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맛이 달다. 전원의 짙은 흙내음이 황폐해져가는 멍든 자아를 깨운다. '흙'은 우리의 모태요, 멸하지 않을 영원한 안식처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빼곡한 일상을 뒤로 하고 전원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잠시나마 흙의 소중함을 배우려는 모습에는 자신과 타인을 넘어서 세상을 향한 겸손의 마음이 짙게 배어 있다. 물질이 풍요해질수록 마음은 건조해져 오래 묵은 것이 더 그리운 날 청주시 흥덕구 성화동 성동교회(담임목사 장광섭)를 찾았다.
갈가리 파헤쳐 속살 훤히 드러낸 택지개발 성화2지구내 열병식을 하듯 줄지어 선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성동교회의 100년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높은 종탑을따라 호젓한 오솔길을 걸었다.
대형크레인들의 굉음으로 샤갈의 꿈속같던 풍경과 자유스러움 소박한 정서는 서슬퍼런 기계톱날 앞에 쪽 못쓰고 쓰러져 둥근 울음을 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
지난 1908년 3월 1일 설립돼 98년동안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역사를 전해온 성동교회가 요즘 대한주택공사의 택지개발로 인해 헐릴 위기에 처해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값 주고 사시고, 성도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성동교회는 1908년 3월 1일 김기철 씨가 쌍수교회(현 남일교회)의 영수로 활동하던 장성권씨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고 청원군 사주면 농촌리 오리골에 6칸짜리 초가를 빌려 예배처소로 사용하면서 교회로써의 틀을 갖추고 오리교회로 이름을 달았다.
초창기 성동교회 기반조성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은 김교인(金敎人)과 유창준 이다.
김교인은 그의 아버지와 함께 청주·청원 지역을 돌아다니며 전도를 하던 민노아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가 예수를 믿게 된 데에는 한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의 부친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집안을 몇차례 탕진하게 되었는데 예수를 믿으면 술을 끊을 수 있다는 민노아 선교사가의 전도를 받고 그는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과 김교인을 비롯한 가족들의 상투를 자르는 등 술독을 깨고, 담뱃대도 아궁이에 던졌다는 이야기가 당시 예수를 믿지않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복음전파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후 김교인은 전도인이 되어 부강 오대골에 개척교회를 세워 그곳에서 양약방을 경영하며 오대골 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또한 유창준은 일제의 탄압으로 신앙을 지키기 어려웠던 때에, 오직 믿음 하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신앙제일주의를 가진 사람이였다. 그는 성동교회 최초로 당회를 구성해 교회의 틀을 갖추어 갔다. 후에 그는 성동교회 초대 장로로 교회 발전과 농촌지역 복음 전파에 헌신했다.
1934년까지 박영재 조사가 시무(6년)하면서 인근지역 석판리에 석판교회를 분립했고, 1936년에는 오리골에서 인근마을 농촌부락으로 예배당을 옮겨 신축했다.
1943년 김만학 전도사가 부임하면서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않고 굳건히 교회를 지키며, 일제의 강압으로 분립한 석판교회와 1944년 다시 합병을 하게 되었다. 광복 후 신앙의 자유를 찾은 교회는 열성적인 복음 전파로 빠르게 부흥했으며 1948년 석판교회가 재분립됐다.
그 후 한국전쟁 때 교인들은 피난을 떠났다가 70여일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폐허가 된 가옥과 논밭을 거두고, 하나님 성전을 증축 하는 등 복음화에 온 힘을 기울여 1948년 가마교회를 세웠다.
1955년 장전부락에 새 성전을 짓고, 1969년 농촌교회를 성동교회(聖洞敎會)로 계명했다. 교회 이름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하는 교인들의 간구한 의지가 깃들어 있다. 1997년 창립 90주년 기념으로 용암동에 성은교회를 세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몸소 보여주기도 했다.
