도 조국도 아닌 독일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면서 ‘평생 가닿고자 했던 곳, 하나코.’라는 의미심장한 메모를 남겼기 때문이다.
느리고 높낮이 없는 저음 일색. 오래 들으면 귀가 눅눅했다. 장맛비처럼 그치지 않았다. 바이마르 대공가의 서늘한 지하묘소에서, 라인고우 언덕에서 수제 백포도주를 마시며, 힐데스하임역 아카시아 나무 아래서, 베를린 쿠담 거리 어둡고 음습한 지하철 플랫폼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긴 이야기를 글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26쪽)
소설의 첫 번째 화자 이근호는 하나코의 통역을 맡으면서 점차 김상호의 죽음 뒤에 얽힌 거대하고 가슴 아픈 비밀들을 마주하게 된다. 일본과 한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해갈할 수 없는 그리움을 안은 채 제3국 독일에서 살아가야 했던 작곡가 김상호. 각각 제2, 제3의 화자로 기능하는 두 문서 ‘토카타 운트 푸가(Toccata und Fuga)’와 ‘랩소디 인 베를린(Rhapsody in Berlin)'은, 1770년대 바로크 시대 독일 풀무꾼에서 비범한 음악가로 성장한 힌터마이어의 혈통과 생애, 그리고 1944년 한 유대인 수용소에서 탄생한 ‘이디시어 랩소디’가 그와 무관하지 않음을 서서히 드러낸다. ‘시도 때도 없이 음악이 사무쳤을 뿐인’ 그들,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타국에서 잊힌 그들은 디아스포라 음악가였다.
“국적은 한국이지만, 토마스는 한국말 몰라요. 일본에서 살았고 독일에서 살았죠.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살고 싶은 곳에서 살지 못하는 거죠. 떠도는 것도 아니면서 떠돌지 않는 것도 아니죠. 영원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음울한 운명을 불치의 통증처럼 안고 사는 사람들. 물론 그들 잘못은 아니죠…….”(206~207쪽)
‘분산(分散), 이산(離散)’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디아스포라(Diaspora)’의 사전적 의미는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본래 팔레스타인을 떠나 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강요에 의해 터전을 잃고 떠도는, 갇힌 동시에 추방된 사람들 모두를 이르는 보통명사가 되어버렸다. 이념과 이념이 충돌하고 디아스포라가 겪는 고통의 진원지였던 ‘베를린’에서 펼쳐지는 이 광시곡(狂詩曲)은 곧 랩소디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랩소디 인 블루’로 유명한 작곡가 거쉬인이 작곡한 ‘파리의 아메리카인’에서 흘러나오는 이방인으로서의 정서 잶한 제목의 한 바탕을 이루었다.
저자는 바흐의 오르간 곡을 즐겨 듣다가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파이프오르간이 연주되는 동안 그 거대한 악기 뒤에서 바람을 넣는 이들이 얼마나 고생스러울지 헤아리다가, 임진왜란 때 나가사키에서 중부독일로 팔려 간 조선인 악공의 후손인 풀무꾼 캐릭터를 떠올린 것이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를 연상시키는 유명 음악가 ‘아이블링거’에게 발탁되어 신분이 해방되고 그와 경쟁하며 대등한 음악가로 성장하는 입지전적인 인물인 ‘힌터마이어’. 작가의 상상력은 독일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자라난, 언어도 외양도 모두 독일인인 힌터마이어의 핏줄 깊이 흐르는 조선인의 피에 가닿는다.
