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백석(1912 - ?)은 모두 세 차례 경남지역을 다녀 간 것으로 여겨진다. 1935년 6월과 1936년 1월, 그리고 1936년 12월에 있었던 세 번째 걸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세 차례에 걸친 남행을 빌어 백석은 모두 여섯 편에 이르는 기행시를 발표하고 있다. 백석이 북도 사람이고, 그가 남긴 작품 대부분이 고향과 그 가까운 함경·평안도 지역, 지나 동북지역에 걸치는 곳곳의 장소 경험이나 민속 체험, 또는 거기서 겪었던 삶의 서정에 치우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모두 여섯 편에 이르는 경남지역 기행시의 경우는 썩 이례적인 경우라 하겠다.
그런데 이 세 차례에 걸친 걸음이 가 머물렀던 맨 끝자리는 언제나 다도해의 아름다운 항구로 이름이 드높은 통영이었다. 그의 남행시 여섯 편은 <統營>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세 편에 <昌原道>, <固城街道>, <三千浦>로서 통영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될 곳이거나, 그 가까이 이는 곳의 이름이다. 이렇듯 통영이라는 장소가 백석 시에서 중요한 곳으로 올라서게 된 것은 그가 남긴 통영시 세 편이 모두 뛰어난 작품인 까닭도 있으나, 나아가 그가 통영에 가게 된 속사정도 한 몫을 한다. 곧 20대 젊은 백석이 사랑해 마지 않았던 박경련이란 처녀의 고향이 통영이었던 탓이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때로는 그녀의 흔적을 찾아 백석은 통영을 찾았고, 그 일로 겪은 바가 여섯 편 남행시로 고스란히 남게 된 셈이다.
그런데 앞의 두 차례 통영 길에 백석을 이끌었던 이가 통영을 고향으로 삼고 있으면서 같은 일터인 조선일보사에서 함께 일하며 절친하게 지냈던 벗, 신현중이었다. 백석에게 동향 통영 처녀인 박경련을 소개해 주고, 혼인을 주선하는 일을 앞서 맡았다가, 뒷날 백석을 젖혀두고 그녀와 혼인하게 된 이가 바로 그다. 그리하니 백석과 신현중, 그리고 그의 아내 박경련은 흔치 않은 인연의 고리로 얽혀 있었던 셈이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백석은 북에 머물러 있다 세상에 그 죽음을 알리지도 못한 채 삶을 마감하였고, 신현중 또한 돌아간 지 벌써 스무 해에 이르고 있으니, 세월이 이저런 사람살이의 인연 꾸러미를 어디로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인가 싶다.
어쨌든 백석은 젊은 시절, 이루지 못해 안타까웠을 연모와 그 기억을 애틋한 장소시로서 남겨 두어, 통영이라는 남도 갯가의 한 도시를 우리 시문학 속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장소로 올려 세웠다. 통영을 고향으로 가진 대표 문학인인 청마 유치환이 고향 앞바다를 향해 부른, 억세고도 짐짓 허황된 <깃발>의 목소리와는 사뭇 달리, 따뜻한 마음과 쉬 다치기 쉬운 섬세한 눈길로 푸른 통영 바다를 사랑의 기쁨과 애잔함이 한꺼번에 뭉개구름처럼 피어 오르는 곳으로 우리 앞에 남겨 주었다. 멀리 바닷가를 끼고 있었던 평북 정주 지역 출신 백석이 남녘 먼 바닷가로 몸을 실어 그의 고향과 같은 안온한 느낌에 젖으면서 통영 지역에 색다른 장소이미지를 마련해 준 셈이다.
이제 한때 백석과 가장 가까웠던 벗, 신현중이 남긴 수필 한 편을 빌어 백석의 나날살이와 남도 통영 걸음에서 겪었을 일들을 새삼스럽게 좇아가 보기로 한다. 신현중의 글은 백석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매우 드문 가운데서 얻은 바, 그를 가장 가까이서 사사로운 일들을 함께 겪으면서 벗했던 이가 남긴 백석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 자료라는 데 의의가 크다. 게다가 백석의 남행시 여섯 편이 지닌 속사정을 세세하게 드려다 볼 수 있도록 빌미를 마련해 주는 살아 있는 자료이며, 경남지역 문단사에서 신현중이라는 수필가를 처음으로 되돌아 보게 하는데 빠트릴 수 없는 글이라는 점도 짚어두어야겠다.
2. 백석과 신현중
신현중은 호를 위랑(韋郞)이라 썼다. 그는 1910년 경남 하동군 적량에서 아버지 신상재의 일남삼녀 가운데서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선친 신상재는 일찍이 진주 군청과 통영 군청을 거치며 관리로서 일을 했다. 신현중은 보통학교 삼 학년 무렵 그러한 아버지를 따라 통영으로 건너와 거기서 자랐다. 1921년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가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거쳤고, 1929년 이른바 경성제국대학 예과 6회로 입학하였다. 입학 뒤부터 독서회를 만들어 계급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키워갔다. 그해 12월 광주학생의거가 일어난 다음 달, 경성제국대학 안에 그 격문을 뿌리기도 했던 행동력이 이미 거기서부터 다듬어졌던 셈이다.
