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사상
고재경/비전여수, 인재육성 대표
충무공은 54년 동안의 일생을 통하여, 우리 역사상에 가장 크고 높은 거룩한 영웅으로서의 자취를 끼쳤거니와, 과연 공으로 하여금, 공 되게 한, 가장 근본적이요 기초적인 정신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래 원고는 이은상 지음 '성웅 이순신'에서 요약 발췌한 것입니다.
1. 제 힘으로 사는 정신
제 힘으로 사는 정신은 흔히 일컫는 자립정신이요 자주정신이다. 제 스스로 제 힘으로 사는 것이다. 남의 힘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남을 기대지 않는 것이다. 충무공은 그 일생을 통하여, 이 정신을 최고도로 발휘한 분이다. 그러기 때문에 공의 출세가 얼마나 더디었는지 모른다.
과거에 오른 것도 32세로써 보통의 경우보다 무척 늦게 되었다. 그렇게 급제를 하고도 북쪽 변방으로 나가, 권관이니 만호니 하는 대단찮은 자리로만 돌아다니다가, 정읍 현감이라는 손바닥만한 고을살이를 얻은 것도 45세 때의 일이요, 전라좌수사가 된 것은 47세 때의 일이라, 실로 15년 세월이 걸린 것이다. 유성룡이 그의 징비록에 “조정에서는 공을 밀어주고 당겨주는 이가 없어, 급제한지 10여년이 지나도록 출세하지 못했다.”고 했다.
공은 자기의 발전을 위해서 권세가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같은 기회가 왔어도 그것을 물리쳤다. 율곡과 충무공은 같은 덕수 이씨다. 충무공이 아저씨 항렬이요, 율곡은 조카뻘이 된다. 율곡은 일찍부터 출세해서 대신의 자리에 까지 간 사람이요, 충무공은 미관말직에서 허덕이는 사람이었다. 율곡이 충무공을 만나보자고 청했다. 그것도 유성룡을 통해서 였고, 또 유성룡도 서로 만나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충무공은 그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율곡과 내가 같은 성바지라, 서로 만나는 것도 좋겠지마는, 그가 벼슬을 주는 대신의 자리에 있는 동안에는, 만나보지 않겠다.”
율곡과 유성룡은 그의 인격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가의 힘을 빌어 벼슬길에 나왔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기의 서녀로써 공의 소실을 삼겠다고 했을 때,“내가 벼슬길에 처음 나온 자로서, 권세 있는 집안에 발을 붙일 수는 없다.”하고 거절하였고 또 유전이란 재상이 공의 화살통을 청했을 때도, “그 따위 화살통 하나 쯤 드리기는 쉬우나, 그 때문에 이름을 더럽힐 수가 없소.” 하고 거절하였다.
공은 이같이 남의 힘에 의존하려는 생각은 꿈에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그것처럼 자기를 모독하는 것이 없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면 제힘이란 무엇이고, 그 힘은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제힘이란 실력을 이름이다. 참된 힘이다. 거짓 힘은 실력이 아니다. 남의 힘은 거짓 힘이다. 그러면, 그 실력, 그 참된 제 힘을 어떻게 하면 갖출 수 있는 것인가. 충무공은 과연 자기의 실력을 어디서 가지고 왔던 것인가. 자기 스스로 만들고, 자기 스스로 훈련을 거듭하여, 모으고 쌓은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훈련에 의한 축적이었다. 그 힘 가지고 일생을 살았고, 그 힘 가지고 왜적에게 항쟁했으며, 그 힘 가지고 민족과 역사를 구원해 낸 것이다.
공은 명궁이었다. 그러나 부하 장수들과 더불어 거리로 활쏘기를 몇 천 번이나 하였다.
생활 전체를 통해서 항상 긴장을 풀지 않았다. 진중에서 염병에 걸려 심히 앓을 때에, 자제와 군관들이 눕기를 권할 적에 “장수된 자가 죽지 않았으니 눕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끝내 앉아서 앓기를 12일 동안이나 했다.
공의 행장에 “7년 동안 띠를 풀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띠는 전대를 말함이다. 무겁디 무거운 그 띠를 맨 채 먹고, 자고, 준비하고, 대기하는 생활을 7년 동안이나 했다.
공은 이같이 자기 실력을 쌓았기 때문에 비로소 신념이 생긴 것이다. 어떠한 난관에 부딪혀서든지, 공은 오직 무서운 신념으로 헤쳐 나갔고 능히 이겼던 것이다.