마지막 숨 토하듯, 아버지는 얘기했다. 지구 반대편 머나먼 나라. 돌아갈 수 없는 조상의 땅을 준Sun이라 했다. 백칠십 년 동안 기둥과 설주에 못 끝으로 새겼던, 옷섶 가장자리에 바늘로 수놓았던, 그리고 힌터마이어가 악보 끝에 적는 그림이, 그 땅의 글자요 이름이라 했다.(274쪽)
한편 재일 한국인 2세로 일본에서도 국외자인 디아스포라로서 살아가던 겐타로는 결국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고 하나코와의 첫사랑에 실패하는 끔찍한 경험을 한 뒤 독일로 음악 유학을 떠나지만, 그곳 또한 타지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태어나서 진정한 조국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배척받고 소외당할 때, 오히려 그는 상대적으로 살아보지 못한 조국에 대한 상실과 그리움을 더 키울 수밖에 없다.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강제당하는 삶에 태생적으로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만 살면서도 조국을 그리워했으나 곧 분단된 조국 앞에서 그는 방황하고, 양쪽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고통받는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25년을 살았고, 평양에서 잠깐, 한국에서 17년을 갇혀 살았으며, 그 뒤 20년째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건대 그는 어디에도 살고 있지 않다. 일본과 북한과 한국과 독일. 어디에도 속한 적 없었다. 그가 서 있던 곳은, 어디서나 게토였다. / 게토 특유의 벽과 대문은 사라졌어도 그곳에 나뉘어 갇히는 자들은 언제나 있었다. 갇힌 자가 있다는 건 가두는 자가 있다는 거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 모두는 갇힌 자가 되었다. 너나없이, 가두면서 갇히는 거대한 궁지(窮地). 이것이 우리의 슬프고도 어리석은 근대이며, 작센하우젠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383쪽)
얼핏 윤이상과 동베를린을 떠올리게 하는데, 주인공 겐타로는 소위 ‘동백림 사건’(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는 독일과 프랑스에 거주하는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 교육을 받으며 적화 활동을 했다고 주장했다.)이라 불리는 이 사건 이후에 벌어진 단독 사건으로 한국에 소환되어 고문과 재판을 받으며 17년 간 옥살이를 하다가 석방된다. 이후 다시 독일로 가서 20년 동안 생을 이어가다가, 마치 ‘프리모 레비’처럼 의문에 휩싸인 자살을 하고 마는 것이다. 김상호의 죽음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하는 소설은 폐부를 찌르는 먹먹한 반전을 지나 그에 대한 답변으로 끝맺지만, 결코 뚜렷하고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베를린으로 돌아온 뒤 그는 조국도 민족도 결국 말일 뿐이라며 음악에 전념했소. 예술가로서 자신에게 남은 조국은 이제, 음악, 그것뿐이라며. 멋진 말이었지. 정말 많은 곡을 열심히 만들었소. 실은 미친듯이었지. / 토마스는 조국뿐 아니라, 종당엔 음악마저도 음악일 뿐이라 여겼던 것 같소. 말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는 거지.(456~457쪽)
겐타로가 고초를 겪는 이유는, 통일 독일 이전 시기에 북한대사관을 통해서 모종의 ‘문서’를 입수하고자 평양을 방문했다가 간첩죄로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가 얻으려 했던 문서는 독일 바로크 시대에 활약했던 음악가 힌터마이어의 일대기에 대한 문서, 즉 ‘토카타 운트 푸가’였고, 이 지점에서 200여 년의 세월을 지나 두 디아스포라는 정신적으로 조우한다.
힌터마이어 악보에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조성(調性) 없는 악보를 발견하고 토마스는 경악했다. 당시의 화성과 대위법에서 종종 벗어나는 기보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기보자의 실수나 미숙의 결과가 결코 아니었다. 토마스 자신의 음악이 무려 200년의 유래를 갖는다는 방증이었다.(89쪽)
이 연결 고리는 일본 나가사키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가사키 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조선 침략의 전초 기지로, 조선인 악공 및 도공 등을 포함한 많은 포로들을 잡아 집결해 놓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나가사키에서 일본 각지 및 스페인, 포르투갈 노예 상인에게 팔려 나간 조선인 노예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엄연히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게 유럽에 끌려간 조선컀 노예들이 이탈리아에 걸쳐 남부 독일에 이르기까지 현지인과 결혼해 자식을 낳아 살았으리라는 가능성에 작가 구효서의 호?심과 상상력뿐만 아니라 문제의식이 조응했다. 17~18세기에 당시 조선인의 피가 흐르는 한 인물이 중부 독일에 살아갔다는 근거가 바로 일본 나가사키이다.