1930년 예과 2학년 무렵 학교 바깥의 계급주의 조직과 연결, 물밑 작업을 계속했던 그는 1931년 9월 왜로들의 만주침략이 일어나자 실천할 때라고 보고 격문을 쓰고 이틀밤에 걸쳐 등사하여 시내 곳곳에 뿌렸다. 잠시 몸을 함흥으로 피하기도 했던 신현중은 다시 서울로 돌아와 붙들렸다. 이 일로 50여명이 잡혔던 바 있었는데, 이듬해 8월 이른바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왜로들의 재판에 올라간 이는 일본인 세 사람을 포함, 모두 19명이었다. 이른바 '경성대반제동맹활동'이다. 경성제국대학이 만들어지고 가장 규모가 크고 조직적인 현실 참여 활동이었던 셈이다(이충우, 1980;179-196). 이 일로 신현중은 기소 기간을 합해 삼 년 동안이나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주동인물로서 높은 형을 받았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 또한 파면을 당하여 집안이 커다란 곤경에 이르게 되었다.
1934년 겨울에 삼년형을 마치고 나온 신현중은 다른 관련자들과는 달리 경성제대로 복학하지 않고, 1935년 봄에 조선일보사에 들어가 사회부에서 언론인으로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거기서 그는 백석을 만났고, 백석과 매우 친했던 벗 허준과도 깊이 어울리면서 자신의 여동생을 그에게 맡기게 된다. 신현중의 누나인 신순정은 통영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서울로 먼저 올라와 있었던 집안을 뒤 따라 포천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통영에서 가르친 바 있었던 박경련은 그때 이화고녀에 다니면서 옛 스승댁을 드나들었고, 신현중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신현중은 이때 이미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을 하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바 있는 김준연의 딸과 약혼한 사이였다. 그래서 백석에게 장가들기를 권하면서 통영 여자들을 칭찬하며 중매 들겠다고 나섰다 한다. 1935년 6월 벗인 허준의 혼인 기념 축하 모임에서 신현중과 백석, 그리고 허준을 비롯하여 박경련, 김천금과 같은 통영 출신 처녀들이 초대되어 모임을 갖게 되었다. 거기서 백석은 박경련을 유심히 살핀 것 같고, 마음을 둔 듯하다. 그 모임에 이어 곧 백석은 허준과 신현중을 앞세워 통영에 첫 걸음을 하게 되었다. 아마 처가 신행을 떠나야 했을 허준 부부와 동행하는 꼴이었을 것이다. 그해 12월 『조광』에 발표된 <통영>은 그때의 통영 풍광을 마음 속에 새긴 작품이었다. 백석 나이 스물네 살에 박경련은 꽃다운 열여덟 살이었다.
"저문六月"의 통영 첫 걸음에서 겪었던 생생한 감각과 포근한 느낌을 잘 그려내고 있다. "녯날엔 統制使가있었다는 낡은港口" 통영 갯가의 건강한 처녀들은 모두 그가 연모해 마지않았던 박경련이었을 터이며, 그녀는 "녯날이가지않은" 정결한 모습으로 "말업시 사랑하다" 죽을 듯 이미 몇 달 앞서부터 젊은 백석을 강렬하게 사로잡으며 다가왔던 "千姬"였다. "소라방등이붉으레한마당에" 나리는 "김냄새나는비"라는 표현은 백석이 북쪽 고향에서 가끔 보았을 바다와 같은 장소이면서도, 그곳과는 사뭇 다르게 새로운 연모의 장소로 살아 오르던 남쪽 통영바다가 지닌 고유한 아름다움에 사뭇 즐거웠을 백석의 마음을 잘 담아낸 표현인 셈이다.
즐거웠고, 색달랐으며, 가슴 두근거렸을 첫 통영 길을 마친 몇 달 뒤인 이듬해 1936년 1월 초순에 백석은 다시 한 번 먼 통영으로 신현중과 함께 내려갔다. 두 번째 통영 걸음이었다. 박경련을 만나기 위해서였는데, 박경련은 방학이어서 고향 통영 집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백석은 대구, 삼랑진을 거쳐 마산에 이른 뒤 배를 타고 통영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던 탓에 이미 서울로 되올라가 버린 박경련과 백석은 걸음이 엇갈려 만날 수가 없었다. 백석과 신현중은 박경련이 없는 통영에 내려, 박경련의 외사촌이었던 서병직의 안내를 받아가며, 이통제사순신장군의 사당인 충렬사를 비롯해 통영의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이미 서울로 떠나버려 통영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박경련을 생각하며, 백석은 그 심회를 1월 23일 『조선일보』에서 <統營>이라는 시로 고스란히 담아냈다.