공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원균의 잘못으로 우리 수군이 패전해 버리고, 다시 옥에서 나와 통제사의 재임명을 받았건마는 남은 전선이라고는 겨우 12척이 고작이었다. 조정에서는 그것을 민망히 여겨 “해전을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 싸우라”고 명령했으나, 공은 이렇게 말했다. “신에게 싸울 수 있는 배가 상기도 12척이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면 능히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300여 척을 상대로 한 12척의 항쟁! 동서고금 어디서 그 같은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공은 실로 그 신념 하나 가지고 불가사의의 승첩을 거둔 것이다. 인간은 작은 일에고, 큰 일에고 오직 이 신념을 가지고서만, 자기 일생을 개척해 갈 수 있고, 또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신념이란 제 힘을 가진 자 만의 영광스런 재산이다.
충무공은 과연 제 힘으로 사는 정신을 가진 모범이었다. 실력과 신념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 민족의 스승이었다.
2. 정의를 목표로 삼는 정신
사람은 마땅히 자기 일생을 이끌고 가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 목표가 없이 사는 사람은 바람같이 왔다가 번개같이 가버리는 자취 없는 사람일 따름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해를 가지고 다툰다. 이로우냐 해로우냐는 것으로서 생활의 목표를 삼는 것이다. 또 흔히 승부를 가지고 겨룬다. 이기느냐 지느냐를 가지고 생활의 목표를 삼는 것이다. 또 흔히 성패를 가지고 따진다.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것으로써 목표를 삼는 것이다.
그러나 충무공은 생활의 목표를 이해 만에 두지도 않았고, 승부 만에 두지도 않았고, 또 성패 만에 두지도 않았다. 오직 하나 정∙부정, 의∙불의 만에 두어, 바르고 옳은 일이면 취하고 굽고 그른 일이면 싸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해롭고, 지고, 실패되는 한이 있을지라도, 바르고 옳은 일이면 그것으로써 자기 갈길을 삼았었고, 그 반면 설혹 이롭고, 이기고, 성공할 수 있는 경우라 한대도, 굽고 그른 일이면 생명을 걸고 싸웠던 것이다.
공의 목표는 다만 정의와 나라였다. 공은 일찍부터 생사를 초월한, 대장부의 늠름한 자세를 가졌었다. 생사를 초월한 그 힘은 어디서 생겨지는 것인가. 그것은 정의와 나라라는 움직일 수 없는 절대적인 목표가 서졌기 때문에, 저절로 생사를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그 목표가 이미 생사보다 크기 때문이다. 큰 것을 세운 이상 작은 것을 돌아볼 것이 없는 것이다.
함경도에서 오랑캐들을 무찌른 큰 공로를 세우고도 병사 이일의 시기로 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친구들은 공이 혹시 형틀에서 죽을지 몰라 걱정하는데 공은 정작 태연했으며,
발포 만호로 있을 때 상관인 수사 전라좌수사 성박이 사람을 보내어 객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찍어다가 거문고를 만들겠다고 했으나, “이것은 나라의 물건이다. 수사인들 어찌 사사로이 쓰기 위해서 찍어 갈 수가 있을 것이냐. 더구나 이같이 오래된 나무를 하루아침에 찍어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하고 좌수사의 심부름꾼을 돌려보냈다.
공이 한산도 진중에 있어, 한창 적군 토벌을 계획하고 있던 무렵 고향으로부터 온 소식에 부인의 병환이 위독하다고 했건마는, “나랏일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는 생각이 미칠 수 없다.”하여, 국사와 사사의 경중을 확실히 했다.
감옥으로 잡혀 갔을 때에도 생사를 초월한 자세로 태연할 따름이었고, 또 이른바 백의종군으로 풀려나왔을 때에도 비록 어제의 통제사가 오늘의 평복 군인이 되었을망정 , 공은 거기에 불펑도 불만도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 깨어진 빈 바다로 달려 나가, 전심전력 어떻게 하면 나라를 다시 살릴 수 있을까 하는 것 만에, 지혜화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일찍이 어떤 이가 공의 높이 기용되지 못함을 위로해 말하되 “그대만한 지식과 지혜와 포부와 방략을 가지고서 이같이 펴이지 못함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했을 때, 공은 서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이면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해 볼 것이요, 만일 안 쓰인다면 들에 내려가 밭갈이 하는 것도 족하다.” 이 얼마나 정돈된 인격자의 말이냐.