너무도 먼 나라에서 날아온 지친 새가 검은 숲에 내려앉은 얘기. 면면히 자손들이 태어나고 죽어간 얘기. 한땀 한땀 경작지를 넓혀 가던 조상들 얘기. / 멀고 아득한 옛 이야기들은 혹은 슬프고 혹은 애틋했다. 힌터마이어는 아버지 곁을 좀처럼 떠나지 못했다. 먼 나라는 상상의 땅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날아온 지친 새란 슈바르츠발트에 처음 정착한 이방의 조상이었다. / 날아온 게 아니라 배를 타고 왔다는 것, 여러 나라를 거치고 거쳐 마침내 당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인에게서 도망쳐 수십 일 굶고 걷고 노숙하며 간신히 피해 숨어든 곳, 슈바르츠발트. / 슈바르츠 숲에서 마침내 조상은 살 수 있었다. 대신 짐승으로 살아야 했다. 숲은 너무도 크고 깊어 종일 빛이 들지 않았다. 로마 군병마저 외면한 숲이었다. 사람의 매와 학대를 피할 수 있었으나 사나운 야생의 짐승과 대적해야 했다. 그것들보다 더 거친 짐승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272~273쪽)
이렇게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디아스포라들의 이야기가 자유로운 형식 속에 변주되는 광시곡, 즉 랩소디가 되어 역사와 음악, 민족과 사랑 속에 울려 퍼진다. 이 작품은 결국 아버지와 국가와 민족과 혈통이란 오늘의 우리에게, 그리고 방치된 한국인 디아스포라들의 아픔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되짚는 이야기이다. 변방의 역사와 낮은 곳에서 숨죽이며 떠돌던 개인의 삶이 모여 울려 퍼지는 거대한 광시곡이다.
철저한 취재와 작가정신으로 일궈낸 현장성, 소설이 선사해야 할 문학성과 읽는 즐거움 성취
전작인 대산문학상 수상작 『나가사키 파파』에서도 소설 집필만을 위해 일본으로 향했던 작가는, 이번에도 독일 지역을 가로지르는 현장 취재를 통해 현지의 생활과 풍광을 실감 나게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음악’을 몰랐기에 이 소설을 쓸 수 있었다고 하지만, 클래식음악과 바로크 시대 독일의 생활상, 무형인 음악을 익히고 만들고 연주하는 과정은 매우 사실적이다. 동시에 들리는 음악을 보이듯 생생히 표현해 공감각적인 정서를 환기하는 문학적 치환 능력은 등단 20여 년 내공을 지닌 작가의 필력을 가늠하게 만든다.