성동교회는 100여년동안 10여명의 교역자를 배출했고, 중·고등부를 조직해 청소년들의 신앙 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어린이들을 위한 공부방도 운영하고있으며, 여선교회원 40여명은 충북대병원에서 자원봉사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교회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구원에 있듯 성동교회 교인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바른길 즉 이 땅에서 승리 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은총의 하나님 세상을 변화시키소서
상물린 가장의 편안한 낮잠처럼 고요하던 성화동 전원마을이 스치면 베일 것 같은 날세운 기계들의 굉음 소리로 분주하다. 그 가운데 100년 역사를 간직한 성동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주택공사가 택지개발을 시행하면서 종교부지공급과 교회건물보상의 문제로 주택공사와 마찰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 토지 및 건물 보상가는 교회용지 2,359평, 평당 90여만원으로 시가에 비하면 헐값이고, 주택공사에서 제시하는(대체용지 960여평 시가 불확실) 시가 80~90%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가격이 급등할 경우 금전적으로 상당한 손해를 보게 될 뿐만 아니라 대체용지 가격이 급등할 경우 그 주변땅을 구입해 성전 건축을 하기엔 역부족인 샘이다.
결국 교회 땅은 헐값으로 보상을 받고, 대체용지를 받으려면 몇배의 돈을 지불해야 되기 때문이다.
성동교회 2,500여평 땅은 100여년동안 교인들이 몸속의 한 장기인양 지켜온 땅이다. 평생 일궈온 토지를 교회에 헌납한 교인도 있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하나님전에 드린이도 있다. 그동안 성동 교회를 거쳐간 수백 수천 명의 숨결을 간직한 성전이 얼마간의 보상으로 끝나 버린다면 하나님 성전의 의미와 가치는 고사하고, 지역개발과 교회와의 함수관계에서 교인들이 받을 마음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전도의 어장이 늘어나 득(得)이 있는 만큼 실(失)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성동교회의 2006년 기도제목이자 목회 비전은 교회가 이곳에 그대로 존치되어 이 주변에 있는 맑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구원의 방주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로 거듭나길 바란다. 이에 장 목사는 교회가 존치 돼야 할 이유와 보상금액의 현실화 등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대한주택공사 충북지역본부에 제출했으나 묵살 당했다. 이에 장광섭 목사는 장 목사는 적절한 보상과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속만 태우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위기를 맞고 있는 성동교회는 요즘 죽어가고 있는 강도만난 자를 외면한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닌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이 순간도 빨간 벽돌의 고딕 건축물 예배당에는 세월의 역사가 쉼없이 흐르고 있다.
예배당을 돌아 나오는 길 밑둥잘린 나무의 나이테에는 나무가 걸어온 길이 고스란히 보인다. 제 몸에 나이테를 그려 넣고 손도장을 꾹꾹 찍어 두었다. 어떤 다짐을 속 깊이 새겨 두엇을까? 겹겹이 쟁여둔 예배당 벽돌 사이사이에도 교회의 나이가 깃들어 있다. 생전의 꿈을 탁본해 둔 벽과 벽 사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으로 빛을 향해 달려온 나무에서 송진향 물처럼 흐른다. 죽은 나무의 몸이 이처럼 향기로울 수 있을까?
인간의 희망과 꿈이 숨쉬는 나라, 다양한 문화를 가진 나라, 세계 4대 문명중 하나인 인더스 문명이 발생한 나라, 불교가 처음 생겨난 나라, 마하트마 간디가 비폭력 무저항운동으로 영국의 지배에 맞섰던 나라, 사람들은 이곳을 인도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역사성이 없었다면 지금에 인도는 존재할 것인가.
우리나라는 왜 유규한 역사를 지닌 문화유산이 없는 것인지. 인도, 그들이 역사성을 무시하고 문화 유산을 개발의 논리에 앞세워 허물어 버렸다면 그들은 지금 존재 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역사의식을 회복하고, 정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현재만 보지말고, 미래를 보는 혜안을 가져야 할 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