가치는 어디까지나 안에서 찾는 것이다. 가치는 지위에 있는 것도 아니요, 형식에 있는 것도 아니요, 또 양적으로 규정짓지도 못한다. 가치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요. 내용에 있는 것이요, 또 질적으로 규정짓는 것이다. 높은 지위에 앉아 나라를 좀먹는 존재보다는 한 낱 미미한 농부로서 고구마 한 덩이라도 생산해 내는 그를 우러러 보아야 한다. 그것이 충무공 정신이다.
목표를 세운 사람은 앞을 바라보며 간다. 옆을 보는 것은 한 눈 파는 것이다. 목표를 세운 사람은 그 목표에 지성을 다한다. 그러기에 마지막 전쟁에 나가며, 순국 직전 바로 몇 시간 전에 동짓달 바람찬 갑판 위로 올라가, 손 씻고, 무릎 꿇고, 하늘에 빌었으되 “이 원수 무찌른다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했다. 공은 생명까지도 던져버렸다. 오직 나라에 바치는 지성 때문이었다.
3. 국토를 사랑하는 정신
충무공은 자나 깨나 나라였다. 자기 개인은 없었다. 나라 밖에 없었다.
나라란 무엇인가? 상식적으로 볼 때, 국토와 국민과 정권을 말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직감적으로 부딪혀지는 것이 국토다. 국토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
명나라 지휘관인 도사 담종인이 강화를 핑계로 소서행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충무공에게 일본을 치지 말라는 공문을 보내 왔다. “일본군이 싸움을 그치겠다고 하니, 일본 진영에 가까이 오지 말 것과 또 모두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다시피 했다. 그 때 공은 염병으로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너무나 분하여 친히 글을 지어 대답했으되, “영남 연해안이 내 땅 아닌 곳이 없는데, 우리더러 일본 진영 가까이 오지 말란 말이 무엇이며, 또 우리가 우리 땅에 있는데, 각각 본 고장으로 돌아가라 하니, 도대체 본고장이란 어느 쪽을 가리킴인가?”
충무공에게는 전라도도 없었고 경상도도 없었다. 아산도 없었고 한산도도 없었다. 모두가 내나라 땅이란 그것 밖에는 없었다. 그러므로 ‘영남해안이 내 땅 아닌 곳이 없다’고 했던 것이다.
한산도 곳간 속에 따로 벼 500 섬을 간직해 둔 것이 있었다. 군량 이외에 따로 마련해 두는 것을 보고,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지금 임금이 의주에까지 피난을 가 계신다. 들으니 조정의 대신들은 일이 불행하게 되면, 강을 건너자고 한다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이 곡식을 배에다 싣고 서해로 거슬러 올라가 임금을 마중해 태우고, 죽음을 다해 적과 싸울 것이요, 설사 불행하게 될지라도 임금과 신하가 같이 안고 내 국토 안에서 죽는 것이 옳다.”하고 말했다. 이 얼마나 철두철미한 국토의식이냐? 애국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내 국토를 사랑하는 그것부터 애국의 시작인 것이다. (우리나라 고관대작 자녀들의 병역기피, 외국의 솔선수범에 대한 이야기. 중동전쟁, 한국전쟁, 노블리스 오블리쥬)
공은 과연 나라사랑이란 국토를 사랑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또 그 애국은 구국에까지 발전해가야 하는 것을 가르쳐 준 민족의 스승이었다.
4. 국민과 같이 가는 정신
나라를 사랑하는 첫째 조건이 국토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국민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동포애다. 여기 그 동포사랑을 철두철미 실천한 영웅이 있다. 그가 바로 충무공이다. 공은 전쟁의 목적이 적군을 쳐부수는데 있지 않고, 그 보다는 오히려 백성을 보호하는 거기에 있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또 그대로 실천했던 것이다.
공의 함대가 적선을 깨뜨리고 적군을 무찌르는 동안에 육지에 내려 마을로 도망간 적군이 있다. 얼른 생각하면 거기에 남은 빈 배들을 모조리 불질러 태워버리거나 노획해 가지고 와서 전과를 올리기에 힘쓰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공은 남은 배 몇 척을 두라고 하면서, “적군이 타고 나올 배가 없으면, 마을로 올라가 우리 백성들에게 큰 해를 입힐 것이다. 짐짓 배를 남겨 두어서, 놈들이 타고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임진년에 정부는 의주로 피난가고, 고을마다 사또라는 책임자들은 모두 다 처자를 이끌고 도망갔는데, 수많은 피난민들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본 충무공은, 그들을 전선에 나누어 싣고 곡식 종자까지 주어서 돌산도로 들여보내어 살도록 했다.