초반부터 경쾌하게 터져 나오는 3악장, 다시 알레그로. 1악장의 생기와 2악장의 봄볕이 어우러지며 완숙한 봄의 정경을 눈앞에 쏟아냈다. 아직은 여려 수줍지만 제 모양을 갖춘 신록이, 봄 햇살을 투과하며 바람에 나부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활기찬 만물의 약동. 멈칫거리던 걸음이 빨라졌고 세찬 바람은 훈기에 흩어졌으며, 어색하고 두렵던 생명의 움직임들이 어느덧 되돌아온 산들바람으로 신명을 찾기 시작했다.(437쪽)
2차세계대전 당시 수용소와 안기부 고문실에 대한 묘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등단 이후 오로지 소설만으로 살아온 작가의 집필 자세와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음악 전공이잖아, 자네. 그래서 말인데, 어떤 걸 사 주어야 하나? 작은 아이가 바이올린을 사달라고 난리거든. 예대를 가겠다는 거야. / 죽일 듯 달려들어 겐타로를 벽으로 몰아붙이던 남자였다. 목을 조르고 복부에 주먹을 퍼붓던. 불과 5분 전 일이었다. 뺨을 꼬집고 근무철(勤務綴)로 쉴 새 없이 머리를 내려치던 남자는 제풀에 화가 나 벌떡 일어서곤 했다. 제풀에 화내는 것도 나름대로 터득한 그들만의 비결이었다.(362쪽)
웹진 연재 당시 독자들은 제각각의 사연을 지닌 채 고군분투하는 인물군상 하나하나에 깊이 빠져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사무쳤던’ 음악 곁을 떠나기가 두려워, 이용당하면서도 아이블링거 곁에 남았으나 음악과 종교에 대해서는 늘 새롭고 자유롭고 드넓은 시각을 양보하지 못했던 힌터마이어의 열정, 아이블링거와의 근친상간에 놓여 있었고 부서질 듯 희미하고 연약하고 조용했지만 뜨거운 내면을 지닌 여인 레아, 치기와 욕망에 사로잡혀 친누이와 힌터마이어를 농락했지만 끝내 음악의 영성에 굴복해 스스로 표절을 고백한 아이블링거, 늘 안주하지 않고 정체성과 음악을 고민하던 깊고 순수한 영혼을 지닌 김상호, 테러를 당해 한쪽 다리를 잃고도 늘 광대처럼 유쾌했던 슈타인도르프(“멋진 글을 하나 썼지. 그것 때문에 쫓기는 몸이 되었다오. 국가나 경찰은 내 글이 인신공격이나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점만 인정하고 보호할 뿐, 내 몸뚱어리를 하루 24시간 지켜주진 않지. 그래서 다리 하나가 먼저 저승으로 날아가 버렸다오.”(249쪽)), 그리고 ‘당연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당당하고 까칠하지만 사려 깊고 영민한 멋진 할머니 하나코와 점차 그들 모두에게 감화되는 이근호까지. 생생히 살아 숨쉬며 자신의 시대에서 자기 몫을 해낸 인물들로 인해 이 작품은 거대하고 무거운 ‘의미’의 덫에 빠지지 않고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제공하는 소설의 삿락적 기능마저 거머쥐었다.
나로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흐름이 자네의 손끝에서 흘러나왔어. 나는 어째서 지금껏 그러한 것을 상상할 수 없었을까. 나는 듣고, 보고, 익힌 것만 상상할 수 있었던 거네. (……) 자네의 것은 바깥에서 오는 거였어. 자네도 모를 바깥 어디에서. 하늘, 빛, 구름, 바람 같은 곳으로부터. 나는 그런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이미 내 안에 가득 찬 것이 있었지. 열의와 자부심으로 수십 년 배우고 익힌 것들. 그러니 내겐 원시라는 게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처음을 잊었고,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거라네. 바깥을 스스로 차단하고 자만의 어둔 그늘 아래 웅크리고 있다네. 계단에 숨어 자네의 무음연주를 아프게 들을 때처럼……. 자네는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지. 자네에겐 바깥의 것이 거침없이 들어와 원시의 몸을 끓게 하고, 소용돌이치는 소리로 살아나게 한다네.(147쪽)
산골짜기’를 뜻하는 이름을 지닌 힌터마이어는 조상들로부터 전해 들은, 깊은 골짜기에 새가 날아온다는 낯선 나라 이야기를 자주 들려준다. 가보지 못한 동쪽 어느 나라에 대한 판타지가 곁들인 그의 이야기에서는 우리 민족이 지닌 성정이 아름다운 설화와 우화로 거듭나고 있다.