집집이 아이 만한 피도안간 대구를 말리는곳
황화장사령감이 일본말을 잘도하는곳
처녀들은 모두 漁場主한테 시집을가고싶허 한다는곳
"명정샘"은 이통제사순신장군을 모신 충렬사 앞에 있었던 샘이다.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는데, 일정(日井)과 월정(月井)이라는 두 개의 샘으로 이루어져, 그 둘을 모은 명(明)이라는 글자를 따서 명정(明井)이라 일컬었다. "명정골"은 곧 맑은 샘이 있는 골이라는 뜻이다. 박경련과 그 가족이 살고 있었던 집은 바로 명정골 396호였다. 이 시에서 "내가조아하는 그이"란 바로 박경련이었을 터이다. 충렬사 "날근사당의 돌층게에 주저안저서" 그녀를 만나지 못한 채 통영에 머물게 된 백석의 연정어린 마음이 잘 드러난다. "蘭"처럼 고운 자태로 "열나흘달을업고 손방아만짓는 내사람"이라는 아름다운 구절로 담아낸 박경련에 대한 그리움이 사뭇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신현중은 이어 백석을 데리고, 진주로 건너가 그 무렵 식산은행의 행원으로 일하고 있었던 그의 작은아버지 신경재의 집에 머물면서 즐겁게 유흥을 즐겼다. 그 다음 날 마산을 거쳐 신현중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뒤, 1월 23일에 백석은 이 시 <統營>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던 것이다. 이때 그가 통영과 진주를 거쳐 남도에 머물렀던 기간은 사흘이나 나흘이었을 듯 싶다. 그 짧은 동안에 진주에서도 다시 바다 쪽으로 한참을 내려서야 닿이는 삼천포까지는 둘러볼 여유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3월에 이르러 백석은 『조선일보』에 다시 <南行詩抄>라는 이름 아래 경남 이저곳을 다룬 장소시 4편을 발표했다. 3월 5일의 <昌原道>, 6일의 <統營>, 7일의 <固城街道>, 8일의 <三千浦>가 그것이다. 이때는 백석이 『조선일보』를 막 떠난 시점이며, 4월에 함흥의 영생고보로 일자리를 옮기기 직전이라 마음을 정리할겸, 홀로 박경련의 고향인 통영과 그 가까운 곳을 둘러볼 수 있었을 것이다. 송준(1994 ㄱ; 230)도 백석이 2월 9일 무렵 다시 통영으로 여행을 한 느낌을 받았으나, 속단할 수 없다고 했다. 만약 이 점이 사실이라면 백석이 통영을 걸음한 일은 세 번이 아니라, 네 번에 이르게 되는 셈이다.
실제 <南行詩抄> 속의 시들은 그 배경이 <昌原道>와 <統營>이 두 번째 통영 걸음을 했던 때였던 1월 초순 무렵의 겨울 풍경일 뿐, 나머지 <固城街道>, <三千浦>는 "아지랑이올으고", "진달래 개나리 한창" 핀 봄날이다. 그러나 시가 발표되었던 3월 초순 무렵은 "진달래 개나리 한창" 피기에는 좀 이른 느낌이 있으나, 겨울과는 완연히 다른 봄날의 풍광을 그리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게다가 그 느낌도 통영에 첫 걸음한 뒤였던 1935년 12월에 발표된 <統營>이나, 두 번째 걸음 뒤 발표했던 1936년 1월의 <統營>과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앞의 두 <統營>에서 말할이가 "千姬" 또는 "蘭"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이성을 향한 강렬한 느낌을 앞세우고 있는 것과는 달리, 세 번째 통영시에서는 그 자신의 특장을 살려, 말할이의 심사를 죽이고, 통영과 그에 이르기 위해 지나쳐야 했을 창원이나 통영 가까이 있는 도시인 고성, 삼천포의 토착적인 삶을 여유 있게 그려주고 있다. 따라서 1936년 3월 세 번째 통영시를 발표할 무렵에는 이미 함흥으로, 더욱 통영에서 멀어지는 북쪽으로 일자리를 옮길 것이 결정된 상태에다, 신문사를 그만 두고 모처럼 한가해진 그로서는 박경련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남행길을 다시 한 번 서둘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점은 짐작에 지나지 않는다.
세 번째 통영시에서 백석은 '서병직씨에게'라는 곁제목을 붙여, 두 번째 걸음부터 통영에 머무르는 그를 대접했던, 박경련의 외사촌 서병직에 대한 고마움과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믿음은 그 자신과 박경련 사이에 앞으로 깊어질지도 모를 사랑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과도 무관하지 않았던 듯 싶다.