그랬기 때문에 공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따라다녔다. 한산도에 진치고 있을 때, 그 섬이 큰 고을처럼 융성했으며, 마지막 해에 목포 앞 고금도에다 진 쳤을 적에는 지나간 한산도 시절보다 오히려 10배나 되었다고 했으니, 그 외롭고 먼 섬에 그토록 수많은 피난민들이 왜 따라다녔겠는가? 다만, 공의 동포사랑 그것 하나보고, 그것 하나 믿고 모여 들었던 것이다.
명나라 진도독의 수군들이 우리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을 적에도, 외교적 수단을 써서 백성들의 막을 헐고 자기 짐도 꾸리는 것처럼 하며 “나는 이 나라 대장이기 때문에, 우리 백성들이 이 곳을 떠난다고 하면, 나 혼자 남아 있어 무엇하겠소. 나는 우리 백성들과 함께 가야 하오.” 했었다. 그리하여 명나라 군사를 다스리는 권한까지 넘겨 맡아,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기에 만전을 기했던 것이다.
공이 순국하기 직전, 진도독은 소서행장에게서 뇌물을 먹고, 그의 빠져나갈 길을 틔워 줄겸, 자기는 남해에 있는 적을 치러 가겠다고 했다. 남해에 있는 적이란 실은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 있는 우리 동포들이었다. 우리 동포들의 머리를 베어 적의 머리처럼 보고하여 공을 세우려는 목적이었다. 충무공이 극구 반대하자 진린은 황제가 준 칼을 어루만지며 위협하였다. 이에 공은, “ 한 번 죽는 건 아깝지 아니하오. 나는 이 나라 대장이오. 적을 버리고 내 동포를 죽이게 할 수는 없소.” 하며, 태산 같은 자세를 보였을 때, 진린은 마침내 사과하고 말았다.
공의 행적 속에는 통제사의 재임명을 받고, 말을 달려 전라도 곡성 옥과 지대를 지나오다가, 길에서 피난민을 만났을 때에 취했던, 공의 태도에 감격함을 느끼지 않을 수 가 없다. 거기에 세 마디가 적혀 있다. “말에서 내려, 손목을 잡고, 타일렀다.” 비상시국 그 와중에서 대장이 말에서 내린 것은 겸손과 백성 사랑의 극치요, 동포사랑 그것이 밖으로 표출 된 것이 손목잡음이요, 위로하고 부탁하며 타일렀다니 그 얼마나 숭고한 인격인가?
그러한 충무공이었기 때문에 공이 묶여서 감옥으로 갈 때에도 천릿길에 고을마다 마을마다 통곡하는 소리가 이어졌고, 또 마지막 순국한 뒤에 공의 영구가 고금도로부터 아산까지 올라갈 적에도, 역시 천릿길 고을마다 마을마다 통곡하는 소리가 이어졌던 것이다.
공은 부하사랑도 극진했다. 종일토록 싸우고 난 밤에 군인들은 잠재워 놓고 자기는 혼자 돌아앉아 등불을 돋우고, 손수 내일 쓸 화살을 다듬었다고 공의 행장에 적혀 있다. 참으로 위대한 지휘관이었다.
부상한 군인들에게 골고루 약물을 주어 치료케 하고, 죽은 장병들은 그 시체를 낱낱이 보전했다가 따로 군관을 정하여 각각 제 고장에 곱게 묻어 주는 등, 얼마나 세심한 주의로써 부하들에게 임했던지 모른다.
운주당이란 참모본부를 설치해 놓고 거기서 장병들과 함께 자고 토론할 적에 비록 부하 졸병이나 종놈들의 의견까지라도 좋은 것이 있으면 채택했으며, 또 상하 없이 같이 앉아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이니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방식이 아니고 무엇이냐.
더우기 공은 어느 곳에 가서든지 매양 그 곳에 있는 어떤 종의 집에 가서 유숙했음을 본다. 곳곳에 높은 벼슬아치 집에서도 머물 수 있었지마는, 공은 구태여 종의 집 같은 데를 찾아서 유숙하고 다녔던 것은, 공의 국민과 함께 하는 정신의 표시였던 것이다.