동방에는 또 어마어마한 새가 있는데, 한 사람이 그 위에서 평생을 내달아도 끝에 닿을 수 없을 만큼 긴 날개를 가졌다고 합니다. 날갯짓 한 번에 5만 마일을 난나고 하니까요. 이 새는 물고기가 변해서 된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 물고기도 어마어마하게 컸겠지요. 이 새가 한 번 날면 날개가 하늘을 가려 며칠이나 걷히지 않는 구름과 같고, 큰 바람을 일으켜 바다의 풍랑 또한 5만 마일에 이르도록 거칠게 뒤덮입니다.(254~255쪽)
그 나라 온 백성은 흰옷을 입었습니다. 춘하추동 구별 없어 한여름에도 저잣거리는 온통 눈 덮인 듯 하얬지요. 어디서나 노래와 춤을 즐겼습니다. 논에서 밭에서 노래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 병을 치료할 때조차 춤추고 노래하며 악기를 두드렸습니다. 사원에도 종과 북과 징이 있었고, 수도승들은 긴 소매 하늘로 젖히며 느릿느릿 오래오래 춤추었습니다. 온 백성 모든 이의 영혼에 욕심 아닌 아름다운 가락이 흘렀습니다.(305~307쪽)
예술적, 윤리적 모범이 된 장편소설의 부활―국적 없는 디아스포라 앞에 우리는 모두 유죄다
작가의 문제의식은 ‘코리언 디아스포라’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반성하면서 출발했다. 일부러 외면하지는 않았다 해도 이 사회적, 역사적 무관심은 과연 정당한 것인지, 사회와 국가, 정부, 그리고 작가들에게조차 묻고 싶다는 문제의식이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단일 민족 국가로, 혈통주의가 뚜렷한 민족성을 지닌 채 살아온 우리는 외세 침략으로 인해 생존권과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부단한 노력 속에 디아스포라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허나 그 이유만으로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정당화할 수 없다. ‘우리’라는 공동체 이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나머지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을 발견하고 고백하고 반성하는 것 또한 문학의 몫임을, 작가는 소설이라는 간접적이고 지난한 방식을 통해 주장하는 것이다.
이 소설이 지닌 또 다른 매력은, 디아스포라의 개념과 파생 배경을 단순히 민족과 국경이 아니라 이념과 인식이라는 철학적 차원으로까지 확대해 보인다는 점이다. 기득권자라 할 수 있는 아이블링거는, 전통적인 인식 세계를 옹호하며 그 안에서 자율성을 확대해 보자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시선으로 음악 양식과 종교를 바라본다. 그러나 힌터마이어는 반대 입장을 고수한다. 한쪽은 경계를 짓고 그 안에서의 발화를 최대화하자는 것, 한쪽은 경계 자체를 무너뜨리자는 것, 민족의 아이덴티티라는 것도 의식의 경계일 뿐이라는 것이다.(이 기조는 김상호, 즉 겐타로이자 토마스에게서도 또다시 반복된다.)
형식을 지키려는 의지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처럼 주어진 형식 안에서 음악적 자율성을 극대화 하려는 것은 예술의지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율마저 압박하려 형식을 강요하는 것은 권력의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스스로 신심을 내어 믿는 신과 두려워 복종하는 신이 있듯 말입니다./ 선생님의 토카타는 푸가에 비해 언제나 짧습니다. 저는 토카타에 비해 푸가가 언제나 짧습니다…….(243쪽)
한국, 일본, 독일, 북한 이 모두 이념이나 국가 등으로 나뉘지만 그 모든 것은 사실상 인식의 문제이며 그 인식의 경계는 곧 ‘말’, ‘언어’의 경계이다. 종교도, 음악도 이 언어의 하나일 뿐이다. 힌터마이어와 아이블링거는 경계와 비경계 사이의 충돌이며, 바로 그 지점에서 근대가 출발한다. 근대를 태동한 그 개념이 현대에 와서는 어느 민족이든 집단에든 속하지 못하고 사이에 낀 존재인 디아스포라를 낳은 것이다.