통영장 낫대들었다
갓한닙쓰고 건시한접사고 흥공단단기한감끈코 술한병바더들고
화륜선 만저보려 선창갓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압헤
문둥이 품바타령 듯다가
열닐헤달이 올라서
나룻배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 <統營>
함흥에 머물고 있었던 백석은 1936년 겨울 방학이 되자, 그 곳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허준과 자신의 혼사 문제를 신중하게 의논하였고, 마침내 허준을 앞세워 통영으로 박경련의 집으로 청혼을 넣으러 가게 되었다. 그 무렵 박경련은 이화고녀를 졸업한 뒤, 통영 집에 와 있었다. 그러나 집안의 완강한 거부로 혼사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백석은 서병직의 대접만 받고 돌아왔다. 이때가 겉으로 드러난 세 번째 통영 걸음이었다.
그러나 그 몇 달 뒤인 1937년 4월, 신현중이 김준연의 딸과 파혼하고, 그의 벗 백석이 오래 마음에 두고 있었던 박경련과 오히려 혼인하게 된 사정은 송준(1994 ㄱ;101-108)에서 잘 밝혀놓은 바와 같다. 신현중은 백석과는 한때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던 벗이었으나, 그 뒤 백석이 '蘭'으로 깊이 사랑했던 여인과 오히려 혼인하게 됨으로써 백석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겨준 셈이다.
샛파란 피ㅅ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간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벌인일을 생각한다
- <내가 생각하는 것은> 가운데서.
이길이다
얼마가서 甘露같은 물이 솟는마을 하이얀 회담벽에 옛적본의
장반시게를 걸어놓은집 홀어미와 사는 물새같은 외딸의 혼사말이 아즈랑이 같이 낀 곳은
- <南鄕> 가운데서.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서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 <흰 바람벽이 있어> 가운데서.
1937년 4월 믿고 지냈던 벗, 신현중과 박경련이 혼인을 한 뒤 여섯 달 뒤인 10월 <女性>에 발표한 작품이 맨 위의 <바다>다. 백석은 바닷가를 거닐며, 그녀를 잊지 못한 채, "생각만" 나고, "사랑하고만" 싶다고 말한다. 여전히 그 혼인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셈이다. 이듬해인 1938년 4월에 발표된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서는 그 일을 이제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추스리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간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벌인일"이라는 명료한 표현에다, 그 일을 이제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음가짐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 발표된 <南鄕>에 이르면 그녀로 향했던 주체할 수 없었을 마음과 그로 말미암아 겪었던 지난 일들이 오히려 그리운 하나의 풍경으로 객관화되고 있다. "홀어미와 사는 물새같은 외딸의 혼사말이 아즈랑이 같이 낀 곳"이라 해 통영이 어느덧 멀리 남녘에 있는 또 하나의 고향처럼 백석에게 새삼스러운 추억의 장소가 되고 있는 셈이다. 굳이 <南鄕>이라는 제목을 붙여둔 까닭이겠다.
그리고 종내는 그녀를 향한 오랜 안타까움도, 야속한 벗 신현중에 대한 복잡했을 마음도 다 가라앉고 그 일들을 멀찍이 떼어놓고 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른 시가 1941년에 발표한 <흰 바람벽이 있어>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 박경련이 "蘭"과 같이 고왔던 처녀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앉어", "벌서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 여인으로 성숙해 간 세월과 한 가지로 백석의 연모도 아픈 그늘을 걷어내고 여느 사람의 세상살이 속의 그립고도 예사로운 풍경으로 그녀를 소담스럽게 올려놓을 만큼 성숙했던 셈이다. 백석이 여섯 해 남짓 닿일 데 없고 메아리 없이 박경련을 향해 홀로 겪었을 사랑과 그리움의 드라마가 마지막 짙게 찍힌 자리다.
그리고 그 맨 뒷자리가 그의 나이 삼십 세인 1941년, 왜로제국주의의 서슬이 더욱 퍼렇게 겨레의 말과 얼을 갈아먹고 있었던 때였고, 백석으로서는 굴욕적인 역사가 덮씌우는 삶의 신산함과 질곡에 이리저리 쫓기며 피하며, 나라밖 동북지역으로 일본으로 방랑과 방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첫 자리였다. 이루지 못한 연모로 말미암았을 안타까움이 더욱 예사롭지 않게 여겨지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때 신현중은 이미 백석보다 한 해 앞선 1940년, 5년에 걸친 『조선일보』 기자 생활을 그만 두고 문득 오랜 서울 생활을 마무리한 다음이었다.