5. 새 길을 뚫고 가는 정신
충무공의 제 힘으로 사는 정신, 정의를 목표 삼는 정신, 국토를 사랑하는 정신, 국민과 같이 가는 정신, 이 모든 기본정신들이 종합적으로 결실을 맺는 정신이 있다. 그것이 바로 새 길을 뚫고 가는 정신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정신이다.
충무공은 그 시대 상황 속에서 일체의 부정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쟁과 파벌! 그것도 부정해야 했다. 모략과 음모, 그것도 부정해야 했다. 나약과 안일, 그것도 부정해야 했고, 시기, 질투, 증오, 불의, 가식, 허례, 이기, 물욕 그래서 산업이 피폐해지고 국방이 해이해져서 국토는 거칠어가고 민심조차 어지러웠던, 그 모든 상태를 부정해야만 했다. 그 부정 위에서, 그 일체의 부정을 밟고 일어섰던 것이다.
공의 앞에는 갈 길이 없었다. 가시덤불 길이었다. 너무도 적막한 사막이었다. 길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행진을 멈추고 말았다. 충무공은 그 모든 사람들의 자세와 운명을 부정했다. 길이 없었기 때문에 새 길을 뚫는 수밖에 없었다. 새 길을 뚫어 나라의 운명을 열어 놓았고, 국민의 갈 길을 터 주었었다. 그 길을 뚫기 위해서 무수한 고초를 당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주어진 환경 속에서만 적응해서 살려고들 한다. 그러나 환경에 순응해서 사는 것은 새 짐승도 능히 하는 일이다. 사람은 결코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는 것만으로서 족한 것이 아니다.
충무공 당시, 아무런 국방준비가 없었던 그 때, 공은 온갖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군사를 훈련했다. 무기를 정비했다. 거북선을 만들었다.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새 배를 구상해 내었던 것이다. 동서양 역사상에 가장 처음으로 나타난 철갑의 배였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4-5년 전에 일본이 조총을 우리나라에 가져다 바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받아 다만 무기 곳간에 집어넣어 두었을 뿐이었다. 뒷날 임진란이 일어나 왜적들의 조총 때문에 우리가 크게 패전하고서야, “그 때 그 조총을 어쨌느냐”고 서로 놀라며 묻는 한심한 우리들이었다.
공은 해전을 치르느라 분망한 가운데서도 조총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것을 분해하고 연구하여 마침내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충무공이 한산도에서 만들어 낸 조총은 그 성능이 왜적의 그것보다 몇 배나 더 강한 것이었다. 그것은 임란이 일어난 다음해 9월 14일에 완성되었던 것이요, 또 공은 그것을 하루 빨리 각 도에 전해서, 많이 만들어 내도록 하자고까지 건의했던 것이다. 그랬어도 조정에서는 거기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 얼마나 탄식할 일이었더냐.
그렇게 힘없고 계획 없던 정부만 믿고 싸우려 했더라면, 하루도 싸우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군인을 주었던가. 그 군인이 먹을 군량을 주었던가. 그 군인이 입을 군복을 주었던가. 아니 누가 그 군인이 쓸 무기를 주었던가. 아무도 공에게 군인과 군량과 군복과 무기를 준 일이 없었다. 오직 공 자신이 군인을 불러 모았고, 공 자신이 지혜와 노력으로, 군량과 군복과 무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산도에 둔전을 경작하여 수만 석의 군량을 모았고 소금 굽고 고기 잡아 그것을 팔아서 베를 바꾸어 군복을 지어 입혔으며, 나무를 찍어와 배를 만들고 쇠를 녹여 무기를 만드는 등 없는데서 있게 한 모든 방책과 실시가 오직 공의 창조정신에서 우러났던 것이다.
그리고 옥에서 나온 후 다시 통제사의 재임명을 받기는 했어도, 아무 것도 없이 다 깨어진 나머지, 먹을 것, 입을 것조차 없는 군인들에게 닥쳐오는 겨울이 막연했을 때, ‘해로통행첩’이란 제도를 구상하여 만여 섬의 군량을 마련하는 한 편 왜적의 간첩선을 봉쇄하는 데에도 큰 효과를 보았던 것이다.
충무공은 실로 없는 데서 있게 했다. 막힌 것을 열어 놓았다. 나라와 민족으로 하여금 죽음 속에서 삶을 찾을 수 있게 했다. 공은 그같이 새 길을 뚥고 가는 힘과 의욕을 유산으로 허락해 주신 민족의 스승이었다. <끝>