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군 서면에서 언덕만 넘으면 주꾸미로 유명한 마량포구와 홍원항이었다. 언덕에는 흐드러진 벚꽃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벚꽃나무는 바람이 스쳐갈 때마다 꽃잎을 하늘에 날렸다. 수천 개 벚꽃잎은 따뜻한 봄볕에 반짝거리며 파르르 땅으로 떨어졌다. 꽃비를 맞으며 언덕을 넘었다.
▲ 한산 여인들이 모시 날실에 '풋닛가루'를 묻히고 있다. 콩가루와 소금을 풀어 만든 풋닛가루를 먹이면 실 이음새가 매끄러워진다. | |
◆ 요염한 동백나무숲
마량포구나 홍원항으로 직진하기 전 ‘마량 동백나무숲’으로 향했다. 동백은 요염한 붉은빛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한 꽃이란다. 그래서 흉하게 시든 모습을 남이 보기 전 스스로 떨어진다는데, 올해는 봄이 늦게 찾아와선지 가지에 달린 동백꽃이 아직 많았다.
동백으로 유명한 곳은 많지만, 이곳처럼 홑겹 꽃잎에 노란 꽃술이 도드라지는 토종 동백은 흔치 않다. 동백 85그루가 얽히고설켜 둥그런 숲을 이루고 있는데, 숲 속에 서너 명이 앉을 만한 공간이 있다. 밖에서는 잘 들여다보이지 않을 만큼 가지가 무성하다. 청춘 남녀는 안에 들어가면 금세 나오지 않는다.
천연기념물 169호로 지정된 이곳 동백나무숲은 500여년 전 마량리 수군첨사가 ‘험한 파도를 안전하게 다니려면 제단을 세워 제사지내야 한다’는 계시에 따라 심었다고 전해진다. 동백나무숲 앞 ‘동백정’ 낙조도 볼만하다. 거대한 화력발전소가 사진 찍을 때마다 배경에 걸리는 게 옥에 티다. 입장료 어른 500원, 청소년 300원, 어린이 200원. (041)950-2466
▲ 홍원항 수협 앞 길바다에서 팔리는 풍성한 해산물,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봄 주꾸미 볶음, 한산소주를 증류하는 과정.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 | ◆ 마량포로 달리며 서해안 갯벌 감상
동백나무숲을 충분히 감상했으면 마량포나 홍원항으로 간다. 넓은 서해 갯벌을 감상하고 싶다면 마량포항이 더 좋다. 물이 빠진 갯벌에서는 어촌 아낙이 바지락을 캐고 있었다. 같은 마을에 산다는 아주머니는 “예전엔 갯벌에 낙지며 바지락이 흔했는데, 요즘은 하루 종일 캐도 별로 나오는 게 없다”며 한숨이다. 마량포로 이어지는 도로가 동백꽃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 드디어 주꾸미 맛볼 시간!
마량포와 홍원항에서는 매년 봄 ‘주꾸미 축제’를 연다. 올해 축제는 지난 8일 이미 막을 내렸다. 하지만 한산한 요즘이 오히려 주꾸미를 맛보기엔 적기다. 예년 이맘때면 날이 따뜻해져 주꾸미가 산란에 들어갔지만, 올해는 추위가 늦게까지 이어지면서 아직 산란하지 않아 알이 몸통에 꽉 찬 주꾸미가 잡힌다.
마량포 서해안횟집(041-952-3177), 홍원항 ‘3311회쎈타’(041-952-3311) 등 포구를 따라 늘어선 횟집에서 다양한 주꾸미 요리를 맛볼 수 있다. 회, 샤브샤브, 전골, 볶음 등 요리와 관계없이 ㎏당 2만5000원에서 3만원선. 1㎏이면 주꾸미가 10마리쯤 된다. 먹성 좋은 4인 가족이 먹기에 약간 부족하단 느낌이 든다. 샤브샤브를 먹었다면 이때 라면 사리를 넣어 너무 퍼지지 않게 끓인다. 담백한 주꾸미 국물과 기름진 라면 면발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 ‘앉은뱅이술’ 한산소곡주
좋은 음식엔 좋은 술을 곁들이면 더욱 맛이 난다. 같은 땅에서 난 술이면 더 좋다. 이곳 서천에는 명주 ‘한산소곡주’가 있다. 목욕재계한 여인네들이 소복으로 갈아입고 100일간 정성껏 빚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소곡주는 ‘앉은뱅이술’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과거 보러 서울 가던 선비들이 술맛에 반해 주저앉았단 말도, 술 빚던 며느리가 맛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취해 일어서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었다는 말도 있다. 어쨌거나 술맛이 기막히다는 뜻이다.