신현중은 비록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을 보냈던 통영으로 귀향해 농촌 생활을 하고 있었다. 통영에서 신현중은 요시찰 인물로 늘 감시를 받으며 시달림을 당했다. 어지러웠던 시국 속에서 광복을 한 달 남짓 앞두고 두류산 아래에 있는 하동 적량 고향으로 몸을 피해 있었던 신현중은 광복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신현중은 조선통신사에 들어가, 다시 언론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제 몫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뜻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진주로 내려오게 된 그는 진주여자중학교 교장을 처음으로 오랜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뒤 신현중은 내내 남쪽 그의 고향 언저리에서 머물며 1950년 통영여중교 교장, 1952년 통영중학교 교장, 1956년 부산 남중학교 교장, 1962년 부산여중교 교장으로 일했다. 경남·부산의 교직을 두루 거치면서 청마 유치환, 초정 김상옥과도 자주 어울렸다. 1980년에 영면하였는데, 고인의 뜻에 따라 통영 미륵산 아래에 묻혔다. 1982년 뒤늦게 '대한민국건국훈장애족장'을 서훈 받고, 1993년 그의 넋은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으로 옮겨졌다.
신현중은 언론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여러 문인들과 자주 어울렸던 탓에 직접적으로 글을 쓸 기회가 많았을 터이나, 전문문인으로 문단에 나서 잦은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광복 뒤에 발표했던 시 몇 편과 진주·통영 지역 교직 생활 가운데 틈틈이 써 둔 수필들을 모아 수필집 『두멧집』을 내었고, 『국문판 논어』와 『국역 노자』를 옮겨 내어 학생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고전에 쉬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애썼다. 그는 문학인으로서보다는 교육자로서 자신의 몫을 더 생각했고, 또 그렇게 처신했던 셈이다.
3. 수필 <서울 文壇의 回想>
이제 신현중이 남긴 수필 <서울 문단의 회상>을 원문 그대로 옮겨, 백석과 신현중의 옛일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한자로 되어 있는 낱말은 읽기 쉽도록 한글로 바꾸고, 한자를 괄호 안으로 집어넣었다. 다만 맨 뒤에 붙여 둔 백석의 시 <北方에서>는 발표되었을 때의 원본을 살렸다.
서울 문단(文壇)의 회상(回想)
위 랑(韋 郞)
편집자(編輯者) 하촉(下囑)하시되 "서울 문단회상(文壇回想)"이라고 하였으나 문단인(文壇人) 아닌 나에겐 알맞지 않은 제목(題目)이다 차라리 "서울 문인교유록(文人交遊錄)"이라면 서투른 붓이나마 쓸 수가 있겠다 과거(過去) 반평생(半平生) 내 직업(職業)이 일개(一介) 기자(記者)였기 때문에 기림(起林)·만식(萬植)·원조(源朝)·석영(夕影)·일보(一步)·소천(宵泉)·병각(秉珏)·대산(垈山)·자영(子泳)·기영(基永)·정희(貞熙)·천명(天命)·선희(善熙)·허준(許俊)·백석(白石) 등등(等等) 한 직장(職場)에서 비비대고 일하고 낄낄거리고 놀았더니만큼 이 쟁쟁한 문단(文壇)의 별들이 내 머리 속 한 구석에 남겨 준 그림자를 더듬어 회상(回想)할 수가 있다 이 별들이 다 빛나되 그 빛이 제마다 다르고 이 별들과 다 사겼으되 그 인상(印象)이 제각기(各其) 달랐으므로 이분들의 회상기(回想記)를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쓸 수도 있는지라 우선 이번엔 내 교우(交友) 범위(範圍)에서 이 진양(晉陽)땅과 인연(因緣)이 깊은 시인(詩人) 백석(白石)의 이야기부터 쓰기로 한다