말을 말뿐이라 하는 것은 말을 무시하거나 부정한다는 뜻과 다릅니다. 말이 더 풍성해지고 다양해집니다. 음악을 음악일 뿐이라 하는 것도 음악을 더 자유롭게 한다고 믿습니다. 제 믿음은 거기에 있습니다. 말이 어떤 것으로 규정되지 않고, 음악 또한 어떤 것으로 규정되지 않을 때 좀 더 자유로이 우리 영혼에 근접할 수 있다고 봅니다. 파괴와 방종과 일탈처럼 보이는 것이 때로는 실상에 가까울 수도 있겠지요.(352쪽)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민족과 종교와 국경의 경계에 서온 자들,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의식을 규정하는 ‘언어’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그 경계를 허물기라는 것, 때로는 무지와 방관조차 커다란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음악이라는 무형의 예술조차 인간의 의도에 따라 그 무엇보다도 잔인하고 처절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32막사의 뱀’을 통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단 한 번 푸득거린 새의 날갯짓 소리. 그리고 그만인 소리. 허공에 작은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흩어지는, 여리고 부질없는 소리……. 사람 목이 교수대 형틀에 걸려 늘어지는 소리였다. 탈옥을 도모했던 사람이, 유일한 탈출구인 하늘로 사라지는 소리. / 그때야 대원들은 연주를 멈춘 까닭을 알았다. 무엇을 위한 연주였는지 뒤늦게 깨달았다.(320쪽)
아무것도 모른 채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지금 여기’ 이전, 그리고 이후의 모든 디아스포라 앞에 떳떳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안다는 것은 상처와 반성을 부른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수년 동안 개인의 무의식과 감정, 가정사에 천착해 온 한국문단에 작가 구효서는 오랜만에 묵직한 숙제를 던진다. 그리고 『랩소디 인 베를린』을 통해 작은 실마리를 안긴다. 한 개인의 한편에는 예술성,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가 있으며 다른 한편의 날개에는 사회적, 역사적,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이 놓여 있다는 것. 앞으로의 조국, 미래지향적인 조국이라는 무언가에는 어떤 ‘예술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특히 예술가에게는 본인의 영혼과도 동일시할 만한 자신의 작품. 곧 그것이 바로 미래의 조국이자 국가상이 되기를 바라며, 작가 구효서는 이 장엄하고 아름다운 음색을 지닌 장편소설을 묵묵히 지휘한 것이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머물고 싶지 않았다. 머물고자 해도 머물러지지 않았다. 방향과 목적지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늘 떠나도 떠나지지 않았다. 머물 곳을 알지 못하는 한 떠나도 떠난 것이 아니었다. (……) 김상호는 죽었고 하나코는 살아 있었다. 그것은 동쪽과 서쪽만큼이나 다른 방향이었다. 그러나 삶의 시작이 죽음의 시작이고, 삶의 끝이 죽음의 끝이라면, 방향이 달랐을 뿐 그들의 선택은 같은 것일 수 있었다. 그럴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김상호가 죽은 이유는 하나코가 사는 이유라는 것. 그게 서로 다르다 말한다는 건 삶과 죽음의 엄숙성을 철없이 비웃는 처사라는 것. 그리고 동쪽이든 서쪽이든 그들은 공히 갔다는 것. 하나코도 그렇게 말의 경계를 넘어, 떠나갔다는 것…….(469~470쪽)
“지금까지의 한국문학에서 ‘디아스포라’의 주제를 이보다 방대하고 심원하게 그려낸 소설은 없었다.
18세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독일에서 일본과 한국에 이르기까지 확장된 시공간을 배경으로 정치적 억압과 유랑의 역경을 혼신의 열정으로 부딪혀간 두 음악가의 삶을 추적하는 구효서의 소설은, ‘예술가 소설’의 새로운 전범을 열어 보인다.
핏빛 동백꽃잎의 낙화 같은 존재의 슬픈 운명을 힘차게 비상하는 물떼새의 날갯짓으로 승화시키는 음악의 장엄한 선율, 그 선율이 민족과 정치, 그리고 종교와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사랑의 지평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 이경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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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시금 읽고 싶어지는...소장 가치가 있는..언넝 사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