차갑게 식힌 소곡주를 투명한 잔에 담아 먼저 눈으로 음미했다. 연한 노란빛이다. 우아한 국화향이 코를 간질이고, 옅은 단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담백한 주꾸미 샤브샤브나 회 요리와도 좋고, 매콤달콤한 전골이나 볶음에도 어울렸다.
서천군 한산읍 김영신씨가 며느리 우희열씨에게 비법을 전수했고, 지금은 우희열씨의 아들 나장연씨가 집안 법도대로 소곡주를 빚고 있다. 한산모시관 내 직판장에서 작은 병(360㎖) 6000원, 중간 병(700㎖) 1만2000원, 큰 병(1.8ℓ) 2만4000원. 식당에서는 작은 병 1만5000원, 중간 병은 2만5000원쯤 받는다. 도수가 18도로 꽤 높다. 소곡주를 한 번 더 증류한 ‘불소곡주’는 무려 43도나 되니 조심할 것! (041)951-0290 www.sogokju.co.kr
◆ 주꾸미 사오려면
주꾸미를 먹고만 오기 섭섭하다? 마량포와 홍원항에 있는 수협위판장(041-952-3162)에 들러 보시라. 도매 위주지만 소매도 한다. 지난 25일 시세가 ㎏당 1만2200원으로, 축제 기간보다 많이 떨어졌다.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한 자연산 광어가 ㎏당 2만6000원, 꽃게는 3만7000원이다. 홍원항 수협 앞에서는 아주머니들이 건어물과 조개류, 젓갈류를 판다. 꾸득꾸득하게 말린 도다리는 7마리, 간재미 4마리, ‘밥도둑’ 조기 8마리, 짭짤한 바지락젓 1㎏이 각각 1만원이다.
◆ 일출-일몰
여유가 있으면 하루 쉬면서 일몰을 보고 간다. 마량포와 홍원항 모두 좋다. 마량포는 서해에서 드물게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서해로 튀어나왔다가 아래쪽으로 꺾인 이곳 지형 덕분이다. 한데 바다에서 뜨는 해를 볼 수 있는 건 동지부터 두 달 동안으로, 아쉽게도 지금은 바다 너머 산 뒤에서 뜨는 일출에 만족해야 한다.
◆ 귀가하다 들를 만한 곳
서천군 한산읍은 예부터 모시로 유명한 지역. 한산모시는 입으면 입을수록 질겨지고 빨면 빨수록 윤이 나고 질겨진다고 한다. ‘한산모시관’에 전시된 중국산 모시와 비교해 보면 한산모시는 올이 훨씬 곱고 무게도 절반밖에 나가지 않는다. 한산모시관에 오면 한산 여인들이 모시를 짓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무형문화재 방연옥(62) 할머니는 모시를 다듬느라 거칠어진 손을 수줍게 감추면서 “한산에서 나는 모시풀 품질이 우수하기도 하지만, 모시풀 속대를 이로 뜯어서 가늘게 뽑는 곳은 한산밖에 없다”고 했다.
모시는 저 때문에 손이 거칠어지고 이가 닳아 버린 한산 여인들이 안쓰러웠는지 선물을 하나 했다. “모시를 짜는 여인들은 골다공증에 걸리지 않는다고 해요. 모시에는 철분과 칼슘이 많은데, 모시를 이로 뜯다 보면 자연 철분과 칼슘을 섭취한다네요. 한산에선 떡에 쑥 대신 모시를 넣는데, 더 차지고 맛있어요.”
다음달 1일부터 6일까지 한산모시관에서 ‘모시문화제’가 열린다. 모시와 관련된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고 하니 아이들과 함께 들러 보는 것도 좋겠다. (041)951-4100 mosi.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