백석(白石)은 그 처녀시집(處女詩集)의 이름 그대로 "사슴"과 같은 시인(詩人)이다 새캄한 머리털이 가늘고 부드러우면서 구실구실 숱이 많아 우선 보기 좋다 웃 눈썹 역시(亦是) 새캄하고 숱이 많고 약간 꾸불거리면 기운차게 가로 툭하게 긋겨 있고 속 눈썹 길게 자란 그 큰 눈이 이글이글 아름답다 약간 높은 코가 잔등선이 부드럽게 내려 와서 변두리가 도톰하게 살져서 정말 잘 생겼다 구태여 흠잡으려면 이마가 조금 좁은 것 목이 긴 것뿐이다 키도 중키 이상(以上)이요 어깨며 다리며 균형된 체격이어서 그 사치한 입성으로 세종로(世宗路)를 걸어가라치면 참 멋이 질질 흐르는 당대(當代)의 미청년(美靑年)이었다 우선 일반사회인(一般社會人)은 그만두고 같은 사내(社內)에 있던 정희(貞熙)·천명(天命) 등등(等等) 여류시인(女流詩人)들이 이 백석(白石)을 얼마나 좋아하고 가까이하려 애썼는지는 여러 가지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지마는 여기서는 그만 둔다 멋장이니만치 호사스런 사슴이었다 그 때 우리는 삼사십원 정도(三四十圓程度)의 양복(洋服)을 입고 달닐 땐데 백석(白石)은 이백원(二百圓) 들였다는 연두빛깔 "떠불 버튼"을 입고 다녔었고 양말 한 결레 이삼십전(二三十錢)하던 땐데 일원(壹圓) 이원(貳圓)짜리 양말을 신고 다녔었다 터틈한 나도 그의 강권(强勸)으로 해서 일원오십전(壹圓五十錢)짜리 양말을 신어 본 것이 시방 생각해도 우습고 그리웁다 그와 동무해서 길을 거닐다가 점심(點心) 때가 되면 큰 걱정이다 나는 설넝탕이나 대구탕이나 한 그릇이면 그만인데 그는 그런 음식점에는 들어가기를 싫어했다 깨끔하지 않다는 것이겠지마는 그가 갈 수 있는 깨끗하고 먹음직한 곳으로 가려면 그 때 나의 호주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지저분하고 궂은 것을 얼마나 싫어했는지는 전화(電話) 받을 때를 보면 그만이다 뭇 사람이 손과 귀와 입을 대던 것이라고 해서 으례 수화기(受話器)는 손수건으로 싸서 쥐고는 귀와 입에 수화기(受話器)를 대지 않고 조금 떼어서 들고 받는 것이었다 나쁘게 보고 말한다면 괴벽스럽고 신경질이라고 하겠지만 그렇게 깨끗한 것만 찾는 백석(白石)이가 사흘 나흘 낯을 씻지않고 컴컴하고 지저분한 방 안에 때 묻은 이불을 덮고 있는 허준(許俊)이와 가장 친(親)한 것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십대(二十代)의 백석(白石)이와 사귀던 이런 일 저런 일을 쓰려면 한정이 없고 내만이 관계(關係)하고 내만이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자미(滋味) 있는 그의 Romance를 가지고 있어 흉한 말이지만 만약(萬若) 백석(白石)이 나보다 일직 죽는다면 한 권쯤 책으로 엮어 내 놓을 수도 있으나 아마도 백석(白石)이 나보다 오래 살 것 틀림없으므로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영남문학(嶺南文學) 독자(讀者)를 위해서 그의 내진담(來晉譚) 하나를 펴련다 그 때 백석(白石)이 스물 다섯 살 때이던가 겨울 방학(放學)이 지나고 서울 공부(工夫)하는 학생(學生)들이 신학기(新學期) 등교(登校)하러 갈 때니까 아마 정월(正月) 초순(初旬)쯤 되었겠다 백석(白石)이와 나는 통영(統營)을 들려서 이 진주로 왔다 젊은 시인(詩人) 장차 우리 시단(詩壇)의 빛나는 별이 꼭 될 것 같이 생각되는 백석(白石)을 안내(案內)해 온 나는 논개(論介)로 이름높은 이 낭만(浪漫)의 진양(晉陽)에 와서 우선 손 쉽게 만날 수 있는 고운 아가씨를 소개(紹介)하기로 작정(作定)하고 등아각(登雅閣)이라던가 하는 요정(料亭)으로 하루 저녁 자리를 잡았다 마침 무슨 인연(因緣)이 있었던지 그 때 진주(晉州)서 가장 인기(人氣) 높은 예기(藝妓) 한 사람도 자리를 함께 하여 노래하고 술마시고 하였는데 그 아가씨 이름을 잊었으니 여기선 란(蘭)이라고 해 두자 한참 흥겨워 노는데 하기야 그 때 백석(白石)도 나도 똑같은 문자(文字) 그대로의 숫총각이었지만 고운 아가씨들이 모두다 나는 춘향전(春香傳) 방자로 제쳐놓고 백석(白石)만을 도령(道令)님으로 모시고 마음 조렸던 건 두 말 할 것 없다 우리는 서울서 온 손인지라 자연(自然) 서울 이야기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아가씨들이 서울을 아니 백석(白石)이 살고 있는 서울을 그리워하는 빛이 완연하였고 나도 백석(白石)이도 그 란(蘭)이란 애보고 그만하면 서울와도 일류(一流)가 될 수 있다고 지나는 말로 한 것도 그럴 법도 한 일이었다 하루 저녁 유쾌하게 그러나 어디까지 깨끗하게 즐긴 다음 바로 그 이튿날로 상경(上京)하고 말았었다 그런데 그 후 한 열흘도 못지난 어느 날에 출판국(出版局)에서 일하던 백석(白石)이가 편집국(編輯局)으로 허덕허덕 나를 찾아 왔다 아주 해쓱 질린 얼굴로 황겁하게 나를 찾아 왔다 손에는 전보(電報) 한 장을 쥐고 좀 그 때 광경(光景)을 과장해서 표현(表現)한다면 전보(電報) 한 장을 쥔 그 손이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전보를 보니 사연은 간단하다 "내일 아침 서울 도착 맞아주오 란이" 『이거 큰 일 났네. 어떡허면 좋은가?』 그는 정말 어쩔줄을 모르고 걱정하며 나에게 어떻게 조력(助力)해 달라고 애원(哀願)이다 나는 전보(電報)를 내 손에 받아 쥐고 훑어 본 다음 일부러 애꾸지게 『나는 모르겠네. 내 이름으로 전보가 왔으면 모르거니와 자네 앞으로 온 거니까 자네 알아서 처리(處理)하게 내가 알 바 아닐세 내 못난 게 나는 섧네. 자네가 부러우니보다 심술이 날 지경이야』 이런 수작으로 한참 놀린 다음 그의 애원(哀願)에 못이기는 듯 첫째 서울역(驛)에서 그를 찾아 서울 첫 번 길을 딛는 그 아가씨들을 자동차도 인도해야 될텐데 그 택시값이 없어서 걱정이다 그와 나는 이 자동차 삯을 이리저리 겨우 주선하여 놓고 이튿날 아침 서울역(驛)에서 만나기로 약속(約束)하였다 이튿날 이른 아침 경부선(京釜線) 첫차가 도착(到着)될 무렵 경성역(京城驛)엘 나갔더니 이등대합실(二等待合室)에서 백석(白石)은 검은 두루막 검은 모자를 쓰고 나 오기만 고대중(苦待中)이다 이윽고 우리는 이 진양(晉陽)서 올라온 란이와 또 하나 아가씨 두 분을 태우고 경쾌(輕快)히 남대문(南大門)을 스치고 장안(長安)으로 드라이브 해 들어갔다……
백석(白石)이를 연분(緣分)해서 상경(上京)한 이 두 송이 진양(晉陽) 꽃이 한 달 뒤에는 일류(一流)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시인(詩人) 백석(白石)이가 첫날 서울역(驛)에 마중나가 준 다음 그후론 일체(一切) 그들과 면대(面對)조차 없었던 것은 특기(特記)치 않을 수 없다 그 때 진양(晉陽) 오기 전 통영(統營)을 둘러서 충렬사(忠烈祠)에 갔었는데 내가 먼저 충무공(忠武公) 위패(位牌) 아래 절하고 나서 백석(白石)을 참배(參拜)하랬더니 그는 그저 보고 서있었을 뿐 끝내 절할 줄을 몰랐는데 나는 그 때 그의 충성(忠誠) 없음을 속으로 탓도 했었지만 시방은 그가 왜 절하지 않았는가를 이해(理解)할 수 있는 것 같다 백석(白石)의 시(詩)가 뛰어난 건지 아닌지는 평론가(評論家)에 맡기고 그저 독자(讀者)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朝鮮) 것만 쓰고 조선(朝鮮) 때 조선(朝鮮) 내음새 조선(朝鮮) 향기만 풍기는 독특(獨特)한 시(詩)이라해서 좋아하던 내가 요즘 당시잡지(當時雜誌)를 뒤적거려 백석(白石)의 시(詩)를 읽으니 정말 조선의 슬픔을 절실(切實)히 노래한 열열(熱熱)한 민족시인(民族詩人) 백석(白石)이란 것을 새삼스레 더 느끼게 한다. 끝으로 백석(白石) 구고(舊稿) 한 편(篇) 베껴써서 시인(詩人) 백석(白石)의 회상(回想)을 돕는 바다
北方에서
― 鄭玄雄에게 ―
白 石
아득한 녯날에 나는 떠났다 扶餘를 肅愼을 渤海를 女眞을 遼를 金을
興安嶺을 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익갈나무의 슬퍼하든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는 말도 잊지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딸어나와 울든것도 잊지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익이지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해ㅅ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야 또 한 아득한 새 녯날이 비롯하는때
이제는 참으로 익이지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녯 한울로 땅으로―나의 胎盤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것은 사랑하는것은 우럴으는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西紀 一九四○年 七月 文章에서)
4. 백석의 됨됨이
<서울 文壇의 回想>은 1949년 4월 5일에 나온 『嶺文』 7집에 실린 신현중의 수필이다. 이 글을 쓸 무렵 신현중은 광복 뒤 잠시 머물렀던 두 번째 서울 생활을 모두 마감하고, 낙향하여 진주여자중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상현과 함께 진주에서 영문을 내는데 앞장서고 있었던 설창수가 오래 서울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을 뿐 아니라, 서울 문단 사정에 밝을 신현중에게 서울 문단 회고기를 부탁하였고, 신현중은 바로 절친했던 백석을 떠올려 그의 남행기를 중심으로 이 글을 쓴 것으로 여겨진다. 신현중과 백석이 함께 진주까지 건너와서 머물렀던 일을 기억해 내고 있는 이 글은 그러므로 1936년 1월 백석이 두 번째로 통영으로 걸음 해서 박경련을 만나보려다 길이 엇갈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되올라 갔을 때의 회고인 셈이다.
이 글은 먼저 1)앞머리에서 서울 문단 회상에 대해 가볍게 운을 뗀 뒤, 백석을 지목하여 2)그의 됨됨이를 여러 가지로 일러 준 다음, 3)그와 함께 통영, 진주로 내려와서 함께 겪었던 일을 밝히고, 4)마지막으로 맺음말로써 마무리 짓고 있다. 모두 네 덩어리로 글이 짜여져 있는 셈이다. 이 글을 빌어서 우리는 알려져 왔던 바와 같이 신현중과 백석의 절친했던 관계를 새삼스럽게 알게 될 뿐 아니라, 백석의 사람됨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각별히 2)에서 신현중이 백석의 생김새와 됨됨이에 대해 묘사한 것은 다른 어떤 글보다 꼼꼼하다. 문인 인상기를 즐겨 썼던 안석영의 글과 견주어 보면 이 점을 잘 알 수 있다. "머리와 체격과 걸음걸이와 용모가 이국풍정을 느끼게 하며 정열이 대단하고 남구적인 정조를 띤 이로 그 외모와는 달리 그의 시는 조선적이며 고전적인 데가 있다"는 안석영(1937;63)의 소박하고도 겉치레에 가까운 표현과는 썩 다르다. 게다가 결백증에 가까운 듯이 "괴벽스럽고 신경질"적으로까지 보이는 백석의 깔끔하고 섬세하면서도 허트러지지 않는 모습은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했던 백석의 엄격하고도 심지 굳은 됨됨이를 엿보게 하는 좋은 실마리가 된다.
새카만 머리털이 가늘고 부드러우면서 구실구실 숱이 많아 우선 보기 좋다. 웃 눈썹 역시(亦是) 새캄하고 숱이 많고 약간 꾸불거리면 기운차게 가로 툭하게 긋겨 있고 속 눈썹 길게 자란 그 큰 눈이 이글이글 아름답다. 약간 높은 코가 잔등선이 부드럽게 내려 와서 변두리가 도톰하게 살져서 정말 잘 생겼다. 그태여 흠잡으려면 이마가 조금 좁은 것 목이 긴 것뿐이다. 키도 중키 이상(以上)이요 어깨며 다리며 균형된 체격이어서 그 사치한 입성으로 세종로(世宗路)를 걸어가라치면 참 멋이 질질 흐르는 당대(當代)의 미청년(美靑年)이었다.
그가 지저분하고 궂은 것을 얼마나 싫어했는지는 전화(電話) 받을 때를 보면 그만이다. 뭇 사람이 손과 귀와 입을 대던 것이라고 해서 으례 수화기(受話器)는 손수건으로 싸서 쥐고는 귀와 입에 수화기(受話器)를 대지 않고 조금 떼어서 들고 받는 것이었다. 나쁘게 보고 말한다면 괴벽스럽고 신경질이라고 하겠지만 그렇게 깨끗한 것만 찾는 백석(白石)이가 사흘 나흘 낯을 씻지않고 컴컴하고 지저분한 방 안에 때 묻은 이불을 덮고 있는 허준(許俊)이와 가장 친(親)한 것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을 알 수가 있다.
"내만이 관계(關係)하고 내만이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자미(滋味) 있는 그의 Romance를 가지고" 있는 벗이 쓴 글답게, 백석의 생김새와 사람됨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이 돋보인다. 게다가 백석의 시를 두고 "조선(朝鮮) 것만 쓰고 조선(朝鮮) 때 조선(朝鮮) 내음새 조선(朝鮮) 향기만 풍기는 독특(獨特)한 시(詩)"이라 한 대목이나, 백석이야말로 "정말 조선의 슬픔을 절실(切實)히 노래한 열열(熱熱)한 민족시인(民族詩人)"이라 추겨 세운 대목은 단호하고 눈부시다. 이 글이 씌어졌던 무렵의 문단 정황으로 보아, 그의 가까운 벗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신현중이 백석의 문학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매우 정확하고도 남달리 깊었던 이해를 엿보게 한다.
이 글을 빌미로 경남 지역문학에서 반제 항쟁에 앞장 서 옥고를 치렀을 뿐 아니라, 언론인이었으며, 교육자로서 어려웠던 시기를 남다르게 살고자 했던 신현중의 수필문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백석이 남긴 아름다운 통영 장소시 또한 각별하게 지역 사람들에게 사랑 받게 되기를 바란다. 남달리 삶의 비바람이 잦고 사나웠던 시인 백석의 삶자리 가운데 작은 한 곳을 일깨워 주는 흔치 않은 이삭 하나를 조심스럽게 드넓은 문학마당에 거두어 올리는 까닭이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